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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차이나타운’
한국 속의 작은 중국
인천시 중구 북성동과 선린동 일대에 형성된 차이나타운(China Town). 이미 방송이나 신문 등 언론매체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곳이지만 본인은 지난 3월7일(수) 처음으로 찾아가 보았습니다.
<차이나타운 입구에 세워진 페루>
일반적으로 차이나타운이란 중국 본토가 아닌 다른 나라에, 자연적․인위적으로 중국인들이 모여 살게 되면서 형성된 마을이지요. 이러한 차이나타운은 세계 곳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차이나타운은 싱가포르 등 화교의 주요 거주지뿐 아니라 미국ㆍ일본ㆍ캐나다 등의 주요 도시에 자연적 혹은 계획적으로 건설돼 화상의 삶의 터전이자 현지 투자 및 사업협력의 허브(Hub)로 각 나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인천 차이나타운은 다른 나라에 있는 차이나타운과는 형성 구조가 다르다고 합니다. 다른 나라의 경우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최초 노동자부터 근대 중국의 불안한 정국을 피해 이주한 중산층까지 포함하여 중국인 거리가 형성된 것에 비해, 이 곳은 짧은 기간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는 근대화 과정에서 가까운 거리의 이점을 살려 주로 상업을 위해 이곳에 안주를 한 사람들의 터전으로 형성된 것이라고 합니다.
인천 차이나타운은 1883년 인천 개항 이후 1884년 청국조계지가 설치되고, 1900년대에 중국 상권이 활성화되면서 자연발생적으로 조성된 국내 유일의 차이나타운입니다. 당시 중국 산동반도에서 배가 운항되면서 지금의 북성동과 선린동 일대를 중심으로 화교의 숫자가 증가하면서 이 일대가 청관거리로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화교들은 중국에서 가져온 식료, 잡화, 소금, 곡물들을 팔고 우리나라의 사금 등을 구입해 상권을 넓혀갔으며, 청관거리에는 중국 요리집과 무역상들이 자리 잡아 인천 최대의 상권으로 이름을 떨치면서 한 때는 1만여명이 북적이는 작은 중국으로 발전하기도 했답니다.
인천 차이나타운은 수도권 지하철 1호선 종착지인 인천역에서 내려 자유공원 쪽으로 횡단도로를 건너면 바로 만날 수 있습니다. 타운 뒤쪽에는 자유공원이 있으며, 앞쪽으로는 인천항과 월미도가 바라보이는 산자락에 형성된 곳입니다.
입구에는 차이나타운의 상징인 ‘패루(牌樓)’가 우뚝 솟아있는 것이 눈에 띕니다. 패루는 중국에서 큰 거리를 가로질러 세워진 시설물이나 공원 어귀에 세우던 문으로 중국인이 모여 사는 곳이면 어디나 있는, 동네의 대문 역할을 하는 상징물이지요.
패루를 지나면 경사진 길을 오르면 본격적으로 차이나타운에 접어들게 됩니다. 길을 따라 늘어선 주변 상가는 온통 붉은색 일색입니다. 수십 개의 중국 음식점과 상점, 관운장을 모시는 의선당은 물론 북성동 주민센터도 중국풍으로 꾸며져 있어 거리 곳곳이 마치 중국의 어느 마을을 옮겨놓은 듯합니다.
<중국풍으로 건축된 북성동 주민센터>
커다란 용장식물이 있는 북성동 주민센터를 지나면 T자형 갈림길이 나오는데 그 중앙에 한국식 자장면으로 유명한 ‘공화춘’ 식당이 눈에 들어옵니다. 1905년 지어진 2층짜리 목(目)자형 구조물로 전형적인 청나라 양식을 따랐다고 합니다. 화교 출신 우희광이 1911년 이곳에서 중국 음식점을 개업해 유명해졌다고 하는데, 중화민국 수립을 기념해 ‘공화국의 봄’이라는 뜻의 공화춘(共和春)이라고 지었다고 합니다.
<‘공화춘’ 식당>
거리를 거닐다 보면 구수한 춘장 냄새가 코끝을 자극합니다. 자장면이 처음 태어난 것은 인천 개항 후 산둥지방의 중국인들이 대거 몰려와 청요리집들이 생겨나면서부터라고 합니다. 청요리가 인기를 끌자 누군가가 부두 노동자들을 위한 싸고 손쉬운 음식을 생각하게 됐는데, 산둥지방에서 즐겨먹던 춘장으로 자장소스를 만들어 국수를 비벼먹게 만든 것이 자장면의 탄생이라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옵니다.
<중국식 건축 점포>
현재 인천 중구 일대의 화교 중 절반이 넘는 사람이 차이나타운을 중심으로 모여 산다고 합니다. 차이나타운 거리는 붉고 화려한 금장으로 치장한 옛 건물, 화상(華商)들의 활기, 치파오(중국 여성의 전통 복장)를 본떠 만든 유니폼을 입은 종업원, 심심찮게 들려오는 중국말…. 영락없는 중국의 어느 마을을 옮겨 놓은 듯 합니다.
공화춘 삼거리에서 오른쪽 길로 가다가 자유공원으로 가는 길에는 ‘삼국지 벽화거리’가 있습니다. 길 양쪽벽면에 삼국지의 중요 장면을 설명과 함께 타일로 제작하여 장식한 곳입니다. 삼국지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그림을 통해 모르는 사람에게 설명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총 80여컷의 장면이 있는데 차이나타운을 찾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차이나타운은 알고 보면 더욱 재미있는 곳입니다. 현재 인천시 중구청 옆에 있는 청·일 조계지 경계단(조계지 경계를 나타내는 계단)을 가운데 두고 양국의 조계지가 있었는데 그로 인해 지금도 양국의 흔적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일본 조계지역에는 옛 은행 등 일본식 건물이 이국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앞으로 이 지역은 역사박물관이 들어서는 등 역사문화의 거리로 조성될 것이라고 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우리나라의 화교사회는 개항 초기부터 해방까지 화려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전쟁 후 외면을 당하기 시작합니다. 화폐개혁으로 장롱 속 돈을 모두 신고해야 했고, 외국인 부동산 소유제한으로 그들이 반세기 이상 가꾸어온 주안, 용현동, 부평 일대의 토지들이 헐값에 판매되거나 남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면서 거의 반수 이상의 화교들이 떠났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곳 인천 차이나타운은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중국의 급부상과 하나의 지구촌 시대를 맞이하여 재도약의 기회를 맞고 있습니다. 6·25전쟁 이후 급속도로 위축된 차이나타운은 인천이 대중국 교류의 중심도시로 성장하고 또한 21세기 지구촌의 세계화 바람에 힘입어 이 지역의 역사성과 문화성이 재조명되면서 인천의 새로운 문화와 관광 명소로 각광받으면서 재도약의 기회를 맞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최근 정부의 지역특화발전특구정책에 따라 인천시와 중구청은 이 지역을 관광특구로 지정하고 정부 예산과 지자체 예산을 집중 투자하여 본격적인 개발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특히, 관광시설 확충, 상권 활성화를 위한 규제 완화, 중국 상가 조성, 자장면 박물관 조성, 야외 문화공간 조성, 테마거리 조성(중국풍 조형물 설치 등), 차이나타운 내 주요 거리 차량 통행 제한, 거리 예술제 실시와 중국어 마을 조성, 기반시설 공사 등 끊임없는 유무형의 관광 인프라 개발과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 한·중간 국제교류 증진 등 대내외적으로 큰 성과를 달성하면서 이곳 인천 차이나타운은 과거의 화려했든 영광을 점차 다시 찾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자유공원 산책로>
차이나타운을 한눈에 보려면 자유공원으로 오르는 길에 있는 팔각정이나 자유공원에 정상에 가면 됩니다. 이곳에서는 연안부두와 바다까지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매년 4월 중순 벚꽃이 만개하고 개나리가 피면 공원 주변은 더욱 화려해진다고 합니다. 차이나타운에서는 매년 10월 초에 ‘중국의 날 문화축제’를 개최하여 색다른 풍경과 행사를 마련하고 있다고 하는데 시간이 허락하면 그때 다시 한 번 들려볼까 합니다.
●차이나타운 주요 문화유적지
<인용> 인천 차이나타운 홈페이지
화교 중산학교
1884년 인천에 조계지를 설치한 청국의 영사관이 있던 현재의 자리에 1934년 건립된 2층 조적조 건축물. 지금도 지역 내 화교들을 교육하고 있는 인천 유일의 교육기관으로 목조트러스의 모임지붕과 중앙포치(Poach), 아치형 창호 및 지붕 층의 출창 형태가 특징이다. 현재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 과정을 가르치고 있으며, 중국 붐을 타고 한국 학생들도 많이 다니고 있다.
해안 천주교 교육관
원래는 가정집이었던 곳으로 현재 맞은편 해안 천주교 성당의 교육관으로 사용 중이다.
의선당
인천 개항 후 인천에 거주하는 중국인들이 불어남에 따라 교화 및 정신적 안녕을 기리는 중국식 사당을 지었다. 산동지방의 도교 식으로 1893년경 세워졌다고 추정된다.
내부에는 사후 안식을 기원하는 관음보살, 돈을 벌어준다는 관우상, 자식을 점지해준다는 삼신 할미상, 중국을 왕래할 때 뱃길의 안녕을 보살펴 주는 용왕상, 그리고 원행길이나 산길을 보호해 준다는 호산할아버지(산신령)의 다섯 분이 모셔져 있다.
한국전쟁 후 화교들의 수도 줄어들고 찾는 이들이 줄어들며 무술수련장으로도 쓰이다가, 2006년 5월 수리를 거친 후 지금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청국 영사관 터 및 회의청
조선시대 말 청국은 1883년 일본이 인천에 조계지를 설치한 후에야 1884년 청국지계를 설치하고 청국이사부, 혹은 이사서라 호칭하는 영사관을 설치했다. 그후 이곳은 청일전쟁으로 폐쇄 되었다가 1898년 다시 문을 열고 자국의 거류민을 보호하는 일을 하였는데 1930년대에 이르러 중국과의 관계가 악화되고 전쟁에 휩싸이며 영사관도 폐쇄됐다.
청관내의 자국 거류민의 결속과 생활기반의 안정 등을 위하여 설립된 건물인 청국영사관 회의청은 한국전쟁 당시 파괴된 청국영사관 터 뒷켠에 남아있는 1층 목조 건축물로 1910년에 건립되었다. 흑벽 위 회칠 마감된 전면 벽체와 조적마감된 측벽 및 개구부, 창호 형태는 당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현관에 걸려있는 두 개의 명판은 건축물의 역사를 알려준다.
청일 조계지와 공자상
1883년 일본이 현 중구청 일대를 중심으로 7천평을 조차지로 설정하자 다음해 청국도 일본조계지를 경계로 하여 현 차이나타운 일대를 조계지로 설정했다. 한중문화관 옆길에서 자유공원으로 100여m 오르다 보면 중간에 돌계단이 시작되는데 이곳이 청일 조계지 경계 계단이다. 길 양쪽으로 설치된 석등도 중국식과 일본식으로 구별되고 중국 청도시 정부에서 기증한 공자상이 계단 중앙을 기준으로 중국 측에 세워져 있다.
선린동 화교주택
한중 문화관에서자유공원으로 오르다 보면 경사진 곳이 돌계단이 나오는데 이곳이 청나라와 일본인이 살던 경계 지역이다.
한국전쟁 기간 중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기 위해서 인천에 2~3일간 집중 포격을 하는데 이때 많은 건물들이 소실되었다. 계단 오르는 방향으로 왼쪽에 용하게도 포화를 피한 중국식 2층 건물이 보이는데 1930년대에 지어진 것으로 보여진다.
오른쪽 일본인 거주 지역에는 남아 있는 건물이 없어 중구청에서 일본인 거리를 조성하며 일본풍으로 리모델링한 건물로 중국쪽과 비교하며 차이점을 느끼게 해준다.
중국식 점포 건축
중국인들이 1925년에 건립해 사용한 주상복합건축물로 현재 화교인이 중국요리집, 상가, 주거로 사용하고 있다. 연와조의 2층 벽돌조 건축물로 각각의 공간이 연속되어 있고 주국 특유의 원색을 사용해 화려한 색채를 강조했으며 박공형 지붕, 목조 청풍차양, 개발형 발코니가 특징이다.
인천 근대 박물관
개항 관련 자료 및 개화기 생활용품, 인천 성냥 및 각종 등잔, 그리고 차이나타운 생활관과 공화춘 자료 등을 위주로 하여, 구체적으로는 인천항 지도 및 각국 조계지도, 수입품 모자, 지약지솔, 안경, 면도기, 비누, 만년필, 세창양행 물감 상표, 깡통, 담배, 바늘, 파이프, 음반, 경인선 기차표 및 철도 자료 다수, 수술도구 및 의약품, 독립신문, 제국신물, 황성신문, 관보, 인천 풍물 스테레오뷰 사진, 자석식 전화기, 축음기, 올겐, 선풍기, 싱거미싱, 라디오, 카메라, 미발기구 일괄 및 각종 연장, 저울, 자, 말, 인천제조 술통, 조탕간판 및 각종 범랑 간판, 해양과 선박 관련 물품(19세기 말 인천 영국영사관에서 사용한 영국재 대형 장식장) 등을 비롯하여 그 밖에도 많은 전시품이 있어 개항기의 인천의 유물을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다.
스카이 힐
차이나타운 3패루(선린문)을 지나 자유공원으로 올라가는 길에 조성된 계단으로 양 옆에 자금성, 만리장성, 갑골문자, 경극, 우슈, 팬더 등 다양한 벽화가 그려져 있으며 멀리 인청항의 전경도 볼 수 있는 장소이다.
(구)일본영사관
1883년 인천이 개항하고 조계지가 설정되면서 인천에 거주하는 일본인이 늘어나게 되자 자국민의 보호를 위해 현 인천 중구청 자리에 일본 영사관을 설치한다. 현재의 건물은 1933년에 2층으로 지어져 사용하다가 1964년에 한층을 증축한 상태이며, 해방 이후 계속 인천시청으로 사용하다가 1985년 시청이 구월동으로 옮기면서 중구청으로 사용하고 있다.
(구) 일본 제일은행 인천지점
인천에서 은행업의 시초는 제일국립은행(일본계)이다. 1883년 인천에 해관 개설에 따라 관세의 취급 및 한국에서 산출되는 금괴와 사금의 매수를 목적으로 처음에는 제일은행 부산지점 인천 출장소를 설치하였다가 1898년 9월 인천지점으로 승격하였다. 현 건물은 1897년에 신축되었는데 중앙에 돔을 설치한 좌우 대칭형의 르네상스 양식을 띄고 있다. 인천시 지정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구) 일본 18은행 인천지점
18은행의 본점은 일본 나가사키로서 개항 이후 면직물 수입판매 등으로 부를 축적한 일본인들이 1890년에 세운 건물이다. 일본인들이 한국에 은행을 세운 것은 한국 내 금융업을 석권하고 식민지화 하기위한 목적이었다. 현재는 인천 개항장 근대 건축전시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찾아가는 길>
1) 전철 : 국철(지하철1호선) 인천행을 타고 인천역 하차 도보 1분 거리
2) 자가용 이용시
①경인고속도로와 서해안고속도로 종점(인천항)에서 월미도방향으로 약 15분 거리에 위치 - 경인고속도로 끝 지점에서 직진(인하대병원 → 정석빌딩 → 우회전 → 옹진군청 → 삼익아파트앞에서 유턴 → 인천경찰청 → 자유공원광장)
②서해안고속도로 끝 지점에서 고가 밑 우회전 (인하대병원→정석빌딩→우회전→옹진군청→삼익아파트앞에서 유턴 → 인천경찰청 → 자유공원광장)
3) 차이나타운 내 공영 주차장이 있으며, 타운 거리만 구경할 경우 1시간 정도 거닐면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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