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소
헌인릉 입구주차장이다
* 대상 참여자
연령대는 여러 연령대로
왕릉과 숲에 관심많은
그러나 왕릉체험경험은 없는
20여분이다
* 편안하고 간단한 소개와 나눔
저는
오늘 여러분과 같이
헌인릉과 숲을 나누고자
찾아 뵌 수니라면 박래현입니다.
간단히 제 소개드리면
닉네임은
숲이라면 좋겠어서 수니라면이구요
나이는 여러분과 비슷한 50대후반,
여러 일들을 했지만,
지금은 이와같이 여러분들 만나는
일만 하고 있습니다.
각자
간단한 소개나눔 해볼까요?
빠른 진행을 위해
개인별 소개시간은 15초이내입니다.
형식은
오늘 여기서 뭐뭐뭐를 알고 싶은
50대후반의 누구누구...
이렇게 입니다.
(개인별 소개 및 완료후)
* 해설 들어서기전 멘트
잠깐동안
간단한 소개였지만
소개전보다 훨씬 연대감이
생긴거 같습니다.
먼저 오늘 저의 이야기는
제가 먼저 공부한 내용으로
여러분께 공유하는 형식입니다.
저는 왕릉에 관심은 많지만
그리 심도있게 공부는 못 했습니다.
여러분의 질의에 대답을
못 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혹여라도 그런 일 있더라도
실망없으시길 당부드립니다.
자 이제
여러분과 조선왕릉의 세계로
같이 들어가시죠!
* 헌인릉 주변 환경
먼저,
왕릉이 위치한 산을 한번 볼까요.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대모산입니다.
(나즈막한데, 강남요지에 위치하여
강남분들 많이 오르는 산이죠!)
그래서 왕릉으로도 위치가 좋았나 봅니다.
(왕릉의 옆자리의 대모산자락에
주식회사 떡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 세곡동쪽으로는 MB시절의
반값아파트있구요.)
맞은편의 산은 인릉산입니다.
(인릉에서 보인다고 인릉산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자료를 찾을 수가 없네요)
* 어떤 왕과 왕후가 모셔졌나
두개의 능이 있는데
헌릉은 조선의 왕중에 유일하게
과거 급제한 이성계의 다섯번째 아들,
태종과 원경왕후의 쌍릉으로
약 600년전에 조성되었구요
인릉은
정조대왕의 아들이며
세도정치에 한껏 휘둘린
순조와 순원왕후의 합장릉으로
약 160여년전에 조성되었습니다.
어려운 단어 나왔는데요
쌍릉은 두 능이 쌍으로 있는 능,
합장릉은 두 분이 한 곳에 있는 능입니다.
바로 옆에 있으면서도
400여년이 넘는 차이가 있어
비교해서 둘러보시기 좋을 듯 합니다.
* 문화재로의 등재
대한민국 사적 제 194호로
등재되어 있는 곳이구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된 곳입니다.
그런데, 여기보다 더 오래된
신라, 백제왕릉은 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가 안 되었을까요?
(3,4분 정도의 답을 들어보고)
네,
말씀주신 생각들이 맞습니다.
간단히 정리하면
조선왕릉은 도굴 등으로
전혀 파헤쳐지지 않아
보존상태가 완벽하며
누구누구의 왕릉인지와
어찌어찌 만들었는지가
너무도 명확하게 기록된
왕릉이라 세계문화유산이 되었습니다
반면,
백제의 무녕왕릉을 제외한
백제, 신라의 왕릉들은
왕릉으로 추정되기는 하나 확실치 않고
대부분이 도굴로 소실이 많다.
그래서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어렵다.
여기서 또 한가지 질문합니다.
그렇다면 조선왕릉들은
어떻게 도굴을 피한걸까요?
(3,4분 정도의 답을 들어보고)
네,
말씀주신 생각들이 맞습니다.
간단히 정리하면
우선 대단히 견고하다.
그러나 견고하다고 도굴을
피하기는 어려우나
조선왕릉의 유물은
기록에 의하면 실물이 아닌
모조품이어서 도굴의 실익이 없다.
그래서 도굴이 거의 없다.
* 태종에 대한
아들 세종의 소심한 어깃장
헌릉의 쌍릉을 바라보며
잠시 쉬어가는 이야기 한토막을
조선조
최고의 카리스마를 지닌 왕 태종과
조선조
최고의 지성을 지닌 왕 세종의
부자간 이야기인데요
세종은 매우 엄격한
그의 아버지 태종에 대해
반대의견을 낸 경우는 드문 일인데
어머니 원경왕후 능에
대해서는 귀여운(?) 어깃장이 있다.
세번이 있었는데요.
처음은
원경왕후의 상을 치를 때입니다
태종은
굳이 3년상을 다 치를 필요 없고
12일만 상복을 입으라고 했지만
세종은
"3년복을 다 입지는 못해도
어머님 산소에 모실 때까지는
입겠다"고 소심히 반대했다고 합니다.
두번째는
왕후능옆 사찰건립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세종은 원경왕후의 무덤 옆에
작은 절을 지으려고 했는데,
태종이
"내가 불교를 싫어하는데
왜 내가 나중에 들어갈 무덤 옆에
절을 짓냐"고 버럭하자
세종은
"어머니 계시는 곳이 너무 적적해서
절에서 염불하는 소리라도
들으시면 좋지 않을까 해서
그럽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물론 절을 짓는 것은
없던 일로 끝났다.
세번째는
같은 장소에 장례지낸 일인데요.
태종과 원경왕후는
서로간의 자녀도 많지만
자녀들이나 다른사람들이 보기엔
서로간 다툼이 심한 현실애증부부
였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실제로 태종이 원경왕후의 옆에
같이 뭍히기를 원했기도 알려지고
있기는 한데
세종의 프리즘에 의하면
태종의 가혹한 외척 숙청으로 인해
말년 심신이 고생하다가
세상을 떠난 원경왕후의 릉에
태종은 같이 뭍히길 싫어 할 법한데
태종을 왕후 바로 옆에 안장한 이유는
두 부부가 저승에서라도 화해하여
잘 지내기를 바라는 세종의
강력한 의도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 헌인릉 오리나무숲
헌인릉 아래쪽으로
17,000여평에 오리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데,
이 숲은
2005년에 서울시에서
생태경관 보전지역으로
지정하였습니다.
헌인릉 주변 오리나무숲 일대는
지하수가 풍부하고 토심이 깊어
서울에서는 둔촌동 생태경관보전지역과
더불어 오리나무 군집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오리나무림, 노란물봉선 등이 있는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오색딱다구리가 관찰됩니다.
첫번째 이유는
남쪽 주작에 연관이 있다.
오리나무에는
타닌 성분이 많아 갈색,
붉은색 염료로 이용된다.
그래서 오리나무를 잘라 보면
처음에는 그 단면이 흰색이지만
점차 붉은색으로 변한다.
이처럼 오리나무가
붉은색을 내는지라
남쪽 지키는 주작이 된다.
북쪽을 지키는 건 현무이다.
소나무는
나무껍질이 거북 등처럼 갈라져 있는데
거북은 현무를 의미하여
주로 왕릉의 뒷편 둘레에는
도래솔이라는 소나무로 둘러싸여 있다.
두번째 이유는
오리나무가 습지에 강해서이다.
명당의 입지 조건은
주산과 조산에 둘러싸인
배산임수 背山臨水의 터로
보통 북쪽에 산이 자리 잡고
남쪽에는 물이 흐른다.
터가 경사지고 앞으로 트여 있어
양명하며 배수에도 유리해야 한다.
왕릉 능역 안을 흐르는 물은
명당수로 부르는데
명당수가 제대로 빠져나가지
못하면 습지를 이루게 된다.
그래서 이걸 방지하기 위해
습지에 강한 오리나무를 심게 된다.
이런 경우가
헌인릉을 비롯해 선정릉, 동구릉,
서오릉 등에서 볼 수 있다
* 태종의 수리사업과 태종우
태종은 말년에 심한 가뭄으로
고생하였는데
눈을 감으면서도 가뭄을 걱정하여
자신이 죽어 혼이 있다면
이날 비가 오게 하겠다고
유언을 남겼다.
그 이후 해마다 태종의 기일인
음력 5월 10일이 되면 비가 왔는데
이 비를 ‘태종우(太宗雨)’라고 하며
헌릉의 혼유석 밑 하전석의
네모난 구멍 속에 있는 물을
태종우가 고였다고 한다.
* 왕릉을 둘러싼 소나무숲 도래솔
* 결어
오늘 진행에서 불편한 점이
있으셨으면 조그만 점이라도
다음의 진행에 도움되도록
말씀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