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스도 안의 형제들(Brethren) - 브레드린 (사진 자료 첨부)
교회사가들에 의해 '형제교회' 혹은 '플리머스 형제들’로 불리는 그들은(다시 말씀드리지만 그들은 이런 호칭을 사용한 적도 없고, 또 사용하고자 하지도 않았습니다) 모든 구원받은 동료 그리스도인들과 더불어 교제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한 마디로 중앙 통제기관이 없는 것이 큰 특징입니다. 그들은 영국과 미국, 그리고 유럽 대륙과 아프리카 대륙, 그리고 아시아 여러 국가 등에 널리 퍼져 있으며, 각 지역마다 많은 수의 교회를 구성하고 있으며,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각 지역교회는 그 운영에 있어 독립적입니다. 그들은 어떤 총회나 노회 등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지역 간에는 가족처럼 친밀한 교제와 강한 결속력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형제운동의 기원
교회사적으로 볼 때 '형제운동'의 기원은 주후 1825년부터 시작됩니다. 물론 그들이 일반적으로 주장하는 그 교회 의 기원은 사도시대부터 시작됩니다. 실상 그들의 목적은 신약성경에 나타난 단순하면서도 생명력 있는 초대교회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려는데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19세기 초 무렵 여러 기독교 교단들에서 분리되는 일들은 오늘날 교회들이 직면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형제운동의 개척지는 일단의 청년들로서 대부분 영국 더 블린에 소재한 트리니티 대학에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제반 교파의 장벽을 뛰어넘어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예배와 교제를 위해 함께 모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이같은 모임이 장차 큰 운동의 시발점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결코 새로운 교단을 만들려고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같은 시도야말로 그들이 함께 모이는 순수한 목적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얼마 동안 그들 중 일부는 전에 소속된 구성원에 남아 있었고 그중 극소수만이 성직자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같은 성직 수여 관행은 오래 계속되지 못했습니다.
형제운동의 초기 인도자 중의 하나는 바로 존 넬슨 다비 (J. N. Darby, 주후 1800~1882)였습니다. 그는 아일랜드 교회 목회자였습니다. 그는 비상한 지적 능력과 성품의 소유자로서 각 교단 소속 교회가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는 시기에 교회의 하나됨을 증거하는 전세계적 협력을 꿈꾸었습니다. 이같은 형제운동은 더블린에서 시작하여 영국 전역으로 그 세력이 확장되었습니다.
영국의 첫 번째 모임은 1831년 플리머스에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그 지명을 따라 '플리머스 형제들'(Plymouth Brethren)이란 낯익은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플리머스에 세워진 모임의 인도자는 사무엘 트레겔레스(Samuel P. Tregelles, 1813~1875)와 그의 친척이 되는 벤자민 뉴톤 (Benjamin W. Newton, 1807~1899)이었습니다. 뉴톤은 19세기 당시 영국에서 출간된 헬라어 신약성경역본의 가장 주목받는 주 편집자였습니다.
또다른 모임 가운데 중요한 교회는 브리스톨에 위치한 베데스다 모임(Bethesda Chapel)으로서 스코틀랜드 태생 유대인 목회자인 헨리 크레잌 (Henry Craik, 1805~1866)과 독일계 죠지 뮐러(George Muller, 1805~1898)가 공동으로 사역한 곳입니다. 특히 죠지 뮐러는 1836년에 브리스톨에 고아원을 세워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만 고아원을 운영한 사람으로서 전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그가 시작한 고아원들이 그곳에 남아 있습니다. 또한 바네이도 박사(Dr. T. J. Barnado)도 모임의 형제로서 1870년에 영국에 죠지 뮐러처럼 고아원을 세워 운영한 인물로 존경을 받았습니다.
* 붙임 사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