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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행함으로
(야고보서 1장 22~27절) 찬송 542장, 545장
성도는 말씀을 배우고, 확신에 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겸손한 자만이 배우려 합니다.
교만한 자는 결코, 배우려 하지 않고, 오히려 가르치려고만 합니다.
모든 인간은 무지 속에서 태어나 모든 것을 배우며 성장합니다.
감사하는 것도 배우는 것이고, 사랑하는 법도 배워야 온전한 인간으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사람은 배우면서 성장합니다.
배우지 않는 이는 세상 살아가기가 힘이 들고, 오히려 퇴보한 삶을 살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살기 위해서 배우고, 깨닫기 위해서 배우며,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서 배워야 합니다.
아는 것이 힘이라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제자로 부르시고, 성도로 세워 주셨습니다.
제자는, 영원토록 스승의 가르침을 배우고, 따르는 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잘 배워야 하고, 올바르게 배워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잘못 배운 인생은, 가룟 유다처럼 잘못되고 망가진 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도적이 되고, 거짓으로 사는 인생은, 처음부터 잘못 배웠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를 아는 것이 지식과 지혜의 근본이라고 하였습니다.
배우지 않고 게으른 자는, 인생의 전장에서 늘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인내력을 배우고, 노력하는 법도 배워야 합니다.
배우지 않으면, 금수나 버러지처럼 살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말씀을 읽으며, 기도하는 것도, 하나님을 더 알고,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은,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하였습니다.
시편 기자는 시편 119편에,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고난도 배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고난을 통하여 순종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는 세상은, 배움의 터전이요, 배움의 교실입니다.
성도의 신앙생활이란, 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배우며,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에 대하여 배우며, 하나님으로 채워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의 한계를 배우고, 전능자를 배우며, 점점 하나님을 닮아가며, 그분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감이 인생에서 큰 힘이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늦기 전에, 문제에 부딪히기 전에, 배우면, 세상을 지혜롭게 살 수가 있습니다.
젊어서도 배우고, 늙어서도 배우며, 교회에 가서도 평생 배우는 자만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인생을 풍요롭고, 아름답게 살 수가 있습니다.
1517년 루터는 카톨릭교회의 공로주의와 보속신앙을 지적하며, 오직 믿음으로, 오직 성경으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외치면서 종교개혁을 외침으로 개신교회가 새롭게 시작된 것입니다.
오직 믿음 - Sola Fide,
오직 성경 - Sola Scriptura,
오직 은혜 - Sola Gratia를 슬로건으로 삼고, 그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비판하면서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습니다.
중세 가톨릭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는 뒷전으로 밀어내고, 인간의 행위에 의해 구원이 결정되는 공로주의와 보속신앙(고해성사)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가 기독교 신앙은 성서와 하나님의 말씀에 그 뿌리를 두어야 하는데, 성경말씀이 있어야 할 자리에 전통과 예전만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 이전의 카톨릭교회는 Vulgate성경(볼가타) 즉 라틴어로 된 성경을 사용했는데, 그 당시 사제들 중에 라틴어를 모르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그 당시의 가톨릭 공로주의 신앙은, 눈에 보이는 무엇인가를 요구하였습니다.
그래서 건물우상주의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성 베드로 성당을 짓다가 돈이 모자라자, 연옥교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터첼이라는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연보함에 너희 아버지의 이름으로 드린 헌금이 딸랑하고 들어가는 순간, 지옥에 있던 너희 아버지의 영혼이 연옥으로 올라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모든 교인들을 죄인이라고 규정지어 놓고, 이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면죄부를 사야 천국에 갈수 있다고 종교사기극을 벌였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가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혜를 주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종교개혁 5백7돌을 앞두고, 한국교회가 걸어가야 할 길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약에, 루터와 칼빈이 오늘의 한국교회에 온다면, 과연 무엇을 개혁하라고 외칠 것 같습니까?
2017년 2월에, “기독교윤리실천운동본부”에서는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에 대하여 설문조사를 했었습니다.
그 결과에 따르면, 천주교(29.2%), 불교(28.0%), 개신교(21.3%)의 순으로 개신교의 신뢰도가 꼴찌로 나타났었다고 합니다.
왜, 사람들이 한국교회를 신뢰하지 않느냐는 물음에는 기독인들이 언행일치가 되지 않아서가(24.8%). 교회 내부적 비리 및 부정부패가 많아서가(21.4%), 타 종교에 대해서 너무 비판적이고, 배타적이어서가(10.2%)로 나타났었다고 합니다.
결국 한국교회를 신뢰하지 않는 이유의 44.3%가 믿음에 동반되는 행함이 없다는 평가였습니다.
이렇게 우리 기독교인들이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는, 행함이 없는 믿음 때문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이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 앞에서, 우리가 무엇이라고 항변 할 말이 있을까요?
아마도 변명의 여지가 별로 없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사회의 판단 앞에, 일희일비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세상이 요구하는 기준에 무조건 맞추어야 된다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거룩함에 그 기준을 맞추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 한국교회의 모습은, 하나님 앞에서도 거룩하지 않고, 사람들 앞에서도 비난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유대공동체와 로마제국에서 신앙공동체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 사회의 걸림돌처럼 여겨졌었습니다.
로마 황제를 세계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사회적 환경에서, “우리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 한분 외에는 없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관직에 나가지도 못하고, 세상이 주는 여러 가지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심지어 목숨까지 내놓아야 했습니다.
예수라는 분 때문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사회에 걸림돌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회에서 비난을 받았고,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교회가 비판받고 있는 대목은, 그들이 비난받았던 이런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
예수라는 진리 때문에, 걸림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과는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걸림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진리를 말하는 교회가, 진리와 동떨어진 길을 걸어가고, 사랑을 입버릇처럼 말하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사랑을 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믿음과 행함이 분리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라는 걸림돌 때문에, 사회에서 비난 받았습니다.
중세교회는 믿음은, 온데간데없고, 인간의 행위만 강조했기 때문에, 교회가 타락했습니다.
그러면, 오늘 교회된 우리들은, 무엇 때문에 비난받고, 무엇 때문에 타락하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예수, 그분 때문에, 비난받아야 한다면, 기꺼이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들은, 예수님 때문에, 또는 진리 때문에, 비난받는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또 믿음이 없기 때문에 비난 받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에 동반되는 행위가 없기 때문에 비난 받고, 있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 때문에, 사회에서 조롱거리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이단이 더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루터는 1517년 종교개혁을 선포할 때, 로마서 1장 17절의 말씀을 보면,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이 말씀으로, 그 포문을 열었습니다.
행함으로 구원받고, 인간의 공로를 찬양하던 시절 루터가 선포한 말씀은, 너무도 지당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루터가 한국교회에 와서 말씀을 전한다면, 어떤 말씀을 전할까요?
행함이 없는 믿음 때문에, 세상에 조롱거리가 되고 있는 우리 한국교회를 향해서 과연 어떤 말씀을 들고, 강단에 설까요?
사실 저는 이 본문과 제목을 정하면서, 찹찹한 마음이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본문과 제목을 바꿀까, 여러번 생각했습니다.
루터가 외쳤던“오직 믿음”과 정반대 반향으로 말해야 하기 때문에, 무척 힘들었습니다.
루터는 “오직 믿음”을 말하면서, 로마서 말씀에, 근거를 두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오직 행함”이라는 로마서의 말씀을 주제로 삼으면서, 야고보서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루터는 행함을 강조하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종교개혁을 이야기를 준비하면서 야고보서를 근거로 말씀을 준비하였습니다.
조금은 황당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오직 믿음이 아니라, 오직 행함을 말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하고, 고민해도, 루터가 오늘 한국교회의 강단에 선다면, 아마도 야고보서 말씀을 전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거의 종교개혁의 선언문을 들고서, 그대로 읽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슬로건으로만 남아 있는“오직 믿음”으로를 외친다면,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 비난받고 있는, 한국교회가 더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저는 “오직 행함으로”를 외치는 것이 가장 종교개혁적이고, 루터의 믿음을 이어받은 성도일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Reformed Church is Reforming Church" 개혁교회는 개혁하는 교회라는 말입니다.
과거의 개혁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개혁하고 있는 교회가 개혁교회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믿음과 행함 앞에서,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 방법으로 대처해 왔습니다.
하나는, 행함을 강조하는 율법주의요,
다른 하나는, 믿음을 강조하는 복음주의입니다.
행함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주로 야고보서에 그 기반을 두었고, 믿음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바울서신 중에서도 로마서에 그 기반을 두었습니다.
과연 어느 쪽이 옳을까요?
우리가 속해있는 개신교회는 지금껏 율법주의는 틀렸고, 복음주의가 옳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의 주장이 틀렸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왜냐하면, 야고보서는 율법주의자를 옹호하거나, 인간의 행위만을 강조하는 말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 행하지 않으면, 정말로 잘못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반드시 행함이 동반되어야 참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오늘 본문 22절에서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야고보는 ‘행함’을 강조하였습니다.
바울 서신과 같이 완곡하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직선적으로 거침없이 적나라하게 표현하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오히려 말씀을 듣기만 하는 사람은, 자신을 속이는 자라고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거울로 자기 모습을 보는 것과 같아서 말씀을 곧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의 거울은, 청동이었습니다.
모습이 희미하였습니다.
희미한 모습은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말씀을 행하지 않고, 듣기만 하면, 결국 말씀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 25절을 보면,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야고보의 진술은 과연 타당한 논리일까요?
그런데, 마틴 루터가 주장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오직 믿음’뿐이라는 개념을 가진 성도라면, 야고보의 이 주장이 매우 불편하게 들릴 것입니다.
루터는 신자가 의로움을 얻는 길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을 강조하여 ‘오직 믿음’이라고 한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해 강력하게 저항했던 것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신학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의 행위가 상대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컨대, 어떤 집사님이 딸 혼수비용으로 얼마를 모아 놓았는데, 같은 교회의 성도가 돈이 없어서 큰 수술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합시다.
그 집사님이 혼수비용 얼마를 수술비용으로 내놓았습니다.
그렇다고 이러한 행동이 말씀대로 행하는 자라 할 수 있을까요?
물론, 그런 행위는 칭찬받을 만하지만, 절대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 행위를 기준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신 사건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행위입니다.
인간이 협력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너는 내 딸이다, 너는 내 아들이다, 라고 할 때, 딸과 아들의 행위를 보고 구원해 주신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루터는 이런 의인론의 관점에서 중세교회의 인간 공로주의를 비판했던 것입니다.
믿음 없는 행위를 비판할 때, 주로 쓰인 본문말씀이 야고보서였습니다.
루터는 바울 서신을 좋아했습니다.
특히 로마서 말씀을 최고의 말씀으로 여겼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이 로마서에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반면에, 야고보서를 가리켜 지푸라기와 같다고 혹평했습니다.
그것을 신약성경에서 제외시켜야 한다고까지 주장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복음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의 논쟁이 되었던 믿음과 행함은, 야고보서와 로마서를 비교하면, 그 근거가 아주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예로 들었습니다.
야고보서 2장 21절의 말씀을 보면,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라고 제단에 바친 행위에 대해 강조합니다.
바칠 때, 행함으로, 물론 야고보가 행함만을 주장한 것은 아닙니다.
믿음과 더불어 행함도 필요하다는 주장입니다.
바울 역시 로마서에서 아브라함을 예로 들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와는 정 반대의 논리를 펼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4장 3절의 말씀을 보면,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강조합니다.
이어서 로마서 4장 13절의 말씀을 보면,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똑같은 아브라함을 예로 들면서, 야고보는 행위의 중요성을, 바울은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전통을 이어받는 루터에게, 야고보는 율법을 추종하는 몽학 선생에 불과했습니다.
오늘 야고보의 편지와 바울의 편지를 동일하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고있는 우리들은 무척이나 당혹스럽습니다.
어느 쪽을 택해야 할까요?
행함인가요, 믿음인가요?
아니면, 야고보 편입니까? 바울 편입니까?
훗날 하나님 나라에 가서 야고보와 바울 앞에서 삼자대면하면, 속이 시원하게 풀리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개신교 신자라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야고보보다는 바울에게 기울어지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것은 루터가 명확하게 분석한 뒤로는 더 이상의 논란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지금까지 어어왔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하나님과 나의 관계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나 중심의 세계관에서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으로 옮겨간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신앙의 기초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의 기초는 하나님을 닮아가는 수행입니다.
세상의 변화를 위한 외적인 행위보다는 마음의 변화를 위한 수행이 우선적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수행이라는 말을 단순히 도를 닦는다는 식으로만 이해하게 되면 곤란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몰두한다는 뜻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한국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선한 행위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수행의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신자다운 기품이 없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보면, 행위는 넘쳐납니다.
교회 안에 말도 많고, 행위도 너무 많습니다.
각 교회의 프로그램과 이벤트가 과잉이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다 아실 것입니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무슨 프로그램을 하지 않으면, 교회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간주합니다.
그런 프로그램이 신자의 영성을, 믿음의 세계로 인도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경우도 물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많은 경우에는 행사를 위한 행사로 끝나고 마는 것이 문제입니다.
수행의 성격이 축소되고, 행위의 성격이 더 강조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차이를 구분하기는 그리 쉽지 않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결혼식을 준비하는 것과 결혼을 준비하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결혼식 며칠 전에 사진 찍기에서 혼이 빠지고 결혼식 날도 친구들과 친척들에 휘둘립니다.
두 사람의 관계의 의미를 묻고, 서로를 깊이 받아들이는 것이 결혼의 준비라면, 결혼식은 다른 사람에게 두 사람의 관계를 보여주기 위해 초청하는 것입니다.
수행이 결혼이라면, 행위는 결혼식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자신의 영적인 깊은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내 마음의 지성소를 열어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받아들이고, 그분이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나의 주인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수행입니다.
수행은 믿음의 차원이지, 행위의 차원은 아닙니다.
이런 수행을 뒤로 하고, 인간의 행위만 강조한다면, 그것은 신앙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선으로 하는 수행에 관점을 두었지, 율법주의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제 야고보서를 우리는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복음의 시대에는 율법의 행위를 강조하는 야고보서는, 유행 지난 패션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서는 결코, 폐기처분해야 할 지푸라기 서신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대목에서 루터는 로마 가톨릭교회와의 진리투쟁에 급급하여 야고보서를 배제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만약 루터가 오늘 한국교회의 강단에 선다면, 제일 먼저 야고보서를 펼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야고보와 바울은, 큰 틀에서 분명히 신학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는 유대-기독교인들의 대표자였고, 바울은 이방-기독교인들의 대표자였습니다.
야고보는 유대인을 상대로 복음을 전했고, 바울은 이방인을 상대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전해야 할 대상이 완전히 달랐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야고보의 행위를 부정한 것처럼, 야고보는 바울의 행위 없는 믿음을 부정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것입니다.
신앙의 근본에서는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대립적인 입장에서 글을 쓸 수밖에 없는 속사정이 있었을 뿐입니다.
공동체의 정황이 서로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 문제를 야고보의 입장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야고보는 지금 믿음만을 강조하고 행위를 중요시 하지 않는 사람들 앞에 서 있습니다.
이들은, 바울의 가르침을 극단적으로 몰고 간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믿음만 있으면, 다른 것은 아무 것도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의 죄를 용서했으며, 부활이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했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주장입니다.
이런 극단적인 행위배척주의는, 복음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은 복음이라는 명분에 숨어서 인간의 구체적인 윤리적 책임을 송두리째 부정했습니다.
초기 기독교 시대의 니골라 당이 대표적인 집단입니다.
그들은 복음의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이미 구원 받았기 때문에, 이 땅에서 어떻게 살든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신령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육체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하면서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니골라 당이 에베소 교회에도 침투할 정도였습니다.
문제는 오늘 날 한국교회에도 니골라 당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구원파가 그들입니다.
오대양 사건의 주범이고, 세월호 사건의 중심에 서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이미 하늘나라에서 구원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신자들이 세상에서 그 어떤 죄를 지어도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아무 상관이 없다고 가르칩니다.
한번 회개했으면, 다시 회개할 필요도 없다고 합니다.
그들은 구원의 확신만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구원파입니다.
그들은, “죄 사함의 비밀, 거듭남의 비밀”이라는 단순한 구호에, 병적으로 집착합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 눈에는 구원파와 개신교인들이 별반 다를 바가 없다고 보는 점입니다.
오직 영혼구원에만 매달리는 교회, 죽어서 천국 가는 것만 전하는 교회와 차이점이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니골라 당이나, 구원파의 위험성은 없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는 무시하고, 예수 = 구원이라는 수학공식 하나를 외우는 것으로, 구원받았다고 말하면서, 하나님 앞에서의 수행을 거부하는 성도가 아닌지요?
주님을 닮아가는 모습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천국행 티켓이 보장되어 있다고 자만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닙니까?
구원과 믿음이라는 자기만의 성채에 숨어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과 역사에 대한 책임을 무시하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교회에 나오는 것만 해도 힘들어 죽겠는데, 무슨 역사적 책임이냐, 라고 하면서 난처하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당장 집을 팔고, 은행의 적금을 해약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사회혁명가가 되어야 한다고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주님을 내 마음 속에 주인으로 모셔 들이고, 그 분이 내 속에 들어오셔서 그 분의 뜻대로 역사하시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에는 나만 위해 살던 사람이 주님이 기뻐하는 일과 장소를 소중하게 여기며 서로 나눔으로, 세상과 함께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요, 이것이 행함입니다.
하나님과 세상은 바로 행함이 있는 이 믿음을 요구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을 봉독하다 보면, 비슷한 정신을 말씀하는 성서기자들이 있습니다.
바울은, 하박국 선지자와 가깝고, 요한과 야고보는 예수의 이종사촌입니다.
반면에, 야고보는 미가 선지자와 가깝고, 마태와는 사촌입니다.
미가 선지자는 천천의 수양보다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보다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믿음과 행함을 정리해 주고 있습니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사랑하는 아름다운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 모두가 주일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모였습니다.
수학공식 외우듯이 예수 =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받아들이고, 그분을 닮아가는 수행으로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우리가 좋은 나무가 될 것이고, 우리를 통해서 좋은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로 세상 사람들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행함으로, 믿음을 증거하며 살아가는 아름다운교회 성도들 위에, 하나님의 은총이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