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의 피로 산 교회 (행 20:28-33)
28.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29.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30.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31.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32.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33.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교회의 신뢰도 자꾸 떨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믿을 수 있다는 신뢰지수가 20%가 안 됩니다. 기독교인들 80%를 못 믿겠다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을 못 믿으면 누굴 믿겠는가? 여러분은 신뢰 받을 만한 그리스도인인가, 자문자답 해보십시오. 옛날에 믿는 분들은 신뢰를 받았지요. ‘예수쟁이’라는 말을 들으면서요.
교회가 신뢰를 잃으면 큰일입니다. 교회에서 전하는 복음의 신뢰를 잃게 됩니다. 그래서 전도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영혼을 구원하지 못하는 교회를 무엇에 쓰는가?
한국교회가 신뢰를 잃는데, 가장 역할을 한 사람은 첫째가 목사들이요, 둘째가 장로들이요, 그리고 중직자들입니다. 말씀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작은 교회들보다는 큰 교회들의 책임이 더 큽니다. 대형교회들이 문제를 일으켜서, 교회 이미지가 많이 실추됐습니다.
큰 직분을 맡았으면 더 감사하고 더 신뢰 받는 충성된 사람이 되어야지요. 큰 교회가 되면, 더 감사하고 더 겸손히 섬겨야지요. 그런데 왜 그게 안 될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올바른 교회관을 갖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교회가 뭔지를 바로 알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올바른 교회관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교회를 섬겨서, 교회가 망가지는 것입니다. 교회를 그냥 종교기관의 하나로 여기면 안 됩니다. 여러분은 교회가 무엇인지 아는가?
교회가 무엇인가? 교회가 얼마나 소중한 곳인가?
1. 교회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산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무리하면서,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을 밀레도 섬으로 불러서, 마지막 당부를 하는 말입니다.
(행 20:28)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교회마다 감독자, 직분자들을 세워서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공동번역으로 다시 보겠습니다.
(행 20:28) 여러분은 늘 자신을 살피며 성령께서 맡겨주신 양떼들을 잘 돌보시오. 성령께서는 여러분을 감독으로 세우셔서 하나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피로 값을 치르고 얻으신 당신의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피 값을 치르고 얻으신 교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드님의 피가 누구의 피인가? 예수님의 피입니다.이렇게 귀한 것이 또 있겠는가? 여러분의 소유 중에 자녀의 피를 팔고 사온 것이 있는가? 그러니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가 얼마나 귀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어떻게 창조하셨나요? 말씀으로 지으셨습니다.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니, 빛이 있게 됐습니다. 그러면, 사람은 어떻게 지으셨나요?
(창 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그래서 인간이 만물보다 귀한 것입니다. 만드는 과정이 다릅니다. 말씀으로 지은 것과 손수 빚으신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시장에서 사온 강아지보다 자녀가 귀한 이유가 무엇인가? 자녀는 강아지처럼 사온 것이 아닙니다. 자식은 피 흘려 얻은 생명이요, 부모의 분신과도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교회를 어떻게 세우셨다고요? “교회여, 세워져라!” 명령해서 세우셨나요? 아닙니다. 그러면, 손으로 빚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어 세우셨나요? 아닙니다.
그러면? ‘교회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피 값으로 세운 것입니다. 교회에는 예수님의 피가 묻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 그 어떤 기관이나 조직에 하나님의 피가 묻어있는가? 교회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교회보다 하나님께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그분은 교회를 위해 가장 비싼 값을 치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속죄제물이 되사, 보배로운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골고다 언덕은 온통 붉은 피로 물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장사되고 3일 후에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피 묻은 복음입니다. 우리는 이 복음을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피 값으로 우리를 산 것입니다.
(고전 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피 값으로 산, 성도들이 모인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성도들이 귀하고 그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도 귀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피로 사신 교회를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피로 사신 교회, 아들을 희생시켜 세우신 교회에서,자기 이익과 자기 욕심을 도모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희생하셨으니, 우리도 교회 위해 희생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바울은 에베소교회 장로들에게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행 20:33)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하나님께서 자기 피로 산 교회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가 무엇인가? 교회가 얼마나 소중한 곳인가?
2.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분신(分身)입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분신이라는 말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체(同一體)라는 말입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우리는 그 몸에 붙어 있는 지체입니다.
박해자 사울이 이 사실을 알고 놀라 자빠졌던 것입니다. 사울은 맹목적인 교회 박해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소위 ‘행동하는 지성인’이었습니다. 비겁한 지성인이 아니라, 용기 있는 지식인이었지요. 사울은 많이 배운 지성인으로서,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목숨을 걸고 행동했습니다.
사울은 예수쟁이들을 잡아 죽이고, 교회를 없애 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데 앞장섰고, 믿는 자들을 더 많이 잡아 가두려고 먼 곳, 다메섹까지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 박해자 사울을 부르셨습니다. 사울을 찾아오셨습니다. 일대일로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백주 대낮에, 하늘로써 강한 빛이 비추었습니다.
(행 9: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그리고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행 9:4)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이것을 소위 부르심, calling, 소명이라고 합니다. 이때 박해자 사울이 놀라서 물었습니다.
(행 9:5) 주여 누구시니이까?
Who are you, Lord?
당신, 도대체 누구십니까? 물을 수밖에요.
그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행 9:5)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사울은 깜짝 놀랐습니다. 십자가에 죽은 줄만 알았던 예수가 살아 계신 거예요. 그리고 사울보고 “왜 나를 핍박하느냐, 내가 네게 무엇을 잘 못했느냐, 내가 너를 대신해서 죽었는데, 네가 져야할 십자가를 대신 졌는데,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사울이 얼마나 놀랐겠어요.
사울이 거기서 깨진 것입니다. 편견이 깨지고 고정관념이 깨졌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 맞구나.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이 맞구나. 그리스도이신 것이 맞구나!” 그 예수를 믿고 즉시 전도자가 된 것입니다.
한 가지 더 놀란 것이 있습니다. 사울은 지금까지 믿는 자들을 잡아가두고 죽이고 초대교회를 파괴하고 박해하는데 앞장섰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나를 박해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사울은 예수를 직접 핍박한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나를 박해하느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과 교회를 예수님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박해하고 믿는 사람을 투옥시킨 것이 예수님을 박해한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사울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분신이요,
동일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여러분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분신이요, 그리스도와 동일체라는 사실을 아는가? 그래서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이요,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는 것이 예수를 핍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교회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해야 하는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분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들 한 분 한 분이 얼마나 소중한 분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분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교회를 소중하게 생각하세요. 그게 예수님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 믿는 성도들을 소중하게 생각하세요. 그게 예수님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3. 교회는 신자의 어머니와 같습니다.
장로교회의 창시자요, 종교개혁자인 존 칼뱅은 자신의 책 ‘기독교 강요’에서 교회를 ‘어머니’라고 부르면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섬기는 사람에게는 교회가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교회를 가리켜 ‘신자의 어머니’라는 사상은 초대교회로부터 줄곧 이어져 왔습니다. 유명한 교부 털투리안, 성 어거스틴 역시 이 말을 썼습니다.
왜 교회가 신자의 어머니일까? 육신의 어머니가 우리를 출산하고 양육하는 것처럼, 교회는 우리를 거듭나게 해준 어머니와 같습니다. 누구도 어머니 없이는 태어날 수도 없듯이, 어느 신자도 교회 없이는 거듭날 수 없고, 신앙이 자랄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 모두 어머니인 교회의 품에서 자랐습니다. 교회에서 복음을 듣고 신령한 젖과 밥인 말씀을 받아먹고 자랐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보호를 받으면서 성장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우리의 신앙의 어머니와 같습니다.
또한 이 말씀을 보세요.
(갈 4:25)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노릇 하고
(갈 4: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좀 어려운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두 종류의 예루살렘이 나오는데 ‘지금 예루살렘’과 ‘위에 있는 예루살렘’입니다. ‘지금 있는 예루살렘’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을 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유대인’ 또는 ‘유대성전’을 가리킵니다.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 하는 우리 그리스도인’, 또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가리킵니다. 또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우리 어머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어머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어머니의 자손이 많다는 것입니다. 즉 교회로 인하여 구원받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갈 4:27) 기록된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교회는 사랑과 온유, 자비와 같은 여성적이고, 모성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어머니와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어머니 같은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어머니 같은 교회를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교회를 사랑하는가? 실감이 안 나는 질문인가? 그러면 질문을 바꿔, 여러분의 어머니를 사랑하는가? 교회를 어머니처럼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어머니를 사랑하듯이, 어머니인 교회를 마음으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가 어릴 때는 어머니의 도움을 받았지만, 장성한 후에는 부모님을 돌봐드립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린 신자였을 때는 교회의 사랑과 보살핌 가운데서 자랍니다. 하지만, 성장해서는 부모를 섬기듯이 어머니인 교회를 사랑하고 섬겨야합니다. 더욱이 어머니가 편치 않으실 때는 더욱 사랑하고 돌봐드립니다.
요즘, 교회를 향한 비판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립니다. 이럴 때 일수록 우리는, 연약한 어머니인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며 섬겨야 합니다. 그래야 어머니인 교회가 다시 힘을 얻고 일어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복음을 들려주고 양육해주고 돌봐준 화평교회를 사랑하고, 눈물과 기도로 봉사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4. 우리는 피로 산 교회를 사랑하고 보살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교회가 뭔지를 잘 모르고 핍박했습니다. 예수 믿는 초대교회 성도들을 잡아들였습니다. 그러나 후에 교회가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산 교회요, 예수 그리스도의 분신이요, 신앙의 어머니인 교회를 알았습니다.
그 후에 사도바울이 교회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모릅니다. 정말 교회를 위하여 눈물과 기도로 봉사했습니다. 에베소교회 장로들 앞에서 피로 산 교회를 위하여 눈물로 섬겼다고 고백했습니다.
(행 20:19)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그리고 에베소교회 장로들에게 눈물로 교회를 섬길 것을 권면했습니다.
(행 20:31)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사도바울은 사랑의 눈물로, 수고의 눈물로, 희생의 눈물로, 인내의 눈물로 교회를 섬겼습니다. 피로 산 교회를 섬기는데 눈물의 봉사는 필수입니다.
그리고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에게 피로 산 교회를 잘 보살피는 것이 중직자의 책임이라고 당부했습니다.
(행 20:28)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사도바울은 소아시아와 유럽에 많은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때, 바울은 교회에 그 어떤 권리도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당연한 권리조차 포기했습니다.
고전 9:5절 이하에서 고린도교회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다른 사도들과 주님의 형제들과 베드로처럼, 나도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는가? 어찌 나와 바나바에게만 일하지 않고 먹을 권리가 없겠는가? 자기 비용으로 군대생활을 할 사람이 어디 있는가? 포도원을 만들고 포도를 먹지 않을 사람이 누구인가? 양을 기르는 사람치고 그 젖을 먹지 않을 사람이 누구인가? 율법에도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고 돼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이런 권리를 쓰지 않았습니다. 왜요? 이유가 무엇일까요?
(고전 9:12)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또 한 가지 권리를 쓰지 않은 이유를 말합니다.
(고전 9:18)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교회를 어떻게 섬기고 있는가? 혹시 권리를 주장하는가? 의무는 다 하되, 권리주장은 하지 마십시오. 그래야 교회가 평안합니다. 복음전도에 집중합니다. 주님이 상을 주십니다. 저도 무엇을 주장하거나 요구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저도 사도바울 만큼은 아닐지라도, 누구보다도 교회를 사랑합니다.
어느 권사님이 말하기를 “목사님 덕분에 신앙생활 행복하게 해서 감사합니다.” 그것이 저의 기쁨이고 보람이 아니겠는가?
성도여러분, 피로 산 교회를 더욱 사랑하시길 바랍니다. 교회 잘되고 부흥하기를 위하여, 기도하고 충성하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주님이 축복하십니다. 아멘.
찬송가 208장을 부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