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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세종 즉위년(1418) 8월 21일에 임금이 형조에 명하여, 민무구, 민무질, 민무휼, 민무회의 처자에게 외방으로 가서 편할 대로 살게 하고,
2 이거이의 자손에게는 경외에서 자유로 살게 함을 허락하고,
3 김한로는 청주로 양이(量移)하게 하라 하니,
4 형조 판서 조말생 등이 아뢰기를, "이 무리들은 불충한 죄를 범한 자들이오니, 첫 정사에 가볍게 용서할 수 없습니다.
5 그리고 김한로를 서울 가까이 둘 수는 없습니다." 하였으나,
6 임금이 말하기를, "상왕의께서 명으로 감히 좇지 않을 수 없다." 하여, 조말생 등이 굳이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7 ○ 8월 22일에 대간이 민무구와 이거이들의 처자들에게 자유를 주지 말 것과 김한로에게 감죄하여 주지 말 것을 청하였으나,
8 임금은 다만 거이와 한로에 관한 일만은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였다.
9 ○ 8월 25일에상왕이 병조 참판 강상인과 좌랑 채지지를 잡아 의금부에 가두라고 명하였다.
10 이 때에 병조는 매양 군사에 관한 일을 상왕에게 아뢰지 아니하고 먼저 임금에게 아뢰므로,
11 임금이 이를 물리치면서 "어찌하여 부왕께 주상하지 않느냐." 하였다.
12 상왕이 이러한 사실을 알고, 그의 소위를 시험해 보고자 하여,
13 강상인에게 묻기를 "상아패와 오매패는 장차 어디에 쓰려고 한 것인가." 하니,
14 상인이 대답하기를, "이것으로 대신을 부르는 데 쓰나이다." 하였다.
15 상왕은 이 말을 듣고 곧 상아패와 오매패를 꺼내어서 상인에게 주며, "여기서는 소용이 없으니, 모두 왕궁으로 가져가라." 하였다.
16 상인은 곧 이를 받들고 주상전으로 가지고 갔다. 임금이 묻기를 "이것은 무엇에 쓰는 것이냐." 하니,
17 상인이 "이것으로써 밖에 나가 있는 장수를 부르는 데 쓰는 것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18 임금이 말하기를 "그러면 여기에 두어서는 안된다." 고 하고, 곧 상인으로 하여금 다시 가지고 가서 도로 바치게 하였다.
19 상왕은 상인이 거짓을 꾸며 면대하여 속이는구나 하고,
20 임금에게 말하기를 "일찍이 군국의 중요한 일은 내가 친히 청단하겠노라고 말하였는데,
21 이제 상인들이 모든 군에 관한 일을 다만 임금에게만 아뢰고 나에게는 아뢰지 않았다." 하였다.
22 ○ 26일에 병조 판서 박습, 이각, 김자온, 이안유, 양여공, 송을개, 이숙복을 의금부에 내려 가두었다.
23 ○ 28일에 평안도 관찰사가 급보로 아뢰기를 "오랑캐 40여 명이 여연군에 침입하여 남녀 10명을 잡아 가지고 돌아가는 것을 지군사 박자검이 뒤쫓아 가서 모조리 빼앗아 돌아왔다." 고 하였다.
24 ○ 29일에 상왕이 박습과 강상인을 원종 공신이라 하여 용서하고 면죄하다
25 ○ 9월 2일에 상왕이 말하기를 "심온은 국왕의 장인이니 그 존귀함이 비할 데 없으니, 마땅히 영의정이 되어야 할 것이며, 그 좌차는 두 정승과 상의하도록 하라." 하였다.
26 ○ 6일에 삼성에서 다시 박습 등에게 죄를 줄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은 박습이 상왕의 원종 공신이라고 해서
27 다만 강상인의 예와 같이 자원에 따라 지방에 안치하고, 나머지는 모두 외방으로 나누어 정배하라고 하였다.
28 ○ 9월 9일에 박습과 강상인의 공신 녹권 및 직첩과 이각, 김자온, 이안유, 양여공, 송을개, 채지지, 이숙복 등의 직첩을 모두 거두었다.
30 ○ 형조 판서 김여지, 허지, 최관 등이 연합으로 상소하여 아뢰고 임금이 상왕께 이 뜻을 말하여
31 강상인은 단천의 관노에 붙이고,
32 박습은 사천으로, 이각은 무장으로, 김자온은 양산으로, 양여공은 함안으로, 이안유는 경산으로, 채지지는 고부로, 송을개는 칠원으로, 이숙복은 강동으로 귀양보냈다.
33 ○ 16일에 형조와 대간이 계하기를 "박습은 한 관사의 행수로서 강상인의 간계에 빠져으니, 박습도 강상인의 예에 따라 하옵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34 ○ 10월 6일에 사헌부에서 상소하여 아뢰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길은 삼강, 오상을 바로잡는 것보다 더 큰 일이 없사오니, 천하 국가의 치란, 흥망이 실로 이에 매어 있는 까닭입니다.
35 바라옵건대 아들이 아버지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종이 상전에게 대하여 비록 죽이기까지에는 이르지 않았다 할지라도,
36 그 악역의 정상이 이미 나타난 자와 아비, 남편, 상전을 걸어 고소하거나 저주하거나, 후욕한 자는 비록 사령이 내리기 전에 있은 일이라 할지라도 법률에 따라 죄를 처단하소서" 하니,
37 임금이 정부와 육조로 하여금 이를 의논케 한 바, 임금은 이에 따랐다.
38 ○ 12일에 사간원 좌사간 대부 최관 등이 또한 글을 올려 이방간 부자에게 죄주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39 ○ 16일에 상왕이 양녕 대군을 불러 보니, 임금이 밤을 타서 상왕전에 이르러 제를 만나보았다.
40 ○ 11월 1일에 상왕이 말하기를 "양녕이 성품이 안정하지 못하므로, 간사한 무리들이 몰래 서로 유인할까 염려되니, 강화에 집 백여 칸을 지어 들어가 거처하게 하도록 하라." 하였다.
41 ○ 2일에 상왕이 말하기를 "육조와 대간이 회안 등의 죄를 청하는데, 회안은 간사한 사람에게 그릇 인도되어 군사를 일으키게 된 것이다.
42 강상인이 병조가 항상 전문에 있음을 기화로 군무를 아뢰지도 않았으며,
43 안문하였을 때에 '능히 깨달아 살피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반드시 압슬형을 써서 신문을 하여야만 그제야 그 진상을 알 수 있을 것이다.
44 박습이 상인의 말을 믿고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나는 죄가 차등이 있어야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45 길재는 불러도 오지 않으며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뜻을 굳게 지키니, 신하의 절개는 진실로 이렇게 해야만 될 것이다.'" 하였다.
46 ○ 5일, 이에 앞서 김한로의 어머니가 죽으매, 한로가 분상하는 것을 허락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하연들이 두세 번 이를 옳지 못함을 청하였으나,
47 임금께서 윤허하지 않고 한로로 하여금 아들 김경재와 더불어 와서, 그 어머니를 장사지내게 하였다.
48 ○ 11일에 임금이 친히 헌부의 봉장을 보고, 허지에게 말하기를 "이방간 부자의 일은 내가 두 번이나 상왕에게 아뢰었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였다.
49 그 나머지 죄인은 경들이 마땅히 다시 논청하여, 비록 극형에 처하지는 못하더라도 마땅히 중한 죄로 논단해야 될 것이다." 고 하였다.
50 허지가 말하기를 "이방간의 부자는 부왕의 원수가 되니, 한 나라 안에 같이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고 하였다.
51 ○ 12일에 상왕이 임금과 더불어 정전에 나아가서 이명덕, 장윤화, 하연 등을 불러 말하기를 "소를 올려 이방간 등 여러 사람의 죄를 청하였으나, 나는 반드시 따르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52 ○ 14일에 조말생이 신효창의 고신을 빼앗고, 노비를 관가에 소속시키길 바랬으나 상왕이 윤허하지 않고 외방에 안치시키다
53 대사헌 허지와 변계량과 전흥들이 청하기를, "국문하소서." 하니, 상왕이 그대로 따랐다.
54 15일에 의금부에서 신효창의 옥사를 갖추어서 아뢰기를 "비록 신문하지 말고 다만 외방으로 내쫓으라고만 명하였으나, 신 등은 명령을 받들 수 없습니다." 고 하니,
55 상왕이 말하기를, "임금에게 뇌물을 쓴 것으로 형률을 당하는 일이 있는 것인가, 또는 그 죄가 대사를 입지 못하는 것인가 알 수 없다.
56 내가 왕위에 있을 때에 명백하게 처치하지 못한 일이 또한 많으니, 경 등이 주상에게 아뢰어 시행하라." 고 하였다.
57 ○ 19일에 대사헌 허지와 좌사간 정수홍 등이 대궐 문에 엎드려 아뢰기를 "이방간 부자와 박만 등은 모두 죄가 강상에 관계되니 용서할 수 없습니다." 고 하니,
58 임금이 말하기를 "이른바 죄인은 모두 상왕에게 충성하지 않은 자이니, 내가 어찌 용서하고자 하겠느냐.
59 그러나 상왕께서 말씀하기를, '내가 왕위에 있은 지가 10여 년이 되었으나, 차마 목베지 못하였다.'’고 하셨으니, 하루 아침에 극형에 처하는 것은 원치 않는다." 고 하였다.
60 ○ 20일에 의금부에서 강상인을 신문하니 복죄하지 않으므로, 볼기를 쳤으나 또한 복죄하지 않고,
61 다만 말하기를 "내가 30년 동안이나 원종 공신이 되었으니, 어찌 다른 마음이 있으랴. 다만 일을 잘 알지 못한 것뿐이다." 고 하였다.
62 이명덕 등이 상세히 아뢰니, 임금이 명을 전하되 "끝까지 신문하고, 또 그 당여도 신문해야 될 것이다. 우리 부자 사이에 이와 같은 간사한 사람이 있으니, 제거하지 않을 수 없다." 고 하였다.
63 ○ 21일에 강상인이 말하기를 "국가의 명령은 마땅히 한 곳에서 나와야 된다고 생각하였으므로 상왕에게 아뢰지 않은 것이다.
64 그러나 이 아뢰지 않은 뜻은 실상 계달하기가 어려운 까닭으로 또한 감히 아뢰지 못한 것이다." 하고
65 또 말하기를 "내가 박습과 의논하면서, '군사는 한 곳에서 나오는 것이 어떠냐.'고 하니, 박습도 또한 옳다고 하므로 아뢰지 않았다." 고 하였다.
66 그 원정을 신문하니 복죄하지 않으므로, 압슬형을 한 차례 더하니, 분연히 말하기를 "그렇다면 내가 주상을 배반한 것이다." 고 하였다.
67 또 신문하니, 더욱 분연하여 말하기를 "그렇다면, 내가 새 임금의 덕을 입기를 바란 것이다." 고 하였다.
68 그 당여(黨與)를 신문하니 복죄하지 아니하였다.
2 ○ 11월 22일에 의금부에서 이관과 심청과 조흡을 잡아서 대질하니,
2 심청이 말하기를 "'군사가 두 곳으로 갈라져 있다'고 한 한 마디는 내가 말한 것이 아니라." 하면서 변명하였다가, 형벌을 받고 나서 복죄하였다.
3 이관을 신문하니, 이관이 술에 몹시 취하여 정신이 산란하여 말에 차서가 없어, 처음에는 상인이 일찍이 나에게 들른 일이 없다고 하였으나, 고문을 당하고는 그제야 복죄하였다.
4 조흡을 신문하니, 조흡이 말하기를, "군사는 반드시 상왕이 이를 주관하셔야 된다." 고 하고, 상인을 신문하니 말이 같으므로, 이에 조흡은 석방하였다.
5 상인이 또 압슬형을 당하고 말하기를 "날짜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영의정 심온과 의논하기를, '군사를 나누어 소속시키는데 갑사는 수효가 적으니, 마땅히 3천 명으로 해야 되겠다.'고 한즉,
6 심온이 또한 옳다고 하였으며, 그 후에 또 의논할 일이 있어 날이 저물 때에 심온의 집에 가서, '군사는 마땅히 한 곳으로 돌아가야 된다.'고 하였더니, 심온도 또한 '옳다'고 하였고,
7 또 장천군 이종무가 빙긋이 웃으면서 수긍하였으며,
8 또 우의정 이원을 대궐 문 밖 길에서 만나, '군사를 나누어 소속시키는 것이 어떠하냐.'고 하였더니,
9 대답하기를, '이를 어찌 말할 수 있느냐.'고 하였다." 고 하였다.
10 ○ 23일에 상왕이 말하기를 "과연 그 진상이 오늘날에야 나타났구나. 마땅히 대간을 제거하여야 될 것이니, 이를 잘 살펴 문초하라." 고 하였다.
11 이원과 이종무가 옥에 나아가서 상인과 대변하는데,
12 이원이 상인을 불러 말하기를 "강 참판은 사람을 죄에 빠뜨리지 말라." 고 하였다.
13 종무도 또한 대변하니, 상인이 말하기를 "고초를 견디지 못한 때문이니, 실상은 모두 무함(誣陷)이었다." 고 하였다.
14 심온은 사은사로 연경에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대변할 수가 없었다.
15 이보다 먼저 상인이 여러 번 고초를 당하였으나, 말과 기색이 꺾이지 않았는데, 이날에 이르러서는 말이 입 밖에 잘 나오지 않았다.
16 승전색 내관 김용기가 의금부에서 신문한 일을 아뢰기를 "심 본방(장인)이 군사가 한 곳에 모여야 된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옵니다." 하니,
17 임금이 대답하기를 "비록 그렇지마는 상왕의 교지가 이미 이와 같으시니 장차 어찌하겠는가." 하였다.
18 주상이 수강궁에 나아가서 용기의 말을 상세히 상왕께 아뢰니, 상왕이 말하기를 "내가 들은 바는 이와는 다르다. 과연 이와 같다면 무슨 죄가 있으리요." 하고,
19 즉시 좌의정 박은을 부르니, 박은이 병을 핑계하고 오지 아니하므로, 상왕이 박은의 뜻을 헤아려 알고,
20 원숙에게 명하여 박은의 집에 교지를 전하기를 "생각해보니, 이와 같은 대간은 제거하는 것이 마땅하므로, 다시 그 일을 신문하여 이와 같은 사태에 이른 것이다.
21 심온이 대답하기를, '군사가 반드시 한 곳에 모이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하니, 경은 이를 알아야 할 것이다." 고 하니,
22 박은이 고개를 숙이고 엎드려 명령을 듣고 즉시 일어나 앉으며 말하기를 "신은 이 일이 이 지경에 이를 줄 몰랐습니다.
23 심온이 말한 바, 한 곳은 반드시 주상전을 가리킨 것이오니 그 뜻은 알 수 있습니다.
24 신도 또한 아뢰올 일이 있으니 마땅히 두 임금 앞에 가서 친히 아뢰겠나이다." 하고,
25 즉시 수강궁에 나아가니, 상왕이 불러 보는데 주상도 또한 자리에 있었다.
26 박은이 아뢰기를, "지화가 어느 날 신의 집에 왔으므로,
27 신이 말하기를, '내가 장차 좌의정을 사직하려 하는 바, 심 본방(세종의 장인) 으로서 나를 대신하도록 청하고자 한다.'고 하였삽더니,
28 그 후 수일만에 지화가 다시 와서 말하기를, '내가 정승의 말로써 심 본방에게 말한즉, 본방이 네가 좌의정에게 노력하도록 청하라고 하므로,
29 신이 지화의 말을 듣고 생각하기를, 외척으로는 마땅히 겸양하는 마음을 가져야 될 것인데, 지금 이 말은 오로지 권리만을 위하여 말하는 것이오니 무슨 뜻이겠습니까.
30 그러므로 신이 전일 중량포의 낮참에서 감히 공공연히 말하지는 못하고 은밀히 이에 언급한 것입니다.
31 처음에 심온이 영의정에 임명되니, 어느 사람이 그가 나라의 정권을 잡을 수는 없다고 말하니,
32 심온이 좌의정에 임명된 예가 있다.' 대답하였다." 고 하니, 이는 대개 민제를 가리킨 것이다.
33 지화가 그 말을 박은에게 누설한 까닭으로, 박은이 짐짓 자기는 벼슬을 사직하고 심온으로 대신하고자 한다고 말한 것이었다.
34 지화는 신숫점을 치는 소경이다.
35 임금이 일찍이 상왕을 따라 중량포에 행차하여 낮참에 한담 할 즈음에, 박은이 외척이 국사에 참견하는 일을 말할 때에
36 아뢰기를, "후비의 아버지는 임금이 자주 접견하는 것이 마땅치 않습니다." 고 하였더니,
37 그 까닭으로 이제 박은이 은밀히 언급하였다고 말한 것이다.
38 또 아뢰기를 "심온의 사위 유자해가 경복궁에서 시립할 때에 신을 보고 비웃으며" 하였다.
39 박은이 나간 후, 상왕이 임금에게 이르기를 "좌의정의 한 말은 그 의미를 알지 못하겠으나, 하필 오늘의 옥사를 위하여 이를 말하였을까." 하였다.
40 박은이 말하기를 "이미 바른 말을 하라고 구하고서 말함으로써 죽이는 것이 옳겠는가.
41 내가 마땅히 바른 말을 하겠다." 하니, 의논하는 사람이 모두 그렇게 하지 말하고 말렸다.
42 변계량이 은근히 박은에게 이르기를 "그대의 말이 너무 지나쳤다. 많은 신하들이 비록 죽이기를 청하더라도 위에서는 반드시 죽이지 않을 것이니,
43 그대는 마땅히 많은 신하들과 더불어 죽이기를 함께 청할 것이다." 하니
44 박은이 그렇게 여겨 이에 많은 신하들을 거느리고 방문중을 죽이기를 청하니, 상왕이 과연 윤허하지 않았다.
45 변계량이 전후에 박은을 지시한 말이 모두 임금의 뜻을 미리 탐지하여 보자는 것이었으니,
46 그 붕당을 지어 임금을 업신여긴 죄는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어찌 유자(儒者)의 마음가짐이라 하겠는가.
47 (이미 사관과 변계량의 관계를 써 놓았다. 여기에서도 이와 같이 변계량을 비난하니, 이는 변계량의 하늘의 제사에 관한 주장 때문에 관계가 멀어진 것인가?)
48 ○ 처음에 임금이 왕위에 올라 장의동의 본궁에 거처하였는데, 박은이 들어와서 왕의 앞에서 관직을 임명하였다.
49 이날에 중궁의 백부, 숙부와 강석덕이 모두 관직이 승진되니, 박은이 유자해까지 아울러 승진시키기를 청하므로,
50 임금이 이를 말리며 말하기를 "갑자기 은총이 지나치니 아직 후일을 기다리라." 고 하였다.
51 박은이 다시 청하기를 "이 사람의 관직이 너무 낮습니다." 고 하였으나, 임금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였다.
52 이 때에 이르러서 박은이 또 들어와서 관직을 임명하는데, 임금이 유자해의 관직을 승진시키고자 하여
53 박은에게 물었다. 박은은 머리를 숙이고 대답하지 않았으니, 대개 이계주의 말을 듣고 유자해에게 불쾌하게 여긴 때문이었다.
54 ○ 강상인을 신문하여 압슬형을 두 차례나 쓰니, 대답이 전과 같더니, 말이 약간 계속하면서
55 성달생을 끌어내어 말하기를 "달생이 말하기를, '감순할 곳이 없으니 마땅히 주상전의 가까운 곳에 이를 지을 것이라.' 하고,
56 또 말하기를, '어찌 대체(大體)를 돌보지 않으시고 전대로 예전 그 곳에 계시는가.' 하였다." 고 하였다.
57 달생을 고문하였으나 복죄하지 아니하였다.
58 상왕이 말하기를 "이것은 우연히 한 말이지 무슨 죄 될 것이 있느냐." 고 하였다.
59 이관을 신문하여 압슬형을 한 차례 하니, "내가 심온의 집에 가서 말하기를, '병사는 나누어 소속시킴이 불편하니, 마땅히 다 주상전에 돌려보냄이 어떠하냐.'고 한즉,
60 심온이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옳다. 그러나 법이 이미 정하여 있는 까닭으로 이와 같이 할 뿐이다.'고 하므로,
61 관이 이 말을 듣고 또 스스로 생각하기를, '주상이 어리고 잔약하지 않은데, 이미 왕위를 전하였으면 어찌하여 병사를 나눌 수 있을까.
62 상왕께는 마땅히 갑사를 나눠 보내서 시위하면 그뿐일 터인데.' 하고, 그래서 상인을 보고 이 말을 꺼낸 것이라." 고 하였다.
63 심청을 신문하여 압슬형을 한 차례 하니, 복죄하지 않다가
64 두 차례만에 그제야 말하기를 "형 온을 그 집에서 보았는데, 형이 '군사는 마땅히 한 곳에서 나와야 된다.'고 하므로, 내가 '형의 말이 옳다.'고 대답하였다." 고 하였다.
65 상왕이 이명덕에게 이르기를 "정상(情狀)이 이미 나타났으니, 다시 신문할 필요가 없다." 고 하였다.
66 명덕이 그 원정(原情)을 국문하기를 청하니, 상왕이 말하기를 "수모자(首謀者)는 심온이니 그의 당(黨) 상인과 이관 등은 마땅히 극형에 처하여, 5도에 두루 보여야 할 것이다. 속히 단죄하여 아뢰라." 고 하였다.
67 ○ 24일에 박습을 신문하니 박습이 김효손을 끌어대었다가, 효손이 변석함이 명백하여, 박습이 무고하였음을 자백하였다.
68 효손은 박습의 처형이요, 박습의 아들 박의보는 이관의 사위이다.
69 상인이 또 말하기를 "내가 전일에 이종무가 수긍했다고 한 것은 무고이다." 하였다.
70 옥사가 이루어지매, 이명덕 등이 상세히 아뢰니, 이종무, 성달생, 김효손 등은 석방하여 보냈다.
71 처음에 상인이 "일찍이 연사종, 최윤덕, 조말생, 전흥, 원숙을 보고 '병사를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으니,
72 모두 말하기를, '마땅히 의건부에 합쳐야 된다.'고 하였다." 고 하였다.
73 이때에 조말생과 전흥이 상인과 대변하기를 청하니, 상왕이 이를 허락하지 않고,
74 박습, 심온, 심청, 상인, 이관 등의 가산을 봉(封)하였다.
3 ○ 11월 25일에 상왕이 박은, 이원, 조말생, 원숙을 불러서 일을 의논하고, 인하여 술을 주었다.
2 술이 어지간하여 박은과 이원이 아뢰기를 "두 전하가 일체이옵신데 험악하고 편협한 간신들이 두 길로 갈라서 일을 꾀하오니, 신 등이 모두 분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고 하였다.
3 ○ 판전의감사 이욱으로 의금부 진무를 삼아 의주에 가서 심온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잡아 오라고 하고,
4 인하여 명령하기를 "심온이 만약 사신과 같이 오거든 심온에게 병을 핑계하고 짐짓 머물게 하여 비밀히 잡아 오되,
5 사신으로 하여금 알게 하지는 말 것이니, 중국 조정에서 우리 부자 사이에 변고가 있는가 잘못 알까 염려된다." 고 하였다.
6 ○ 의금부에서 계하기를 "형률에 의거하면, 강상인, 박습, 심청, 이관은 모반 대역에 해당되므로,
7 수모자와 종범자를 분간하지 않고 모두 능지 처사하게 될 것이오며,
8 그들의 부자의 나이 16세 이상이 된 자는 모두 교형에 처하고,
9 15세 이하와 처첩, 조손, 형제, 자매는 공신의 집에 주어서 노비를 삼게 할 것이옵고,
10 이각과 채지지는 상인의 모의를 알고도 고발하지 않았으니, 곤장 1백 대를 치고 3천 리 밖으로 귀양보낼 것이오며,
11 성달생은 제서를 어김이 있사오니, 곤장 1백 대를 치게 할 것입니다." 하였다.
12 ○ 상왕이 말하기를 "심인봉은 곧 심청의 배 다른 형이다. 비록 세력이 없더라도 역신의 형으로써 입직하는 것이 의리에 편안하겠느냐." 하니,
13 조말생 등이 아뢰기를 "이것은 곧 신 등의 죄입니다." 고 하였다.
14 상왕이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병권을 내놓지 않는 것은 왕위를 마음에 두고 잊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15 주상을 위하여 무슨 사고가 있을 경우에 후원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16 예로부터 지친을 이간시키는 것은 여러 소인의 무리로 말미암음이니, 징계하여 뒷 세상 사람을 경계하지 않으리오." 하였다.
17 ○ 상왕이 박은, 조말생, 이명덕, 원숙을 불러 보고 말하기를 "강상인과 이관은 죄가 중하니 지금 마땅히 죽일 것이요,
18 심청과 박습은 상인에 비하면 죄가 경한 듯하였다.
19 괴수 심온이 돌아오지 않았으니, 아직 남겨 두었다가 대질시키는 것이 어떠한가.
20 그렇지 않으면 인심과 천의에 부끄러움이 있지 않겠는가." 하니,
21 박은과 의금부의 청을 들어 명하여 강상인은 형률대로 시행하고,
22 박습과 이관, 심청은 모두 참형에 처하고,
23 네 사람의 부자는 교형을 면제하여 종을 삼고,
24 이각과 채지지, 성달생은 사면하라 하였다.
25 의금부에서 또 계하기를 "죄인의 부자는 이미 사형을 면하였으나, 마땅히 가산을 적몰해야 될 것이며, 이각과 채지지와 성달생은 모두 사면할 수 없습니다." 하니,
26 그 말을 따라 이각 등은 모두 장형은 면하고 외방으로 귀양가게 하니, 이각과 채지지가 모두 그전에 갔던 곳으로 귀양갔다.
29 백관을 모아 강상인을 차열(車裂)하고, 박습과 이관과 심청을 서교에서 목 베었다.
30 임금이 문묘에 참배하고자 하여 이미 길일을 가렸다가, 상인 등이 처형되는 일로써 이를 정지하였다.
31 상인의 아우 강상신을 영해로, 강상례를 무안으로, 강상려를 서산으로, 강상망을 단양으로,
32 아들 강장생을 영덕으로 귀양보내고, 박습의 아들 박의손을 남해로, 박의보를 광양으로, 이관의 아들 이소인을 울산으로, 형 이약을 통천으로 귀양보내어 모두 관노를 삼았다.
33 박습은 옥중에 있다가 벌써 죽었다.
34 강상인이 수레에 올라 크게 부르짖기를 "나는 실상 죄가 없는데, 때리는 매를 견디지 못하여 죽는다." 고 하였다.
35 후에 변계량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무술년의 옥사는 신이 의금부 제조로 있었사온데,
36 허지가 여러 제조에게 말하기를, '마땅히 박습에게 압슬형을 쓸 것이라.'고 하니,
37 여러 제조가 좋다고 하여 이에 압슬형을 쓰니 곧 자백하였습니다.
38 상왕께서도 또한 박습의 죄를 의심하시고 계신데, 박은이 다시 청하여 이에 목베었습니다." 고 하였다.
39 또 말하기를 "허지는 오래지 않아서 죽었으니 그 보복의 틀리지 않음이 이와 같다." 고 하였다.
40 26일에 선지하기를 "심씨가 이미 국모가 되었으니, 그 집안이 어찌 천인에 속할 수 있겠느냐." 하여,
41 심인봉 등이 이로 말미암아 천인이 됨을 면하고 양민이 되었다.
42 선지하기를 "심온의 아내와 네 명의 어린 딸을 천인에 속하게 할 때는 임금의 윤허를 얻어 시행하라." 고 하였다.
43 ○ 28일에 상왕이 유정현, 박은, 이원, 조말생, 허조, 하연 등을 불러 말하기를
44 "그 아버지가 죄를 지었어도 딸이 후비가 된 일은 옛날에도 또한 있었으며,
45 하물며 형률에도 연좌한다는 명문이 없으므로, 내가 이미 공비에게 밥먹기를 권하였고, 또 염려하지 말라고 명령하였으니,
46 경 등은 마땅히 이 뜻을 알라." 하니 모두 아뢰기를 "상교가 진실로 마땅합니다." 하였다.
47 ○ 29일에 의정부, 육조의 당상과 허지, 정수홍 등이 대궐에 나아가서 대역을 처단함을 기뻐하며 하례하였다.
48 두 임금이 전교하기를 "자연의 도리로 된 것이요, 사람의 힘으로 된 것은 아니니, 하례하지 말라." 고 하였다.
49 여러 신하들이 대답하기를 "사직이 편안하고 장구할 복입니다." 고 하였다.
50 ○ 유정현이 상왕에 답하기를 "예로부터 제왕은 자손이 번성한 것을 귀하게 여겼으니, 빈과 잉첩 2, 3명을 들이기를 청합니다." 고 하였다.
51 상왕이 말하기를 "이 일은 주상이 알 바가 아니니, 내가 마땅히 주장할 것이다." 하였다.
52 박은이 말을 하는 김에 아뢰기를 "궁중이 적막합니다." 고 하니,
53 그 뜻은 대개 중궁을 마땅히 폐할 것을 말함이다.
54 상왕이 그 뜻을 알고 말하기를 "내가 이미 경의 뜻을 알았다." 고 하였다.
55 조말생, 원숙, 장윤화 등이 "심온은 곧 부왕의 원수이니, 어찌 그 딸로써 중궁에 자리를 잡고 있도록 하겠습니까." 하니, 상왕이 대답하지 않았다.
56 허조는 아뢰기를 "빈과 잉첩을 갖추고자 함은 신도 역시 마땅히 두 성씨를 맞아 들여야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니,
57 상왕이 매우 기뻐하였으며, 인하여 혼가를 금하도록 명하였다.
58 ○ 12월 4일에 의금부에서 다시 청하기를 "여러 형들의 천인됨을 면한 것을 신 등은 오히려 옳지 못하였다고 생각하오니, 아내와 딸들은 천인을 면하게 할 수 없습니다." 하여, 상왕이 그 말대로 좇고,
59 명하기를 "비록 천인에 속하게 하더라도 역사(役使)는 말도록 하라." 고 하였다.
60 ○ 12월 22일에 이욱이 심온을 잡아 오니, 이에 이명덕, 허지, 성엄, 정초를 명하여, 의금부와 같이 이를 신문하게 하였다.
61 심온이 강상인들이 벌써 죽은 줄을 모르고, 그들과 더불어 대변하기를 요구하였다.
62 이에 매로 치고 압슬형을 쓰니, 심온이 말하기를 "반드시 면하지 못할 것이라." 하면서,
63 드디어 복죄하기를 "신은 무인인 까닭으로 병권을 홀로 잡아 보자는 것뿐이고, 함께 모의한 자는 상인 등 여러 사람 외에 다른 사람은 없습니다." 하니,
64 다시 신문하였다. 안수산이 옥방에서 심온을 바라다보는데,
65 심온이 마침 이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수산도 또한 이를 알았다." 고 하였다.
66 수산이 마주 대하여 논변하고 고문을 받았으나 복죄하지 않으니, 심온이 또한 무함하였다고 자복하여 수산이 그제야 죄를 면하게 되었다.
67 ○ 23일에 상왕이 심온을 자결 시키고, 안수산을 예천에 정배하였다.
68 (역사라는 것은 무엇인가? 태종의 비 민씨의 외척이 모두 사사되고, 세종의 비 심씨의 외척도 이렇게 하여 사라졌으나, 심씨는 왕자 셋을 나은 덕에 폐비 되지 않고 후에 영릉에 세종과 합장 되었다.)
4 ○ 12월 25일에 임금이 말하기를 "고려사에 공민왕 이하의 사적은 정도전이 들은 바로써 더 쓰고 깎고 하여,
2 사신의 본 초고와 같지 않은 곳이 매우 많으니,
3 어찌 뒷세상에 미쁘게 전할 수 있으랴. 없는 것만 같지 못하다." 고 하니,
4 변계량과 정초가 아뢰기를 "만약 끊어지고 세상에 전하지 않는다면, 뒷세상에서 누가 전하께서 정도전이 직필을 증손한 것을 미워하신 뜻을 알 수 있겠습니까.
5 원컨대 문신에게 명하여 고쳐 짓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렇다" 하였다.
6 ○ 세종 1년(1419) 1월 11일에 편전에서 정사를 보고 술상을 마련하여, 여섯 순배를 나누고 파하였다.
7 참찬 김점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하시는 정사는 마땅히 금상 황제의 법도를 따라야 될 줄로 아옵니다." 하니,
8 예조 판서 허조는 아뢰기를 "중국의 법은 본받을 것도 있고 본받지 못할 것도 있습니다." 하였다.
9 김점은 아뢰기를 "황제가 친히 죄수를 심문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본받아 주소서" 하니,
10 허조는 아뢰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임금이 친히 죄수를 결제하고 대소를 가리지 않는다면, 관을 두어서 무엇하오리까." 하였다.
11 김점은 "시왕(時王)의 제도는 따르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황제는 불교를 존중하고 신앙합니다." 하니,
12 허조는 "불교를 존중하고 신앙하는 것은 제왕의 성덕이 아니옵기로, 신은 취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13 임금은 허조를 옳게 여기고 김점을 그르게 여겼다.
14 ○ 1월 30일에 광주에서 달려와 아뢰기를 "양녕이 지난밤 자정에 편지를 써서 봉해 놓고 담을 넘어 도망갔습니다." 고 하였다.
15 상왕은 근심과 한탄으로 식사도 전폐하고 내시 최한과 홍득경 및 내금위 홍약들을 보내어 앞질러 광주에 가서 찾아오게 하였다.
17 ○ 처음 상왕이 위(位)에 있을 적에, 기생 칠점생도 연루의 혐의로 잡혀 갇히었다.
18 그 기생의 말이 "심 판서 댁 주인도 역시 이 일을 안다." 고 하니,
19 의금부는 아뢰기를 "심온의 아내마저 데려다 문초해야 된다." 하였다.
20 ○ 임금은 세자의 말한 바와 효녕의 말한 바를 갖추어 상왕께 아뢰기를 "(양녕의 일을) 경사대부로부터 여염집 서민들까지도 모르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21 지금 심온을 죄를 주자고 청한 대신도 역시 어찌 몰라서 말을 안했겠습니까.
22 유독 심온과 그 아내에게 죄를 주자고 한다면, 옳다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왕이 옳게 여겼다.
23 이튿날 아침에 상왕이 "심온은 충녕의 장인인데, 인정상 세자의 일을 어떻게 말하겠느냐." 고 하니,
24 하연이 "전하의 분부가 지당하옵니다." 고 하였다. 그래서 신문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25 ○ 2월 2일, 이번 양녕이 도망갔을 때, 약장들은 일이 어리 때문에 났다고 하여,
26 허물을 씌워 협박을 더하였고, 충개는 제지하지 못하고 목을 매어 죽게 한 때문이다.
27 옥에 가두고 문초하다가 이윽고 놓아 주었다. 약장은 양녕의 유모, 가이는 김한로의 비첩, 충개는 어리의 몸종이다.
28 ○ 3일에 상왕이 말하기를 "이제 양녕에게 매 2연과 말 3필을 주어 매사냥이나 하며 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하겠다." 하였다.
29 ○ 15일에 대마도 왜인 종우마가 사로잡혀 간 우리 나라 사람 1명을 돌려보냄과 동시에 토산물을 바치고 따라서 양곡을 구걸하므로, 백미 20가마를 주게 하였다.
30 ○ 16일에 좌의정 박은이 계하기를 "문신을 선발하여 집현전에 모아 문풍을 진흥시키시는 동시에,
31 지금부터는 사서(四書)를 통달한 뒤에라야 무과에 응시할 수 있도록 하소서." 하니,
32 임금이 아름답게 여기고 받아들였다.
33 ○ 17일에 지신사 원숙은 아뢰기를 "격고하는 자가 많아서 이렇다 저렇다 말들이 많을 것이니, 실로 불가하옵니다." 하였다.
34 김점이 "우리 나라는 사람이 적고 사무도 복잡하지는 않사옵고,
35 의금부가 전원이 모이지 않으면, 단안을 내리지 아니하니, 이것이 지체되는 이유입니다." 하니,
36 임금이 "그렇다. 그러나 의금부가 전원이 모이고 안 모이는 것은 사건의 대소에 있을 것이다." 하였다.
37 또 말하기를 "사건이 전원에 관계되지 않는 것이면, 한 사람만이라도 단안을 내릴 수 있지 않느냐." 하였다.
38 ○ 2월 28일에 임금이 함께 사냥하자고 하니, 양녕이 기뻐하며 하는 말이 "나로 하여금 항상 이와 같이 하게 한다면, 내가 어찌 도망했겠습니까." 하였다.
39 ○ 4월 12일에 고려 문하 주서 길재가 졸하였다.
40 ○ 5월 14일에 임금이 말하기를 "각도와 각 포구에 비록 병선은 있으나, 그 수가 많지 않고 방어가 허술하여,
41 혹 뜻밖의 변을 당하면, 적에 대항하지 못하고 도리어, 변환을 일으키게 될까 하여, 이제 전함을 두는 것을 폐지하고 육지만을 지키고자 한다." 하니,
42 판부사 이종무와 정역들이 답하기를 "우리 나라는 바다에 접해 있으니, 전함이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만약 전함이 없으면, 어찌 편안히 지낼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43 이지강이 아뢰기를 "고려 말년에 왜적이 침노하여 경기까지 이르렀으나, 전함을 둔 후에야 국가가 편안하였고, 백성이 안도하였나이다." 하니,
44 임금이 말하기를 "적이 만일 병선이 많이 모일 것을 알면, 병선이 오기 전에 반드시 먼저 급히 쳐 올 것이니, 이것이 실로 염려되는 바이다." 하였다.
45 ○ 양상(兩上)이 유정현, 박은, 이원, 허조들을 불러 "허술한 틈을 타서 대마도를 치는 것이 좋을까 어떨까." 를 의논하니,
46 모두 아뢰기를 "허술한 틈을 타는 것은 불가하고, 마땅히 적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려서 치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
47 유독 조말생만이 "허술한 틈을 타서 쳐야 합니다." 하니,
48 상왕이 말하기를 "허술한 틈을 타서 쳐부수는 것만 같지 못하였다." 하고,
49 곧 장천군 이종무를 삼군 도체찰사로 명하여, 중군을 거느리게 하고,
50 유습을 좌군 도절제사로, 이지실을 우군 도절제사로 삼아, 경상, 전라, 충청의 3도 병선 2백 척과 배 타는 데 능숙한 군정들을 거느려,
51 왜구의 돌아오는 길목을 맞이하고, 6월 초8일에 각도의 병선들을 함께 견내량에 모여서 기다리기로 약속하였다.
52 ○ 5월 15일에 선지하기를 "여러 섬의 왜적들이 기근으로 매년 양식을 구걸할 때면 곧 급여하기도 하였고, 또 우리의 변읍에서 장사할 것도 허락하였으니,
53 그들이 살게 된 것은 전혀 우리 나라의 은덕이어늘, 이것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변민들을 침략하여도 모른 체 하였으나,
54 이제 도리어 군사를 일으켜, 우리 충청도 도두음곶이를 침략하여, 우리 인민들을 죽이고 병선을 불살랐으며, 또 우리 황해도 해주 지경에 와서 도적질까지 하니,
55 전에 이미 우리 나라에 와서 귀화한 왜인들은 곧 우리 나라의 백성이라.
56 그 이름을 따로 밝혀 등록하게 하고, 각 포구의 병선에 분배하되, 집마다 세금을 면제하고,
57 그 이름을 적어서 알릴 것이며, 이중에 공이 있는 자는 반드시 상을 후히 줄 것이다." 하였다.
58 ○ 조말생과 허조에게 명하여, 일본국 구주(九州)에서 사자로 보내 온 정우 등 네 사람을 제군의 처소에서 대접하게 하고,
59 따라온 사람들은 배가 머물러 있는 곳으로 보내라고 이르고,
60 우리 나라에서 대마도를 토벌할 뜻을 말하되, 너무 놀라게 하지는 말라고 하였다.
61○ 6월 2일에 조흡을 좌군 도총제에, 이춘생을 좌군 총제에, 이천을 좌군 동지총제에, 윤득홍을 좌군 첨총제로 삼으니,
62 천은 그 때에 첨절제사로 대마도 정벌에 종군하였고, 득홍은 왜인을 잡는 데 공이 있었으므로 발탁되었다.
63 ○ 병조에서 계하기를 "이제 여러 도에 있는 병선이 대마도에 나가 정벌하므로 각 포구의 방어가 허술하니,
64 방어하기 위하여 남아 있는 병선에 명령하여 요새지에 나누어 보내어 머물러 둔을 치게 하소서" 하니, 상왕이 그대로 따랐다.
65 ○ 6월 6일에 교지를 삼군 도통사에 내리어 대략 말하기를 "구주 절도사가 우리 나라의 대마도 정벌의 본의를 알지 못하고 반드시 의혹을 이룰 것이니,
66 우리 나라 병선이 떠난 뒤에 구주 사신의 배를 돌려 보내게 하고, 구주에 간여하지 아니할 뜻을 알리라." 하였다.
67 ○ 6월 7일에 변계량이 가뭄이 심하므로 원단에서 하늘에 제사 드리는 예를 다시 하자고 청하니,
68 임금이 말하기를 "참람한 예는 행함이 불가하다." 고 하였다.
69 변계량이 다시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제후가 하늘에 제사함이 옳지 않음은 예에 있어 마땅한 것이니, 어찌 감히 지방이 수천 리가 된다 해서 천자의 예를 분수없이 행하리오." 하였다.
70 변계량이 다시 아뢰기를 "기수(沂水) 가에 하늘에 제사하여 비를 비는 곳이 있으니, 이같은 예는 옛적에도 있었습니다.
71 평상시에 늘 제사함은 불가하다 하겠으나, 이제 막심한 한재를 당하여 행함이 또한 무방하오니, 하늘에 제사함이 무슨 혐의가 되겠습니까." 하니,
72 임금이 그렇게 여기고, 명하여 하늘에 제사할 날짜를 선택하라 하였다.
73 ○ 8일에 임금이 말하기를 "가뭄이 너무 심하니, 궐내에서 덜고 줄일 만한 일을 적어 알려라." 하였다.
74 ○ 이조 판서 맹사성에게 명하여 소격전에 비를 빌고, 검교 한성부 윤 최덕의로 석척 기우를 경복궁 경회루 못가에서 지내게 하고, 우의정 이원으로 원구(圓丘)에서 비를 빌게 하였다.
75 8일 밤에 비가 왔고 9일에 비가 왔다. 명하여 원구 및 여러 곳의 기우하는 제사를 정지하게 하였다.
76 10일에 큰 비가 왔다.
5 ○ 세종 1년(1419) 6월 9일에 상왕이 중외(中外)에 교유하기를 "병력을 기울여서 무력을 행하는 것은 과연 성현이 경계한 것이요,
2 죄 있는 이를 다스리고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제왕으로서 부득이한 일이라,
3 대마도는 본래 우리 나라 땅인데, 다만 궁벽하게 막혀 있고, 또 좁고 누추하므로, 왜놈이 거류하게 두었더니,
4 개같이 도적질하고, 쥐같이 훔치는 버릇을 가지고 경인년으로부터 변경에 뛰놀기 시작하여
5 마음대로 군민을 살해하고, 부형을 잡아 가고 그 집에 불을 질러서, 고아와 과부가 바다를 바라보고 우는 일이 해마다 없는 때가 없으니,
6 뜻 있는 선배와 착한 사람들이 팔뚝을 걷어 부치고 탄식하며, 그 고기를 씹고 그 가죽 위에서 자기를 생각함이 여러 해이다.
7 신민들이여, 간흉한 무리를 쓸어 버리고 생령을 수화(水火)에서 건지고자 하여,
8 여기에 이해(利害)를 말하여 나의 뜻을 일반 신민들에게 널리 알리노라." 하였다.
9 ○ 6월 18일, 이날 사시에 이종무가 거제도 남쪽에 있는 주원방포에서 출발해서 다시 대마도로 향하였다.
10 ○ 20일 오시에 우리 군사 10여 척이 먼저 대마도에 도착하였다.
11 섬에 있는 도적이 바라보고서 본섬에 있는 사람이 득리(得利)하여 가지고 돌아온다 하고, 술과 고기를 가지고 환영하다가,
12 대군이 뒤이어 두지포에 정박하니, 모두 넋을 잃고 도망하고, 다만 50여 인이 막으며 싸우다가, 흩어져 양식과 재산을 버리고,
13 험하고 막힌 곳에 숨어서 대적하지 않거늘, 먼저 귀화한 왜인 지문을 보내어 편지로 도도웅와에게 깨우쳐 이르나 대답하지 않았다.
14 이에 우리 군사가 길을 나누어 수색하여, 크고 작은 적선 1백 29척을 빼앗아, 그중에 사용할 만한 것으로 20척을 고르고, 나머지는 모두 불살라 버렸다.
15 또 도적의 가옥 1천 9백 39호를 불질렀으며, 전후에 머리 벤 것이 1백 14이요, 사로잡은 사람이 21명이었다.
16 밭에 있는 벼곡식을 베어버렸고, 포로된 중국인 남녀가 합하여 1백 31명이었다.
17 제장들이 포로된 중국인에게 물으니, 섬중에 기갈이 심하고, 또 창졸간에 부자라 하여도 겨우 양식 한두 말만 가지고 달아났으니,
18 오랫동안 포위하면 반드시 굶어 죽으리라 하므로, 드디어 책(柵)을 훈내곶에 세워 놓고 적의 왕래하는 중요한 곳을 막으며, 오래 머무를 뜻을 보였다.
19 ○ 21일에 허조가 간절히 청하기를 "전날에 상서하였던 바, 부락에 사는 백성이 그 고을 관장의 범죄한 것을 고하지 못하게 하여, 풍속을 두텁게 하는 법을 마련하소서." 하니,
20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다시 참고해 보고자 함은, 이미 이루어진 법을 마음대로 함부로 고칠 수 없는 때문이다." 하니,
21 여러 의논이 분분하여 한결같지 않으나,
22 다만 이수 혼자 말하기를 "새로 고치는 것이 불가하니, 만일 부락민이 탐관 오리의 잘못을 고하여 하소연하지 못한다면, 방자한 행동이 기탄이 없어서 그 해가 백성에게 미칠 것은 필연한 것입니다." 하였다.
23 계사가 끝나매, 여러 신하에게 술을 다섯 순배 돌려 먹이고 파연하였다.
26 ○ 6월 29일에 유정현의 종사관 조의구가 대마도에서 돌아와 승전을 고하니, 3품 이상이 수강궁에 나아가 하례하였다.
27 ○ 이종무 등이 배를 두지포에 머무르게 하고 날마다 편장을 보내어 육지에 내려 수색하여 잡고,
28 다시 그 가옥 68호와 배 15척을 불사르고, 도적 9급을 베고, 중국인 남녀 15명과 본국인 8명을 얻었다.
29 우리 절제사 이순몽과 병마사 김효성들이 또한 적을 만나 힘껏 싸워 막으니, 적이 그제야 물러갔고, 중군은 마침내 하륙하지 아니하였다.
30 도도웅와는 우리 군사가 오래 머물까 두려워서 글을 받들고 군사를 물려 수호(修好)하기를 빌면서
31 말하기를 "7월 사이에는 항상 풍파의 변이 있으니, 오래 머무름이 옳지 않습니다." 하였다.
32 ○ 7월 3일에 이종무 등이 수군을 이끌고 돌아와 거제도에 머물렀다.
33 ○ 7월 4일에 왜구가 황해도에서 충청도까지 이르러 적의 배 2척이 안흥량에 들어와 전라도의 공선 9척을 노략하고 대마도로 향하여 갔으나, 수군 도만호 이매는 감히 구원하지 못하였다.
34 (왜구의 침략 내용들은 실록에 있고, 여기에 태종 이후의 일을 기록하지 않았으니 왜구의 도적질은 끝이 없었다.)
35 ○ 5일에 황해도 감사가 급보하기를 "중국으로부터 돌아오는 왜구 약 수십 척이 이달 초3일에 소청도 해양에 출몰하였습니다." 하니,
36 상왕이 곧 진무 이양성을 보내어 유정현에게 이르기를 "방비를 엄하게 하라." 하고,
37 또 "연해 요로(要路)에는 각각 병선 20척씩을 예비하였다가 변에 대비하라." 하였다.
39 ○ 6일에 좌의정 박은이 상왕에게 계하기를 "이제 적왜가 중국에 들어가 도적질하고 본도로 돌아오는 것이 곧 이때이므로,
40 마땅히 이종무 등으로 다시 대마도에 나가 적이 섬에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맞아서 치게 되면,
41 적을 파함에 틀림없을 것이니, 진실로 진멸시킬 기회를 잃지 마소서." 하니, 상왕이 그렇게 여겼다.
42 ○ 7일에 상왕이 이춘생을 보내어 동정군중(東征軍中)에 나가 하사한 술로 제장들을 위로하고,
43 유정현에게 중국으로부터 돌아온 적선 30여 척이 대마도로 향하니 치게 하였다.
44 ○ 10일에 유정현이 다시 계하기를 "대마도에서 전사한 자가 1백 80명입니다." 하였다.
45 ○ 상왕이 이에 이호신을 보내어 유정현에게 선지를 내리기를 "대마도를 다시 토벌하는 것을 중지하게 하고,
46 장수들로 하여금 전라, 경상도의 요해처에 보내어, 엄하게 방비하여, 적이 통과하는 것을 기다렸다가 추격하여 잡게 하라." 하였다.
47 ○ 7월 17일에 상왕이 조말생에게 명하여, 대마도 수호 도도웅와에게 글을 보내어 말하기를
48 "대마도라는 섬은 경상도의 계림(鷄林)에 예속했으니, 본디 우리 나라 땅이란 것이 문적에 실려 있어, 분명히 상고할 수가 있다.
49 다만 그 땅이 심히 작고, 또 바다 가운데 있어서, 왕래함이 막혀 백성이 살지 않는지라,
50 이러므로 왜인으로서 그 나라에서 쫓겨나서 갈 곳이 없는 자들이 다 와서, 함께 모여 살아 굴혈을 삼은 것이다.
51 도도웅와의 아비 종정무의 의를 사모하고 정성을 다한 것을 생각해서,
52 범하여도 교계(較計)하지 않았으며, 통신하는 사신을 접할 때마다 사관을 정하여 머물게 하고,
53 또 그 생활의 어려움을 생각하여, 이(利)를 꾀하는 상선(商船)의 교통도 허락하였으며,
54 경상도의 미곡을 대마도로 운수한 것이 해마다 대개 수만 석이 넘었으니, 그것으로 거의 그 몸을 길러 주림을 면하고
55 그 양심을 확충하여, 도적질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천지 사이에 삶을 같이할까 하였노라.
56 만약 능히 번연(飜然)히 깨닫고 다 휩쓸어 와서 항복하면, 도도웅와는 좋은 벼슬을 줄 것이며, 두터운 녹도 나누어 줄 것이요,
57 나머지 대관들은 평도전의 예와 같이 할 것이며, 그 나머지 여러 군소(群小)들도 또한 다 옷과 양식을 넉넉히 주어서, 비옥한 땅에 살게 하고,
58 다 같이 갈고 심는 일을 얻게 하여, 우리 백성과 꼭 같이 보고 같이 사랑하게 한다.
59 병조는 글을 대마도에 보내어, 나의 지극한 생각을 알려서, 그 자신(自新)할 길을 열어 멸망의 화를 면하게 하고,
60 나의 생민(生民)을 사랑하는 뜻에 맞도록 하라." 하고,
61 귀화한 왜인 등현 등 5인에게 이 글을 가지고 대마도로 가게 하였다.
62 ○ 7월 28일에 병조에서 계하기를 "9, 10월 사이에 장차 크게 군사를 일으켜, 다시 대마도를 섬멸한다 하니, 각도에 독려하여 각 병선을 정리하게 하소서." 하니, 상왕이 그대로 따랐다.
63 ○ 8월 5일에통사 최운과 선존의가 송관동 등 12명을 중로에 나가 보고, 그 보고 들은 것을 물으니,
64 관동이 대답하기를 "대마도란 곳은 길이는 한 3백 리가 되겠고, 너비는 60여 리 되겠는데,
65 이번 싸움에 전사한 것이, 왜인이 20여 명이고 조선 사람이 백여 명이라." 하니,
66 최운 등이 돌아와서 그대로 아뢰니, 상왕이 운 등에게 묻기를 "관동들을 모두 요동으로 보내야 할까, 혹은 특별히 붙들어 둘까." 하니,
67 운 등이 아뢰기를 "중국의 군병으로도 달단을 치다가 죽은 사람이 반이나 넘는데, 백여 명의 죽은 것이 무엇이 부끄럽겠습니까." 하니,
68 상왕이 이르기를 "내 뜻이 본래 그러하였다." 하고, 곧 명하여 요동으로 보내게 하였다.
69 ○ 8월 11일에 경기좌도 수군 첨절제사 이각이 글을 올리기를
70 "병선을 더 짓는 것이 시급합니다. 적의 병선은 백으로 세어, 각 포구의 병선이 많다 하여도, 5, 6척 입니다.
71 한가한 백성을 다 찾아내어, 수군에 보충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72 강화 교동 좌우변에 소속된 관군은 본시 전라도의 훈련 받은 용병으로, 모두 추려내어 군적에 올리시어, 군인 수를 늘일 수 있고 배에 익숙하도록 훈련하는 데에도 이보다 요긴한 것이 없습니다.
73 배를 만드는 재목은 반드시 소나무라야 하는데 비록 벌채를 금지하는 법령을 있으나, 심어서 기르는 방법은 있지 않으니,
74 이제 벌채와 불조심을 하라는 법령을 엄하게 포고하시고,
75 또 연해의 황폐한 땅에 소나무를 심고 기르게 하시되, 훗날의 소용에 대비하게 하소서." 하니, 상왕이 그대로 따랐다.
6 ○ 9월 19일에 임금이 윤회에게 이르기를 "요사이 고려사를 읽어 보았더니, 사실과 맞지 않는 곳이 많으오. 마땅히 개수해야 할 것이오." 하였다.
2 20일에 임금이 예문관 대제학 유관, 의정부 참찬 변계량 등에게 명하여, 정도전이 찬수한 고려사를 개수하게 하였다.
3 ○ 9월 20일에 등현, 변상들이 대마도로부터 돌아왔다.
4 대마도의 수호 종도도웅와가 도이단도로를 보내어 예조 판서에게 신서(信書)를 내어 항복하기를 빌었고,
5 인신 내리기를 청원했으며, 토물을 헌납하였다.
6 임금이 말하기를 "대마도는 지금 비록 궁박한 정도가 심해서 항복하기를 빌기는 하나, 속 마음은 실상 거짓일 것이오.
7 만약에 온 섬이 통틀어서 항복해 온다면 괜찮겠소. 만약에 그들이 오지 않는다면, 어찌 족히 믿을 수 있겠소." 하니,
8 이원이 아뢰기를 "비록 온 섬이 통틀어서 항복해 온다 하더라도, 그것을 처치하는 것 역시 어렵습니다." 하였다.
9 임금이 말하기를 "수만에 지나지 않는데, 그 정도를 처치하는 것이 무엇이 어렵겠소." 하니,
10 원이 아뢰기를 "궁박한 정도가 심해서, 표면적으로 우호적인 교제를 허락하는 것일 뿐입니다. 반드시 온 섬이 통틀어서 투항해 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11 허조가 아뢰기를 "도성 밖에다 왜관(倭館)을 지어 거기에 머물게 하고 도성 안에 들어오게 하지 말 것이고,
12 도도웅와 및 종준 등의 문서를 가지고 온 자들은 예로써 접대하여 주고, 그들이 매매하는 재화는 자기가 운반해 다니게 하고,
13 그 밖에 등차랑 등이 부리는 사람은 접대를 불허하여, 내왕의 개시를 엄격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14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에 내왕을 하게 되면, 경의 말과 같이 하는 것이 좋소." 하였다.
15 10월 3일에 병조에서 계하기를 "대마도의 왜노가 나라에서 무육(撫育)해 주는 은혜를 생각지 않고 변경의 백성들을 살략(殺掠)하여,
16 그 죄가 죽여도 남음이 있으므로, 장수에게 명해서 원정 토벌케 하였습니다.
17 지금 듣자옵건대, 제도의 군정들이 재차 토벌하는 것을 피하려고 속속 유망하고 항산(恒産)을 지킬 계획을 하지 않습니다.
18 무식한 백성들이 나라의 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도피하려고 꾀하니, 이들을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9 이제 충청, 전라, 경상 등 도의 감사를 시켜 서울로 잡아 올려 대대적으로 징계하여, 본보기를 보여 주도록 하소서." 하니, 상왕이 그대로 따랐다.
20 10월 11일에 상왕이 대마도의 투항을 설유하는 방책을 의논하니,
21 다들 말하기를 "반드시 종준(宗俊) 등이 친히 와서 투화한다면, 그 때에는 너희들이 항복하는 것을 허락해 주고,
22 큰 공이 있는 자는 벼슬을 살게 하고, 작은 자는 백성이나 되게 하여,
23 너희들의 원하는 바를 들어 주어 생업에 안정하게 하여 줄 것이니,
24 너는 돌아가서 도민(島民)들이 깨닫도록 일러주고 속히 와서 보고하라.
25 11월까지 기다려도 보고해 오지 않는다면, 우리도 영영 투항해 오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겠다.고 말해서,
25 병조와 예조가 함께 설유하여 보내도록 할 것입니다." 하니, 상왕은 그 방법이 옳다고 하였다.
27 ○ 13일에 말생에게 명하여 예조에 가서 허조와 함께 도이단도로에게 전에 의논한 바와 같이, 항복해 오라는 뜻을 설유하게 하였다.
28 도이단도로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틀림없이 선지에 보인 뜻을 가지고 돌아가서 도도웅와에게 말하겠습니다.
29 그러하오나 도내[對馬島內]의 사람들이 반드시 다른 도적이 아니온데, 지금 내리신 선지는 다 도적질을 했다고 하였으니, 마음 속이 정말 아프고 답답합니다." 하였다.
30 ○ 17일에 대마도의 도적 중도 만호 좌위문대랑이 예조에 글을 보내 와 말하기를
31 "귀국에서 본도를 토벌할 때 왕명을 경외하여, 감히 화살 하나도 쏘지 않았고,
32 또 종준에게 말하여, 관군을 잘 보호하여 그들로 하여금 물을 길어 가게 하였으니,
33 그 때의 장수들은 이 일을 다 알 것입니다. 전일에 보낸 배와 간 사람들을 돌려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34 ○ 18일에 도도웅와가 보낸 사람 도이단도로가 대궐에 나아가 사명을 배하였다.
35 예조 판서 허조가 그 서신에 답하여 말하기를 "그 땅에 사는 온 사람들이 항복해 온다면,
36 큰 작위를 내리고, 인신을 주고, 후한 녹을 나누어 주고, 전택을 내려 대대로 부귀를 누리게 할 것이요" 하였다.
37 ○ 27일에 임금이 말하기를 "왜인의 접대가 지금부터 다시 시작되었소. 성 밖에 (왜인을 위한) 관사를 짓는 일이 지금의 급한 일이오." 하니,
38 김점이 아뢰기를 "날씨가 차지기 시작했으니, 토목의 일을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39 ○ 12월 17일에 일본국 원의지의 사신 양예가 대궐에 들어와 서계를 올리고 토산물을 바치니, 객청에서 접대하게 하였다.
40 그 서계에 이르기를 "우리 나라와 귀국은 바다를 격한 가장 가까운 나라이나, 큰 물결이 험한데가 많아서 때때로 소식을 잇지 못하니, 게으른 것이 아닙니다.
41 이제 중 양예를 보내서 기거를 문안하고 겸해서 석전 7천 축을 구하오니,
42 만약 윤허하시어 이 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길이 좋은 인연을 맺게 하시면, 그 이익이 또한 넓지 않겠습니까.
43 이것을 용납하시기를 엎드려 빌며 변변치 못한 토산물을 서계 끝에 열기하였습니다." 하였다.
44 일찍이 황제가 의지의 아비 도의를 왕으로 봉하였으나,
45 의지는 명을 받들지 아니하고, 스스로 정이 대장군이라 일컫고,
46 그 나라 사람들이 어소라고 하는 까닭에, 그 서계에 다만 일본국 원의지라 하고 왕자를 쓰지 아니하였다.
47 ○ 12월 20일에 상왕이 조말생과 이명덕을 시켜 가만히 원숙에게 이르기를
48 "주상이 다만 아들 둘뿐인데, 큰 애가 여섯 살이니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49 더구나 이제 안으로 시녀도 없고, 홀로 궁중에 있으니 사알이나 사약 따위의 딸에서 시어될 만한 사람을 골라서
50 먼저 태비께 보이고 들이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7 ○ 세종 2년(1420) 1월 27일 선지하기를 "지금 일기가 따뜻하게 강의 얼음이 장차 풀리게 되면,
2 사람이 빠질까 염려되니, 각 나루터에 명하여 얼음을 깨고 사람을 건너게 하라." 하였다.
3 ○ 윤 1월 10일에 예조에서 계하기를 "대마도의 도도웅와의 부하 시응계도가 와서
4 웅와의 말을 전달하기를, '대마도는 토지가 척박하고 생활이 곤란하오니,
5 바라옵건대, 섬 사람들을 가라산 등 섬에 보내어 주둔하게 하여, 밖에서 귀국을 호위하며,
6 백성으로는 섬에 들어가서 안심하고 농업에 종사하게 하고,
7 그 땅에서 세금을 받아서 우리에게 나누어 주어 쓰게 하옵소서.
8 나는 일가 사람들이 수호하는 자리를 빼앗으려고 엿보는 것이 두려워, 나갈 수가 없사오니,
9 만일 우리 섬으로 하여금 귀국 영토 안의 주,군의 예에 의하여,
10 주의 명칭을 정하여 주고, 인신을 주신다면 마땅히 신하의 도리를 지키어 시키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11 도두음곶이[都豆音串]에 침입한 해적의 배 30척 중에서 싸우다가 없어진 것이 16척이며,
12 나머지 14척은 돌아왔는데, 7척은 곧 일기주의 사람인데, 벌써 그 본주로 돌아갔고,
13 7척은 곧 우리 섬의 사람인데, 그 배 임자는 전쟁에서 죽고, 다만, 격인(格人)들만 돌아왔으므로,
14 이제 이미 각 배의 두목 되는 자 한 사람씩을 잡아들여 그 처자까지 잡아 가두고, 그들의 집안 재산과 배를 몰수하고 명령을 기다리고 있사오니,
15 빨리 관원을 보내어 처리하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16 ○ 윤 1월 23일에 예조 판서 허조에게 명하여 도도웅와의 서한에 답서하게 하니,
17 그 글에 이르기를 "신하가 되기를 원하는 뜻을 자세히 알았으며,
18 또한 대마도는 경상도에 매여 있으니, 모든 보고나 또는 문의할 일은 반드시 본도의 관찰사에게 보고를 하여, 그를 통하여 보고하게 하고, 직접 본조에 올리지 말도록 할 것이요,
19 근래에 귀하의 관할 지역에 있는 대관과 만호가 각기 제 마음대로 사람을 보내어 글을 바치고 성의를 표시하니
20 지금부터는 반드시 귀하가 친히 서명한 문서를 받아 가지고 와야만 비로소 예의로 접견함을 허락하겠노라." 하였다.
21 그 인장의 글자는 "종씨 도도웅와"라 하였다.
23 ○ 4월 20일에 남방(南方) 토룡(土龍)에게 비를 빌었다.
24 ○ 5월 3일에 박은, 정탁에게 명하여 재계하고 원구단에 비를 빌게 하였다.
25 이날에 비왔다. 2월부터 이제까지 비가 오지 아니하여,
26 임금이 매우 진념하여 여러 곳 신사에 두루 빌게 하고, 무릇 옛 문서에 기재되어 있는 비를 비는 방법은 거행하지 아니함이 없었고,
27 찬을 감하고 옥사를 다시 살피고 하여, 하늘의 경계함을 공경하여 근신하였더니,
28 이제에 이르러 연일 비가 내려 전야(田野)가 흡족히 젖었다.
29 ○ 5월 7일에 예조에서 계하기를 "진주 아전 정습은 열녀의 아들이온데,
30 비록 장정 삼형제 중에 한 사람이 아니오나, 잡과에 과거보는 것을 허락하여 절의를 장려하고 풍속을 권면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좇았다.
31 습의 모친 최씨는 영암 선비 최인우의 딸이다.
32 진주 호장 정만에게 시집가서 아들 딸 네 사람을 낳았는데, 그 끝의 아이가 강보에 있을 때,
33 홍무 기미년에 왜적이 진주에 들어와, 온 고을 사람들이 모두 피란하게 되었다.
34 그 때 마침 정만은 일이 있어 서울에 갔었는데, 왜적이 동네로 몰려 들어오니, 최씨는 나이가 삼십여 세에 외양도 아름다웠다.
35 여러 어린 자식들을 안고 업고 산속으로 도망하여 피하였다.
36 왜적이 사면으로 나와서 노략질하였다가 최씨를 만나서 칼을 들이대고 협박하므로,
37 최씨가 나무를 끌어안고 막으면서 소리쳐 꾸짖기를 "죽기는 일반이다. 너희 도적놈에게 더럽히고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의롭게 죽겠다." 하고 꾸짖기를 입에서 그치지 아니하니,
38 왜적이 칼로 쳐 나무 아래에서 죽어 넘어졌고, 왜적은 두 어린이를 붙들어 갔다.
39 그 때에 습의 나이 겨우 여섯 살이었는데, 시체 옆에서 울부짖고,
40 강보에 있는 어린 것은 그래도 기어가서 젖을 빨다가, 피가 입에 흥건하여 역시 곧 죽었다.
41 ○ 5월 12일에 상왕이 군기감 제조 윤자당과 병조 판서 조말생에게 명령하여 양화도에서 전함을 시험하게 하고, 임금이 술을 하사하였다.
42 ○ 5월 23일에 대마도 도도웅와의 어미가 사람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쳤다.
43 ○ 29일에 일본 예주 태수 대내다다량이 사람을 보내어 와서 토산물을 진상하였다.
44 ○ 6월 21일에 임금이 밤에 대비를 모시고 몰래 이궁 남교 2리쯤 되는 풀밭에 행차하여 자리를 잡으니,
45 두 대군과 청평, 평양 두 공주도 또한 따르고, 그 나머지 따르는 자는 남녀 합하여 불과 40인이었다.
46 정줄과 도류승 을유 등이 앞을 인도하여 행하였다.
47 22일, 임금이 대비를 모시고 토원 동천변에 자리를 옮기고, 이로부터 새벽마다 천차(遷次)하고 밝기 전에 장전에 돌아와 낮에는 머물러 쉬니,
48 왕자와 공주가 어떤 때는 도보로 따르고, 군사는 선지를 받들어 멀리서 바라보고 따르며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하였다.
49 26일, 임금이 대비를 모시고 선암 아래 냇가로 행차를 옮기고, 무당으로 하여금 악차(幄次)에서 신(神)에게 제사하였다.
50 새벽에 임금이 두어 사람을 데리고 대비를 모시고 가만히 동소문으로 들어와 흥덕사에 행차를 정하니, 두 대군이 도보로 따르고,
51 시종자들은 임금의 간 곳을 잃어, 다 동대문 밖 안암동에 이르러 헛되이 장전(帳殿)을 설치하고 시위하다가, 해가 저물어 다 성안으로 돌아왔다.
52 이날에 대비의 병환이 나으므로, 이로부터 밤마다 행차를 옮기시어, 사람들이 알지 못하였다.
53 7월 4일, 상왕이 풍양으로부터 광연루에 이어하고, 임금으로 하여금 대비를 모시고 창덕궁의 별전에 들어가 거하게 하였다.
54 대비가 전국술을 조금 마시고, 인하여 혼침하여 편안치 못하므로, 음식을 드리지 못하였다
55 ○ 7월 10일 낮 오시에 대비가 별전에서 훙하니, 춘추가 56세이요, 중궁에 정위한 지 21년이다.
56 임금이 옷을 갈아 입고, 머리 풀고, 발 벗고, 부르짖어 통곡하니,
57 상왕이 거적자리에 나아가 미음을 전하니, 이 때 임금이 음식을 진어하지 않은 지 이미 수일이라, 상왕이 눈물을 흘리며 울면서 권하였다
58 ○ 예조 판서 허조 등이 계하기를 "임금과 신하의 상하 구분이 각각 없을 수 없는 것이니, 조금이라도 능멸히 여기는 마음이 있을 수 없는 법인데,
59 근자에 와서는 아래에 있는 사람으로 윗사람의 일을 엿보다가 조그마한 틈이라도 있는 것을 알게 되면, 그럴듯하게 만들어 하소연하며,
60 이와 같은 풍조는 단연히 자라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61 ○ 10월 21일에 상왕이 말하기를 "일본국 왕이 우리 나라에서 영락 연호를 쓰는 것을 책망하고 있으나, 이것은 족히 수죄할 것도 없고,
62 소이전이 우리 변방을 침략하려 하고, 도도웅수가 또 말하기를, '금후에는 흥리선을 나가지 못하게 하리라.' 하니, 그들의 절교할 뜻이 이미 드러났다.
63 대마도의 왜인들이 와서 농사짓기와 고기잡이와 소금 굽는 일들을 못하도록 한다면, 반드시 그들이 소이전과 같이 항복하기를 청할 것이고,
64 만약 항복을 아니하면 여러 장수를 시켜 번갈아 가면서 들어가 공격함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
8 ○ 세종 3년(1421) 1월 23일에 상왕이 예조에 명하여 대마도의 장사하는 왜인 표온이로에게 이르기를
2 "통신사 송희경이 돌아올 적에 정성의 아우 웅수가 말하기를, '지금 이후로는 서로 호시(통상) 하지 아니하겠다.' 하였다 하니, 이로 본다면, 국교를 끊으려고 함이 분명하였던 것이다.
3 그러므로 우선 장사하는 왜를 모두 접대하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였더니,
4 그 뒤에도 상선으로서 웅수의 문서를 받아 가지고 온 배가 5척이나 되었었다.
5 국가에서는 희경의 아뢴 바가 혹시나 잘못 전해 들은 것이 아닌가 하는 연고로, 매매하는 것은 허락하여 돌려보냈었으나, 이제 너희들이 온 데에도 또한 웅수의 변명하는 말이 없다.
6 그러나, 너희들은 웅수와 같이 사는 것이 아니니까 혹 알지 못하기도 할 것이다.
7 금후에 상선이 올 때에는 분명히 그 일을 알아 가지고 오라." 하였다.
8 ○ 1월 30일에 이전에 정도전이 편찬한 고려사가 간혹 사신이 본래 초(草)한 것과 같지 아니한 곳이 있고,
9 또 제(制)니, 칙(勅)이니 하는 말과 태자(太子)라고 한 것 등의 유가 참람되고 분수에 넘치는 말이 된다 하여,
10 유관과 변계량에게 명하여 교정하게 하였더니, 이제 와서 편찬이 완성되었으므로 이에 헌상해 올렸다.
11 ○ 4월 1일에 대마 도주 종정성과 도만호 좌위문대랑 등이 사절을 보내 와서 조공하였다.
12 ○ 4월 3일에 길창군 권규가 졸하였다. 규는 권근의 아들이다.
13 12살에 상왕의 딸 경안 공주에게 장가들어 숭정 대부의 계급에 오르고 길천군에 봉함되었다. 이 때에 병으로 죽으니, 나이가 29세이다.
14 자기 집에 드나드는 사람이 쌀을 훔친 것을 청지기가 붙잡아서 아뢰니, 규는 가난한 선비라 하면서 그대로 그에게 주었다.
15 규는 성격이 온후하고 자신을 겸손하게 가지며, 자기의 생활을 매우 검소하게 하고, 사랑과 공경으로 어머니를 섬겼다.
16 아들은 권담과 권총이다.
17 시호를 제간(齊簡)이라 하였는데, 모든 부마(왕의사위)가 죽으면, 특별한 지시가 있은 연후에 시호를 내리는 것인데,
18 예조에서 아뢰기를 "부마는 다른 대신과 견줄 바가 아닙니다.
19 빈소를 드리고 염을 갖추는 기구를 모두 관가에서 준비하되, 홑저고리와 겹저고리 모두 세 벌씩, 저고리 깃 한 벌, 홑저고리 깃 두 벌, 시체를 묶는 데 쓰는 흰 모시 3필, 명정감으로 붉은 명주 10척, 혼백 감 1필을 마련하고, 장례는 중등으로 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20 이것은 규의 집이 워낙 가난하여, 저축된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21 ○ 4월 6일에 임금이 백성이 굶주리므로, 호조에 명하여 풍저창과 군자감의 묵은 쌀과 밀을 꺼내어, 가난한 백성으로 하여금 이를 사게 하였다.
22 이 때 저화 한 장으로 쌀 2되를 사는데, 임금이 쌀은 1말 5되, 밀은 3말씩을 주게 하니,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23 이 때 경기 각 고을의 창고는 진대로 곡식을 백성에게 꾸어주었기 때문에 텅텅 비게 되었다.
24 그러므로 군자감의 쌀을 꾸어주니, 경기도의 백성이 이고 지고 가는 자가 잇따라 끊어지지 아니하였다.
26 ○ 대마 도주 종정성이 구리안을 보내어 예조 판서에게 글을 올리기를 "최공이 금년 정월에 보낸 서계를 받자오니, '대마도가 경상도에 예속되었다.' 했는데,
27 역사 서적을 조사하여 보고 노인들에게 물어보아도 사실 근거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28 그러나 만일 대왕께서 훌륭한 덕을 닦고 두터운 은혜를 베푸신다면, 누가 감히 귀의하지 않겠습니까.
29 반드시 옛날대로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하였다.
30 나라에서는 글 내용이 공손하지 않다 하여, 사절을 예절대로 접대하지 아니하고, 그가 바친 예물도 거절하였다.
31 ○ 4월 27일에 이지강이 계하기를 "지금 밀과 보리가 익기 시작하여, 백성의 식량이 대어 먹을 수 있으니, 기민을 진제하는 것을 중지하소서." 하니,
32 임금이 말하기를 "밀과 보리가 익었다 할지라도, 나는 굶주리는 백성이 있을까 염려되니,
33 수령들로 하여금 직접 백성의 살림을 조사하게 하여, 만일 굶주리는 자가 있으면 구제하게 하라." 하였다.
34 ○ 6월 19일에 호조에 명하기를 "장마가 너무 심하여, 쌀 값이 치솟아 비싸니, 백성의 생계가 근심스럽다.
35 그 군량의 묵은 쌀 1만 석으로써 민간의 저화를 사서 가난한 사람에게 먼저 이를 지급하라." 하였다.
36 ○ 6월 26일에 교지를 내리기를 "지금 비가 재앙이 되어 장차 흉년을 당하게 되었으니,
37 너희들 모든 신민(臣民)은 각기 스스로 용도를 절약하고 헛되이 쓰지 말라." 하였다.
38 (민(民)은 절약하는 것이 당연하나, 신(臣)은 절약하여 민에게 이르지 못하니 민은 가난해 질 수 밖에 없었다.)
39 ○ 9월 12일, 앞서 사복 소윤 김보안의 처 임씨가 종제(從弟) 나우본과 간통하였더니,
40 보안의 전처 딸이 그 아비에 고하여, 보안이 헌사에 고발하였다.
41 그 때에 그녀가 아이를 배고 있어 고문을 더하지 못 하였더니, 이날에 이르러 유사를 받았다.
42 ○ 4월 27일에 임금이 면복을 하고 인정전에 나와 원자 이향을 책봉하여 왕세자로 하였다.
43 ○ 12월 12일에 구경부가 요동으로부터 돌아와서 아뢰기를 "달달의 군사 40만 명이 심양로에 둔쳐 있으므로,
44 요동 성문을 낮에도 열지 않았으며, 말을 바꾸어 북경으로 보내다가 중로에서 4백여 필을 빼앗겼습니다." 하였다.
45 ○ 12월 26일, 처음에 예조 판서 허조가 건의하여, 노비가 주인을 고발한 자는, 거짓임과 참을 묻지 않고 모두 참형에 처하여, 풍속을 순후하게 하도록 하니, 그대로 따랐는데,
46 이 때에 와서 형조에서 계하기를 "계집 종의 남편과 사내 종의 아내도 또한 노비의 예에 있지마는, 노비와는 차이가 있으니, 죄를 같이 하는 것은 적당하지 못합니다.
47 계집 종의 남편과 사내종의 아내가 주인을 고발한 자는, 본률(本律)에 차등을 두어 논죄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48 임금이 말하기를 "처음에는 상고하지 않고 한 것이지만, 그러나 만약 정률(正律)이 있다면 마땅히 율문대로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9 ○ 2월 28일에 공비가 가례색에서 뽑아 올린 상호군 조뇌와 좌랑 장수와 전 현감 신기의 딸을 궁중에 불러 보았다.
2 처음에 변계량이 조말생에게 말하기를 "대비가 이미 돌아가고, 김씨도 또한 나가 버렸으니, 마땅히 태상왕을 위하여 다시 명가의 딸을 가려서 빈과 잉첩의 모자라는 데를 보충해야 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3 태상왕이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내가 늙었으니 하고 싶지 않다." 라고 하였으나, 굳이 청하니 그제야 이를 허락하였다.
4 가례색에서 두 서너 사람을 뽑으니, 이에 조씨를 맞아들이기로 결정하여 필단과 견자를 조뇌의 집에 내리고 기일이 며칠 있었는데,
5 태상왕이 다시 오랫동안 주저하더니 마침내 맞아들이지 아니하였다.
6 ○ 3월 5일에 선지하기를 "도성을 수축하는 군인들이 혹은 병을 앓게 되니, 매우 불쌍히 여겨야 되겠으므로,
7 네 곳에 구료소를 설치하여, 약품과 죽, 밥을 준비하여 적당한 데 따라 구료하게 하였는데,
8 군사를 거느린 수령들은 비록 군인이 병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구료소에 보내지 아니하여,
9 군인들을 죽게 하였으니, 수령이 법을 받들어 행하는 뜻에 어긋난 것이다.
10 그 군인의 죽은 사람이 16명 이상이 된 자에게는 직첩을 회수하고 곤장 60대를 치고,
11 6명 이상이 된 자에게는 태형 50을 치고 본래의 직책으로 다시 임명한다." 라고 하였다.
12 이에 수령을 추죄하여 모두 몸소 태형과 장형을 받게 하고 속전(贖錢) 거두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13 ○ 3월 8일에 일기주의 궁내대랑이 "삼가 조선국 집정 각하에게 받들어 아룁니다.
14 저는 비록 본국의 생민을 위하여 귀국의 은택을 입고 있지마는 지금 구주(九州)가 귀국의 은의를 저버리고자 하여,
15 평의는 결정되지 못했지마는, 주책(籌策)은 이미 반이나 정해졌습니다.
16 만약 반역의 모의가 있더라도 제가 반드시 특별히 귀국 조정의 궐하에 아뢸 수 없사오니, 삼가 용서하시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17 ○ 대마도 주월의 좌위문대랑이 사람을 보내어 와서 토산물을 바치고 대마도에서 잡혀 와 억류된 왜인을 돌려보내 주기를 청하였다.
18 ○ 4월 17일에 통사 김시우가 요동으로부터 돌아와 "달달(몽고)이 중국 국경에 침범하므로, 명나라 임금이 이달 21일에 말을 타고 친히 정벌하러 간다." 라고 하였다.
19 태상왕이 변계량, 이지강을 불러 말하기를 "임금의 자손은 넓히지 아니할 수 없으니, 후궁이 될 만한 여자 두 사람을 선택하여 보고하라." 하였다.
20 이보다 앞서 16세 이하의 여자의 결혼을 금하였는데, 태상왕이 말하기를 "어떠한 사람이고 늙은 자는 어찌 그 자녀를 혼인시키려고 하지 아니하리오. 속히 후궁을 선택하여 금혼령을 정지하도록 하라." 하였다.
21 ○ 5월 9일에 금천 부원군 박은이 53세로 졸하였다.
22 전라도 나주 반남현 사람이요, 고려 판전교시사 박상충의 아들이다. 난 지 여섯 살 때에 부모가 모두 돌아가 외롭게 자라났다.
23 조금 장성하여 용기를 내어 글을 읽고 19세 때에 급제하여 후덕부 승에 임명되었다.
24 태조 6년에 사헌 시사에 임명되었는데, 계림 부윤 유양이 일찍이 어떠한 일을 가지고 은을 욕하였다.
25 은이 굴하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만일 당신의 나이에 이르면, 나도 또한 당신과 같게 될 것인데, 어찌하여 이처럼 곤욕을 주느냐." 하였다.
26 얼마 되지 아니하여 조정에서, 양이 항복한 왜놈과 결탁하여 본국에 배반하였다 하고 헌부를 시켜 다스리게 하였었다.
27 그때 집정은 생각하기를 "은은 일찍이 양에게 곤욕을 당하였으니, 반드시 잘 적발할 것이라." 하였다.
28 은이 대(臺)에 오르게 되자, 양이 뜰 아래서 쳐다보고 문득 머리를 숙이고 눈물을 흘렸는데, 그것은 은이 반드시 그전 원망을 갚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29 형리가 결안(結案)을 가지고 은에게 나오니, 은이 붓을 던지고 큰 소리로 말하기를 "어찌 죄 아닌 것을 가지고 사람을 죽는 데 빠지게 할 수 있느냐." 하고,
30 마침내 서명하지 아니하여, 아무 일 없이 양을 보호하여 죽지 않게 하였다.
31 뒤에 양이 정승이 되어 은에게 이르기를 "양은 진실로 소인이었다. 그대의 말채나 잡고 나의 평생을 마치려고 한 것이 오래였다." 라고 하였다.
32 집정은 은을 미워하여 지방으로 내보내어 지춘천사가 되었다.
33 후에 임금에게 계하여 심문하는 형장은 한 차례에 30대씩으로 정하여, 일정한 법을 만드니, 사람들이 많은 덕을 보았다.
34 김점이 항상 조정에서 은을 보면, 반드시 큰 소리로 말하기를 "그대의 등용한 사람은 다 그대의 집에 드나들던 자요, 우리들의 부탁한 사람은 모두 들어주지 아니하니 옳은 일인가," 하니, 은이 대답할 말이 없었다.
35 세종 원년 봄에 태상이 평강에 행행(行幸)하려 할 때에 정현이 말하기를 "이제 농사가 한참 성하여, 비록 호위할 사람을 간편히 한다 할지라도, 두 임금이 거둥하면, 민폐가 많을 것입니다." 하고,
36 은은 대답하여 말하기를 "임금의 말씀이 심히 옳습니다." 하고,
37 태상이 전지하기를 "영의정의 말은 내가 공경하여 듣고, 좌의정의 말인들 또한 어찌 망령된 신하라 하겠는가." 하였다.
38 은의 얼굴빛이 크게 변하여 정현과 서로 좋게 지내지 아니하였다.
39 (사관이 박은에 대하여 옳고 그름을 모두 기록하였으니, 훌륭하다. 그렇다면 변계량에 대한 평은 변계량의 또다른 면이 있기 때문인가.)
40 ○ 5월 16일에 요동 사람 이생길, 박인길 등 40여 명이 달달의 난을 피하여 강계 지방에 왔다.
41 ○ 20일에 의빈 권씨와 신녕 궁주 신씨가 임금에게 계하지 아니하고,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었다.
42 후궁들이 서로 경쟁하여 머리를 깎고 염불하는 기구를 준비하여, 아침 저녁으로 불법을 행하였는데, 임금이 금하여도 되지 아니하였다.
43 ○ 6월 27일, 평안도 곽산군의 백성 김마언의 처가 전광병에 걸리니, 마언이 처를 버리었다.
44 그 딸 사월이 사방으로 치료하는 방법을 구하였는데, 방문에 살아 있는 사람의 뼈를 부수어 먹으면 즉효라는 말이 있으므로,
45 사월이 곧 왼손 무명지를 잘라 빻아 가지고 국에 타서 먹였는데, 병이 낫게 되었다.
46 명령을 내려 그의 문려(門閭)에 정표하고, 그 집의 부역을 영구히 면제시키게 하였다.
47 ○ 8월 1일에 호조에 전지하기를 "금년에 곡식이 귀하여, 쌀값이 올라가게 되니, 창고에 있는 묵은 쌀 5천 석도 민가에 판매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48 ○ 9월 21일에 호조에게 명하기를 "이제 흉년을 당하여, 여러 관사의 공물을 이미 감하였으나,
49 받아들일 때에 조금이라도 백성에게 폐단되는 일이 있을까 염려되니, 여러 관사로 하여금 사호(絲毫)라도 더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50 ○ 10월 9일에 예조에서 계하기를 "국상 3년 안에는 모든 국민들이 모두 흰옷을 입으나,
51 신혼(新婚)한 집에서는 의당 길복(吉服)을 입어야 할 것인즉, 3일 동안만 길복을 입도록 허용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52 ○ 10월 13일, 장사아치(상인)들이 모두, 저화는 쓰지 아니하고 쌀과 베로서 매매하게 되니 물건 값이 치솟고, 저화는 매우 천하게 되었다.
53 ○ 10월 15일에 2, 3세 이하의 굶주린 아이들에게도 5세 이상의 예(例)에 따라서 진휼하라고 명하였다.
54 ○ 10월 29일에 곽산군의 백성이 굶어 죽은 일이 있으므로, 그 지군사 신홍생을 곤장 1백 대를 쳤다.
55 ○ 11월 13일에 길에 떠돌아다니는 굶주린 백성들을 그 고을의 수령과 역승(驛丞)으로 하여금 진심껏 구호하여,
56 그들로 하여금 굶고 얼게 하지 말도록 하고, 그 잃어버린 소아(小兒)들은 친히 감독하고 호양(護養)할 것이며, 곧 계문(啓聞)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57 ○ 28일에 서울 안의 맹인(盲人)으로, 혼자 사는 여자 29인이 북을 치고 호소하기를,
58 "일찍이 환자[還上]를 받아 먹었으나, 가난한 탓으로 수를 채워 바치지 못하겠사오니,
59 저화(楮貨)로써 대신 바치기를 원합니다." 하므로, 호조에 명하여 그들의 소원을 들어 주라고 하였다.
60 ○ 12월 25일에 이후로는 문소전과 광효전에 진상하는 노루, 사슴, 기러기, 오리 등 물건은 모두 바치지 말라고 명하였다.
61 (이해에 계속하여 대사헌과 사간원 등에서 양녕대군과 김한로를 탄핵함이 끝이 없었다.)
62 (조선이 공자를 섬겨 중국의 예를 따라 깨닳았으나, 신라가 가야를 정벌한 예를 깨닳지 못했고 고려가 제주를 다스린 것을 깨닳지 못하여 대마도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였으니, 이는 자국의 역사를 깨닳지 못함과 같다.
63 또한 고려가 백제를 두려워 한 것이 신라가 가야를 다스린 예와 다르니 훗날 대한민국에 까지 그 영향이 미치었고
64 신라와 백제의 싸움은 고려와 조선을 거쳐 대한민국 60년에 이르러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으니 통탄할 일이다.
65 고려와 조선이 백제를 탓하듯 대마도와 여진을 신민으로 알았어도
66 여진을 야인이라 하고 대마도 신민을 왜놈이라 하여 하나로 만들지 못하였으니
67 이들이 정녕 한 국가의 왕과 신하라 할 수 있을까. 이것은 모두 중국의 예를 따른 까닳이다.
68 또한 현재의 통치자들과 관료들이 이와 같으니 한 나라의 지도자라 할 수 있을까)
10 ○ 세종 5년(1423) 2월 28일에 황해도 경차관이 계하기를 "연해의 각 고을에 공(貢)바치는 소금이 2백 55석이 남아 있으니, 각 고을의 실농한 인민에게 나누어 줄 것입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2 ○ 6월 6일에 의금부에서 계하기를 "금성 현령 이훈, 감고 김거상, 윤생사 등이 진제를 잘하지 못하여 백성을 굶어 죽게 만들었으므로, 곤장 1백 대에 처하소서." 하니,
3 이훈에게는 속(贖)받지 말고 곤장 90대에 처하고, 나머지는 법대로 처단하라고 명하였다.
4 ○ 10일에 예조 판서 황희가 계하기를 "고양현에 굶어 죽은 사람이 있다고 하여 이극복을 명하여 가서 살펴보게 하였더니,
5 사비(私婢) 모란의 모자(母子) 세 사람이 굶주리어 부종이 났고, 소동(小童) 1명은 굶어 죽었다 합니다." 하니,
6 의금부에 명하여 현감 김자경을 추핵하니, 곤장 80대에 좌죄하였다.
7 ○ 호조에서 경기 감사의 관문에 의하여 계하기를 "환상(還上)으로 군자감의 묵은 쌀 2천 석과 유후사 창고의 묵은 쌀 1천 석을 더 주기를 청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8 ○ 10월 5일에 사헌부에서 남녀가 다른 길을 걷게 하고, 저자를 같이하지 못하도록 청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9 ○ 8일에 통사 김을현이 요동에서 돌아와 계하기를 "7월 24일에 황제가 친히 6군을 거느리고 북으로 달달을 정벌하러 갔다." 하였다.
10 ○ 12월 29일에 유관과 윤회에게 명하여 고려사를 개수(改修)하게 하였다.
11 처음에 정도전, 정총 등이 전조(前朝)의 역사를 편수함에 있어, 이색, 이인복이 저술한 금경록(金鏡錄)을 근거로 하여 37권을 편찬하였더니,
12 정도전이 말하기를 "원왕(元王) 이하는 비기어 참람하게 쓴 것이 많다 하여,
13 즉 종(宗)이라고 일컬은 것을 왕이라 쓰고,
14 절일(節日)이라고 호칭한 것을 생일(生日)이라 썼으며,
15 짐(朕)은 나[予]로 쓰고, 조(詔)를 교(敎)라 썼으니,
16 고친 것이 많아서 그 실상이 인멸된 것이 있고,
17 또 운경은 도전의 부친으로, 별다른 재능과 덕행도 없었는데도 전(傳)을 지어 드러내고,
18 정몽주, 김진양은 충신인 것을 가차없이 깎고 몰았으며,
19 오직 자기의 일은 비록 작은 것이라도 반드시 기록하여, 그 옳고 그른 것을 정한 것이 좋아하고 미워하는 데서 나왔고, 착하다고 한 것과 악하다고 한 것이 예 역사를 그르쳐 놓았다." 하였다.
20 진산군 하윤이 이르기를 "도전의 마음씨의 바르지 못함이 이와 같이 극심한 지경에 이르렀다." 하고,
21 조정에 건의하기를 "옛날 역사에 상고하여 거기에 붙여 쓸 것은 더 써넣고, 없앨 것은 삭제하여야 한다." 고 하더니, 그만 이것을 마치지 못하고 돌아갔던 것이다.
22 ○ 세종 6년(1424) 1월 29일에 전 판부사 정역의 집 종이 영의정 유정현의 장리(長利) 돈을 꾸어서 썼는데,
23 연사가 흉년으로 가난하고 궁핍하여 미처 갚지 못하였더니,
24 유정현이 구노(具奴)의 집에 보내어 그의 가마와 솥을 모조리 빼앗아 왔다.
25 정역이 효령 대군에게 고하여 정현에게 도로 내어줄 것을 청하였다.
26 효령이 정현의 아들 총제 유장을 불러 말하기를 "네 아비가 지위가 수상에 이르러 녹 받는 것이 적지 아니하고,
27 또 주상의 백성을 아끼어 주시는 뜻을 몸받아 살게끔 구휼하여 주는 것이 그의 직분이어늘,
28 이제 궁핍한 종놈의 솥과 가마를 빼앗아 가니, 수상된 본의가 어디에 있는가." 하였다.
29 장이 말하기를 "저의 아비가 저의 말을 듣지 아니한 지 오래 되었으니, 다른 사람을 시켜 고하는 것이 좋을 줄로 아옵니다." 하였다.
30 정역은 효령대군 부인의 부친이다. 정현의 사람된 품이 성질이 심히 인색하여 추호도 남을 주는 일이 없고,
31 동산에 있는 실과도 모두 시장에 팔아서 조그마한 이익까지 계산하며,
32 그의 반인(伴人)으로, 능히 장리 준 돈을 다 받아 들인 자에게 상을 주며,
33 역승(驛丞)의 임명까지 하게 되어, 이로써 부자가 되어 곡식을 쌓은 것이 7만여 석이나 되었다.
34 백성들이 원망하기를 "비록 죽을망정 다시는 영의정의 장리는 꾸어 쓰지 않겠다." 하였다.
35 (이러므로 전 판부사 정역이나, 영의정 유정현이나 동색이였던 것이다.)
36 ○ 4월 17일에 병조에 전지하기를 "병선(兵船)은 국가에서 해구(海寇)를 방어하는 기구로서 그 쓰임이 가장 중한 것이다.
37 송목을 양성하는 기술과 병선을 수호하는 방법을 상세하게 갖추어서 알리라." 하였다.
38 ○ 8월 10일에 이조 판서 허조가 계하기를 "공사(公私)의 계집종이 양민 남편에게 시집가서 낳은 자식은 아비를 따라 양민이 되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39 (허조는 진작에 내쳐야 할 사람인데, 세종은 어찌 하여 가까이 두고 있는 것인가. 이러한 자를 탄핵하지 않고 정쟁을 일삼으니 대소신료들이 모두 동색이기 때문일 것이다.)
40 ○ 11일에 동지춘추관사 윤회가 교정하여 편찬한 고려사를 올리다
41 ○ 10월 26일에 최씨와 박씨를 선택하여 후궁에 들이었다.
42 최씨는 최사의의 딸이요, 박씨는 박강생의 딸이다. 최씨와 박씨의 시녀가 여덟, 시종 환자가 또한 여덟이었다.
43 ○ 27일에 양녕 대군이 병권을 장악하려 한다는 난언을 한 갑사 지영우를 처벌하다.
44 ○ 30일에 임금이 여러 대신에게 이르기를 "수령이 그들의 경내에서 가난하여 혼가의 시기를 놓친 자와 장사를 미루는 것을 불쌍히 여겨,
45 흔히 혼인에 필요한 물건과 장사지내는 비용을 내어주게 되는데,
46 그가 죄를 짓게 될 때 이것까지 포함하여 장물로 따지는 것은 진실로 옳지 못한 일이다. 이를 의논하여 아뢰라." 하였다.
47 ○ 세종 7년(1425) 2월 10일에 병조에서 함길도 감사의 관문에 의하여 계하기를 "함흥주사 박흥손이 세량(稅糧)을 독촉하기 위하여
48 별감 신말응개를 거느리고 최천봉의 집에 이르니,
49 천봉의 갑사 이흥민이 종 3인을 거느리고 흥손 등을 잡아 결박 구타하여 상해에 이르게 하고,
50 또 거리에 순시한 뒤에 뽕나무에 매달았으니, 그 방자함이 이보다 심할 수가 없습니다.
51 갑사는 스스로 '금병(禁兵)이라 감사가 직접 처단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두려워하거나 기탄하는 바가 없는 것입니다.
52 만약 이를 방금(防禁)하는 조치가 없다면, 아마도 후일에 이와 같이 횡패하는 자가 잇달아 생겨날까 염려되오니,
53 청컨대, 지금부터 하번(下番)한 갑사에 이와 같은 자가 있으면, 감사가 체포 수감하고, 이를 아뢰어 보고하여 죄를 결단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54 ○ 3월 20일에 황희가 일찍이 남원 부사 이간이 보낸 유지(油紙) 안롱(鞍籠)을 받은 바 있었는데,
55 이 때 이르러 일이 발각되어 피혐(避嫌)하였다.
56 당초에 전라도 찰방 이종규가 남원에 이르러 이간이 여러 사람에게 물품을 보낸 사문서를 수색해 얻은 이를 조사한 바,
57 서울과 지방의 관리가 수뢰를 범한 자가 많았으나, 유독 권귀 층에는 관여된 것이 없으니,
58 사람들이 그 문서에서 삭제된 여부를 자못 의심하던 중 오직 황희만이 자수(自首)하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마침내 은폐하고 말았던 것이었다.
59 이로 인하여 시론이 황희만을 무던하게 여겼으며,
60 대제학 변계량이 사서(私書)로 죄를 청하였으나, 종규가 이를 비호하여 일이 끝내 발각되지 않았다.
61 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그를 곧지 못하다고 하였다. 종규의 사람됨이 겉으로는 염결 근검한 것 같았으나 안으로는 실상 아곡(阿曲) 음험(陰險)하였다.
62 (변계량이 죄를 청하였음에도 이종교의 일을 들어 일이 발각되지 않았다고 하였으니 사관이 변계량을 미워 하였음이 분명해 진다. 전에 사관이 변계량이 하늘의 제를 올리는 것에 대해 변계량을 나쁘게 묘사하여 혹 하였으나 이를 보니 확실해 진다.)
62 ○ 29일에 경연에 나아갔다. 임금이 대제학 변계량을 불러서 명하기를 "유순도와 더불어 세자의 배필을 점쳐서 알려라." 하였다.
63 계량이 약간 사주(四柱)의 운명을 볼 줄 알았고, 순도는 비록 유학에 종사하는 자이나 순전히 음양 술수와 의술(醫術)로 진출한 자였다.
64 (변계량이 음양술수를 사용하는 것은 비류하나, 의술을 사용하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닌가? 또한 그는 단군이 하늘의 자손임을 남겼고 하늘에 제사하는 풍습을 남겼으니, 민족의 혼을 살린 사람이라 할 수 있다.)
65 ○ 호조에서 경시서 첩정에 의거하여 계하기를 "저자의 사람들이 만약 돈을 쓰지 아니하고 쌀이나 포목이나 또는 여러가지 물건으로 서로 무역하는 자는,
66 임인년의 전례에 의거하여 직접 잡아 가두고, 이 사실을 널리 보여서 여러 사람들을 경계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67 ○ 9월 28일에 수행한 정연, 맹겸이 계하기를 "장군 절제사 한확이 전감무 김성정의 첩의 딸 고미와 간통하였으니 논핵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68 임금이 장군 절제사를 갈아 임명하고, 확은 서울로 돌아오게 하였다.
69 이 계집은 일찍이 시녀로 궐내에 있던 것을 어미 집에 놓아 보낸 것인데, 확이 간통하다가 그 계집의 어미가 고소하여 발각된 것이었다.
70 헌사에서 핵실하여 논죄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면서
71 "이 사람은 내가 죄줄 수 없는 사람이다." 하였다.
72 (한확은 청주사람으로 1417년 누이가 명나라 성조의 후궁이 되고 이어 여비가 되었다.
73 작년(1424)에 성조가 죽자 여비도 자결하였는데, 그 다음 황제의 후궁으로 또 한확의 누이가 뽑혔다.
74 후에 수양대군을 세조로 세워 1등공신이 되고, 명에 세조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돌아오다가 죽는다.)
75 이러하니, 한확의 만행이 어떠하든 세종이 죄를 주기 힘들었다.)
76 ○ 12월 16일에 예문 제학 윤회가 윤대할 때, 임금이 회에게 이르기를 "이제 대소 관리들이 술잔치를 벌이고 떼를 지어 마시건만,
77 사헌부가 규탄하지 아니하니 정사의 밝지 않음과 기강의 해이함이 이보다 더할 수 있겠느냐." 하였다.
78 19일에 임금이 대언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듣건대 떼를 지어 술 마시는 것이 금년에 가장 성행한다 하더구나." 하였다.
80 ○ 이 해 4월 18일에 평안도 감사에게 전지하기를 "석등잔 대,중,소 아울러 30개를 이제 가는 사직 장영실이 말하는 것을 들어 준비하라." 하였다.
81 5월 8일에 사헌부에서 계하기를 "이간(李侃)의 뇌물을 받은 사람 중에서 먼저 황현, 이승직, 장영실 등을 추고하고, 죄를 정하온즉, 장물이 관(貫) 이하이므로 태 20도에 해당합니다." 하였다.
11○ 세종 8년(1426) 1월 25일에 예빈 판관 문방귀가 아뢰기를 "신은 제주에서 출생한 몸으로 16세에 서울 구경을 와서,
2 장차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업적을 계승하며, 충성과 효도를 극진히 할 생각으로 성균관에 입학하여,
3 을유년에 처음 벼슬에 올랐다가 바로 아버지의 상사를 당하여 여묘(廬墓)에 살며 상기를 마쳤었는데,
4 국가에서 신이 효행이 있다고 잘못 들으시고 금구 현령에 임명하시와,
5 거의 만기가 될 무렵 또 어머니의 상사를 당하여 삼년상을 마치고, 지난해 10월에 궐하(闕下)에 나와서 뵈왔더니,
6 12월 초4일에 과분하게 성상의 은혜를 받자와 특진으로 예빈 판관에 임명시키오니, 실로 분수에 넘치옵니다.
7 비록 몸이 가루가 될지라도 보답하올 바를 알지 못하겠나이다.
8 신의 부모는 모두 벌써 죽었사오나, 신의 처자만이 홀로 제주에 살고 있는데, 형제간도 없고 달리 의지할 곳이 없사오며,
9 비록 나오려 할지라도 여자의 여행이라 혼자서 바다를 건너기가 어렵겠사오니,
10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신에게 돌아가서 처자를 데리고 나와서 서울에서 거주하게 하여 주시오면,
11 이런 다행이 없을까 하나이다." 하니, 명하여 이조에 회부하였다.
12 ○ 2월 9일에 예조판서 이맹균, 이조판서 허조가 사직을 청하니 명하여 이조에 회부하였다.
13 ○ 5월 18일에 좌의정 이직 이하 정부, 육조의 참판 이상의 관원들이 대궐에 나아가 계하기를,
14 "어제 신 등이 소를 올렸는데, 다만 천안에 제명하는 것만 명하셨으니, 신 등의 마음에 미안함이 있습니다. 바라옵건대 윤허하시고 시행하소서." 하니,
15 임금이 말하기를 "태종께서 시행한 일은 내가 변경할 수 없고, 또 그 천안을 삭제하였다면 안씨는 이미 왕비의 어머니가 되니, 비록 봉작이 없다 하더라도 무엇이 혐의스럽겠는가." 하였다.
16 또 계하기를 "천안에서만 삭제하면 서인이 될 뿐인데, 국모의 어머니로서 어찌 서인이 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마지 못하여 그대로 따랐다. (작첩을 돌려 주었다.)
17 ○ 6월 4일에 공비가 어머니 안씨 집에 행차하여 연회를 베풀고, 유시에 궁궐로 돌아왔다.
18 ○ 6월 24일에 의금부에서 계하기를 "시녀(侍女) 수청이 어고의 백사와 채선을 도적질했으니, 형률에 의하면 참형에 처하고, 가산은 관청에 몰수하는 데 해당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19 지사간 고약해가 계하기를 "신(臣)이 생각하건대 사람을 죽이는 것은 경솔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20 후세의 중주(中主)가 그의 사사로운 노여움에서 이를 핑계하여, 문득 조옥(詔獄)을 내리어 경솔히 사형을 집행하게 된다면 법을 전하는 소이(所以)가 못됩니다." 하니,
21 임금이 이 말을 옳게 여기어 듣고 즉시 의금부에 명하여 또한 세 번을 잘 살펴보고 아뢰게 하였다.
22 ○ 8월 2일에 형조에서 계하기를 "경상도 사천현 사람 잉읍실이 백정 박문의 아내 웅덕을 발로 차서 낙태하여 죽였으니, 형률에 응당 교수(絞首) 해야 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23 (잉읍실의 이름이 후대의 모든 사람이 알게 될지 어찌 알았겠는가? 현재의 사람들도 후손과 모든 사람이 그대들의 이름을 알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악행을 보아 깨우치는 것이지 선행만을 보아서는 깨우치지 못한다.)
24 ○ 11월 5일에 임금이 일찍이 예조에 명해서 삼국 시조의 사당을 세우도록 했는데,
25 이때에 이르러 판서 신상이 계하기를 "주나라 말년에 칠국(七國)이 자웅을 다투어 법을 정하지 못했사온대,
26 우리 동방도 통일되기 전까지는 삼국의 아귀다툼이 마치 주나라 칠국 시대와 같지 않았습니까." 하니,
27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옛 일을 상고하면 우리 동방은 삼국 시조가 있기 전에는 십이한과 구한이 있어서 나라의 경계가 분분했으니,
28 그렇다면 삼국의 시조가 이를 다소 합쳐 놓은 것은 그 공로가 진실로 적지 않으니, 마땅히 의사를 세워서 그 공을 갚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29 ○ 11월 25일에 허조로 이조 판서를, 이맹균으로 병조 판서를 삼았다.
30 ○ 세종 9년(1427) 1월 10일에 예조에서 경상도 감사의 관문에 의거하여 계하기를, "지금 나온 대마도의 왜녀(倭女) 아마이소가 말하되,
31 '아들 삼미삼보라와 딸 감인주와 남편 고라시라가 기해년에 장사를 하려고 와서 부산포에 정박했는데,
32 국가에서 대마도를 정벌할 때에 각 포에 거류하던 왜인들을 각 고을에 나누어 소속시켰습니다.
33 노녀는 그들의 간 곳을 알지 못하여 그리워하여 마지 않았는데,
34 지금 아들 삼미삼보라는 봉화군에 있고, 딸 감인주와 남편 고라시라는 순흥부에 있다는 말을 듣고,
35 기어코 한 곳에서 목숨을 마치고자 하여 찾아 왔습니다.'라고 합니다." 하니,
36 임금이 그 뜻을 불쌍히 여겨 아마이소에게 순흥에 살도록 하고, 삼미삼보라를 옮겨서 어머니와 여동생과 같이 살도록 하였다.
37 ○ 6월 12일에 저화를 사용하지 아니한 까닭으로 죄를 받았던 사람들의 관에 몰수됐던 재물을 모두 도로 내어 주었다.
38 ○ 6월 21일에 좌의정 황희와 우의정 맹사성은 관직을 파면하고,
39 서선은 직첩을 회수하고, 신개는 강음으로, 조계생은 태인으로, 안숭선은 배천으로 각각 귀양보내고,
40 서달은 장 1백 대에 유 3천 리를 속으로 바치게 하고, 이수강은 장 1백 대에다 유 3천 리에 처하여 광양으로 보내고,
41 조순은 장 1백에 도 3년을 속으로 바치게 하고, 이운과 윤환은 각각 장 1백에 도 3년을 속으로 바치게 하고,
42 노호는 장 90에 도 2년 반을 속으로 바치게 하고, 곽규와 강윤은 각각 장 1백과 도 3년에 처하고, 신기는 장 1백에 처하였다.
43 서달은 서선의 아들이며 황희의 사위인데, 모친 최씨를 모시고 대흥현으로 돌아가는 길에 신창현을 지나다가
44 그 고을 아전이 예로 대하지 않고 달아나는 것을 괘씸하게 여기어, 종 잉질종 등 세 사람을 시켜 잡아 오라고 하였는데,
45 잉질종이 길에서 어떤 아전 하나를 붙잡아 묶어서 앞세워 가지고 그에게 달아난 아전의 집으로 인도하게 하였다.
46 (이 일로 좌의정, 우의정 및 많은 사람이 파면과 귀양에 가게 되었으니, 예와 권위라는 욕심이 무엇인가.)
47 아전 표운평이란 자가 이것을 보고 말하기를 "어떠한 사람인데 관원도 없는 데서 이렇게 아전을 묶어 놓고 때리느냐." 하니,
48 종들이 그 말에 성이 나서 표운평의 머리채를 잡은 채 발로 차고 또 큰 작대기로 엉덩이와 등줄기를 함부로 여남은 번 두들기고서
49 끌고 서달이 있는 데까지 왔는데, 표운평이 어리둥절하여 말을 못하는 지라,
50 서달(황희의 사위)이 화김에 잘 살펴보지 않고 말하기를 "일부러 술취한 체하고 말을 안하는구나." 하면서,
51 수행원 서득을 시켜 되려 작대기로 무릎과 다리를 50여 번이나 두들겼다.
52 표운평이 그 이튿날 그만 죽어버렸는데, 그 집에서 감사에게 고소하니,
53 감사 조계생이 조순과 이수강을 시켜 신창에서 함께 국문하게 하였다.
53 조순과 이수강이 서달이 주장하여 때리게 한 것으로 조서를 작성하여 신창 관노에게 주어 감사에게 보고하였다.
54 그때에 황희가 찬성으로 있었는데, 신창은 바로 판부사 맹사성의 본고향이므로 그에게 부탁하여 원수진 집과 화해를 시켜 달라 하였다.
55 표운평의 형 복만이란 자가 때마침 서울에 왔기로,
56 맹사성이 불러 오게 하여 힘써 권하기를 "우리 신창 고을의 풍속을 아름답지 못하게 하지 말라." 고 하고,
57 또 신창 현감 곽규에게 서신(서달의 아비)을 보내어 잘 주선해 주도록 하고,
58 서선도 또한 곽규와 이수강이 있는 곳에 나아가서 서달이 외아들임을 말하여 동정받기를 청하고,
59 노호는 서선의 사위인지라, 이웃 고을 수령으로서 혹 몸소 가기도하고, 혹 사람을 시켜서 애걸하기도 하였다.
60 이에 곽규가 노호에게 내통하여 일러주기를 "차사관의 보고가 막 떠났다." 하므로,
61 노호가 길목을 질러 그 서류를 손에 넣었으며,
61 강윤이 또한 최씨의 겨레붙이인지라, 원수진 집을 꾀어 이익을 줄 것을 약속하고 사화(私和)를 권하매,
62 복만이 역시 뇌물을 받고 맹사성과 곽규의 말대로
63 원수진 집에 가서 달래어 이르기를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날 수가 없는 것이고, 본고을 재상과 현임 수령의 명령을 아전으로서 순종하지 않다가 나중에 몸을 어디다가 둘 것이냐." 하여,
64 드디어 사홧장을 써 받아 가지고 표운평의 아내에게 주어 신창(新昌)에 바쳐서 온수현으로 보내니,
65 이수강이 조순과 함께 의논하여 다시 관련된 증인을 모아 가지고
66 드디어 조서를 뒤집어 만들어 서달을 면죄되게 하고 죄를 잉질종에게 돌리어 감사에게 보고하였다.
67 감사가 윤환과 이운을 시켜 다시 국문하게 하였는데, 윤환 등도 또한 선과 호와 수강의 청한 말을 받았는지라 그 안대로 회보하니,
68 감사 조계생과 도사 신기도 다시 살펴보지 않고 형조에 그대로 옮겨 보고하였으며,
69 형조 좌랑 안숭선은 7개월 동안이나 미루적거리다가 다시 더 논하지도 않고 참판 신개에게 넘기니,
70 역시 자세히 살피지 아니하고 서달을 방면하고,
71 옥사는 잉질종 등에게 돌아가게 되어 법에 비추어 정부에 보고하니, 정부는 그대로 위에 아뢰었는데,
72 임금이 사건의 조서에 어긋난 점이 있음을 의아하여, 의금부에 내려서 다시 국문하여 죄를 매기니,
73 서달은 율이 교형에 해당되는데, 임금은 그가 외아들이기 때문에 특히 사형을 감하고 유형을 속으로 바치게 하고,
74 조순은 그 때에 상중이었기 때문에 또한 속으로 바치게 하였다.
75 (황희, 맹사성은 이로 부터 20여일만에 좌의정, 우의정에 복직 되었다.)
76 ○ 7월 1일에 의정부, 예조, 예문관에 전지하기를 "역대의 여러 역사가 비록 한 질이 되지 않더라도 모두 경연으로 보내어 바치라." 하였다.
77 ○ 15일에 겸대사헌 이맹균 등이 상소하기를 "좌의정 황희와 우의정 맹사성은 서달을 구원하고자 하여 죄가 없는 사람에게 죄에 빠지도록 했으니, 대신의 마음씀이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78 원하건데, 서달을 변방의 먼 곳으로 귀양보내어 뒷 사람에게 경계하심이 공도에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79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들의 말한 것이 옳다. 그러나 대신을 진용퇴출시키는 일은 경솔히 할 수 없는 것이다.
80 또 서달이 죄 없는 사람을 부당하게 죽인 것은 광망해서 그렇게 된 것인데,
81 저 옥사를 추국하는 관원이 실정을 알면서도 거짓으로 속여, 사람의 죄를 올렸다내렸다하여 과인을 속였으니, 그 죄는 어찌 중하지 않은가.
82 부모가 늙어 병든 사람이 아닌데도 독자로써 죄를 면한 사람이 다만 서달뿐만은 아니니 앞으로는 다시 말하지 말라." 하였다.
83 (관망하였다 하여 용서할 수 있을까? 다른 사람에게 죄를 넣어, 죽이고자 했으니 임금이 재조사를 명하지 않았다면 두 명을 죽인것과 다름이 없다. 그렇다면 억울히 죽어간 자들이 많았을 것이다.)
84 ○ 8월 4일에 대사헌 이맹균, 집의 김종서 등을 불러 관직에 나아가게 하다
12 ○ 세종 10년(1428) 1월 12일에 양녕 대군 이제가 좌군비의 윤이와 몰래 정을 통하다가 일이 발각되매
2 윤이와 그의 어미 기매를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니,
3 양녕 대군이 윤이가 갇혔다는 소문을 듣고 근심하고 번민해서 병이 났으므로,
4 순성군 이개와 내의 노중례와 환자 이귀에게 명하여 약을 가지고 역마를 타고 이천의 사제로 가게 하고, 조금 후에 윤이를 석방하였다.
5 (이 일로 4월 중순까지 양녕대군에게 죄 주기를 청하는 상소가 끝이 없었다.)
6 ○ 14일에 임금이 안순과 김자에게 이르기를 "양녕이 윤이를 간통한 것이 병신년 무렵이었다고 하나 전혀 거짓말이다.
7 태종께 죄를 얻어 밖으로 내쫓긴 뒤로 작년과 금년 사이에 비로소 간통한 것이다.
8 새해에 접어들어 또한 말하기를, '이보다 앞서 서로 알았다.'고 하니, 실상 나를 속이는 것이다.
9 내가 그것이 사실이 아닌 것을 알고 자세히 추구(推究)하니,
10 문득 분개 하여 글을 올렸으므로 그 언사가 좀 불손하여, 일을 계한 사람이 나오게 된 것이다." 하니,
11 김자가 조용히 계하기를 "양녕이 태종께 죄를 얻어 밖으로 쫓겨나 거처하게 된 것은 오직 여색에 빠졌기 때문이온데,
12 이제 또 허물을 고치지 아니하고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전하께서 우애가 돈독하시기 때문에 은혜를 받고 사랑을 믿기 때문입니다.
13 하물며 그의 상서에 '전하와 영원히 이별입니다.'고 하였으니, 그 말이 너무 심합니다.
14 원컨대 지금부터는 그 접대하는 예절을 엄하게 하여 사랑을 믿고 방자히 굴지 못하게 하소서." 하였다.
15 ○ 갑사 홍택을 의금부로 가두도록 명하니, 양녕과 사통했기 때문이었다.
16 ○ 15일에 의정부 찬성 권진과 형조 판서 노한이 계하기를 "양녕 대군 이제가 사통의 금령을 따르지 아니하고
17 또 세자 때부터 윤이와 간통하였다고 속여 말하여 성상의 총명을 속였습니다. 원컨대 유사에 내려 이를 다스리소서." 하였다.
18 임금이 "양녕이 본디 문사(文辭)에는 부족한데다가
19 다만 윤이를 사랑하여, 사형에 처하지나 아니할까 의심하여, 구원하고자 하여 그런 것뿐이지 원망하는 뜻은 없었다.
20 더구나 형제의 사이에는 마땅히 작은 일로써 급작스럽게 논단 할 수는 없으니 다시 이를 말하지 말라." 하였다.
21 김종서가 양녕 대군의 작록을 회수하고 출입을 금지시킬 것을 상소하다.
22 황희, 안순 등이 양녕 대군을 국문하기를 청하고, 김효정 등이 먼 지방으로 내쫗기를 청하다.
23 ○ 1월 16일에 효령 대군 이보의 가노가 과전의 조를 징수하면서 부당하게 쌀 10석, 콩 7석, 종이 50권과 잡물을 거둔 것이 대단히 많았으므로, 국문하게 하였다.
24 ○ 19일에 대간을 불러 벼슬에 나오라 하니, "신 등이 사직하고 물러났는데, 도로 벼슬에 나오라고 명하시기에 신 등은 감히 다시 청하오니, 원컨대 신 등의 청을 들어주소서." 하였다.
25 20일에 대사헌 김맹성, 좌사간 김효정 등이 양녕의 죄를 여덟 번에 이르도록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했다.
26 22일에 윤이는 장 1백 대를 결정하되, 유 3천 리를 속바치게 하고, 기매는 장 1백 대를 결정하되, 도 3년을 속바치게 하였다.
27 23일에 김맹성, 김효정 등이 양녕의 죄를 청하기를 두세 번에 이르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므로, 대간이 글을 올려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했다.
28 ○ 1월 26일에 호조에서 계하기를 "서울 안과 성 밑 10리에 있는 굶주리는 백성이 무릇 1백 25인이나 되니,
29 원컨대 계묘년의 예에 따라 부근의 동서 활인원의 관원에게 쌀, 콩, 소금, 장을 나누어 주어서 몸소 친히 진제하게 하고,
30 그 나머지의 굶주리는 백성들도 또한 이 예대로 진제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31 ○ 2월 7일에 김맹성을 좌천시켜 형조 참판을 삼고, 김종서를 좌천시켜 전농 윤으로 삼았다.
32 ○ 8일에 좌군비 기매와 그의 딸 윤이를 먼 지방의 관비로 정하도록 명하였다.
33 ○ 23일에 김맹성, 김종서 등을 의금부에 가두도록 명하였으니,
34 일찍이 대원이 되었을 때에 왕거의 아내의 족인들이 나누어 쓴 미곡을 추징하지 않고 이리저리 꾸며 대어 계달하였기 때문이었다.
35 ○ 30일, 처음에 양질이 범죄 사실을 남김 없이 실토하지 아니하고 항거하니,
36 최사강이 말하기를 "이것은 우리들이 마음대로 국문할 것이 아닌데 어찌 자복하지 않는가." 하였다.
37 안순과 신상이 계하기를 "사강이 양질을 시켜 성상께 원망을 돌렸으니, 파면하소서." 하니,
38 명하여 사강의 제조의 직임을 파면하여 사제로 돌아가게 하였다.
39 ○ 3월 13일에 최부, 유맹문이 연명으로 글을 올리기를 "신 등은 양녕 대군 이제의 죄를 번갈아 올려 거의 두달이 되었는데도 윤허를 받지 못했사온데,
40 지금 강무의 행차에 또 순성군 이개를 호종하게 하시니, 신 등은 더욱 실망을 더할 뿐입니다.
41 이제의 작록을 삭탈하고, 이개를 밖으로 내쫓아 신민의 기대를 위로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42 ○ 3월 19일에 임금이 말하기를 "이종직은 장차 형률에 의거하여 과죄 할 것이지마는,
43 안국은 종직의 아들이 자기의 아버지를 고소한 것을 원망하여 고소하였으니, 예상사로서 마땅히 청리 할 수 없다.
44 입법 할 때에 대사헌이 때마침 외방에 있었으므로 알지 못하고 잘못 계 한 것이니 그것을 고치라." 고 하였다.
45 ○ 3월 29일, 별감 장반야가 한을생을 따라 북경에 갔다가 돌아왔는데, 의금부에서 반야에게 양녕에게서 여자종을 받은 까닭을 물으니,
46 반야가 말하기를 "양녕이 어릴 때부터 나를 사랑했기 때문에 이를 준 것이다." 하였다.
47 의금부에서 계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반야가 여자종을 받은 것은 반드시 그 까닭이 있을 것이니, 만약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압슬형을 가하여 국문하라.
48 또한 불로의 말도 전일에 말한 것과 같지 않으니 또한 형벌로 고문하여 실정을 알아 내라." 하였다.
49 4월 1일에 의금부에서 계하기를 "처음에 양녕 대군이 윤이의 고운 맵시를 물었는데,
50 장반야는 그 뜻을 알면서도 즉시 계달하지 아니하였으며,
51 또 김불로를 시켜서 윤이를 양녕 대군에게 데려다 주게 하고,
52 대군이 준 계집종 2명과 황금 20냥을 받고 은밀히 사통하였습니다." 하였다.
53 ○ 4월 5일에 임금이 효령 대군 이하 여러 종친들과 더불어 내전에서 격구하였다.
54 8일에 양녕 대군 이제에게 술 잔치를 내렸다.
55 9일에 홍택, 신장수, 김불로, 장반야 등을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56 최부, 유맹문, 유계문, 이심 등이 계하기를 "장반야는 양녕과 사통하여 황금과 계집종을 받았으니, 죄가 모반에 관계되며,
57 홍택 등도 또한 양녕과 사통하였은즉, 그들의 마음은 반드시 다른 생각이 있는 것이니 석방할 수 없습니다." 하니,
58 임금이 말하기를 "반야는 석방하지 말라." 하였다.
59 ○ 14일에 의금부에서 장반야의 참형을 계하니, 계한 대로 하되, 다만 재산을 관에 몰수하는 것을 면제하고, 연좌된 사람들을 논죄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60 ○ 21일에 대사헌 최부가 계하기를 "홍양생과 유연생에게 장을 쳐서 신문하였으나 다 복죄하지 않았습니다.
61 양생은 처음에 간음 현장에서 붙잡힌 일이 없다고 말하였고,
62 연생과 안영의 노비 등이 말하는 것도 또한 일치하지 아니하여, 지금 아직 진상을 알아내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63 임금이 말하기를 "율문에, '모든 간음 사건은 간음 현장에서 붙잡은 것이라야 죄가 성립된다.'고 하였다.
64 아조(我朝)에서는 비록 간음 현장에서 붙잡지 못하였더라도 그 간음한 정상이 명백하면 죄주는 것도 또한 전례가 있다.
65 그러나 대명률에서 반드시 간음 현장에 붙잡은 자라고 말한 것은, 의심나는 죄를 단죄할까 염려한 것이다." 하였다.
66 안영의 아내인 유장의 딸이 유연생이고, 홍양생은 그의 사촌오빠였다.
67 부(府)가 또 계하기를 "안영의 비부(婢夫) 조원우는 유연생의 오빠인 판관 유중창과 서로 힐난하다가,
68 중창이 소장을 올려, '원우가 나를 힐난하여 말하기를, '이것이 밝은 시대냐.'하며, 당세(當世)를 비방하였습니다.'고 하기에,
69 원우를 국문하였더니, 원우가 곧 말하기를, '내가 중창을 힐난하며 말하기를, '밝은 태평 시대에 어찌 이같이 악한 짓을 하는가.'하였습니다.' 합니다.
70 증인들을 모두 심문하였으나, 말이 각기 일치하지 않아서 어느 것에 좇을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71 임금이 말하기를 "원우는 천인(賤人)이다. 과연 중창의 말과 비록 같다고 한들 어찌 국정(國政)을 비방한 것으로 논죄할 수 있겠는가.
72 다만 천한 노비로서 중창을 능욕한 것은 죄주어야 하겠다." 하였다.
13 ○ 윤 4월 11일에 임금이 평안도, 함길도의 두 도가 농사에 소활한 것을 염려하여 승정원에 명령을 내려,
2 두 도의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농작의 상황을 묻게 하고, 또 농사에 대한 글을 알려 주게 하였다.
3 ○ 윤 4월 13일에 양반의 딸로 부모가 모두 죽어 시집 못가고 있는 경우에 국가에서 혼수를 보조하게 하다
4 ○ 윤 4월 15일에 임금이 말하기를 "서로 간통한 뒤에 본부가 쫓아가 죽였으면, 비록 간음 현장에서 잡아 죽인 것은 아닐지라도 또한 현장에서 살상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5 투구 살인한 자는 사령을 만나면 죽음을 면할 수 있으나, 사령이 없으면 당연히 사형되어야 할 것이다.
6 지금 방문 밖으로 쫓아가 죽인 자를 투구 살인에 견주어 죄를 준다면 사람의 정리에 맞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다시 상고하여 아뢰라." 하였다.
7 ○ 5월 14일에 의화 궁주 안씨가 졸하니, 부의로 쌀과 콩 각 1백 석을 하사하였다. 안씨는 즉 고려 공민왕의 정비이었다.
8 ○ 9월 1일에 임금이 좌우에게 이르기를 "서리가 일찍 내려 콩이 여물지 않았는데 그런가." 하니,
9 호조 판서 안순이 대답하기를 "늦게 심은 콩은 혹 여물지 않은 것도 있사오나, 일찍 심은 것은 이미 여물었나이다." 하였다.
10 ○ 3일에 형조에서 계하기를 "청송 사람 양녀 가이는 젊었을 때에 사노 부금과 간통하여 자식까지 있었는데,
11 관에서 양민이 천인과 서로 혼인했다 하여 이혼시켜 왜놈 손다에게 시집보냈습니다.
12 그 뒤에 가이가 부금과 이웃 사람 이내근내와 함께 손다를 죽였사오니,
13 가이는 율에 의하여 능지 처참해야 할 것이오나, 그러나 처음에 관의 위엄에 눌려 자식이 있는 남편을 버리고 왜놈에게 시집간 것이오니,
14 음란하고 방자해서 남편을 죽인 예(例)로 논죄할 수 없사오니, 청컨대 교형에 처하는 율로 비부(比附)하고,
15 부금은 참형에 처하고, 내근내는 교형에 처하소서." 하니,
16 명하여 가이에게는 한 등을 감하게 하고, 그 나머지는 계한 대로 따랐다.
17 (간통한 것인가? 혼인한 것인가? 아이까지 낳은 부부간의 정을 강제로 떼어낸 조선의 시대상이 가장 잘 표현되어 있다.)
20 ○ 세종 10년 10월 3일, 임금이 일찍이 진주 사람 김화가 그 아비를 살해하였다는 사실을 듣고, 깜짝 놀라 낯빛을 변하고는 곧 자책하고
21 드디어 여러 신하를 소집하여 효제를 돈독히 하고, 풍속을 후하게 이끌도록 할 방책을 논의하게 하니,
22 판부사 변계량이 아뢰기를, "청하옵건대 효행록(孝行錄) 등의 서적을 널리 반포하여
23 항간의 영세민으로 하여금 이를 항상 읽고 외게 하여 점차로 효제와 예의의 마당으로 들어오도록 하소서." 하였다.
24 이에 이르러 임금이 설순에게 이르기를 "이제 세상 풍속이 박악(薄惡)하여
25 심지어는 자식이 자식 노릇을 하지 않는 자도 있으니, 효행록을 간행하여 이로써 어리석은 백성들을 깨우쳐 주려고 생각한다.
26 이것은 비록 폐단을 구제하는 급무가 아니지만, 그러나 실로 교화하는 데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이니,
27 전에 편찬한 24인의 효행에다가 또 20여 인의 효행을 더 넣고, 전조와 및 삼국 시대의 사람으로 효행이 특이한 자도 또한 모두 수집하여
28 한 책을 편찬해 이루도록 하되, 집현전에서 이를 주관하라." 하니,
29 설순이 대답하기를 "효도는 곧 백행(百行)의 근원입니다.
30 이제 이 책을 편찬하여 사람마다 이를 알게 한다면 매우 좋은 일입니다.
31 그러하오나 고려사로 말씀하오면 춘추관에 수장되어 있어 관 밖의 사람은 참고하여 살펴볼 수 없사오니, 청컨대 춘추관으로 하여금 이를 초록해 보내도록 하소서." 하였다.
32 (세종이 말하기를 '효행록을 간행하여 이로써 어리석은 백성들을 깨우쳐 주려고 생각한다' 하였으니 효행록은 한문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 한문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언문이 필요 하다 생각했을 터이다. 이로서 이 일이 원인이 되어 한글 창제를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33 ○ 11월 3일에 형조에서 계하기를 "예천 사람 장영기의 비부(婢夫) 도라대는 그의 주인의 아내 내은지와 간통하였사오니,
34 청컨대 율에 의하여 도라대는 교수형에 처하고, 내은지는 장형 1백 대를 속으로 거두시고 3천 리 밖으로 유배시키소서." 하니,
35 임금이 말하기를 "도라대는 항상 가장의 아내와 더불어 같이 김도 매고 방아도 찧는 등의 일을 하다가 이 때문에 서로 정을 통하게 된 것이니, 이것은 반드시 천한 자의 집일 것이다.
36 도라대의 죄는 용서할 만하나, 그러나 율문에 이르기를, '고공인(雇工人)이 가장의 아내를 간통한 자는 교형에 처한다.' 하였으니,
37 만약에 천한 자라고 하여 이를 관대히 한다면 뒤에 다시 이와 같은 자가 있을 것이요,
38 율에 의하여 죄준다면 법을 쓰는 것이 고르지 않을 것이다.
39 그러나 마땅히 율에 의하여 죄를 단행하여 후일에 경계하라." 하니, 드디어 계한 대로 시행하였다.
40 ○ 세종 11년(1429) 1월 16일에 임금이 대신들에게 이르기를 "이각이 말하기를, '명나라 황제가 조선에 군사를 청하여 달단을 정복하려고 한다는 말을 들었다.' 하니, 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니,
41 허조가 대답하기를 "원나라 조정에서도 청병한 일이 있었는데 우의정으로 치사한 유관이 친히 그 일을 보았었습니다." 하였다.
42 임금이 말하기를 "부득이하여 이에 응하게 된다면 쓸 만한 병사들을 뽑아서 보내는 것이 옳을 것이다.
43 그러나 우리 나라는 산천이 험준하고, 인물(人物)이 선소(鮮少)하니,
44 명나라 조정에 말하여서 면하지 못하게 된 연후에나 이에 응해야 할 것이다.
45 이번에 온 사신이 성지라 칭하고 옥등과 구아를 요구하는데, 구아를 구하는 것은 사실인 듯하나 옥등은 사실이 아닌 듯하니,
46 옥등을 사신으로 하여금 가지고 가서 바치게 하고, 주본은 사은하러 입조하는 최득비의 사위 편에 부치는 것이 어떠할까.
47 이와 같은 뜻을 사신에게 넌지시 떠 보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48 ○ 3월 4일에 중부 장통방 민가에서 실화하여 40여호가 연소하였다.
49 5일에 임금이 화재가 났다는 소문을 듣고 깜짝 놀라며 사냥하는 것을 보지 아니하였다.
50 예조에 전지하기를 "환궁할 때에 각전, 각궁 및 의정부와 육조는 풍정을 올리지 말라." 하고 매장원에 머물렀다.
51 6일에 환궁하면서 곧 호조에 전지하기를 "화재를 당한 각집을 자세히 조사하고, 병오년의 예에 의하여 진제할 미곡을 주라." 하였다.
52 ○ 5월 16일에 농사직설을 찬술하게 하였다. (이는 다음해에 각도에 반포하였나 세종 19년에 이르러 농사직설을 백성에게 권유하도록 했으나 강제하지 못하고 점차적으로 흥행하게 했다.)
53 ○ 6월 16일에 임금이 대언 등에게 이르기를 "중국은 남녀의 분별이 있기 때문에 비록 자매 사이라도 서로 보지 못하지만,
54 우리 나라의 풍속은 자매를 서로 보는 것으로 아름다운 풍속을 삼기 때문에 자주 이와 같은 일이 있게 되니, 마땅히 정실(情實)을 명백히 분별해야 될 것이라." 하였다.
55 ○ 23일에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의 풍속은 비록 무복지친이라도 서로 만나 보는 것이 예의이므로,
56 간통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자주 있었다. 무복지친은 서로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57 맹사성이 "사촌이면 벌써 무복지친이 되니 이렇게 서로 보지 못하게 한다면 혹시 풍속을 박하게 하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58 임금이 "차라리 풍속이 박하게 하더라도 남녀의 분별이 뚜렷이 하여 서로 관계가 없도록 하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는가." 하였다.
59 ○ 27일에 전지하기를 "입직한 군사가 병이 있으면 혜민국과 제생원으로 하여금 약을 지어서 병조로 보내어 입직한 의원에게 전하여 구료하게 하고 일정한 규정으로 하라" 하였다.
60 ○ 7월 4일에 예조에서 아뢰기를 "신라, 고구려, 백제의 시조에 대해서는 이미 사당을 세웠으니, 청하건대 사전에 기재하고 치제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61 ○ 11일에 형조 판서 김자지가 아뢰기를 "15세 미만인 사람이 남의 서속을 한 말쯤 훔쳤습니다.
62 장형에 처하자니 미성년이고, 자자에 처하자니 이미 장형도 하지 않는 사람이며, 또한 율에 해당한 조문이 없습니다." 하니,
63 임금이 말하기를 "나이가 어려 사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어쩌다가 훔친 것을 따진다면 무엇하겠는가.
64 또 율에도 이러한 조문이 없으니, 이것이 바로 의심나는 일이라는 것이다. 불문에 붙이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65 허조도 아뢰기를 "죄가 의심스러우면 가볍게 처리하라고 하였으니, 불문에 붙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66 신상이 아뢰기를 "옳지 않습니다. 죄가 의심스러우면 오직 가볍게 처리하라고 한 것은 이런 것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67 이미 남의 물건을 훔치고 붙잡혔다면 의죄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지금 자자하지 않는다면 뒤에도 징계함이 없어서 또 다시 할 것입니다." 하였다.
68 임금이 말하기를 "나도 경의 뜻을 알고 있다. 비록 그러하나 율에 해당한 조문이 없으니 이것은 의죄(疑罪)인 것이다.
69 의정부와 여러 조가 함께 다시 의논하여 아뢰어라." 하였다.
70 ○ 7월 20일에 근정전에 거둥하여 하교하기를 "마땅한 덕행은 생각지 아니하고 남편의 달콤한 사사로운 총애만을 다투어 바라는 이가 있게 되었다.
71 심한 자는 아양을 부리는 방법을 쓰며, 압승(壓勝)의 술법으로써 독점하려고 하다가 폐출되는 일을 재촉하게 된다.
72 뜻밖에도 김씨가 미혹시키는 방법으로써 압승술을 쓴 단서가 발각되었다.
73 과인이 듣고 매우 놀라 즉시 궁인을 보내어 심문하게 하였더니, 김씨가 대답하기를, '시녀 호초가 나에게 가르쳤습니다.' 하므로
74 곧 호초를 불러 들여 친히 그 사유를 물으니, 호초가 말하기를, '거년 겨울에 주빈께서 부인이 남자에게 사랑을 받는 술법을 묻기에 모른다고 대답하였으나,
75 주빈께서 강요하므로 비(婢)가 드디어 가르쳐 그렇게 하면 내가 사랑을 받게 되고 저쪽 여자는 멀어져서 배척을 받는다 하였고
76 호초가 또 말하기를, 그 뒤에 주빈께서 다시 묻기를, 그 밖에 또 무슨 술법이 있느냐'고 하기에 비(婢)가 또 가르쳐 말하였습니다.
77 가르친 두 가지 술법의 전자는 박신의 버린 첩 중가이에게서 전해 들었고, 후자는 정효문의 기생첩 하봉래에게 전해 들었습니다.'라고 하였다.
78 휘빈 김씨를 폐빈하여 서인을 삼았으며, 책인을 회수하고 사삿 집으로 쫓아 돌려보내어서 우리의 가법을 더럽히지 못하게 하였다.
79 국민들의 귀와 눈에 놀라움을 줄 것과 더욱 모든 관료들도 아직 그 일의 시말을 깊이 알지 못하는 것을 염려하기 때문에 이에 알리노라." 하였다.
80 김오문과 이반의 직첩을 거두고, 김중엄의 관직을 파면시켰다. 김오문은 폐빈 김씨의 아버지이고, 김중엄은 그의 형이며, 호초는 이반의 첩의 딸이었다.
81 ○ 9월 6일에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함길도에는 귀화한 야인 등이 죽은 제 형의 아내와 종매를 첩으로 삼아 풍속을 더럽히는 자가 많습니다. 청컨대, 추핵하게 하소서." 하니,
82 추핵하지 말고 소재지의 관원으로 하여금 엄중히 금지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14 ○ 세종 12년(1430) 4월 18일에 판우군부사 변계량이 병으로 사직을 청하니, 그대로 들어주고 인하여
2 전교하기를 "경이 중한 책임을 받고 병으로 말미암아 일을 다스리지 못하는 까닭으로 직무를 사면하고자 하니,
3 내가 어찌 경을 인원수만 채웠다고 하여 사직을 윤허했으리요. 경은 안심하고 병을 조리하라." 하였다.
4 ○ 병조 판서 이수가 졸하였다. 봉산군 사람이었다.
5 젊어서 학문을 좋아하여 게으르게 하지 아니하고 정밀하게 연구하여 강론하니, 당시 사람들의 추앙하는 바가 되었다.
6 술에 취하여 말을 달리다가 떨어져서 이내 죽으니, 나이는 57세였다.
7 성품이 후중(厚重)하여 겉치레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궁하든지 통(通)하든지, 얻든지 잃든지 일찍이 기쁜 빛이나 노여운 빛을 나타내지 아니하며,
8 치산(治産)함을 일삼지 않았으며, 여러 가지로 벼슬을 거쳤으되 항상 빈사의 지위를 띠고 있었으므로 더욱 부지런하고 삼가기를 더하였다.
9 ○ 5월 6일에 충청도 감사에게 전지하기를 "듣건대 도내에 굶주린 백성이 꽤 있다고 하니, 그들을 모두 구호하고 장계를 갖추어 아뢰라." 하였다.
10 ○ 8월 15일에 예조에서 부인들이 외출 시 얼굴을 가리게 할 것을 건의하니 그대로 따랐다.
11 ○ 10월 4일에 임금이 좌우에게 말하기를 "어제 내가 가 본 곳에는 농사가 매우 잘 되지 못하였다." 하니,
12 좌우가 대답하기를 "금년에는 비가 많이 와서 곡식이 많은 피해를 입었사온데,
13 강원도 지방이 가장 심하여 풀뿌리를 먹는 자들이 있사오니, 명년 봄에는 구제를 늦추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였다.
14 21일에 강원도 감사가 아뢰기를 "본도는 수재로 인하여 농사가 잘되지 아니하여 백성의 식량이 부족하오니,
15 금년도의 각 지방의 미납한 공물을 면제하여 주옵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6 ○ 10월 25일에 상정소에서 아뢰기를 "관청에서 복무하는 여종이 아이를 낳을 달과 생산한 후 1백 일 동안은 복무를 면제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7 ○ 병조에서 경상도 감사의 관문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지난 기유년에 나온 대마도의 왜인 여시로와 여매시라 등이 우리 나라에 거주하기를 원하오니, 희망하는 곳에 정착하게 하여 주옵소서." 하니,
18 명하여 "토지, 가옥, 종 식량을 주어 춥고 굶주리지 않게 하고 수령이 늘 돌보아 주게 하라." 하였다.
19 ○ 28일에 형조에 전지하기를 "중앙과 지방의 관리가 절도를 심문함에 있어 전후에 범한 것이 비록 사실과 틀리는 것이 없다 할지라도
20 너무 빨리 서두르기 때문에 신장(訊杖)을 함부로 가하며,
21 혹은 급히 자백을 받기 위하여 마음대로 난장(亂杖)을 행하는 경우도 있고,
22 혹은 죄수가 도피한다고 핑계하고 오래도록 옥에 구류해 두고 핍박하여,
23 이로 인하여 생명을 잃게 하는 경우도 있다 하니, 중앙과 지방에 일러 이런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24 ○ 10월 29일에 임금이 대언 등에게 이르기를 "지난번에 '신문고를 함부로 치는 자에게는 죄를 주라.' 했었는데,
25 이제 다시 생각하니, 이렇게 하면 품은 생각이 있어 아뢰고 싶은 사람도 법을 두려워하여 말하지 못할 것이요,
26 또 어리석은 사람은 이것을 모르고 치게 될 것이다.
27 그러므로 나는 그들에게 죄를 주지 않을 터이니, 경들은 그리 알라." 하고,
28 임금은 또 말하기를 "모든 고신에 50일이 되도록 서명하지 않는 것은 불가한 일이 아닌가.
29 그런즉 그 직무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곧 서명하고, 불가한 사람은 아뢰어 다시 임명하도록 하라." 하였다.
30 지사간 윤수미가 대답하기를 "약간의 과오가 있는 사람에 대하여는 보류해 두고 서명을 하지 않는 것은 그를 징계하기 위한 것이요, 끝까지 서명을 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니,
31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서명하지 않은 자에 대하여 50일 이내에 사유를 갖추어 윤허를 받으라." 하였다.
32 임금은 또 말하기를 "고의로 남의 집에 불을 지른 자에 대하여 주범과 종범을 구별하지 않고 죄를 다스리는 것은 옳지 못하니,
33 주모자는 참형에 처하고 종범은 장 1백 대에, 유 3천리에 처해도 또한 징계될 수 있을 터인데,
34 정부에서 의논하고 모두 참형에 처해야 된다고 하나, 나는 옳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하고,
35 인하여 우대언 김종서에게 명하여 다시 정부에서 의논하게 하였다.
36 ○ 상정소에서 아뢰기를 "따로 사당을 세운 자에게는 증조에게 제사 지낼 때에도 하루의 휴가를 주어 제사를 돕게 하오며, 제사지내는 날에는 아버지를 계승하는 작은 종가에도 그렇게 하시옵소서." 하니,
37 예조에 명하여 정부와 여러 조가 함께 의논하게 하였다. 모두 좋다고 하므로, 그대로 따랐다.
38 ○ 11월 2일에 황희, 맹사성, 허조, 안순 등을 불러 의논하기를 "일찍이 한 말, 한 되 이상의 물품을 매매하는 데는 동전만을 사용하도록 명령하였으나,
39 금년에 경기도가 흉년이 들어서 만일 동전만을 사용하게 한다면, 물자를 가진 사람은 양곡을 바꾸기가 쉽지 않을 터이니,
40 백성이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니,
41 황희 등이 아뢰기를 "전일에 내리신 명령은 다시 거듭 밝히지 마시고, 매매할 때에 물건이 많고 적든 간에 돈을 겸하여 사용하게 하옵소서." 하였다.
42 또 "조회에 복무하는 악공(樂工,음악인)은 경기도 내에 갑오년 이후 양민에게 시집가서 출생한 자와, 간척, 보충군에 출가하여 출생한 자로 뽑았기 때문에,
43 식량을 싸가지고 멀리서 오게 되어 그 일을 감당하기가 어려우니, 이것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니,
44 황희 등이 아뢰기를 "마땅히 서울에 거주하는 자로서 갑오년 이후에 양민에게 출가하여 출생한 자와, 무당과 판수[盲人]의 자식 가운데에서 선발하여 쓰게 하옵소서." 하였다.
45 또 "아버지가 대부(大夫)가 됐을 때에는 3대를 제사지내다가, 아버지가 죽은 뒤에 아들이 서민이면 2대만을 제사지내게 될 것이니,
46 아버지가 생존했을 때에 제사지내던 할머니의 신주는 여러 겹으로 싸서 두었다가,
47 대부가 되었을 때에 다시 싸두었던 신주를 꺼내어 제사를 지낸다면 그 법이 매우 불편할 터이니,
48 이 조항을 육전(六典)에서 삭제해 버리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하니
49 황희 등이 아뢰기를 "문공(文公)의 예대로 따라서 한계를 정하여 풍속을 후하게 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50 ○ 11월 4일에 황희, 맹사성, 권진, 신상, 정초 등을 불러 의논하기를 "이 앞서 해마다 농한기를 이용하여 군자고 70간을 지으라 했는데,
51 지금 최윤덕 등이 하삼도에 가서 성을 쌓고 있다. 만일 재목을 벌채하여 운반하게 하면, 백성이 반드시 고통을 당할 것이니,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는가." 하였고 황희 등이 답하였다.
52 황희 등이 아뢰기를 "아무리 성을 쌓는 공사가 있을지라도 군자고를 짓는 일은 중지할 수 없사오니,
53 재목이 산출되는 인근 지방에서 성을 쌓는 사람들을 시켜서 재목을 벌채하게 하옵소서." 하였다.
54 또 의논하기를 "금년의 농사가 잘 되지 못하여, 여러 해 동안 대출한 환상을 만일 모두 받아들인다면,
55 또 토지와 집을 팔아서 갚고 유리하여 정착지를 잃게 될 것이니,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는가." 하니,
56 황희 등이 아뢰기를 "고식적으로 보아주고 징수하지 않는다면 해마다 밀리고 또 밀려서 뒤에는 감당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하니,
57 명하기를 "재목을 베는 일과 여러 해 전부터 밀려 내려 오는 환상을 받아들이는 것을 우선 정지하라." 하였다.
58 ○ 5일에 여러 도의 감사에게 전지하기를 "각 고을의 백성으로서 농사를 실패하여 가난이 심한 자에게 만일 일시에 여러 해 동안 대출하여 준 것을 모두 받아들인다면,
59 반드시 토지와 가옥을 팔아서 갚고 유리하여 살 곳을 잃게 될 것이니 그 생활의 정도를 보아서 징수하라." 하였다.
60 ○ 9일에 전 집의 정분, 장령 장수, 최문손, 지평 박이창, 김자갱 등을 의금부에 가두게 하였으니, 성개의 노비 사건을 오래도록 보고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61 ○ 형조에서 아뢰기를 "만경현 사람 김민이 자기 아내의 여종 덕가이와 예빈시의 노예 물금과 함께, 전귀생을 죽이고 그의 재산을 나누어 가졌사오니, 모두 참형에 처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62 ○ 12일에 임금이 좌우에게 이르기를 "윤봉이 최습에게 이르기를, '이 나라에서는 유학의 학설을 신봉하고 불교의 의식은 좋아하지 않는데,
63 중국은 태조 고황제 이후로 모두 불교의 의식을 좋아하였는데 그 중에 홍희 황제께서 가장 좋아하여 친히 수륙재를 차렸다.' 하니,
64 불교가 들어온 지가 오래인데 중국엔들 왜 유학자가 없어서 중국에서 과연 불교를 좋아한다는 것을 몰랐겠는가." 하니,
65 성달생, 서선, 권진, 안순 등이 아뢰기를 "신 등도 직접 불교를 좋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고,
66 순이 또 아뢰기를 "중국에는 불교를 너무나 좋아하여, 나라의 운명이 오래 가지 않는 것이 이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였다.
67 ○ 11월 25일에 황희, 맹사성을 불러 의논하기를 "우리 나라는 과거부터 백성을 동원시키는 것이 일정한 한계가 없어서 열흘, 한 달까지에 이르기도 하여, 백성의 고통이 매우 심하였다.
68 옛 제도를 조사하여 날 수를 제한 하려 하는 데 있어 열흘이나 한 달까지는 가지 않게 함이 어떠한가." 하니, 모두들 "좋습니다." 하였다.
69 ○ 12월 7일에 임금이 음악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이르기를 "박연이 조회의 음악을 바로잡으려 하는데, 바르게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70 율려신서도 형식만 갖추어 놓은 것뿐이다. 우리 나라의 음악이 비록 다 잘 되었다고 할 수는 없으나,
71 반드시 중국에 부끄러워할 것은 없다. 중국의 음악인들 어찌 바르게 되었다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72 ○ 12월 29일에 형조에서 양인에게 시집간 여종을 양인이 되도록 아뢰니, 그대로 따랐다.
15 ○ 세종 13년(1431) 1월 1일에 승정원에게 전지하기를 "근정전이 높아서 만일 화재가 있다면 창졸간에 오르기가 어려울 것이니,
2 쇠고리를 연쇄하여 처마 아래로 늘여 놓았다가, 화재가 있으면 이를 잡고 오르내리게 하는 것이 어떠한가.
3 또 옥상(屋上)이 위험하여 불을 잡으려던 자가 미끄러질 경우 잡을 만한 물건이 없으니,
4 역시 긴 쇠고리를 만들어서 옥상에 가로 쳐 놓는 것이 어떤가. 이천과 더불어 이를 의논하여 아뢰라." 하고 이는 만들어졌다.
5 ○ 1월 10일에 형조에서 경상도 감사의 관문에 의하여 아뢰기를 "각 고을 창기의 소생은, 청컨대 공사의 비자가 누차 그 남편을 갈고,
6 갑오년 6월 이후에 공사의 노자가 공사의 비자에게 장가가서 낳은 것은 그 아비가 뒤에 비록 양인이 되었더라도,
7 그가 천할 때에 장가가서 낳은 것들은 그 어미의 신분을 좇아 시행하옵소서" 하니,
8 명하여 이를 의정부에 내려 제조와 더불어 같이 의논하게 하였는데,
9 모두 말하기를 "옳습니다." 하므로, 그대로 따랐다.
10 ○ 4월 12일에 사헌부에 전지하기를 "명화 도적의 살인 사건을 한성부 관리들이 계달을 더디게 하였으니, 그것을 핵실하여 아뢰라." 하였다.
11 ○ 19일에 망오지라는 사나이와 박만 등 여섯 사람이 각기 꾸리어 싼 물건을 지고 영서역정에 모였으므로,
12 관령이 마을 사람들을 거느리고 잡았으나, 두 사람만 잡고 나머지 네 사람은 향림사 산으로 올라가서 미처 잡지 못하고 그 물건만 빼앗았는데,
13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이제 잡은 두 사람을 추국하니, 정상이 조금 드러났고 장물도 나타났는데, 두 사람이 또 말하기를, 같은 무리가 목멱산에 있다'고 합니다." 하였다.
14 이보다 앞서 김경의 집 종 막산, 두지 등이 명화 도적으로 체포되어 고문을 한 차례 당하였으나 장물이 없었고,
15 또 김경의 종 부존을 체포하여 국문하니, 김경이 부존을 비호한다고 하므로, 경을 가두고 두 차례 고문하였다.
16 고문한 노비가 모두 10여 명인데 모두 불복하였고, 또 박연을 고문하였더니 이에 장물이 나왔으므로, 또 박연에게 압슬형을 가하니,
17 이에 말하기를 "“내가 두지, 막산, 미마이, 부존, 서중 등과 도둑질하여 그 장물을 나누었습니다." 하매,
18 두지, 미마이를 고문하니 모두 자복하였으나, 서중과 부존은 압슬형을 하여도 불복하였다.
19 20일에 의금부에 전지하기를 "지금 보건대, 갇힌 도적들은 친족으로서 부호하는 자가 없으니 관에서 음식을 주어 굶주리지 않도록 하라." 하였다.
20 21일에 의금부에서 아뢰길 "명화 도적 망오지, 박만 등의 장물이 이미 나타났사오니,
21 청하건대, 김경의 종인 부존, 두지, 박연, 이마이, 서중, 막산 등 6명을 석방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22 22일에 사람을 보내어 군사들의 도적 잡는 데에 있어 근만을 살피게 하고, 드디어 안구경과 김희경 등을 의금부에 내렸다.
23 ○ 5월 8일에 형조에서 아뢰기를 "각사의 노비로서 양사의 안적에 거듭 기록된 자는 역에 종사하고 있는 관청의 문적에 기록할 때에 부모를 따라 기록하게 하여 서로 떨어지지 않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24 ○ 6월 14일에 임금이 말하기를 "허조의 말은 옳도다. 부민들이 자기의 일을 가지고 수령을 고소한 자는 다만 소송한 일만 판결하고, 그릇 판결한 수령의 죄는 논하지 않는 것이 어떨까." 하였다.
25 숭선이 아뢰기를 "부민들이 고소한 것을 혐의하여 죄 주지 않는다면, 누가 능히 법을 두려워하여 바르게 판결하겠습니까.
26 오결(誤決)로 인하여 다투는 송사가 날마다 번거로움이 더욱 심할 것이오니, 옳지 못합니다." 하니
27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옳도다." 하고 "대신들이 전후로 논의한 바를 내가 장차 다시 보겠다" 하였다.
28 ○ 6월 20일에 임금이 찬성 허조에게 이르기를 "근간에 들으니, 경이 대언 등과 더불어 말하기를,
29 '부민들이 친히 수령을 고소하는 자는 마땅히 수리하기를 허락치 말라고 하여, 내게 상달되기를 바란다. '고 하니,
30 경이 일찍이 말하기를, '부민이 수령을 고소하는 것은 심히 충후(忠厚)한 풍습이 아니라.'고 하여, 태종께서도 가납하셨으니 경자년에 이미 법을 세웠는데,
31 내가 일찍이 생각하건대, 경의 말이 매우 옳으나, 자기의 억울한 바에 이르러서도 다 수리하지 못하게 한다면,
32 가령 수령이 백성의 노비를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주어도 다시 수리하지 않는 것이 가할까.
33 민생들이 하고자 함이 있는데 임금이 없으면 어지러워지므로 반드시 임금을 세워서 다스리게 하였는데,
34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을 받지 않으면 어찌 다스리는 체통에 해롭지 않을까." 하니,
35 조가 대답하기를 "고려가 5백 년을 유지한 것은 오로지 윗사람을 능멸하는 풍습을 끊었기 때문입니다.
36 부민의 수령에 대한 관계는 아들의 아버지에게와, 신하의 임금에 대한 것과 같아서 절대로 범할 수 없습니다.
37 만약 그 허물과 악함을 고소하면, 이는 신하와 아들이 임금과 아비의 허물을 들추는 것과 같습니다.
38 하물며 때로 조정 관리를 보내어 수령의 불법한 일을 살펴 사람마다 말할 수 있는 것이오리까." 하였다.
39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고소하는 금령을 세우고, 또 조관을 보내어 백성들로 하여금 진소하게 하면 실로 모순(矛盾)이 되며,
40 때로 조관을 보내는 것은 특히 일시의 법이고, 육전(六典)에 싣기에는 적합하지 못하다.
41 고인(古人)은 옛일을 본받지 아니함을 경계하였으니, 법을 세우는 데 근거가 없으면 폐단을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 하니,
42 조가 능히 대답하지 못하였다.
43 판서 권진이 아뢰기를 "백성이 고소하는 것을 금하면, 관리들이 두려워하고 기탄하는 마음이 없을 것이며, 장차 고의로 오결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하고,
44 판서 신상, 정흠지, 신개 등이 아뢰기를 "비록 부민들의 고소를 금할지라도 자기의 억울한 것을 호소하는 것은 정(呈)하게 하고,
45 그릇 판결한 것은 다른 관에 이송하여 고쳐 바르게 한 것은 이미 격례(格例)가 되었습니다." 하니,
46 임금이 말하기를 "자기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도 받지 못하게 하는 논의는 내 마음에 합당치 못하다." 하였다.
47 허조 등이 나가자, 임금이 대언들에게 이르기를 "허조의 말이 어떤한가." 하니,
48 지신사 안숭선이 아뢰기를 "필부필부(匹夫匹婦)가 스스로 말을 다함을 얻지 못하면, 백성과 임금이 더불어 그 공을 이룩할 수 없으며, 하정(下情)이 상달되지 못하여 다스리는 체통에 심히 어그러집니다." 하였다.
49 임금이 말하기를 "그릇 판결한 것을 고쳐 바룬 뒤에 그 죄는 논하지 마는 것이 어떨까." 하니,
50 숭선 등이 아뢰기를 "만약 분변하여 판결을 고친다면, 이미 이룩된 법이 있는데 어찌 죄를 면하오리까. 그 죄를 논하지 아니하면 오결하기를 청탁하는 풍습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였다.
51 임금이 "여러 논의가 같지 않음이 이와 같으니 상정소로 하여금 다시 논의하게 하고, 아울러, '때로 조관을 보내어 고찰한다.'는 조문(條文)은 깎으라." 하였다.
53 ○ 7월 28일에 형조에 전지하기를 "죄를 범하여 옥에 있는 홀아비와 과부 및 형벌을 받은 사람의 어린 자식들을,
54 만약 돌보아 기르지 아니하면 혹 굶주리고 추워서 죽음에 이를 것이니,
55 지금부터는 그 친족에게 주고, 젖먹이 아이는 젖 있는 사람에게 주며,
56 친족이 없으면 관가에서 거두어 보호하고 기르되 그 지방에 있는 관리로 항상 보살펴 기르게 하며,
57 만일 잘 보살피지 아니하여 굶주리고 추위에 떨게 한다면, 서울 안에서는 헌사, 지방에서는 감사가 규찰해 다스리게 하라." 하였다.
16 ○ 세종 14년(1432) 3월 15일에 평안도 감사에게 전지하기를 "지금 계본을 보니, 각 고을의 수령들이 농서를 타일러 깨우쳐 주어서 백성들에게 갈고 심는 법을 가르치고 있음을 알겠다.
2 궁벽한 곳에 사는 백성들에게도 골고루 깨우쳐 주며 부드럽게 차근차근한 말로 가르쳐서 성과를 거두게 하고,
3 비록 농서대로 준수하지 않는 자가 있더라도 또한 처벌하는 일이 없게 하라." 하였다.
4 ○ 3월 25일에 상정소 제조 맹사성, 권진, 신상, 허조, 정초 등을 불러 의논하였다.
5 그 첫째로는 "전일에 의논하던 아비를 따라 양민으로 한다는 법은 되풀이하여 생각하여 보았으나 최선의 방법을 깨닫지 못하겠다.
6 이 법을 세운 것은 오로지 하늘이 백성을 낳으매 본래 귀천의 차별이 없는 것인데,
7 태종께서 대신들과 함께 심사숙고하여 드디어 아비를 좇아 양민으로 한다는 법을 세운 것이니, 이것은 만세의 아름다운 법이다.
8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사비(私婢)가 천인 남편에게 시집가서 낳은 자식을 양민을 만들고자 하여,
9 양인을 끌어들여 그것이 아이의 친아비라고 일컬으니, 이것으로 인하여 그 아비를 아비로 하지 않아 윤상을 파괴하며 어지럽히게 된다. 이것은 큰 폐단이니 바로잡지 않을 수 없다.
10 경들이 전일에 의논하기를, '공,사의 계집종이 양인 남편에게 시집갈 때에는 본주인에게 신고하여 문안(文案)을 작성한 다음에 시집가기를 허락하게 하라.' 고 하였으나, 이 의논은 옳은 것 같으면서 그른 것이다.
11 공처(公處)의 계집종이라면 그가 양민에게 시집갈 때를 당하여, 관리는 그 종이 자기의 사유물이 아니니 혹은 그대로 들어 줄는지 모르겠으나,
12 만약 사삿집의 계집종이라면 비록 양민에게 시집가고자 하더라도 그 주인은 반드시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13 그러니 각기 마을의 이정(里正)에게 신고하여 문안을 작성한 뒤에 시집가도록 허가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14 사성 등이 아뢰기를 "비록 이정이나 이장에게 신고하더라도 아비를 아비로 하지 않는 폐단은 근절되지 않을 것입니다.
15 아비를 따라 양민이 되게 하는 법은 아비를 존중하는 뜻에서 나온 것으로서, 천리와 인정에 합치하는 천하 고금의 확론입니다.
16 그러나 사내 종이 양민 여자에게 장가들어 낳은 자녀는 홀로 아비를 따르지 않는 것은 매우 사리에 통하지 않습니다.
17 사내 종이 양녀에게 장가들어 낳은 자녀도 또한 아비를 따라 천인이 되게 하여 천륜을 존중하게 하소서." 하였다.
18 임금이 말하기를 "그것은 옳지 않다. 국가가 법을 세우는데 어찌 종으로 하여금 양녀에게 장가들게 규정할 수 있겠는가.
19 내 생각에는 양민과 천민이 서로 관계하는 것을 일절 금단시키고, 만약 범법하는 자가 있거든 율에 의거하여 처벌하며,
20 그 범법 행위로 인하여 낳은 자녀는 다 속공(屬公)하게 하는 것이 사리에 맞고 유익하지 않겠는가." 하니,
21 사성 등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지당합니다. 그러나 통하지 않는 점이 있습니다.
22 그러한 법을 세운다면 사비(私婢)는 자기의 자녀가 속공되는 것을 기쁘게 여겨, 모두 양민의 남편을 얻어서 그의 자녀로 하여금 다 공천이 되게 할 것입니다.
23 그렇게 되면 백년을 넘지 않아서 사천은 거의 없어질 것입니다.
24 만약 부득이하다면 양인과 천인 사이의 통간을 일절 금지하고, 그 범법 행위로 낳은 자녀는 각각 주인에게 돌려주게 한다면,
25 사비는 양인 남편이 자기에게 무익하다는 것을 알고 반드시 양민과 통간을 즐겨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26 ○ 이틀 뒤에 다시 논의하여 맹사성, 허조 등이 아뢰기를 "어느 품계를 물론하고 천인을 첩으로 삼는 것은 일률적으로 다 금지하여야 합니다." 하고,
27 권진은 아뢰기를 "전일에 의논한 대로 시행하여야 합니다." 하고,
28 성억, 조계생, 이명덕, 정흠지, 신장, 이징옥, 최사의, 정연, 고약해, 유맹문, 최해산, 우승범 등은 아뢰기를 "전일의 의논이 타당합니다.
29 다만 유음 자손 이상의 사람은 비록 천첩이 낳은 자녀가 있더라도 양인이 되는 것은 의심할 것이 없으나,
30 만약 평민과 천인은 높은 것과 낮은 것이 서로 뒤섞이며, 또 나이가 만 40이 되었는지 아닌지도 또한 알기가 어려워서,
31 그들이 서로 관계하여 낳은 자녀를 양민으로 할 것인가 천민으로 할 것인가 반드시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청하건대, 이 부분은 삭제하도록 하소서." 하니,
32 임금이 말하기를 "논의한 것이 다 그럴 듯하다. 우선 전일의 의논에 좇기로 하겠다." 하였다.
33 ○ 6월 9일에 임금이 좌대언 김종서에게 이르기를 "경이 최윤덕을 아는가." 하니,
34 대답하기를 "사람됨이 비록 학문의 실력은 없으나 마음 가짐이 정직하고 또한 뚜렷한 잘못이 없으며, 용무(用武)의 재략(才略)은 특이합니다." 하매,
35 임금이 말하기를 "곧고 착실하여 거짓이 없으며, 근신(謹愼)하여 직무를 봉행(奉行)하므로 태종께서도 인재라고 생각하시어 정부(政府)에 시용(試用)하였노라.
36 전조와 국초에 간혹 무신으로서 정승을 삼은 이가 있으나, 어찌 그 모두가 윤덕보다 훌륭한 자이겠는가.
37 그는 비록 수상(首相)이 되더라도 또한 좋을 것이다. 다만 말이 절실하지 못한 것이 많다.
38 하윤이 정승이 되어 모든 정무를 처리할 때에, 조영무가 거기에 옳으니 그르니 하는 일이 없었다.
39 만약 한 사람의 훌륭한 정승을 얻으면 나라 일은 근심 없을 수 있는 것이다." 하였다.
17 ○ 세종 15년(1433) 2월 15일에 임금이 장차 파저강 야인을 토벌하려고 대신에게 시험하고자 하여,
2 비밀히 의정부, 육조, 삼군 도진무 등에게 접대할 방법과 죄를 성토 할 말과 토벌할 계책 등을 각각 진술하게 하고
3 임금이 도승지 안숭선에게 명하여, 밀봉하여 발표하지 말고 깊이 생각하게 하였다.
4 ○ 3월 7일에 평안도 절제사 최윤덕이 경력 최치운을 보내어 아뢰기를 "파저강을 토벌하는 일에 군사 3천을 쓰라고 하시니,
5 신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오랑캐의 땅은 험하고 막힌 곳이 많고 형세가 두 번 일으키기 어려우니,
6 군사가 만여 명이 있어야 가할 것이온데, 지금 3천 명으로 정하였다는 말을 듣자오니 신은 심히 염려되옵니다." 하므로,
7 임금이 사정전에 나아가 지신사 안숭선 및 최치운을 인견하고 이르기를 "처음 군신들과 더불어 군사의 수를 논의하니, 혹은 7, 8백 명을 말하고 혹은 1천 명으로 말하여,
8 마침내 3천 명으로 한정하였으나, 내 마음으로 적다고 생각하였더니, 지금 올린 글을 보니 과연 그렇다.
9 어제 박호문의 말에, '만 명의 수에 내리지 않아야 마땅하다.'고 하므로,
10 의정부, 육조, 삼군 도진무 등으로 하여금 회의하게 하였더니, 혹은 5백 명을 더하라고 하고, 혹은 1천 명을 더하라고 하며, 혹은 더할 필요가 없다고 하여 의논이 일치되지 않았다." 하니,
11 치운이 아뢰기를 "윤덕이 말하기를, '처음 올 때에는 타납노, 합라 등만 치고자 하면 정병 1천 명만 얻어도 오히려 가하다고 하였는데,
12 지금 다시 생각하니, 만약 한 두 마을을 치면 반드시 서로 구원할 것이니 성패를 알기 어렵다.
13 옛 사람은 많은 군사를 동원하여도 작은 도적에게 패한 바가 되었는데, 하물며 많은 군사를 진실로 두 번 일으키기 어려우니,
14 한 두 마을마다 각각 한 군대를 보내면, 저들이 장차 자신도 구원하기에 겨를이 없을 것인데, 다른 사람을 구원할 수는 없을 것이다.
15 이런 까닭으로 만여 명이 아니고는 불가하며, 만약 3천 명으로 몇 길을 나누자면, 군사를 나누기가 또한 어렵다.'고 하옵니다." 하니,
16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군사의 수를 1만으로 더하겠다." 하였다.
17 ○ 3월 17일에 이조 판서 허조가 아뢰기를 "겨울을 기다려 얼음이 언 뒤에 그들이 뜻하지 않는 때에 나가서 깨뜨리고, 아직 발병을 정지하옴이 어떠하오리까." 하니,
18 임금이 말하기를 "대저 큰 비는 6, 7월 사이에 있는데, 하늘이 우리를 미워한다면 큰 비를 내려서 군사의 길을 막을 것이나, 하늘이 미워하지 않는다면 4월에 하필 큰 비가 오리오." 하였다.
19 ○ 5월 7일에 평안도 절제사 최윤덕이 박호문을 보내어 치계하기를
20 "본도의 마병, 보병의 정군 1만을 발하고, 겸하여 황해도 군마 5천을 거느리고 4월 초10일에 일제히 강계부에 모여서 군사를 나누었는데,
21 중군 절제사 이순몽은 군사 2천 5백 15명을 거느리고 적괴 이만주의 채리로 향하고,
22 좌군 절제사 최해산은 2천 70명을 거느리고 거여 등지로 향하고,
23 우군 절제사 이각은 1천 7백 70명을 거느리고 마천 등지로 향하고,
24 조전 절제사 이징석은 군사 3천 10명을 거느리고 올라 등지로 향하고,
25 김효성은 군사 1천 8백 88명을 거느리고 임합라 부모의 채리로 향하고,
26 홍사석은 군사 1천 1백 10명을 거느리고 팔리수 등지로 향하고,
27 신은 군사 2천 5백 99명을 거느리고 정적 임합라의 채리로 향하여,
28 본월 19일에 여러 장수들이 몰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을 마쳤습니다." 하였다.
29 ○ 9월 16일에 안숭선에게 명하여 영의정 황희와 좌의정 맹사성에게 의논하기를
30 "행 사직 장영실은 그 아비가 본래 원나라의 소주, 항주 사람이고, 어미는 기생이었는데,
31 공교한 솜씨가 보통 사람에 뛰어나므로 태종께서 보호하시었고, 나도 역시 이를 아낀다.
32 임인, 계묘년 무렵에 상의원 별좌를 시키고자 하여 이조 판서 허조와 병조 판서 조말생에게 의논하였더니,
33 허조는, '기생의 소생을 상의원에 임용할 수 없다.'고 하고,
34 말생은 '이런 무리는 상의원에 더욱 적합하다.'고 하여,
35 두 의논이 일치되지 아니하므로, 내가 굳이 하지 못하였다가 그 뒤에 다시 대신들에게 의논한즉,
36 유정현 등이 '상의원에 임명할 수 있다.'고 하기에, 내가 그대로 따라서 별좌에 임명하였었다.
37 영실의 사람됨이 비단 공교한 솜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질이 똑똑하기가 보통에 뛰어나서,
38 매양 강무할 때에는 나의 곁에 가까이 모시어서 내시를 대신하여 명령을 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찌 이것을 공이라고 하겠는가.
39 이제 자격궁루를 만들었는데 비록 나의 가르침을 받아서 하였지마는, 만약 이 사람이 아니더라면 암만해도 만들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
40 내가 들으니 원나라 순제 때에 저절로 치는 물시계가 있었다 하나, 그러나 만듦새의 정교함이 아마도 영실의 정밀함에는 미치지 못하였을 것이다.
41 만대에 이어 전할 기물을 능히 만들었으니 그 공이 작지 아니하므로 호군의 관직을 더해 주고자 한다." 하니,
42 희 등이 아뢰기를 "김인은 평양의 관노였사오나 날래고 용맹함이 보통 사람에 뛰어나므로 태종께서 호군을 특별히 제수하시었고,
43 이 같은 무리들로 호군 이상의 관직을 받는 자가 매우 많사온데, 유독 영실에게만 어찌 불가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44 ○ 11월 19일에 말하기를 "수성(守成)하는 임금은 반드시 큰 것을 좋아하고 공(功)을 세우기를 즐겨 하는 폐단이 있다.
45 이것은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조상의 왕위를 계승하는 임금이 마땅히 경계해야 할 일이다.
46 내가 조종의 왕업을 계승하여 영성(盈盛)한 왕운(王運)을 안존(安存)하는 것으로서 항상 마음먹고 있다.
47 전일에 파저의 전역(戰役) 때에는 대신과 장수와 재상들이 다 불가하다고 말하였다. 이 말들은 바로 만세에 변함이 없는 정론이었다.
48 그런데, 내가 드디어 정벌을 명령하여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특히 행운일 뿐이고 숭상할 만한 것은 못된다.
49 매양 생각하니, 알목하는 본래 우리 나라의 영토 안에 있던 땅이다.
50 혹시 범찰 등이 딴 곳으로 옮겨 가고, 또 강적이 있어서 알목하에 와서 살게 되면, 다만 우리 나라의 변경을 잃어버릴 뿐 아니라, 도 하나의 강적이 생기게 된다.
51 그러므로, 나는 그곳의 허술한 기회를 타서 영북진을 알목하에 옮기고,
52 경원부를 소다로에 옮겨서 옛 영토를 회복하여서 조종의 뜻을 잇고자 하는데 어떤가.
53 또 태조께서는 경원을 공주에 두었고, 태종께서는 경원을 소다로에 두었는데,
54 태종이 차마 버리지 못하여 부거참에 목책을 설치하고 군사를 주둔시켜 지키게 하셨다.
55 이것은 조종이 알목하로써 우리의 땅을 삼으려는 마음인 것이다. 일찍이 이것을 마음속에서 잊은 일이 없다.
56 비로소 두 진을 설치하여 옛 지경을 개척하는 것은 조종이 이미 이루어 놓은 법이다. 그것이 어찌 나의 공(功)이 될 수 있겠는가." 하니,
57 권진, 황희 등은 아뢰기를 "두 진을 둔다면 하나의 진 안에 인구가 천호 이상은 되어야만 합당할 것인데, 그 인호의 나올 곳이 매우 어렵습니다.
58 우효강이 오기를 기다려 형세를 자세히 물어 본 뒤에 다시 상세히 의논하게 하소서." 하매,
59 임금이 말하기를 "들어가 살게 할 인구는 하삼도의 향리, 역졸, 공천, 사천을 물론하고
60 만약 자진하여 응모하는 자가 있으면, 신역을 면제하여 주어서 들어가 살게 하며, 혹은 토관직을 제수하여 군대의 수에 충당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였다.
61 황희 등이 아뢰기를 "함길도의 함흥 이북의 인민들을 먼저 뽑아 들어가 살게 하고, 부족하면 부근의 다른 도의 인민을 뽑아서 들어가 살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62 맹사성은 아뢰기를 "지금은 그 공주가 모두 풀이 우거진 황야가 되어 야인의 점거한 바가 되었음은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63 옛날 경원에서 아군이 패한 것은 흥부가 적임자가 아니였기 때문입니다.
64 만약 장수로서의 지략이 있는 자가 있어서 거기를 지킨다면 어찌 패하는 일이 있겠습니까.
65 지금 시기가 이처럼 절호하니 바로 국토를 넓힐 때입니다." 하였다.
18 ○ 세종 16년(1434) 4월 2일에 임금이 말하기를 "영북진 절제사 이징옥이 동맹가첩목아의 아우를 정벌하자 청하고,
2 도관찰사 김종서는 정벌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하니, 이 두 의논이 어떠한가." 하고 물으매,
3 영의정 황희 등이 아뢰기를 "침략하려는 흔단도 없사온데 이를 치게 되면, 저들이 반드시 분노하여 잡류들을 많이 이끌고 와 침노할 것입니다." 하니,
4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겠다. 나도 또한 생각하기를 맹가첩목아가 패망한 뒤로 우리 나라가 곧 진을 설치하였으나,
5 흔단도 없는데 경거망동하여 이를 친다는 것은 옳지 않게 여겨지니, 경 등은 숙의하여 아뢰라." 하였다.
6 ○ 4월 26일에 형조에 전교하기를 "경외의 여종이 아이를 배어 산삭(産朔)에 임한 자와 산후 1백 일 안에 있는 자는 사역을 시키지 말라 함은 일찍이 법으로 세웠으나,
7 그 남편에게는 전연 휴가를 주지 아니하고 그전대로 구실을 하게 하여 산모를 구호할 수 없게 되니,
8 한갓 부부가 서로 구원하는 뜻에 어긋날 뿐 아니라, 이 때문에 혹 목숨을 잃는 일까지 있어 진실로 가엾다 할 것이다.
9 이제부터는 사역인의 아내가 아이를 낳으면 그 남편도 만 30일 뒤에 구실을 하게 하라." 하였다.
10 ○ 6월 25일에 예조에서 아뢰기를 "여진 문자를 이해하는 자가 불과 1, 2인이어서 장차 폐절하게 되겠사오니,
11 시조인 및 함길도의 여진인 자제 중에서 여진 문자를 이해하는 자 4, 5일을 추려 뽑아서 사역원에 소속시켜 훈도로 삼으시고, 겸하여 통사로 임명하도록 하옵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2 ○ 7월 1일에 이날부터 비로소 새 누기(물시계) 를 썼다.
13 임금이 예전 누기가 정밀하지 못한 까닭으로 누기를 고쳐 만들기를 명하였다.
14 간의와 참고하면 털끝만치도 틀리지 아니한다.
15 임금이 또 시간을 알리는 자가 차착(差錯)됨을 면치 못할까 염려하여,
16 호군 장영실에게 명하여 사신 목인을 만들어 시간에 따라 스스로 알리게 하고,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아니하도록 하였다.
17 영실은 동래현 관노인데, 성품이 정교하여 항상 궐내의 공장 일을 맡았었다.
18 ○ 7월 2일에 지중추원사 이천을 불러 의논하기를 "태종께서 처음으로 주자소를 설치하시고 큰 글자를 주조 할 때에,
19 조정 신하들이 모두 이룩하기 어렵다고 하였으나, 태종께서는 억지로 우겨서 만들게 하여, 모든 책을 인쇄하여 중외에 널리 폈으니 또한 거룩하지 아니하냐.
20 다만 초창기 이므로 제조가 정밀하지 못하여 인쇄하는 자가 괴롭게 여겼다.
21 내가 이 폐단을 생각하여 일찍이 경에게 고쳐 만들기를 명하였더니, 경도 어렵게 여겼으나,
22 내가 강요하자, 경이 지혜를 써서 판을 만들고 주자를 부어 만들어서, 모두 바르고 고르며 견고하여 내가 심히 아름답게 여긴다.
23 이제 대군들이 큰 글자로 고쳐 만들어서 책을 박아 보자고 청하나, 일이 심히 번거롭고 많지마는, 이 일도 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24 이에 이천에게 명하여 그 일을 감독하게 하고, 집현전 직제학 김돈, 김빈, 장영실 등에게 일을 주장하게 맡기고,
25 경연에 간직한 효순사실, 위선음즐, 논어 등 책의 자형을 자본으로 삼아, 주자 20여 만 자를 만들어,
26 이것으로 하루의 박은 바가 40여 장에 이르니, 자체가 깨끗하고 바르며, 일하기의 쉬움이 예전에 비하여 갑절이나 되었다.
27 ○ 9월 27일에 호조에 전지하기를 "평안, 황해 두 도의 인민들이 압사하는 화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위험한 땅에 살다가,
28 금년 폭우로 산이 무너져서 많이 압사함에 이르렀으니, 내가 매우 가엾어 하는 바다.
29 위의 두 도와 다른 도의 각 고을에 산이 무너질 의심이 있는 땅에 거주하는 인민은, 후일에 산이 무너져 압사하는 화를 반복 설명하여 점차로 이사시켜서 예측할 수 없는 압사의 화를 면하게 하라." 하였다.
30 ○ 10월 12일에 임금이 연회에 임하여 술을 돌릴 때에, 왕흠이 전하를 일컬어 황제라고 하였다.
31 임금이 도승지 안숭선에게 이르기를 "왕흠이 나를 황제라고 일컬으니 지극히 놀랍고 황공하다.
32 위인이 대단히 경박하여 예절에 맞지가 않는 사람이다. 경이 그리 알고 관반에게도 또한 이 뜻을 알게 하여,
33 만일 다시 이런 말을 발하거든 좋아하지 않는 빛을 보이어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19 ○ 세종 17년(1435) 8월 21일에 함길도 감사와 도절제사가 아뢰기를 "홀라온 올적합이 연달아 보고하기를, '혐진 올적합이 장차 회령 등처에 쳐들어오려 한다.' 하니,
2 청컨대 친히 북청 이북의 정군과 한량 자제 6백 명을 거느리고 녹야기에 군사를 둔쳐서 뜻밖의 변고에 대비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3 ○ 세종 18년(1436) 3월 12일에 예문 대제학 윤회가 57세에 졸하였다. 본관은 무송이니, 윤소종의 아들이다.
4 나이 겨우 10세에 통감강목을 능히 외웠고, 총명하고 민첩함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다.
5 태종께서 일찍이 회에게 이르기를 "경은 학문이 고금을 통달했으므로 세상에 드문 재주이고, 용렬한 무리의 비교가 아니니, 경은 힘쓰라." 하였다.
6 천성이 술을 즐기니 두 임금께서 여러 번 꾸짖어 금하게 하였으나, 오히려 능히 그치지 못하였다.
7 두 아들이 있으니 윤경연과 윤경원이다.
8 ○ 10월 3일에 함길도 도절제사가 치보하기를 "9월 26일에 올적합의 군사 3천여 명이 와서 경원의 읍성을 포위하므로,
9 판관 이백경과 호군 우안덕 등이 나누어 나와서 앞뒤에서 들이쳐서 적의 머리 3급을 베었으며,
10 도진무 조석강은 군사를 거느리고 이르니 적군이 조금 물러가는지라,
11 석강이 성에 들어와서 군대를 정돈하여 나와서 적을 뒤따라 두만강에 이르러 서로 싸웠는데,
12 적이 강을 건너가고 해가 이미 저물었으므로 우리 군사가 추격하지 못하고 되돌아 왔습니다." 하였다.
13 ○ 10월 20일에 각도의 감사에게 전지하기를 "듣건대, 그 도에 기근이 절박하고 인민이 유이하여 그 자손들을 미처 거두어 구휼하지도 못하고,
14 혹은 길에 버리기도 하고 혹은 나무에 매어두기도 하면서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한 사람이 간혹 있다 하니, 내가 심히 염려한다.
15 경 등은 나의 지극한 뜻을 본받아 마음을 다하여 구휼하여 굶어 죽게 하지 말아라.
16 또 금년은 그만이지마는 명년의 일은 마땅히 할 수 있으니,
17 내년 봄 농사철에 종자와 구식(口食)을 모름지기 미리 조처 준비하여 모자람이 없게 하라." 하였다.
18 ○ 예전에,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지금 기근으로 인하여 유이하는 백성이 그 어린 아이를 버리고 가버리매,
19 마을 사람도 또한 보호해서 기르지 않으므로, 의탁할 데가 없어서 굶주려 죽는 사람이 있게 됩니다.
20 지금부터 소재 고을의 이정으로 하여금 수령에게 달려가 알려서, 일정한 재산이 있고 자상한 사람에게 아이를 주어서 보호 양육하도록 하고,
21 관청에서 의복과 양식을 주어서 얼고 굶주림을 면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22 ○ 10월 26일에 임금이 사정전에 나아가서 도승지 신인손과 동부승지 권채를 불러 어탑 앞에 나아오게 하여 측근의 신하를 물리치고 말하기를
23 "세족인 김씨를 기유년(세종 11년)의 사건을 초래하였으므로 이를 폐하고 다시 봉씨를 간택했는데,
24 뜻밖에도 세자가 친영한 이후로 금슬이 서로 좋지 못한 지가 몇 해나 되었다.
25 세 사람의 승휘를 뽑아 들였는데, 봉씨는 성질이 시기하고 질투함이 심하여서,
26 권 승휘가 임신을 하게 되자, 봉씨가 더욱 분개하고 원망하여 항상 궁인에게 말하기를, '권 승휘가 아들을 두게 되면 우리들은 쫓겨나야 할 거야.' 하였고,
27 그 후에 봉씨가 스스로 말하기를, '태기가 있다.' 하여, 궁중에서 모두 기뻐하였다.
28 어느 날 봉씨가 또 스스로 말하기를, '낙태를 하였다.'고 하면서, '단단한 물건이 형체를 이루어 나왔는데 지금 이불 속에 있다.'고 하므로,
29 늙은 궁궐 여종으로 하여금 가서 이를 보게 했으나, 이불 속에는 아무 것도 보이는 것이 없었으니, 그가 말한 임신은 거짓말이었다.
30 요사이 듣건대, 봉씨가 궁궐의 여종 소쌍이란 사람을 사랑하여 항상 그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하니,
31 궁인들이 혹 서로 수군거리기를, '빈께서 소쌍과 항상 잠자리와 거처를 같이 한다.'고 하였다.
32 소쌍도 다른 사람에게 늘 말하기를, '빈께서 나를 사랑하기를 보통보다 매우 다르게 하므로, 나는 매우 무섭다.' 하였다.
33 소쌍의 사건을 듣고난 후로는 내 뜻은 단연코 폐하고자 한다.
34 세 대신과 더불어 함께 의논하여 속히 교지를 지어 바치게 하라." 하였다.
35 ○ 11월 2일에 충청도 감사 정분이 아뢰기를 "도내의 각 고을에 떠돌아다니는 사람은 거개부역에 시달린 사람들인데도, 수령은 그 굶주림을 두려워하여 이를 금지시키지 않았습니다.
36 그런 까닭으로 이미 그 이사하는 것을 금지시키고, 마음을 다하여 굶주리는 사람을 구제하게 했으나,
37 그 이미 벌써 전라도로 도망해 간 사람은 그 도의 각 고을에서 그들이 그 지경 안에서 죽게 될까 두려워하여 모두 찾아서 본고장으로 돌려 보내게 되는데,
38 이 겨울의 추운 시기에 먼 길에서 내왕하였다가 혹시 굶고 얼어서 죽게 될 것이니,
39 선군(船軍)을 제외하고 다른 나머지 사람들은 잠정적으로 보호 구휼하게 하여,
40 내년 봄에 농사철이 임박함을 기다려 모두 찾아서 돌려 보내게 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41 그대로 따르고, 마침내 명하여 다른 도에까지도 공문을 보내어 이를 알리게 하였다.
42 ○ 11월 9일에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가
43 상언하기를 "신이 나와서 북쪽 변방을 지켜 오랑캐와 뒤섞여 거처하게 되매, 그 실정을 살펴 알았는데, 오랑캐는 천태만상이며 한 가지로 딱 잡아서 논할 수는 없습니다.
44 은혜가 없으면 그 마음을 기쁘게 할 수가 없으며, 위력이 없으면 그 뜻을 두렵게 할 수가 없는데, 은혜가 지나치면 교만하게 되고 위력이 지나치면 원망하게 됩니다.
45 신은 원컨대 내년 가을 8, 9월의 바뀌어지는 때에, 본도의 정병 4천 명을 뽑고,
46 올량합, 알타리 가운데 올적합에게 원망을 맺은 사람을 모집하여 향도로 삼아 길을 나누어 가서 정벌한다면,
47 군사의 명분이 정직하고 위세가 웅장할 것이니, 어찌 이기기 못할까 근심하겠습니까." 하였다.
48 임금이 이 글을 보고, 사정전에 나아가서 도승지 신인손을 불러 말하기를
49 "북방은 우리 국경으로부터 저들의 소굴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가 7, 8일의 노정이 되고,
50 잡종 야인들이 서로 잇달아 살고 있으니, 만약 군사를 움직인다면 저들이 반드시 먼저 방비하여 산림에 숨어 있을 것이니, 성공을 어찌 기필하겠는가.
51 이 일이 지극히 중대하므로 이 글을 봉하여 간수해 두었다가 일을 할 만한 시기를 기다리고 절대로 밖에 드러나게 공포하지 말라." 하였다.
52 ○ 12월 22일에 왜통사 윤인보, 윤인소 등이 가뭄으로 인하여 흉년 구제의 계책을 진술하면서 아뢰기를,
53 "일본 사람들은 상시로 칡뿌리와 고사리뿌리를 먹으니, 만약 이것을 사용하여 흉년을 구제한다면 이치가 있을 듯합니다." 하니,
54 임금이 그렇게 여겨서 인보를 경상도에 보내고, 인소를 전라도, 충청도에 보내어, 그것을 캐어 먹는 방법을 가르치게 하였다.
55 ○ 12월 26일에 유사눌이 상서하기를 "신이 삼가 세년가를 보건대, 단군은 조선의 시조입니다.
56 신이 세년가로 상고해 보건대, 단군이 처음에는 평양에 도읍했다가 후에는 백악에 도읍했으며,
57 은나라 무정 8년 을미에 아사달산에 들어가서 신이 되었는데,
58 그 노래에 이르기를, '1천 48년 동안 나라를 누리고, 지금도 사당이 아사달에 있네.' 했으니, 어찌 그 근거가 없겠습니까.
59 또 더군다나 고려에서는 구월산 밑에 사당을 세워 그 당우와 위판이 아직도 남아 있어서
60 세년가와 합치하니,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서는 이 곳을 버리고 다시 사당을 다른 곳에다 세운다면 아마 그 장소가 잘못된 듯합니다." 하였다.
61 ○ 12월 28일에 교지를 의정부에 내려서 양원 권씨를 세워 빈으로 삼았다.
20 ○ 세종 19년(1437) 2월 5일에 승정원에 전지하기를 "지난번에 굶주린 백성들을 두루 구휼하기가 쉽지 않은 것을 염려하여,
2 경도에서 가까운 여러 고을의 백성들로 하여금 서울 창고에서 쌀을 받게 하였으나,
3 여러 고을 백성들이 모두 노량, 한강을 경유하니, 사람과 물건이 폭주하여 양쪽 언덕에서 유숙하여 도리어 기한에 걸린다.
4 나룻 사람들이 다투어 사삿 배로 값을 받고 사람을 건너주니, 본래 사람을 구제하기 위한 것인데 도리어 이런 폐단이 있으니 내가 심히 염려한다.
5 의금부 낭청을 양쪽 나루에 보내어 공선(公船)과 사선(私船)을 모아 나누어 실어서 건너 주고, 또 사선의 세 받는 것을 엄금하라." 하였다.
6 ○ 2월 8일에 강원도 감사 유계문에게 전지하기를 "내가 또한 생각하건대, 옛날에 왜노들이 날뛰어 대마도에 살면서도 오히려 영동을 침략하여 함길도에까지 이르렀었는데,
7 무릉도에 사람이 없는 지가 오래니, 이제 만일 왜노들이 먼저 점거한다면 장래의 근심이 또한 알 수 없다.
8 현을 신설하고 수령을 두어 백성을 옮겨 채우는 것은 사세로 보아 어려우니,
9 매년 사람을 보내어 섬 안을 탐색하거나, 혹은 토산물을 채취하고, 혹은 말의 목장을 만들면,
10 왜노들도 대국의 땅이라고 생각하여 반드시 몰래 점거할 생각을 내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12 ○ 18일에 이숙묘, 김익생, 최사의, 조원복, 윤휘, 심치 등을 의금부에 가두었으니, 기민이 죽음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13 이전에는 기민을 죽게 한 자는 공신의 자손을 물론하고 모두 곤장을 치고 수속을 허락하지 않았었는데,
14 이번에는 이 기민이 길을 지나가다가 마침 진제장 옆에서 죽었기 때문에 수속을 허락한 것이다.
15 함길도 도절제사가 치계하기를 "이것이 신의 직책은 아니오나, 지금 야인을 귀순시키는 때를 당하여 마땅히 별달리 조치가 있어야 하겠사오니,
16 전부 감면하든지 혹은 3분의 2를 감하든지 하여, 오는 사람들을 권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니,
17 임금이 말하기를 "아직 모두 면제하라." 하였다.
18 ○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경상도의 각포에 와서 정박한 굶주린 왜인들을 구휼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9 ○ 3월 26일에 전라도의 쌀 5만 석을 충청도에 옮겼다.
20 이보다 먼저 본도 감사가 아뢰기를 "기민의 전후 수효의 총계가 70만 1천 2백 89인인데,
21 지금 농사철을 당하여 유민들이 환업하는 자가 또한 많으므로,
22 비록 전라도의 쌀 9만 석을 조운하더라도 진휼하여 구제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였으므로, 이 명령이 있은 것이다.
23 ○ 4월 1일에 세자로 하여금 섭정하게 했으나 의정부에서 반대하다
24 ○ 2일에 함길도 감사와 도절제사가 아뢰기를 "알타리의 동어허리라는 자가 성심으로 귀순하여 멀고 가까운 사변을 모두 자세히 고하므로,
25 이제 그 아들을 조정에 들어오게 하였으니, 마땅히 특별히 은혜를 더하여 여러 종족의 야인들을 권장하옵소서." 하였다.
26 ○ 4월 11일에 김종서, 이숙치 등이 야인 토벌 계획을 올리다. (이는 전에 임금이 명하였기 때문이다.)
27 ○ 4월 15일, 처음에 임금이 주야 측후기를 만들기를 명하여 이름을 '일성정시의'라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이룩됨을 보고하였다.
29 ○ 5월 8일에 경상도 감사에게 전지하기를 "근일에 예천군에서 올린 보리는 한 줄기에 혹 세 이삭, 혹은 너덧 이삭씩 나왔으니,
30 만약에 이 종자를 취해 심는다면 후년에도 이와 같이 이삭이 나올 이치가 혹 있을 것이니,
31 그 보리가 익기를 기다려서 종자를 취하여 수량을 갖추어 아뢰되, 한 말을 먼저 보냄이 가하겠다." 하였다.
32 ○ 5월 22일, 이 앞서 함길도 감사가 치보하기를 "두만강은 야인이 사는 곳이기 때문에 거행하지 아니하였으나,
33 이제 4진을 설치하였으니, 이 강은 나라의 북기(北紀)가 되고,
34 역내(域內)의 큰 내[大川]이오니, 청하건대, 치제하옵소서." 하였는데,
35 이에 이르러 예조에서 아뢰기를 "두만강은 평안도 압록강의 신에 견주어 중사(中祀)로서 제사하되,
36 사당은 세우지 말며, 단유(壇壝)만 설치하게 하옵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37 ○ 9월 22일에 평안도 감사가 치보하기를 "이번 9월 초7일에 좌군 이화와 우군 정덕성이 산양회에서 압록강을 지나갔고,
38 도절제사 이천 등은 만포 구자의 앞 여울을 지나서,
39 11일에 좌,우군이 고음한 지방에 들어가서 적의 전장을 양쪽으로 공격하니, 적이 모두 도망하므로
40 좌군은 홍타리로 향했고, 도절제사의 군대는 오자점에서 강을 따라 내려와서,
41 적의 소굴 12호를 수색하고는 적 35명을 목 베이고 5명을 생금하였으며, 소와 말들을 빼앗고 그들이 쌓아 둔 서속을 불태웠습니다.
42 12일에는 우군이 파저강을 지나서 올라 산성과 아한 지방을 수색하였고
43 즉시 파저강을 도로 건너서, 13일 새벽녘에 우군과 도절제사 군사들이 함께 오미부에 이르러
44 그 적의 소굴을 포위하니, 이미 적이 미리 알고 다 숨어서 빈집 24호와 쌓아 둔 콩과 서속들을 불태웠습니다.
45 모두 적을 죽이고 잡은 것이 60명이옵고, 우리 군사인즉, 1명이 살에 맞아 죽었습니다." 하였다.
46 ○ 10월 6일에 어가가 평강현에 도착하니, 현감 박경손이 고을 경계상에서 맞아 알현하였다.
47 순지(蓴池) 등지에서 사냥하고 적산(積山)에서 유숙하였다.
48 병조 및 감사에게 전지하기를 "어가를 따르는 하례들이 찬비로 인하여 동상이 있을까 염려된다.
49 진무 및 차사원은 후진(後陣)을 호위하는 한편, 구호하여서 죽는 자가 없게 하라." 하였다.
50 사헌부 지평 이영상, 사간원 좌헌납 조자 등이 진계하기를 "양녕 대군이 활과 살을 가지고 몰이하는 안에서 달리는 것이 매우 불가합니다." 하니,
51 내시 김충이 말하기를 "양녕에게 관한 일은 계달하지 말라는 전지가 있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계달하기 어렵습니다." 하였다.
52 ○ 10월 7일에 이영상이 양녕을 핵문하여 의금부에 가두도록 하다.
53 임금은 듣고 이영상을 불러 묻기를 "어제 저녁에 양녕을 핵문한 것은 네가 홀로 한 것인가, 간원과 함께 의논하여 한 것인가." 하니,
54 대답하기를 "신이 혼자 하였습니다." 하매, 이에 의금부에 가두도록 명하였다.
55 19일에 양녕을 탄핵한 이영상을 국문하다.
56 ○ 11월 27일에 예조에서 아뢰기를 "유구국에서 가끔 사신이 오는데, 우리 나라에는 그들의 문자를 해득하는 자가 없습니다.
57 서울과 지방에 유구국 문자를 해득하는 자를 찾아서 사역원 훈도로 차임하고,
58 왜 학생에게 겸해서 익히도록 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59 ○ 12월 7일에 의정부에 전지하기를 "각도 백성이 근래에 흉년으로 인해서 의창 곡식을 많이 꾸어다 먹고 돌려 갚지 못한다.
60 그 수령들은 그들이 가난한가 부유한가를 묻지 않고 일시에 다 받아들이고자 하여, 기한을 정하고 독촉하여서 원망하지 않는 백성이 없다.
61 부유한 사람 외에 가난한 각호는 알맞게 요량하여서 거두어 들이고 구휼하기에 힘쓰도록 하라." 하였다.
62 ○ 13일에 평안도 감사가 치보하기를 "본월 11일에 야인 3천여 기가 벽동에 침입하여 벽단 목책을 불태우고 돌아갔습니다.
63 지벽동군사 신진보는 벽단 부만호 허유강과 3백여 기를 거느리고 이를 쫓는 중입니다." 하였다.
64 14일에 평안도 감사가 치보하기를 "적은 강을 넘어서 돌아갔습니다.
65 신진보와 허유강은 강을 넘어 30리 지점가지 쫓아가서 적과 싸우다가 패전하였습니다.
66 유강은 전사하고 진보는 흩어진 군사를 거두어서 산에 올랐는데 적이 포위하였습니다.
67 마침 김자옹이 이효정과 함께 군사 3백 기를 거느리고 가니, 적은 포위를 풀고 가버렸습니다." 하였다.
21 ○ 세종 20년(1438) 1월 7일에 흠경각이 완성되었다. 이는 대호군 장영실이 건설한 것이나 그 규모와 제도의 묘함은 모두 임금이 마련한 것이며, 각은 경복궁 침전 곁에 있었다.
2 (이는 자동 천문 물시계인 옥루를 보관하던 집이며 옥루는 장영실이 이 때에 만들었다.)
3 ○ 3월 20일에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지금부터 버린 어린이를 받아 기르기를 자원하는 자가 있으면,
4 거주하는 마을 이름과 성명 및 어린이를 주고받은 연월을 문서에 명백하게 기재하여 마음껏 기르도록 하고,
5 그 양자는 받아 기른 사람에 한해서 그 요역을 제가 대신하여 은공을 갚도록 하며,
6 비록 공사 천인이라도 관청이나 원 주인에게 돌려주지 말며,
7 만약 기르기를 자원하는 자가 없으면 제생원에게 전례대로 구호하여 기르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8 ○ 7월 15일에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무릉도(울릉도)가 비록 본국의 땅이긴 하오나,
9 바다 가운데 절역에 위치하였으므로 나라에서 현읍을 설치하지 않은 지 오래이온데,
10 그 온 가족이 도피 은익한 자는 본국을 배반함과 다름이 없사오니,
11 청하옵건대, 그 정상을 국문하도록 하옵소서." 하니, 그대로 따르고,
12 인하여 강원도 감사에게 전지하기를 "무릉도에서 포획해 온 사람들을 그 도피한 죄만을 추궁하고서
13 위로와 온정을 가하지 않는다면, 혹 무더위에 상하여 질병이 발생하거나 혹은 기아와 피곤에 빠질까 염려된다.
14 경은 마땅히 극진한 구제와 보호를 가하도록 하라." 하였다.
15 ○ 10월 4일에 맹사성이 79세로 죽었다. 신창 사람이었다.
16 ○ 세종 21년(1439) 12월 28일에 좌의정 허조가 71세의 나이로 죽었다. 두 아들이 있으니 허후와 허눌이다.
17 ○ 세종 23년(1441) 6월 3일에 오량합 유자가 사람을 때려 죽였으므로,
18 유사가 마땅히 사형할 것으로써 논죄하니,
19 특별히 그 죄를 용서하고 저자에 3일 동안 세웠다가 장 1백 대에 처하였으니, 야인에게 우대하는 뜻을 보인 것이었다.
20 ○ 9일에 오도리 송고로부리개를 호군으로 삼고, 의복, 안마, 포화를 내려 주었다.
21 ○ 7월 23일에 왕세자빈 권씨가 동궁 자선당에서 원손을 낳아 임금이 말하기를 "세자의 연령이 이미 장년이 되었는데도, 후사가 없어서 내가 매우 염려하였다.
22 이제 적손이 생겼으니 나의 마음이 기쁘기가 진실로 이와 같을 수 없다." 하였다.
23 24일에 왕세자빈 권씨가 졸하였다.
24 병이 위독하게 되매, 임금이 친히 가서 문병하기를 잠시 동안에 두세 번에 이르렀더니, 죽게 되매
25 양궁이 매우 슬퍼하여 수라를 폐하였고, 궁중의 시어들이 눈물을 흘리며 울지 않는 이 없었다.
26 ○ 8월 18일에 호조에서 아뢰기를 "각도 감사가 우량(雨量)을 전보하도록 이미 성법이 있사오니,
27 토성의 조습이 같지 아니하고, 흙속으로 스며 든 천심도 역시 알기 어렵사오니,
28 청하옵건대, 서운관에 대를 짓고 쇠로 그릇을 부어 만들되, 길이는 2척이 되게 하고 직경은 8촌이 되게 하여,
29 대 위에 올려 놓고 비를 받아, 본관 관원으로 하여금 천심을 척량하여 보고하게 하고,
30 수령이 역시 물의 천심을 재어서 감사에게 보고하게 하고, 감사가 전문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31 ○ 세종 24년(1442) 3월 16일에 대호군 장영실이 안여를 감조하였는데,
32 견실하지 못하여 부러지고 허물어졌으므로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게 하였다.
33 ○ 4월 27일에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대호군 장영실이 안여(安輿)를 감독하여
34 제조함에 삼가 견고하게 만들지 아니하여 부러지고 부서지게 하였으니,
35 형률에 의거하면 곤장 1백 대를 쳐야 될 것이며,
36 임효돈, 최효남도 안여를 감독하여 제조하면서 장식한 쇠가 또한 견고하게 하지 아니했으며,
37 대호군 조순생은 안여가 견고하지 않은 곳을 보고 장영실에게 이르기를,
38 '반드시 부러지거나 부서지지 않을 것이오.'라고 하였으니,
39 모두 형률에 의거하면 곤장 80개를 쳐야 될 것입니다." 하니,
40 임금이 장영실에게는 2등을 감형하고, 임효돈과 최효남에게는 1등을 감형하며, 조순생에게는 처벌하지 않도록 명하였다.
41 ○ 5월 3일에 임금이 박강, 이순로, 이하, 장영실, 임효돈, 최효남의 죄를 가지고 황희에게 의논하게 하니,
42 여러 사람이 말하기를 "이 사람들의 죄는 불경에 관계되니, 마땅히 직첩을 회수하고 곤장을 집행하여 그 나머지 사람들을 징계해야 될 것입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22 ○ 세종 25년(1443) 2월 13일에 함길도 도관찰사와 도절제사에게 전지하기를 "들어와 귀화한 야인으로서 본국 내지에 살기를 원하는 자를,
2 서울에 치계하여 회보를 기다려서 처치하려면, 내왕하는 날짜가 오래 걸려서 혹 농사짓기에 때를 잃게 될 것이니,
3 이 뒤로는 내지에 살기를 원하는 자가 있거든 경 등이 적당하게 생각하여 조치하되,
4 길주 이남에 기름진 토지와 완전 구비된 집을 골라 들어 살게 하고, 곧 식구를 헤아려 의복•양식•소금•간장을 주고,
5 첫해 농사에는 관에서 사람과 소를 주어 도와주게 하여서 그들로 하여금 생업에 편안하게 하라." 하였다.
6 ○ 4월 19일에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세자가 정사를 섭행하도록 한 것과 남면하여 조회를 받는 것에 대한 부당함을 상소하다
7 20일에 영의정 황희, 우의정 신개, 하연, 황보인, 권제, 이숙치 등이 대궐에 나아와서 아뢰기를,
8 "세자에게 신이라 칭하면서 조회를 받게 하면, 지존에게 혐의스러운 뿐만 아니라,
9 더군다나 자선당과 승화당은 이미 지존께서 임어하시는 처소이니, 더구나 불가합니다." 하니,
10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고집하여 여러 신하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 아니다.
11 나의 병이 나을지 아니 나을지는 한 해 한 달을 한정하여 기대할 수가 없고, 나날이 심해지고 감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12 지금 나도 병으로서 세자에게 섭정하게 하는 것인데, 무슨 불가한 것이 있는가." 하매,
13 희 등이 다시 아뢰기를 "만일 부득이하다면 세자는 동궁 정문 동쪽에 앉고, 여러 신하가 재배례를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므로,
14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의 말이 이와 같으니 나의 마음도 또한 편하다.
15 여러 신하가 비록 세자에게 신이라 칭하지 않더라도 가하나,
16 사부와 종친 존장이 조참 할 때에 세자가 행할 모든 예절을 고금을 참작하여 보고하도록 하라." 하였다.
17 ○ 5월 16일에 왕세자가 섭정하는 제도를 정하다
18 ○ 22일에 전지하기를 "금후에는 열흘에 한 번씩 정사를 보겠으나,
19 혹 직접 계달하여야 할 공사가 있으면 열흘이라는 기한에 구애되지 말라." 하였다.
20 ○ 5월 28일에 오도리 상호군 동나송개가 우지개 상호군 김토두와 사이가 좋지 않으므로,
21 임금이 야인으로서 귀화하여 서울에 거주하는 사람을 승정원에다 불러 모으고,
22 우찬성 황보인, 예조 판서 김종서에게 명하여 타이르게 하고 드디어 음식을 먹이니,
23 나송개가 마침내 토두와 화해하고 형제의 의를 맺었다.
24 ○ 8월 11일에 예조에 전지하기를 "수륙(水陸)에서 방수(防戍)하던 자와 경외(京外)에서 부역하다가 변(變)을 만나 목숨을 잃은 자와,
25 적에게 살해당하고 포로된 자는 부의(賻儀)를 주고 복호해 주도록 이미 일찍이 입법하였거니와,
26 그 공무로 인해서 비명(非命)에 죽은 자만은 부의를 주지 아니하고 복호도 하지 않으니 실로 잘못된 법이다.
27 이제부터는 공무로 인해서 비명에 죽은 자는 배 타던 군사가 물에 빠져 죽은 예에 의하여 쌀과 콩 2석을 주고 3년 동안 복호하여, 휼전(恤典)을 넓히고,
28 또 공무로 인해서 물고(物故)한 자는 그 고을에서 치제하도록 역시 그 법이 있는데,
29 각 고을 수령들이 혹은 거행하지 아니하니, 금후에는 모름지기 곧 거행하고
30 본조에 이문하여 아뢰게 해서, 후일의 빙고(憑考)가 되게 하라." 하였다.
31 ○ 12월 30일에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는데,
32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 중성, 종성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33 무릇 문자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34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轉換)하는 것이 무궁하니,
35 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일렀다.
36 ○ 세종 26년(1444) 2월 16일에 집현전 교리 최항, 박팽년, 신숙주, 이선로, 이개, 강희안 등에게 명하여
37 의사청에 나아가 언문으로 운회를 번역하게 하고,
38 동궁과 진양 대군 이유, 안평 대군 이용으로 하여금 그 일을 관장하게 하였는데,
39 모두가 성품이 예단하므로 상을 거듭 내려 주고 공억하는 것을 넉넉하고 후하게 하였다.
40 ○ 20일에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상소하기를 "신 등이 엎디어 보옵건대, 언문을 제작하신 것이 지극히 신묘하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혜를 운전하심이 천고에 뛰어나시오나,
41 신 등의 구구한 좁은 소견으로는 오히려 의심되는 것이 있사옵니다.
42 설혹 말하기를, '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본뜬 것이고 새로 된 글자가 아니라.' 하지만,
43 글자의 형상은 비록 옛날의 전문(篆文)을 모방하였을지라도
44 음을 쓰고 글자를 합하는 것은 모두 옛 것에 반대되니 실로 의거할 데가 없사옵니다.
45 만일 중국에라도 흘러 들어가서 혹시라도 비난하여 말하는 자가 있사오면,
46 어찌 대국을 섬기고 중화를 사모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사오리까.
47 ○ 오직 몽고, 서하, 여진, 일본, 서번의 종류가 각기 그 글자가 있으되, 이는 모두 이적의 일이므로 족히 말할 것이 없사옵니다.
48 옛글에 말하기를, '화하를 써서 이적(夷狄)을 변화시킨다.' 하였고, 화하가 이적으로 변한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49 이제 따로 언문을 만드는 것은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이적과 같아지려는 것으로서,
50 이른바 소합향(蘇合香)을 버리고 당랑환(螗螂丸)을 취함이오니, 어찌 문명의 큰 흠절이 아니오리까.
51 ○ 만약 우리 나라가 원래부터 문자를 알지 못하여 결승(結繩)하는 세대라면
52 우선 언문을 빌어서 한때의 사용에 이바지하는 것은 오히려 가할 것입니다.
53 그래도 바른 의논을 고집하는 자는 반드시 말하기를, '언문을 시행하여 임시 방편을 하는 것보다는
54 차라리 더디고 느릴지라도 중국에서 통용하는 문자를 습득하여 길고 오랜 계책을 삼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할 것입니다.
55 하물며 이두는 시행한 지 수천 년이나 되어 부서(簿書)나 기회(期會) 등의 일에 방애됨이 없사온데,
56 어찌 예로부터 시행하던 폐단 없는 글을 고쳐서 따로 야비하고 상스러운 무익한 글자를 창조하시나이까.
57 ○ 이제 넓게 여러 사람의 의논을 채택하지도 않고 갑자기 이배 10여 인으로 하여금 가르쳐 익히게 하며,
58 또 가볍게 옛사람이 이미 이룩한 운서(韻書)를 고치고 근거 없는 언문을 부회(附會)하여
59 공장(工匠) 수십 인을 모아 각본(刻本)하여서 급하게 널리 반포하려 하시니, 천하 후세의 공의(公議)에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60 ○ 임금이 소를 보고, 만리 등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이 이르기를, '음(音)을 사용하고 글자를 합한 것이 모두 옛 글에 위반된다.' 하였는데, 설총의 이두도 역시 음이 다르지 않으냐.
61 또 이두를 제작한 본뜻이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함이 아니하겠느냐. 만일 그것이 백성을 편리하게 한 것이라면 이제의 언문은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한 것이다.
62 너희들이 설총은 옳다 하면서 군상의 하는 일은 그르다 하는 것은 무엇이냐.
63 또 네가 운서(韻書)를 아느냐. 사성 칠음에 자모가 몇이나 있느냐.
64 만일 내가 그 운서를 바로잡지 아니하면 누가 이를 바로잡을 것이냐." 하고
65 ○ 임금이 말하기를 "전번에 김문이 아뢰기를, '언문을 제작함에 불가할 것은 없습니다.' 하였는데, 지금은 도리어 불가하다 하고,
66 또 정창손은 말하기를, '삼강행실을 반포한 후에 충신, 효자, 열녀의 무리가 나옴을 볼 수 없는 것은, 사람이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이 사람의 자질 여하에 있기 때문입니다.
67 어찌 꼭 언문으로 번역한 후에야 사람이 모두 본받을 것입니까.' 하였으니,
68 이따위 말이 어찌 선비의 이치를 아는 말이겠느냐. 아무짝에도 쓸데 없는 용속(庸俗)한 선비이다." 하였다.
69 먼젓번에 임금이 정창손에게 하교하기를 "내가 만일 언문으로 삼강행실을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가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 효자, 열녀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이다." 하였는데,
70 창손이 이 말로 계달한 때문에 이제 이러한 하교가 있은 것이었다.
71 임금이 또 하교하기를 "내가 너희들을 부른 것은 처음부터 죄주려 한 것이 아니고, 다만 소(疏) 안에 한두 가지 말을 물으려 하였던 것인데,
72 너희들이 사리를 돌아보지 않고 말을 변하여 대답하니, 너희들의 죄는 벗기 어렵다." 하고,
73 드디어 최만리, 신석조, 김문, 정창손, 하위지, 송처검, 조근을 의금부에 내렸다가 이튿날 석방하라 명하였는데,
74 오직 정창손만은 파직시키고, 인하여 의금부에 전지하기를 "김문이 앞뒤에 말을 변하여 계달한 사유를 국문하여 아뢰라." 하였다.
23 ○ 세종 26년(1444) 윤7월 24일에 형조에 전지하기를 "우리 나라의 노비의 법은 상하의 구분을 엄격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2 강상이 이것으로 말미암아 의지할 바를 더하는 까닭에, 노비가 죄가 있어서 그 주인이 그를 죽인 경우에 논의하는 사람들은 상례처럼
3 다 그 주인을 치켜올리고 그 노비를 억누르면서, 이것은 진실로 좋은 법이고 아름다운 뜻이라고 한다.
4 그러나, 상주고 벌주는 것은 임금 된 자의 대권이건만, 임금 된 자라도 한 사람의 죄 없는 자를 죽여서,
5 선한 것을 복 주고 지나친 것을 화 주는 하늘의 법칙을 오히려 함부로 하지 못하는 것이다.
6 더욱이 노비는 비록 천민이나 하늘이 낸 백성 아님이 없으니, 신하된 자로서 하늘이 낳은 백성을 부리는 것만도 만족하다고 할 것인데,
7 그 어찌 제멋대로 형벌을 행하여 무고한 사람을 함부로 죽일 수 있단 말인가.
8 임금된 자의 덕은 살리기를 좋아해야 할 뿐인데,
9 무고한 백성이 많이 죽는 것을 보고 앉아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금하지도 않고
10 그 주인을 치켜올리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나는 매우 옳지 않게 여긴다.
11 우리 나라의 노비는 대대로 서로 전해 내려오는 것으로서 명분이 매우 엄중하여 중국의 노비와는 아주 다르니,
12 노비의 죄있는 자를 그 주인이 처벌하는 법도 실행한 지가 이미 오래된 것이니 갑자기 고치기는 쉽지 않다.
13 더욱이 사삿집의 은밀한 곳에서 죄 지은 노비를 그 주인이 어떻게 하나하나 율문을 상고하여 논죄할 수 있겠는가.
14 그것이 법에 의거하였는지 아닌지는 고핵(考覈)하기가 매우 어렵다.
15 그러나 그가 함부로 무고한 자를 죽이고도 그에 따른 가족은 그냥 계속하여 부리게 한다면,
16 이것이 어찌 백성을 사랑하고 형벌을 신중히 하는 뜻이겠는가.
17 지금부터는 노비가 죄가 있건 없건 간에 관에 진고(陳告)하지 않고 구타 살해한 자는 일체 옛 법례에 따라 과단(科斷)할 것이며,
18 만약 포락(炮烙), 의형(劓刑), 이형(刵刑), 경면(黥面), 고족(刳足)과 혹은 쇠붙이 칼날을 사용하거나,
19 큰 나무나 큰 돌을 사용하는 등 모든 참혹한 방법으로 함부로 죽인 자라도,
20 그 죽은 자의 가족이 자기의 노비가 아니면 속공(屬公)시키지 못하도록 한다.
21 만약 기복친(朞服親)이나 외조부모가 구타 살해한 것이라도 그 죽은 자의 가족이 살인에 관계된 자의 노비라면 또한 속공(屬公)하게 하라." 하였다.
22 ○ 세종 27년(1445) 1월 18일에 의정부에서 호조의 정문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23 "요동에 들어가는 사람이 있을 때마다 염소와 돼지를 사서 가져오게 하고,
24 또 통사로 하여금 먹여 기르고 불까는 법을 배워 익히게 하여
25 그대로 분예빈시 별좌를 삼아서 그 먹여기르는 것을 감독하게 하고,
26 또 전에 기르던 제사 소용의 중국 돼지는 토종과 잡종이 되어 몸이 작고 살찌지 않아서 제향에 합당하지 아니오니, 함께 사 가지고 오게 하사이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27 ○ 세종 28년(1446) 3월 24일에 왕비가 수양 대군 제택에서 훙하였다.
28 (왕비는 수양 대군의 어머니, 소헌왕후 이다. 후일에 왕비의 손자 단종이 수양 대군에 의해 폐위 되고 사사된다.)
29 ○ 12월 26일에 이조에 전지하기를 "금후로는 이과(吏科)와 이전(吏典)의 취재(取才) 때에는 훈민정음도 아울러 시험해 뽑게 하되,
30 비록 의리(義理)는 통하지 못하더라도 능히 합자(合字)하는 사람을 뽑게 하라." 하였다.
31 ○ 세종 29년(1447) 4월 20일에 이조에 전지하기를 "다음 식년(式年)부터 시작하되, 먼저 훈민정음을 시험하여 입격한 자에게만 다른 시험을 보게 할 것이며,
32 각 관아의 관리 시험에도 모두 훈민정음을 시험하도록 하라." 하였다.
33 ○ 10월 16일에 용비어천가 5백 50본을 군신에게 내려 주었다.
34 ○ 27일에 예조에 전지하기를 "금년에 도성 안에 창진(瘡疹)의 병이 전보다 배나 되어서,
35 백성들이 혹은 구료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고 혹은 조심하지 못하여 생명을 잃게 되는 자가 가끔 있으니,
36 병에 걸린 가호는 방리(坊里)의 역사를 면제하고 공천(公賤)은 평복될 때까지 역사를 시키지 말고
37 의원을 나누어 정하되, 증세에 따라 약을 주어서 치료하게 하라." 하였다.
38 ○ 12월 23일에 형조에서 상신하기를 "김의정, 안의생 등이 사람이 사람의 고기를 먹었다고 말을 지어냈으니
39 요언(妖言)을 조작한 율로 죄를 주면 죄가 참형에 해당합니다." 하니,
40 명하여 1등을 감하고, 전 가족이 변방 고을에 입거(入居)하게 하였다.
41 ○ 세종 30년(1448) 7월 19일에 하연, 정인지 등이 불당 설치 불가를 또 간하였으나 듣지 아니하다.
42 (불당 설치 불가를 청하는 일은 7월 17일 부터 10월 까지 계속 되었다.)
43 ○ 세종 31년(1449) 6월 4일에 전지하여 정원에 명하기를 "금후로는 사대(事大)와 제향(祭享) 때의 따로 의논할 일,
44 크고 작은 군사 움직이는 일, 당상관을 제수하는 일, 과죄 하는 일 이외의 나머지 여러 사무는 모두 세자로 하여금 듣고 결단하게 하라." 하였다.
45 ○ 7월 24일에 세자가 함원전에서 자는 것이 불가하다는 청에 윤허하지 아니하다.
46 ○ 10월 25일에 세자에게 등창이 생기니, 여러 신하를 나누어 보내 기내의 명산, 대천과 신사, 불우에 빌게 하고, 정부, 육조, 중추원에서 날마다 문안드리게 하였다.
47 ○ 11월 14일에 승정원에게 전지하기를 "동궁의 병이 오래 되었으나 아직도 차도가 없는데,
48 정월 이전에 아뢸 일도 반드시 재가를 얻지 못하였을 것인즉, 모든 서무는 내가 친히 결정할 것이니 혹시라도 지체하지 말고 계문하도록 하라." 하였다.
49 ○ 12월 25일에 세자에게 또 종기가 났으므로 여러 신하를 나누어 보내, 기내의 신사와 불우에 기도하게 하였다.
50 ○ 세종 32년(1450) 1월 18일에 임금과 동궁이 몸이 불편하여 조서를 맞이하는 방법에 대해 대신들과 의논하다.
51 ○ 1월 23일에 중 53명을 모아 구병 정근을 시어소에서 베풀고, 종묘와 사직에 기도하게 하며, 여러 신하를 나누어 보내어 경내의 명산 대천에 기도드리게 하였다.
52 ○ 29일에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채붕 할 때에 조사의 처첩이 부계(浮階)를 매고 구경하는데,
53 남녀 족속이 그 속에 섞여 있으니, 청하옵건대, 이를 금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54 ○ 2월 17일에 임금이 영응 대군 집 동별궁에서 훙하였다.
55 임금은 슬기롭고 도리에 밝으매, 마음이 밝고 뛰어나게 지혜롭고, 인자하고 효성이 지극하며,
56 지혜롭고 용감하게 결단하며, 합(閤)에 있을 때부터 배우기를 좋아하되 게으르지 않아, 손에서 책이 떠나지 않았다.
57 일찍이 여러 달 동안 편치 않았는데도 글읽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태종이 근심하여 명하여 서적을 거두어 감추게 하였는데,
58 사이에 한 책이 남아 있어 날마다 외우기를 마지 않으니, 대개 천성이 이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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