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경험
첫날 서울역에 도착하니 봄비가 곱게 내리고 있었다.
역사 3층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나와서 택시를 탔다. 가방이 있으니 먼저 숙소로 가서 짐을 풀어놓고 일정을 시작하기로 했다.
지하철 1호선 서울역에서 가까운 대방역에 있는 서울 여성프라자 호텔(?)이다.
전에 부산 여성회 따라 한 번 가서 묵었던 곳인데, 시내 가깝고 서울 여성회 단체에서 운영하는 곳이라서 안전하고 편할 것 같아서 미리 예약해두었다.
10평 정도의 양실 방은 환하고 깨끗하고 마음에 들어서 일주일 묵기에 좋을 것 같고, 시작이 좋으니 끝까지 다 좋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숙소 바로 앞이 전철역이어서 교통은 정말 편한데 잘 잡았다 싶었다.
신분증과 500 원짜리 동전을 넣고 나오는 경로 우대표를 서울을 떠날 때까지 많이 사용했다.
500원 동전 하나로 넣고 찾고 하며 일주일을 계속 써서 동전 하나에 대한 가치도 새로 가지게 되었다.
전철로 종로 3가역까지 가서는 택시를 타고 첫 코스인 삼청공원으로 갔다.
벚꽃이 아름답다 하여 공원을 돌고, 삼청동 길을 내려와서 경복궁 옆에 있는 국립현대 미술관으로 거쳐 저녁 식사를 하고, 광화문 거리를 걸어서 세종 문화회관 공연으로 첫날을 마감하려 했다.
보슬비가 내리며 한창인 벚꽃이 꽃비가 되어 흩날리는 삼청공원 길은 안개에 젖어 아주 환상적이었다. 곱게 내리는 봄비가 그렇게 운치 있는 줄도 그날 처음 느껴보는 듯 했다. 우산 하나씩 쓰고 깊은 호흡으로 숨을 들이 마시며 촉촉한 향기 가득한 공기를 맛보며 아름다운 숲에 홀려 말을 잃고 천천히 걷기만 해도 행복했다.
삼청동 길은 예전 한적하고 고즈넉하던 곳은 어디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아주 예쁘고 아기자기하고 개성 만발인 상점들로 꽉 채워져 눈을 놀라게 하였다. 독특하고 기발한 간판들 하나하나 읽으며 웃고, 이상하게들 꾸며 놓은 상점 디자인에 놀라서 탄성 지르며 내려왔다.
웅장하고 규모 큰 것만이 아름답고 볼거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친구는 유럽 어느 길보다 더 정감 있고 눈이 호강하는 것 같다며 좋아했다.
과천 국립미술관과 시청 쪽에 있는 시립 미술관은 가 본 적이 있어서 새로 생긴 국립 현대미술관을 코스로 넣었다. 미술관 앞마당도 너르고 건물 안도 높고 널찍널찍 하여서 다니는데 힘이 들었다. 작품도 현대미술 쪽은 우리 같은 노친네에게는 ‘아! 이런 것도 예술이라 하구나.’ 하는 경이로움은 주지만 감동은 별 다가오지 않아 큰 재미는 없었다.
정독 도서관 근처에 알아 논 맛집에서 저녁을 먹으려했으나 저질 체력으로 꼼짝하기 싫어서 미술관 안의 레스토랑에서 쉴 겸 식사를 했다. 들어 갈 때는 테이블에 몇 군데 손님이 있었으나 우리가 식사를 마치고 둘러보니 넓은 홀에 달랑 우리만 있다. 저녁 시간이 일러서 그러나 하며 이야기 나누는데 조금 있다 문 닫는다고 나가달라고 한다.
“이제 겨우 6시20분인데 나가달라니요?”
“미술관에 딸려 있어서 주말은 9시까지, 평일은 6시 30분까지입니다.”
우린 8시 [캣츠]공연을 보기 위해 7시까지는 느긋하게 쉬면서 힘을 보충하려 했는데.....
여행 둘째 날에 예약했던 공연을 자리가 더 좋다고 첫날로 바꾸며 체력 걱정도 들었는데, 기차도 안자서 오고, 공연도 안자서 보는 거라 괜찮을 거다 싶었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KTX 타고라도 좀 무리였는지 힘에 부쳤다.
무거워진 다리를 끌면서 경복궁 담장 길을 따라 걸었다.
담길 모퉁이에 젊은 의경이 부동자세로 서 있어서 가서 슬며시 말을 물었다.
“앞의 이 종각이 혹시 보신각 종이예요?”
“아닙니다.”
“그럼 무슨 종각이에요?”
무어라고 대답했는데 지금은 기억이 안 난다. 나도 아닌 줄은 알면서 경직돼 서 있는 그 젊은이와 지친 나도 같이 대화를 나누며 잠깐이지만 웃고 싶었다. 감사하다 고맙다 상냥하게 말하며 피로도 순간 서로 잊게 해 주고 싶었다.
광화문 거리를 느릿느릿 걸어서 일찍 입장하여 로비에서 오래 쉬며 기다리다 드디어 꿈에 그리던 공연을 보았다. 감동과 환희가 밀려와 여한이 없다는 생각까지 들며 피로도 어디로 다 증발하고 기쁨으로 충만하여 전철을 타고 숙소에 찾아갔다. (공연 이야기는 따로 해야 한다)
시간은 자정쯤으로 가고 있었는데 그 큰 숙소의 정문과 옆문이 모두 잠겨있었다. 정문 앞에서 두드리다 안 되어 전화번호를 찾아 다급하게 상황을 말했다. 그러는데 인터넷으로 예약하며 밤 10시에는 안전을 위해 문을 닫는다는 조항이 그제야 슬며시 기억났다.
문 옆에 비상벨을 누르라 하는데 어둡고 벨이 여러 개여서 이것저것 막 눌러대도 안 열려 다시 전화 걸려하니 경비 아저씨가 나와서 문을 열어주며 벨 하나 제대로 못 찾는 우리를 한심해 하는 것 같았다.
우여곡절 끝에 따뜻한 우리의 방에 들어오고, 친구가 한마디 하여 빵 터지며 실컷 웃고 첫날밤이 지나갔다.
“아이구! 하루가 길기도 하구, 재미도 있구, 또 평생에 처음 해보는 경험도 두 가지나 있었네.”
“무슨 첫 경험이라니?”
“야, 식당에서 저녁밥 먹고 6시 조금 넘자 쫓겨나제, 영업하는 숙소에서 10시 넘었다고 문 잠그제, 그기 보통 접할 수 있는 경험이가.”
“뭐? 정말 말 되네.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