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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량진 왜변 전후의 조선 전기 대일관계 -청천산악회 2013. 06.16. 통영시 사량도 등산을 하며
이 재 익. 시인, 청천 17기 소답자한 제55호에서
사천시 삼천포항에서 배를 타고 사량도로 갔다 삼천포항 출발→ 돈지항 도착 → 지리망산, 가마봉 → 옥녀봉 → 대항 승선→ 삼천포항으로 되돌아오는 코스다. 오전에 갈 때는 옅은 해무가 끼었다. 바다물의 온도와 육지의 지온이 급격히 차이가 심해져서 해무가 많이 끼는 철이다. 해무 속에 남해군 창선도로 들어가는 삼천포 대교의 은은한 모습이 아름답다. 다리에 둥근 아치가 보이는 섬은 늑도이다. 죽방렴 멸치잡이 시설 옆을 지나며, 해무와 유람선, 어선, 멀리 수우도가 어우러지는 해상 풍경은 환상적이다.
한 시간 걸려 사량도 돈지항에 도착했다. 사량도의 윗섬이다. 하선하여 항으로 쏟아지는 등산객중 대부분은 청천(동아고) 동문 산악회원이다. 오늘 버스 5대에 203명이라는 대규모 등산단체다. 돈지항 마을에는 송엽국을 가꾸어 놨다. 송엽국은 여름철에 흔히 볼 수 있는 화초로, 채송화 같은데 채송화는 아니고 잎은 채송화 같고, 꽃은 국화 같은 다년생 풀꽃으로 일명 사철채송화라고도 한다. 담장 벽에다 벽화도 아름답게 그렸다.
불모산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근사한 사량도 등산이구나 하는 느낌이 온다. 바위가 날카롭고 한발 헛디뎌서는 안 되는 난코스다. 앞사람이 엉금엉금 기니 뒷사람도 따라서 긴다. 전차복후차계前車覆後車戒, 넘어진 앞차보고 뒤차가 조심한다는 격이다. 내 안에 속삭이는 열정을 다 쏟아 붓는다. 그 열정은 땅에 쏟아지지 않고 푸른 하늘 속으로 흩어진다. 돌아갈까? 어정쩡해 하는 사람도 보이고, 아예 우회하기도 한다. 마찰을 만들기 위해 신선이 도끼로 덕지덕지 깎아둔 것이라는 느낌도 든다. 인생에는 언제나 발밑에 돌부리가 있다.
모두들 탄성을 지르고, 미소를 띠는 것은 힘들다는 것인가. 멋지다는 것인가? 무섭다는 것인지? 미소는 언제, 어느 때, 누구를 봐도 좋다. 그러나 바로 눈앞의 미소가 더 감동적이다. 발 디디고 올라설 바위 공간이 정원초과인데 통제할 방법이 없다. 기어오르고 내리는 게 최고다. 산에는 왜 담쟁이가 왜 없을까? 마을에서만 사나? 우리는 모두 오늘 움직이는 담쟁이가 되었다.
바위는 왜 산에만 많은가? 바위가 없으면 산이 아니지. 마음에 절벽이 오거든. 절벽은 단절이 아니라. 받쳐주는 기초다. 사람은 험상궂으면 피하는데, 바위는 험악할수록 즐겨 찾는다. 우회하는 길도 만만찮다. 돌아보니 뒤 따라 오는 사람이 조심해서 걷느라고 하늘이 궁금해 수형이 우뚝 솟았으나, 통통한 노간주나무의 멋진 모습을 감상할 여유도 없다.
불모산을 지나 가마봉과 옥녀봉으로 오르락내리락 한다. 돈지항은 멀어 지고, 금평항과 대항이 다가 온다. 아, 멋진 옥녀봉 정상의 이음다리 셋! 종전에는 밧줄과 줄사다리 때문에 인명사고가 더러 있었지만, 이제는 데크 계단길이나 출렁다리가 잘 구비되어 많이 안전해졌다.
옥녀봉을 향하여 가면, 왼쪽 마을이, 오늘 등산 후 돌아가는 배를 타게 될 대항 해수욕장 마을이고, 바다 건너 육지는 고성군이다. 옥녀봉을 향하여 오른 쪽은 금평항이고 마을 앞에 동강이라는 해협을 건너 사량도의 아랫섬이 있다. 윗섬과 아랫섬 사이에 교량건설이 한창이다. 지도를 보니 건너편인 아랫섬이 더 커 보인다. 그러나 절경은 여기 윗섬이고, 사량면사무소가 있으며, 역사적 유적이 있다.
금평항 마을을 진촌, 진리라고 한다. 진촌이란 조선시대 사량진이란 수군 군사 기지가 있었다는 것이며, 수군만호가 주둔하여 행정과 군사를 지휘하였다. 진촌에는 사량초등학교와 사량중학교가 있고 왜구 격퇴에 공을 세운 최영장군 사당(도 문화재 32호)이 있다. 진촌 마을 만호의 선정비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우물벽으로 사용되어 우물 안에 있는 것을 2012년에 꺼내서 사량진 만호 선정비 5기를 정비 복원했다고 한다.
사량진은 조선시대는 종4품의 만호가 주둔하는 만호진이며, 병선의 초계 정박처로, 성종 21년에는 사량진성을 축성, 조선수군의 중요거점이었다. 이 진촌과 동강에서 사량진왜변이 일어난 것은 특기 할만하다. 절경에 올라서 사량진왜변을 전후한 조선 초기의 대일외교 관계의 무거운 역사를 회상해 보기로 한다.
♣ 고려 말 조선 초에 남해안 일대는 왜구들이 극성을 부렸다. 고려 말에 최영, 이성계, 박위, 최무선 장군 등이 왜구 격퇴에 공을 세웠고, 조선 초 세종 때 1419년에 이종무 장군이 쓰시마섬을 정벌하였다.
♣ 세종때 : 쓰시마정벌→ 삼포개항→ 계해약조로 전개 되었다. 세종은 왜구 회유와 교린정책을 위하여 쓰시마 도주의 간청을 받아들여 제포(=내이포 ; 진해 웅천인), 부산포, 염포(울산)의 삼포三浦를 개항하였다. l443년(세종 25) 대마도주와 계해약조癸亥約條를 맺었다. 변효문卞孝文과 일본의 쓰시마 도주 소 사다모리宗貞盛가 세견선歲遣船(=무역선) 등 무역규정을 정한 것이다.
♣ 계해약조의 중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세견선(무역선)은 1년에 60척으로 하고 이들에게는 식량을 지급한다. -삼포에 머무르는 자의 날짜는 20일로 한하되, 상경한 자의 배를 지키는 간수인看守人은 50일로 정하고 이들에게도 식량을 지급한다. -조선에서 왜인에게 주는 세사미두歲賜米豆(원조하는 쌀 하사)는 쌀과 콩을 합하여 200섬으로 제한한다.
세종은 왜인들의 성품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먼저 위세를 떨쳐 이종무로 하여금 그들을 정벌하게 한 다음, 다시 은정恩情을 베풀어 그들의 살길을 열어주었다. 조선은 이때 일본인들에게 베풀었다. 특히 대마도에.
♣ 계해약조 이후의 조일 관계는 삼포왜란→ 임신약조→ 사량진왜변→ 정미약조→ 을묘왜변→ 단절→임진왜란 순으로 전개 되어 나갔다.
♣ 1510년(중종 5), 삼포왜란三浦倭亂 -계해약조 체결 당시 60명에 한하여 허가한 거류민의 수가 세종 말년에는 약 2,000명으로 증가하였다. 점차 교만, 조정의 명을 어겨, 중종이 즉위하자 개혁의 일환으로, 일본인들에 대한 통제가 더욱 심해졌다. 일본인들은 이에 불만을 품고 결국 터진 것이 삼포왜란이다. 1510년(중종 5)이다.
-3포의 일본인들은 쓰시마 일본인의 원조를 얻어 4,000~5,000명으로 폭동을 일으켰다. 한때 내이포(제포),부산포를 함락시키고 웅천熊川을 격파하였으므로, 조정에서 황형黃衡,유담년柳聃年을 慶尙左右道防禦使로 임명하여 응전, 대파하였다. -너희들은 상종을 못하겠다. 3포에서 모두 나가달라! 그 결과 3포의 일본거류민을 모두 추방하였다.
♣ 삼포왜란 결과 → 임신약조壬申約條 체결 -당시 아시카가 바쿠후足利幕府 정권이 다시 수교할 것을 간청하였고, 對조선 교역에 의존해오던 왜인들은 당장 생활에 곤란을 느껴, 쓰시마도주는 조선과의 통교 재개를 위해 왜란의 주모자를 참래斬來(머리를 베어서 가져옴)하고, 포로를 송환하며 사죄하는 등 성의를 보였기 때문에 조선은 또 못이긴 척 하고 임신약조로 들어줬다. 1512년 중종 7년이다. 물론 조선과 일본을 대표한 쓰시마도주對馬島主 사이에 맺은 조약이다.
-9개 항목이지만 임신약조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ㅇ 왜인들의 3포의 거주를 불허하고 단 내이포에서만 거주를 허한다. ㅇ 도주島主의 세견선歲遣船 50척을 25척으로 반감한다. ㅇ 세사미두歲賜米豆는 200섬에서 100섬으로 반감한다. 일본은 난을 일으켰다가 혜택이 반감되는 손해를 감수해야 했다.
♣ 사량진왜변蛇梁鎭倭變→ 정미약조丁未約條 ; -임신약조로 왜인의 활동은 상당히 제약을 받아, 왜인의 행패는 여전히 계속되었다. -이 무렵의 일본은 군웅활거의 전국시대였기 때문에 국내가 혼란하자 왜구가 다시 일어나게 된 것이다. -1544년 4월, 20여척의 왜선이 사량진의 동쪽 강구로 쳐들어와 200여명의 적이 성을 포위하고 만호 유택과 접전하여 수군 1인을 죽이고, 10여인을 부상 시킨 뒤 사람과 말馬을 약탈해 갔다. 이 왜란의 규모는 삼포왜란과는 비할 바 아니게 가벼웠으나, 대외 관계에 있어서 또 하나의 커다란 전환점이 됐다.
-이 사량진왜변으로 조정은 갑론을박하였지만, 외교관계를 단절할 경우 왜구가 다시 일어날까 염려되어 국왕사및 우리나라와 긴밀한 관계에 있는 오우치(大內) 쇼오니(小二) 등에는 통교를 허락하였으나 대마도에는 허락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대마도주가 왜구의 움직임을 알면서도 방임하였기 때문이었다. 한편 국왕사에 대해서는 영봉선迎逢船(국왕사의 배가 돌아갈 때 마중 나오는 배) 이란 무역제도를 허용하였다. 또 이 사량진왜변을 계기로 병조의 건의에 의해 가덕도에 진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일본 측의 간절한 요청과 중종의 거상居喪(장례식)도 끝났기 때문에 1547년 명종2년에 정미약조丁未約條를 체결하고 통교를 허락하였다. ㅇ 세견선歲遣船은 25척으로 제한 ㅇ 풍랑 일기불순을 이유로 가덕도 서쪽에 내선하는 일본인은 왜적으로 간주한다. 정미약조, 이 조약으로 통교는 재개되었으나 전과 같이 평화로운 관계는 유지되지 못하였다. 일본 자체의 혼란으로 다시 왜구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 을묘왜변乙卯倭變 -1555년, 조선 명종 때 왜구가 전남 영암, 강진, 진도, 장흥 일대에 배 70여 척으로 침입하였다. 영암靈岩의 달량성達梁城, 어란포於蘭浦, 진도珍島의 금갑金甲, 남도南桃 등의 보루堡壘를 불태우고 만행을 자행하였고 강진康津, 장흥長興에도 침입하였다. -이를 막던 전라병사 원적元積과 장흥부사 한온韓蘊 등이 전사하고, 영암군수 이덕견李德堅은 사로잡히는 등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조정은 호조판서 이준경李浚慶을 도순찰사, 김경석金慶錫, 남치훈南致勳을 방어사로 삼아 영암에서 이를 크게 무찔렀다.
- 왜구가 물러간 후 쓰시마 도주는 을묘왜변에 가담한 왜구들의 목을 베어 보내 사죄하고 세견선의 부활을 거듭 요청하였으므로 정부에서는 이를 또 승낙하였으나, 단지 세견선 5척만을 허락하였기 때문에 사실상 임진왜란 발생 전까지는 대일 통상 외교가 거의 단절된 상태가 계속되었다.
* 1555년 을묘왜변은 달량포에서 시작됐는데 당시 지명으로는 영암이라 했는데, 그 위치를 가늠해 보니 현재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면 소재지인 남창리로 확인 된다. 완도와 가까운 해남의 남부이다. 당시 거기가 영암에 소속이었나? 여기에서 사량진왜변을 전후한 조선 전기 한일 관계 얘기를 마무리한다. 두 산봉우리를 가교가 연결해 주듯이, 예나 지금이나 나라와 나라 사이를 연결하는 외교 통상 교류는 어려운 일이다.
전설이라도 좀 산듯한게 좋은데~ 옥녀봉 전설은 구질구질해서 잊어야 하겠다. 아버지가 딸을 탐했다. 아마도 치매 걸려서 딸을 알아보지 못한 노인이었을 것이다. 딸은 정상에 오시면 허락하겠다고 했고, 아버지가 설마 그 체력으로 옥녀봉을 오르겠느냐고 생각해서 한 말인데, 정말 아버지가 올라오자 절벽으로 몸을 날렸다는 슬픈 전설이다. 산봉우리가 험하다 보니 생각해 낸 전설일 게다. 그렇지만 윤리 도덕에도 맞지 않는 해괴한 전설이다.
이제 하산 길이다. 동강쪽으로 내려가다가 돌아서 북쪽 사면 대항으로 간다. 백척간두百尺竿頭라더니 10척간석은 된다. 오늘 흘린 땀으로 마음은 날개가 달려 하늘을 나는 신선이 된 기분, 우화등선羽化登仙이다. 통영시는 절경도 많다. 암벽 밑으로 어려운 길을 만들어 놨다. 이 등산코스 정비는 최근에 완성되었다. 통영시가 수고하였다. 현 시장이 우리 고교 동기라 더욱 기분이 좋다.
멋진 수형으로 죽은 나무를 보니, 삶 속에 죽음이 섞여있는 것이고, 나비들이 땅을 핥아서 난리다. 아마도 과자가 흘러서 단맛이 스몄나보다. 키가 크고 하얀 개망초 꽃들, 하나 뜯어보면 개망초인데, 모이면 아름다운 꽃밭! 조화와 협동의 진정한 의미다. 야생화 마삭줄이며, 돼지감자, 잎 넓고 푸르게 싱싱한데, 뿌리는 당뇨 변비에 좋다는 돼지감자 군락지가 관찰된다.
대항에서 타고 갈 배가 와 있다. 4시 20분에 출항한다. 배를 타고 뒤돌아보니 방금 보고 내려 온 옥녀봉의 출렁다리와, 바닷쪽으로 왼쪽 가장자리에 뾰족한 고동산(217m)이 한참 동안 선명하게 올려다 보인다. 어장의 하얀 부표, 어부들은 재단사, 바다를 재단하는 재단사다. 아침에 해무가 많이 끼었으나. 한낮에 걷혀 시야가 깨끗하고, 파도가 잔잔하여 일기가 좋다.
건너편 육지는 공룡 발자국이 있는 고성 상족암 해안이다. 삼천포 화력발전소가 나타난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고성군인데, 삼천포와 더 가까워 그런 명칭이 붙었나 보다. 늦은 오후 서쪽 바다의 번쩍이는 물비늘 너머로 삼천포 대교의 아름다운 모습은 아침에 해무 속에서 본 것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다.
멀리 삼천포 진산인 큰 산은 사천시의 명산인 와룡산이다. 삼천포 남일대 해수욕장이 멀리 보인다. 결국 우리는 저 남일대의 업소에서 단체가 목욕을 하였다. 남일대 해수욕장의 규모는 작아 코끼리 바위가 물을 졸일 듯하고 어둠은 또 즐거운 산행을 졸인다. ●
☞ 경남 통영시 사량도의 불모산~옥녀봉 등산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시려면 본 카페 <앨범_경남> 게시판에 4개 항목으로 사진을 안내 했으니 참고하세요.
사 량 도
이 재 익
불모산 절벽 바위 담쟁이, 앞사람 엉금기니 뒷사람도 따라기고 앞사람 돌아보면 뒷사람도 따라본다. 멀리 바라보는 발밑에는 언제나 돌부리가 있다.
옥녀봉 절벽위에 다리 셋 절벽은 단절과 세상 끝이 아니라, 받쳐주는 지주. 미소는 무섭다, 힘들다, 멋지다는 감동,
열정은 푸른 하늘에 흩어지듯 꽃이 되고 무덤위에 속절없는 개망초 꽃무리 하나 뜯으면 망초 모이면 꽃밭 조화 협동의 진정한 의미를 넘어 삶과 죽음도 아름답게 연결한다.
어선, 유람선, 죽방어장, 하얀 부표어장과 늑도, 창선, 수우, 사량도가 아침 해무 속에, 주저 앉은 물소 같더니, 땀방울 팍팍한 삶도 오후에는 유리알처럼 맑아진다고 서쪽 바다 반짝이는 물비늘 위에 경쾌한 삼천포대교가 가르쳐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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