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식인문화(6)
# 중국 정사에 나타난 식인의 시초
어제는 은나라시대의 식인사례를 게재했습니다만 그것은 정사에 기록된 사례는 아닙니다.
오늘은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즉.. 정사에 최초로 기록된 식인사례를 올리고자 합니다.
은왕조의 주(紂)왕은 대신인 구후의 딸이 절세미인이란 말을 듣고 아내로 삼았는데 그 아내가
너무도 정숙하고 외설을 좋아하지 않아 자신의 성적취향에 맞지않자 격노하고 그녀를 살해하고
그녀의 아버지 구후를 해(소금에 절인 육젓)으로 만들어 먹어버립니다.
신하인 곽후가 이를 강력히 말리자 주왕은 곽후를 포(脯:찢어 말린고기)로 만들어 먹어버립니다.
그밖에도 주왕은 자신에게 간하는 신하 익후를 자(炙:불고기)로 만들어 먹어버립니다.
또 신하 귀후는 포로 매백은 해를 만들어 먹어버렸습니다.
또 주왕은 신하인 황비호의 아내 경씨를 희롱하다 거절당하자 그녀를 해로 만들어 남편인 황비호에게
하사하고 먹게 합니다.
이에 황비호는 격노하여 군사를 일으켜 주왕을 제거하게 됩니다.
동물세계에서나 통하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인간에도 적용되는 적나라한 사례입니다.
# 식인의 시작 夏왕조시대
# 최초로 문헌에 기록된 식인풍습은 하나라때부터 시작합니다.
하왕조의 후예란 인물은 병사를 이끌고 약정국을 침공하여 국왕인 백봉의 궁전에 들어가 재산을
약탈하고 백봉을 살해한후 그 육신을 잘게 쪼개어 육장(肉醬)을 만들어 하나라 왕인 중강왕에게
바쳤습니다.
즉 속국의 임금의 고기로 만든 육젓을 진미로 만들어 전리품으로 하왕에게 헌상한것입니다.
그 사건이 있고 얼마지나지 않아 후예는 그 신하인 봉몽과 자신의 애첩간의 공모에 의해 살해를
당합니다.
후예의 애첩은 과거 후예가 정복한 나라에서 전리품으로 데려온 왕녀였습니다.
그녀는 후예를 살해한뒤 그를 역시 육장으로 만들었죠.
다음날 후예의 아들은 아버지를 찾았으나 찾지 못하자 의붓어머니에게 아버지의 행방을 묻자
후예의 육젓을 가져와 보여주며 "너의 아비가 우리나라를 멸망케하고 나의 아들을 죽여 육젓으로
담았으니 나도 너의 아비를 죽여 육젓으로 담았다. 너도 그의 아들이니 용서할수 없느나 니 아비의
육젓을 먹으면 용서해주겠다"
후예의 아들은 놀라 도망쳤으나 곧 잡혀 역시 육젓이 되었습니다.
하왕조에서 처음으로 문서에 기록된 식인의 역사는 복수에 의한 것입니다만은 시간이 지날수록 복수
및 형벌로서의 식인에서 군량비 대신쓰는 식량으로써.. 단지 사람고기를 너무나 맛있어해서
즐기는쪽으로 발전하고 대상도 죄인, 원수에서 아무런상관이 없는 자국백성 및 부녀자로 확대됩니다
중국인은 왜 식인을 대범하게 받아들이는 걸까요?
왜 살인과 사기같은 범죄를 저지르고도 죄의식을 느끼지 못할까요?
왜 뇌물을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할까요? 왜
약자에게 잔인하고 강자에게 비굴한 것을 지혜로운 처세술이라고 여길까요?
왜 돈에 미친듯이 환장을 하는 걸까요?
그들의 민족성이 본래 잔인해서? 아닐 겁니다.
어머니의 자궁에 잉태될 때 그 인간의 유전자 속에 민족성이 전해지겠습니까? 거기에 무슨 특별한
정보같은 게 있는 것도 아닐텐데.
그렇다면 그들의 사회, 문화적 환경에 따라서 그런 결과들이 나오는 거겠죠. 중국을 한 마디로
요약해서 말한다면 1백명이 정원인 기차간 안에 1만명이 들어가 서로 밑에 깔리지 않으려고 서
있으려 안간힘을 쓰는 꼴입니다.
즉 한마디로 극심한 생존경쟁 사회란 거죠.
역사를 들어 설명한다면 앞에서 제가 말한 것 처럼 중국은 수천번의 내전과 침략, 기근, 질병에
시달려 왔습니다.
춘추전국시대, 진시황의 사후 벌어진 유방과 항우의 항쟁, 흉노족의 침략, 전한의 멸망과 내분,
후한의 붕괴와 더불어 위오촉의 삼국시대, 그 이후 북방 유목민족들의 대대적인 남침과 그로 인한
강북 상실... 수나라의 멸망과 역시 잦은 내분, 당왕조의 팽창에 이은 무수한 전쟁, 오대 십국, 거란족과
여진, 몽골의 침략, 명나라의 쇠퇴와 내란, 청의 침입, 서양 열강과 일제의 침략, 국공내전... 이렇게
삶과 죽음이 오가는 극한 상황들이 계속 반복되다 보면 사람의 가치관에 중대한 변화가 발생합니다.
형이상학적인 관념들- 명예, 도덕, 윤리, 규범, 염치, 동정, 사랑 등 -은 무시되고 오로지 형이하하적이고 원초적인 본능들을 위주로 매사를 판단하게 되지요. 우선은 돈이 있어야지요. 그 다음은 음식, 집,
색욕, 권력의 순으로 발전해 갑니다. 이 과정은 현대 중국인들이 동경하는 성공의 과정이기도 하고요. 등소평이 개방을 하기 이전에 이미 중국인들의 심리 속에는 물욕에 대한 강렬한 열망이 있었던 겁니다.
이렇게 중국인들은 철저히 실용적(?)입니다. 죄의식이라든지 선과 악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라든지
하는 쓰잘데 없는 몽상따위는 애초에 그들의 머릿속에 자리잡을 곳이 없죠.
그런 실용적인 사고의 극단이 바로 식인이라는 방식으로 나타난 거죠. 땅은 한정되어 있는데 인구는
쎄고 쎄고 넘쳐나겠다, 한 두놈쯤 죽여봐야 표도 안나니 이왕 죽어서 썩을 거 내가 좀 먹고 영양
보충 좀 하면 어떠냐... 하는 생각으로 식인을 한 겁니다.
제가 중국의 역사서와 소설들을 몇 가지 들춰 보았는데 -여건상 수천권의 관련 서적들을 모두 본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서요. 용서 바랍니다.- 놀라운 사실은 중국인은 식인을 그다지 끔찍한 일이라고
보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좀 대놓고 떠들기엔 그렇지만 일상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 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춘추전국시대에 보면 이런 일들이 나옵니다.
송나라의 환공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신하인 남궁장만과 맹획이 각각 진나라와 위나라로 도망치자
두 나라로 사자를 보내 그들을 은밀히 데려오게 했습니다. 그리고 남궁장만과 맹획이 송나라로
끌려오자 송환공은 그들을 시장 한 가운데에 세워놓고 병사들을 시켜 쇠몽둥이로 수백번을 때려
죽인 다음 둘의 살점을 칼로 떼어 소금에 절여 그 인육을 모든 신하들에게 나눠주었다고 합니다.
그럼 그 인육을 받은 신하들을 어떻게 했을까요? 고이 모셔놓기만 했을까요? 각자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보시길 바랍니다.
또 이런 일도 있습니다. 춘추전국시대의 오패이자 가장 뛰어난 군주인 제환공은 간신인 역아를
총애했는데 어느날 그에게 "나는 일찌기 새고기와 집짐승, 가축, 사냥감, 물고기로 만든 온갖 요리를
먹어보았지만 사람의 고기를 먹지 못해 그 맛을 모르겠다"라고 농담조(?)로 말을 걸었습니다. 그러자
역아는 아무 말 없이 물러가더니 점심상에 왠 찐 고기 한 쟁반을 들고와 제환공에게 바쳤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그 고기는 젖을 먹은 염소 새끼 고기보다더 연하고 맛이 좋았다고 합니다. 맛있게
고기를 먹고 난 제환공은 역아에게 "이 고기가 무언데 이토록 맛이 좋으냐?"라고 묻자 역아는
태연스럽게 말했습니다. "제 큰 아들을 죽여서 상감께 바쳤습니다."
이런 일이 있는 후 제환공은 역아를 어떻게 대우했을까요? 놀랍게도 그는 역아를 "군주를 위해
자신의 자식까지 죽여 바친 충성심있는 인물"이라고 여기며 깊이 총애해 말년에는 그에게 국가의
전권을 맡겼다고 합니다.
여기서 몇가지 들여다 볼 것이 있습니다. 이미 춘추전국시대에 식인은 흔하게 일어났으며 중국인들은
그것을 일상화된 현상으로 여겼고 죽임을 당해 요리가 된 인간을 전혀 동정하지 않았다는 것,
또한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사관들도 식인이라는 행위 자체를 비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이런 중국의 추한 일면을 알면 알수록 공자가 "구이九夷의 땅에 가서 살고 싶다."라고 말한
내역이 이해가 됩니다. 아울러 고조선이 망하기 전까지 우리땅에는 범죄가 없어 사람들이 밤에도
집문을 걸어 잠그지 않고 평화롭게 살았는데 한나라의 침공으로 조선이 망하고 한족漢族들이 대거
유입되 들어오자 온갖 범죄가 들끓어 밤에 집문을 걸어 잠그지 않고는 잠을 잘 수 없었다는 기록도
이해가 되고요.
참고로 흉노와 선비족시절부터 수백년 동안 중국을 지배해온 몽골인들은 중국인을 어느 민족보다
싫어하고 혐오합니다. 그것은 몽골인들이 누구보다도 중국인들의 추악한 식인 풍습에 질겁을 한
것이 아닐까요? (반면 한국인은 좋아한답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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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쇼킹차이나네요..
잘 읽었습니다. ^^
결론이 좋아요. '실용적' 이 단어 기억하겠습니다. 글 잘 읽고 갑니다. 수고 하셧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