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여섯 가지 화합
부처님께서는 다시 여러 비구들을 모이게 한 다음 여섯 가지 화합하는 법을 말씀하셨다. “여기 기억하고 사랑하고 존중해야 할 여섯 가지 화합하는 법이 잇다. 이 법에 의지하여 화합하고 다투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첫째, 같은 계율을 같이 지키라. 둘째, 의견을 같이 맞추라. 셋째, 받은 공양을 똑같이 수용하라. 넷째, 한 장소에 같이 모여 살아라. 다섯째, 항상 서로 자비롭게 말하라. 여섯째, 남의 뜻을 존중하라.” 부처님께서는 이튿날 아침 코삼비에 들어가 걸식을 마치고 비구들을 불러 말씀하셨다. “대중이 화합하지 못할 때에는 저마다의 행동을 더욱 삼가야 한다., 법답지 못하고 친절하지 못한 일이 있을 때에는 참고 견디며, 자비스런 마음으로 법답고 친절한 일이 행해지도록 힘써야 한다. 물과 젖이 합한 것처럼 한 자리에 화합해서 한 스승의 법을 배우면서 안락하게 지내야 할 것이다. 여러 비구들, 그들은 여래의 계율에 따라 머리를 깍고 출가한 사문이 아닌가. 아무쪼록 잘 참고 견디며 자비에 의해 밝게 화합해야 한다. 부디 다투지 마라. 이 이상 화합을 깨뜨리지 마라.” 부처님의 이와 같은 간곡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어떤 비구는 말했다. “부처님 걱정 마시고 그저 가만히 계십시오. 부처님께서는 법의 왕이십니다. 저희들의 다툼은 저희들끼리 알아서 하겠습니다.” “아니다, 그런 소리 말아라. 서로 싸우고 욕하고 비방하면서 시비를 가리지 말아라. 물과 젖이 합한 것처럼 화합하여 살면서 한 스승에게 같이 배우면 여래의 법 안에서 이익을 얻고 안락하게 될 것이다.”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몇 번이고 거듭 말씀하셨으나 코삼비 비구들은 끝내 싸움을 그치지 않았다. 부처님께서는 ‘이같이 어리석은 겉모양에만 마음을 파고 있으니 어쩔 수 없구나’ 하시고, 가르치던 대중이나 공양 올리던 신도들에게도 아무 말씀 없이 훌쩍 코삼비를 떠나셨다. 그리고 사밧티로 돌아와 어느 조용한 숲속에서 홀로 고요함을 즐기셨다. 마치 큰 코끼리가 많은 새끼 코끼리들을 떠나 번거로움 없이 즐기듯 하셨다. < 사분률 43 >
3. 양쪽 말을 들어보라
이때 코삼비의 신도들은 부처님께서 아무 말씀 없이 사밧티 쪽으로 떠나셨다는 말을 듣고 서운해하고 슬퍼했다. 그리고 비구들은 시비를 그치지 않기 때문에 가신 거라고 그들을 원망했다. 신도들은 모임을 열고, 오늘부터 코삼비에 있는 비구들에게는 공양도 올리지 말고 예배하지도 말고 아는 체도 하지 말자고 결의하였다. 공양을 받을 수 없게 되자 비구들은 하는 수 없이 ‘부처님께 찾아가 이 싸움을 끝맺고 말자’ 하고, 행장을 꾸려 사밧티로 길을 떠났다. 코삼비의 시비꾼들이 사밧티로 온다는 소문을 듣고 사리풋타는 여러 비구들과 함께 부처님께 가서 말씀드렸다. “코삼비 비구들이 싸우면서 서로 비방하고 욕지거리를 하는데 그 입이 마치 칼날 같다고 합니다. 그들이 이곳으로 온다는데 저희들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사리풋타에게 말씀하셨다. “두 무리의 말을 들어보라. 그래서 법답게 말하는 비구가 있거든 그의 말을 받아들여 칭찬하고 그의 편이 되어 주거라.” “어떻게 그 비구의 말이 법답고 법답지 못한 줄을 알 수 있습니까?” “대중이 서로 화합하지 못하는 것은 다음 열 여덟 가지를 바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계율과 계율 아닌 것, 법과 법 아닌 것, 범하고 범하지 않은 것, 가볍고 무거운 것, 여지가 있고 여지가 없는 것, 추악하고 추악하지 않은 것, 할 것과 하지 않을 것, 막을 것과 막지 않을 것, 말할 것과 말하지 않을 r서이다. 사리풋타, 네가 이런 일을 관찰하면 그 비구가 법답게 말하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것들을 제자리에 두지 않고 서로 뒤바꾸어 알고 해석함으로써 온갖 시비가 생기고 대중의 화합이 깨뜨려지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사밧티에 잇는 비구와 코삼비에서 온 비구들을 한데 모아 놓고 말씀하셨다. “내가 지금까지 제정하여 놓은 모든 계율은 곧 너희들의 보호자요 스승이다. 바로 너희들이 믿고 의지하며 목숨이 다하도록 지켜야 할 것이다. 하나라도 범하게 되면 밥대로 다스림을 받고 참회해야 한다. 이와 같은 계율은 오로지 교단의 화합을 위하고 대중이 안락하게 수행하도록 하기 위해서 있는 것임을 알아라. 그러므로 많은 계율 가운데서 중요한 것을 제하고, 그 나머지 사소한 계율에 대해서는 너무 고집하여 범하고 범하지 않은 것을 캐냄으로써 시비를 일삼지 않도록 하여라. 이치에 어긋나지 않도록 두루 살펴 삼가며, 윗사람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을 사랑하여 서로서로 화합하고 예의와 법도에 맞도록 할 것이다. 이것이 출가하여 수행하는 사람들이 공경하고 순종할 법이다.” 코삼비에서 온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들의 허물을 뉘우쳐 참회하고 다시 화합을 이루었다. < 사분률 43 >
제 5 편 조사어록
제 1장 마음 닦는 법
1. 불타는 집
삼계의 뜨거운 번뇌가 마치 불타는 집과 같은데, 어째서 거기 머물러 그 긴 고통을 달게 받을 것인가. 윤회를 면하려면 부처를 찾아야 한다. 부처는 곧 이 마음인데, 마음을 어찌 먼 데서 찾으랴. 마음은 이 몸을 떠나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육신은 거짓이어서 생이 있고 멸이 있지만, 참마음은 허공과 같아서 끊이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뼈와 살은 무너지고 흩어져 흙으로 돌아가고 바람으로 돌아가지만 한 물건은 신령스러워 하늘을 덮고 땅을 덮는다.” 고 한 것이다. 슬프다! 요즘 사람들은 어리석어서 자기 마음이 참 부처인 줄 알지 못하고 자기 성품이 참 법인 줄을 모르고 있다. 법을 멀리 성인에게서만 구하려 하고, 부처를 찾고자 하면서도 자기 마음을 살피지 않는다. 만약 ‘마음 밖에 부처가 있고, 성품 밖에 법이 있다 .’ 고 굳게 고집하여 불도를 구한다면, 이와 같은 사람은 비록 티끌처럼 많은 세월이 지나도록 몸을 태우고 뼈를 두드려 골수를 내며, 피를 뽑아 경전을 쓰고 밤낮으로 눕지 않으며, 하루 한 끼만 먹고 팔만대장경을 줄줄 외며 온갖 고행을 닦는다 할지라도, 모래로 밥을 짓는 것과 같아서 보람도 없이 수고롭기만 할 것이다. 자기 마음을 알면 수많은 법문과 한량없는 진리를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얻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모든 중생을 두루 살펴보니 여래의 지혜와 덕을 갖추고 있다.” 하시고, “모든 중생의 갖가지 허망된 생각이 다 여래의 원각효심에서 일어난다.” 고 하셨으니, 이 마음을 떠나 부처를 이룰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과거의 모든 부처님들도 이 마음을 밝힌 분이며, 현재의 모든 성현들도 이 마음을 닦은 분이며, 미래의 배울 사람들도 또한 이 법을 의지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수행하는 사람들은 결코 밖에서 구하지 말 것이다. 마음의 바탕은 물듦이 없어서 본래부터 스스로 원만히 이루어진 것이니, 그릇된 인연을 떠나면 곧 의젓한 부처이다. <보조 수심결>
2 불성은 어디에
“만약 불성이 이 몸에 있다고 한다면, 이미 몸 가운데 있으면서 범부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니, 저는 어째서 지금 불성을 보지 못합니까?” “네 몸 안에 있는데도 네가 스스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면 배고프고 목마른 줄 알며, 차고 더운 줄 알며, 성내고 기뻐하는 것이 무슨 물건인가? 또 이 육신은 지, 수, 화, 풍의 네 가지 요소가 모인 것이므로, 그 바탕이 미련해 식정이 없는데 어떻게 보고 듣고 깨달아 알겠는가. 보고 듣고 깨달아 아는 그것이 바로 너의 불성이다.” 그러므로 임제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사대는 법을 설할 줄도 들을 줄도 모르고 허공도 또한 그런데, 다만 네 눈앞에 뚜렷이 홀로 밝은 형상 없는 것이라야 비로소 법을 설하고 들을 줄을 안다.” 고 하였다. 여기에서 말한 형상 없는 것이란 모든 부처님의 법인이며, 너의 본래 마음이다. 즉 불성이 네 안에 버젓이 있는데 어찌 그것을 밖에서 찾느냐. 네가 믿지 못하겠다면 옛 성이들의 도에 든 인연 몇 가지를 들어 의심을 풀어 줄 테니 진실인 줄 믿으라. 옛날 이견왕이 바라제 존자께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존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성품을 보는 것이 부처입니다.” “스님은 성품을 보았습니까?” “그렇습니다. 나는 불성을 보았습니다.” “성품이 어느 곳에 있습니까?” “성품은 작용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 무슨 작용이기에 나는 지금 보지 못합니까?” “지금 버젓이 작용하는데도 왕이 스스로 보지 못합니다.” “내게 있단 말입니까?” “왕이 작용한다면 볼 수 있지만, 작용하지 않는다면 그 체도 보기 어렵습니다.” “만일 작용할 때에는 몇 군데로 출현합니까?” “출현할 때에는 여덟 군데로 합니다.” 왕이 그 여덟 군데를 말해 달라고 하자 존자는 다음과 같이 가르쳐 주었다. “태 안에 있으면 몸이라 하고, 세상에 나오면 사람이라 하며, 눈에 있으면 보고, 귀에 있으면 듣고, 코에 있으면 냄새를 맡으며, 혀에 있으면 말을 하고, 손에 있으면 붙잡고, 발에 있으면 걸어다니며, 두루 나타나서는 온 누리에 다 싸고, 거두어들이면 한 티끌에 있습니다. 아는 사람은 이것이 불성인 줄 알고, 모르는 사람은 정혼이라 부릅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열렸다. 또 어떤 스님이 귀종 화상께 물은 적이 있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화상은 이렇게 말했다. “내 이제 그대에게 일러주고 싶지만 그대가 믿지 않을까 걱정이다.” “큰 스님의 지극한 말씀을 어찌 감히 믿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곧 너니라. ” “어떻게 닦아가야 합니까?” “한 꺼풀 가리는 것이 눈에 있으니 헛꽃이 어지러이 지는구나. ” 그 스님은 이 말끝에 알아차린 바가 있었다. 옛 성인의 도에 드신 인연이 이와 같이 명백하고 간단하여 힘들지 않았다. 이 법문으로 말미암아 알아차린 것이 있다면, 그는 옛 성인과 더불어 손을 마주잡고 함께 갈 것이다. <보조 수심결>
3. 신통변화
“앞에 말씀하신 견성이 참으로 견성이라면 그는 곧 성인입니다. 신통변화를 나타내어 보통 사람과는 다른 데가 있어야 할 텐데, 어째서 요즘 수도인들은 한 사람도 신통 변화를 부리지 못합니까?” “너 함부로 미친 소리를 하지 말아라. 정과 사를 분간하지 못함은 어리석어 뒤바뀐 것이다. 요즘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입으로는 곧잘 진리를 말하지만 마음에 게으른 생각을 내어 도리어 자격지심에 떨어지는 수가 있으니, 다 네가 의심하는 것과 같은 데에 있는 것이다. 도를 배워도 앞뒤를 알지 못하고, 진리를 말하지만 본말을 가리지 못하는 것은 그릇된 소견이지 수학이라 이름할 수 없다. 자기를 그르칠 뿐 아니라 남까지도 그르치게 하는 것이니 어찌 삼가지 않을 것인가. 대체로 도에 들어감에는 문이 많으나 크게 나누어 돈오와 점수 두 문에 지나지 않는다. 비록 돈오점수가 가장 으뜸가는 근기의 길이라 하지만, 과거를 미루어 본다면 이미 여러 생을 두고 깨달음을 의지해 닦아 점점 훈습해 왔으므로, 금생에 이르러 듣자마자 곧 깨달아 일시에 단박 마치게 된 것이다. 사실, 이것도 먼저 깨닫고 나서 닦는 근기이므로, 이 돈과 점 두 가지 문은 모든 성인들의 길이다. 예전부터 모든 성인들이 먼저 깨닫고 뒤에 닦아, 이 닦음으로 말미암아 증득하게 된 것이다. 이른바 신통 변화는 깨달음에 의지해 닦아서 점점 훈습해 나타난 것이요, 깨달을 때에 곧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경에 말씀하기를 “이치는 단박 깨닫는 것이므로 깨달음에 따라 번뇌를 녹일 수 있지만, 현상은 단번에 제거될 수 없으므로 차례를 따라 없애는 것이다.” 고 하였다. 그러므로 규봉스님이, 먼저 깨닫고 나서 닦는 뜻을 깊이 밝혀 다음 같이 이른 것이다. “얼음 못이 모두 물인 줄은 알지만 햇볕으로써 녹일 수 있고, 범부가 곧 부처인 줄은 깨달으나 법력으로써만 훈수할 수 있다. 얼음이 녹아 물이 흘러야만 대고 씻을 수 있고, 망상이 다해야만 마음이 신령스레 통하여 신통과 광명의 작용을 나타낼 수 있다.” 그러므로 알아라. 현상의 신통변화는 하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점점 닦아 감으로써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신통이 자재한 사람의 경지로는 오히려 요괴스런 짓이고, 성인의 분수에는 하찮은 일이다. 비록 나타날지라도 요긴하게 쓰지 않을 것인데, 요즘 어리석은 무리들은 망령되어 말하기를, “한 생각 깨달을 때 한량없는 묘용과 신통변화를 나타낸다.” 하니, 이와 같은 생각은 이른바 앞뒤를 분간하지 못하고 본말을 알지 못한 것이다. 앞뒤와 본말을 알지 못하고 불도를 찾는다면 모가 난 나무를 가지고 둥근 구멍에 맞추려는 것과 같으리니, 어찌 큰 잘못이 아니겠는가. 방편을 모르기 때문에 미리 겁을 먹고 스스로 물러나 부처의 종성을 끊는 사람이 적지 않다. 자신이 밝지 못하기 때문에, 남의 깨달음을 믿지도 않아 신통 없는 이를 보고 업신여긴다. 이는 성현을 속이는 것이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 <보조 수심결>
4. 돈오와 점수
“돈오와 점수 두 문이 모든 성인의 길이라 말씀하셨는데, 깨달음이 이미 단박 깨달음이었다면 왜 점수를 빌리며, 닦음이 점차 닦는 것이라면 어째서 돈오라 합니까? 돈과 점의 두 가지 뜻을 거듭 말씀하여 의심을 풀어 주십시오.” “범부가 미했을 때는 사대로 몸을 삼고 망상으로 마음을 삼아, 자성이 참 법신인 줄 모르고,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다가 문득 선지식의 가르침을 만나, 한 생각에 마음의 빛을 돌이켜 자기 본성을 보게 된다. 이 성품의 바탕에는 본래부터 번뇌가 없는 지혜 성품이 저절로 갖추어져 있어 모든 부처님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이것을 돈오라 한다. 그러나, 비록 본성이 부처와 다름없음을 깨달았으나, 끝없이 익혀 온 습기를 갑자기 없애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의지해 닦아 점점 훈습하여 공이 이루어지고 성인의 모태 기르기를 오래 하면 성을 이루게 되므로 점수라 한다. 이를테면, 어린애가 처음 태어났을 때에 모든 기관이 갖추어 있음은 어른과 다름이 없지만, 그 힘이 충실치 못하기 때문에 얼마 동안의 세월을 지낸 뒤에야 비로소 어른 구실을 하는 것과 같다.” “그러면 무슨 방편을 써야 한 생각에 문득 자성을 깨닫겠습니까?” “다만 네 자심이다. 이 밖에 무슨 방편을 쓰겠는가. 만일 방편을 써 앎을 구한다면, 마치 어떤 사람이 자기 눈을 보지 못하고 눈이 없다면서 다시 보고자 하는 것과 같다. 이미 자기 눈인데 어떻게 다시 보겠는가. 없어지지 않은 줄 알면 곧 눈을 보는 것이다. 다시 또 보고자 하는 마음도 없는데, 어떻게 보지 못한다는 생각이 있겠는가. 자기의 영지도 이와 같아서 이미 자기 마음인데 무엇하러 또 앎을 구할 것인가. 만약 앎을 구하고자 한다면 문득 알지 못할 것이다. 다만 알지 못한 줄 알면 이것이 곧 견성이다.” <보조 수심결>
5. 본래 면목
“상상의 근기는 들으면 곧 쉽게 알지만, 중하의 근기는 의혹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방편을 말씀하여 어리석은 이로 하여금 알아 듣게 해 주십시오. ” “도는 알고 모르는데 있지 않다. 네가 어리석어 깨닫기를 기다리니 그 생각을 쉬고 내 말을 들어라. 모든 법이 꿈과 같고 허깨비와 같으므로 번뇌 망상이 본래 고요하고, 티끌 세상이 어둡지 않다. 그러므로 공적하고 신령스럽게 아는 마음이 너의 본래 면목이며, 삼세 제불과 역대 조사와 천하 선지식이 은밀히 서로 전한 법인인 것이다. 이 마음을 깨달으면 과정을 거치지 않고 참으로 바로 부처님의 경지에 올라가, 걸음걸음이 삼계에 뛰어나서 집에 돌아가 단박 의심을 끊게 된다. 인간과 천상의 스승이 되고 자비와 지혜가 서로 도와 자리 이타를 갖추게 되며, 인간과 천상의 공양을 받을 만하다. 네가 이와 같다면 참 대장부이니 평생에 할 일을 마친 것이다.” “제 분수대로 보면 어떤 것이 공적영지의 마음입니까?” “네가 지금 내게 묻는 것이 너의 공적 영지하는 마음인데, 왜 돌이켜 보지 않고 밖으로만 찾느냐? 내 이제 네 분수를 따라 바로 본심을 가리켜 깨닫게 할테니 너는 마음을 비우고 내 말을 들어라. 아침부터 저녁에 이르도록 보고 들으며 웃고 말하고, 성내고 기뻐하며 옳고 그른 온갖 행위를 무엇이 그렇게 하는지 어디 말해 보아라. 만일 육신이 그렇게 한다면, 왜 사람이 한 번 명을 마치면 눈을 스스로 보지 못하느냐? 어째서 귀는 들을 수 없고, 코는 냄새를 맡을 수 없고, 혀는 말하지 못하며, 몸은 움직이지 못하고, 손을 잡지 못하며, 발은 걷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알아라. 보고 듣고 움직이는 것은 반드시 너의 본심이지 육신이 아니다. 이 육신을 이루고 있는 네 가지 요소의 성질이 공하여 마치 거울에 비친 형상과 같고 물에 비친 달과 같다. 그런데 어떻게 항상 분명히 알며 어둡지 않고 한량없는 묘용을 통달할 것인가. 그러므로 말하기를 ‘신통과 묘용이여, 물을 긷고 나무를 나름이라. ’ 고 한 것이다. 또 이치에 들어가는 데는 길이 많으나, 너에게 한 문을 가리켜 근원에 들어가게 하겠다. 네가 까마귀 울고 까치 지저귀는 소리를 듣느냐? ” “듣습니다.” “듣는 성품을 돌이켜 보아라. 얼마나 많은 소리가 있느냐? ” “이 속에 이르러서는 모든 소리와 온갖 분별을 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기특하다! 이것이 관세음보살께서 진리에 드신 문이다. 내가 다시 너에게 물어보겠다. 네가 말하기를, 이 속에 이르러서는 모든 소리와 온갖 분별을 할 수 없다고 했는데, 할 수 없다면 그 때는 허공이 아니겠느냐? ” “본래 공하지 않으므로 환히 밝아 어둡지 않습니다.” “그럼 어떤 것이 공하지 않은 체인가?” “모양이 없으므로 말로 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부처님과 조사들의 생명이니 다시 의심하지 말아라. ” <보조 수심결>
6. 이 몸 이때 못 건지면
과거 윤회의 업을 따라 생각하면, 몇 천 겁을 흑암지옥에 떨어지고 무간지옥에 들어가 고통을 받았을 것인가. 불도를 구하고자 하여도 선지식을 만나지 못하고 오랜 겁을 생사에 빠져, 깨닫지 못한 채 갖은 악업을 지은 것이 그 얼마일 것인가. 때때로 생각하면 긴 슬픔을 깨닫지 못한 것이니, 게을리 지내다가 다시 그전 같은 재난을 받지 말아야겠다. 그리고 누가 나에게 지금의 인생을 만나 만물의 영장이 되어 도 닦는 길을 어둡지 않게 한 것인가. 참으로 눈먼 거북이 나무를 만남이요, 겨자씨가 바늘에 꽂힌 격이다. 그 다행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내가 만약 물러설 마음을 내거나 게으름을 부려, 항상 뒤로 미루다가 그만 목숨을 잃고 지옥에라도 떨어져 온갖 고통을 받을 때, 한 마디 불법을 들어 믿고 받들어 괴로움을 벗고자 한들 어찌 다시 얻게 될 것인가. 위태로운 데에 이르러서는 뉘우쳐도 소용이 없다. 바라건데 도 닦는 사람들은 게으르지 말고 탐욕과 음욕에 집착하지 말며, 머리에 타는 불을 끄듯 하여 돌이켜 살필 줄을 알아야 한다. 무상이 빨라 몸은 아침 이슬과 같고 목숨은 저녁 노을과 같다. 오늘은 있을지라도 내일은 기약하기 어려우니 간절히 뜻에 새겨 둘 일이다. 이 몸을 금생에 건지지 않으면 다시 어느 생을 기다려 건질 것인가. 지금 닦지 않는다면 만겁에 어긋나 등질 것이요, 힘써 닦으면 어려운 행이 점점 어렵지 않게 되어 수행이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다. 어허! 요즘 사람들은 배고파 음식을 대하고도 입을 벌릴 줄 모르며, 병들어 의사를 만나고서도 약을 먹을 줄 모르니, 아 어찌할 것인가, 어찌할 것인가. 따르지 않는 사람은 나도 어쩔 수 없구나. 슬프다! 우물 안 개구리가 어찌 창해의 넓음을 알며, 여우가 어찌 사자의 소리를 내랴. 그러므로 말세에 이 법문을 듣고 희귀한 생각을 내어 믿고 받아 가지는 사람은 이미 한량없는 겁에 모든 성인을 섬기어 갖가지 선근을 심었고, 깊이 지혜의 바른 인연을 맺은 으뜸가는 그릇임을 알아라. 금강경에 말씀하기를 ‘이 글귀에 신심을 내는 이는 한량없는 부처님 회상에서 온갖 선근을 심은 것임을 알아야 한다’ 고 했고, 또 ‘대승을 발한 이를 위해 설하며 최상승을 발한 이를 위해 설한다’ 고 했다. 원컨대 도 구하는 사람들은 미리 겁을 내지 말고 용맹한 마음을 낼 것이다. 만일 수승함을 믿지 않고 하열함을 달게 여겨 어렵다는 생각을 내어 닦지 않으면, 비록 숙세의 선근이 있을지라도 이제 그것을 끊는 것이므로 더욱 어려운 데로 멀어질 것이다. 이미 보배가 있는 곳에 이르렀으니 빈손으로 돌아가지 말아라. 한번 사람 몸을 잃으면 만 겁에 돌이키기 어려우니, 바라건대 마땅히 삼가할 것이다. 지혜로운 이가 보배 있는 곳을 알면서도 구하지 않고 어찌 외롭고 가난함을 원망할 것인가. 보배를 얻으려면 가죽주머니를 잊어버려야 한다. <보조 수심결>
제 2장 마음을 살피는 일
1. 모든 것의 근본
제자 혜가가 물었다. “불도를 얻고자 하면 어떤 법을 수행하는 것이 가장 요긴하겠습니까?” 달마 스님은 대답했다. “오직 마음을 관하는 한 법이 모든 행을 다 거두어들이는 것이니 이 법이 가장 간결하고 요긴하다.” “어째서 마음을 관하는 한 법이 모든 행을 거두어들인다 하십니까?” “마음이란 모든 것의 근본이므로 모든 현상은 오직 마음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깨달으면 만 가지 행을 다 갖추는 것이다. 이를테면 여기 큰 나무가 있다고 하자. 그 나무의 가지나 잎이나 열매는 모두 뿌리가 근본이다. 나무를 가꾸는 사람은 뿌리를 북돋울 것이고, 나무를 베고자 하는 사람도 그 뿌리를 베어야 할 것이다. 수행하는 사람도 그와 같아서, 마음을 알고 도를 닦으면 많은 공을 들이지 않고도 쉽게 이룰 것이다. 그러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수도한다면 부질없이 헛된 공만 들이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법이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마음 밖에 따로 구할 도가 있다면 옳지 않은 말이다.” “어떻게 마음을 관하는 것이 마음을 아는 것이라 하십니까?” “보살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사대와 오온이 본래 공하여 실체가 없음을 밝게 알며, 또 자기 마음을 쓰는 데 두가지 차별이 있음을 분명히 본다. 두 가지란 맑은 마음과 물든 마음이다. 맑은 마음이란 번뇌가 없는 진여의 마음이요, 물든 마음이란 번뇌가 있는 무명의 마음이다. 이 두 마음은 본래부터 갖추어 있어 비록 인연 따라 화합하기는 하지만 새로 생기는 것은 아니다. 맑은 마음은 항상 착한 인연을 즐기고, 물든 마음은 악한 업을 생각한다. 만약 진여의 마음을 깨쳐 그것이 물들거나 때묻지 않은 것인 줄 깨달으면 이 사람은 성인이다. 그는 괴로움에서 벗어나 열반의 즐거움을 누릴 것이다. 그러나 물든 마음을 따라 악한 짓을 하면 온갖 괴로움과 어둠이 몸에 감기고 덮이게 되니 이를 범부라 한다. 범부는 항상 삼계에 빠져 갖가지 괴로움을 받으니, 그것은 물든 마음으로 말미암아 진여의 마음이 가려졌기 때문이다. 십지경에 말하기를 ‘중생의 몸 가운데 금강석처럼 굳은 불성이 있어 해와 같이 밝고 원만하며 광대 무변하지만, 오온의 검은 구름에 덮여 마치 항아리 속에 있는 불빛이 밖을 비추지 못하는 것과 같다. ’ 고 하였고, 또 열반경에 말하기를 ‘일체 중생에게 모두 불성이 있으나 무명에 덮여서 해탈을 얻지 못한다. ’ 고 하였다. 불성이란 깨침이다. 스스로 깨치고 깨친 지혜가 밝아 번뇌에서 벗어나면 이것이 곧 해탈이다. 그러므로 모든 선은 깨침이 근본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근본이 되어 모든 공덕의 나무가 무성하고 열반의 열매가 여문다. 이와 같이 마음을 관하는 것을 마음을 알았다고 한다. “ <달마 관심론>
2. 삼독
“진여 불성의 모든 공덕은 깨침이 근본이 된다는 것은 알았으나 무명인 마음과 온갖 악은 무엇을 근본으로 삼습니까?” “무명인 마음에는 팔만 사천의 번뇌와 정욕이 있어 악한 것들이 한량없으니 성냄과 어리석음인데, 이 삼독심에는 저절로 모든 악한 것이 갖추어져 있다. 마치 큰 나무가 뿌리는 하나이나 가지는 수없이 많은 것처럼, 삼독의 뿌리는 하나이지만 그 속에 한량없는 많은 악업이 있어 무엇으로 비교할 수도 없다. 이와 같은 삼독은 본체에서는 하나이나 저절로 삼독이 되어 이것이 육근에 작용하면 육적이 된다. 육적은 곧 육식이다. 육식이 육근을 드나들며 온갖 대상에 탐착심을 일으키므로 악업을 지어 진여를 가리게 된다. 그러므로 육적이라 이름한다. 중생들은 이 삼독과 육적으로 말미암아 몸과 마음이 어지러워지고 생사의 구렁에 빠져 육도에 윤회하면서 온갖 고통을 받는다. 이를테면 강물이 원래 조그마한 샘물에서 시작하여 끊이지 않고 흐르면 시내를 이루고 마침내는 만경 창파를 이루게 되나, 어떤 사람이 그 물줄기의 근원을 끊으면 모든 흐름이 다 쉬게 된다. 이와 같이 해탈을 구하는 사람도 삼독을 돌이켜 삼취경계를 이루고, 육적을 돌이켜 육바라밀을 이루면 저절로 모든 고뇌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삼독과 육적이 광대 무변한데 마음만을 보고 어떻게 한없는 고뇌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삼계에 태어남은 오로지 마음으로 되는 것이니 만약 마음을 깨달으면 삼계에 있으면서 곧 삼계에서 벗어나게 된다. 삼계라는 것은 곧 삼독이다. 탐내는 마음이 욕계가 되고, 성내는 마음이 색계가 되며, 어리석은 마음이 무색계가 된다. 삼독심이 갖가지 악을 짓고 맺어 업을 이루고 육도에 윤회하게 되니 이것을 삼계라 한다. 또 삼독이 짓는 무겁고 가벼운 업을 따라 과보를 받는 것도 같지 않아 여섯 곳으로 나뉘게 되니 이것을 육도라 한다. 그러나 악업은 오로지 자기 마음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마음을 잘 거둬 그릇되고 악한 것을 버리면 삼계와 육도를 윤회하는 괴로움은 저절로 소멸되고, 모든 고뇌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니 이것을 해탈이라 한다.” <달마 관심론>
3. 삼 아승지겁
“부처님께서는 삼 아승지겁을 부지런히 수행하여 불도를 이루었다 하셨는데, 스님께서는 어찌하여 오직 삼독을 제하면 곧 해탈이라 하십니까?” “부처님의 말씀은 진실하다. 아승지는 곧 삼독심이다. 아승지는 셀 수 없다는 뜻이다. 마음 가운데는 항하의 모래와 같이 많은 악한 생각이 있고 그 낱낱 생각 가운데 다 일 겁씩 있으니, 삼독의 악한 생각이 항하의 모래와 같이 많으므로 셀 수 없다고 말한다. 범부는 진여의 성품이 삼독에 덮였으니, 항하의 모래와 같이 많은 악한 생각에서 뛰어나지 않으면 어떻게 해탈이라 할 수 있겠느냐.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삼독심만 제거해 버리면 이것이 곧 삼 아승지겁을 지낸 것이다. 말세 중생이 어리석고 둔하여 부처님의 깊고 묘한 삼 아승지겁이라는 말씀의 뜻을 알지 못하고 한량없는 겁을 지내야만 성불한다고 알고 있다. 이것이 어찌 말세에 수행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 뜻을 잘못 알고 의심을 내어 보리도에서 물러나게 함이 아니겠느냐. ” <달마 관심론>
4. 정념
“보살이 삼취정계를 가지고 또한 육바라밀을 행하여야 불도를 이룬다 하셨는데, 수행자가 오직 마음만 관하고 계행을 닦지 않는다면 어떻게 성불할 수 있겠습니까?” “삼취정계란 곧 삼독심을 다스리는 것이니, 일독을 제하면 무량한 선이 이루어진다. 취란 모았다는 뜻인데 삼독을 다스리면 곧 세가지 한량없는 선을 이루게 된다. 널리 선을 마음에 모았으므로 삼취정계라 한다. 또 육바라밀이란 곧 육근을 맑게 하는 것이니 바라밀이란 피안에 이른다는 뜻이다. 육근이 청정하여 번뇌에 물들지 않으면 곧 번뇌에서 벗어나 피안에 이르게 되므로 육바라밀이라 한다.” “경에 말씀하기를 ‘지극한 마음으로 염불하면 서방정토에 왕생한다. ’ 하셨으니 이 묘문으로 성불할 것인데 어째서 마음을 관하여 해탈을 구하라 하십니까?” “염불하는 자는 반드시 정념을 닦아야 한다. 참된 뜻을 분명히 알면 정이 되고, 참된 뜻에 분명하지 못하면 사가 되는 것이니, 정념은 반드시 서방정토를 얻지만 사념으로는 피안에 이를 수 없다. 불이란 깨쳤다는 뜻이니 몸과 마음을 살펴 악한 것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고, 염이란 생각하는 것이니 계행을 생각하여 부지런히 힘쓰는 것을 잊지 않음이다. 이와 같이 아는 것이 정념이다. 그러므로 염이란 마음에 있는 것이지 말에 있는 것이 아니다. 고기를 그물로 잡지만 잡고 나서는 그물 생각은 잊어버리는 것과 같이, 말에 의지하여 뜻을 알지만 뜻을 알았으면 말을 잊어야 한다. 이와 같이 이미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고자 한다면 반드시 염불의 실체를 행해야 한다. 염불한다 하면서 진실한 뜻을 모르고 입으로만 공연히 부처님의 명호를 외운다면 헛된 공만 들이는 것이니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외운다는 것과 생각한다는 것은 말과 뜻이 다르다. 외운다는 것은 입으로 하는 것이요, 생각한다는 것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각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니 깨달아 행하는 문임을 알아야 한다. 외우는 것은 입으로 하는 것이니 곧 음성의 모양이다. 마음에 없이 입으로만 명호를 외운다면 그것은 모양에 집착하여 복을 구하는 것이니 그릇된 짓이다.” <달마 관심론>
5. 해탈의 나루터
달마 스님이 말했다. “경에 말씀하기를 ‘무릇 상이 있는 것은 모두 다 허망하다. 또 형상으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 나를 찾는다면 이 사람은 그릇된 도를 행하는 것이니 여래를 보지 못한다’ 고 하지 않았던가. 이와 같이 사물이나 형체는 진실이 아님을 알 것이다. 그러므로 옛부터 모든 성인들이 닦으신 공덕을 말씀하실 때는 한결같이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마음을 강조했다. 마음은 모든 성인의 근원이며 일만 가지 악의 주인이다. 열반의 즐거움도 자기 마음에서 오는 것이요, 삼계 윤회의 즐거움도 자기 마음에서 일어난다. 마음은 곧 세간을 뛰어나는 문이고 해탈로 나아가는 나루터이다. 문을 알면 나아가지 못할까 걱정할 것이 없고, 나루터를 알면 저 기슭에 이르지 못할 것을 어찌 근심하겠는가. 가만히 살피건대, 요즘 사람들은 아는 것이 얕아 겉 모양만으로 공덕을 삼으려 한다. 힘써 공을 들여 자기도 손해보고 남도 또한 미혹하게 하며, 이러고서도 부끄러운 줄 알지 못하니 어느 때에나 깨칠 것인가. 세간의 덧없는 유위법을 보고는 아득하여 알지 못한다. 그러면서 세간의 조그마한 즐거움을 탐착하고 다가올 큰 괴로움은 깨닫지 못하니, 이와 같이 공부해서는 헛되이 스스로를 피로하게 할 뿐 도무지 이익이 없을 것이다. 다만 마음을 잘 거두어 안으로 돌이켜 깨치면 보는 것이 항상 맑아, 삼독심은 끊어져 사라지고 육적이 드나들 문은 닫혀 침범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 때 비로소 한량없는 공덕의 갖가지 장엄과 무량 법문을 낱낱이 다 성취하여 순식간에 범부를 벗어나 성인의 경지에 오르게 될 것이다. 깨침은 잠깐 사이에 있는 것인데 어찌 머리가 희기를 기다리랴. 참된 법문의 심오한 뜻을 어찌 갖추어 말할 수 있으랴. 여기서는 마음 관하는 것만을 말하며 나머지 세밀한 일을 짐작케 하려는 것이다.” <달마 관심론>
6. 이심전심
달마 스님이 말했다. “삼계가 어지럽게 일어나는 것은 모두 한 마음으로 돌아가니 전불 후불이 이심전심하시고 문자를 세우지 않으셨다.” 제자가 물었다. “만약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마음을 삼습니까?” “네가 나에게 묻는 것이 곧 네 마음이며, 내가 너에게 대답하는 이것이 내 마음이다. 만약 내가 마음이 없다면 무엇으로 너에게 대답을 하겠으며, 네가 마음이 없다면 무엇으로 나에게 물을 수 있겠느냐. 나에게 묻는 것이 곧 너의 마음이다. 시작 없는 옛적부터 지금까지 전해 오는 모든 말과 행동과 장소와 시간이 다 네 본심이며 너의 본분이니 마음이 곧 부처라는 것도 이와 같은 말이다. 그러므로 이 마음을 버리고 따로 부처를 구할 수 없으며, 이 마음을 떠나서 보리나 열반을 찾는다면 옳지 않다. 자성은 진실하여 인도 아니고 과도 아니며, 법은 곧 마음이니 자기 마음 이것이 보리요 열반이다. 만약 마음 밖에 부처나 보리가 따로 있다면 옳지 않으니 마음 밖에 부처와 보리가 어디에 있다고 하더냐. 비유해 말하면, 어떤 사람이 손으로 허공을 잡는다고 할 때 허공은 다만 이름이 있을 뿐 모양이 없으니 잡을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는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달마 혈맥론>
7. 대장경을 외울지라도
달마 스님이 말했다. “누구나 부처를 찾고자 하면 반드시 견성을 해야 한다. 만약 견성하지 못했으면 염불을 하거나 경을 외우거나 계를 지켜도 별 이익이 없다. 염불하면 인과를 얻고, 경을 외우면 총명을 얻고, 계를 가지면 천상에 태어나고, 보시를 하면 복된 과보를 얻기는 하나 부처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자기를 밝게 깨닫지 못했으면 반드시 선지식을 찾아 생사의 근본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선지식은 견성한 사람이니 견성하지 못했으면 선지식이라 할 수 없다. 비록 대장경을 설하더라도 역시 생사를 면치 못해 삼계에 윤회하며 괴로움을 벗어날 기약이 없을 것이다. 옛날 선성 비구가 대장경을 다 외었어도 윤회를 면치 못한 것은 견성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선성 비구도 그러했는데, 요즘 사람들이 경론을 서너 권 배워 가지고 불법으로 삼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진실로 자기 마음을 알지 못하면 한가롭게 문서나 외워도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다.” <달마 혈맥론>
8. 스승을 찾아라
달마 스님이 말했다. “한 물건도 얻을 것이 없으나, 만약 알지 못한다면 반드시 선지식을 찾아가 간절하게 힘써 구해야 한다. 생사가 큰 일이니 헛되이 지내지 않도록 하여라. 돌이켜 보아라. 비록 보배가 산과 같이 쌓이고 권속이 항하의 모래처럼 많다 하더라도 눈을 뜨면 보이지만 눈을 감고는 볼 수 없다. 유위법은 모두 꿈과 같으며 꼭두각시와 같은 것이다. 스승을 찾아가라. 급히 스승을 구하지 않으면 일생을 헛되이 보내게 된다. 불성은 본래 스스로 있는 것이지만, 스승을 인연하지 않고는 바르게 알지 못하는 것이니 스승 없이 깨친 자는 만의 하나도 드물다. 검고 흰 것도 분별하지 못하면서 망녕되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편다고 하면, 이것은 부처를 비방하고 법을 어지럽히는 짓이다. 이와 같이 무리들은 설법하기를 비오듯이 하더라도 모두가 마군의 말이요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다. 그 스승은 마왕이요 제자는 마왕의 권속인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의 지도로 인해 생사 고해에 떨어지게 되는 것을 알지 못한다. 견성하면 부처요, 견성하지 못하면 중생이다. 그러나 불성이 중생의 성품을 떠나지 않았다. 중생의 성품을 떠나 따로 불성이 있다면 부처가 이제 어느 곳에 있겠느냐. 중생의 성품의 곧 불성인 것이다. 성품 밖에 부처가 없고, 부처는 곧 성품이니, 이 성품을 버리고 따로 부처가 없으며 부처 밖에 성품도 없다.” 제자가 물었다. “견성하지 못했더라도 염불하고 경을 외우며 보시하고 계를 지녀 부지런히 복된 일을 지으면 성불하지 않겠습니까?” “못한다! ” “어째서 못합니까?” “조그마한 법이라도 얻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유위법이며 인과에 얽매인 법이므로 과보를 받고 윤회를 받게 될 것이다. 생사도 면치 못했으면서 어떻게 성불할 수 있겠느냐. 성불은 반드시 먼저 견성을 해야 한다. 견성하지 못하면 인과를 얻는 법 같은 것도 모두가 외도들의 법이다. 법을 구하고자 하는 자라면 어찌 외도법을 배우겠느냐. 또 어떤 사람이 인과를 무시하고 부지런히 악한 업을 지으면서 망령되이 말하기를 ‘본래 공한 것이다. 악한 일을 하더라도 허물이 없다’ 고 하면 그는 무간지옥에 떨어져 영영 나올 기약이 없을 것이니,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어찌 이런 소견을 가지겠느냐.” <달마 혈맥론>
9. 이 몸이 곧 법신
제자가 달마 스님에게 물었다. “이미 사람의 모든 말이나 행동과 그 밖의 모든 것이 본심이라면 이 몸이 허물어질 때 사람들은 어째서 본심을 보지 못합니까?” “본심은 항상 나타나 있건만 네가 스스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마음이 있는데 어째서 보지 못합니까?” “네가 꿈을 꾼 일이 있느냐? ” “있습니다.” “네가 꿈을 꿀 때 그것은 네 몸이냐 아니냐? ” “제 몸입니다.” “꿈 속의 네 말이나 모든 행동이 너와 같으냐 다르냐? ” “다르지 않습니다.” “이미 다르지 않다면 그 몸이 곧 너의 본 법신이며 그 법신이 곧 너의 본심이다. 이 마음은 시작없는 옛적부터 지금까지 너와 떨어진 적이 없고, 생멸이 없으며 늘거나 주는 일도 없고 때묻거나 깨끗하지도 않다. 좋거나 나쁘지도 않고 오고 가지도 않으며 옳고 그른 것도 없다. 마치 허공과 같아 취할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다. 이 마음은 빛깔이나 모양이 없으니 극히 미묘하여 보기 어렵다. 사람들이 모두 이를 보고자 하여 이 광명 가운데서 손을 놀리고 발을 움직이는 자가 끝없이 많지만, 물음에 당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해 마치 나무등신 같구나. 딱하다, 모두 자기가 쓰고 있는 물건인데 어찌하여 모르는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중생이 모두 미혹해 있으므로 업을 짓고, 생사 바다에 빠져, 나오고자 하여도 도리어 빠진다’ 하셨으니, 이것은 오직 견성하지 못한 때문이다. 중생이 미혹하지 않았다면 어째서 그 중에 한 사람도 아는 사람이 없는가. 제 몸을 움직여 쓰는 것을 왜 모르는가. ” <달마 혈맥론>
10. 백정도 성불할 수 있다
제자가 달마 스님에게 물었다. “가정을 가진 사람은 음욕을 버릴 수 없는데 어떻게 성불할 수 있겠습니까?” “이 법은 오직 견성을 말할 뿐 음욕을 말하지 않는다. 이 범부는 오직 견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음욕이 문제가 되지만, 견성만 하면 음심과 욕심이 본래 공적하여 끊거나 버리기 위해 힘쓸 필요가 없다. 그렇다고 거기에 빠지지도 않으니 비록 버릇이 남았더라도 해로울 것이 없다. 왜냐 하면 성품은 본래 청정하여 비록 색신 가운데 있더라도 물들거나 더러워질 수 없기 때문이다. 법신은 본래 받는 것이 없고 주리고 목마름도 없으며 춥고 더운 것도 없다. 본래 한 물건도 얻어 볼 것이 없으나 다만 색신으로 인해 주리고 목마르며 춥고 더운 것이 있으니, 속지 않으려거든 곧 정신차려 정진해야 한다. 생사에 자재를 얻어 일체법을 굴려 걸림이 없게 되면 어느 곳이고 편안하지 않은 곳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터럭 끝만큼이라도 의심이 있으면 결코 일체 경계에 자재하지 못해 윤회를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견성만 하면 백정일지라도 성불할 수 있다.” <달마 혈맥론>
제 3 장 본원 청정심
1. 부처란 마음이다
모든 부처님과 일체 중생의 본체는 한마음일 뿐 다른 것이 아니다. 이 마음은 시작없는 옛적부터 나고 죽는 것이 아니고, 푸르거나 누른 것도 아니며 어떤 형상이 있는 것도 아니다. 모든 이름과 말과 자취와 관계를 초월한 본체가 곧 마음이다. 여기서는 자칫 생각만 움직여도 벌써 어긋나는 것이니, 마치 허공과 같아 끝이 없으며 짐작이나 생각으로 헤아릴 수도 없는 것이다. 이 한마음이 곧 부처이다. 부처와 중생이 결코 다를 것이 없지만, 중생들이 상에 집착하여 밖을 향해 부처를 찾으니 찾으면 찾을수록 더욱 잃게 된다. 스스로 부처이면서 다시 부처를 찾고, 마음을 가지고 다시 마음을 잡으려 한다면, 아무리 오랜 세월을 두고 몸이 다하도록 애써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오직 생각만 쉬면 부처가 스스로 앞에 나타나는 것임을 모르고 있다. 이 마음이 곧 부처이며 부처는 곧 중생이니, 이 마음은 중생이 되었을 때도 줄지 않고 부처가 되었을 때도 늘지 않으며, 육도만행과 항하의 모래만큼 많은 공덕이 모두 갖추어져 다시 더 닦거나 보탤 여지가 없는 것이다. 인연을 만나면 곧 따르고 인연이 없어지면 곧 고요하다. 이 부처를 믿지 않고 상에 집착하여 수행하며 그것으로 공덕을 삼는다면, 이런 것은 모두가 망상이요, 도와는 크게 어긋난다. 이 마음이 곧 부처요 다시 다른 마음이 없다. 이 마음은 허공처럼 맑고 깨끗하여 한 점의 모양도 없다. 만약 한 생각이라도 움직인다면 곧 법체와는 어긋나며 상에 집착하는 것이니, 일찍이 이와 같은 상에 집착한 부처는 없었다. 또한 육도만행을 닦아 성불하고자 한다면 이것은 곧 점차로 부처를 이루려고 하는 것이니 점차로 된 부처도 없다. 다만 한 마음만 깨달으면 다시 더 얻을 아무 법도 없으니 이것이 곧 참 부처이다. 부처와 중생은 이 한마음 뿐이요 조금도 다르지 않다. 마치 허공과 같아서 더럽히거나 무너뜨릴 수 없으며, 해가 온 세상을 비춰 밝음이 천하에 퍼지더라도 허공은 일찍이 밝은 일이 없고, 해가 져서 어둠이 천하를 덮더라도 어둡지 않다. 밝고 어둠이 뒤바뀌더라도 허공의 성질은 조금도 변함이 없으니, 부처와 중생의 마음도 이와 같다. 부처를 생각할 때 청정한 광명과 자재 해탈의 거룩한 모양으로 보고, 중생 보기를 때묻고 어둑하고 생사에 시달리는 혼탁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무량겁을 지내도록 수행해도 끝내 도는 이루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상에 집착해 있기 때문이다. 이 마음에는 다시 털끝 만한 것이라도 얻을 것이 없으니 마음이 곧 부처인 까닭이다. 요즘 도를 배우는 사람들은 이 마음의 본체는 깨닫지 못하고 마음에서 생각을 일으켜 밖을 향해 부처를 구하며 상에 집착하여 수행하고 있다. 이런 것은 모두가 그릇된 방법이요 보리도는 아니다. <황벽 전심법요>
2. 무심
시방세계의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보다는 한 사람의 무심도인에게 공양하는 것이 더 낫다. 왜냐하면 무심이란 분별 망상 없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의 본체가 안으로는 목석과 같아 동요함이 없고, 밖으로는 허공과 같아 막힘이 없으며, 주체와 객체도 없고 방향과 위치도 없고 모양도 없으며,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다. 수행인이 이 법에 들어오지 못하는 것은 공에 떨어져 머물 곳이 없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멀리서 강 건너 기슭만 바라보고는 스스로 물러서서 아는 것을 구하니, 아는 것을 구하는 이는 쇠털과 같이 많고 도를 깨닫는 이는 쇠뿔과 같이 드물다. 오늘날 수행인들이 자기 마음 가운데서 깨닫고자 하지 않고 마음 밖으로 상에 집착하여 대상을 취하니 모두 도와는 어긋난다. 이 마음은 곧 무심인 마음이며 모든 상을 떠난 것이다. 중생과 부처가 다시 차별이 없으니 무심하기만 하면 이것이 곧 구경이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 무심하지 않으면 몇 겁을 수행해도 끝내 도는 이루지 못할 것이다. 삼승의 수행에 얽혀 해탈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 마음을 깨닫는 데는 더디고 빠름이 있다. 이 법을 듣고 한 생각에 무심한 이도 있고 여러 과정을 거쳐서 무심한 이도 있으니, 어느 것이든 마침내는 무심해야만 도를 얻는 법이다. 이 법은 다시 닦거나 증해서 얻는 것이 아니고 실로 얻을 것이 없는 것이지만 진실하여 허황하지도 않다. 한 생각에 얻은 이나 여러 과정을 거쳐 얻은 이나 그 결과는 같으며 깊고 얕은 차이가 없다. 무심을 모르는 선행이나 악행은 모두 상에 집착한 것이다. 그러므로 악을 행해 괴로운 윤회를 받고 선을 행해 부질없이 수고하니, 모두가 자기의 무심한 마음을 보는 것만 같지 못하다. <황벽 전심법요>
3. 본원 청정심
이 법은 곧 마음이므로 마음 밖에 없으며, 이 마음은 곧 법이므로 법 밖에 마음이 없다. 마음은 스스로 무심하여 다시 무심한 것도 없으니, 만약 마음으로 무심코자 한다면 도리어 유심이 될 것이다. 이 도리는 모든 생각과 헤아림이 끊어졌으므로 언어로 표현할 수 없으며 마음으로 생각할 수도 없다. 이 마음이 본래 청정한 부처이므로 사람마다 다 있는 것이다. 고물거리는 미물 중생으로부터 불보살에 이르기까지 본래 한 몸이요 다를 것이 없는데, 망상으로 분별하기 때문에 가지가지로 업을 짓고 과보를 받게 된다. 비록 업을 짓고 과보를 받으나 본불밖에는 한 물건도 없으니, 텅 비어 일체에 통하며 또 고요하여 밝고 미묘하고 안락할 뿐이다. 스스로 깊이 깨달아 들어가면 바로 그 자리이니 다시 더 한 물건이라도 보태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 이르러 이제까지 지내온 여러 겁 동안의 많은 수행을 돌이켜 보면 모두 꿈속의 헛된 장난임을 알 것이다. 그러므로 여래께서는 ‘내가 무상정각에서 실로 얻은 것이 없으니 만약 얻은 것이 있었다면 연등불께서 내게 수기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 하셨으며, 또 말씀하시기를 ‘이 법이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으며 이것을 이름하여 무상 정각이라 한다. ’ 고 하셨다. 이와 같이 보면 이 본원 청정심이 중생이나 부처님이나 두루 평등하여 너와 내가 없이 항상 스스로 밝아 널리 비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마에 구슬이 박힌 힘센 장사가 자기에게 구슬이 박힌 것을 모르고 밖으로만 찾아 두루 다녀도 얻지 못하다가, 지혜 있는 사람이 이마에 구슬이 박힌 것을 가르쳐 주면 당장에 구슬을 찾는다. 수행인이 자기 본심이 부처임을 알지 못하고 밖을 향해 찾아다니면서 갖가지 공을 닦아 점차로 깨닫고자 하지만, 만 겁을 지내어도 영영 도는 이루지 못할 것이다. <황벽 전심법요>
4. 목마르기 전에 샘을 파라
그대들이 만약 미리 칠통을 철저히 깨뜨리지 않으면 섣달 그믐날을 당해 정신차리지 못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남이 참선하는 것을 보고 ‘아직도 저러고 있나?’ 하고 비웃는다. 그러나 내 그런 사람에게 물으리라. “문득 죽음이 닥치면 그대는 어떻게 생사를 대적하겠는가?” 평상시에 힘을 얻어 놓아야 급할 때 다소 힘을 덜 수 있는데, 목마르기를 기다려 샘을 파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마라. 죽음이 박두하면 이미 손발을 쓸 수가 없으니, 앞길이 망망하여 어지러이 갈팡질팡할 뿐이다. 평시에 구두선만 익혀 선을 말하고, 도를 말하며, 부처를 꾸짖고 조사를 욕해 제법 다해 마친 듯하다가 여기에 이르러서는 아무 쓸모가 없게 된다. 평시에 남들은 속여 왔지만 이 때를 당해 어찌 자기마저 속일 수 있으랴. 권하노니, 육신이 건강할 동안에 이 일을 분명히 판단해 두라. 이 일은 풀기가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닌데, 힘써 정진하려고는 하지 않고 어렵다고만 하니, 진정한 대장부라면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화두는 다음과 같이 생각해야 한다.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에게 묻기를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자 답하기를 “무(없다)” 라고 했다. 어째서 없다고 했는지 없다는 그 뜻을 참구해야 한다. 밤이나 낮이나 가나 오나 앉으나 서나 생각생각 끊이지 않고 정신을 차려 참구하라. 날이 가고 해가 지나 정진이 여물어지면 마음 빛이 활짝 열려 불조의 기틀을 깨달아, 문득 천하 노화상의 혀끝에 속지 않고 스스로 큰소리치게 될 것이다. 알고 보면 달마가 서쪽에서 왔다는 것도 바람이 없는데 파도를 일으킨 것이요, 부처님이 꽃을 들어 보이신 것도 오히려 허물이라 할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서는 일 천 성인이 오히려 열지 못하는데 어찌 염라대왕을 말할 것인가? 여기에 신기한 도리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런 생각하지 마라. 일이란 마음 있는 사람을 두려워한다. <황벽 시중>
제 4장 참선에 대한 경책
1. 못 깨치더라도 다른 길 찾지 말라
선사 고봉화상은 항상 학인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오직 화두를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다닐때도 이렇게 참구 하라. 깊이 궁구하여 힘이 미치지 못하고 생각이 머무를 수 없는 곳에 이르러 문득 타파하여 벗어나면 성불한 지 이미 오래임을 알 것이다.” 참선하여 깨치지 못하더라도 부디 다른 방법을 찾지 마라. 오직 마음이 다른 인연에 이끌리지 않도록 할것이며, 또 모든 망념을 끊고 힘써 화두를 들고 앉으라. 목숨을 떼어놓고 용맹스럽게 정진한다면 백 번 죽어라도 상관없으리라. 만약 철저히 깨치지 못했거든 결코 쉬지 마라. 이런 결심만 있으면 큰 일을 마치지 못할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병중 공부에는 용맹 정진도 필요 없고 눈을 부릅뜨고 억지 힘을 쓸 것도 없다. 다만 너의 마음을 목석과 같게 하고 뜻을 불꺼진 재와 같이 하여, 꼭두각시 같은 이 몸을 세계 밖으로 던져 버려라. 누가 와서 돌보아 주거나 말거나, 설사 백스무 살을 산다 할지라도, 혹은 죽어 숙세의 업에 끌려 지옥에 떨어져도 그만이라고 생각하라. 어떤 환경에도 흔들림이 없이, 다만 간절하게 저 아무 맛도 없는 화두를 가지고 병석에 누운 채 묵묵히 궁구하고 놓아 지내지 마라. <중봉 시중>
2. 장 서방이 마시고 이 서방이 취하는 도리
3년, 5년을 정진해도 힘을 못 얻으면 참구해 오던 화두를 내버리는 일이 있는데, 이것은 길을 가다가 중도에서 그만두는 것과 같다. 이제까지 쌓은 허다한 공부가 참으로 아깝다. 뜻이 있는 자면 산수 좋고 조용한 승당에서 맹세코 3년만 문을 나서지 말아 보아라. 반드시 열릴 날이 있을 것이다. 어던 사람은 공부하다가 마음이 좀 맑아져 약간의 경계가 나타나면 문득 게송을 읊으며 스스로 큰 일을 다 마친 사람이라 자처하고 혓바닥이나 즐겨 놀리다가 일생을 그르치고 만다. 세치 혓바닥의 기운이 다하면 장차 무엇으로써 감당할 것인가. 생사를 벗어나려면 장차 무엇으로써 감당할 것인가. 생사를 벗어나려면 반드시 참다워야 하고 깨침 또한 실다워야 한다. 화두가 면밀하여 끊임없고, 몸이 있는 줄도 알지 못하면, 이것은 ‘나’ 라는 집착은 없어졌으나 법에 대한 집착은 아직 없어지지 않은 것이다. 몸을 잊고 있다가 문득 다시 몸을 생각하게 되면, 꿈속에 만 길 낭떠러지에서 미끄러져 떨어질 때 살려고 발버둥치다가 마침내 깨어나는 것과 같이, 이 경지에 이르거든 오로지 화두만을 단단히 들고 가라. 문득 화두를 따라 일체를 잊어버리면 주관인 나와 객관인 법이 모두 없어질 것이다. 불 꺼진 재에서 콩이 튀어야 비로소 장 서방이 마시고 이 서방이 취하는 도리를 알게 될 것이다. 바로 이 때 반야 문하에 와서 방망이를 맞도록 하여라. <반야 시중>
3. 보고 듣는 놈은 어디에 있는가
어떤 사람은 입만 열면 나는 선객이라고 한다. 그러다가 ‘어떤 것이 선인가?’ 하고 물으면 어름어름하다가 마침내 입을 다물고 마니, 이 어찌 딱한 일이 아니며 굴욕이 아니랴. 버젓하게 불조의 밥을 얻어먹고 본분사를 까맣게 알지 못하면서 다투어 말귀나 세속 지식을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떠들며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또 어떤 자는 부모에게서 낳기 전 본래 면목은 찾으려 하지 않고, 두툼한 방석 위에 앉아 부질없는 품팔이 방아나 찧으면서 복이 되기를 바라며 업장이 참회한다 하니, 도하고는 참으로 십만 팔천 리이다. 어떤 사람은 마음을 한곳으로 굳히고 생각을 거두어 사물을 복 공으로 돌리며 생각이 일어나면 곧 눌러 막는다. 이런 견해는 공에 떨어진 외도이며 혼이 돌아오지 않는 산 송장이다. 어떤 사람은 망녕되이 성내고 기뻐하면서 보고 듣는 사물로써 명백히 알아마친 것을 삼고 일생 공부 다 마쳤다 하니, 내 잠깐 그런 사람에게 묻겠다. “문득 죽음이 닥쳐와 불구덩이 속의 한줌 재가 되면, 성내고 기뻐하고 보고 듣는 놈은 어느 곳에 있는가?” <초석 시중>
4. 조용한 환경에 탐착하지 말라
참선하는 데는 무엇보다 고요한 환경에 탐착하지 말아야 한다. 고요한 환경에 빠지게 되면 사람이 생기가 없고 고요한 데 주저앉아 깨치지 못하게 된다. 대개 사람들은 시끄러운 환경은 싫어하고 고요한 환경을 좋아한다. 수행하는 사람이 항상 시끄럽고 번거러운 곳에서 지내다가 한 번 고요한 환경을 만나면 마치 꿀이나 엿을 먹는 것과 같이 탐착하게 되니 이것이 오래가면 스스로 곤하고 졸음에 취해 잠자기만 좋아하니 어찌 깨치기를 바라랴. 공부하는 사람은 머리를 들어도 하늘을 보지 못하고 머리를 숙여도 땅을 보지 못하며, 산을 보아도 산이 아니요 물을 보아도 물이 아니다. 가도 가는 줄 모르고 낮아도 앉은 줄 모르며, 천 사람 만 사람 가운데 있어도 한 사람도 보지 못해야 한다. 몸과 마음이 오로지 한 개의 의단 뿐이니 의단을 부수지 않고는 쉬지 말아야 한다. <박산 선경어>
5. 고양이 쥐잡듯이
참선할 때는 죽기를 두려워 말고 살기도 바라지 말라. 살기만 하고 죽지 못할까 걱정해야 한다. 진실로 의정과 어불어 한곳에 매여 있기만 하면 거친 환경은 쫓지 않아도 저절로 물러갈 것이요, 망녕된 마음은 맑히기를 힘쓰지 않아도 스스로 맑아질 것이다. 육근의 문턱이 자연히 텅 비고 넓어져 손만 들면 곧 잡히고 부르면 즉시 대답하는데 어찌 살지 못할 것을 걱정할 것인가. 화두를 들 때는 반드시 화두가 뚜렷하고 분명해야 한다. 마치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와 같이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귀신굴에 주저앉아 혼혼침침하여 일생을 허송하게 될 것이니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는 두 눈을 부릅뜨고 네 다리를 딱 버티고, 어떻게 하면 쥐를 잡아먹을까만을 생각한다. 비록 곁에 닭이나 개가 있더라도 눈 한 번 팔지 않는다. 참선하는 사람도 이와 같이 분연히 이 도리를 밝히고야 말겠다 하고, 어떠한 역경이 닥쳐오더라도 한 생각도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 만약 조금이라도 딴 생각을 일으키면 쥐만 놓칠 뿐 아니라 고양이 새끼마저 놓치게 된다. <박산 선경어>
6. 문자나 말에 팔리지 마라
참선할 때 조사의 공안을 생각으로 헤아려 짐작해서는 안된다. 설사 해석하여 하나하나 알았다 하더라도 본분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조사의 말 한 마디, 글 한 구절은 마치 큰 불무더기와 같아, 가까이 갈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것인데 어찌 그 가운데 앉고 누울 수 있으랴. 더욱 그 가운데 주저앉아 크고 작은 것을 따지고, 좋고 나쁜 것을 가린다면 목숨을 잃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참선하는 사람은 문자를 찾거나 신기한 말에 팔리지 말아야 한다. 이런 것들은 이익이 없을 뿐만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되고 망상이 된다. 생각의 길이 끊어진 곳을 얻으려 하면서 말꼬리나 더듬는다면 아무것도 될 것이 없다. 공부할 때 공안을 진실하게 참구하여 깨뜨리지는 않고 다른 것과 비교하여 헤아리며 알고자 하는 것을 가장 꺼린다. 마음에 머무름이 있으면 도와는 더욱 더 멀어진다. 그와 같이 정진한다면 비록 미래 불이 출현할 때까지 할지라도 소득이 없을 것이다. 참으로 의정이 문득 일어난 자라면 은산 철벽에서 오로지 살길만을 찾으려고 애쓰는 것과 같다. 만약 살아날 길을 찾지 못했다면 어찌 편안하게 앉아만 있겠는가. 참선하는 사람이 이와 같이 정진한다면 어느덧 시절이 다가와 스스로 깨칠 것이다. <박산 선경어>
7. 간절한 마음으로 정진하라
참선하는 데에 가장 요긴한 것은 간절한 마음이니 간절해야만 힘이 된다. 간절하지 않으면 게으른 생각이 나고 게으른 생각이 나면 방종 방일하여 그르치게 된다. 만약 간절하게 마음을 쓰면 방일이나 게으름이 아예 생길 수 없다. 간절한 이 한 생각만 잊지 않으면 조사의 경지에 이르지 못할까 근심하거나 생가를 깨뜨리지 못할까 걱정이 없다. 이 간절한 생각은 당장에 선악의 허물을 뛰어 넘는다. 화두가 간절하면 망상도 졸음도 없다. <박산 선경어>
8. 깨치기를 기다리면 깨치지 못한다
참선하는 데 깨치기를 기다려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이 집에 간다면서 도중에 앉아서 가지는 않고, 집에 닿기만을 기다린다면 그는 끝내 나그네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집을 향해 가야 집에 이를 것이다. 이와 같이 마음으로 깨닫기만을 기다린다면 깨치지 못할 것이다. 오로지 화두를잡아 힘 쓸 뿐 깨치기를 기다려서는 안 된다. 정진에 진취가 없다고 걱정할 것은 없다. 진취가 없거든 더욱 힘쓰는 이것이 공부다. 형상이 없다해서 머뭇거린다면 비록 백 겁 천생을 기다린다 할지라도 누가 어떻게 해 줄 것인가. 의정이 일거든 놓지 않는 것이 향상이다. ‘생사’ 두 글자를 이마에 붙인 듯 생각하고 마치 범에게 쉬지 말고 정진하라. 범에게 쫓기게 되어 안전한 곳에 피신하지 못하면 잡아먹히고 말 것이니, 어찌 다리가 아프다고 도중에서 쉴 수 있으랴. <박산 선경어>
9. 화두로 병을 물리쳐라
내 나이 스물에 이 일 있음을 알고 서른 둘에 이르도록 열 일고여덟 분의 장로를 찾아가 법문을 듣고 정진했으나 도무지 확실한 뜻을 알지 못했었다. 후에 완산 장로를 뵈오니 ‘무’ 자를 함구하라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스물네 시간 동안 생생한 정신으로 정진하되,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와 같이 하고 닭이 알을 안듯이 하여 끊임없이 하라. 투철히 깨치지 못했다면 쥐가 나무 궤를 쏠 듯이 결코 화두를 바꾸지 말고 꾸준히 정진하라. 이와 같이 하면 반드시 밝혀 낼 시절이 있을 것이다.” 그로부터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부지런히 참구하였더니 십팔 일이 지나서 한 번은 차를 마시다가 문득 부처님이 꽃을 들어 보이시니 카샤파가 미소한 도리를 깨치고 환희를 이기지 못했었다. 서너 명의 장로를 찾아 결택을 구했으나 아무도 말씀이 없더니, 어떤 스님이 말하기를 “다만 해인 삼매로 일관하고 다른 것은 모두 상관하지 마라.” 하시기에 이 말을 그대로 믿고 두 해를 보냈다. 경정 오년 유월에 사천 중경에서 극심한 이질병에 걸려 죽을 지경에 빠졌으나 아무 의지할 힘도 없고 해인 삼매도 소용없었다. 종전에 좀 알았다는 것도 아무 쓸데가 없어, 입도 달싹할 수 없고 손도 꼼짝할 수 없으니 남은 길은 오직 죽음뿐이었다. 업연의 경계가 일시에 나타나 두렵고 떨려 갈팡질팡할 뿐 어찌할 도리가 없고 온갖 고통이 한꺼번에 닥쳐왔었다. 그때 내 억지로 정신을 가다듬어 가족에게 후사를 말하고 행로를 차려 좋고 좌복을 높이 고이고 간신히 일어나 좌정하고 삼보와 천신에게 빌었다. ‘이제까지 모든 착하지 못한 짓을 진심으로 참회합니다. 바라건대 이 몸이 이제 수명이 다하였거든 반야의 힘을 입어 바른 생각대로 태어나 일찍이 출가하여지이다. 혹 병이 낫게 되거든 곧 출가 수행하여 크게 깨쳐서 널리 후학을 제도케 하여지이다.’ 이와 같이 하고 ‘무’ 자를 들어 마음을 돌이켜 스스로를 비추고 있으니 얼마 아니하여 장부가 서너 번 꿈틀거렸다. 그대로 두었더니 또 얼마 있다가는 눈까풀이 움직이지 않으며, 또 얼마 있다가는 몸이 없는 듯 보이지 않고 아직 화두만이 끊이지 않았다. 밤늦게 서야 자리에서 일어나니 병이 반은 물러간 듯했다. 다시 앉아 삼경 사점에 이르니 모든 병이 씻은 듯이 없어지고 심신이 평안하여 아주 가볍게 되었다. <몽산 법어>
10. 물에 비친 달처럼
팔월에 강릉으로 가서 삭발하고 일년 동안 있다가 생각에 나섰다. 도중에 밥을 짓다가 생각하기를, 공부는 모름지기 단숨에 해 바칠 것이지 끊일락 이을락 해서는 안 되겠다 하고, 황룡에 이르러 당으로 돌아갔다. 첫 번째 수마가 닥쳐왔을 때는 자리에 앉은 채 정신을 바짝 차려 힘 안 들이고 물리쳤고, 다음에도 역시 그와 같이 하여 물리쳤다. 세 번째 수마가 심하게 닥쳐왔을 때는 자리에서 내려와 불전에 예배하여 쫓아버리고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이미 방법을 얻었으므로 그때그때 방편을 써서 수마를 물리치며 정진했다. 처음에는 목침을 베고 잠깐 잤고 뒤에는 팔을 베었고 나중에는 아주 눕지를 않았다. 이렇게 이삼 일이 지나니 밤이고 낮이고 심히 피곤했다. 한 번은 발바닥이 땅에 닿지 않고 공중에 둥둥 뜬 듯하더니, 홀연 눈앞의 검은 구름이 활짝 걷히는 듯하고 마치 금방 목욕탕에서라도 나온 듯 심신이 상쾌하였다. 마음에는 화두에 대한 의단이 더욱더 바깥 경계의 소리나 빛깔이나 오욕이 들어오지 못해 청정하기가 마치 은쟁반에 흰 눈을 듬뿍 담은 듯하고 청명한 가을 공기 같았다. 그때 돌이켜 생각하니 정진의 경지는 비록 좋으나 결택할 길이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승천의 고섬 화상에게 갔었다. 다시 선실에 돌아와 스스로 맹세하기를 ‘확연히 깨치지 못하면 내 결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리라’ 하고 배겨냈더니 달포만에 다시 정진이 복구되었다. 그 당시 온몸에 부스럼이 났는데도 불구하고 목숨을 떼어놓은 맹렬한 정진 끝에 힘을 얻었었다. 재에 참례하려고 절에서 나와 화두를 들고 가다가 재가를 지나치는 것도 알지 못했다. 이렇게 하여 다시 동중공부를 쌓아 얻으니, 이 때 경지는 마치 물에 비친 달과도 같아 급한 여울이나 거센 물결 속에 부딪쳐도 흩어지지 않으며 놓아 지내도 또한 잊혀지지 않는 활발한 경지였다. <몽산 법어>
11. 파도가 곧 물이로다
삼월 초엿새 좌선 중에 바로 ‘무’ 자를 들고 있는데, 어떤 수좌가 선실에 들어와 향을 사르다가 향합을 건드려 소리가 났다. 이 소리를 듣고 ‘악!’ 하고 외마디 소리를 치니, 드디어 자기 면목을 깨달아 마침내 조주를 깨뜨렸던 것이다. 그때 게송을 지었다. 어느덧 갈 길 다하였네 밟아 뒤집으니 파도가 곧 물이로다 천하를 뛰어넘는 늙은 조주여 그대 면목 다만 이것뿐인가. 그해 가을 임안에서 설암 퇴경 석범 허주 등 여러 장로를 뵈었다. 허주 장로가 완산 장로께 가 뵙기를 권하시어 완산 장로를 찾아뵈었다. 그때 장로가 물으셨다. “ ‘광명이 고요히 비춰 온 법계에 두루 했네’ 라고 한 게송은 어찌 장졸 수재가 지은 것이 아니냐?” 내가 대답하려 하자 벽력같은 할로 쫓아내셨다. 이때부터 앉으나 서나 음식을 먹으나 아무 생각이 없더니 여섯 달이 지난 다음 해 봄, 하루는 성밖에서 돌아오는 길에 돌층계를 올라가다가 문득 가슴속에 뭉쳤던 의심덩어리가 눈 녹듯 풀렸다. 이 몸이 길을 걷고있는 줄도 알지 못했다. 곧 완산 장로를 찾았다. 또 먼저 번 말을 하시는 것을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선상을 들어 엎었고, 다시 종전부터 극히 까다로운 공안을 들어 대시는 것을 거침없이 알았던 것이다. 참선은 모름지기 자세히 해야 한다. 산 승이 만약 중경에서 병들지 않았던들 아마 평생을 헛되이 마쳤을 것이다. 참선에 요긴한 일을 말한다면, 먼저 바른 지견을 가진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그러므로 옛 사람들은 조석으로 찾아가 심신을 결택하고, 쉬지 않고 간절히 이 일을 구명했던 것이다. <몽산 어록>
제5장 육조의 법문
1. 반야
보리와 반야의 성품은 사람마다 본래 가지고 있지만, 마음이 어두워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 그러므로 선지식의 가르침을 받아 자성을 보아야 할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이나 지혜로운 사람의 불성은 본래 차별이 없으나 다만 막히고 트임이 같지 않으므로 어리석음과 지혜로움이 있게 된 것이다. 내 이제 마하반야바라밀 법을 말해 그대들에게 각기 지혜를 얻게 할 것이니 정신차려 잘 들어라. 세상 사람들이 입으로는 종일 반야를 말하면서도 자성 반야는 알지 못하니, 마치 먹는 이야기를 아무리 해봐도 배부를 수 없는 것과 같은 일이다. 입으로만 공을 말한다면 만 겁을 지나더라도 견성할 수 없다. 마하반야바라밀은 ‘큰 지혜로 피안에 이른다’ 는 뜻이다. 이것은 마음으로 행할 것이요 입으로 말하는 데 있지 않다. 입으로만 외우고 마음으로 행하지 않는다면 허깨비와 같이 허망한 것이다. 그러나 입으로 외우고 마음을 행한다면 곧 마음과 입이 서로 응하는 것이다. 본 성품이 부처요 성품을 떠나서는 부처가 없다. 마하란 크다는 뜻이니, 심량의 광대함이 허공과 같아 끝이 없다는 말이다. 모나거나 둥글지도 않으며, 크거나 작지도 않다. 또한 푸르고 누르고 붉고 흰 빛깔과 상관없으며, 위아래와 길고 짧음도 없고, 성내고 기뻐할 것도 없으며, 옳고 그름과 선하고 악함도 없다. 머리도 꼬리도 없는 것이어서, 모든 부처님의 세계가 다 허공과 같다. 사람들의 미묘한 성품이 본래 공해서 한 법도 얻을 것이 없으므로, 자성의 진공도 그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을 듣고 공에 걸리지 말아라. 무엇보다 공에 걸리지 말 것이니, 만약 아무 생각도 없이 멍청히 앉아만 있으면 곧 무기공에 떨어질 것이다. 허공은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이므로 해와 달과 별, 산과 풀과 나무, 악인. 선인. 천당. 지옥, 그리고 큰 바다나 수미산도 다 허공 안에 있는 것이다. 사람들의 성품이 공한 것도 이와 같다. 자성이 모든 법을 포함하기 때문에 크다고 하는 것이다. 만 법은 사람들의 성품 속에 있다. 만약 남의 선악을 보더라도 취하고 버리는 분별이 없이 거기 물들지 않으면 마음이 허공과 같을 것이다. 이것이 큰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입으로만 말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으로 행한다. 어리석은 사람이 마음을 비우고 아무 생각도 없이 고요히 앉아 스스로 크다고 일컫는다면, 이런 사람과는 더불어 말할 것이 못된다. 왜냐하면 그는 그릇된 소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은 넓고 커서 법계에 두루해 있다. 쓰면 아주 분명하고, 응용에 따라 일체를 알아서 일체가 곧 하나요 하나가 곧 일체이며, 가고 옴에 자유로워 마음에 걸림이 없으니 이것이 곧 반야다. 모든 반야지가 다 자성으로부터 나온 것이며 밖에서 들어온 것이 아니다. 마음을 쓸 때 잘못이 없으면 이것이 진성의 자용이다. 하나가 참될 때 모든 것이 참된 것이다. 반야는 지혜이니 언제 어디에서나 생각생각이 어리석지 않아, 항상 지혜롭게 행동하면 이것이 공 반야행이다. 한 생각이 어리석으면 반야가 끊어지고, 한 생각이 슬기로우면 반야가 일어난다. 사람들이 대개 어리석어 반야를 보지 못하고 입으로만 곧잘 말하는데 마음은 노상 어리석다. 반야는 형상이 없으니 슬기로운 마음이 곧 그것이다. 바라밀은 피안에 이른다는 말로서 생멸을 떠난다는 뜻이다. 대상에 집착하면 생멸이 일어나 물에 잇는 물결과 같으니 이것이 차안이요, 대상에 걸림이 없으면 생멸이 없어 물이 자유롭게 흐르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피안이다. 그러므로 범부가 곧 부처이며, 번뇌가 곧 보리다. 앞생각이 어두웠을 때는 범부였지만, 뒷생각을 깨달으면 곧 부처다. 앞생각이 대상에 집착했을 때는 번뇌이지만, 뒷생각이 대상을 떠나면 곧 보리인 것이다. 마하반야바라밀은 가장 높고 귀해 으뜸가는 경지이다. 가는 것도 오는 것도 또한 머무는 것도 아니지만,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여기서 나오신 것이다. <육조단경 반야품>
2. 정혜
내 이 법문은 정혜로써 근본을 삼는다. 그러므로 정과 해가 다르다 하지 말아라. 정과 해는 하나요 둘이 아니다. 정은 해의 본체요, 해는 정의 작용이다. 곧 혜 안에 정이 있고 정안에 혜가 있는 것이니, 만약 이 뜻을 알면 곧 정과 혜를 함께 배운다. 도를 배우는 사람들은 먼저 정이 있고서야 혜가 나온다거나, 혜가 있은 뒤 정이 나온다거나 하여 서로 다르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이런 소견을 가지는 자는 법에 두 모양을 두는 것이다. 입으로는 착한 말을 하면서 마음은 착하지 않은 것이다. 스스로 깨달아 닦아 나감에는 말다툼이 있을 수 없다. 만약 앞뒤를 다툰다면 곧 어리석은 사람과 같으므로 승부가 끝이 없어, 도리어 아와 법만 늘어서 사상을 버리지 못할 것이다. 정과 혜는 이를테면 들과 불빛과 같다. 등이 있으면 불빛이 있고, 등이 없으면 불빛이 없다. 등은 불빛의 본체이고 불빛은 등의 작용이므로 등과 불빛의 이름은 다르나 본체는 하나인 것처럼, 정과 혜도 그와 같다. <육조단경 정혜품>
3. 일행삼매
일생삼매란 가고 멈추고 앉고 눕고 간에 항상 곧은 마음을 쓰는 일이다. 그러므로 유마경에 말씀하기를 “곧은 마음이 도량이며, 곧은 마음이 정토다.” 라고 한 것이다. 마음으로는 아첨하고 굽은 짓을 하면서 입으로는 곧은 체하거나, 입으로는 일행삼매를 말하면서 마음은 곧지 않게 하지 마라. 곧은 마음으로 행하여 모든 것에 걸리지 말라. 어리석은 사람은 법상에 집착하여 일행삼매를 가리켜 말하기를, 가만히 앉아 일으키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이는 무정과 같아서 오히려 도를 막는 인연이 된다. 도는 반드시 통하여 흐르게 해야 하는데 어찌 도리어 막히게 할 것인가. 마음이 무엇에고 걸리지 않으면 도가 곧 통해 흐를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무엇에 걸린다면 이것은 스스로 얽히는 일이다. 앉아서 움직이지 않는 것을 옳다고 한다면, 저 사리풋다가 숲속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유마힐에게 꾸중을 들은 일과 같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앉아서 고요히 마음을 관해 움직이지 않고 일어나지 않게 하면 이것이 공이 된다.” 고 가르친다. 이것은 어리석은 사람이 알지 못하고 집착해 전도된 말이다. 이런 사람들이 적지 않으니, 이와 같은 상교는 크게 그릇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육조단경 정혜품>
4. 무념 무상 무주
본래 바른 가르침에는 돈과 점이 없다. 사람의 바탕에 총명하고 우둔함이 있어 우둔한 사람은 차츰 닦아가고 총명한 사람은 단박 깨닫는다. 그러나 스스로 본심을 알고 본성을 보면 차별이 없다. 그러므로 돈이니 점이니 하는 것은 헛이름을 붙인 것이다. 내 이 법문은 위로부터 내려오면서 먼저 무념을 세워 종으로 삼고, 무상으로 체를 삼고, 무주로 본을 삼았다. 무상이란 상에서 상을 떠남이요, 무념이란 염에서 염이 없음이요, 무주란 사람의 본성이 선하거나 악하거나 밉거나 원수거나 간에, 서로 말을 주고받거나 좋지 못한 수작을 걸어오더라도 모두 다 헛것으로 돌려, 대들거나 해칠 것을 행각하지 않는 것이다. 생각과 생각 사이에 지난 경계를 생각하지 마라. 만약 지난 생각과 지금 생각과 뒷생각이 잇따라 끊어지지 않으면 이것이 얽매임이다. 모든 존재에 생각이 머물지 않으면 곧 얽매임이 없는 것이니, 무주로써 근본을 삼음이다. 밖으로 모든 상을 떠나면 이것이 무상이니, 상에서 떠나기만 하면 곧 법체가 청정하므로 무상으로 체를 삼은 것이다. 모든 대상에 마음이 물들지 않으면 이것이 무념이니, 제 생각에 항상 모든 대상을 떠나서 대상에 마음을 내지 말 것이다. 그러나 만약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모든 생각을 아주 없애버리려면, 한 생각이 끊어지면서 곧 죽어 딴 곳에 태어나니, 이것은 큰 착오이므로 배우는 사람은 명심해야 한다. 만약 법의 뜻을 알지 못하면 자기만 잘못 되지 않고 남까지도 잘못되게 한다. 또 자기가 어두워 보지 못하면서 부처님 말씀을 비방까지 한다. 그러므로 무념을 세워 종을 삼은 것이다. 무념으로 종을 삼은 이유는 무엇인가. 어둔 사람이 입으로만 견성했다 하면서 대상에 생각을 두고, 생각 위에 문득 사된 소견을 일으켜 온갖 지저분한 망상은 낸다. 자성은 본래 한 법도 얻을 것이 없는데 만약 얻은 것이 있다 하여 망령되어 화복을 말하면 이것이 곧 지저분한 사된 소견이다. 그러므로 이 법문은 무념을 세워서 종을 삼은 것이다. 그러면 무란 무엇을 없앰이며, 염이란 무엇을 생각함인가. 무란 두 가지 모양이 없고 모든 쓸데없는 망상이 없는 것이며, 염이란 진여의 본 성품을 생각함이다. 진여란 자성이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진여에 성품이 있으므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여가 없다면 눈과 귀와 소리와 물질이 곧 없어질 것이다. 진여의 자성에서 생각을 일으키면 육근이 비록 보고 듣고 깨닫고 알더라도, 모든 대상에 물들지 않고 참 성품이 항상 자재할 것이다. 그러므로 유마경에 이르기를 “모든 법상을 잘 분별하되 제 일의에 있어서는 움직임이 없다.” 고 한 것이다. <육조단경 정혜품>
5. 좌선과 선정
좌선은 원래 마음에 집착함도 아니고 청정에 집착함이 아니며 또한 움직이지 않음도 아니다. 만약 마음에 집착하는 것이라면 마음이 본래 망령된 것이므로 알고 보면 환과 같아 잡을 데가 없다. 청정에 집착하는 것이라면 사람의 성품이 본래 청정한 것인데 망념 때문에 진여가 파묻힌 것이니, 망념만 없으면 성품이 저절로 청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일으켜 청정하게 한다 함은 도리어 청정하다는 망념을 내는 것이 된다. 망념이란 처소가 없으니 조촐한 티를 내어 공부한다 함은 조촐한 데 얽매여 제 본성을 막는 일이 된다. 만약 움직이지 않음을 닦고자 한다면, 모든 사람들을 대할 때 남의 시비와 선악과 허물을 보지 말 것이니, 이것이 곧 자성의 움직이지 않음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몸은 비록 움직이지 않으나 입을 열면 곧 남의 시비 장단과 좋고 나쁨을 말하게 되니 이것은 도를 등지는 짓이다. 마음을 고집하거나 청정을 고집하면 곧 도에 막히게 될 것이다. 그러면 어떤 것을 좌선이라 하는가. 이 법문 중에 걸리고 막힘이 없어서 밖으로 일체 선악의 환경에 마음과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좌라하고, 안으로 자성을 보아 움직이지 않는 것을 선이라 한다. 무엇을 선정이라 하는가. 밖으로 상을 떠남이 선이며, 안으로 어지럽지 않음이 정이다. 만약 밖으로 상에 걸리면 안으로 마음이 어지럽고, 밖으로 상을 떠나면 마음도 따라서 어지럽지 않다. 본 성품은 저절로 청정하며 스스로 안정한 것이지만, 대상만을 보고서 대상을 생각하므로 곧 어지럽게 된다. 만약 모든 대상을 보되 마음이 어지러워지지 않는다면 이것이 참된 정이다. 밖으로 상을 떠나면 곧 선이며, 안으로 어지럽지 않으면 곧 정이니, 외선과 내정 이것이 선정이다. 보살계경에 이르기를 “내 본 성품이 본래 청정하다.” 하였으니, 생각생각에 본성의 청정함을 보아, 스스로 닦고 행하여 스스로 불도를 이루도록 해야 한다. <육조단경 좌선품>
6. 오분법신향
이 일은 모름지기 자성 가운데서 일어나는 것이니, 어느 때든지 순간순간 그 마음을 밝혀 스스로 닦고 스스로 행하면 자기의 법신을 보고 자기 마음의 부처를 보아 스스로 건지고 조심할 것이다. 먼저 자성의 오분법신향을 전할까 한다. 첫째는 계향이니, 자기 마음속에 그릇됨이 없고 악독함이 없고 질투와 탐욕과 성냄이 없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정향이니, 여러 가지 선악의 환경을 보더라도 마음이 어지럽지 않음이다. 셋째는 혜향이니, 자기 마음에 거리낌이 없어 항상 지혜로써 제 성품을 비춰 보고, 악한 일을 하니 않고 착한 일을 할지라도 자랑스런 마음이 없으며, 손위 공경하고 손아래를 생각하며 외롭고 가난한 이를 가엾이 여김이다. 넷째는 해탈향이니, 마음에 반연함이 없어 선도 생각하지 않고, 악도 생각하지 않으며, 자유자재하여 거리낌없음이다. 다섯째는 해탈지견향이다. 마음은 선과 악에 거리낌없더라도 공에 빠져 고요함만을 지키면 옳지 않다. 그러므로 널리 배우고 많이 들어 자기 본심을 알고 부처의 이치는 통달하여 빛에 화하고 사물에 대할지라도 나와 남이 없어 뒤바뀜이 없는 지혜의 참성품에 이른다. 이와 같은 향은 저마다 자기 안에서 피울 것이요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다. <육조단경 참회품>
7. 무상참회
이제 너희에게 무상참회를 주어 삼세의 죄과를 없애고 몸과 말과 생각의 네 가지 업을 청정하게 할 것이니 나를 따라 이와 같이 부르라. “제가 순간순간마다 미련하고 어리석은 데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이전부터 지어 온 나쁜 짓과 미련한 죄를 모두 참회하오니 단번에 소멸하여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하소서. 제가 순간순간마다 교만하고 진실치 못한 데에 물들지 않게 하소서. 이전부터 지어온 나쁜 짓과 교만하고 진실치 못한 죄를 모두 참회하오니 단번에 소멸하여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하소서. 제가 순간순간마다 질투에 물들지 않게 물들지 않게 하소서. 이전부터 지어온 나쁜 짓과 질투한 죄를 모두 참회하오니 단번에 소멸하여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하소서.” 이것이 무상참회다. 참회란 무엇인가? 참이란 지나간 허물을 뉘우침이다. 전에 지은 악업인 어리석고 교만하고 허황하고 시기 질투한 죄를 다 뉘우쳐 다시는 더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회란 이 다음에 오기 쉬운 허물을 조심하여 그 죄를 미리 깨닫고 아주 끊어 다시는 짓지 않겠다는 결심이다. 범부들은 어리석어 지나간 허물을 뉘우칠 줄 알면서도 앞으로 있을 허물은 조심할 줄 모른다. 그러기 때문에 지나간 죄도 없어지지 않고 새로운 허물이 잇따라 생기게 되니, 이것을 어찌 참회라 할 것인가. <육조단경 참회품>
8. 사홍서원
이미 참회하였으니 이제는 사홍서원을 발해야 한다. “ 내마음의 중생이 끝이 없어도 건지리이다. 내 마음의 번뇌가 다함이 없어도 끊으리이다. 내 마음의 법문이 한이 없어도 배우리이다. 내 마음의 불도가 위없어도 이루리이다.” 중생을 건진다 함은 내가 그대들을 건진다는 것과 같은 뜻은 아니다. 마음 속의 중생이라 사되고 어두운 생각, 망령되고 진실하지 못한 생각, 착하지 못한 생각, 질투하는 생각, 악독한 생각, 이와 같은 생각이 모두 중생인 것이다. 저마다 자기 마음을 스스로 건지는 이것이 참으로 건짐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자기 마음을 스스로 건질 수 있을까. 자기 마음속의 그릇된 소견과 번뇌와 무지를 바른 견해로써 건진다. 바른 견해는 지혜로 하여금 어리석음을 깨뜨리고 스스로 건지게 한다. 그릇됨이 오면 올바름으로, 미혹이 오면 깨달음으로, 어리석음이 오면 지혜로, 악이 오면 선으로 건지는 이것이 참으러 건짐이다. 그리고 번뇌를 끊는다 함은 자성의 지혜로 허망한 생각을 없앤다는 것이고, 법문을 배운다 함은 스스로 성품을 보아 항상 바른 법을 행하는 것이다. 또 불도를 이룬다 함은 항상 마음을 낮추어 참되고 바르게 행동하며, 미혹도 버리고 깨달음에서도 떠나 항상 지혜를 내며, 참된 것도 없애고 망령된 것도 없애어, 바로 불성을 보면 곧 불도를 이루는 것이다. <육조단경 참회품>
9. 삼귀의
네 가지 큰 서원을 발한 이는 불. 법. 승의 자성 삼보에 귀의하여라. 불이란 깨달음이고 법이란 올바름이며 승이란 청정함이다. 마음이 깨달음에 귀의하여 그릇되고 어두운 것을 내지 않고, 욕심을 적게 하고 만족하게 생각하여 재물과 색을 떠나면 이것이 양족존이다. 마음이 올바름에 귀의하여 그릇된 소견이 없으면 남과 나를 따지는 일도, 탐욕과 애욕에 빠지는 일도 없을 것이니 이것이 이욕존이다. 그리고 마음이 청정에 귀의하면 온갖 지저분한 것과 애욕에 물들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중중존이다. 이와 같이 수행하는 것이 스스로 귀의하는 것인데, 범부들은 이것을 알지 못하고 밤낮으로 삼귀계를 받는다고 한다. 만약 부처에게 귀의한다면 그 부처는 어디에 있는가. 부처를 보지 못한다면 무엇을 의지해 돌아갈 것인가. 그러니 귀의한다는 말이 우습지 아니한가. 그러므로 자신의 부처에게 돌아가지 않으면 의지할 곳이 없다. 이제 스스로 깨달았다면 저마다 제 마음의 삼보에 귀의하라. 안으로 심성을 고르게 하고 밖으로 남을 공경하는 것이 스스로 귀의함이다. <육조단경 참회품>
10. 마음이 밝아야 경을 알 수 있다
법달은 홍주 사람인데, 일곱 살에 출가하여 항상 법화경을 읽었다. 어느 날 조사에게 와서 절하는데 머리가 딸에 닿지 않았다. 조사가 꾸짖으며 말했다. “그렇게 머리 숙이기가 싫으면 무엇 하러 절을 하느냐. 네 마음속에 필시 무엇이 하나 들어 있는 모양인데 무엇을 익혀 왔느냐?” 법달이 대답했다. “법화경을 외우기 이미 삼천 독에 이르렀습니다.” “네가 설사 만 독을 하여 경 뜻을 통달했다 할지라도 그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면 도리어 허물이 된다는 걸 모르는구나. 내 게송을 들어보아라. 절이란 본래 아만을 꺾자는 것 어째서 머리가 땅에 닿지 않는가 ‘나’라는 게 있으면 허물이 생기고 제 공덕 잊으면 복이 한량없는 것을.” 조사가 다시 말했다. “네 이름이 무어냐?” “법달이라 합니다.” “네 이름이 법달이라니 어떻게 그리 일찍이 법을 통달했느냐? 네 이제 이름을 법달이라 하니 그 동안 얼마나 힘써 외었나 허투루 외는 것은 소리만 돌 뿐 마음을 밝혀야 보살이 된다. 네게 이제 인연이 있기 때문에 너를 위해 말해 주겠다 부처는 말이 없는 것임을 믿으면 저절로 입에서 연꽃이 피리라.” 법달이 게송을 듣고 뉘우쳐 사과를 했다. “앞으로는 반드시 모든 것을 공경하겠습니다. 제가 법화경을 외우긴 했으나 경 뜻을 알지 못해 항상 의심이 있습니다. 스님께서는 크신 지혜로 경 뜻을 말씀해 주십시오.” “법달이 법은 통달하였어도 네 마음은 모르는구나. 경에는 본래 의심이 없는데 네 마음이 스스로 의심하는 것이다. 너는 이 경의 주제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제가 어둡고 둔해 다만 겉으로 글자나 읽었을 뿐이니 어찌 그 뜻을 알겠습니까.” “그러면 나는 글자를 알지 못하니 어지 그 경을 한 번 읽어보아라. 듣고서 풀이해 주겠다.” 법달이 소리 높여 읽어 가다가 비유품에 이르자, 조사는 그만 그치라 하고 다음같이 말했다. “이 경은 본래 인연 출세로 주제를 삼은 것이니, 비록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 말했을지라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경에 말하기를 ‘모든 부처님이 한 가지 큰 인연으로 세상에 출현하셨다 하였으니, 큰 인연이란 부처님의 지견인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밖으로 어두워 상에 걸리고, 안으로 어두워 공에 떨어지니, 만약 상에서 상을 떠나고 공에서 공을 떠나면, 안과 밖에 함께 어둡지 않을 것이다. 이 법을 깨달으면 한 생각에 마음이 열리리니 이것이 부처님 지견을 얻는 길이다. 너는 경 뜻을 잘못 알아 가지고 그것은 부처님 지견을 말한 것이지 우리들 분수에는 맞지 않는 것이라고 하지 말아라. 이것은 곧 부처님을 헐뜯고 경전을 비방하는 일이다. 너는 이제 부처님 지견이란 제 마음이요, 따로 부처가 없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네가 그 동안 쓴 것을 대단하게 여겨 그것으로 자랑삼는다면 얼굴 소가 꼬리를 사랑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그러면 뜻만 알면 수고스럽게 외우지 않아도 좋습니까?” “경에 어찌 허물이 있다고 네가 외우는 걸 못하게 하겠느냐. 다만 막히고 트임이 사람에게 달리고 더하고 덜함이 자신에게 달렸으니, 입으로 외우고 실제로 행동하면 이것이 곧 경을 읽는 것이다. 그러나 입으로는 외워도 실행하지 못하면 이것은 오히려 경에 읽히는 것이다.” 법달은 이 말 끝에 크게 깨달았다. <육조단경 기연품>
제6장 상단법어
1. 주리면 먹고 고단하면 잔다
스님은 법상에 올라가 이렇게 설법했다. “검소한 데서 사치스런 데로 들어가기는 쉬워도, 사치한 데서 검소한 데로 나오기는 어렵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생각생각에 부처가 나타나고 걸음걸음에 미륵 보살이 탄생하며, 물건마다 일마다 티끌 같은 세계를 두루 나타내고, 말마다 글귀마다 대장경의 부처님 말씀을 완전히 펼친다 할지라도 이것은 대수롭지 않은 예삿일이니, 거기서 무엇을 드러내려고 해서는 안된다. 배고프면 밥 먹고 목마르면 물 마시며, 한가로우면 앉아 있고 고단하면 잠을 잔다. 불법이니 몸이니 마음이니 하는 생각이 전연 없고 태평스러운 풍월에도 상관하지 않는다. 이것은 어떤 사람의 경지인가?” 한참을 말이 없다가 “그도 방망이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하고 주장자를 세웠다. <진각 어록>
2. 갈등을 끊고 마주 보라
스님은 법상에 올라가 또 이렇게 설법했다. “이것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향상이나 향하에 안배할 수 없고, 대장경이나 소장경의 해설로도 통하지 않는다. 무엇을 진여니 반야니 보리니 열반이니 하며, 또 무엇을 가리켜 부처가 세상에 나왔고, 조사가 서쪽에서 왔다 하는가. 갈등을 끊고 당장에 마주 보아야 할 것이다.” 주장자를 한 번 내리치고는 “어서 높게 착안하라.” 고 하였다. <진각 어록>
3. 정월 초하루
스님은 정월 초하룻날 법상에 올라가 이렇게 설법했다. “오늘 아침에 그대들을 위해 시절 인연을 들어 말하겠다. 어린이는 한 살이 보태지고 늙은이는 한 살이 줄어지며, 늙고 어림에 관계없는 이는 줄지도 않고 보태지지도 않을 것이다. 보태지거나 줄어지거나, 보태고 줄어짐이 없다는 것을 모두 한쪽에 놓아 버려라. 말해 보라. 놓아 버린 뒤에는 어떤가? 누가 이 세상에 신선이 없다 했는가. 모름지기 술항아리 속에 별천지가 있음을 믿어라.” <진각 어록>
4. 일없는 사람
스님은 법상에 올라가 이렇게 설법했다. “구름과 연기가 사라지고 흩어지면 둥근 달이 저절로 밝아지고, 모래와 자갈을 일어 추려 버리면 순금이 저절로 드러난다. 이 일도 그와 같아서 미친 생각 쉬는 곳에 바로 보리다. 성품이 깨끗하고 미묘하게 밝음은 남에게서 얻은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크게 깨달으신 부처님께서도 처음 이 일을 깨친 뒤 지혜의 눈으로 시방세계를 두루 살피고 나서 감탄하신 것이다. ”신기하구나. 내가 보건대 모든 중생들은 여래의 지혜와 덕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망상과 집착 때문에 깨닫지를 못한다. 그러니 망상과 집착을 버리면 스승 없이 얻은 지혜, 자연의 지혜, 걸림이 없는 지혜가 드러날 것이다.“ 여러 대중들, 부처님은 진실로 말씀하시는 분인데 어찌 우리들을 속이시겠는가. 그 말씀을 믿고 그 경지를 향해 들어가 당장 한 칼로 두 동강을 내어 망상과 집착을 쉬어버린다면, 그것은 일마다 분명하고 물건마다 역력하게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그도 별 사람은 아니다. 그 경지에 이르면 벗어나야 할 생사도 없고 찾아야 할 열반도 없어, 다만 일없는 사람이 될 것이다. <진각 어록>
5. 크게 치면 크게 울린다
“구름을 잡고 안개를 움켜 주는 살아 있는 용이 어찌 썩은 물에 잠겨 있겠으며, 해를 쫓고 바람을 따르는 용맹스런 말이 어찌 마른 동백나무 밑에 엎드려 있겠는가. 슬프다, 한갓 침묵만 지키는 어리석은 선정은 기왓장을 갈아 거울을 만들려는 격이고, 문자만을 찾는 미친 지혜는 바다에 들어가 모래를 세는 격이니, 그것은 모두 걸림 없는 기틀과 자재하고 미묘한 작용을 모르는 것이다. 종은 크게 치면 크게 울리고 작게 치면 작게 울린다. 거울은 되놈이 오면 되놈을 비추고 왜놈이 오면 왜놈을 비춘다. 그들은 이런 이치를 전혀 모르고 있다. 그러나 비록 그와 같이 엎치고 날치는 수단을 얻었다 할지라도 아직 생사의 기슭을 떠나지 못한 것이다. 그러면 말해 보라. 필경 어떤 것인가를. 깊숙한 암자 안의 주인은 암자 밖의 일을 관계하지 않는다.” <진각 어록>
6. 하늘에 구름이 깨끗하니
스님은 법상에 올라가 이렇게 설법했다. “결박하는 것도 남이 결박하는 것이 아니고, 결박을 푸는 것도 남이 푸는 것 아니다. 풀거나 결박하는 것이 남이 아니므로 모름지기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스스로 깨닫는 요긴한 법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얻고 잃음과 옳고 그름을 한꺼번에 놓아버리되 놓아버릴 것이 없는 데까지 이르고, 놓아버릴 것이 없는 그것까지도 다시 놓아버려야 한다. 그 경지에 이르면 위로는 우러러 잡을 것이 없고, 아래로는 제 몸마저 없어져 청정한 광명이 앞에 나타날 것이다. 천 길 벼랑에서 마음대로 붙잡고 기회를 따라 움직이되 조금도 움직이는 일이 보이지 않는 이라야 비로소 안락하고 해탈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네 바다의 물결이 고요하니 용의 잠이 편안하고, 하늘에 구름이 깨끗하니 학이 높이 나는구나.” <진각 어록>
7. 시든 꽃잎
스님이 입적하시던 날 법상에 올라 이렇게 설법했다. ”봄은 깊고 절 안은 깨끗하여 티끌 하나 없는데, 시든 꽃잎은 시나브로 푸른 이끼 위에 떨어지누나. 누가 일러 소림의 소식이 끊어졌다 하던가. 저녁 바람이 이따금 그윽한 향기를 보내오는데.” <진각 어록>
8. 최상서 우에게 보낸 글
주신 글에 법어를 청했으므로 몇 가지 인연을 적어 청에 답할까 합니다. 부처님의 경전밖에 따로 전한 것으로서 바로 근원을 끊는 그 하나는, 기틀을 마주 대면하고 말을 마치자 당장 마음이 확 트이는 일입니다. 이때에는 대장경도 그 주석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마디 말에 알아듣지 못하고, 다시 머리를 돌리고 골수를 굴리며, 눈을 치켜올리고, 속으로 헤아리고 생각하며, 임을 열고 혀를 움직인다면 그것은 생사의 근본입니다. 정승 배휴가 어느 절에 들어가 벽화를 보고 그 절 원주에게 물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원주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고승입니다.”“얼굴은 그럴 듯하군. 이 고승이 지금 어디 있습니까?” 원주가 대답이 없자 배휴는 “이 절에 선승은 없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대중 가운데 황벽화운 선사가 있었으므로 원주는 황벽 스님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배휴는 황벽 스님에게 조금 전 이야기를 들어 물었습니다. 황벽 스님은 아까처럼 다시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배휴는 “얼굴은 그럴 듯한데 그 고승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이때 황벽 스님은 큰 소리로 “배 정승!” 하고 불렀습니다. 배휴는 깜짝 놀라 “예” 하고 대답했습다. 황벽 스님이 “어디 있는고?” 하고 물었을 때 배휴는 당장 그 뜻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이 산승은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그가 고승은 지금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배휴를 불러 그가 대답하자마자 “악!” 하겠습니다. 또 우적 정승이 자옥 화상에게 불도의 지극한 이치를 묻고 그 스님에게 한 말씀을 청했습니다. 자옥 스님은 “불도의 지극한 이치는 인정과 예의를 버리는 데 있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이때 우적이 ”스님은 인정과 예의를 버리셨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우적 정승!“ ”예.“ ”다시 따로 구하지 마십시오.“ 하고 스님은 말했습니다. 그후 약산 스님이 이 말을 전해 듣고 ”애석 하구나. 우적. 자옥산 밑에서 생매장을 당했구나.“ 라고 말했습니다. 우적은 이 말을 듣고 약산스님을 찾아갔습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우적 정승!“ ”예.“ ”이것이 무엇이오?“ 라고 물었을 때 우적은 깨달은 바가 있었습니다. 초경은 이 화두를 들어 말했습니다. ”이 답은 매우 뛰어난 천지의 차가 있다. 한결같은 것이 도다.“ 그러나 이 산승은 그렇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의 대답을 기다려 ”머리를 돌려라.“ 라고 하겠습니다. 수능엄경에 말했습니다. ”수행자들이 최상의 보리를 이루지 못하고 따로 성문이나 연각을 이루고, 외도와 마군의 괴수나 그 권속이 되는 것은 두 가지 근본을 알지 못하고 어지럽게 닦아 익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모래를 삶아 음식을 만들려는 것과 같아 무량겁을 지나더라도 되지 않을 것이다. 두 가지란 무엇인가. 첫째는 본래부터 있는 생사의 근본이니, 즉 네가 지금 중생들과 관계하고 있는 그 마음을 제 성품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둘째는 본래부터 있는 보리 열반의 청정한 실체이니, 즉 지금의 네 알음알이가 원래 밝아 모든 인연을 지어 그 인연 때문에 벌어진 것이다. 중생들이 이 본래의 밝음을 버리기 때문에 종일 움직이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온갖 세계로 드나든다.“ 그러나 산승은 그렇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누가 어떤 것이 생사의 근본이냐고 묻는다면, ”네가 이미 드러내 보였다.“ 라고 대답하겠습니다. 또 어떤 것이 보리 열반의 본래 청정한 실체인가고 묻는다면, 한 번 할을 하겠습니다. 이상에서 들어 보인 몇 개의 화두가 결국 어디로 돌아가는지 자세히 참구해 보십시오. 무릇 남의 지시를 받거나 혹은 스스로 공부하여 재미있고 자신 있는 곳을 얻더라도, 문으로 들어온 것은 집안의 보배라 생각지 말고, 한꺼번에 놓아 버리되 놓아버릴 것이 없는 데서 다시 놓아버려야 합니다. 통 밑이 빠져 한 방울의 물도 없이 말라 터진 뒤에야 깨침이 있고 들어갈 곳이 있습니다. 이때 비로소 마음과 뜻과 알음알이가 끊어져, 자기 집안의 재산을 꺼내어 이리저리 마음대로 쓸지라도 다함이 없을 것입니다. 자취를 남기지도 않고 어느 한 끝에 떨어지지도 않아 꼭대기에서 바닥까지 확 트여 걸림이 없어야 생사의 바다에 마음대로 드나들면서 중생을 건질 수 있을 것입니다. 힘쓰고 힘쓰십시오. <진각어록>
9.방산 거사에게 보낸 글
편지에 “생각이 잠깐 일어날 때에 그 화두를 드니 이 공 더욱 미묘합니다.” 고 하셨습니다. 옛 스님은 말하기를 “생각이 일어난다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더디게 깨닫는 것이 두렵다.” 고 했습니다. 또 “생각이 일어나거든 곧 깨달아라. 깨달으면 곧 없어질 것이다.” 라고도 했으며, “생각은 모든 환경을 반연하는데 마음은 분별을 아주 끊는다.” 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검고 흰 것을 잘 분별하고 이익과 손해를 살펴 그 구경에 이르면 다행이겠습니다. 주신 편지에 청하신 뜻이 못내 간절하여 다시 번거롭게 말합니다. 생각이 일어나고 생각이 사라지는 것을 생사라 합니다. 생사에 다다라 반드시 힘을 다해 화두를 드십시오. 화두가 순일해지면 일어나고 멸함이 없어질 것입니다. 일어나고 멸함이 없어진 곳을 고요함이라 하고, 고요한 속에서도 화두에 어둡지 않는 것을 영지라 합니다. 이 비고 고요한 영지는 무너지지도 않고 난잡하지도 않습니다. 이와 같이 공을 들이면 머지않아 공을 이룰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화두와 함께 한 덩이가 되어 의지하는 곳이 없고 마음의 가는 곳이 없으면, 그때는 다만 방산 거사 하나뿐일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다른 생각을 일으키면 반드시 그림자의 유혹을 받을 것입니다. 거기서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방산이 어디에 있는가를. 조주 스님의 ‘없다’ 고 말한 뜻이 무엇인가를 완전히 붙들면 새삼스레 벌일 필요도 없어질 것입니다. 물을 마시는 사람이 차고 더움을 스스로 알 듯이, 천만 가지 의심이 한꺼번에 깨어질 것입니다. 혹시 완전히 깨치지 못하더라도 어떻게 할까 하는 생각을 버리고, 화두가 끊어지지 않고 계속하도록 간절히 붙들어야 합니다. 움직이거나 가만히 있거나 말하거나 침묵하거나 모든 행동에서 한결같이 어둡지 않고, 그저 또록또록하고 분명하게 화두를 들되 하루에 몇 번이나 끊어지는가를 때때로 점검해 보십시오. 그래서 끊어지는 때가 있거든 다시 용맹스런 마음을 내고 공력을 더 들여 끊임이 없게 하십시오. 하루에 한 번도 끊임이 없게 되었다면 정력을 더욱 기울여 때때로 점검하되 날마다 끊임없이 해야 합니다. 만약 사흘 동안 순일하게 끊임이 없으면 움직이거나 가만히 있을 때에도 한결같고 말하거나 침묵할 때에도 한결같아 화두가 항상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흐르는 여울의 달빛처럼 부딪혀도 흩어지지 않고 헤쳐도 없어지지 않으며, 휘저어도 사라지지 않고 자나깨나 한결 같으면 크게 깨칠 때가 가까워진 것입니다. 그때에는 부디 남에게 캐어물으려 하지 말고, 또 일없는 사람과 이야기하지도 마십시오. 그저 스물네 시간 일상 생활 가운데서 어리석은 사람이나 벙어리처럼 행동하고, 몸과 마음을 모두 버려 죽은 사람같이 하십시오. 안에서 내어놓지도 말고 밖에서 들이지도 마십시오. 거기서 화두를 잊어버리면 그것은 큰 잘못이니, 큰 의심을 깨뜨리기 전에는 화두에 어둡지 말고 내 말대로 하십시오. 그 경지에 이르면 어느 새 무명이 깨어지고 홀연히 크게 깨칠 것입니다. 깨친 뒤에는 부디 본분종사를 찾아가 마지막에 인가를 받아야 합니다. 만약 그와 같은 종사를 만나지 못하면 열 개에 다섯 쌍이 모두 마군이 될 것입니다. 조심하기를 진심으로 빌고 빕니다. <태고어록>
10. 화두 참구하는 법
스님은 어느 날 대중을 모아 놓고 일상의 정진을 낱낱이 물은 다음 이와 같이 말했다. “모름지기 대장부의 마음을 내고 결정된 뜻을 세워, 평생에 깨치거나 알려고 한 모든 문장과 어언 삼매를 싹 쓸어 큰 바닷속에 던져버리고 다시는 집착하지 마시오. 한 번 앉으면 그 자리에서 팔만 사천의 온갖 생각을 끊고, 본래부터 참구하던 화두를 한 번 들면 놓지 마시오. ‘모든 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어떤 것이 본래 면목인가?’ ‘어떤 것이 내 성품인가?’ ‘어째서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했을까?’ 이런 화두를 들되, 마지막 한 마디를 힘을 다해 드시오. 화두가 앞에 나타나면 들지 않아도 저절로 들려 고요한 곳에서나 시끄러운 곳에서나 한결같을 것이오. 이 경지에 이르면 다니거나 멈추거나 앉거나 눕거나 옷 입을 때나 밥 먹을 때나 언제 어디서나 온몸은 하나의 의심 덩어리가 됩니다. 의심하고 또 의심하며 부딪치고 또 부딪쳐 몸과 마음을 한 덩어리로 만들어 그것을 똑똑히 참구하시오. 화두 위에서 그 뜻을 헤아리거나 어록이나 경전에서 그것을 찾으려 하지 말고, 단박 깨뜨려야 비로소 집안에 들어가게 될 것이오. 만약 화두가 들어도 들리지 않아 냉담하고 아무 재미가 없으면, 낮은 소리로 서너 번 연거푸 외워 보시오. 문득 화두에 힘이 생기에 됨을 알 수 있을 것이오. 그런 경우에 이르면 더욱 힘을 내어 놓치지 않도록 하시오. 여러분이 저마다 뜻을 세웠거든 정신을 차리고 눈을 비비면서, 용맹 정진하는 가운데서도 더욱더 용맹 정진하면 갑자기 탁 터져 백천 가지 일을 다 알게 될 것이오. 그런 경지에 이른 사람은 이십 년이고 삼십 년이고 묻지 말고 물가나 나무 밑에서 성태를 기르시오. 그러면 그는 금강권도 마음대로 삼켰다 토했다하며, 가시덤불 속도 팔을 저으며 지나갈 것이고, 한 생각 사이에 시방세계를 삼키고 삼세의 부처를 토해낼 것이오. 이와 같은 경지에 이르러야 그대들은 비로소 법신불의 갓을 머리에 쓸 수 있고, 보화불의 머리에 앉을 수 있을 것이오. 그렇지 못하면 밤낮을 가리지 말고 방석 위에 우뚝 앉아 눈을 바로 하고 ‘이 무엇인가?’ 의 도리를 참구하시오.” <나옹어록>
11. 기슭에 닿았거든 배를 버려라
재를 올린 뒤 스님은 법상에 올라 한참을 잠잠히 있다가 말문을 열었다. “여러 불자들, 알겠소? 여기서 당장 빛을 돌이켜 한 번 보시오.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 등은 본지풍광을 밟을 수 있는가. 그렇지 못하면 조그만 갈등을 말하겠으니 자세히 듣고 똑똑히 살피시오. 사대가 모일 때에도 이 한 점의 신령스런 밝음은 그에 따라 생기지 않았고, 사대가 흩어질 때에도 그것은 무너지지 않소. 나고 죽음과 생기고 무너짐은 허공과 같거니 원친의 묵은 업이 지금 어디 있겠소. 이미 없어진 것이라 찾아도 자취가 없고 트이어 걸림 없음이 허공과 같소. 세계와 티끌마다 미묘한 본체요, 일마다 물건마다 모두가 주인공이오. 소리도 없으면 그윽이 통합니다. 때를 따라 당당히 나타나고 예로부터 지금까지 오묘하고 오묘합니다. 자유로운 그 작용이 다른 물건 아니고 때를 죽이고 살림이 모두 그것의 힘이오. 여러 불자들, 알겠소? 만약 모르겠다면 이 산승이 불자들을 위해 알도록 하겠소.” 죽비로 탁자를 치면서 한 번 할을 한 다음 이와 같이 말했다. “여기서 단박 밝게 깨쳐 현관을 뚫고 지나가면, 삼세의 부처님과 역대 조사와 천하 선지식들의 골수를 환히 보고, 그분들과 손을 마주 잡고 함께 다닐 것이오.” 또 한 번 죽비로 탁자를 친 뒤 말을 이었다. “이로써 많은 생의 부모와 여러 겁의 원친에서 뛰어나고, 세세 생생에 함부로 자식이 되어 어머니를 해치고 친한 이를 원망한 일에서 뛰어나고, 지옥의 갖가지 고통받는 무리에서 뛰어나시오. 이로써 괴로워하는 축생의 무리에서 뛰어나고, 성내는 아수라의 무리에서 뛰어나고, 천상의 쾌락에 빠져 있는 무리에서 뛰어나시오.” 죽비를 내던지고 이렇게 말을 맺었다. “기슭에 닿았으면 배를 버릴 것이지 무엇 하러 다시 나루터 사람에게 길을 묻는가.” <나옹 어록>
12. 공부 열 가지
세상 사람들은 모양을 보면 그 모양에서 뛰어나지 못하고, 소리를 들으면 그 소리에서 뛰어나지 못한다. 어떻게 하면 모양과 소리에서 뛰어날 수 있을까? 이미 모양과 소리에서 뛰어났으면 반드시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 어떻게 바른 공부를 시작할 것인가? 이미 공부를 시작했으면 그 공부를 익혀야 하는데 공부가 익은 때는 어떤가? 공부가 익었으면 다시 거친 콧김을 없애야 한다. 거친 콧김을 없앤 때는 어떤가? 콧김이 없어지면 냉담하고 재미가 없으며, 기력이 없고 의식이 분명치 않으며 마음도 활동하지 않는다. 또 그때는 그 허망한 몸이 인간에 있는 줄을 모른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그때는 어떤 시절인가? 공부가 지극해지면 움직이고 조용함에 틈이 없고, 자고 깸이 한결같아 부딪쳐도 흩어지지 않고 움직여도 잃지 않는다. 마치 개가 기름이 끓는 솥을 보고 핥으려 해도 핥을 수 없고, 버리려 해도 버릴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갑자기 백이십 근이나 되는 짐을 내려놓은 것 같아 단박에 꺾이고 단박에 끊긴다. 그때에는 어떤 것이 그대의 자성인가? 이미 자성을 깨쳤으면 자성의 작용은 인연을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럼 어떤 것이 작용에 따름인가? 이미 자성의 작용을 알았으면 생사를 초월해야 하는데, 눈빛이 땅에 떨어질 때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이미 생사를 벗어났으면 그 가는 곳을 알아야 한다. 사대는 뿔뿔이 흩어져 어디로 가는가? <나옹 어록>
13. 병문안
그대의 병이 중하다고 들었다. 그것은 무슨 병인가? 몸의 병인가, 마음의 병인가. 몸의 병이라면 몸은 지. 수. 화. 풍의 네 가지 요소가 잠시 모여 이루어진 것, 그 네 가지는 저마다 주인이 있는데 그럼 어느 것이 그 병자인가? 만약 마음의 병이라면 마음은 꼭두각시와 같은 것, 비록 거짓 이름은 있으나 그 실체는 실로 공한 것이니 병이 어디에서 일어났는가? 그 일어난 곳을 추궁해 본다면 난 곳이 없을 것이다. 그럼 지금의 그 고통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또 고통을 아는 그것은 무엇인가? 이와 같이 살피고 살펴보면 문득 크게 깨칠 것이다. 이것이 내 병문안이다. <나옹 어록>
제 7 장 선가의 거울
1. 한 물건
여기 한 물건이 있는데,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하여 일찍이 나지도 않았고 죽지도 않았다. 이름 지을 길 없고 모양 그릴 수 없다. 한 물건이란 무엇인가? 옛 어른은 이렇게 노래했다. 한 부처 나기 전에 의젓한 둥그러미 석가도 알지 못한다 했는데 어찌 가섭이 전하랴. 이것이 한 물건의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으며, 이름 지을 길도 모양 그릴 수도 없는 연유다. 육조스님이 대중에게 물었다. “내게 한 물건이 있는데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다. 너희들은 알겠느냐?” 신회 선사가 곧 대답하기를 “모든 부처님의 근본이요 신회의 불성입니다.” 하였으니, 이것이 육조의 서자가 된 연유다. 회향 선사가 숭산으로부터 와서 뵙자 육조스님이 묻기를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할 때에 회양은 어쩔 줄 모르고 쩔쩔매다가 팔 년만에야 깨치고 나서 말하기를 “가령 한 물건이라 하여도 맞지 않습니다.” 하였으니, 이것이 육조의 맏아들이 된 연유다. 부처님과 조사가 세상에 출현하심은 마치 바람도 없는데 물결을 일으킨 격이다. 세상에 출현한다는 것은 대비심으로 근본을 삼아 중생을 건지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한 물건으로써 따진다면, 사람마다 본래 면목이 저절로 갖추어졌는데 어찌 남이 연지 찍고 분 발라 주기를 기다릴 것인가. 그러므로 부처님이 중생을 건진다는 것도 공연한 짓인 것이다. 억지로 여러 가지 이름을 붙여 마음이라 부처라 혹은 중생이라 하지만, 이름에 얽매여 분별을 낼 것이 아니다. 다 그대로 옳은 것은 아니다. 한 생각이라도 움직이면 곧 어긋난다. <서산 선가귀감>
2. 선과 교
부처님께서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한 것이 선지가 되고, 평생 말씀하신 것이 교문이 되었다. 그러므로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세 곳이란 다자탑 앞에서 자리를 절반 나누어 앉음이 하나요,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보임이 둘이요, 사라쌍수 아래에서 관 밖으로 두 발을 내어 보임이 셋이니, 이른바 카샤파 존자가 선의 등불을 따로 받았다는 것이 이것이다. 그러므로 선과 교의 근본은 부처님이고, 선과 교의 갈래는 카샤파 존자와 아난다 존자다. 말 없음으로써 말 없는 데 이르는 것은 선이요, 말로써 말 없는 데 이르는 것이 교다. 또한 마음은 선법이요 말은 교법이다. 법은 비록 한맛이라도 뜻은 하늘과 땅만큼 아득히 떨어진 것이다. <서산 선가귀감>
3. 일 없는 도인
생각 끊고 반연 쉬고 일없이 우두커니 앉아 있으니, 봄이 오매 풀이 저절로 푸르구나. 생각 끊고 반연을 쉰다는 것은 마음에서 얻은 것을 가리킴이니, 이른바 일없는 도인이다. 어디에나 얽매임 없고 애당초 일 없어서, 배고프면 밥을 먹고 고단하면 잠을 잔다. 녹수청산에 마음대로 오고 가며, 어촌과 주막에 걸림없이 지내가리. 세월이 가나 오나 내 알 바 아니지만 봄이 오니 예전처럼 풀잎이 푸르구나. <서산 선가귀감>
4. 격 밖의 선지
부처님은 활같이 말씀하시고 조사들은 활줄같이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걸림 없는 법이란 바로 한맛에 돌아감이다. 이 한맛의 자취마저 떨쳐 버려야 비로소 조사가 보인 한마음을 드러내게 된다. 그러므로 ‘뜰 앞에 잣나무’란 화두는 용궁의 장경에도 없다고 말한 것이다. 활같이 말씀했다는 것은 곧다는 뜻이며, 어떤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물었다.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입니까?” 대답하기를, “뜰 앞의 잣나무이다.” 하였으니, 이것이 격 밖의 선지다. <서산 선가귀감>
5. 간절한 마음
자기가 참구하는 공안에 대해서는 간절한 마음으로 공부해야 한다. 마치 닭이 알을 안은 것과 같이 하고,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와 같이 하며, 주린 사람이 밥 생각하듯 하고, 목마른 사람이 물 생각하듯 하며, 어린애가 어머니 생각하듯 하면 반드시 꿰뚫을 때가 있을 것이다. 조사들의 공안이 일천칠백 가지나 있는데, ‘개가 불성이 없다.’라든지 ‘뜰 앞의 잣나무’라든지 ‘삼 서 근, 마른 똥막대기’ 같은 것들이다. 닭이 알을 안을 때는 더운 기운이 지속되며,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는 마음과 눈이 움직이지 않게 한다. 주릴 때 밥 생각하는 것과 목마를 때 물을 생각하는 것이나 어린애가 어머니를 생각한 것들은, 모두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고 억지로 지어서 내는 마음이 아니므로 간절한 것이다. 참선하는 데에 이렇듯 간절한 마음이 없이 깨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참선에는 반드시 세 가지 요긴한 것이 있어야 한다. 첫째는 큰 신심이고, 둘째는 큰 분심이며, 셋째는 큰 의심이다. 만약 이 중에 하나라도 빠지면 다리 부러진 솥과 같아서 소용없이 되고 말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불하는 데에는 믿음이 뿌리가 된다.” 하셨고, 영가스님은 “도를 닦는 사람은 먼저 뜻을 세워야 한다.”고 하였으며, 몽산스님은 “참선하는 이가 화두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통이다.”고 하면서 “크게 의심하는 데서 크게 깨친다.”고 하였다. <서산 선가귀감>
6. 화두의 열 가지 병
화두는 들어 일으키는 곳에서 알아맞히려 하지도 말고, 생각으로 헤아리지도 말며, 또한 깨닫기를 기다리지도 말아라. 더 생각할 수 없는 곳까지 나아가 생각하면, 마음이 더 갈 곳이 없어서 마치 늙은 쥐가 쇠뿔 속으로 들어가다가 잡히듯 할 것이다. 이런가 저런가 따지고 맞혀 보는 것이 식정이며, 생사를 따라 굴러다니는 것이 식정이며, 무서워하고 갈팡질팡하는 것도 또한 식정이다. 요즘 사람들은 이 병통을 알지 못하고 다만 이 속에서 빠졌다 솟았다 하고 있을 뿐이다. 화두를 참구하는 데에 열 가지 병이 있다. 분별로써 헤아리는 것, 눈썹을 오르내리고 눈을 끔적거리기를 그치지 않는 것, 말길에서 살림살이를 짓는 것, 글에서 끌어다 증거를 삼으려는 것, 들어 일으키는 곳에서 알아맞히려는 것, 모든 것을 다 날려버리고 일없는 곳에 들어앉아 있는 것, 있다는 것이나 없다는 것으로 아는 것, 참으로 없다는 것으로 아는 것, 도리가 그렇거니 하고 알음알이를 짓는 것, 조급하게 깨치기를 기다리는 것들이다. 이 열 가지 병을 떠나 화두에만 정신차려 ‘무슨 뜻일까?’ 하고 의심할 일이다.
이 일은 마치 모기가 무쇠로 된 소에게 덤벼드는 것과 같아서, 함부로 주둥이를 댈 수 없는 곳에 목숨을 떼어놓고 한번 뚫어 보면 몸뚱이째 들어갈 것이다. 공부는 거문고 줄을 고르듯 하여 팽팽하고 느슨함이 알맞아야 한다. 너무 애쓰면 병나기 쉽고, 잊어버리면 무명에 떨어지게 된다. 성성하고 역력하게 하면서도 차근차근 끊임없이 해야 한다. 거문고 타는 사람이 말하기를, 그 줄의 느슨하고 팽팽함이 알맞아야 아름다운 소리가 제대로 난다고 했다. 공부하는 것도 이와 같아서 조급히 하면 혈기를 올리게 될 것이고, 잊어버리면 흐리멍덩하게 된다. 느리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게 되면 오묘한 이치가 그 속에 있을 것이다. <서산 선가귀감>
7. 일상의 점검
참선하는 이는 항상 이와 같이 돌이켜보아야 한다. 네 가지 은혜가 깊고 높은 것을 알고 있는가? 네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 더러운 이 육신이 순간순간 썩어가는 것을 알고 있는가? 사람의 목숨이 숨 한 번에 달린 것을 알고 있는가? 일찍이 부처님이나 조사를 만나고서도 그대로 지나치지 않았는가? 공부하는 곳을 떠나지 않고 도인다운 절개를 지키고 있는가? 곁에 있는 사람들과 쓸데없는 잡담이나 하며 지내지 않는가? 분주히 시비를 일삼고 있지나 않는가? 화두가 어느 때나 똑똑히 들리고 있는가? 남과 이야기하고 있을 때에도 화두가 끊임없이 되는가? 보고 듣고 알아차릴 때에도 한 생각을 이루고 있는가? 제 공부를 돌아볼 때 부처님과 조사를 붙잡을 만한가? 금생에 꼭 부처님의 지혜를 이을 수 있을까? 앉고 눕고 편할 때에 지옥의 고통을 생각하는가? 이 육신으로 윤회를 벗어날 자신이 있는가? 이런 것이 참선하는 이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때때로 점검되어야 할 도리이다. 옛 어른이 말하기를 “이 몸 이때 못 건지면 다시 언제 건지랴!” 하지 않았는가. <서산 선가귀감>
8. 제 성품을 더럽히지 마라
중생의 마음을 버릴 것 없이 다만 제 성품을 더럽히지 말아라. 바른 법을 찾는 것이 곧 바르지 못한 일이다. 버리는 것이나 찾는 일이 다 더럽히는 일이다. 모름지기 마음속을 비우고 스스로 비추어 보아, 한 생각 인연따라 일어나는 것이 사실은 일어남이 없다는 것임을 믿어야 한다. 죽이고 도둑질하고 음행하고 거짓말하는 것이 모두 한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자세히 살펴보아라. 그 일어나는 곳이 곧 비어 없는데 무엇을 다시 끊을 것인가. 여기에서는 성품과 형상을 함께 밝힌 것이다. 경에 말하기를 “무명을 아주 끊는다는 것은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하였고, 또한 “생각이 일어나면 곧 깨달으라.”고 하였다. <서산 선가귀감>
9. 참선과 계행
음란하면서 참선하는 것은 모래를 찌어서 밥을 지으려는 것 같고, 살생하면서 참선하는 것은 제 귀를 막고 소리를 지르는 것 같으며, 도둑질하면서 참선하는 것은 새는 그릇에 물이 가득 차기를 바라는 것 같고, 거짓말하면서 참선하는 것은 똥으로 향을 만들려는 것과 같다. 이런 것들은 비록 많은 지혜가 있더라도 마군의 길을 이룰 뿐이다. 만약 계행이 없으면 비루먹은 여우의 몸도 받지 못한다 했는데, 하물며 청정한 지혜의 열매를 바랄 수 있겠는가. 계율 존중하기를 부처님 모시듯 한다면, 부처님이 늘 계시는 거나 다를 일이 없다. 모름지기 풀에 매여 있고, 거위를 살리던 옛일로써 본보기를 삼아야 할 것이다. 생사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탐욕을 끊고 애욕의 불꽃을 꺼버려야 한다. 애정은 윤회의 근본이 되고, 정욕은 몸을 받는 인연이 된다.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음란한 마음을 끊지 못하면 티끌 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하셨고, 또 “애정이 한 번 얽히게 되면 사람들 끌어다 죄악의 문에 처넣는다.”고 하셨다. 애욕의 불꽃이란 애정이 너무 간절하여 불붙듯 함을 말한 것이다. <서산 선가귀감>
10. 자비와 인욕
가난한 이가 와서 구걸하거든 분수대로 나누어 주라. 한몸처럼 두루 가엾이 여기면 이것이 참 보시이며, 나와 남이 둘 아닌 것이 한몸이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우리들의 살림살이 아닌가. 누가 와서 해롭게 하더라도 마음을 거두어 성내거나 원망하지 말아야 한다. 한 생각 성내는 데에 온갖 장애가 벌어진다. 번뇌가 비록 한량없다 하지만 성내는 것이 그보다 더하다. 열반경에 이르기를 “창과 칼로 찌르거나 향수와 약을 발라 주더라도 두 가지에 다 무심하라.”고 하였다. 수행자가 성내는 것은 흰구름 속에서 번갯불이 번쩍이는 것과 같다. 참을성이 없다면 보살의 행도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닦아 가는 길이 한량없지만 자비와 인욕이 근본이 된다. 참는 마음이 꼭두각시의 꿈이라면 욕보는 현실은 거북의 털과 같다. <서산 선가귀감>
11. 첫째가는 정진
본바탕 천진한 마음을 지키는 것이 첫째가는 정진이다. 만약 정진할 생각을 일으킨다면 이것은 망상이요 정진이 아니다. 그러므로 옛 어른이 말하기를 “망상 내지 말아라! 망상 내지 말아라!”고 한 것이다. 게으른 사람은 늘 뒤만 돌아보는데 이런 사람은 스스로 자기를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경을 보되 자기 마음속으로 돌이켜봄이 없다면 비록 팔만대장경을 다 보았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것은 어리석게 공부함을 깨우친 것이니, 마치 봄날에 새가 지저귀고 가을밤에 벌레가 우는 것처럼 아무 뜻도 없는 것이다. 규봉 선사가 이르기를 “글자나 알고 경을 보는 것으로는 원래 깨칠 수 없다. 글귀나 새기고 말뜻이나 물어 보는 것으로는 탐욕이나 부리고 성을 내며 못된 소견만 더 일으키게 된다.”고 하였다. 수행이 이루어지기 전에 남에게 자랑하려고, 한갓 말재주나 부려 서로 이기려고만 한다면 변소에 단청하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말세에 어리석게 수행하는 것을 일깨우는 말이다. 수행이란 본래 제 성품을 닦는 것인데, 어떤 사람들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 하고 있으니 이 무슨 생각일까. <서산 선가귀감>
12. 출가행
출가하여 스님이 되는 것은 어찌 작은 일이랴. 편하고 한가함을 구해서가 아니며, 따뜻이 입고 배불리 먹으려고 한 것도 아니며, 명예나 재물을 구하려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나고 죽음을 벗어나려는 것이며, 번뇌를 끊으려는 것이고, 부처님의 지혜를 이으려는 것이며, 삼계에서 뛰어난 중생을 건지려는 것이다. 이름과 재물을 따른 납자는 풀 속에 묻힌 야인만도 못하다. 제왕의 자리도 침 뱉고 설산에 들어가신 것은 부처님이 천 분 나실지라도 바뀌지 않을 법칙인데, 말세에 양의 바탕에 범의 껍질을 쓴 무리들이 염치도 없이 바람을 타고 세력에 휩쓸려 아첨을 하고 잘 보이려고만 애쓰니, 아 그 버릇을 어쩔 것인가. 마음이 세상 명리에 물든 사람은 권세의 문에 아부하다가 풍진에 부대끼어 도리어 세속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고 만다. 이런 납자를 양의 바탕에 비유한 것은 그럴 만한 여러 가지 행동이 있기 때문이다. <서산 선가귀감>
13. 한 개의 숫돌
불자여, 그대의 한 그릇 밥과 한 벌 옷이 곧 농부들의 피요 직녀들의 땀인데, 도의 눈이 밝지 못하고야 어찌 삭여낼 것인가. 그러므로 말하기를 “털을 쓰고 뿔을 이고 있는 것이 무엇인 줄 아는가? 그것은 오늘날 신도들이 주는 것을 공부하지 않으면서 거저 먹는 그런 부류들의 미래상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배고프지 않아도 또 먹고, 춥지 않아도 더 입으니 무슨 심사일까? 참으로 딱한 일이다. 눈앞의 쾌락이 후생에 고통인 줄을 생각자 않는구나! 그러므로 도를 닦는 이는 한 개의 숫돌과 같아서, 장 서방이 와서 갈고 이 생원이 갈아 가면, 남의 칼은 잘 들겠지만 내 돌은 점점 닳아 없어지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어떤 사람들은 도리어 남들이 와서 내 돌에 칼을 갈지 않는다고 걱정하고 있으니 참으로 딱한 일이 아닌가. <서산 선가귀감>
14. 네 마리 독사
우습다, 이 몸이여. 아홉 구멍에서는 항상 더러운 것이 흘러 나오고, 백천 가지 부스럼 덩어리를 한 조각 엷은 가죽으로 싸 놓았구나. 가죽주머니에는 똥이 가득 담기고 피고름 뭉치이므로 냄새나고 더러워 조금도 탐하거나 아까워할 것이 없다. 더구나 백년을 잘 길러 준대도 숨 한 번에 은혜를 등지고 마는 것을. 모든 업이 이 몸 때문에 생긴 것이다. 이 몸은 애욕의 근본이므로 그것이 허망한 줄 알게 되면 애욕도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이를 탐착하는 데서 한량없는 허물과 근심 걱정이 일어나기 때문에 여기 특별히 밝혀 수행인의 눈을 띄워 주려는 것이다. 네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 이 몸에는 주인될 것이 없으므로 네 가지 원수가 모였다고도 하고, 네 가지 은혜를 등지는 것들이므로 네 마리 독사를 기른다고도 한다. 내가 허망함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남의 일로 화도 내고 깔보기도 하며, 다른 사람도 또한 허망함을 깨닫지 못해 나로 인해 성내고 깔보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두 귀신이 한 송장을 가지고 싸우는 것이나 다를 것이 없다. <서산 선가귀감>
15. 대장부의 기상
죄가 있거든 곧 참회하고, 잘못된 일이 있으면 부끄러워할 줄 아는 데에 대장부의 기상이 있다. 그리고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롭게 되면 그 죄업도 마음을 따라 없어질 것이다. 참회란 먼저 지은 허물을 뉘우쳐 다시는 짓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일이다.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안으로 자신을 꾸짖고 밖으로 허물을 드러내는 일이다. 마음이란 본래 비어 고요한 것이므로 죄업이 붙어 있을 곳이 없다. 수행인은 마땅히 마음을 단정히 하여 검소하고 진실한 것으로써 근본을 삼아야 한다. 표주박 한 개와 누더기 한 벌이면 어디를 가나 걸릴 것이 없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음이 똑바른 줄과 같아야 한다.”고 했으며, “바른 마음이 곧 도량이다.”고 하셨다. 이 몸에 탐착하지 않는다면 어디를 가나 거리낌이 없을 것이다. 범부들은 눈앞 현실에만 따르고, 수행인은 마음만을 붙잡으려 한다. 그러나 마음과 바깥 현실 두 가지를 다 내버리는 이것이 참된 법이다. 현실만 따르는 것은 목마른 사슴이 아지랑이를 물인 줄 알고 찾아가는 것 같고, 마음만을 붙잡으려는 것은 원숭이가 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 바깥 현실과 마음이 비록 다르다 할지라도 병통이기는 마찬가지다. <서산 선가귀감>
16. 자유인
누구든지 임종할 때에는 이렇게 관찰해야 한다. 즉 오온이 다 비어 이 몸에는 ‘나’라고 내세울 것이 없고, 참 마음은 모양이 없어 오고가는 것이 아니다. 날 때에도 성품은 난 바가 없고 죽을 때에도 성품은 가는 것이 아니다. 지극히 밝고 고요해 마음과 대상은 둘이 아니다. 이와 같이 관찰하여 단박 깨치면 삼세와 인과에 얽매이거나 이끌리지 않게 될 것이니, 이런 사람이야말로 세상에서 뛰어난 자유인이다. 부처님을 만난다 할지라도 따라갈 마음이 없고, 지옥을 보더라도 무서운 생각이 없어야 한다. 그저 무심하게만 되면 법계와 같게 될 것이다. 대장부는 부처나 조사 보기를 원수같이 해야 한다. 만약 부처에게 매달려 구하는 것이 있다면 그는 부처에게 얽매인 것이고, 조사에게 매달려 구하는 것이 있다면 또한 조사에게 얽매여 있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이 있으면 모두 고통이므로 일없는 것만 같지 못하다. 이 문안에 들어오려면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 <서산 선가귀감>
제 8 장 출가 사문에게 보내는 글
1. 그대 어째서 아직도
많은 부처님 법 안에서 도를 이루었는데, 그대는 어째서 아직도 고해에서 헤매고 있는가. 그대는 시작없는 옛적부터 이 생에 이르도록 깨달음을 등지고 티끌에 묻혀 어리석은 생각에 빠져 있구나. 항상 악업을 지어 삼악도에 떨어지고 착한 일은 하지 않으니 생사의 바다에 빠진 것이 아닌가. 몸은 여섯 도둑을 따라 악도에 떨어지니 고통이 극심하고, 마음은 일승법을 등지니 사람으로 태어나도 부처님 나시기 전이거나 그 후일 수밖에 없다. 이제 다행히 인간으로 태어나기는 했지만 부처님이 안 계신 말세이니 슬프다, 이것이 누구의 허물인가.
그러나 그대가 이제라도 반성하여 애욕을 끊고 출가하여 티끌 세상에서 벗어나는 진리를 배운다면 마치 용이 물을 만난 듯, 범이 산에 의지한 듯하며 그 뛰어난 도리는 말로 다할 수 없다. 사람에게는 과거와 현재가 있으나 법은 멀고 가까움이 없고, 사람은 어리석고 지혜로움이 있으나 도는 성하고 쇠함이 없다. 설사 부처님 생존시에 태어났더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면 무엇이 이로우며, 말세를 만났더라도 부처님의 교법을 받들어 행한다면 무엇을 걱정할 것인가.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의사와 같아 병에 따라 약을 주지만 먹고 안 먹는 것은 의사의 허물이 아니다. 듣고도 가지 않는 것은 길잡이의 허물이 아니다. 자기를 이롭게 하고 남도 이롭게 하는 방법이 모두 갖추어졌으니, 가령 내가 오래 살더라도 별다른 이익이 없을 것이다. 이제부터 내 제자들이 차례차례 받들어 행하면, 여래의 법신은 항상 머물러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이치를 안다면 자신이 도를 닦지 않는 것을 한탄할지언정 어찌 말세라고 걱정할 것인가. 간절히 바라노니, 그대는 모름지기 굳은 뜻을 세워 활짝 열린 마음으로 여러 가지 반연을 쉬고 뒤바뀐 생각을 버려라. 참으로 죽고 사는 이 큰 일을 위해 조사의 화두를 자세히 탐구하라. 그래서 철저하게 깨닫는 것으로 근본을 삼아야 한다. 자기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 하여 물러서서는 안 된다. 이 말세에 부처님이 떠나신 지가 오래 되니 마군은 강하고 불법은 약하며 옳지 않은 사람이 많아, 남을 이롭게 하는 이는 적고 잘못 되게 하는 이가 많으며, 지혜로운 이는 드물고 어리석은 이가 많다. 스스로 도를 닦지 않으면서 남까지 시끄럽게 하니, 수행을 방해하는 일을 말로는 다할 수 없다. 그대가 길을 잘못 들까 하여, 내 조그만 소견으로 열 가지를 마련하여 경책하니, 반드시 믿고 그대로 행하여 한 가지도 어기지 마라. 어리석어 안 배우면 교만만 늘고 어둔 마음 닦잖으니 너와 나만 크네. 빈속에 뜻만 크니 굶은 범 같고 지식 없이 방탕함은 미친 원숭이. 삿된 말 나쁜 소리는 곧잘 들으면서 성현들의 가르침은 모른 체하니 착한 일에 인연 없어 누가 건지랴 나쁜 세상 헤매면서 고생할 밖에. <야운 자경문>
2. 초발심 수행자의 생활규범
첫째, 좋은 옷과 맛있는 음식을 받아 쓰지 말라. 밭 갈고 씨 뿌리는 일에서 먹고 입기까지 소와 사람의 수고는 물론, 벌레들이 죽고 상한 것은 한량없을 것이다. 남을 수고롭게 하여 내 몸을 이롭게 하는 것도 옳지 못한데, 하물며 남의 생명을 죽여 내가 살려는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 농사짓는 사람들도 늘 헐벗고 굶주리는 고통이 있고 길쌈하는 아낙네도 몸 가릴 옷이 없는데, 나는 항상 두 손을 놀려 두면서 어찌 춥고 배고픔을 싫어하랴. 좋은 옷과 맛있는 음식은 사실 빚만 더하는 것이지 도에는 손해되는 것이다. 해진 옷과 나물밥은 은혜를 줄이고 음덕을 쌓는다. 금생에 마음을 밝히지 못하면 한 방울 물도 소화하기 어려울 것이다.
풀뿌리와 나무열매로 주린 배를 달래고 송낙과 풀잎으로 몸을 가리네 허공을 나는 학과 흰구름으로 벗을 삼아 높은 산 깊은 골에서 남은 세월 보내리. 둘째, 내것을 아끼지 말고 남의 것을 탐내지 말라. 삼악도의 고통을 가져오는 데는 탐욕이 으뜸이요, 여섯 가지 바라밀다는 보시가 제일이다. 아끼고 탐내는 것은 선한 길을 막고 자비로 보시함은 나쁜 길을 방비한다. 가난한 사람이 와서 빌거든 아무리 구차하더라도 인색하지 마라. 올 때도 빈손으로 왔고 갈 때도 빈손으로 가는 것이 아니냐. 내 재물도 아끼는 마음이 없는데 어찌 남의 것에 마음을 두랴. 아무 것도 가져가지 못하고 평생에 지은 업만 이 몸을 따를 것이다. 사흘 닦은 마음은 천 년의 보배요, 백년 탐낸 물건은 하루아침 티끌이다. 어찌하여 괴로운 삼악도가 생겼는가 오랜 세월 익혀온 애욕 탓이다 부처님의 가사 바리 이대로 살 만한데 무엇하러 쌓고 모아 무명 기르나 셋째, 말을 적게 하고 행동을 가벼이 말라. 몸을 가벼이 움직이지 않으면 산란한 마음이 가라앉아 선정을 이루고, 말이 적으며 어리석음을 돌이켜 지혜를 이룰 것이다. 진실한 본체는 말을 떠난 것이고, 진리는 어떠한 일에도 흔들림이 없다. 입은 화의 문이니 반드시 엄하게 지켜야 하고, 몸은 재앙의 근본이니 가벼이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 자주 나는 새는 그물에 걸리기 쉽고, 가벼이 날뛰는 짐승은 화살에 맞을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육 년을 설산에 앉아 움직이지 않으셨고 달마스님은 소림굴에서 구 년을 말이 없었다. 후세에 참선하는 이가 어찌 이 일을 본받지 않을 것인가. 몸과 마음 선정에 들어 동하지 않고 토굴 속에 홀로 앉아 오가지 마라 잠잠하고 고요하여 아무 일 없이 내 마음속 부처님께 귀의하리라. 넷째, 좋은 벗은 친하고 나뿐 이웃은 멀리하라. 새가 쉴 때에는 숲을 가려 앉듯이 사람도 배우려면 그 스승을 잘 택해야 한다. 좋은 숲을 찾으면 편히 쉴 수 있고 훌륭한 스승을 만나면 학문이 높아진다. 그러므로 좋은 벗은 부모처럼 섬기고 나쁜 이웃은 원수처럼 멀리해야 한다. 학은 까마귀와 벗할 생각이 없는데 붕새인들 어찌 뱁새와 짝할 마음이 있겠는가. 소나무 숲에서 자라는 칡은 천 길이라도 올라가지만 잔디 속에 선 나무는 석자를 면할 수 없다. 어리석은 소인배는 그때마다 멀리하고, 뜻이 크고 높은 사람은 항상 가까이하라. 가고 오고 어느 때나 선지식 모셔 마음속의 가시덤불 베어 버리라 그리하여 앞길이 활짝 트이면 걸음마다 그 자리가 뚫린 관문이어라. 다섯째, 삼경이 아니면 잠자지 말라. 끝없이 오랜 세월을 두고 수도를 방해하는 것은 졸음보다 더한 것이 없다. 하루 종일 어느 때나 맑은 정신으로 의심을 일으켜 흐리지 말고, 앉거나 서거나 가만히 마음을 살펴보아라. 한평생을 헛되이 보낸다면 두고두고 한이 될 것이다. 덧없는 세월은 찰나와 같으니 나날이 놀랍고 두려우며 목숨은 잠깐이라 한때라도 보증할 수 없다. 조사의 관문을 뚫지 못했다면 어찌 편안하게 잠들 수 있겠는가. 졸음 뱀이 구름 끼니 마음달 흐려 도 닦는 이 여기 와서 갈 바를 모르네 이 속에서 비수검 빼어 들면 구름이란 간데없고 달빛 밝으리. 여섯째, 잘난 듯이 뻐기거나 남을 업신여기지 말라. 어진 행동을 닦는 데는 겸양이 근본이고, 벗을 사귀는 데는 공경과 믿음이 으뜸이 된다. 나니 너니 하고 교만이 높아지면 삼악도의 고해가 더욱 깊어진다. 밖으로 나타난 위의는 존귀한 듯하지만 안은 텅 비어 썩은 배와 같다. 벼슬이 높을수록 겸손히 하라고 하지 않았는가. 나다 남이다 하는 집착이 없어지는 곳에 도는 저절로 이루어지며, 마음이 겸손한 사람에게는 온갖 복이 저절로 돌아온다. 교만한 티끌 속에 지혜 묻히고 나다 너다 하는 산에 번뇌 자라니 잘난 체 안 배우고 늙어진 뒤에 병들어 신음하니 한탄뿐이네. 일곱째, 재물이나 여색은 바른 생각으로 대하라. 몸을 해치는 것은 여색보다 더한 것이 없고 도를 잃게 하는 것은 재물에 미칠 것이 없다. 그러므로 부처님이 계율을 제정하여 재물과 여색을 엄금하신 것이다. ‘여인을 보거든 독사와 호랑이처럼 여기고, 금이나 옥을 대하거든 나무나 돌같이 보라.’ 비록 어두운 방에 홀로 있더라도 큰 손님을 대한 듯이 하고, 남이 볼 때나 안 볼 때나 한결같이 해서 안과 밖을 달리하지 말아라. 마음이 깨끗하면 선신이 수호하고, 여색을 생각하면 천신들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선신이 수호하면 험난한 곳에서도 편안하고, 천신들이 용서하지 않으면 편안한 곳이라도 불안이 따른다. 탐욕은 염라왕의 지옥문이고 청정은 아미타불의 연화대이다 고랑 차고 지옥 가면 고통이 천 가지 배로 가는 극락세계 기쁨이 만 가지. 여덟째, 세속 사람과 사귀어서 미움받지 말라. 마음속에서 애정을 끊어 버린 이를 사문이라 하고, 세상일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을 출가라 한다. 이미 애정을 끊고 세상을 떠났는데 무엇 하러 세상 사람과 다시 사귈 것인가. 세속을 그리워하고 못 잊어하면 도철이라 한다. 도철은 본래부터 도의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인정이 짙으면 도의 마음이 멀어지니 인정에 사로잡히지 마라. 출가한 뜻을 등지지 않으려면 명산을 찾아가 깊은 뜻을 연구하라. 가사와 바리로 인정을 끊고 주리고 배부른 데에 무심하면 저절로 도는 높아질 것이다. 나와 남 위하는 일 착하다 해도 그건 모두가 생사 윤회의 씨가 된다 솔바람 칡덩굴 달빛 아래서 그릇됨이 없는 조사선을 닦으라. 아홉째, 남의 허물을 말하지 말라. 칭찬하고 헐뜯는 말을 듣더라도 마음에는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절한 일 없이 칭찬을 받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요, 허물이 있어 시비를 듣는 것은 기쁜 일이다. 기뻐하면 잘못을 고치게 되고, 부끄러워하면 도 닦는 데 채찍질이 될 것이다. 남의 허물을 말하지 마라. 마침내는 그 허물이 내게로 돌아올 것이다. 남을 해치는 말을 들으면 부모를 헐뜯는 말과 같이 여겨야 한다. 세상은 오늘 남의 허물을 말하지만 내일은 다시 내 허물을 말할 것이다. 모든 일이 다 허망한 것인데, 비방과 칭찬에 어찌 걱정하고 기뻐할 것인가. 종일토록 잘잘못을 시비하다가 밤이 되면 흐리멍덩 잠에 빠진다 이같은 출가는 빚만 늘어서 삼계에서 벗어나기 더욱 어려워. 열째, 대중과 함께 살 때에 마음을 평등하게 가져라. 애정을 끊고 부모를 하직한 것은 온 세상을 평등하게 보기 때문이다. 만일 가깝고 먼 것이 있다면 마음이 평등하지 못한 것이니 그렇다면 출가하여 무슨 덕이 있겠는가. 마음에 사랑하고 미워하는 분별이 없다면 어찌 이 몸에 괴롭고 즐거운 성쇠가 있으랴. 평등한 성품에는 나와 남이 없고, 큰 거울에는 멀고 가까움이 없다. 삼악도에 드나드는 것은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요, 육도에 오르내리는 것은 친하고 성긴 업으로 이루어진다. 마음이 평등하면 가지고 버릴 것이 없으니, 가지고 버릴 것이 없다면 생사가 어디 있겠는가.
위 없는 보리도를 성취하려면 언제나 평등심을 굳게 가지라 사랑하고 미워하는 차별 있으면 도는 더욱 멀어지고 업만 깊으리. 그대가 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눈먼 거북이 나무 구멍을 만난 것처럼 아주 어려운 일이다. 한평생이 얼마나 된다고 닦지 않고 게으름만 피우느냐. 사람으로 태어나기도 어렵지만, 불법 만나기는 더욱 어려운 일이다. 금생에 놓쳐 버리면 만 겁을 지내도 다시 만나기는 힘들다. 이 열 가지 계법을 지키고 부지런히 닦아 물러나지 말고 속히 정각을 이루어 중생을 제도해야 한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대 혼자만 생사의 바다에서 뛰어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중생을 건지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가 끝없는 옛적부터 금생에 이르도록 생사에 오락가락할 때 번번히 부모를 의지했을 것이니, 그 끝없는 세월이 부모 되었던 이가 얼마나 많을 것인가. 이와 같이 생각하면 육도 중생이 그대의 부모 아닌 이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중생들이 모두 악도에 떨어져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밤낮으로 받고 있으니, 그들을 제도하지 않는다면 어느 때 벗어날 것인가. 가슴을 도리는 듯 애닯고 슬픈 일이 아닌가! 천만 번 바라노니, 그대는 어서 큰 지혜를 밝히고 신통 변화를 갖추며, 자유자재한 방편으로 거친 파도에 지혜의 배가 되어, 탐욕의 기슭에서 헤매는 미혹의 중생을 제도하라. 그대는 아는가, 삼세 부처님과 역대 조사들이 우리와 같은 범부였다는 사실을. 그도 장부요 나도 장부이니, 하지 않아서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옛사람의 말에 ‘도가 사람을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스스로 도를 멀리한다’고 하였으며, 또 ‘내가 착하려고 하면 착한 것이 스스로 따라온다’고 하였으니, 진실로 옳은 말씀이다. 만일 믿는 마음만 물러서지 않는다면 누가 자성을 깨쳐 부처를 이루지 못하겠는가. 이제 삼보를 모시고 낱낱이 그대에게 경계했으니, 만일 잘못인 줄 알면서 일부러 범한다면 산채로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어찌 삼가지 않겠는가. 옥토끼 뜨고 지니 늙음은 잠깐 금까마귀 들락날락 세월만 가네 명예와 재물은 아침의 이슬 영화롭고 괴로운 일 저녁 연기라. 간절히 도 닦기를 권하노니 어서어서 부처되어 중생 건지라 이생에 나의 말을 듣지 않으면 오는 생에 반드시 한탄하리라. <야운 자경문>
3. 수행자에게 보내는 글
부처님께서 열반의 세계에 계시는 것은 오랜 세월 동안 욕심을 끊고 고행하신 결과요, 중생들이 불타는 집에서 윤회하는 것은 끝없는 세상에 탐욕을 버리지 못한 탓이다. 누가 막지 않는 천당이지만 가는 사람이 적은 것은 삼독의 번뇌를 자기의 재물인 양 여기기 때문이며, 유혹이 없는데도 나쁜 세계에 들어가는 이가 많은 것은 네 마리 독사와 다섯 가지 욕락을 그릇되게 마음의 보배로 삼기 때문이다. 그 누군들 산중에 들어가 도 닦을 생각이 없으랴마는, 저마다 그렇지 못함은 애욕에 얽혀 있기 때문이다. 비록 산에 들어가 마음을 닦지는 못할지라도 자기의 능력에 따라 착한 일을 버리지 마라. 세상의 욕락을 버리면 성현처럼 공경받을 것이요, 어려운 일을 참고 이기면 부처님과 같이 존경받을 것이다. 재물을 아끼고 탐하는 것은 악마의 권속이요, 자비스런 마음으로 베푸는 것은 부처님의 제자이다. 높은 산 험한 바위는 지혜로운 이의 거처할 곳이요, 푸른 소나무가 들어선 깊은 골짜기는 수행자가 살아갈 곳이다. 주리면 나무열매로 그 창자를 달래고 목마르면 흐르는 물을 마셔 갈증을 풀어라.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이 몸은 언젠가 죽을 것이고, 비단옷으로 감싸 보아도 목숨은 마침내 끊어지고 만다. 메아리 울리는 바위굴로 염불당을 삼고, 슬피 울어예는 기러기로 마음의 벗을 삼으라. 예배하는 무릎이 얼음같이 시려도 불을 생각하지 말고, 주린 창자가 끊어질 듯하여도 먹을 것을 생각지 말아야 한다. 백년이 잠깐인데 어찌 배우지 아니하며, 일생이 얼마이기에 닦지 않고 놀기만 하겠느냐. 마음속의 애욕을 버린 이를 사문이라 한다. 수행하는 이가 비단옷을 입는 것은 개가 코끼리 가죽을 쓴 격이고, 도 닦는 사람이 애정을 품는 것은 고슴도치가 쥐구멍에 들어간 것과 같다. 아무리 재주가 있더라도 마을에 사는 사람은 부처님이 그를 가엾이 여기시고, 설사 도행이 없더라도 산중에 사는 이는 성현들이 그를 기쁘게 여기신다. 재주와 학문이 많더라도 계행이 없으면 보배 있는 곳에 가려고 하면서 길을 떠나지 않는 것과 같고, 수행을 부지런히 하여도 지혜가 없는 이는 동쪽으로 가려고 하면서 서쪽을 향하는 것과 같다. 지혜로운 이의 하는 일은 쌀로 밥을 짓는 것이고, 어리석은 이의 하는 짓은 모래를 삶아 밥을 지으려는 것이다. 사람마다 밥을 먹어 주린 창자를 달랠 줄은 알면서도 불법을 배워 어리석은 마음을 고칠 줄 모르는구나. 행동과 지혜가 갖추어짐은 수레의 두 바퀴와 같고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는 것은 두 날개와 같다. 죽을 받고 축원을 하면서도 그 뜻을 알지 못한다면 시주에게 수치스런 일이며, 밥을 얻고 심경을 외울 때에 그 이치를 모른다면 볼보살께 부끄럽지 아니하랴. 사람들이 구더기를 더럽게 여기듯이 성현들은 사문으로서 깨끗하고 더러움을 분별하지 않는 것을 걱정하신다. 세간의 시끄러움을 벗어버리고 천상으로 올라가는 데는 계행이 사다리가 된다. 그러므로 계행을 깨뜨린 이가 남의 복밭이 되려는 것은 마치 죽지 부러진 새가 거북을 업고 하늘을 날려는 것과 같다. 제 허물도 벗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남의 죄를 풀어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계행을 지키지 못하면 남의 공양을 받을 수 없다. 계행이 없는 살덩이는 아무리 길러도 이익이 없고, 덧없는 목숨은 아무리 아껴도 보전하지 못한다. 덕이 높은 큰스님이 되기 위해서는 끝없는 고통을 참아야 하고, 사자좌에 앉으려거든 세상의 향락을 영원히 버려야 한다. 수행자의 마음이 깨끗하면 천신들이 모두 찬탄하고, 수도인이 여색을 생각하면 착한 신들도 그를 버린다. 사대는 곧 흩어지는 것이어서 오래 살기를 보증할 수 없으며, 오늘이라 할 때 벌써 늦은 것이니 아침부터 서둘러야 할 것이다. 세상의 향락이란 고통이 뒤따르는 것인데 무엇을 그토록 탐하며, 한번 참으면 길이 즐거울 텐데 어찌 닦지 않는가. 도인으로서 탐욕을 내는 것은 수행인의 수치요, 출가한 사람이 재산을 모으는 것은 세상의 웃음거리다. 방패막이 할 말이 끝이 없는데 어찌 그리 탐착하며, 다음다음 하면서도 애착을 끊지 못하는구나. 이 일이 한이 없는데 세상일을 버리지 못하며, 핑계가 끝이 없는데 끊을 마음을 내지 않는구나. 오늘이 끝이 없는데 나쁜 짓은 날마다 늘어가고, 내일이 끝이 없는데 착한 일 하는 날은 많지 못하며, 금년 금년 하면서 번뇌는 한량없고, 내년이 다하지 않는데 깨달음은 얻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가 어느새 하루가 흐르고 어느덧 한 달이 되며, 한 달 두 달이 흘러 문득 한 해가 되고, 한 해 두 해가 바뀌어 어느덧 죽음에 이르게 된다. 부서진 수레는 구르지 못하고 늙은 사람은 닦을 수 없다. 누워서는 게으름만 피우고 앉으면 생각만 어지러워진다. 몇 생을 닦지 않고 세월만 보냈으며, 그 얼마를 헛되이 살았으면서 한평생을 닦지 않는가. 이 몸은 죽고야 말 것인데 내생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어찌 급하고 급한 일이 아닌가. <원효 발심수행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