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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병 제3기로 북진작전에 참가
장용회 용사는 1931년 제주시 애월읍 곽지리에서 태어났다. 만19세 때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기습남침을 자행한 북한군은 취약한 아군을 밀어내면서 노도같이 남하하고 있었다. 위태로운 조국을 구하기 위해, 장용회는 곽지리에 거주하는 같은 마을 출신 26명과 함께 8월 5일 제주도 모슬포주둔 해병 제3대대에 입대하였다. 그는 제11중대의 화기소대에 배치되어 열악한 환경 속에서 극한적인 훈련을 받았다. 8월 31일 훈련을 마치고, 다음날 9월 1일 제주항을 떠나 진해와 부산을 거쳐, 9월 15일 역사적인 인천상육작전에 참가하였다. 그 후 10월 26일 원산의 명사십리에 상륙한 후 11월 17일에는 평안남도 양덕군 동양면까지 진격하였다. 그러나 그 심산유곡에서 북한군에게 포위를 당했다가 다행이도 12월 3일 큰 손실 없이 원산으로 철수하여 12월 7일 수송선을 타고 진해로 내려왔다. 그토록 바라던 통일직전에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고 엄청난 참화 속에 해병의 위상을 내외에 알렸던 1950년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 924고지 공격
새로운 1951년이 밝았다. 1월 26일 해병대는 경북 영덕의 강구항에 상륙하여 태백산맥의 설산위에서 적군을 공격하였고, 3월 21년에는 홍천에 있는 가리산을 점령하였다. 그런 후 6월 4일부터 20일까지 적의 난공불락을 자랑하던 견고한 요새인 도솔산을 점령하였다. 이러한 피땀으로 점철된 치열한 전투에서 장용회 일등 수병은 경기관총을 쏘며 종횡무진 활약을 하였다. 8월 31일 장 수병이 속한 해병 제3대대는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에 솟아 있는 924고지를 공격하게 되었다. 이 924고지와 그 인근 1026고지 쟁탈전은 중동부전선의 전세를 좌우케 되었으며 155마일에 걸친 전 전선에 영향을 주게 되는 요충지였다. 이 일대는 너무나 험악한 산악이었고 도처에 지뢰가 매설되어 있어 매우 위험하였다. 그곳에 북한군은 최강부대인 제3군단 제1사단 제3연대였으며 그중 제1대대 500여명은 924고지에, 제2대대 500여명은 1026고지에 배치하고 제3대대를 예비대로 두고 있었다. 그리고 각 대대마다 82MM 박격포 8문과 중기관포 6문으로 무장하여, 해병대보다 우세한 화력을 보유하고 있어서 아군은 막대한 희생을 각오하여야만 했다. 드디어 제3대대의 작전 명령은 떨어졌고, 제11중대는 정면으로 제9중대는 우측면으로 우회 공격하였다.
적군은 아군이 공격할 요소요소에 이미 지뢰를 매설하였고 능선에서 정상까지 농무가 잔뜩 끼어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시계 불량으로 아군포대에서 발사한 포탄이 불행하게도 해병대지역에 낙하하여 대혼란이 일어났다. 이때 장용회 수병은 제11중대 경기소대의 경기관총사수로 소총소대에 배속되어 적진에 경기관총탄을 총열이 빨개지도록 연속 발사하였다. 그러나 적도 완강히 버티며 기관총탄을 아군진지로 쏘아댔다. 그 때 제11중대장이 그만 부상을 입었다. 그 즉시 선임 장교가 중대를 지휘하여 “돌격 앞으로!”하고 크게 소리를 쳤다. 바로 그때 적진으로부터 아식 보총소리가 들려오더니 선임 장교가 그 총탄에 쓰러지고 말았다. 결국 제11중대는 지휘선이 무너져 공격을 중단하고 철수해야했다. 불운은 겹쳐, 그날 공격부대를 직접 시찰하던 연대장 김대식 대령마저 지뢰를 밟아 다리부상으로 후송되었다.
□ 적의 진지 위에 기관총을 거치하다
8월 31일 제3대대의 924고지 공격은 일단 중지하고 내일을 기약하기로 했다. 그러나 밤에는 꼭 적군으로부터 역습을 당할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장수병을 비롯한 경기반원들은 경기관총을 매고 어둠이 짙어질 때 능선에서 내려와 부사수를 비롯한 탄약수와 함께 숲 속에 은폐된 평평한 대지위에 이르렀다. 일단 경기반원들은 그곳에 기관총을 거치하고 교대로 보초를 서서 주변을 경계하기로 하였다. 고온다습하여 불쾌지수가 높은 여름밤은 점차 깊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순번이 돌아가다가 자정 무렵부터는 장수병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카빈소총을 손에 잡고 기관총 옆에 와서, 앉았다가 일어서기를 반복하는데도 졸음이 몰려와 이를 물리치는 것이 여간 힘들 일이 아니었다.
이렇게 자신과의 싸움을 하던 중, 바로 발 밑 땅속에서 어슴푸레하게 불빛이 새어 나왔다. 분명히 기관총이 있는 땅 밑인데, 유령도 아니고, 장수병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그 속을 응시하였다. 그 때 약 3m앞 숲 속에서 이상한 물체가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장수병의 신경은 극도로 예민해지고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가슴은 마냥 두근두근 거렸지만 극도로 숨소리를 죽이고 숲 속에 몸을 숨긴 채 감각기능을 총동원하여 사방을 관찰하였다. 그러고 보니, 그 외모가 아군이 아니고 적군이 분명하였다. 이 사태를 어떻게 처리할까? 하는데, 다행히 적군은 아군을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들이 아군을 발견했다면, 따발총으로 선제공격을 해왔을 것이나 너무 태연했다. 그래서 장수병은 부사수를 살짝 건드리며, 쉬잇! 하고 오른쪽 검지를 일직선으로 입에 대는 시늉을 하였다. 그러자 그도 긴장한 모습으로 장수병의 다음 행동을 주시하였다. 장수병은 부사수에게 불빛이 비쳐오는 방향을 가리키며 적군이 우리가 있는 밑에 진을 치고 있으니, 잘 관찰하라고 귓속말로 일러주었다. 그리고 다시 살금살금 이동하여 인접소대에 보초 있는 곳으로 갔다. “나는 장용회 수병이다” 하고 나지막하게 소리치니, 그가 얼른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역시 입을 다물도록 검지를 입에 대었다. 그는 알아차리고 아무 말 없이 장수병을 쳐다보았다. 바라보니 그 보초는 같은 해병 제3기생인 서귀포시 서귀동 출신 강무중 수병(작고)이었다. “강수병! 이 바로 밑에 불빛이 보이지 않나?”, “나도 조금 전부터 그곳을 뚫어져라 관찰하고 있네.” “강수병 잘 살피고 있게, 내가 조금 더 앞으로 나가 정찰하고 오겠네.” “장수병, 조심하게. 내가 여기서 엄호하겠네.”
장수병은 즉시 무성한 수풀을 한 포기씩 헤치며 숨을 죽이고 앞으로 나아갔다. 가다보니, 굴 입구는 땅속으로 파내려져 갔고, 어느 정도 내려가서는 굴이 좌측으로 뚫려 있었다. 그 속을 쳐다보니, 희미한 불빛이 더운 열기와 함께 새어나오고, 북한군의 말소리도 나지막하게 귓전에 들려왔다. 장수병은 이를 보고, 즉시 사뿐사뿐 뒤로 물러났다. 그러고 보니 장수병이 걸어놓은 기관총 주변에는 아군이 있고, 그 땅 밑 벙커에는 북한군이 진을 치고 있지 않은가? 같은 땅 위와 아래에 각각 아군과 적군이, 서로 모른 채 이 순간까지 잠시나마 공존하고 있었구나! 우리들은 적진 속을 들어와 태연하게 기관총을 걸어두었으니 잘못하다가는 우리는 전멸이다. 사실 호랑이굴에 들어왔으니, 이판사판 죽기 아니면 죽이기다.
□ 적이 진을 친 땅굴 속으로
장수병은 기관총반에 비상경계를 시키고 땅속에 적군들이 움직이는 징후가 포착되면 즉시 발사토록 지시하였다. 그런 후 땅굴 속으로 들어가 적을 공격키로 하였다. 그런데 그 누가 화약고나 다름없는 적진 속에 들어가느냐가 문제였다. 사실 맡고 싶지 않은 역할이었다. 그래서 장수병이 앞장을 서고 강부중 수병이 뒤따르기로 하였다. 한발 먼저 굴속으로 들어가다가 위험에 처하면 손바닥으로 강수병을 치면, 그 때 수류탄을 던져 넣기로 했다. 물론 함께 폭사할지도 모르지만 불가피하게 그런 결정을 내렸다. 그 둘은 수류탄 2발씩을 소지하고, 목숨을 하늘에 맡긴 채 한발 한발 조심조심 옮겨놓는데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이 때 장수병은 양쪽 손으로 굴 입구의 벽과 천장을 더듬거리며 발로는 땅을 나비 앉듯이 살짝 살짝 눌러가며 나아갔다. 굴은 좌측으로 꺾여있었다. 이번에는 강수병이 앞에 서서 나가기로 했는데, 그는 어릴 때부터 체구가 크고 씨름선수로 담력도 세었다. 그가 앞으로 숨을 죽이며 전진하다 되돌아와서, 그 안에 적군이 있다고 손짓을 하였다. 이를 어떻게 대처할까? 하다가 그대로 들어가는 것은 무모할 것 같아, 허장성세하여 적을 무장해제 시키기로 하였다.
□ 허장성세로 적의 투항 유도
두 수병은 우선 수류탄 두 개를 양손에 들고, 여차하면 투척할 준비를 한 후 크게 소리를 질렀다. “야! 북한군들아. 너희들은 지금 완전히 포위되었다. 이 굴 입구만 막아버리면 독안에 든 쥐다. 그러니 두 손을 들고 나오라, 그러면 살려주겠다.” 그렇게 소리쳤으나 안에서는 쥐 죽은 듯이 아무 대꾸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홀연히 적군이 나타나 덤비니 그들도 놀래고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도 자기들끼리 싸우느냐, 항복하느냐로 망설이는 것 같았다.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장수병은 “내가 열을 셀 때까지 나오지 않으면, 이 수류탄을 그 속으로 던져넣겠다.” 그리고는 숫자를 세었다. 두 수병은 초조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다행히 북한군 하나가 “살려 주시라요.”하며 두 손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여기 서 있어! 저 굴속에 몇 명이나 있나?”, “예! 군관동무 1명과 전사동무 6명이 있시오.”, “음, 알았다.” 장수병은 다시 소리쳤다. 지금 안 나오면 수류탄과 화염방사기를 분사시키겠다. 그러자, “살려주시라요.”하며, 7명이 열을 지어 나왔다.
장수병과 강수병은 얼른 굴 입구에서 밖으로 나와 그들을 집결시키니, 기관총반원이 신속하게 몰려들었다. 그 즉시 북한군을 보호조치하고, 굴속을 수색하였더니 체코식 수냉식기관총 1정과 소총 8정까지 노획하였다. 그야말로 아군은 소총 한 방 쏘지 않고 두 수병의 기지와 용맹으로 대전과를 올렸다. 어느새 산중의 진지에도 먼동이 터오기 시작하였다. 장수병이 인솔하는 기관총반에서는 적의 군관 1명을 포함 포로 8명과 노획무기들을 중대본부로 후송하였다. 이 보고를 받은 대대장은 입이 딱 벌어졌다. 적군 생포에 공을 세운 장수병과 강수병은 물론 기관총반에 장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 924고지 점령
바로 이날 9월 1일 오전 7시를 기해 제3대대는 재차 924고지 공격에 들어갔다. 제11중대는 적진 100m까지 진출하여 있었고, 인접 제10중대는 적의 필사적인 저항으로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이러자 전력이 약화된 제10중대는 일단 철수시키고, 그 대신 제1대대 제1중대가 공격을 담당하였다. 제1중대는 적의 온 화력을 집중하여 퍼붓는 포화를 무릅쓰고 전진을 계속하여 적진 100m까지 접근하였다. 그러나 적 토치카에서 퍼붓는 기관총 사격 때문에 적진 50m전방에 머물러야 했다. 이 때 아군은 막대한 사상자를 내어 어려운 상황인데도 화염상사기를 등에 진 해병들이 적탄 속을 뚫고 드디어 화염상사기를 발사하였다. 불길은 적진 속으로 마구 날아가 화염이 휩싸였다. 이래서 924고지는 해병 제1대대 제1중대 용사들이 점령을 했다. 그런데 밤이 되니, 적은 또다시 야습을 감행해 와서 아군은 다시 전세가 불리하여 고지 50m 후방으로 후퇴하였다.
다음날 9월 2일 오전 9시 30분부터 아군은 항공기와 야포의 지원을 받으며 제1대대, 제3중대와 제3대대 제9중대를 투입하여 9월 2일 12시 30분 924고지를 재탈환하였다. 피에 젖은 피아간 시체가 정상주변에 즐비하게 놓여 있었을 정도로 참으로 수많은 해병들이 피 흘린 대가로 얻어낸 빛나는 승리였다. 한편 이 924고지 공격에는 연대장 김대식 대령이 지뢰폭발로 부상을 당했고, 또한 해병대 절도의 대명사격인 강복구 제9중대장도 적의 수류탄 파편에 부상을 입었을 정도로 치열한 전투였다. 더불어 이 고지와 붙어있는 1026고지는 윤영준 소령이 지휘하는 제2대대가 9월 3일 오후 1시 45분과 오후3시 30분에 각각 탈환하였다. 이 대승리에 감격한 이승만대통령은 “신인이 경탄할 공훈”이라고 격찬하였다.
□ 924고지와 1026고지의 전략적 위치
924고지를 김일성고지로 1026고지를 모택동고지로 해병대가 명명한 것은 해병들에게 이 고지를 꼭 점령하여야 한다는 사명감과 임전무퇴의 정신을 불어넣기 위함이었다. 이 두 고지 확보로 아군은 만대리 분지를 장악하고 적의 본거지인 내금강의 유리한 지형확보에 기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휴전회담에서도 유엔군이 유리한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한편 이 924고지와 1026고지 전투에서의 전과는 적 사살 382명, 포로44명, 체코제 경기관총 17문, 자동소총 9정, 따발총 21정, 아식보총 92정을 노획하였고, 피해는 아군전사 105명, 부상 388명이었다.
장용회 용사는 위 공로로 을지무공훈장을 수상하였다. 그는 자기보다 공로가 큰 전우들도 많았을 터인데, 큰 포상을 받게 되어 미안한 마음이 든다며, 같은 마을 곽지리에서 출전한 26명 전우 중 유명을 달리한 분들의 명복을 빈다는 소감을 말하였다.
<발췌> 정수현, [한라의 젊은 영웅들], 제주특별자치도재향군인회,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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