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불>을 읽고 떠나는 여행.
남원과 구례를 돌아보는 1박 2일 엠티.
2016년 겨울 엠티라고 명명했지만 실상 달력상 날짜는 해를 넘겨 2017년 2월이다.
해가 넘어가도 절기상 겨울의 연장이니 편하게 그 해 겨울이라고 부른다.
당시 엠티는 당연히 1박 2일이었으니 항상 숙소문제가 급선무다.
B가 남원의 유명한 한옥펜션을 추천했다. 무한도전에서 촬영을 했다는 꽤 운치있는 곳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전라도는 웬지 한옥펜션이 마땅한 듯 싶고, 더군다나 다름아닌 혼불 문학기행이니 괜찮을 것 같았다.
B가 추천하고 B가 숙소예약한 후 숙소 전화번호를 주길래 숙박비 전액을 입금 했다. 한겨울 비수기에 20만원을 훌쩍 넘는 숙박비가 비싸긴 했지만..그냥 펜션이 아닌 무한도전 촬영 한옥펜션 아닌가.
근데 엠티 날짜가 다가올수록 못가는 회원들이 속출했다.
숙박비 결제까지 한 마당에 불과 며칠을 앞두고 피치못할 사정들이 생기다 못해 심지어 <사람들이 적어서 재미없을 듯 하여 못갈듯 싶다>는 회원까지 나왔다.
10 여 명의 회원 중에 딸랑 4명이 가는 일박이일 엠티..그것도 남자 둘 여자 둘.
게다가 k(김)는 그날 처음 모임에 나왔다. 예전 독서모임에서 만나서 알고 있는 지인이지만 몇년 만에 보는 터라 적잖이 조심스럽고 조금은 서먹하다. 그러고보니 k와 H(홍)은 여행가는 그날 그 자리가 초면인사 자리가 아닌가. 그니까 초면에 악수하고 1박 2일 여행을 한 것이다.
남원 혼불 문학관.
너른 문학관 안에 인기척이라곤 우리 일행 밖에 없어서 조용하다 못해 황량했다. 관리 사무실에서 따끈한 차도 얻어마시며 혼불과 작가 최명희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도 들었다. 기념품으로 가득한 따뜻한 사무실 안쪽에 <독서토론하기 딱 좋아보이는 정갈한 온돌방>이 있었다. 그 자리에 다리 뻗고 앉아서 책 얘기를 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슬몃 들었다. 저 좋은 공간을 저렇게 묵혀두다니..싶은 아까움도 훅 일었다.
사무실에 걸려있는 기념품들을 구경하다가 결국 별다른 쓰임새도 없이 책상 서랍속에 들어갈 엽서 한 묶음을 샀다. 여행지에서 만만하게 살 수 있는 것이 엽서인 것은 혼불 문학관도 예외가 아니었다.
문학관은 책의 느낌과 달랐다. 책이 주는 힘과 주인공들의 땀냄새 진동하는 삶과는 달리 문학관은 마치 공장에서 찍어낸 물건처럼 어딘가 썰렁한 이질감이 있었다. 너무 정갈하고 산뜻해서 인위적인 느낌도 들었고, 책 속 이름을 그대로 따 붙인 바위며 저수지 등이 지나치게 작위적이라 어색했다.
그 중 압권은 갖가지 글씨체가 빼곡한 나무판들이 한무리 전시되어 있는 곳. 절간에서 기왓장 팔듯이 혼불에 대한 감상이나 느낌을 적을 수 있는 판때기를 파는 것인지, 아니면 그런 문학행사를 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냥 나무판에 있는 글 하나가 눈에 팍 들어와서 픽 웃고 말았다. <계속 전교 1등하게 해주세요>. 그냥 전교 1등 하게 해달라도 아니고 계속 하게 해 달라니..이런 욕심꾸러기가 있나. 우숩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무슨 바위나 나무나 분수대나 어디나 비빌 데만 있으면 발복을 하는 인간의 나약함에 공감이 되기도 했다.
문학관에서의 설렁함과는 달리 남원과 구례의 산천은 아름다웠다. 혼불의 느낌은 혼불을 갖다 모아둔 문학관이 아닌 남원과 구례의 산과 마을과 음식에서 더 정겹게 느껴졌다.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불현듯 희뜩 보이며 지나가는 표지판 <인월>.
책 속 인월댁이 나고자란 고향마을이구나 싶고, 더불어 주인공들의 삶이 오롯이 소설속 창작의 인물이 아닌 언젠가 그곳에서 인고의 세월을 살았을 이들의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원의 시골길을 달리다가 눈에 띄는 식당에 들어갔더니 반찬가짓수가 세다가 지칠만큼 많았다. 재료가 나물 아니면 장아찌인데도 하나같이 맛있어서 또 놀랐다.
내친김에 하동까지 쌩쌩 달려서 토지의 배경이 된 최참판댁까지 둘러보는데, 최참판댁 집 안팎은 사람들이 넘쳐났다. 주차장에서 최참판댁까지 온갖 기념품 상점도 열을 지어 있었다. 최참판댁 주변 기념품 상점에 왜 그렇게 천연염색 옷이며 침구류 상품들이 많은 지는 잘 모르겠다. 드라마로도 몇번 나온 토지는 무척이나 대중적이며 상업적이었다. 기왓집이며 초가집도 자꾸 보니 좀 식상하고 해가 지니 추워 지고 배도 또 고파지고..그래서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섬진강 줄기따라 화개장터로 가서 소주 곁들여 삼겹살을 구워먹었다. 술을 곁들인 고기를 배불리 맛있게 먹었다,
그 날 밤.
<진화란 무엇인가>를 가지고 진화론에 대한 무척이나 진지한 토론을 하고,
그 다음 날 아침,
구례 쌍계사 밑에 있는 식당에서 보양음식 같은 사찰음식을 먹으며 언쟁에 가까운 진화론 2차 토론을 또 했다. 식후 산책겸 해서 식당에서 그리 멀지 않은 쌍계사를 휘이 둘러보고 법당에서 함께 절도 했다. K(권)는 법당에서 절을 한 후 절값도 내던데..절을 하면 보통 돈을 받는데 돈을 내는 것이 좀 이상했다.
쌍계사를 내려오는 길, 커다란 기와를 이고 있는 대형 음식점 지붕위로 산뜻한 겨울 아침해가 쨍한 햇살을 쏘아보이고 있었고 나는 폰을 꺼내 쨍한 겨울 햇살을 찍었다. 구례를 떠올리면 그 겨울 사방으로 쨍하게 펴지던 그 햇살이 생각난다.
사족 1.
재밌는 곳, 신나는 곳, 부담없는 곳, 즐거운 곳에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굳이 모으지 않아도 모인다. 하지만 힘든 곳, 불편한 곳, 수고가 필요한 곳, 덜 재밌는 곳은 피하기 십상이다. 인지상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들고 수고스럽지만 필요한 어떤 것들이 면면이 맥을 이어오는 것은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묵묵히 노력하는 누군가들이 있기 때문이다.
항상 기꺼이 차량을 제공하며 주간 야간 가리지 않고 운전을 담당하는 K와 H.
부족한 회비에 난감해하는것을 눈치채고 다른 사람 몰래 따로 돈을 건네던 H.
그리고 일하느라, 애들 키우느라 어려운 와중에도 책을 읽느라 거북목이 되어가는 우리 모두들.
사람이 없다고 ? 그러면 내가 가면 된다.
책을 안 읽느다고? 그러면 내가 읽으면 된다.
애들이 공부를 안한다고 ? 그러면 부모가 하면 된다.
그렇게 나부터 시작하는 동력이 결국 에너지원이 되는 것이다.
사족 2.
혼불 여행 다음 날.
대구로 들어오던 길. 그냥 헤어지기 아쉬워서 대구로 들어오는 길목의 카페 <Someday> 에서 커피 한 잔 마셨다.
홍, 권, 김, 허.
이렇게 넷이서 머리를 맞대고 커피를 마시다가 툭 튀어나온 의견은 바로 <혼불 여행을 시발로 문학기행을 체계화 정례화 하자는 것>. 그리고 그 해 여름, 우리는 박경리의 책 <김약국의 딸>을 읽고 통영으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