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8일 주일 오후에 아내가 조르다시피 하여 함께 대전시네마를 찾았다.
'대전시네마'는 대전 구도심 중앙통에 있는 유일한 독립영화관이다.
‘말하는 건축가’
아내가 신문에서 영화에 대한 정보를 보고 상영관을 찾다가 드디어 날을 잡은 것이다. 솔직히 나는 다큐멘타리 영화는 별로다. 스릴과 서스팬스가 어우러지면서 치고 박고, 부숴버리는 액션영화를 좋아하는데...
소처럼 억지로 끌려가다시피 간 대전시네마, 영화관이 칙칙하고 을씨년스럽고... 정말 이건 아닌 것 같았다.
영화 오프닝 화면도 그렇고 그래서... 시작하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영~ 이건... 내 취향이 아닌데....’
그런데 영화의 내용이 전개되면서 영화 속 주인공인 정기용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아주 심도 있게 와 닿았다.
영화 속 한 강연 장면에서 정기용은 마이크를 잡고 이런 이야기를 한다.
“나는 목소리가 원래 너무 좋아서 마이크만 잡으면 사람들이 노래하라고 해서 강의가 안 될 정도였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어느 날 이런 목소리를 주었다.”
정기용은 목소리가 너무 안 좋아져 평소에도 마이크를 달고 산다. 암투병 과정에서 생긴 성대결절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말하는 건축가>에서 정기용은 끊임없이 말한다. 대사전달이 안되어서 조금은 답답했지만... 그래서 영화를 볼 때에 처음에는 졸다 깨다... 했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나서는 주인공 정기용의 사상과 철학, 그리고 그의 말들에 대하여 많이 생각나게 한다.
정기용씨가 강연하던 중 칠판에 판서한 내용
" 문제도 이 땅에 있고,
그 해법도 이 땅과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있다. "
하얀 시트를 목까지 덮고 얼굴만 내민 사람이 침대에 뉘어진 채로 여러 사람에 둘러싸여 주인공 정기용은 산을 오른다.
사방이 트인 곳에 이르자 이동 침대가 멎는다. 그리고 정기용은 입을 연다.
“감사합니다. 햇빛에 감사하고 바람에 감사하고 나무에 감사합니다---”
세상에 대한 작별 인사다.
병마와 싸우면서, 아니 병과 함께 지내면서 삶의 마지막 1년간을 주인공이 바라던 대로 경건하게,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그의 모습이 참으로 경이롭고 감동적이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이름 없는 나도 내 나름대로 그토록 품위 있고 의연하고 담담하게 마지막을 맞고 싶다.
웰다잉의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좋은 영화이다.
세익스피어는 <노년을 위한 제언>에서 ‘죽음에 대해 자주 말하지 말라.’ 했지만 지금부터라도 주어진 날들을 잘 살기 위해서는 죽음을 더 진지하게 생각해야겠다.
건축가 정기용(1945~2011)은 나이 들어서는 철학적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떠한 모습으로 인생의 종말을 맞이할 것인가.
나는 아직도 이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연기 중이다.
마지막 클라이맥스가 중요한데...
'그래, 내 연기는 지금부터가 절정이야 ' 하고 중얼거린다.
정기용은 영화 속에서 '건축가가 토목업자의 하수인 취급을 받고 있는 현실'에 대해 분개한다.
"건축물을 보존하지 못하혀면 차라리 망쳐 놓치는 말아야지~ " 그러면서 그는 욕도 서슴없이 내뱉는다.
그렇다.
건축가는 단순히 집을 짓는 사람이 아니라 어느 예술가 못지않게 문화를 만들어 가는 사람이다.
그는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그 안에 깃드는 사람들의 요구에 대답하는 건물을 만들었다.
<기적의 도서관>이 그렇고 <등나무가 아름다운 무주의 종합 운동장>, <목욕탕이 있는 무주 안성주민 센터>, <노무현대통령 생가> 등이 그의 건축관을 반영한 것들이다.
그는 평생 자기 집이 없이 월셋방에 살았어도 그의 손에 의해 지어진 집들은 그 속에서 사는 이들과 함께 ‘소통’하며 오래도록 그의 香氣를 전할 것이다.
진정한 건축이 무엇인지, 건축이 그리고 건축가가 단순한 개발업자의 하수인이 아닌 사람과 행복을 만드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준다. 고인이 된 정기용 씨의 건축철학과 공간과 행복에 대해 생각을 하고 싶다면 한 시간 조금 넘는 시간 영화관에 투자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