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 품 론 김분홍의 시 - 전해수 (문학평론가)
전복
귀를 잘랐어
피어싱을 한 귀
수족관에는 잘린 바다의 귀가 자라지 귀가 자라면 전복이 자라지
수평선에 걸린 노을이 꿈속과 꿈 바깥의 절취선을 용접하고 있지 전복의
진주광택에 음각된 파도소리는 몇 톤일까
귀가
그리움이라서
제 귀를 자르는 바다
고깃배가 잘린 귀를 채집하면 귓불에는 따개비가 다닥다닥 귀고리로 붙어
있지 수천의 귀를 잘라낸 바다는 동쪽으로 듣고 서쪽으로 흘려버렸지
어둠이 천공한
피어싱은 목구멍인가 땀구멍인가 전복의 청력에서 갈매기 목소리를 적출
할 수 있지
청각이 오려진 해변에선 네 시의 고백이 젖어가고 귓바퀴에는 구멍이 낭
자하지
스피커는
쌓아두는 것일까, 흘려버리는 것일까
얼굴이 완성되기도 전에 표정을 잃어버린 귀, 난파선의 피사체가 당신의
귀를 땄지
숱한 소문에도 피어싱을 멈추지 않았어
리아트리스
공중에 그어놓은 밑줄은 밀애의 표식입니다 화려하고 보폭이 느린 문장에
밑줄을 긋는다죠
철봉은 풍경의 테두리, 나는 누구의 테두리인가
철봉에 매달려 철봉을 흠모하면 철봉은 사라지고 철봉에 매달려 철봉을
증오하면 철봉은 다가와 나의 손가락을 잘라요
미래는 밀애의 오독, 내가 철봉에 매달릴 때 당신은 뿌리 없는 외발이 전부죠
구름은 무거워지고 싶을 때 외발을 감춰요
철봉과 나는 수직이라서
쇄골에 접혔던 밤을 펼친 철봉은 내 몸을 휘감고, 나는 오늘밤도 철봉에 매
달려요
구름이 피 묻은 손가락으로
하늘에 밑줄을 긋자 철봉은 상대를 바꿔가며 표지뿐인 이불을 넘겨요 내
몸이 뜨거워질수록 철봉은 차갑게 식어가요
거절당할수록 쌓여가는 집착
펼쳐보고, 뒤집어보고, 돌려봐도, 당신은 퇴고할 수 없는 나의 밑줄
그리움의 귀, '소문의 오독'을 찾아서 - 전해수(문학평론가)
‘소리’는 김분홍의 시에서는 ‘그리움의 귀’로 향해 있다. 김분홍 시인은
시「전복」의 이미지를 신체의 일부인 “귀”로 새겨 넣고 있는데 이는 단순
히 전복의 모양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다. 이를테면 수족관의 전복-> 바다
의 귀->피어싱->전복의 청력->(나의) 청각->고백->잃어버린 귀-> 소문에 이
르는 과정을 다각적으로 연결하고 있다. 이른바 “전복”은 얼굴이 완성되기
전의 “귀”이자 표정을 잃어버린 “소문”의 귀로 화하여 ‘그리움의 귀’에 마침
내는 도달한다. 전복을 통해 이처럼 생동감 있는 시적 표현과 이미지를 구
축해내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 전복의 최초의 이미지가 “수족관”이었음을
살펴 볼 때, “수족관”과 “바다”를 잇는 ‘소리’의 향방이 “당신의 귀”를 이끌고
‘소리’의 그리움에 도달하고 있어서 “전복”의 사연이 새롭게 생성되고 있
다.
또한 시「리아트리스」는 김분홍 시인의 관심이 소리의 ‘확산’과 ‘되돌아옴’
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데 이른바 소리의 “밀애”방식을 한 차원
달리 표현하고 있다. 예컨대「리아트리스」에는 “철봉”이 등장하는데 “철봉”
은 “밑줄”의 형상으로 공중에 떠 있는 “뿌리 없는 외발”의 “당신”과 교차된
다. 결국 “당신”은 “나의 밑줄”이며, 나는 당신에게 “거절당할수록 쌓여가는
집착”을 (철봉이라는) 한 줄 밑줄로 “펼쳐보고, 뒤집어보고, 돌려 보”는 변
형된 사랑의 형태를 재구성한다.
공중에 그어놓은 밑줄은 밀애의 표식입니다 화려하고 보폭이 느린 문
장에 밑줄을 긋는다죠
철봉은 풍경의 테두리, 나는 누구의 테두리인가
철봉에 매달려 철봉을 흠모하면 철봉은 사라지고 철봉에 매달려 철봉
을 증오하면 철봉은 다가와 나의 손가락을 잘라요
미래는 밀애의 오독, 내가 철봉에 매달릴 때 당신은 뿌리 없는 외발이
전부죠
―김분홍「, 리아트리스」부분
특히 “밀애”가 “미래”로 발음되면서 “오독”되는 과정을 제시하며 사랑의
다른 모습을 형상화해낸다. 그렇다. 철봉에 거꾸로 매달려 바라보는 세상
은 실은 정상적이지 않다. 그러나 시적 화자는 철봉을 “공중에 그어놓은
밑줄”이라 여기며 이 밑줄은 “밀애의 표식”이며 “보폭이 느린 문장”이라 규
정한다. 한편 철봉이 “상대를 바꿔가며 표지뿐인 이불을 넘”긴다는 표현과
만나면서 “거절”과 “집착”이라는 사랑의 방식이 등장하는데, “철봉이 내 몸
을 휘감고” “철봉에 매달”려 밀애의 표식인 밑줄에 집착하는 “나”의 (매달
린) “손가락”은 철봉에 의해 잘려나간다. 시인은 사랑의 거절을, 그것을, 정
확히 제시하고 있는데 “철봉에 매달려 철봉을 흠모하면 철봉은 사라지고
철봉에 매달려 철봉을 증오하면 철봉은 다가와 나의 손가락을 자”른다며
맹목적 사랑과 그 사랑의 결과를 드러낸다. 사랑할 때의 당신들은 그래서
영원히 “퇴고할 수 없는 나의 밑줄”이 되는 것이다.
2017 시산맥 가을
첫댓글 의미를 찾아가는 이미지들이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세상의 누군가 열심 밑줄을 그어도 그어줘도 그때는 모릅니다. 흐르고 흘러 집착이 떠나고 나면 그때는 미래가 밀애였다는 사실을 알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