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박성수 역, 문예출판사 2006.
저자 서문
보편사의 어떤 문제를 연구하든, 근대 유럽 문명의 산물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자문하게 만든다. 즉 (우리가 보통 그렇게 생각하듯이) 「보편적」인 의의와 가치를 지닌 발전선상에 놓여 있는 듯한 문화적 현상이 서구 문명에서 그리고 오직 서구 문명에서만 나타난 사실은 어떤 일련의 환경들에 귀속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가 그것이다.(프자5)
오직 서구에서만 우리가 오늘날 타당한 것으로 인정하고 있는 발전단계에 오른 과학이 존재한다. 경험적 지식, 우주와 삶의 문제에 대한 반성, 가장 심오한 종류의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지혜 등은 서구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 간단히 말해서 매우 세련된 지식과 관찰은 다른 곳에도 특히 인도, 중국, 바빌로니아, 이집트 등에도 존재했다. 그러나 바빌로니아나 다른 곳에는 천문학이−그래서 그 발전을 더욱 놀라운 것으로 여기게 되는데−최초로 그리스인들로부터 수용된 수학적 기초를 결여하고 있었다. 인도의 기하학은 아무런 합리적 증명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이러한 증명도 역학과 물리학의 창시자인 그리스적 지성이 낳은 또 다른 산물이다. 인도의 자연과학은 비록 관찰에서는 잘 발달했지만 실험방법이 결여되어 있었다. (…) 특히 인도에서 약학은 경험적 기술에서는 매우 발달했을지라도 생물학적 토대 특히 생화학적 토대를 결여하고 있었다. 합리적 화학은 서구를 제외하고는 문화의 어떤 영역에도 존재하지 않았다.(프자5)
그러나 훈련되고 전문화된 인원을 갖추고 이루어지는 합리적이고 체계적이며 전문화된 과학의 추구는 우리 문화에서 현재 차지하고 있는 지배적 위치에 접근하는 의미로는 단지 서구에만 존재했다. 무엇보다도 근대국가와 서구의 경제생활 모두에 기둥의 역할을 하는 훈련된 관리에 대해서는 진정으로 그러하다. 훈련된 관리란 지금까지 단지 암시되었을 뿐, 사회질서에 대하여 현재와 같은 중요성에는 접근한 적도 없는 유형을 구성한다. 물론 관리, 그것도 전문화된 관리란 매우 다양한 사회에서 매우 오래된 구성인자이다. 그러나 어떤 나라도 어떤 시대도 근대 서양과 동일한 의미에서 특별히 훈련된 관리들의 「조직」에 그 전적인 존재, 그리고 그 삶의 정치적, 기술적, 경제적 조건을 절대적이고도 완전하게 의존해 본 적은 없다. 사회적 일상생활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 기술적으로, 상업적으로 그리고 특히 법적으로 훈련된 정부관리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다.(프자7-8)
이는 우리의 근대적 삶에서 가장 강력한 힘인 자본주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획득에의 충동, 이윤과 화폐, 가능한 한 많은 양의 화폐에 대한 추구 그 자체는 자본주의와 관계가 없다. 이 충동은 웨이터, 의사, 마부, 예술가, 창녀, 부패관리, 군인, 귀족, 십자군, 도박꾼, 거지 등에게도 존재하고 있으며 존재해왔다. 아마도 이 충동은 그것의 객관적 가능성이 있는 혹은 있었던 곳이라면 지구상의 모든 나라에 그리고 모든 시대에 모든 종류와 조건의 인간들에게 공통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프자8-9)
획득을 위한 무제한한 탐욕은 결코 자본주의와 동일한 것이 아니며 자본주의 정신과는 더욱더 동일한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아마도」 이러한 비합리적 충동의 절제 혹은 적어도 그러한 충동의 합리적 완화와 동일할 수는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지속적이고 합리적인 자본주의적 경영에 의한 이윤추구 그리고 영원히 「재생되는」 이윤의 추구와 동일한 것이다. 이는 반드시 그러해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전적으로 자본주의적인 사회질서 안에서 이윤획득을 위한 자신의 기회를 이용하지 않는 개별적인 자본주의 기업은 소멸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프자9)
우리는 자본주의적 경제행위를 교환기회의 사용에 의한 즉 (형식적으로) 평화적인 이윤기회의 사용에 의한 이윤기대에 의존하는 행위라고 정의할 것이다. 강제에 의한 획득(형식적으로 그리고 실제로)도 나름의 독특한 법률을 따르는데 이러한 획득을 종국적으로 교환으로부터의 이윤을 지향하는 행위와 같은 범주 안에 두는 일은−아무도 금지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적절하지 않다. 자본주의적 획득이 합리적으로 추구되는 경우에 그에 조응하는 행위는 자본에 의한 계산에 적응된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그 행위가 재화와 인간의 용역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획득수단으로서 체계적으로 사용하도록 적응된다는 것이다. 그 방식이란 한 기업의 회기의 종결 시에 화폐자산으로(혹은 연속적인 경영이라면 주기적으로 평가된 자산의 화폐가치로) 본 기업이 수지균형이 자본 즉 획득을 위해 교환에 사용된 물질적 생산수단의 평가가치를 상회하도록 하는 방식을 말한다.(프자9)
근대에 서양에서는 다른 어떤 곳에서도 나타난 적이 없었던 매우 다른 형태의 자본주의가 발전했다. 즉 (형식적으로) 「자유로운 노동」의 합리적인 자본주의적 조직화가 그것이다.(프자12)
이윤을 위한 정치적 기회나 비합리적 투기적 기회에 맞추어진 것이 아니라 정기적 시장에 맞추어진 합리적 산업조직은 그렇지만 서구 자본주의에만 독특한 것이다. 자본주의적 경영의 근대적인 합리적 조직은 그 발전에 있어 다른 두 가지 중요한 요소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즉 근대적 경제생활을 전적으로 지배하는 가사와 사업의 분리, 그리고 이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합리적 부기가 그것이다. 나름의 회계를 지닌 자본주의적 결사체의 발달은 극동, 근동, 그리고 고대에도 존재했다. 그러나 기업경영의 근대적 독립성에 비하자면 그러한 것들은 단지 조그마한 시작에 불과하다. 이에 대한 이유는 특히 이러한 독립을 위해 불가결한 선결요건 즉 서구의 합리적인 기업부기 그리고 개인적 소유와 기업의 법적인 분리가 전적으로 결여되었거나 아니면 단지 발달의 초기상태에 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곳에서의 경향은 탐욕적인 기업이 왕실의 가사(oikos) 혹은 장원의 「가사」의 일부로서 성장하는 것이었다. 이는 로드베르투스가 지적했듯이 그 모든 피상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다른, 심지어는 반대되는 발달이었다.(프자12-13)
서구 자본주의의 모든 특이성들은 그 중요성을 결국에는 그것들이 노동의 자본주의적 조직화와 결부되었다는 데서 얻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상업화라고 불리는 것, 즉 유통증권의 발달과 투기의 합리화, 교환 등도 그것과 연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노동의 합리적인 자본주의적 조직화가 없다면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해도 그와 연관된 근대 서양의 특수한 모든 문제에 대해서 그리고 특히 사회적 구조에 대해서 지금과 동일한 중요성을 가질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것의 토대가 되는 정밀한 계산은 단지 자유로운 노동의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다.(프자13)
세계에서 근대 서양을 제외하고는 노동의 합리적 조직화가 존재하지 않았듯이 혹은 존재하지 않았기에 합리적 사회주의도 존재하지 않았다. (…) 시민이라는 개념은 서양 밖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근대 서양의 바깥에는 부르주아의 개념도 존재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도 존재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규칙적인 훈련 아래 있는 자유로운 노동의 합리적 조직화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채권자 계급과 채무자 계급, 영주와 토지 없는 농노나 소작인 그리고 상업이익과 소비자 혹은 영주간의 계급투쟁은 다양하게 결합되어 어느 곳에나 존재했다. 그러나 대부자와 그의 노동자간의 서구적인 중세적 투쟁조차도 다른 곳에는 단지 초기에만 존재했을 뿐이다. 대규모 산업의 기업가와 자유임노동자간의 근대적 갈등은 전적으로 결여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사회주의와 같은 문제는 있을 수가 없었다.(프자13-14)
보편적 문화사에서 우리에게 핵심적인 문제는 결국 순전히 경제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상이한 문화에서 단지 형태적으로만−모험가적 유형, 혹은 이윤의 원천으로서 무역, 전쟁, 정치, 행정상의 자본주의−다른 자본주의적 활동 자체의 발전이 아니다. 오히려 자유로운 노동의 합리적 조직화를 갖춘 착실한 부르주아 자본주의의 기원이 문제가 된다. 혹은 문화사의 용어로 말하자면 문제는 서구 부르주아 계급과 그 독특성의 기원에 대한 것이다. 이 문제는 분명 노동의 자본주의적 조직화의 기원과 긴밀히 결부되어 있지만 바로 그 문제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계급으로서의 부르주아는 특별히 근대적인 형태의 자본주의의 발전 이전에도 비록 서반구에서만 그랬던 것이지만 어쨌든 존재했기 때문이다.(프자14)
자본주의의 특별히 근대 서구적인 형태는 일견하기에 기술적 가능성의 발달에 강한 영향을 받아 온 것 같다. 그 자본주의의 합리성은 오늘날 본질적으로 가장 중요한 기술적 요인들의 계산가능성에 의존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이 근본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그 자본주의가 근대 과학의 독특함 특히 수학에 근거한 자연과학과 정밀하고 합리적인 실험 등에 의존한다는 사실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과학, 그리고 그 과학에 의존해 있는 기술의 발달은 다시 중요한 자극을 실제상으로 적용된 자본주의적 이해관계로부터 받는다. 물론 서구과학의 기원이 그러한 이해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 수학이나 역학의 기원이 자본주의적 이해관계에 의하여 결정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대중의 생활조건에 그렇게도 중요한 과학적 지식의 「기술적」 사용은 분명 서양에서 매우 우호적이었던 경제적 고려에 의하여 촉진된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러한 촉진은 서양의 사회구조가 가진 특이함에서 도출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구조의 「어떤」 부분으로부터 그것이 도출된 것인가라는 질문을 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 구조의 모든 부분이 동등한 중요성을 가졌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프자14-15)
의심할 바 없이 중요한 것들 중에는 법률과 행정의 합리적 조직을 들 수 있다. 왜냐하면 근대의 합리적 자본주의는 단지 기술적 생산수단만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형식적 규칙에 따라 계산가능한 법적 체계와 행정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없어도 모험적이고 투기적인 무역 자본주의와 모든 종류의 정치적으로 규정된 자본주의는 가능하지만, 결코 고정자본을 갖추고 계산의 확실성을 지닌 개인적 창의에 의한 합리적 기업은 존재할 수 없다. 그와 같은 법적 체계와 행정은 오직 서양에서만 비교적 잘 이루어진 법적이고 형식주의적인 완성도를 가지고 경제활동에 이용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한 법률이 어디에서 유래했는가를 물어야 한다. 여러 다른 환경 중에서도 자본주의적 이해관계가 역으로 다시, 법과 행정에서 특별히 합리적 법률로 훈련된 법관 계급의 우세를 위한 길을 준비하는 데에 일조했다. 물론 이것만이 유일한 것이었다거나 주된 것이었다는 말은 아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해관계 자체가 법률을 만든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법률의 발전에는 여러 가지 상이한 힘들이 작용했다. 그런데 왜 자본주의적 이해관계가 중국이나 인도에서는 같은 결과를 낳지 못했을까? 왜 그곳에서는 과학적, 예술적, 정치적, 혹은 경제적 발전은 서양에 독특한 합리화의 길에 들어서지 못했을까?(프자15-16)
위의 모든 경우에 있어 문제가 되는 것은 서구문화에 특수하고 독특한 합리화이다. 이 합리화라는 말은 매우 상이한 것들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서 신비적 명상의 합리화라는 것이 있다. 즉 삶의 다른 부분에서 보자면 특히나 비합리적인 태도의 합리화가 있다. 마찬가지로 경제생활, 기술, 과학적 탐구, 군사훈련, 법과 행정 등에 대한 합리화가 있다. 게다가 이러한 분야의 각각은 매우 다른 궁극적 가치와 목적에 따라 합리화될 수 있으며, 한 관점에서 합리적인 것이 다른 관점에서는 비합리적인 것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매우 다양한 성격의 합리화가 삶의 다양한 영역과 문화의 모든 부분에 존재했던 것이다. 문화사의 관점에서 각각의 차이점을 특징짓기 위해서는 어떤 부분이 어떤 방향으로 합리화되었는가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 그와 같은 설명의 시도는 언제나 경제적 요인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 무엇보다도 경제적 조건을 고려에 넣어야 한다. 그렇지만 동시에, 대립되는 상관관계들도 도외시해서는 결코 안 된다. 왜냐하면 경제적 합리주의의 발달이 부분적으로는 합리적인 기술과 법률에 의존한다 해도 그와 동시에 그러한 발달은 일정한 유형의 실천적인 합리적 행위를 채택하는 인간들의 능력과 성향에 의해서도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형들이 정신적 장애에 의하여 방해받게 되면 합리적인 경제행위의 발전도 역시 심각한 내적 저항에 부딪히게 된다. 마술적이고 종교적인 힘들, 그리고 그것에 토대를 둔 윤리적인 의무의 관념 등은 과거에 항상 행위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중요한 형성요인 중의 하나였다.(프자16)
일정한 종교적 관념이 경제적 정신 혹은 경제체계의 에토스의 발전에 미치는 영향의 문제가 그것이다. 이 경우에 우리는 근대적 경제생활의 정신과 금욕적인 프로테스탄티즘의 합리적 윤리간의 연관성을 다룬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단지 인과 연쇄의 한 측면만을 다루는 것이다.(프자17)
오늘날 유행과 학자들의 빗나간 열망 때문에 우리들은 전문가들은 그다지 많지 않아도 좋다거나 혹은 관찰자 정도의 수준에 종속되는 상태로 전락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거의 모든 과학은 딜레탕트에게 어느 정도 신세지고 있으며 종종 매우 귀중한 관점을 신세지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딜레탕티즘을 지도원리로 삼는다면 그것은 과학의 종말이 될 것이다. 그저 보는 것을 열망하는 사람은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이 낫다. 비록 현재의 연구 분야에서도 그와 같은 것들이 문학적 형식으로 엄청나게 제공되고 있긴 하지만, 그렇지만 이러한 태도만큼 이 글들과 같은 철저히 진지한 연구와 거리가 먼 것은 없다. 그리고 덧붙이건대, 설교를 원하는 사람은 비밀종교집회에 가는 것이 나을 것이다. 여기서 비교된 문화들의 상대적 가치에 관한 문제에 관한 한 하나의 대답이란 없다. 사실상 인간 운명의 길은 그 운명의 일부를 탐사하는 사람을 섬뜩하게 한다. 그렇지만 마치 바다의 풍경이나 위엄 있는 산을 본 사람이 적어도 예술적인 형식이나 예언적인 형식으로 그것을 표현할 자질이 없을 때에 그렇듯이 적어도 사소하나마 개인적인 주석을 달아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다른 모든 경우에 직관적으로 파악한 것을 엄청나게 많은 말로 표현하는 것은 대상에 대한 조망을 결여하고 있음을 숨기는 일에 불과하다. 그리고 마찬가지의 것이 인간에 대해서도 조망을 결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프자18-19)
첫댓글 12월 16일 세미나에서는 예정했던 분량에서 '저자 서문' 부분만 읽겠습니다.
애쓰셨습니다. 오후에 뵙겠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부지런한 하교수 짱~~
제가 잘 부탁드립니다.^^
많이 배우겠습니다.
오후에 봬요~~
두분 덕에 드디어 베버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