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 경신(景信) 호 마애(磨厓) 1495년(연산군 1) ~ 1549년(명종4) 문신이다
문집은 마애집이 있으며, 대표관직으로는 대사헌ㆍ이조판서ㆍ우참찬 등을 지냈다.
경상도 안동 출생이며 횡성현감(통정대부 증이조참의) 거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안동 우향계 맹주이며 수의부위(가선대부 증호조참판) 자겸이고 아버지는 진사(자헌대부 증병조판서) 철경이다.
어머니는 창원황씨 통례원 봉례(정4품) 증공조참판 황전의 손녀이고 부사직를 지낸 윤경의 딸이다.
문장에 능해 22살 1516년(중종 11) 생원시에 합격했고, 같은 해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예문관검열에 제수되었다.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예문관대교로 조광조(趙光祖) 일파의 탄압 반대에 적극 앞장섰다.
당시에 정암 조광조 선생이 분연히 지치(至治 : 탓할 나위 없이 잘 다스려진 정치)를 일으키고자 하니 여러 어진 이들이 조정에 가득 찼다.
남곤, 심정 등이 그를 미워하니 임금이 신무문(神武門)에서 고변한 것만 따르고 바깥에 있는 조정에서는 그 사실을 미처 분명하게 알지 못하였다.
당시 권예가 아뢰기를 “대신들이 도당(都堂)에 모이는 것은 대낮에 하는 것이 옳습니다. 어제의 일은 낮에 한 것이 아니고 밤에 한 것입니다. 낮은 양이고 밤은 음입니다. 양은 군자에 속하고 음은 소인에 속합니다. 이 신무문 또한 일을 거행할 장소가 아닙니다.”라고 하자 임금이 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벌을 내리지도 않았다.
일찍이 대간(臺諫)으로 있을 적에는 이항(李抗)이 정승의 자리에 있는 것은 합당하지 않으니 먼 곳으로 속히 유배를 보내야 한다고 논박하였으며 또 심정(沈貞)은 간사하고 탐욕스러우니 속히 전해지는 말을 살펴보아야 한다고 아뢰었다. 이에 앞서 허흡(許洽)도 대간이 되었는데 권예와 명망이 나란하였다. 그러자 요직에 있는 사라들이 이들의 높고 곧은 태도를 미워하였다. 그리하여 김극핍(金克愊)이 경연에서 아뢰기를 “권예ㆍ허흡 두 사람은 사특하고 과격하니 청 컨데 대신들에게 자문하여 점검 하소서”라고 하였다.
심정이 그의 의논에 대해 사족을 달려고 하자 판서 허굉(許硡)이 심정에게 말하기를 “한 때의 이익과 녹봉도 사랑할만하지만 만세의 명예와 절의를 유독 버릴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니 심정이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았다.
1522년 홍문관부수찬을 역임하고, 1526년 사헌부지평에 기용되어 간쟁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이어 홍문관교리·사간원사간·홍문관직제학 등 삼사의 요직을 역임하고, 1529년 강원도어사가 되어 민정을 순찰했다.
이 시기 탐관으로 지목되고 있던 평해군수 최수진(崔秀珍)을 파직시켰다. 이후 내직으로 옮겨 승정원동부승지를 거치고, 이듬해에는 대사간으로서 당상관에 올랐다. 이때 홍문관의 운영이 대신들에 의해 좌우됨을 보고, 홍문관은 공론(公論)의 발원지임을 들어, 직무의 공정성을 강조했다.
한편, 김안로(金安老)와 손을 잡고 복성군옥사(福城君獄死)를 일으켜 심정(沈貞)·성세창(成世昌) 등을 탄핵, 파직시키고 사사(賜死)했다. 그 뒤, 홍문관부제학·대사헌 등 언관을 역임했고, 공조참판·호조참판·병조참판을 거쳐,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다시 형조판서·대사헌·이조판서·우참찬 등 내직에 기용됐다.
그러나 1537년 김안로가 사사되고, 그 일파가 축출되면서 심언광(沈彦光) 심언경(沈彦慶)과 아울러 파직, 안동에서 10여 년 은거하다가 사망했다. 성품은 강경해 나서기를 좋아했고, 자질이 총민했다. 요직을 역임하고 권력을 장악한 바 있어도 근검해 가산은 돌보지 않았다고 한다. 문집으로 『마애집』이 전한다.
❏ 권예 선생께서는 평소의 성격은 강직하였고 청렴결백하여 사적으로 찾아가는 집이 없었고 관직을 사직하고 안동에서 10여간 칩거하며 가산을 다스리지 않아 초가집이 쓸쓸하고 왕래하는 사신을 한 번도 만나 주지 않았고 또한 관청에 단 한 번도 발을 들여 놓지 않았으며 언행이 신중하였다고 당시 사관은 논평하고 있다.
❏ 권예는 1516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때 25세의 나이에 춘추관기사관(정6품)의 낮은 관직으로 죽음 무릅쓰고 어전에서 임금에게 조광조 일파의 탄압을 반대하는데 앞장섰다. 또한 중종반정도 그 방법이 옳지 못하였음 중종에게 직언을 하였다. 조광조 등 이들을 두둔한 김안국(金安國)ㆍ김정국(金正國) 등은 파직되었고 마애 권예 선생께서는 훈구파의 제거 대상이었지만 파직당하지 않으시고 이후 대사성, 대사간, 대사헌, 홍문관부제학, 육조의 참판 및 판서, 세자좌부빈객 등 청요직을 두루 지내셨다.
❏ 권예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재주가 많았으며 얼굴은 반듯하고 수염이 아름다웠다."라고 금계지는 기록하고 있다.
❏ 낙강정(洛江亭)은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나지막한 구릉에 위치한 아담한 건물로 마애(磨厓) 권예(權輗) 선생의 정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