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모니 부처님이 생전에 제자들과 함께 수행했던 승원 중에서 첫 손에 꼽히는 것이
祇園精舍와 竹林精舍이다. 특히 기원정사는 깨달음을 얻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23번의
하안거를 보내신 곳이다.
그 기원정사의 숲을 기림(祇林-토지의 신,혹은 크다는 기 자와 수풀 림 자))이라 하니
경주 含月山 祇林寺는 그런 연유에서 붙인 이름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의 본산인 불국사의 말사이다.
기림사는 천축국(天竺國) 승려 광유(光有)가 창건, 임정사(林井寺)라고 하다가
643년(선덕여왕 12) 원효(元曉)가 확장, 중수하고 기림사로 개칭하였다.
1863년(철종 14) 본사(本寺)와 요사(寮舍) 113칸이 불타 없어졌다. 당시 경주부윤이던
송우화(宋迂和)의 혜시(惠施)로 중건한 것이 현 건물이다.
다행히 경상도영주제명기(慶尙道營主題名記), 동도역세제자기(東都歷世諸子記),
부호장선생안(府戶長先生案) 등의 중요한 문적(文籍)과 근세조선 역대 왕의
어필(御筆) 등이 병화(兵火)를 입지 않고 보관되어 있다.
이 밖에 목탑지(木塔址), 3층석탑, 오백나한상(지방유형문화재 214) 등이 있고,
보물로 대적광전(大寂光殿:보물 833), 건칠보살좌상(乾漆菩薩坐像:보물 415),
삼신불(三神佛:보물 958), 복장유물(보물 959) 등이 있다.
한편 왜구가 동해를 거쳐 경주로 침입하는 길목에 위치한 기림사는 임진왜란 때
승군의 지휘본부로 사용되었으며 진남루.나팔.목비 등이 남아 있어
호국사찰임을 증명해 준다
기림사 연혁은 다음 관련 문헌에서 발췌한 것이다.
1. 기림사중창기(祇林寺重創記) 2. 신라함월산기림사사적(新羅含月山祇林寺事蹟)
3. 개간기림사사적(改刊祇林寺事蹟) 4. 현판기(懸板記) 5. 상량문(上梁文)
6. 발원문(發願文)
광유성인(光有聖人)이 창건(創建). 절 이름을 임정사(林井寺)라 하였다.
광유성인은 인도 스님으로 우리나라에 불교를 최초로 전한 스님일 가능성이 있으며
이에 관련된 설화는 세종대왕이 지었다는 「월인천강지곡」의 내용과 같다.
643년(선덕여왕 12년) 원효(元曉)스님이 중창하고 기림사로 개칭하였다.
682년 신문왕이 감포 앞바다에서 동해의 용왕으로부터 만파식적과 옥대를 선물로
받아 궁으로 귀환하는 도중 기림사 서쪽에서 점심을 먹었던 기록과 용연폭포에서
용을 날려 보낸 기록이 삼국유사에 나온다.
三國遺事 紀異 第二
萬波息笛
...<중략>...
龍曰, 比如一手拍之無聲, 二手拍則有聲, 此竹之爲物, 合之然後有聲,
聖王以聲理天下之瑞也, 王取此竹, 作笛吹之, 天下和平,...<중략>
王宿感恩寺, 十七日, 到祇林寺西溪邊, 留駕晝饍, 太子理恭(卽孝昭大王),
守闕, 聞此事, 走馬來賀, 徐察奏曰, 此玉帶諸窠, 皆眞龍也, 王曰,
汝何以知之, 太子曰, 摘一窠沈水示之, 乃摘左邊第二窠沈溪, 卽成龍上天,
其地成淵, 因號龍淵...<중략>
1258년 (고종 45년) 주지 각유(覺猷) 대선사에 관한 기록이 삼국유사에 나온다.
창건설화
먼 옛날 범마라국 임정사에 오십 년간 수도하면서 천안통과 숙명통 그리고 타심통을
얻은 도인 광유성인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스님은 제자들을 모아놓고 자신의
전생이야기를 했으니 "내가 전생의 부처님의 제자로 공부를 하고 있을 때에, 파사익 왕의
세 시녀는 늘 꿀물과 우유로 부처님과 제자들을 공양 올렸다.
제자들 중에는 인물이 출중한 스님이 한 분 계셨는데, 시녀들은 부처님 다음으로 공양하다가
그만 공경이 사랑으로 변해 시기하고 질투하게 되었다. 스님은 여인들의 유혹을
제도하려 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산 속으로 들어 가 버리셨다.
그러나 스님은 아름답고 상냥한 세 여인을 잊지 못해 번민하다가 결국 도를 이루지 못한 채
입적하고 말았다. 나는 그때 그 스님의 도반으로서 먼저 도를 이루는 사람이 제도키로 약속을
했었다.내 이제 금생에 인연이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도반인 그 스님과 세 시녀를 제도하려 하니
나와 숙세로부터 인연이 있는 이들을 누가 이곳으로 안내하겠느냐?"
그때 승열 스님이 말했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스승이시여!"
"오 장하구나, 너는 아라한과를 얻었으니 능히 할 수 있으리라.
그 스님은 금생의'수다라'라는 대국의 왕이고 왕후와 후궁은 전생의 시녀이니라."
"그럼 한 명의 시녀는 어디에 있습니까?"
"이제 곧 왕의 아들로 태어나 스스로 여기로 올 것이니라.
수다라 왕국은 아직도 불법이 전해지지 않았으므로 세명을 한번에 모셔오기 어려울 테니
먼저 후궁인 월해부인을 인도토록 하여라"
승열 스님이 수다라국에 도착했을 때 ,왕은 마침 500궁녀를 데리고 강가를 거닐다가
숲속에서 잠이 들었다. 산책을 즐기던 궁녀들은 좌선에 든 스님을 발견하고는 이상한 모습에
의아한 눈길을 주고받다가 가까이 다가와서 물었다.
"어디서 오신 누구신지요?"
"나는 범마라국 임정사에서 온 승려입니다."
스님은 궁녀에게 스님은 무엇을 하는 사람이며 불법이 무엇인지를 설명해주었다.
이때 잠에서 깨어 이를 목격한 왕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소리쳤다.
"너는 누군데 나의 궁녀를 꼬이느냐? "
왕은 승렬 스님의 목에 칼을 대고는 인생의 참 진리가 무언지 알려주겠다며 불개미 집을
헐어서 스님의 몸에 풀어놓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불개미는 스님의 몸을 물지 않고 모두 흩어져버렸다.
이것을 본 왕은 크게 놀라면서 예사로운 분이 아닌 줄 알고 스님을 궁중으로 정중히 모셨다.
승열 스님은 1년간 궁중에 살면서 왕과 왕비 그리고 후궁들을 교화하였으며 수다라 왕국의
최초의 절 범승사를 세웠다. 그리고는 며칠 후 승열 스님은 왕에게 말했다.
"이제 그만 임정사로 돌아가야겠습니다."
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스님은 떠날 차비를 하면서 월해부인을 모시러 온 뜻을 밝혔다.
왕은 보내기 아쉬웠으나 월해부인이 선뜻 나서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 후 월해부인은 광유성인의 제자가 되어 물긷고 차를 다리며 열심히 정진하였다.
어느 날 광유스님은 승열 비구에게 다시 수다라국에 가서 왕과 왕비를 모셔오도록했다.
승열 스님이 수다라국에 도착하니 왕과 왕비는 물론 지난번에 귀의한 십여명의 제자와
신도 및 백성들까지 영접하였다.
"월해부인은 대왕이 오셔서 함께 공부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왕이 도착하기도
전에 도를 얻고 사바의 인연을 마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왕은
기가 막힌 듯 슬피 탄식했다.
"오, 참으로 세상은 허망하군요. 대왕이시여! 이 세상에서 참으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선지식이시여, 저를 깨우쳐 주소서!"
"그것은 일체를 소유할 수도 버릴 수도 없는 자신을 아는 일이지요."
승열스님은 자상한 설법과 함께 왕의 전생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왕은 참회하면서 왕비인
원앙부인과 함께 광유성인에게 가서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왕위를 태자에게 물려 준 뒤
임정사로 향해 길을 떠났다.
만삭의 몸으로 길을 떠난 원앙부인은 중도에서 지칠대로 지쳐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부인 힘을 내구려. 나와 함께 도를 이루자고 하지 않았소."
"대왕이시여! 저는 전생에 숙업인 듯 하옵니다. 저를 여기서 종으로 팔아 그 대가를
임정사 부처님께 올려 다음 생에 다시 공부하도록 빌어주십시오. 저의 마지막 소원입니다"
왕은 눈물을 흘리며 죽림국의 한 부자에게 만삭이 된 부인을 팔았다.
"대왕이시여! 아기를 나으면 이름을 무엇이라고 지을까요?"
"아들이거든 안락국이라 하고 딸을 나으면 아량이라 하여주오."
가슴이 터질 듯 아프고 슬픈 마음으로 부인과 작별한 왕은 광유성인의 제자가 되어
차 시봉을 하면서 세속 일을 잊고 정진에 몰두하였다. 그렇게 7년이 되던 어느 날,
임정사로 한 남자아이가 아버지를 찾아왔다. 그는 원앙부인이 낳은 태자 안락국이었으니
바로 전생의 한 시녀이기도 하다. 반갑게 상봉한 부자는 공부하며 함께 지냈다.
수다라 왕이 도를 얻어 열반에 들자 광유스님이 안락국에게 전생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안락국아! 너는 인연 있는 곳을 찿아 가서 중생을 교화하고 제도하거라. 그 인연지는
여기서 이백오십만리 떨어진 해동국으로 그곳에는 문수보살이 부처님의 부촉을 받고
계신 곳이다. 가서는 거북이가 물 마시는 형상을 하고 있는 산을 찾거라.
동해바다의 기운을 들여 마시는 용이 사는 연못이 있고, 탑의 형상을 갖춘 남쪽 돌산에는
'옥정'이라는 우물이 있으니 그 물을 먹으면서 수도하거라. 북쪽에는 설산을 닮은 돌 빛이
흰 산이 있으니 그 산 굴 속에 부처님을 조성하여 모시거라."
그리하여 해동 계림국에 도착한 안락국은 명당을 찾아 조그만 암자를 세워,
이름을 칭하되 '임정사'라 하였다. 절이 창건된지 백오십년 후 신라의 '원효대사'가 절을 확장하고 ,
이름을 부처님 당시의 최초의 절인 '기원정사'의 이름을 따서 현재의 '기림사'라 개명하였다.
-대한불교조계종 기림사 카페에서 창건설화와 내용을 인용함-
대적광전의 주련
世尊坐道場(세존께서는 도량에 앉아 계시고)
淸淨大光明(청정한 대 광명을 놓으시네)
比如千日出(비교하건데 마치 천개의 해가 뜨는 것 같이)
照曜大千界(온세상을 밝게 비추네)
諸法歸本來(모든 법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니)
常自麻滅相(항상 스스로 삼을 멸해야 하는 것을)
千手千眼十一面觀音殿 (40개의 손과 눈에 25수를 곱하면 1000개가 된다)
좌.우 20개의 손과 손마다 눈이 하나씩 있어 40개의 손과 눈과 二十五有 思想
즉 25가지 因果應報를 나타내며 40개의 손에는 "해,달,乾坤帶,輪寶,法螺,寶傘,
戟,鐵,劍,바리,연꽃,여의주 등" 法器와 兵器,寶石을 쥐고 있다.
삼천불전 앞마당 盤松 아래서 쉬고 있는 안사람
三千佛殿,과거,현재,미래불 각 천불전
祇林寺 乾漆觀音菩薩坐像(보물 제415호)
건칠불이란 나무로 골격을 만든 뒤 삼베를 감고 그 위에 진흙을 바른 다음 속을 빼낸
불상을 말하는데, 우리나라에는 남아 있는 예가 매우 적어 이 불상의 가치가 더욱 크다.
타래머리 위에 보관을 따로 만들어 올렸으며 관 표면에는 덩클무늬가 화려하게 새겨져 있다.
얼굴은 둥굴고 풍만하여 눈,코,입 등이 단아하게 묘사되어 보살상의 특징있는 얼굴을
만들어 내고 있다.양 어깨에는 天衣를 걸치고 있으며 목에는 세가닥의 장식이 달린
목걸이를 하고 있다.가슴 부분에 있는 독특한 띠매듭은 조선시대에 나무로 만든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왼손은 대좌를 짚고 다리는 대좌 아래에 내린 반가좌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이런 자세로 보아 관음보살을 형상화한 것으로 짐작된다.전반적으로 얼굴 모습이나
체구는 비만한 편이나 손과 발이 작게 만들어져 비례감이 떨어진다.
보살상은 대좌에 弘治14(연산군 7년,1501년)에 만들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유래가 드문
건칠불이라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로자나불 腹藏典籍(보물 제959호)
이 전적은 기림사 대적광전 본존불인 비로자나불 복장내 소장되어 있던 불경이다.
복장 전적은 54권 71책으로 고려 말기에서 조선조에 걸친 전적으로 연대가 고려시대
목판본과 사경을 비롯해서 17세기 목판본에 이르기까지 간행 시기가 7세기에 걸쳐 있고
권자본,첩장본,호접장본,포배장본,선장본 등 책의 형태가 다양하게 갖추어져 있다.
1986.9.6 새벽 절도범이 비노자나불상의 뒷 부분을 파괴하여 복장 유물을 꺼내어
도주하는 것을 발견하여 유물을 되찾게 되었다.
상수도 보호구역이라는 푯말에 출입금지 표시를 하여 들어 갈 수가 없었다
정말 맑고 깨끗한 계곡물이다
감은사
감은사(感恩寺)란 말 그대로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이다. 31대 신문왕이 선왕인
문무왕의 은혜에 감사드리기 위해 지은 이름이다.
감은사는 원래 삼한을 통일한 제 30대 문무왕이 불력으로 왜를 침략을 막기 위해
지은 절이다. 당의 도움으로 백제를 멸하고(660년) 한때 동아시아 최강국이었던
고구려가 내분과 당의 공격으로 멸망을 하자(668년) 한반도에도 평화가 찿아 오는 듯 했다.
하지만 당은 고구려 땅에는 안동도호부를 백제 땅에는 웅진도호부를 두고 심지어
신라 땅에도 계림도호부를 두어 한반도 전체를 삼키려는 야욕을 보이자 신라는 사력을 다해
당과의 전쟁을 통해 싸워 나가다 매소성과 기벌포에서 대승을 거두어 삼한 통일을 이룩합니다.
그러나 백제는 멸망 후에도 끈질긴 부흥운동을 운동을 전개했는데 왜의 원군을 받기까지 합니다.
663년 백제의 부흥운동이 막을 내리고 668년 삼한을 평정하였지만 신라는 십수년간의
통일 전쟁으로 땅은 피폐해지고 국력은 소진할대로 소진하였는데 문무왕은 혼신의 힘을
국력을 집결하여 감은사를 짓기 시작합니다. 700년간에 걸쳐 사활을 걸고 싸운던 백제와
고구려가 역사의 뒤안 길로 사라져 버렸지만 바다건너에는 아직 왜가 도사리고 있었기 떄문입니다.
신라 건국 초기 부터 왜의 공격과 약탈이 끊이지 않았기에 불력을 빌어 왜침을 막고자 하는
일념에서 였습니다. 불국사가 완성에 25년 그외의 절들이 약 10~20여년의 세월이 걸렸던 것을
감안하면 10년이란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은 신라의 국력을 총집결시켜 절을 완성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문무왕때 짓기 시작한 감은사의 원래 이름은 진국사(鎭國寺)였지만 문무왕이 완공울 보지 못하고
죽자 아들인 신문왕이 선왕의 장례식 날짜에 맞추어 완공을 시키고 절 이름을 감은사로 고쳤습니다.
평소 문무왕은 지의법사(智義法師)에게 "내가 죽은 뒤에는 원컨데 나라를 수호하는 큰용이 되어
불교를 떠받들고 나라를 보위하리라" 라고 말했는데 문무왕은 죽기 직전 유언을 남깁니다.
그 내용은 정리하면
"죽거든 무덤을 만들지 말고 화장하여 장래를 간소히 치루어라. 큰 무덤을 만들어 보았자
세월이 흐르면 무덤에 풀이 우거져 사슴이 풀을 뜯고 토끼가 무덤에 굴을 파고 지다던 목동이
무덤에 올라 피리를 불터니 부질없는 짓이다. 태자(신문왕)은 내가 죽거든 10일 후 내 관앞에서
왕의 즉위식을 올리고 상복을 벗어 버리거라. 또 백성들을 위해 과도한 세금을 거두지 말것이며...."
-chosun.com 박정호 블로그뉴스에서 인용-
강당터 한켠에는 느티나무가 한그루있는데 마을의 당나무(堂木)입니다.
慶州感恩寺址
사적 제31호
금당의 기단 아래에 동향한 구멍을 두어 이곳으로 해룡(海龍)이 된 문무왕이 들어와
서리도록 했고, 또 유서에 따라 골(骨)을 매장한 곳이 절의 앞바다에 있는 대왕암(大王岩)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절의 이름은 본래 나라를 지킨다는 의미에서 진국사(鎭國寺)였으나
신문왕이 부왕의 호국충정에 감사해 감은사(感恩寺)로 고쳐 불렀다.
1960년과 1979~80년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이탑식가람(二塔式伽藍)배치로 남북보다
동서 회랑의 길이가 길며, 양 탑의 중앙부 뒷면에 앞면 5칸, 옆면 3칸의 금당터가 확인되었다.
또한 금당의 바닥구조가 H자형의 받침석과 보를 돌다리처럼 만들고 그위에 직사각형의
석재유구(石材遺構)를 동서방향으로 깔아 마치 우물마루 모양으로 된 것은 〈삼국유사〉의
기록과 일치하는 것으로 매우 흥미롭다. 원래 앞면 8칸, 옆면 4칸이었던 북쪽 강당은 후대에
앞면 5칸, 옆면 4칸으로 고쳐 지은 것도 밝혀졌다.
李淑姬 글
三國遺事 紀異 第二
萬波 息笛
第三十一, 神文大王, 諱政明, 金氏, 開耀元年辛巳七月七日卽位, 爲聖考文武大王,
創感恩寺於東海邊(寺中記云, 文武王欲鎭倭兵, 故始創此寺, 未畢而崩, 爲海龍,
其子神文立, 開耀二年畢排, 金堂砌下, 東向開一穴, 乃龍之入寺, 旋繞之備,
蓋遺詔之葬骨處, 名大王岩, 寺名感恩寺, 後見龍現形處, 名利見臺)
석탑과 더불어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는데 지하구조를 만들고 위에 장대석으로 덥은 후
그 귀에 초석을 놓고 금당을 세웠다.
동탑의 모습
1959년 그리고 1996년 서, 동탑을 각각 해체수리복원 당시 서탑 사리갖춤에서는 사리 1과
동탑 사리갖춤에서는 사리 59과가 발견되었는데 이에 근거해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는
서탑의 사리1과는 불사리(진신사리)이고 동탑의 사리59과는 문무왕의 유해라도 견해를
조심스럽게 내놓았다
수학여행온 초등학교 5학년생들이 감은사지로 올라가는 행렬
문무대왕릉의 원경
利見臺에서 바라 본 대왕암 문무대왕릉
대왕암앞 봉길해수욕장
감포어항에서 수평선너머 고기잡이배들이 야간작업 준비중이다
감포앞바다의 일출
제3편 기림사,감은사지,문무대왕릉,이견대를 끝마칩니다.
마지막 제4편으로 괘릉,영지,대릉원으로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