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우리 집안에는 중2의 친손자와 초등 4학년의 손녀, 중1의 외손자 세 명의 손자가 있다. 딸과 아들 내외는 모두 서울에서 살지만, 우리 내외는 내가 퇴직을 하면서부터 이천에서 떨어져 살고 있다.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기 싫다는 이유다. 이천을 택한 이유는 자식들의 집과 너무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곳이 첫째 조건이었다. 그러나 떨어져 사는 까닭에 손자들이 커갈수록 멀어져 가는 느낌이 든다. 손자들은 학교와 학원,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먼 나라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손자들의 관심을 끄는 방법에는 용돈을 후하게 주든지 아니면 먹고 싶어 하는 것을 푸짐하게 사주는 방법이 있다. 손자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아들 집에 가던지 또는 할아버지 집에 와서 만날 때마다 5만 원씩 용돈을 주기 시작했다. 나만 주는 것이 아니고 내자도 가끔 용돈을 쥐여준다. 또 아버지와 엄마가 잘 안 사주는 갈비구이와 중국음식이나, 손자들이 먹고 싶은 것을 사주면 무척 좋아한다. 용돈 받는 재미와 먹는 맛으로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보고 싶도록 만드는 것이다.
손자들이 중학생이 되면서 공부와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것을 무엇이든지 가르쳐 주고 싶은데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핸드폰을 이용한 문자메시지나 카카오 톡을 이용하여 대화방을 여는 것이다. 문자메시지는 원고지 한 장 이내의 짧은 길이로, 2주일에 한 번 정도 주고받도록 한다. 자주 하면 잔소리가 되고, 길게 하면 싫증을 느낀다. 그동안 몇 번 문자메시지를 보냈더니 중2 친손자의 응답은 짧다. 예를 들면, "옙", "잘 기억하겠습니다."라고 응답한다. 외손자는 응답이 없다. 공갈을 한번 쳐봐야겠다. "너, 용돈 안 받을래?" 제 엄마의 말에 의하면 친구들과 카카오 톡으로 대화하고 게임에 몰두하는데 할아버지 문자메시지는 볼 시간이 없단다. 초등 4학년 손녀는 응답이 없다. 전화로 내 문자메시지를 보았느냐는 물음에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라는 반응이다. 외손자와 손녀와 대화방은 당분간 뜸을 좀 들여야 하겠다.
문제는 어떤 내용을 손자들과 대화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조시대처럼 <천자문(千字文)>, <동몽선습(童蒙先習)>, <소학(小學>)이나 <명심보감(明心寶鑑)>을 늘어놓을 수도 없다. 솔직히 말해 나도 못 배운 것을 말할 엄두가 안 난다. 짧은 문자메시지로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도 문제지만, 이 시대에 그러한 도덕 강의는 별로 재미가 없을 것 같다. 그래서 할아버지와 손자가 공통으로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이야깃거리를 찾아서 대화에 관심을 갖도록 해볼 작정이다. 말로 하기 어려운 내용을 글로서는 쉽게 대화할 수 있을 것이다.
손자들과의 이야깃거리로 우선 일본의 한학자 야스오카 마사히로 (安岡正篤)가 말하는 육중관(六中觀)을 첫 번 째 화두로 선택했다. 어린 나이의 손자들에게 무리한 화두지만, 쉬운 가르침은 없다. 육중관은 야스오카 마사히로의 강연집을 번역한 <운명은 바꿀 수 있다>는 책에서 소개하는 내용의 하나이다. 이 책에는 배울만한 내용이 많다. 예를 들면, "운명의 '명(命)'은 우주의 절대적인 작용이지만, '운(運)'은 움직임을 뜻한다. 운명은 본인 스스로의 깨달음, 자유의지와 노력에 의해 쉼 없이 움직이는 '운'을 창조하고 변화시킬 수 있다"라고 말한다. 이런 내용을 화두로 손자와의 대화방에서는 '요사이 하고 싶은 것이 있느냐?' 또는 '커서 무엇이 되고 싶으냐?' 하는 식으로 시작해서, '하고 싶은 일이라든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든지 하는 희망사항은 스스로 노력함으로써 달성할 수 있다'라는 식으로 대화의 문을 여는 것이다.
내가 일생 동안 읽었던 책 중에서 가장 인상이 깊었던 책이 한 권 있다.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이다. 도(道)와 덕(德)을 설명하는 81장, 5314자 상하권으로 된 작은 책이다. 도덕경은 인간의 본질적인 성품인 도덕에 관하여 해설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차원 높은 형이상학적 철학서이다. 중국의 철학자 공자(孔子)는 노자를 보고서 "그는 마치 용(龍)과 같은 존재이다 "라고 했으며,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에서 "노자는 하지 않는 것(無爲)으로써 저절로 교화되게 하고, 맑고 고요하게 있으면서 저절로 올바르게 되도록 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도덕경은 깊은 사색(思索)을 요구하는 책이다.
내 책장에는 주석(註釋)을 단 사람이 각기 다른 여러 권의 도덕경이 있다. 보이는 대로 사모은 결과이다. 도덕경은 중학생들이 이해하기는 어려운 내용이지만, 설명을 쉽게 해주면 알아들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런 책이 있다는 것을 알기만 해도 성공이다.
손자들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찾다가 책장에서 골라낸 책이 <채근담(菜根譚)>이다. 채근담은 전집(前集) 225편, 후집(後集) 134편으로 된 작은 책이다. 무 뿌리를 씹는 맛과 같은 이야기라는 머리말에 솔깃하여 순식간에 끝장을 보고 말았던 기억이 있다. 누구나 겪어서 알고 있는 일상생활의 평범한 사실을 문제로 삼아, 일찍이 깨닫지 못했던 인생의 참된 뜻과 가장 지혜로운 삶의 방식을 제시해주는 책이다. 그러나 채근담에 담겨있는 사상이 소극적이고 부정적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인간성의 확립과 도덕적인 자기완성을 통해 진취적인 삶의 기틀이 되는 책이기도 하다. 손자들과 이야깃거리의 단서를 잡은 것이다.
또한 소일거리로 시작한 나의 일상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수필로 쓰기 시작한 연작의 태그(tag)를 '생활의 발견'이라고 정했다. 우연히 떠오른 태그였으나, 그것은 옛날에 읽은 적이 있는 중국의 유명한 작가이면서 문화비평가인 린위탕(林語堂)의 <생활의 발견>과 같은 제목이었던 것이다. (사실 <생활의 발견>의 영어 원서 제목은 <The Importance of Living>으로 '생활의 중요성'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생각이다.) 그 책에 대한 내용은 거의 생각나지 않는다. 교보 인터넷서점에 검색하고 즉시 주문하여 지금 열심히 읽고 있다. 이 책의 내용도 손자들과의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라는 기대가 크다.
손자들과 대화할 이야깃거리를 찾다가 <운명은 바꿀 수 있다>, <도덕경>, <채근담>과 <생활의 발견>과 같은 책이 숙제로 남았다. 이러한 책을 기본으로 현실 문제를 섞어 가면 대화방의 소재는 충분할 것이다. 앞으로 손자들과의 대화방이 어떻게 발전할 것인지 나도 확신하지 못한다. 그러나 서로 간에 대화의 상대가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손자들에게 가르쳐주려면 내가 먼저 어느 정도 내용을 알아야 한다. 네 권의 책이 모두 중국과 일본의 고전에 속하는 책들이다. 읽어 본 책도 있지만, 이런 책을 내가 먼저 이해하고 손자들의 수준에 맞는 이야깃거리로 재창조해야 하는 과정이 남았다. 새로 처음부터 다시 공부를 해야겠다. 손자들 가르치려다가 내가 배우게 생겼다.
이 글의 제목 '온고이지신'이라는 말은 중국 공자(孔子)의 말씀으로, <논어(論語)>에서 "온고이지신 가이위사의(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라는 말에서 취한 것이다. “옛것(고전)을 충분히 익혀 새로운 것을 알면, 스승이 될 만하다."라는 뜻이다. 할아버지는 손자의 스승이 될 수 있을까 걱정이다. 나이가 들어가니 걱정거리만 늘어난다. 사서 하는 고생이지만, 할아버지가 된 업보(業報) 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