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는 1대 박혁거세가 나라를 열어 56대 경순왕까지 천년사직을 유지했다. 28대 진덕여왕까지는 성골 왕이 다스렸으며 29대 무열왕부터 36대 혜공왕까지는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정치가 이루어 졌던 신라 중대이고 하대에 접어드는 37대 선덕왕부터는 왕족들이 추천하거나 정적끼리 시해하면서 왕위다툼이 치열해졌다. 780년 김지정이 난을 일으키자 선덕왕이 된 감양상과 같이 난을 평정한 뒤 상대등이 된 김 경신이 있다. 선덕왕 김양상은 무열왕계인 혜공왕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 이때 선덕왕을 도운 왕족이 김경신(38대 원성왕)으로 선덕왕이 재위할 동안 상대등 이란 높은 벼슬을 차지했다. 선덕왕은 왕실 친족집단인 왕자와 근친 왕족들을 중심으로 상대등 병부령 재상등을 임명했다. 선덕왕은 본인도 혜공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자신을 내물왕10세손으로 천명하며 왕위계승을 정당화 했다. 5년간의 짧은 재위를 끝내고 후사없이 죽자 왕족들은 김주원(무열왕계)을 추천했다. 그러나 실제 왕위에 오른 이는 김경신이다. 김경신은 내물왕의 12대손이라 하며 선덕왕처럼 입지가 약한 자신의 정당성을 합리화했다. 이후의 왕위는 원성왕의 자손들이 이어가게 되었고 학계에서는 원성왕대부터 신라하대로 신라시대를 구분하는 것이다.
<삼국유사>에는 김경신의 꿈이야기가 나온다. 경신이 꿈을 꾸었는데 머리에 썼던 두건을 벗고 12현금을 메고 천관사우물 속으로 들어갔다. 해몽을 해보니 두건을 벗는 것은 관직을 쫒겨날 이고, 12현금을 집은 것은 칼을 조짐이요 우물에 들어간 은 옥에 갇힌다는 뜻이라 했다. 이말을 들은 경신은 몸조심을 하며 움츠려 지냈다. 이찬 여삼이 찾아와 그 꿈을 다르게 해석했다. 두건을 벗는다는 것은 윗자리에 사람이 없다는 뜻이고 흰갓을 썼다는 것은 면류관을 쓸 조짐이요 12현금을 들었다는 것은 12대 손자에게 왕위를 전한다는 뜻이며 우물에 든다는 것은 대궐에 들어갈 조짐이라 했다. 한꿈으로 두가지 해석을 들은 김경신은 과연 어떤 해몽을 택했을까 . 김씨의 첫 임금은 17대 내물마립간인데 경신은 내물왕의 12대손이 된다. 삼국을 통일한 무열 문무왕에 이어 통일신라의 문화를 화려하게 꽃피운 성덕 경덕의 시대가 자났는데 바야흐로 그의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선덕왕이 죽자 왕족들은 김주원(金周元)을 새 왕으로 추대했다. 김주원은 각간시중과 병부령을 겸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주원의 집은 서울 북쪽 20리에 있어 큰비가 내려 알천(현재의 북천)의 물이 불어서 빨리 건너오지 못했다. 그사이 경신은 재빨리 왕족들을 재압하고 왕위에 올랐다. 이분이 38대 원성왕이다. 김주원은 무열왕계로 당시 김경신보다 서열이 높았지만 하늘의 폭우가 그의 재위를 방해했다. 원성왕은 김주원을 견재도 하고 곁에 두기도 해 보았다. 명주( 현재의 강릉)에 식읍과 백성을 두어 군왕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명주군왕의 봉함을 받게 된 김주원의 후손들이 강릉을 본관으로 삼아 신라김씨 중 제일 먼저 분적한 큰 집으로 강릉김씨를 이루었다 .
원성왕은 5묘를 정했는데 시조대왕(미추왕), 태종무열대왕.,문무대왕 그의 조부를 흥평대왕 ,그의 부친을 명덕대왕으로 승격시켜 재를 지냈다. 독서삼품과를 설치해 관리를 등용했고 790년에는 벽골제를 증축하고 북국인 발해와 통교하였다. 근친 왕족들의 요직장악으로 그 뒤 왕위를 이었으니 하대 원성왕계로 불린다. 792년 원성왕은 당에 미녀 김정란을 바쳤다 하는데 그녀는 국색으로 몸에서 향기가 난다는 역사서<삼국사기>에 기록된 유일한 미녀이다. 원성왕은 798년에 죽고 괘릉에 장사지냈다 이후의 신라왕실은 왕위다툼으로 정치가 어지러워지고 지방에서 호족들의 반란이 끊임없이 일어나며 쇠약한 왕실을 유지하였다. 김주원의 아들은 아버지의 일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켰는데 822년 김헌창의 난이 그것이다. 왕위계승자인 아버지 김주원이 왕위를 도둑맞았다고 생각한 김헌창은 결국 헌덕왕때 반란을 일으켰다. 헌창의 난에는 신라 9주 5소경 중 4주 3소경이 합류했다. 나라이름을 장안국으로 하고 연호를 경운으로 하여 스스로 왕이 된 김헌창은 결국 웅진성에서 패하여 자결했다. 용케 살아남은 헌창의 아들 범문이 잔당을 모아 825년에 북한산주를 공격했으나 그도 실패하여 처형당하였다. 장보고의 도움을 받아 왕위를 찬탈한 왕이 있는가하면 장보고를 암살시킨 왕도 있었다. 당나귀귀로 유명한 경문왕과 그 자녀들이 중국에 유학한 승려들에 힘입어 불법으로 나라를 다시 일으키려했고 최치원 등 유학파들인 신진사류가 시무10조 등 을 건의하며 안간힘을 썼으나 이미 기울어진 신라는 56대 경순왕이 왕건의 고려에 나라를 바치면서 종지부를 찍는다.
원성왕(元聖王)은 으뜸성인이라는 이름값을 제대로 했는가? 어찌보면 신라하대를 시작했지만 신라를 말아먹은 시초를 제공한 왕이 아니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무덤인 괘릉은 신라 능묘의 걸작품이라 한다. 백제의 무령왕릉이 찬란한 백제문화를 빛낸 유물의 보고라면 원성왕릉인 괘릉은 신라능묘의 모습을 가장 멋지게 표현하고 있는 대표격이라 할 수있다. http://cafe.daum.net/dongrai100/RjVw/1459?q=%EC%8B%A0%EB%9D%BC%EB%8A%94%EB%82%B4%EB%AC%BC%EC%99%95%ED%9B%84%EC%86%90 |
첫댓글 길다고 느껴졌든 설연휴
짧게만 느껴진 아쉬움 남기고
어제가 끝으로 즐겁고
행복했든 명절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구정으로 맞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대망의 2020년
희망하시는 모든일 복주머니
가득 담으시는 한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