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네 사람이 카페에서 다람살라 사원 쪽으로 내려오니 삼거리가 나타났다. 로자씨가 말하기를 조금 다른 길을 따라 3km 정도 걸어가면 히말라야 산맥에 가장 가까운 카페가 있다고 한다. 왕복 6km이면 천천히 걸어도 2시간이면 충분할 것이다. 우리는 코스를 바꾸어 히말라야 산맥 쪽으로 카페까지 갔다 오자고 결정했다.
날씨는 초봄 날씨로 따뜻했다. 봄바람이 살살 불고 기온은 아주 적당했다. 기분이 상쾌했다. 아직 잎이 우거지지는 않았지만 땅에서 돋아나는 새싹이 보였다, 나무 가지에서는 새잎이 조금씩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숲속에서는 이름 모를 새 소리가 들렸다. 다람살라에 봄이 오는 것이 느껴졌다. 여기서도 유채꽃은 빨리 피나 보다. 노란 유채꽃이 피기 시작한 밭이 보였다.
<다람살라의 유채꽃>
로자씨는 델리에서 대안학교 교장이었지만 정확히 말하면 기독교 선교사라고 말할 수 있다. 로자씨는 인도와 한국을 연결해주는 종교적 교량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병산이 말하기를, “선교사는 두 종교 사이에 서 있는 매개자이다. 현대 사회는 전문가도 필요하지만 매개자가 각광 받는 시대이다. 로자씨야말로 현대가 요구하는 인재이다. 앞으로 큰 일을 해낼 것 같다.” 내가 옆에서 들어도 기분이 좋아지는 발언이었다.
산길을 따라 한참 가자 한 무리의 인도 청년들이 떠들썩하게 모여 있다. 로자씨가 물어보더니 인도 남쪽에서 수련회를 온 대학생들이란다. 병산이 무리에게 다가가 탈핵 실크로드 순례 유인물을 나눠주었다. 그리고서는 영어로 큰 소리로 설명을 한다. 유창하지는 않아도 인도 대학생들과 소통하기에는 충분한 영어를 구사했다. 대학생들은 서울에서 로마까지 9000km를 걸어간다는 대목에서 감동을 받았다. 모두 놀라며 탄성이 흘러나왔다. 병산과 대학생들이 함께 단체 사진을 찍었다.
<인도 청년들과 병산>
계속 산길을 따라 올라가니 드디어 고개가 나타났다. 고개에 올라서니 눈 덮인 히말라야 산맥이 보였다. 다람살라에서보다는 가까이에 보였지만 겨우 3km를 걸어왔기 때문에 히말라야 산맥은 여전히 멀었다. 왼쪽 옆으로 난 등산길에는 적은 양이지만 눈이 쌓여 있었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 히말라야의 눈을 만져보았다. 눈은 평창의 눈이나 히말라야의 눈이나 똑같았다.
<히말라야 산맥을 바라보는 언덕에서>
사진을 찍고 나서 우리는 히말라야산맥에 가장 가까운 건물로 갔다. 숙박과 식당과 카페를 겸하는 2층짜리 건물이었다. 식탁과 의자를 내어놓은 데크로 가서 앉았다. 우리는 로자씨의 추천을 받아서 인도 음식을 주문했다. 하얀 히말라야 산맥을 바라보면서 데크에서 식사를 했다. 식사가 끝나고 차를 주문하여 마셨다. 병산이 분위기가 좋으니 판소리를 한 곡 해보라고 나에게 권한다. 나도 분위기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배낭에서 부채를 꺼내어 춘향가에 나오는 ‘갈까부다’를 불렀다. 판소리는 아니리와 소리로 구성된다. 원래의 짧은 아니리 앞에 내가 창작한 아니리를 추가하고서 갈까부다를 불렀다. 내가 히말라야 산맥을 바라보면서 부른 갈까부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창작 아니리)
판소리 춘향가에서 춘향이가 이도령을 그리워하는 대목,
‘갈까부다’를 한번 불러보겠습니다.
옥에 갇힌 춘향이가 이도령을 그리워하면서 부르는 슬픈 노래입니다.
그런데, 만해 한용운 스님의 글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님만 님이 아니라, 그리워하는 것은 다 님이다.
장미화의 님이 봄비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그렇습니다. 누구에게나 다 님이 있습니다.
이원영 교수님의 님은 무엇일까요?
이원영 교수님의 님은 ‘핵없는 세상’이라고 생각됩니다.
후손에게 물려줄 핵 없는 안전한 지구가 이원영 교수의 님입니다.
춘향이가 이도령을 그리워하는 심정보다
이원영 교수가 핵 없는 세상을 그리워하는 심정이
더 강렬하고 더 애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춘향이의 심정을 생각하면서 이원영 교수의 심정을 생각하면서
갈까부다를 한번 불러 보겠습니다.
(아니리)
그 때여 춘향이는 군로가 오는지 사령이 오는지 아무런 줄을 모르고,
도련님 생각이 간절허여
(늦은 중모리)
갈까부다 갈까부다 임 따라서 갈까부다 천리라도 따라가고 만리라도 갈까부다
바람도 쉬어 넘고 구름도 쉬어 넘는 수지니 날지니 해동청 보라매
다 쉬어 넘는 동설령 고개라도 임 따라 갈까부다
하늘의 직녀성은 은하수가 막혔어도 일년 한번 보련마는
우리 님 계신 곳은 무슨 물이 막혔길래 이다지도 못보는고
이제라도 어서 죽어 삼월 동풍 연자(燕子) 되어 임 계신 처마 끝에 집을 짓고 노니다가
밤중이면 임을 만나 만단정회를 허고 지고
뉘년의 꼬염 듣고 영영 이별이 되었는가?
어쩔거나 어쩔거나 아이고 이 일을 어쩔거나 아무도 모르게 설리 운다.
소리가 끝나고 로자씨를 바라보니 눈물을 닦고 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내가 판소리를 2011년 4월에 배우기 시작했는데, 내 목소리는 맑은 음성이어서 텁텁한 막걸리 소리가 어울리는 판소리에는 잘 맞지 않는다. 나는 수원 광교산 아래 고기리에 있는 ‘소리의 향기’라는 소리 연구소에서 송선 김유정 명창에게서 판소리를 배웠다. 1주일에 한번 가서 1시간씩 한 2년 배웠는데 지금까지 잘 한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다. 요즘에는 평창에 살기 때문에 선생님께 가지는 못하고 소리를 녹음하여 독학으로 연습하고 있다. 평창 집은 시골에 있는 단독주택이어서 북장단까지 함께 연습하고 있는데, 북을 곁들이니 판소리가 더 재미있다.
눈덮힌 히말라야 산맥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5000km를 온갖 고생을 하면서 걸어온 병산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옥에 갇힌 춘향이를 생각하면서 갈까부다를 불렀는데, 나도 모르게 감정이 실렸나 보다. 겉보기에는 씩씩한 로자씨가 인도에 살면서 그동안 말 못할 고생이 많았나 보다. 조국을 떠나 인도사람 틈에 끼어 사는 타향살이가 만만치는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나의 판소리를 듣고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나타났다는 것은 내게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다람살라로 되돌아오는 산책길은 내리막이어서 수월했다. 내려오면서 보니 아래 쪽에 달라이 라마 사원 건물이 보였다. 사원은 작은 언덕의 정상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산길을 내려왔다. 상상력이 풍부한 병산이 의외의 발언을 했다. 병산은 “예수가 이 시대에 다시 태어난다면 탈핵운동에 앞장섰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병산의 말에 동의를 하면서 제안했다. 그렇다면 4대 성인을 모두 평가해 보자. 소크라테스가 이 시대에 태어난다면 탈핵운동을 했을까? “그렇다”로 결론 났다. 석가가 이 시대에 다시 태어난다면 탈핵운동을 했을까? “그렇다”로 결론 났다. 공자가 이 시대에 다시 태어난다면 탈핵운동을 했을까? 의견이 엇갈렸다. 우리는 “글쎄요”로 결론냈다.
네 사람은 3시간 정도 산책을 끝내고 다람살라로 돌아와서, 로자씨가 추천하는 작은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같이 했다. 수제비를 주문해서 먹었는데, 맛있었다. 식당 여주인은 한국 사람이었는데, 티베트 남자와 결혼하여 다람살라에서 식당을 경영하면서 잘 산다고 한다. 달라이 라마 법회에는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매우 신실한 한국 여인이라고 한다. 혹시 다람살라를 방문할 계획이 있는 독자에게 추천하고 싶은 그 식당의 이름은 ‘피스 카페’이다.
숙소로 돌아와 <사피엔스>를 조금 읽고서 밤 10시에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