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수공원, 광저우박물관>
월수공원은 아름답기도 하지만 볼 만한 것이 많아서도 유명하다. 진해루라는 건물에 광주박물관이 있고, 성장이라는 이름의 누백년 된 성벽이 아열대나무 뿌리에 얹힌 세월의 무게를 버티고 있다. 진해루와 城墻이 역사적 의미가 깊은 것이고, 그외에는 근대에 세워진 것들이다.
근대적 조형물로 손중산 기념탑과 오양석상이 있다. 둘은 다 별도 항목으로 소개했으므로 여기서는 거명만 한다. 손중산 기념탑은 1929년에, 오양석상은 1960년(1959?)에 건립한 것이다. 기념탑은 정치적인 의미가 오양석상은 문화적인 의미가 깊다. 중산기념탑 근처에는 남월국 창건황제 조타의 무덤이 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광저우박물관>
*진해루
명조 홍무년간 1380년에 처음 지었다. 송3성을 합병할 때 월수산 넘어 성장을 쌓고 제일 상면에 5층 높은 건물을 지어 아래를 내려다 볼 수 있게 하였다. 건축이 雄鎭海疆의 뜻을 담았으므로 진해루라 이름지었다.
청나라 삼우의 난 때 훼손되어 강희제 때 중수하고 민국 시대에 군벌에 훼손되어 1928년 중수하였다. 1928년 중수할 때 목재기둥을 철근과 굳힌 흙을 혼용하여 지었다. 벽돌 장벽은 명대의 유물이다.
1929년에 광주시립박물관으로 하였다가 1950년 다시 광주박물관으로 개칭하였다. 1989년 광동성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고, 현재는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이다. 양성 8경중 하나이다.
광주박물관은 안으로 들어오면 진해루 외에 몇 개의 부속건물이 더 있다. 마침 <성표성사전> 등 두 개의 특별전을 하고 있었다. 이곳에 소장된 유물들을 몇 가지 소개한다.
방문일 : 2019.12.
입장료 : 10원, 60세 이상 5원, 65세이상 무료
*鎭海樓 연기전설
진해루는 명나라 홍무 연간에 건축된 것이다. 홍무는 명나라 태조 홍무제의 연호다. 명태조는 주원장이다. 진해루는 주원장의 명으로 건립된 누각이다. 주원장이 진해루를 짓게 된 배경 관련 전설이 전해온다.
주원장이 천하를 얻고 난 후 남경에 수도를 정한 후 하루는 철관도인과 함게 남경 종산을 유람하고 있었다. 한참 유람의 흥이 올랐을 때 철관이 홀연히 동남 방향을 가리키며 주원장에게 말하였다. 광동의 해수면을 '王氣'가 자욱하게 어려 덮었다. '天子'가 나올 수 있으니 광주의 이러한 '龍脈'을 진압할 누각을 지어야 한다. 아니면 필시 대명의 화를 입을 것이다.
주원장이 이 말을 듣고 유흥이 갑자기 사라져 급히 사람을 광동에 보내 살펴보게 하니 광주의 월수산 위에 왕자의 기운이 나타나 보였다. 주원장은 즉각 명령을 내려 광주 태수 朱亮祖에게 산 위에 누각을 지어 王氣를 진압하라고 하였다. 주량조는 성지를 받고 태만하게 할 수 없어 월수산에 이 누각을 지었다. 이것이 바로 '탑같은 누각, 누각같은 탑'인 '진해루'이다. 진해루의 꼭대기를 홍색으로 한 것도 벽사 鎭王의 의미가 있다고 한다. (전설은 <신광주행> 참조)
-진해루는 바다를 진압하는 누각이라는 말이다. 이름도 거기서 온 것이다. 이름에 雄鎭海疆의 의미를 담았다는 말이 바로 그 것이다. 웅진해강, 바다의 강역을 이겨서 진압하는 곳이 바로 진해루다.
*외사씨 왈 명나라 주원장이 바다의 왕기를 두려워했다는 것은 남월의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남월의 시조 조타의 무덤은 발견되지 않았고, 그 아들 문제의 무덤만 발굴되었다. 그 유물로 월수공원 앞에 서한남월박물관을 만들었다.
일설에는 조타의 무덤이 관음산, 곧 월수산 손문의 기념탑 근방에 있다고도 한다. 그의 무덤에서 왕의 기운이 서려 바다를 덮은 것이 아닌가. 그것은 남월 제국에 대한 두려움이 후세인들에게도 남아 있다는 것이 아닌가.
여만호 공원의 동상과 남월박물관의 지도 등, 남월의 의미 축소 등은 주원장의 공포 때문인가.
* 광주박물관 안에 있는 중원루
*청나라 시대의 유물이다. 이 공예품들은 대부분 광저우에서 생산된 것이다. 특히 법랑은 광주의 유명 공예품이다. 진가사, 조묘 등등의 고건축에서는 기가 막힌 공예의 절정을 살펴볼 수 있다. 동서양의 교류의 중심인 광주의 위치가 공예품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한다.
*아래는 진해루 및 다른 건물에 주로 전시된 전시품들이다.
청 건륭제 시대 제작
영국이 제작한 시계다. 제임스콕스는 당시 영국의 유명한 시계 제작상의 하나다.
*광주박물관에서 내려다 본 시내 전경.
*아래는 성사와 관련된 전시품들이다.
*조타의 상. 남월국을 창건한 조타의 흉상이다. 광저우는 남월의 수도였다. 그때 광주의 이름은 番禹(번우, 판위)이다. 남월에 대한 중국의 인식은 광저우 도처에 남아 있는 남월에 대한 흔적에서 잘 살펴볼 수 있다. 베트남 북부까지 차지했던 남월, 한고조와 다를 바 없는 위치라고 여겼던 조타를 마치 한나라에 복속한 것마냥 묘사하고 있는 중국의 역사 인식을 곳곳에서 마주칠 수 있다.
이런 인식 아래 아래 황손 가계도도 양한의 이름 아래 그려 놓놓은 것으로 보인다. 남월 건국 시기의 일은 중국의 <사기>외에 월남의 <대월사기전서>에도 기록되어 있다. 중국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사기>만이다. 서한과 월남의 관계에 대해서는 본카페의 설파 조동일 선생님이 집필한 <남월과 한나라>(문화비교 설파기언 게시판)를 참고하면 자세한 상황을 알 수 있다.
[난하이군 군위인 런샤오는 진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서 독립할 계획을 세웠다가 병이 나자 롱촨 현령이던 조타(趙陀, 중국이름 자오타, 월남이름 찌에우 다)에게 뜻을 전했다. 조타는 진 멸망 후 남월을 세우고 무왕이라 칭했다. 소수의 중국인 집단이 주동했지만 다수의 비중국인 토착사회와 밀착하여 그럴 수 있었다.
조타는 중국인 관리였지만 토착문화에 익숙해져 있고 자신을 현지인과 동일시했다. 진 이후 들어선 한 고조는 북방 흉노족의 위협을 받고 있어 남월을 무마할 목적으로 육가(陸賈, 루자)를 사신으로 보내 남월왕으로 봉하고자 했다. 조타는 현지 관습대로 맞이해 머리에는 상투를 틀고 다리는 쭉 뻗은 채, 육가가 무례하다 하자 남방의 만이 속에서 오래 살아 예절을 잊어버렸다는 상투적 변명을 했다.
"나와 한제 중 누가 더 현명한가?" ---
"내가 중국에서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곳의 왕이 된 것이지 만약 내가 그곳에 거했다면 어찌 한의 (황제만) 못했겠소."
조타는 남월이 인구나 영토 면에서 한에 비해 작은 나라이지만 , 한과 대등한 독립왕조임을 강조했다. 한고조 사망 후 창사 지역을 정복한 후 자신을 무제, 황제라고 칭했다.
한나라 혜제 시 남월을 정복하려는 시도가 전염병 때문에 실패하고, 문제 즉위 후 다시 육가를 파견하였다. 조타는 황제라 칭하지 않고, 신하의 예를 다하겠다 약속했지만, 대외용이었고, 이후에도 여전히 국내에서는 황제라 칭하고 의식도 이에 맞게 했다. 이것은 이후 베트남 군주들이 중국과 대등하다는 인식의 원형이 되었다.
이후 조타는 푸젠 등의 정복을 통하여 남중국에서 베트남의 땅으로 독립왕조를 건설했다. 베트남 사람들은 중국의 침략에 대항한 위대한 황제로 숭앙했다. 13세기 <대월사기>에서는 베트남 역사는 남월(남비엣)에서 시작된다고 보고 여기서부터 역사를 기술했다.] (유인선 2002, 베트남의 역사, 34~37면 요약)
조타는 독립왕조의 황제로서 베트남에서는 중국과 대등한 자주의식과, 베트남 왕조의 창시자로 숭상되었던 인물이어서 중국의 역사 인식과는 충돌한다.
광저우는 <서한남월왕박물관>이라고 하여 황제 아닌 왕으로, 남월이 서한의 지배 하에 있는 국가로 주장하고 있으나 월남의 인식은 이와 다르다. 이곳 박물관의 조타 가계도도 서한 아래 표기하여 그러한 인식을 강조하고 있다.
<대월사기>를 축소 개작하여 1479년 吳士連이 쓴 <대월사기전서> 한 대목을 인용한다.
"조무제는 우리 월남을 느이 개척해서 스스로 국가를 통치하면서 한나라에 대항해서 균형을 이루고, 글에서는 노부라고 칭했다. 우리 월남을 위해 제왕 통치의 터전을 마련한 공이 크도다."(조동일, 동아시아문명론, 251면 재인용)
역사는 보여주는 것만큼 보지 않고, 볼 수 있는 것만큼 본다. 그대는 남월을 어떻게 이해하려는가.
여행도 그렇다. 여행을 통해 보여주는 것만 보지 말고, 볼 수 있는 것을 제대로 보도록 준비해보자. 그것이 여행의 중요 목적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여행은 세 단계로 진행된다. 출발 전 준비단계, 마음은 이미 여행지에 가 있다. 가서 제대로 보려고 준비하는 단계에 마음 여행이다. 두번째는 여행 실행 단계이다. 몸과 마음이 다 가 있다. 준비한 만큼 보고, 잘 모르는 것은 맘 속에 담아 둔다.
세번째는 여행 후 이해 단계이다. 여행은 생물과 같아서 준비를 하고 가도 현지에 가면 예측하지 못한 상황과도 많이 만난다. 이번 광주 여행에서 남월 문제를 이렇게 많이 만날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 돌아와서 남월에 대해 자료를 찾아보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애써 했다. 여행을 추억하고 여행의 구멍을 메우는 단계이다.
사람마다 즐거워하는 단계가 조금씩 다르다. 어떤 사람은 가기 전에 들뜨는 기분에 여행을 한다고도 한다. 나는 세번째 단계가 가장 즐겁다. 잘 이해 못한 것, 그때는 일정에 쫓겨서 그냥 지나친 것, 돌아와서 사진을 다시 보고, 기억을 더듬어보고 그 의미를 비로소 이해한다.
그러려면 남들이 갔다온 여행 기록을 참고하는 것도 좋다. 요즘은 유투브를 활용하면 세계문화 다큐멘터리 등을 통해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다시 볼 수 있다. 영화를 보면 그때 여행의 추억이 새로워진다.
<로마의 휴일>을 로마를 갔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보았다. 버클리 대학에 갔다 오면서 <졸업>을 보았다. 피렌체를 갔다 오면서 <냉정과 열정 사이>를 보았다. 정서를 통해 접근하는 것은 여행의 감동을 오래 지속시킨다. 그리고 동일한 공간을 접근하는 이해의 폭을 널벼 여행의 의미를 배가시킨다.
*월수공원 내 이곳저곳. 아주 넓고 아름다운 공원이다. 주변 주민들이 와서 운동도 하고 풍광도 즐기는 생활 속의 공간이기도 하다. 겨울에도 무성한 야자수가 광저우가 3계절만 있는 고장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월수공원에는 북수, 남수, 동수의 3개 인공호수가 있다. 그중 하나다. 월수공원은 누대로 양성 8경의 하나였다. 월수산은 백운산 자락에 속한다. 越秀山은 월(월채 월)수산, 월왕산 등으로 불렸다. 명대에는 산 위에 관음각이 있어서 민간에서는 관음산이라고 불렀다.
<고성장>
고성장. 진나라 통일 후 조타가 이 지역에 남월을 건설한 후 번우성을 도성으로 삼아 이 성장을 축성하였다. 진나라 이래로 5차 대규모 수리를 거쳐 오늘날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
남방의 열대 나무가 성벽을 감싸안고, 혹은 뚫으면서 올라가고 있다. 캄보디아 사찰의 나무들이 생각난다. 돌보지 않는 유물 사이로 뚫고 들어가며 자라서 벽도 건물도 균열을 넘어 붕궤시켜 버리는 뿌리의 힘, 유적도 대자연 앞에선 무력하다. 이곳은 그 정도는 아니나 성벽과 나무들이 심하게 얽혀 힘겹게 공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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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양석상 안내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