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서문헌
경정집(敬亭集)
조선 중기의 문인 이민성의 시문집
조선 중기의 문인 이민성(李民宬)의 시문집. 본집 13권, 속집 4권 4책. 목판본. 1664년(현종 5) 저자의 양자 정기(廷機)가 간행하였고, 1903년 다시 중간되었다. 권두에 조경(趙絅)과 정두경(鄭斗卿)의 서문이 있다.
권1∼12에 시 1,257수, 부 11편, 사 2편, 표 4편, 서(序) 3편, 권13에 기 8편, 논 3편, 제문 4편, 명 2편, 찬 2편, 계사 4편, 발문 2편, 서(書) 6편, 속집은 권1∼3에 조천록, 권4에 주본(奏本) 1편, 비밀장계 1편, 연보 1편, 행장 2편, 묘지명 1편, 묘갈명 1편, 제문 6편, 만사 42편, 봉안문 1편, 상향문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그의 시는 당시 매우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었는데, 특히 권6∼8의 〈연사창수집 燕槎唱酬集〉은 중국에 다녀오는 동안에 지은 시로서, 두보(杜甫)와 한유(韓愈)와 비슷하다 할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동해무조석론 東海無潮汐論〉은 우리나라의 동해에 조수가 없다는 설을 부인하고, 동해는 끝없이 넓기 때문에 조수의 폭이 보이지 않을 뿐이지, 결코 조수가 없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 글이다.
〈계백론 階伯論〉은 사신(史臣)의 평을 비판하고 계백을 만고의 충신이라 천명하였다. 〈조천록〉은 저자가 중국에 서장관으로 다녀온 기록인데, 당시 우리나라와 청·명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경졸집(警拙集)
조선 말기의 학자 이득영의 시문집
조선 말기의 학자 이득영(李得英)의 시문집. 4권 2책. 목활자본. 1901년에 아들 기종(箕鍾)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양재순(梁在淳)과 제자 박인철(朴寅澈) 등 세 사람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박재현(朴載鉉)·기종 등 여섯 사람의 발문이 있다.
권1·2에 저자의 유묵(遺墨)과 시 187수, 경의(經義) 12편, 권3에 서(序) 2편, 기 1편, 장(狀) 1편, 제문·묘지, 권4에 동상록(東賞錄)과 부록으로 언행록인 유사·행장·묘지·경졸선생묘도(警拙先生墓圖)가 있다.
그의 시는 소식(蘇軾)의 시풍을 연상시킬 만큼 시어가 간결하고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힘차고 호방하며 소박하고 진솔하다. 또한 단편적인 감상의 토로에 그치지 않고, 한 주제에 대해 일관된 연상을 바탕으로 수십 수의 연작시를 짓고 있는 점도 두드러진다.
권2의 경의는 모두 12편의 제목이 보이지만 11편만이 본문을 가지고 있는데, 사서삼경을 읽으면서 그때 그때 자신의 생각을 수필식으로 정리해놓은 것으로, 도학적인 이념을 바탕으로 하여 그 실제 생활에 대한 적용가능성 등을 논의하고 있다.
이 가운데 〈인정필자경계시 仁政必自經界始〉는 민본정치가 백성들의 공평한 농토 소유에서 시작된다고 경제적 측면을 강조하면서, 당시 토지제도의 문란과 지나친 경제 불균형 현상을 간접적으로 비판한 글이다.
〈동상록〉에서는 금강산의 유래와 자신이 그곳을 유람하게 된 까닭을 먼저 설명한 다음, 지리학적 측면에서 그 지세와 웅장한 모습을 묘사하고, 금강산의 여러 이름에 얽힌 이야기들을 기록하고 있다.
이 글은 왕석초(王錫初)의 제의로 김재철(金在哲)·한국용(韓國容) 등과 함께 4월초에 출발하여 5월초 돌아오기까지의 여정을 일기 형식으로 담고 있는데, 문장은 간결하나 그 기세가 힘차 금강산의 웅장함과 고고함을 잘 그려내고 있다. 특히, 비 속의 안개에 둘러싸인 금강산의 아름다운 모습과 거기서 촉발된 풍류를 서정적으로 노래한 것이 돋보인다. 장서각도서에 있다.
경타재문집(警惰齋文集)
조선 후기의 학자 구용징의 시문집
조선 후기의 학자 구용징(具龍徵)의 시문집. 4권 2책. 목판본. 1917년 그의 7대손 달서(達書)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서찬규(徐贊奎)의 서문과 권말에 박승동(朴昇東)·달서 등의 발문 4편이 있다.
권1에 시 99수, 권2에 소(疏) 5편, 잡저 3편, 권3에 잡저 4편, 상량문 1편, 축문 9편, 제문 1편, 권4는 부록으로 행장, 관찰사에게 지방유림을 대표하여 보낸 청원문, 기타 제현수창(諸賢酬唱)의 시, 서(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시가 이 책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칠언체의 절구와 율시가 대부분이며, 시의(詩意)가 담박하고 한원(閒遠)하다.
〈입춘 立春〉·〈제야 除夜〉·〈강중즉사 江中卽事〉 등의 일반적인 감회·만흥(漫興)의 시와 〈과달천 過達川〉·〈과조령 過鳥嶺〉·〈도한강 渡漢江〉 등의 여행시가 있으며, 이밖에 〈염불암증정원법사 念佛庵贈淨源法師〉·〈유송림사 遊松林寺〉 등 승려나 사찰을 대상으로 지은 시도 여러 수가 보인다.
기타 헌증(獻贈)·수창(酬唱)·화답(和答) 류가 많다. 소에는 성혼(成渾)·이이(李珥)를 변론하고 그들을 문묘에 다시 복향(復享)할 것과, 또 김장생(金長生)의 문묘배향을 청원하는 상소 등이 있다. 잡저에도 또한 성혼·이이·김장생 등을 문묘에 복향 또는 배향을 청원하기 위한 거사통문(擧事通文) 등이 있다.
권3의 축문 가운데 〈우역기양문 牛疫祈穰文〉은 당시의 풍속연구에 도움이 되는 자료이고, 〈파계사불기권선문 把溪寺佛器勸善文〉은 그가 불사(佛事)에 관여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경헌유고(敬軒遺稿)
조선 말기의 학자 강복선의 시문집
조선 말기의 학자 강복선(姜復善)의 시문집. 6권 3책. 필사본. 권1∼3에 시 103수, 서(書) 104편, 권4∼6에 서(序) 4편, 기(記) 14편, 발 2편, 잠 3편, 명 7편, 계(誡) 6편, 설(說) 16편, 논(論) 4편, 잡저 22편, 제문 3편, 고문 2편, 애사 5편, 사실(事實) 1편, 부록으로 행장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청아하며 고답적이다. 〈등하추사 燈下秋思〉·〈쇠류한아 衰柳寒鴉〉·〈황엽충서 黃葉蟲書〉 등은 독특한 사물에 대조적인 사물을 도입하여 그 상황을 조화시켜 읊은 것으로 매우 뛰어난 작품이다. 〈제석음 除夕吟〉은 일년을 보내고 자신을 반성하며 또 새해를 맞아 할 일을 생각해보는 인간의 심정을 잘 묘사하고 있다.
서는 일상적인 것보다 학문에 대한 것이 많다. 〈상확재홍선생 上確齋洪先生〉·〈상중암김선생 上重菴金先生〉·〈상성재유선생 上省齋柳先生〉·〈여정석화장 與鄭石華丈〉 등은 당시의 명유들과 여러 차례 서신을 주고받으면서 사서(四書)·상례(喪禮)·심성(心性)·이기(理氣) 등에 관해 구체적인 의견을 나눈 것으로, 저자의 학문적 깊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기 가운데 〈모퇴정기 慕退亭記〉는 이황(李滉)의 학문을 흠모한 자기의 둘째 형이 모퇴정을 지은 경위를 밝힌 것으로, 이황의 학문을 칭찬하면서 이황과 이이(李珥)와 송시열(宋時烈)의 학문은 동일한 것이라고 하였다.
설 가운데 〈징분질욕설 懲忿窒慾說〉은 분과 욕은 정반대가 되어 일어나는 현상으로서, 분은 위로 올라가고 욕은 아래로 내려가서 그 나타나는 방향이 다르다고 설명하고, 따라서 분을 막지 못하고 욕을 제어하지 못하면 사람이 아니므로, 욕을 막고 분을 제어해야만 학업의 반이 성취된다고 하였다.
〈심형이상하설 心形而上下說〉은 마음이 형의 상과 하 어디에 속하느냐는 물음에 대해 논변한 것이다. 그는 이치로 따지면 형의 상이 되고 기로 말하면 형의 하가 된다고 설명하면서, 마음은 기가 되고 이도 되어 그 사이가 없다고 말하고, 정확하게는 구분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태극도설 太極圖說〉에서는 이익(李瀷)의 설을 비평하여 주희(朱熹)와 육구연(陸九淵)이 말한 태극설의 시비에 대해 둘 다 일리가 있다고 한 것은 잘못된 것으로, 정확한 분석없이 주자의 논지를 훼손시켰다고 주장하였다.
그 밖에 행사·사부모·태극·성리 등 다방면에 걸쳐서 단편적으로 논한 〈잡지 雜識〉가 있으며, 지진에 대해 설명한 〈지진 地震〉도 있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경헌집(敬軒集)
조선 후기 순조의 왕세자 익종의 시문집
조선 후기 순조의 왕세자 익종(翼宗)의 시문집. 12권 6책. 필사본. 서문·발문이 없어 필사연도를 알 수 없다. 권1∼6에 부 3편, 사(詞) 3편, 시 622수, 연구(聯句) 38편, 치사(致詞) 13편, 악장(樂章) 10편, 전문(箋文) 5편, 권7·8에 소 6편, 제문 5편, 서(書) 2편, 비(批) 3편, 서(序) 3편, 기 3편, 잠 1편, 찬(讚) 1편, 상량문 1편, 잡저 105편, 권9·10에 영지(令旨) 113편, 권11·12에 돈유(敦諭) 19편, 비(批) 6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영지 중에서 〈포장형조당상파직강화유수이광헌삭직영지 捕將刑曹堂上罷職江華留守李光憲削職令旨〉는 무뢰한들이 인가를 파괴하고 양녀(養女)를 길거리로 끌어내어 욕보인 민폐의 죄를 물어 포도대장과 형조당상을 파직하고, 강화유수 이광헌에게 삭직할 것을 명령한 내용이다.
〈고시신특제교리영지 高時臣特除校理令旨〉는 익종이 대리청정한 이래 “언로(言路)를 열어야 한다.”고 진언한 종부시정 고시신을 교리로 특진시킬 것을 명한 것이다.
〈칙과장사습영지 勅科場士習令旨〉에서는 과거의 폐단과 선비의 습성을 지적, 선비의 습성을 바보잡는 방법은 과거시험장소를 엄격히 통제하는 데 있고, 보다 구체적인 방법은 수험자가 데리고 오는 자를 금지시키는 데 있다고 하였다.
〈세수권농영지 歲首勸農令旨〉에서는 나라는 백성이 아니면 의지할 수 없고, 백성은 농사가 아니면 먹을 것을 해결할 수가 없으므로, 백성과 나라의 관계나 농사와 백성의 관계는 매우 중대하다고 하였다.
〈인삼남충재책궁칙유영지 因三南蟲災責躬勅諭令旨〉는 가뭄 끝에 장마가 들어 과일 수확이 어렵고, 또 장마로 인해 삼남지방에 크게 발생한 병충해의 방제에 대한 대책을 세우지 못함을 자신의 부덕으로 돌려 개탄하여 이의 대책을 반포한 것이다.
이 밖에 〈영남의흥등읍피재민견휼영지 嶺南義興等邑被災民蠲恤令旨〉·〈칙팔도방백천경학재준영지 勅八道方伯薦經學才俊令旨〉 등은 당시의 정치·사회 문제를 이해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이러한 정치관계의 글은 그가 1827년(순조 27)부터 대리청정할 때 쓴 것이다.
권말에 부록된 〈경헌시초 敬軒詩草〉는 익종이 왕세자로 있을 때 저술하여 자필로 필사한 것인데, 필사 연대는 알 수 없다. 시는 150수가 수록되어 있는데, 그 중 14수는 시강원·익위사에 종사하던 궁료(宮僚)들과 수창(酬唱)한 연구(聯句)의 시들이다. 장서각도서에 있다.
경현록(景賢錄)
1719년(숙종 45) 학자 김하석이 김굉필의 시와 사적을 중심으로 하고 유학자들의 글을 모아 엮은 책.
1719년(숙종 45) 학자 김하석(金夏錫)이 김굉필(金宏弼)의 시와 사적을 중심으로 하고 유학자들의 글을 모아 엮은 책. 6권 3책. 목판본. 도동서원(道東書院)에서 간행하였다.
편찬과정을 살펴보면, 처음에 이정(李楨)이 김굉필과 조위(曺偉)의 사적을 엮어 ≪경현록≫ 1책을 만들었는데, 뒤에 김굉필의 외증손인 정구(鄭逑)가 조위의 사적을 빼고 김굉필의 사적만을 취하여 2책으로 엮었다. 그 뒤 김하석이 증보, 편집하여 3책으로 만든 것이 이 책이다.
제1책의 첫머리에 이황(李滉)이 쓴 경현록편정별록(景賢錄編定別錄)이 있고, 상권에는 김굉필의 세계·사실(事實)·문인(門人), 이적(李績)이 쓴 행장, 김굉필의 시부문(詩賦文), 추증(追贈)·포증(褒贈)·가증(加贈)·청종사(請從祠) 등의 순으로 실려 있고, 하권에는 부록으로 이황 등 유학자들과의 서간문이 있다.
제2책의 첫머리에 김하석이 지은 속록고의(續錄考疑)가 있고 상권에는 정구가 지은 속록서문(續錄序文)에 이어 유문(遺文)·행장·유사추보(遺事追補)·연보 등이 실려 있고, 하권에는 사우문인록(師友門人錄)·서재·서원·사우(祠宇)의 순서로 실려 있다.
제3책의 상권에는 유사·서술(敍述)·추설(追雪)·포증·종사(從祀)·반교(頒敎)·청강축(請降祝)·청종사·제문, 하권에는 신도비·묘갈·화(畫)·병발(屛跋)·양현사기(兩賢祠記)·상현서원기(象賢書院記)·제현시(諸賢詩), 사우문인록(師友門人錄)·서원 등의 순서로 실려 있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경현재집(警弦齋集)
조선 후기의 학자 강세진의 시문집
조선 후기의 학자 강세진(姜世晉)의 시문집. 4권 2책. 활자본. 후손 호린(皓鄰)·영보(永甫)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서문은 없고, 권말에 정상리(鄭象履)의 발문이 있다.
권1·2에 시 522수, 권3에 서(書) 3편, 잡저 2편, 서(序) 3편, 기 7편, 전(傳) 3편, 문(文) 2편, 장(狀) 1편, 뇌사(誄辭) 3편, 권4에 묘지명 1편, 비문 2편, 행장 3편, 부록/으로 묘갈명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시가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전가 田家〉는 5언16운의 장편으로 노경(老境)의 전원생활에 대한 취미를 감흥있게 읊었다. 〈위농 爲農〉도 오언체의 장편으로 농사짓는 취미를 잘 나타내고 있다. 〈증승 贈僧〉과 같이 불교적 취향을 드러내고 있는 것도 있다.
그 밖에 〈낙성기행육십운 洛城紀行六十韻〉·〈중추야독작방가행사십사운 仲秋夜獨酌放歌行四十四韻〉 등은 장편으로 문학적 역량을 과시한 작품이다. 서(書)에는 이덕무(李德懋)에게 답한 편지가 있는데, 대개 문학적 관심을 나타낸 것이 많다. 잡저에는 학술적인 내용의 글은 없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경회유고(絅晦遺稿)
조선 말기의 학자 이종화의 시문집
조선 말기의 학자 이종화(李鍾和)의 시문집. 14권 6책. 목판본. 간행연대는 미상이며 그의 문인 소운규(蘇運奎)가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소운규의 서문과 권말에 윤자철(尹滋轍)의 발문이 있다.
권1에 시 53수, 잠 1편, 명 3편, 권2에 소 2편, 논 8편, 권3·4에 서(書) 45편과 별지, 권5에 설 17편, 서(序) 4편, 권6에 수록(隨錄), 권7∼11에 경의문답·책문(策問), 권12에 도설(圖說) 12편, 권13·14에 변(辨), 부록에 행장·제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에는 〈지인음 知仁吟〉·〈시학자교우 示學者交友〉·〈인인지안택 仁人之安宅〉·〈유성사측 唯聖斯惻〉·〈이우보인 以友輔仁〉·〈차지위대장부 此之謂大丈夫〉 등 학문적 내용을 주제로 하거나 교훈적 성격이 짙은 것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잠의 〈경회재잠 絅晦齋箴〉은 겉치레보다는 내실을 지향한 자신의 정신세계를 표현한 글이고, 〈극기명 克己銘〉·〈금명 禽銘〉·〈식안명 食案銘〉 등은 함축성이 강한 글들이다.
소에는 국가의 어수선한 현실을 비판적 시각에서 포괄적으로 지적하고, 그 시정책을 제시한 〈삼정구폐의소 三政救弊擬疏〉와 고려 때 효자로서 한학주(韓學周) 선조인 교(皦)의 제향을 청원하는 내용을 담은 대작(代作) 〈청문충공한모복원소 請文忠公韓某復院疏〉 등이 실려 있다. 또한 폭넓은 소재를 취하여 예리한 분석을 시도한 〈논삼대지치가복 論三代之治可復〉·〈논장자변무편 論莊子騈拇篇〉·〈간화식전논태사공이인급후세문장 看貨殖傳論太史公而因及後世文章〉·〈논문체 論文體〉·〈논속론 論俗論〉·〈논조박지설 論糟粕之說〉·〈논소동파창용감책 論蘇東坡倡勇敢策〉 등도 있다.
서(書)에는 주로 학문을 연마하면서 느낀 의문점이나 일상사에 대해 친구나 친척들과 상의한 내용의 글들이 많이 실려 있다.
설에는 〈인설 仁說〉·〈의설 義說〉·〈예설 禮說〉·〈지설 智說〉·〈인의예지총설 仁義禮智總說〉·〈양성정설 養性情說〉·〈이기불리부잡설 理氣不離不雜說〉·〈무심공설 無心公說〉 등과, 제자와 후학들에게 가르침을 기술한 〈유학자설 諭學者說〉·〈유소운규설 諭蘇運奎說〉·〈유윤철병설 諭尹轍丙說〉 등이 실려 있다.
이 밖에 서(序)에는 〈경주이씨파보서 慶州李氏派譜序〉와 이노규(李魯奎)가 그린 ≪곡부궐리도 曲阜闕里圖≫의 내력을 소개하고 이의 뛰어난 점을 찬탄한 〈이사궐리도서 李師闕里圖序〉 등이 있다.
〈수록〉은 선현들의 교훈에 대해 생활하면서 몸소 터득한 진리들을 조목별로 기술한 것이다. 그리고 ≪논어≫·≪맹자≫ 등을 내용으로 한 〈책문 策問〉과 〈심학체용도 心學體用圖〉·〈백록동규도 白鹿洞規圖〉·〈수덕응도도 修德凝道圖〉·〈성학집요목록지도 聖學輯要目錄之圖〉·〈십이율상생장단도 十二律相生長短圖〉 등을 포함한 다수의 도설이 있다.
한원진(韓元震) 등 학자들과 역사적 사실을 규명하거나 경전에 대한 선현들의 학설을 분석, 검토하는 한편, 그들과의 논변 내용을 기술한 많은 조목의 변(辨)과 〈노자집해변서 老子集解辨序〉가 있으며, 부록에는 그의 행장과 제문 등이 있다.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있다.
계곡만필(谿谷漫筆)
1635년 장유가 지은 수필평론집
1635년(인조 13) 장유(張維)가 지은 수필평론집. 2권 1책. 목판본. 1643년 ≪계곡집 谿谷集≫을 간행할 때, 문집 맨 뒤에 붙여 함께 간행하였다. 목판본 외에 필사로 된 단행본도 더러 전한다. 권두에 실린 작자의 서문에 이 책의 편찬 동기가 나타나 있다.
즉, 자신은 어릴 때부터 독서와 저술을 본업으로 삼았는데, 지금 수년 동안 깊은 병에 걸려 두문불출하면서 다른 일은 못한다 할지라도 잠시도 마음을 쓰지 않을 수 없으니, 이러한 여가에 평소에 보고 들었던 소설(小說 : 자질구레한 조그마한 이야기)·쇄문(瑣聞) 등을 기록한다고 하였다.
내용을 보면 권1에 진(秦)나라 이전의 온전한 경문(經文)이 서복(徐福)에 의하여 일본에 전하여졌다는 설에 대한 고증으로부터 시작하여, 자신의 작시오계(作詩五戒)를 끝으로 157항의 것을, 권2에 인목왕후(仁穆王后)에 대하여 자기가 쓴 애책문(哀冊文)에 있는 고사용어의 출처문제로부터 시작하여 역년(歷年)에 관한 기록을 끝으로 53항에 걸쳐 자기의 견해를 곁들여 수록한 것인데, 권1이나 권2나 모두 일정한 기준이 없이 자유롭게 서술하였다.
이 책은 우리 나라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일어났던 여러가지 일과 경사자집(經史子集)에 나오는 해석상의 문제점이 되는 구절에 대하여 자신의 견해를 밝힌 것, 평소에 보고 들어왔던 기문·한시·문장 등에 대한 고증과 비평, 그리고 자기의 학문 및 문필에 관한 것 등, 총 210항의 단편적인 이야기를 모아 기록한 일종의 일사(逸史)의 성격을 띤 수필평론집이다.
이 가운데 시화(詩話)를 다룬 것은 권1에 30조항, 권2에 19조항이 있는데, 홍만종(洪萬宗)의 ≪시화총림≫에는 다만 3조항만 수록해놓고 있다. ≪계곡만필≫에서 다루고 있는 시화는 주로 음운에 관한 것이 많은데, 고문 가운데 운을 사용한 예를 들어 논하거나 근체시의 통운(通韻)에 이르기까지 상세하게 논함으로써, 음운학에 상당한 조예가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시의 형식문제뿐 아니라 시에서의 내용을 중시하는 언급도 많은데, 문장에서의 이(理)를 중시하여 이가 승(勝)하면 문은 자연히 아름다워진다고 하였다. 사상적으로 그는 양명학(陽明學)에 기울어 있었는데, 권1에서 우리나라가 정주학(程朱學) 일색인 점을 비판하고, 다양한 학문의 갈래가 존재하는 중국과 비교하면서 학문의 자유를 주장하였다.
그에 따라 문학의 경우에도 도학의 구속을 탈피하고자 하는 생각을 곳곳에 피력하고 있다. 자신이 평생 실행하였다고 하는 〈작시오계〉에서는 “날카로운 기교를 쓰지 않고, 막히거나 깐깐한 말을 쓰지 않고, 표절을 하지 않고, 모방하지 않고, 의심스러운 내용이나 궁벽한 말을 쓰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한, ≪어우야담≫을 평하여 항간의 비루한 일을 많이 기록하였고, 문장이 속되며 사실과 어긋난 내용이 많다고도 하였다. 규장각도서·성균관대학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淸芬室書目(李仁榮, 寶蓮閣, 1968)
<<참고문헌>>韓國冊板目錄總覽(鄭亨愚·尹炳泰 共編,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79)
<<참고문헌>>韓國文學思想史試論(趙東一, 知識産業社, 1978)
<<참고문헌>>韓國古代詩論史(趙鍾業, 太學社, 1984)
<<참고문헌>>谿谷批評小考(金周漢, 어문학 33, 한국어문학회, 1975)
계곡유고(谿谷遺稿)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김복흥의 시문집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김복흥(金復興)의 시문집. 5권 1책. 목활자본. 이 책은 그의 6대손 이탁(履鐸)이 병화에 산일된 유문을 수집했고, 1840년(헌종 6) 8대손 수범(守範)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오한원(吳翰源)·이윤명(李潤命)의 서문과 권말에 이문규(李文規), 이탁·수범의 발문이 있다.
권1에 시 15수, 권2에 제문 3편, 권3에 정문(程文) 4편, 권4·5는 부록으로 증별서시(贈別序詩) 26수, 만사 5수, 제문 2편, 행장·묘갈명·묘지명 각 1편, 통문(通文) 2편, 고유사(告由辭) 1편, 봉안축문(奉安祝文) 2편, 세계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는 주로 당시 명공석학 이대유(李大0xF92B)·최상중(崔尙重)·양사형(楊士衡)·노사회(盧士誨) 등과 주고받은 서정시가 많고, 명나라 장수 여응종(呂應鍾)과 화답한 시는 서로의 은근한 정회를 나타낸 것이 특색이며, 144운(韻)을 써서 경물을 읊은 배율(排律)의 장편 서경시도 있다.
이문규는 발문에서 그의 시를 “충담, 수려하면서도 골격과 기상이 있고 천태만상과 같이 구비된 문장은 귀신이 탄복할 노릇이며, 당송십대가(唐宋十大家)와 서로 백중지간(伯仲之間)이 될 만하다.”고 극찬하였다. 예로부터 많은 사람의 입에 회자(膾炙)되어온 작품들이다.
제문 가운데 노우명(盧友明)에 대한 제문에서는 음운학(音韻學)에 밝고 문장력이 특출함을 추모했으며, 최상중에 대한 제문에서는 학문의 깊이와 임진왜란 때 왜적과 싸운 의열(義烈)을 높이 찬양하였다.
정문의 〈군자화 君子花〉는 연꽃에 대한 시제(試題)로서, 연의 상태를 생동감 있게 묘사해 군자에 비교한 글이다. 문장이 특출하여 당시 시관인 윤근수(尹根壽)가 “신작(神作)이다.”고 극찬한 부체(賦體)의 과문이다. 이외에도 〈오왕장 五王帳〉·〈영안수조 永安受詔〉는 도시(道試)와 사마시(司馬試) 때 모두 장원한 글로서, 옛날의 과문(科文)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부록의 〈증별서시 贈別序詩〉와 〈만사〉에는 정염(丁焰)·이상형(李尙馨)·조찬한(趙纘韓) 등 당시의 많은 석학들이 화답하고 증여한 것을 모은 것인데, 특히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여응종이 저자의 집을 찾아와 수일간 유숙하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떠날 때 쓴 서(序)와 시에서 상호간의 정의를 엿볼 수 있다. 규장각도서와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있다.
계곡집(谿谷集)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장유의 시문집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장유(張維)의 시문집. 34권, 만필(漫筆) 2권 16책. 목판본. 저자 자신이 편집했던 것을 1643년(인조 21) 그의 아들 선징(善澂)이 약간의 시문을 추가하여 다시 편집, 간행하였다. 김상헌(金尙憲)·이명한(李明漢)·이식(李植)·박미(朴瀰) 등의 서문과 저자의 자서가 있다.
권1에 사부(辭賦) 17편, 권2에 표전(表箋) 23편, 교서 10편, 책문(冊文) 3편, 잠명찬(箴銘贊) 1편, 권3에 잡저 76편, 권4에 설 10편, 권5∼7에 서(序) 53편, 권8에 기 19편, 권9에 제문 42편, 권10·11에 묘지명 12편, 권12에 묘갈명 16편, 권13·14에 비명 17편, 권15·16에 행장 7편, 권17∼20에 소차(疏箚) 79편, 권21에 계사(啓辭) 10편, 권22에 주본(奏本) 5편, 권23에 자문(咨文) 18편, 격(檄) 1편, 권24에 정문(呈文) 2편, 첩(帖) 47편, 권25∼34에 시 1,860여수, 만필 2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사부의 〈속천문 續天問〉은 중국 전국시대의 굴원(屈原)이 초회왕(楚懷王) 때 벼슬을 하다 참소를 당해 귀양가서 지었다는 ≪초사 楚辭≫ 중의 〈천문 天問〉을 모방한 것이다.
내용은 우주 대자연의 오묘한 이치, 문화의 성쇠, 생사화복의 원인, 세상인심의 변화 등 의혹적이고 우수적인 것을 모두 들어 설문한 것인데, 서정성을 내포한 운문체의 작품으로 그의 학문과 문장의 깊이를 엿볼 수 있다.
잡저 가운데 〈잡술 雜述〉은 심학(心學)의 기본을 설명한 것으로 마음이 없다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먹어도 그 맛을 모른다고 설파하였다. 〈잡기 雜記〉에서는 “혼돈한 기운은 곧 천지를 생성한다.
혼돈은 음인데, 열고 닫는 것은 양이 된다. 천지란 음양 가운데 형태가 가장 큰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천지는 변멸(變滅)하고, 종시(終始)가 있지만, 음양은 변멸도 종시도 없다. 또한 기(氣)의 본체는 지허(至虛)하여 시작도 마침도 없으며, 한계도 제한도 없다.”고 하여 ‘태허즉기(太虛卽氣)’라는 존재론에 동조하고 있다.
〈전례사의 典禮私議〉에서는 역대 왕조를 계승하는 대통과 국례의식(國禮儀式)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설파하였다. 〈답인논문 答人論文〉에서는 문장을 구사하는 데 있어서 형식에만 치우치는 것을 배격하고, 형식과 내용을 겸비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사상의 핵심이 조리정연하게 전개된 것이 문장으로서는 가치가 있다고 논평하였다.
〈설맹장논변 設孟莊論辨〉은 가정적인 설문을 전개하여 맹자(孟子)와 장자(莊子)가 서로 대담하는 형식을 통하여 자신의 사상을 논변한 글인데, 독자의 흥미를 자아낸다.
설 가운데 〈인심도심설 人心道心說〉은 인심과 도심에 대한 개념을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해설이 각기 다름을 들어 설명한 것이다. 그는 인욕으로 흐름을 절제하여 바른 곳으로 돌리는 길은 ‘정일(精一)’ 두 글자에 있을 뿐임을 강조하여, 알차게 정일에 노력한다면 여러 말들이 길은 다르다 할지라도 결국 돌아가는 곳은 같게 될 것이라고 논술하였다.
서(序) 가운데 〈음부경해서 陰符經解序〉는 그가 20대 초에 썼다는 ≪음부경해≫에 대한 서문인데, 본집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다.
시는 1,860여 수로 방대한 양을 차지한다. 율절(律絶)이 압도적으로 많으나, 고체시는 완순(婉順)하고 우의(寓意)가 있어 도리어 더 읽을 만하다. 전체적으로 시의 문장은 기상이 완전하고 이로(理路)가 분명하다는 평이 전해오듯이 형식보다도 내실을 존중하여, 절실한 주제를 기발한 시상으로 표현한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그의 시는 법도에는 근엄한 편으로 지나치게 침착하고 설명법과 소묘가 많아서 산문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또한 두 차례나 문형(文衡)을 잡고 판서의 벼슬을 지냈던 그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우수와 비상(悲傷)이 깃든 서정적인 작품이 많다.
그 이유는 그가 광해군 때의 파란에 따르는 불우한 생활, 한 차례의 내란과 두 차례의 호란을 겪었고, 거기에다 일생동안 대관을 지낼 때까지도 한사(寒士)와 다름없이 빈곤하게 살았기 때문인 듯하다.
〈만필〉은 1632년 저자가 와병 중에 기록한 잡기로 도합 2권 208책의 단편을 모은 것이다. 경사자집(經史子集)에 걸친 학술상의 사소한 문제들에서 조야의 고사에 관한 견문과, 자신의 학문과 문필에 관한 자술 등에 이르기까지 다루어진 내용이 극히 광범위하다.
정주학과 육왕학의 평론, 병자호란과 화의에 관한 경위, 담배〔南草〕에 관한 고사, ≪태평광기 太平廣記≫의 〈규염객전 虯髥客傳〉에서 우리 나라와의 관계에 대한 고증,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 於于野譚≫의 기사에 대한 비판, 조선조의 문장은 중국 명대 말엽의 폐단을 답습해서 고려 때의 문장만 못해졌다는 평론 등 흥미롭고 참고가 되는 기사가 많다.
이 밖에 본집에 수록된 〈구언응지소 求言應旨疏〉·〈호남암행어사복명서계 湖南暗行御史復命書啓〉의 상소와 장계 등은 16, 17세기의 국내 정치적·사회적 문제를 이해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규장각도서와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있다.
<<참고문헌>>光海君日記
<<참고문헌>>仁祖實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