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타의 세계 ⑯
제2장 세존의 생애 – 깨달음에의 길, 열반에의 길
제8절 위대한 열반(최후의 여행과 입멸)
▶고유명사와 그밖의 용어는 산스크리트어로 표기
1. 최후의 여행
1)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세존은 정각을 얻은 후, 사십여 년 동안 갠지스 강 유역을 중심으로 북인도의 거리에서 거리로, 그리고 마을에서 마을로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설하며 돌아다녔다. 그동안의 활동에 대한 그 역사적 전후 관계는 잘 알 수 없다. 왜냐하면 경전은 모두 세존이 어느 때 어느 곳에서 어떤 사람들에게 어떤 일에 대해서 설법했다고만 기록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존이 80세를 넘어 그 생애를 마치기 직전에서 직후에 이르는 동안에 대해서는 「마하파리닙바나 숫탄타(대반열반경」을 통하여 비교적 상세하게 알 수 있다. ‘열반’이란 원래 등불 따위를 ‘불어서 끈다.’는 뜻이지만, 그 뜻이 변해서 세존의 죽음을 표현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이 경전은 팔리어로 된 것 이외에 중앙 아시아에서 발견된 산스크리트어 사본(寫本)의 단편과 티베트역, 그리고 다섯 종류의 한역본이 있는데, 그들의 기록은 약간의 차이점만이 있을 뿐 대체로 같은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역사적∙지리적으로도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면 이 경전을 중심으로 세존 최후의 여정을 더듬어 보기로 한다.
2) 노쇠한 세존
“나는 노쇠하고 나이도 팔십에 이르렀다. 아난다여, 예컨대 낡은 수레가 가죽끈의 도움으로 겨우 움직여 가듯이 여래의 몸도 가죽끈의 도움으로 간신히 움직이고 있다.”
이것은 세존이 최후의 여행에서 바이샬리(베살리) 근처의 죽림촌에 이르러 최후의 우안거를 지낸 다음 매우 심한 병에 걸려 겨우 회복한 직후에 자신의 몸이 늙어서 간신히 걷고 있는 모습을, 낡아서 부서질 것 같은 수레가 가죽끈으로 묶인 채 간신히 움직이고 있는 모습에 비유해서 한 말이다.
3) 여행길에 오름
팔십 세를 맞이한 세존은 라자그리하의 독수리봉을 뒤로 하고 북쪽으로 길을 청했다. 그 행선지는 아마도 기원정사가 있는 쉬라바스티와 출생지인 카필라바스투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 여행길에는 세존의 시중을 들던 아난다가 동행했던 것 같다. 경전의 곳곳에는 ‘대비구중(大比丘衆)과 함께’라는 기록이 나타나 있지만, 사실상 적은 수의 여행이었음이 분명하다.
팔리어의 문헌에 의하면, 영취산을 떠난 세존은 ‘암밧랏티카원 왕의 집’에 갔으며, 이어서 날란다의 ‘파바리카암바림(林)(Ⓟ빠바리깜바 숲)’에 머무른다. 후일에 장대한 가람을 자랑한 날란다도 당시에는 라자그리하 북쪽 약 5km 되는 지점에 있던 한 쓸쓸한 촌락에 지나지 않았다.
4) 파탈리 마을과 갠지스 강
이어서 세존은 아난다와 함께 갠지스 강 남쪽 강기슭에 있는 파탈리(Ⓟ 빠딸리) 마을로 향한다. 후에 마가다국의 수도가 된 파탈리푸트라(Ⓟ 빠딸리뿌뜨라)가 바로 그곳이다.
파탈리 마을의 신자들은 세존이 도착한다는 소식들 듣고 ‘휴식소’로 세존과 제자들을 초대했다. 여기서 세존은 밤이 깊도록 마을 사람들에게 설법을 해주었으며, 또 그들을 격려해 주어서 기쁜 마음으로 돌아가게 했다고 한다. 세존은 여기서 갠지스 북쪽 언덕에 거주하는 브리지족(Ⓟ 밧지족, 왓지족)과의 전투에 대비한 방벽을 쌓기 위해서 머무르고 있던 두 사람의 마가다국 대신들에게도 가르침을 펴고 있다. 이어서 세존은 이곳에서 “물이 가득하여 강기슭의 까마귀도 물을 마실 수 있을 만큼” 물이 넘실거리는 갠지스 강을 건넌다. 이 당시에 세존이 나간 문을 ‘고타마 문’, 갠지스 강을 건넌 장소를 ‘고타마 나루터’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비하루 주의 수도인 퍼트나 시는 파탈리푸트라의 유전을 포옹하는 듯한 형태로 갠지스 강 남안에 동서로 길게 뻗어 있다. 강의 하류쪽에 해당되는 지금의 퍼트나 시 동쪽 부근에서는 마우리야 시대의 둥근 기둥이 있는 커다란 궁전터가 발견되었으며, 상류에 면한 서쪽 부분은 그 옛날 손 강의 강바닥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세존 시대의 파탈리 마을도 하류쪽으로 한걸음 다가선 부분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타마 문’과 ‘고타마 나루터’에 대해서는, 이것이 지금의 가이 가트(소의 강변 – 고타마도 ‘좋은 소’라는 뜻)라는 설이 나오고 있지만, 실제의 유적을 비교해서 추정하기는 힘든 일이다. 이 근방의 갠지스 강은 가뭄에도 수량이 풍부한 사행항로(斜行航路)인데, 연락선으로 건너편 언덕까지 가는 데는 약 한 시간 반 정도가 소요된다.
그러므로 세존 시대에는 강을 건너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자그마한 배로 바람과 급류를 가르면서 강 가운데의 몇몇 모래톱을 거처 건너편 언덕에 다다랐을 것이다. 경전에서는 사람들이 보통 배나 뗏목을 구해서 강을 건너는 데 반해서 “세존은 이를테면 역사(力士)가 굽힌 팔을 펴거나 혹은 폈던 팔을 굽히듯이 (순식간에) 갠지스 강의 이쪽 강가에서 모습을 감추더니 곧 저쪽 강가에 모습을 나타냈다.”라고 하여, 세존의 비범한 힘을 기록하고 있다.
3) 코티 마을과 나디카 마을
갠지스 강을 건넌 세존이 북쪽 강언덕의 어느 곳에 상륙했는가에 대해서 경전은 아무 것도 기록하고 있지 않다. 다만 「대당서역기」에는 갠지스 강의 북쪽 강언덕에서 약간 북서쪽으로 걸어가면 쉬베타푸라 가람(백성사, 白城寺)가 나온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의정(義淨)의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에는 이 절을 바이샬리국 신자의 절이라 하고, 많은 중국인 승려가 머무르면서 공부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는데, 이로 미루어 볼 때 세존이 강을 건넌 지점도 후에 융성해진 이 근처의 땅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체첼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작은 마을이 지난날의 쉬베라푸타가 아닌가 하는 설도 있다. 이 마을은 퍼트나 시의 맞은 편 약간 하류(동쪽)에 치우쳐 있으며, 몇 기(基)의 스투파 터가 강변 근처에 늘어서 있다. 퍼트나 시와의 사이에는 지금도 나룻배가 왕래하고 있다. 강언덕의 힌두사원에는 불상이 모셔져 있고, 또 금으로 만든 코인(coin)도 발견되고 있다.
경전에 나오는 갠지스 강 북안(北岸) 최초의 마을은 코티 마을(Ⓟ 꼬띠가마)이다. 이 마을의 위치는 분명치 않지만, 갠지스 강의 거대한 모래톱 위에 있었다고 하는 설도 있다. 그리고 그 모래톱은 갠지스 강과 간다키 강, 손 강 등, 다섯 강의 합류점 근방에 있었으리라고 추측되고 있다.
이어서 세존은 나디카 마을의 연와당(煉瓦堂)으로 가서 이곳에 체류하며 설법을 한 다음, 바이샬리로 떠난다. 바이샬리의 남쪽 약 25km 되는 간다키 강변의 작은 마을인 고타로에는 스투파 터처럼 보이는 벽돌을 쌓아올린 두드러진 곳이 있는데, 이를 ‘나디카 마을의 연와당’터로 보는 설이 있다.
6. 바이샬리(Ⓟ 베살리, 웨살리)
바이샬리(Ⓟ 베살리 / 광암성)는 릿차비족의 중심 도시로서 세존시대에 크게 번영하고 있었다. 그 기원은 「라마야나」에 나오는 이크쉬바쿠 왕통의 한 사람인 바이샬라가 일으킨 거리 비살라프리까지 소급된다고 한다. 기원전 5~6세기경의 세존시대에는 공화제도가 선포되고 상업도시로서 더할 나위 없는 번영을 누렸다. 이어서 마가다국 아자탸사트루왕의 지배 하에 있었고, 기원후에는 큐샨왕조와 사캬족의 통치 등을 거쳐 굽타왕조 시대에 이르기까지 번영을 누린 도시의 하나이다.
경전에 의하면 바이샬리 거리는 세 겹의 방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망루와 성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여러 거주 구역에 각각 나뉘어 살았는데, 자이나교의 경전에는 크샤트리야구(區), 브ㅏ흐마나구, 바니크구 등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세존은 이 거리를 자주 들렀다. 정사도 많이 건립되어, 세존의 입멸 후 백년이 지날 무렵에는 제2회 불전결집이 이곳에서 거행되었고, 따라서 이 거리의 이름은 후대에 널리 알려지게 된다. 자이나교에게 있어서도 이 땅은 개조 마하비라의 탄생지로서 지금도 매년 성대한 탄생제가 거행되고 있다.
세존 최후의 여정에 대해서는 바이샬리 체류 중에 생긴 많은 일화들이 전해지고 있다. 이 도시 제일가는 창녀 암바팔리는 거리의 변두리에 살고 있었는데, 자신이 기증한 망고원에 세존이 도착했다는 이야기를 듣자 “실로 화려한 수레”를 몰고 가서 법문을 들은 다음, 세존과 비구들을 식사에 초대한다.
한편 릿차비족의 젊은이들도 아름답게 꾸민 수레를 몰고 세존에게 가던 도중에 돌아오는 암바팔리의 마차와 마주치게 되어 세존이 그녀의 식사 초대에 응했다는 사실을 안다. 그들은 ‘10만금’으로 그 권리를 양보하라고 하지만 암바발리는 비록 바이샬리 전체를 준다 해도 양보할 수 없다고 대답한다. 세존도 그 진심을 알고 암바팔리의 식사 초대에 응했다고 한다.
7)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의 가르침
세존의 바이샬리 근처의 죽림촌에서 최후의 우안거를 지낸다. 여기서 세존은 비구들에게 “바이샬리 근방에서 친구에 의지하거나, 아는 사람에 의지하거나 해서 우안거에 들라.”라고 타일렀다고 하니, 세존은 아난다와 단 둘이서만 죽림촌에 간 것으로 보인다. 이 우안거에서 세존은 매우 위독한 병에 걸려, ‘죽음에 가까우리만큼 심한 아픔’이 있었다. 세존은 이 고통을 참고 견뎌냈지만 근심한 아난다는 세존이 별세한 후에는 무엇에 의지해야 하는가를 세존에게 묻는다. 이에 대해서 세존은 대답한다. 나는 안팎의 구별없이 모든 법을 설했다. 나의 가르침에는 무엇인가 제자들에게 감추는 듯한 ‘스승의 악권(握拳 : 꼭 쥔 주먹)’이 없으며, 나에게는 ‘비구들이 나를 의지하고 있다.’거나 ‘나는 비구들을 교도한다.’는 등의 생각이 없다. 이어서 세존은 비구는 설령 자신이 입멸한다고 해도 스스로의 몸과 스스로의 마음을 알고, 또 법을 알고 나서 탐욕과 근심과 슬픔을 제거하고 “남에게 의지하지 말고 마치 강 가운데의 모래톱과 같이 자기 자신에 의지할 것이며,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고 모래톱에 의지하듯 법에 의지하여” 수행을 계속해 나간다면 높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 하여, 자신의 열반을 예고하는 듯한 훈계를 했다. 여기서 ‘모래톱(dipa)’이란 말은 ‘등불’의 뜻을 지니고 있으므로, 경전에 따라서는 “스스로를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으라”로 번역되어 있기도 하다. ‘자명등 법등명’의 가르침이 바로 이것이다.
8) 입멸의 예고
우안거를 마친 세존은 바이샬리 거리로 탁발을 다니고 또 차이탸 밑에서 한낮의 휴식을 취하기도 했다 바이샬리에는 불교의 성립 이전부터 많은 차이탸(Ⓟ 쩨띠야, 성스러운 나무, 또는 장소)가 있었다. 오늘날 인도의 길을 걷노라면 노목이나 암석 주위를 돌담이나 콘크리트로 둘러싸 놓고 각기 신으로 받들어 공양물을 바치거나 혹은 그 아래에서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는 장면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다. 차이탸라는 말도 후에는 ‘영묘(靈廟, 사당)를 뜻하게 되지만 원래는 ’노천의 신성한 곳‘이라고도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어느 날 세존이 차필라 나무 아래에 있을 때 아난다를 내보내고 나자 예전의 악마가 세존 앞에 또 나타난다. 출가와 수행, 성도 때 악마가 나타나서 갖은 유혹을 다 했음은 앞서 말한 바와 마찬가지이지만 최후에 이르러서도 악마는 세존에게 빨리 열반에 들 것을 권고한다. 세존은 출가 비구들과 재가신자들이 자기 자신을 잘 억제하고 현명하며, 스승의 가르침을 잘 듣고 올바른 수행을 닦으며, 스승의 설법을 지키고, 또 스승의 가르침에 대한 비방자를 항복시킬 때까지는 열반에 들지 않겠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악마는 이제 세존의 가르침이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되어 뒤에 남는 근심은 없을 것이라 하여 재차 열반에 들 것을 재촉하니, 마침내 세존도 3개월 후의 죽음을 예고했다고 한다.
9) 바이샬리와의 이별
세존은 바이샬리 근처에 사는 모든 비구들을 모아서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예고한다. 그리고는 이 마을을 떠나 반다 마을과 핫티 마을 등을 거쳐서 파바(빠와)를 지나 쿠쉬나가르(Ⓟ 꾸시나라)로 향한다. 바이샬리를 떠나면서 세존은 아난다를 향하여 “이로써 내가 바이샬리를 보는 것도 마지막이 되리라.”라고 말하고 ‘코끼리가 바라보는 것처럼’ 뒤를 돌아다보았다고 한다. ‘코끼리처럼’이란 커다란 코끼리가 뒤를 돌아볼 때 몸 전체를 천천히 돌리는 모양을 비유한 것인데, 여기에는 나이가 많고 또 병후의 기색이 완연한 세존의 모습이 아주 잘 표현되어 있다. 한역 경전에는 “대상왕(大象王)처럼 온몸을 오른쪽으로 돌려서 광암성을 바라다보았다.”고 번역되어 있다. 현장도 이를 기념하여 세워진 스투파의 옆에 서서 지난날을 회상했다고 한다.
10) 바이샬리의 유적
바이샬리의 유적은 퍼트나에서 갠지스 강을 건너 북북서 방향으로 약 30km, 즉 간타키 강의 줄기에서 약간 동쪽에 위치하는 비사르 마을과 그 주변, 반경 6~8km 되는 지역에 산재해 있다.
현재는 경전에 나와 있는 “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 겹의 방벽”중에서 두 겹만이 발견되어 있는데, 현장이 둘레가 4~5리가 된다고 기록한 그 중심의 궁성터는 흙더미와 호로 사방이 둘러싸인 남북 약 515m, 동서 약 240m의 직사각형으로 된 낮은 언덕을 이루고 있으며, 현재 라자비살라 카 가르후(바이샬리 왕의 궁전)라 불리고 있다. 발굴 결과 세존 생존시기로 보이는 기원전 500년에서 굽타왕조 후기인 600년 경에 걸친 약 1,000년 동안의 각 시대를 특징짓는 토기와 테라코타, 코인 등이 출토되어, 이 기간 동안 이 지역은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는 도시로서 한창 번성했었음이 드러났다.
현장이 행한 유적 순례의 기점으로 볼 수 있는 정량부의 부파에 속하는 비하라의 유적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으나, 릿차비 귀족이 몸을 씻었다는 아비세카 푸스카루니 연못은 궁성터 북서쪽 약 1km 지점에 지금도 존재하고 있는 카라우나 포칼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근처에는 릿차비족이 세운 것으로 생각되는 스투파가 있으며, 최근에 이르러서는 뒤에 설명하게 될 부처님 사리로 생각되는 것이 발견되었다. 궁성터의 북북서쪽 약 3km 되는 지점에선 한 마리의 사자를 머리에 이고 있는 아쇼카왕 석주(각문은 없다.)와 스투파, 작은 연못 등이 있다. 이곳은 원숭이가 모여들어 세존에게 꿀을 바친 연고지로 지목되고 있다. 원숭이가 꿀을 바친 이야기는 한역 경전인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약사」라는 곳에 기록되어 있으며, 또 「대당서역기」의 마투라국편에도 기록이 되어 있다. 세존의 가르침이 인간 세상 밖에까지 미쳤다고 하는 전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던 것 같다.
세존이 바이샬리에 있을 때 자주 머물렀다고 하는 중각강당은 「잡아함경」에 의하면, 이 연못가에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그 유적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밖에도 창녀 암바팔리의 주택과 망고원 자리라고 전해지는 장소도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세존이 바이샬리를 떠날 때, 많은 릿차비족 사람들이 성 밖 먼 곳까지 전송을 나가서 좀처럼 돌아가려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한역 경전과 「법현전」에서 전하는 그대로이다. 현장은 그 지점을 궁성 서북쪽 50~60리 되는 곳으로 보고 있지만, 정확히 어디쯤인지는 전혀 알 길이 막연하다. 다만 릿차비족 사람들을 달래기 위해서 세존이 신통력을 써서 그 사람들과의 사이에 큰 강을 나타나게 했다는 전설은 세존이 바이샬리 북쪽에서 간다키 강을 건너고, 여기서 릿차비족과 이별한 사실을 암시해 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현장이 말하는 이별의 땅에 세워진 대스투파로 추정되는 것으로서는 바이샬리 북서쪽 약 48km 되는 지점인 켓사랴의 스투파 폐허가 있지만, 실제로 답사를 해보면 거리상으로 너무 멀다는 느낌이 든다.
11) 마지막 여행의 길
세존이 라자그리하를 떠나 최후의 땅인 쿠쉬나가라로 가기 위해서, 파탈리 마을에서 갠지스 강을 건너고 바이샬리를 거쳐 간다키 강의 나루터에 이르는 길은, 현재 퍼트나에서 무잣화르푸르를 경유하여 라크소르로 뻗어 있는 인도 – 네팔을 연결하는 육로를 따라 약간 간다키 강쪽으로 치우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은 사실은 갠지스 강 북안의 아쇼카왕 석주가 바이샬리, 라우랴 아라라지, 아루랴 난단가르, 람푸르바 등, 대략 정북을 향해서 흘러가는 강쪽으로 치우친 선상에 나란히 늘어서 있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대반열반경」의 여러 이본(異本)들은 어느 것이나 모두 파탈리 마을에서 쿠쉬나가라에 이르는 사이에 세존이 통과한 마을이나 도시, 강의 명칭들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지만, 그 수효와 순서에 대해서는 상당히 많은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이를테면 팔리어로 된 「마하파리닙바나 숫탄타」는 바이샬리를 지나서 벨바와 반다 두 마을을 거쳐 핫티, 암바, 잠부 마을을 통과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산스크리트어 단편에서는 바이샬리 다음에 도르나 마을 등 네 마을을 들고 있으며, 또 이어서 찾아간 마을들의 순서도 거꾸로 되어 있다.
12) 춘다(쭌다)의 공양
세존은 얼마 후 쿠쉬나가라 근처의 파바(빠와) 마을로 가서 대장장이의 아들인 춘다의 망고원에 머무르는데, 여기서 공양받은 수카라 맛다바(버섯의 일종)를 먹은 후 중병에 걸린다. 경전에 “붉은 피가 쏟아지고 죽음에 가까운 심한 통증이 일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격렬한 설사를 겸한 병이었다고 생각된다. ‘수카라 맛다바’에는 돼지고기라는 뜻도 있으므로, 이 때의 공양식은 돼지고기 요리였으리라고 해석하는 서양의 학자들도 많다.
2. 세존의 입멸
1) 사라나무(살라나무) 아래에서의 안락한 죽음
병의 고통을 참고 견디면서 세존은 아난다와 함께 쿠쉬나가라에 이르러 말라족의 우파밧타나에 있는 사라나무 숲으로 들어간다.
세존은 “아난다여, 그대는 나를 위해 사라쌍수 사이에 머리를 북쪽으로 향할 수 있도록 자리를 깔라. 나는 피곤하다. 나는 자리에 누울 것이다.”라고 하여 아난다에게 자리를 깔게 하고 나서 오른쪽 옆구리를 아래로 두고 발 위에 발을 포갠 자세를 취한 다음 선정에 들어간 채로 숨을 거두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아난다와 비구들에게 남긴 최후의 유계(遺戒)는 “제행은 무상하니,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는 말이었다.(세존은 이때 또 자기 자신에게 귀의하고 법에 귀의하며 남에게 귀의하지 말라. 스스로를 광명으로 하고 법을 광명으로 삼아 남을 광명으로 삼지 말라고 하셨다 한다.) 그것이 2월 보름 한밤중이었으며, 지극히 안락한 죽음이었다.
옆에서 이 임종을 지켜본 사람들의 슬픔은 어떠했을까, 경전에서는 그 놀라움을 “대지진이 일어나고, 사람들의 모골이 송연해지며, 천상에서는 갑자기 하늘의 북이 울렸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비구들 중에서 수행을 쌓은 자들은 그래도 “생명이 있는 것은 모두 멸한다. 세존조차도 그 예외는 아니다.”라고 지그시 그 슬픔을 찾았지만, 아직도 그와 같은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자는 “팔을 벌리고 울며, 부서진 바윗돌처럼 땅바닥에 뒹굴었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한 사람의 위대한 스승과의 이별에 임해서 인간이 품는 두 가지 감정의 측면을 보는 느낌이다. 이성을 지니고 오로지 슬픔을 참고 견디는 모습을 칭찬해 주는 한편, 그렇다고 해서 슬픔을 슬픔으로써 울부짖는 사람들을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비난할 수는 없는 것이다. 거기에는 인간으로서의 솔직한 감정이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최후의 자리 양옆에 있던 두 그루의 사라수는 이때부터 사라쌍수라 불리게 되었다. 경전에는 “그때 사라쌍수에는 때 아닌 꽃이 피었다. 모든 꽃들도 전부 활짝 피었다. 꽃잎은 세존 공양을 위해서 세존의 몸에 떨어지고, 하늘의 만달라바화(曼多羅華)와 찬다나향(栴檀香)도 중천 허공으로부터 세존의 몸에 뿌려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세존의 열반은 안락한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옛 시문은 범천(梵天)의 시라고 하여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은
마침내 육신을 버리게 되리라.
마치 세상에서 비할 바가 없는 사람,
이와 같은 스승, 힘을 갖춘 수행실천자,
정각(正覺)을 얻은 그 분이 사라지듯이.
2) 장례
세존의 죽음은 날이 새자 아난다에 의해서 쿠쉬나가라의 말라족에게 전해졌다. 말라족 사람들은 남녀노소 모두가 놀라고 슬퍼하지만, 이윽고 향과 꽃다발과 온갖 악기와 오백 겹의 천을 가지고 사라나무 주위에 모여, 주악과 꽃다발과 향으로 세존의 유체를 공경하며 천막을 치고 만다라화를 바치며 6일 동안 공양했다고 한다.
가무와 음악으로 죽은 사람에게 조의를 표현한다는 것이 약간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현재 힌두교의 장례 때 특히 나이 많은 사람의 장례일 경우에는 소리 높이 성전을 외우고 악기를 연주하며 강변의 화장터까지 장례 행력을 지어 가는 것을 볼 때, 이 풍습은 고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새 헝겊과 마포로 번갈아 오백 겹으로 둘러싸이고 쇠 기름관에 넣어진 세존의 유해는 7일 만에 “머리를 감고 새 옷을 입은 8명의 말라족 수장(首長)들”에 의하여 쿠쉬나가라 북문을 통해 시내에 들어갔다가 동문을 통해 나와서, 동쪽 교외 마쿠타 반다나 차이탸(천관사, 天冠寺)에 안치되었다. 여기서 제자의 한 사람인 마하카샤파의 도착을 기다려, 향목을 태워서 화장이 거행되었다. 마하카샤파는 오백 제자들과 함께 파바에서 쿠쉬나가라로 향하던 도중, 만다라화를 든 채 걷고 있던 아지비카파 수도자에게서 세존의 죽음을 알게 된 것이다.
세존의 죽음은 물론 당연한 것이었지만, 그 제자들 사이에서는 크나큰 동요를 일으켰다. 그 가운데는 마하카샤파를 따르던 수밧다라는 나이 많은 비구처럼 “우리들의 스승 붓다 대사문이 사랴졌다. 이제는 우리를 성가시게 속박하는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울음을 그치고 오늘부터는 자기 마음대로 수행하며,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고 자유롭게 행동해도 된다.”고 주장하기 시작한 제자도 있었다. 한역 경전에는 “대가섭이 이를 듣고 기뻐하지 않았다.”고 하여, 그릇된 제자에 대한 마하카샤파의 불쾌한 마음을 전하고 있다.
3) 사리의 분배와 탑의 건립
세존의 사리(舍利, 샤리라 : 유골)가 여덟 등분되어 여덟 기의 스투파가 건립되었다는 전설은 일찍부터 전해 내려오고 있다. 물론, 팔리어, 산스크리트어, 한문 등의 경전에 의해서 전해지는 내용들은 각각 차이가 많이 있지만 사리 분배와 스투파 건립의 사실은 그 역사적 타당성을 인정해도 좋을 것이다.
세존이 입멸했다는 소식을 들은 마가다국의 왕 아자타샤트루와 바이샬리의 릿차비족들을 각기 사자를 쿠쉬나가라에 파견하여 세존의 유골 일부를 요구하지만, 말라족은 이를 거부한다. 이리하여 세존의 유골 분배를 둘러싸고 전쟁이 일어나게 되는데, 결국 사리가 원만하게 분배되어 각지에 스투파가 세워지게 된다. 세존의 사리를 분배받은 것은 마가다국의 아자타샤투르왕, 바이샬리의 릿차비족, 카필라바스투의 샤캬족, 알라캅파의 부리족, 라마그라마의 콜랴족, 베타두비파의 바라문, 파바의 말라족, 쿠쉬나가라의 말라족이었다고 한다. 배분을 결정한 드로나(Ⓟ 도나)라는 바라문은 사리가 들어 있는 병을 받아 갔고, 뒤늦게 당도한 핍팔리바나의 모랴족은 남은 재를 가지고 갔다. 이렇게 해서 8개의 불사리탑과 한 개씩의 병탑(甁塔) 및 회탑(灰塔)이 각각 세워졌다고 한다.
처음에 건립된 8개의 사리탑 가운데서 현재 분명한 것은 두 개 뿐이다. 하나는 앞서 말한 피푸라하와의 대스투파 유적인데, 여기서 출토된 사리는 카필라바스투의 샤캬족이 받들고 있던 것이라고 한다. 다른 하나는 바이샬리의 아비세카 푸스카루니 연못 근처에 있는 스투파 터이다. 1957년 아르데카르 박사에 의해서 이곳에서 발견된 사리 용기는 명문은 없었으나 출토 상황과 스투파의 구조로 미루어 세존 시대의 것으로 거의 인정받고 있다. 다만 이 사리 용기에 들어 있었던 것은 유골이 아니라 유회(遺灰)였다.
그러나 이 같은 추정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가 있으며, 나머지 사리 스투파에 대해서는 아직 발견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4) 쿠쉬나가라의 유적
쿠쉬나가라의 유적은 고라크푸르의 동쪽 전원 안에 남아 있는 사라수의 원시림을 빠져나가, 50km 남짓 되는 카시야 마을에 흩어져 있다. 5세기 초에 하리바라라는 신자가 기증한 전장 6m가 넘는 거대한 열반상을 모시는 열반당의 뒤쪽 스투파에서 이 땅이 니르바나 차이탸라는 취지의 각문이 새겨진 동판이 발견되었고, 수대를 거친 한 쌍의 사라수가 커다란 타원형의 잎을 달고 있다. 동판의 각문에 ‘쿠쉬나가라’라는 단어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땅의 명칭을 추정하는 데엔 이론이 있기도 하지만, 오늘날에는 이곳을 세존이 열반하신 땅으로 간주하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열반당의 약 1.5km 되는 지점에는 세존을 다비에 붙인 마쿠타 반다나 터로 추정되는 라마바르 총(塚)이 있는데, 예전에는 눈먼 중국 승려가 홀로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
이 스투파를 둘러 흐르고 있는 작은 시내가 바로 세존이 최후의 목욕을 했다고 전해지는 히라냐바티(히란냐와띠) 강이라고 한다. 또 파바에서 쿠쉬나가라로 향하면서 병고에 시달린 세존이 물을 마시려고 했을 때, 마침 500명의 대상(隊商)들이 건너간 직후였음에도 불구하고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는 카쿳타 강으로 추정되는 작은 시내가 그 더욱 동쪽 약 4km 지점을 흐르고 있다.
라마바르총에 서서 구름이 흘러가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2천 수백 년이라는 시간의 흐름이 한순간에 응결하여, 세존 열반의 실감이 인도의 대지와 함께 직접 몸에 와 닿는 듯한 느낌이 든다.
(출처 : 佛陀의 世界 / 中村元 著, 金知見 譯)
원불사근본불교대학源佛寺
http://cafe.daum.net/wonbulsatemp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