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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9) :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 / 행 2:1-4
영국의 복음주의 신학자 제임스 패커(Packer)는 ‘성령을 아는 지식’이라는 책에서 주목할 만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바로 성령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을 ‘거룩한 수줍음’(holy shyness)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수줍음’이라는 말은 소심한 사람이 대인관계에 약점으로 드러내는 특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나치게 자신을 의식해서 움츠려드는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 수줍음은 자신을 잊어버리고 상대에게 모든 관심을 쏟는 사랑의 특성을 말합니다. 패커는 성령은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으신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최대한 예수님만 드러내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중매쟁이처럼 우리와 예수님을 맺어주려고만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사랑하게 하고 예수님을 따르게 하려고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께서 자신을 숨기고 예수님만을 나타내시려는 특성을 거룩한 수줍음이라는 용어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이 거룩한 수줍음은 우리가 성령을 알고자 할 때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성령께서 당신에 대해 말씀해 주시지 않을 뿐 아니라, 당신을 숨기시려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성령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령을 안다고 해도 잘못 아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성령을 알기가 힘이 들어도 우리는 반드시 성령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에 대해 올바로 신앙고백을 해야 합니다. 성령을 제대로 알고 올바로 신앙고백하는 일이 우리의 신앙생활의 실재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에서는 “나는 성령을 믿으며”라고 간단하게만 묘사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여덟 차례에 걸쳐 사도신경을 공부해 오고 있습니다. 1강은 서론이었고, 2강은 성부 하나님에 대한 공부를 했습니다. 성부 하나님에 대한 고백의 핵심 요소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3강~8강은 성자 하나님에 대한 공부를 했습니다. 3강은 성자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란 점과, ‘주님’이시며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고백입니다. 4강 탄생, 5강 고난과 죽음, 6강 장사됨과 부활, 7강 승천과 하나님 우편에 계심, 8강 재림입니다. 오늘은 9강으로 성령에 대한 공부를 하겠습니다. 사도신경이 성부, 성자, 성령의 순으로 되어 있는데, 앞에서 정리한 것처럼 성부에 대한 고백은 핵심만 요약했고, 성자에 대한 고백 부분은,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편입니다. 그런데 성령에 대해서는 너무 단순합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성령에 대한 고백이 얼마나 단순하냐 하면, 내용은 아예 없고, 그냥 “나는 성령을 믿으며”가 전부입니다. 어떤 성령을 믿느냐가 없습니다. 그 당시에는 성령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가 문제였지, 어떤 성령을 믿느냐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서 성령에 대한 논란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공의회가 열렸는데, 그 때 한 신조가 만들어졌습니다. 그게 AD 381년에 만들어진, 그 유명한 ‘니케아-콘스탄티노플신조’입니다. 우리가 믿는 성령이 어떤 존재인가를, 이 신조에서 구체적으로 말해줍니다. ‘우리는 생명을 주시는 주 성령을 믿는다. 그는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시며,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예배와 경배를 받으시고,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하셨다.’ 먼저 성령님이 생명을 주시는 주님이라는 고백입니다. 다음은 삼위일체 속에서 성령님의 위치인데,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신다는 고백입니다. 다음은 성부와 성자와 함께, 우리의 예배와 영광을 받으신다는 고백입니다. 사도와 속사도의 뒤를 이은 교부들은,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뿐 아니라, 성령도 찬양받으실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길 원하였던 것입니다. 사실 성령이 ‘생명을 주시는 주’라면, 성령님께 예배와 경배를 드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다음은 성령이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하셨다는 고백입니다.
성령은 어떤 분이십니까? 한 마디로 하나님이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한 분이십니다. 물론 성령이 세 분 하나님 중에 한 분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성령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은 지정의를 가진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성령을 비인격체인 힘이나 능력으로 알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령충만도 성령이 내 안에 가득 채워지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성령론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그렇습니다. 성령은 삼위일체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삼위일체를 벗어나서 이해하면 이단이 됩니다. 삼위일체는 신비라고 했습니다. 신비라는 말은 머리로 이해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신비적인 요소는 그냥 믿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1. 잘못된 삼위일체론
기독교사에 있어왔던 잘못된 삼위일체론을 몇 가지 소개하겠습니다.
① 단일신론이 있습니다. 성부만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일명 ‘독재신론, 군주신론’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원래는 다원적인 영지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성경에서 가르치는 유일신 사상을 옹호하기 위해 출발했으나(2-3세기경), 그 생각이 지나쳐 성부 하나님을 절대 군주로, 성자 예수님은 열등한 존재로 보게 된 것입니다. 여호와 증인이 단일신론을 주장합니다. 그들에 의하면 예수님을 인간으로 성령을 에너지로 봅니다.
② 삼신론이 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세 신으로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각각의 신으로 존재하지 하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을 한 사람이 아리우스(Arius)인데, 그에 의하면 성부 성자 성령 세 분이 모두 신이기는 하지만, 본질과 등급에 차이가 있는 세 종류의 신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성부는 영원하나, 성자는 세계 창조를 위해 그 직전에 창조된 존재로 성부와는 품격이 다른 이등급 신이고, 성령은 그보다 열등하다고 했습니다. 이런 견해는 다신론적 배경을 가진 로마와 헬라 지역의 기독교인들에게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퍼져나갔지만,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습니다.
③ 양태론이 있습니다. 삼위하나님이 본체로는 하나인데 구약에서는 성부로, 신약에서는 성자로,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는 성령으로 나타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을 한 사람이 사벨리우스(Sabellius)인데 그는 유일신론적인 배경에서 하나님이 결코 세 분일 수 없으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한 분 하나님이 세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양태론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동시에 존재함을 믿지 않고, 환경에 따라서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나타내신다고 합니다. 좀 더 쉽게 풀이하면, 내가 가정에서 남편이고 아이들의 아버지입니다. 교회에서 담임목사이고, 당회장입니다. 거리에 나가면 사람들이 아저씨라고 부릅니다. 분명히 임남수 한 사람인데, 상황에 따라 다양한 양태로 나타납니다. 양태론에 의하면, 본래는 하나님이 한 분인데, 어떨 땐 성부로 나타나고, 어떨 땐 성자로 나타나고, 어떨 땐 성령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양태론 역시 이단으로 정죄되었습니다.
2. 성령의 호칭
성령에 대한 대표적인 호칭이 있습니다.
① 보혜사입니다. 요 14:16절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보혜사”가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인데, ‘파라’는 전치사로 ‘곁에’라는 뜻입니다. ‘클레토스’는 ‘보냄 받아 옆에 있다’는 뜻입니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께서 보내셔서 성도 곁에 있는 분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돕기 위해서 곁에 계신 분이라고 쉽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보혜사(保惠師)는 한자어 음역인데, ‘은혜로 보호하시는 스승’이란 뜻입니다. 파라클레토스의 본래적 의미와는 조금 거리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파라클레토스를 영문성경에서는 다양하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킹제임스판에서는 Comforter(위로자)로 번역했고, NIV와 RSV에서는 Counselor(상담자)로 번역했으며, NASB에서는 Help
-er(돕는 자)로 번역했습니다. 각 번역이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으니, 간단하게 집고 넘어가겠습니다.
위로자: 어렵고 힘든 일이나 슬픔 따위를 달래고 격려해 주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성령은 우리가 어렵고 힘든 일을 당하고 있을 때, 찾아오셔서 슬픔을 달래주고 격려해주시는 분입니다. 상담자: 어떤 일을 서로 의논하거나 그 방면의 일을 의뢰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성령은 우리가 어떤 일로 고민하고 있을 때, 찾아오셔서 의논해주고 그 방면의 일을 의뢰하게 해주시는 분입니다. 돕는자: 도움이 필요한 자에게 힘이 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성령은 우리가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을 때, 찾아오셔서 힘이 되어 주시는 분입니다. 종합해서 성령은 우리 곁에 계시며 위로해 주시고, 상담해 주시며,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놓치지 말아야 할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보혜사’앞에 ‘또 다른’이란 말이 붙어 있습니다. 이 말은 완전히 다른 게 아니라, 동일한 다른 하나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도 보혜사이신데, 성령도 보혜사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성령은 예수님과 동일한 하나님이며, 예수님의 대리자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지난 3년간 제자들 곁에 동고동락하면서 도와주셨는데, 그 역할을 성령이 대신 해 주신다는 겁니다.
② 진리의 영입니다. 요 14:17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진리는 성령을 특정 짓는 가장 적절한 용어입니다. 성령은 진리인 성경의 원저자이십니다. 40여명의 기록자들에게 영감을 주어,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과 베드로를 통해, 각각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딤후 3:16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벧후 1: 20-21절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성경에는 ‘진리의 영’과 대조되는 ‘미혹의 영’이 나옵니다. 요일 4:6절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진리의 영은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며, 성도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반면에 미혹의 영은 거짓 선지자들 속에서 활동하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 곧 성육신의 사실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3. 성령의 상징들
성령은 인격성을 가진 하나님이지만, 물질로 상징하기도 합니다. 성령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물질이 몇 가지 있습니다.
① 바람입니다. “성령”이 헬라어로 ‘프뉴마’인데 ‘바람’이란 뜻입니다. 바람은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실체입니다. 요 3:8절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행 2:2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성령은 바람 같이 임하셔서 생명을 주시고, 구원의 역사를 일으켜 주시는 분입니다.
② 불입니다. 불은 심판과 은혜의 도구입니다. 마 3:11절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행 2:3절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성령은 불 같아서 더러운 죄를 태워버리고, 성도의 삶을 은혜로 변화시켜주시는 분입니다.
③ 물입니다. 물은 생명의 원천이자 씻기는 기능이 있습니다. 요 4:14절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엡 5:26절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성령은 물 같아서 영혼을 소생시켜주고, 죄를 깨끗하게 씻어 주시는 분입니다.
④ 기름 부음입니다. 기름 부음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들에게 있었고 성령을 받는 상징입니다. 삼상 10:1절 ‘이에 사무엘이 기름병을 가져다가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맞추며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그의 기업의 지도자로 삼지 아니하셨느냐?’ 6절 ‘네게는 여호와의 영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 고후 1:21-22절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성령은 기름 부음 같아서 성도를 하나님의 자녀로 인치시고 보증해 주시는 분입니다.
⑤ 비둘기입니다. 비둘기는 온유함의 상징입니다. 막 1:10절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요 1: 32절 ‘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성령은 비둘기 형상으로 예수님이 세례받으실 때 임하셨습니다.
그 외에도 비나 술, 옷, 강, 인, 이슬로 성령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4.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
성령세례를 말하기 전에, 먼저 세례의 의미를 설명하겠습니다. 세례는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씻음의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연합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죄를 씻음 받고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 곧 성령 세례는 성령께서 우리의 안에 들어와 내주하시면서, 우리와 연합하시고 동시에 우리의 죄를 씻어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성령세례는 우리의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의 활동을 바람에 비유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성령세례 받을 때 우리에게 보이는 역사가 일어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몸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할 수도 있지만, 전혀 그런 경험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 세례는 예수를 믿는 순간 단번에 받게 됩니다. 우리 안에 순식간에 일어납니다. 이것 역시 신비에 속합니다. 성령 세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보편적으로 임하는 것이지, 어떤 특별한 사람에게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를 많이 해서 받는 것이 아니고, 성경을 많이 읽어서 받는 것이 아니고, 선행을 많이 해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예수만 믿으면 받을 수 있는 축복입니다.
고전 12:3절‘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는 말은, 성령 세례를 받은 확실한 증거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을 보며, ‘아, 그가 성령 세례를 받았구나’확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제 때 일본의 앞잡이 한국계 순사 박광덕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일본인 순사보다 악질이어서, 사람들이 그를 보면 입이 떨려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한번은 길선주 목사님이 평양에서 부흥회를 인도하고 있는데, 서장에게 지시를 받고 교회를 향하게 됩니다. 교회에 도착한 그는 문을 발로 박차고 들어갔습니다. 그를 본 교인들은 벌벌 떨었습니다. 그때 길선주 목사님이 박광덕 순사를 향해 외칩니다. “이 더러운 마귀의 자식아, 거룩한 땅에 어찌 더러운 발을 내딛느냐? 네가 당장 회개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펄펄 끓는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는 갑자기 그 자리에 주저앉더니, 가슴을 치며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는 그 후 사표를 내고 순사를 그만 둡니다. 나중에는 매상교회의 창립 멤버로 가장 충성된 집사가 됐다고 합니다. 성령을 통하지 않고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겠습니까?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이,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까? 그 물음에 답은 “있을 수 있다”입니다. 바울은 그런 사람을 일컬어 ‘육신에 속한 자’라고 표현했습니다. 고전 3:1절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우리는 어떤 사람에 대해, 성령 세례를 받았니 못 받았니 판단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감별사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엡 5:18절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숨어서 한 잔 한다고 성령 세례 받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지만, 술 취함을 방탕한 것이라 했고, 오직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술 취하면 술의 다스림을 받듯이, 성령 충만하면 성령의 다스림을 받습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은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을 위해 힘써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을 사모하고 힘써 간구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성령 충만은 성령 세례와 달리, 점진적으로 나타나고, 반복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성령 세례는 취소되지 않지만, 성령 충만은 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제 성령 충만했다고, 오늘도 성령으로 충만하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만하고 불순종하여 죄의 자리에 있으면, 성령이 근심하며 탄식하십니다. 엡 4:30절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그 자리에 오래 머물러 있으면, 아예 못 일어날 수 있습니다. 누구나 넘어질 수 있지만,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얼른 툭툭 털고 일어나야 합니다. 예수 잘 믿는 사람을 보면, 성령 충만합니다. 예수 잘 믿으려고, 죽자 살자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 충만하면, 예수 믿는 것이 기쁘고 즐겁습니다. 세상에 예수 믿는 것보다 행복한 일이 없게 됩니다. 하지만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예수 믿는 게 힘듭니다. 무기력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고, 따분한 교회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재밌는 건, 교회 밖 활동은 활력이 넘치고 왕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적용하는 거 별로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5. 성령의 은사와 성령의 열매
성령의 은사는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부여받은 영적인 능력입니다. 성도의 신앙생활에 유익을 위하여, 위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각 사람에 따라 주십니다. 구한다고 다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알맞게 주십니다. 재능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능력이라고 한다면, 전공은 후천적으로 습득한 능력이고, 은사는 그것과 상관없이 성령이 주시는 능력입니다. 나는 재능은 물론이고 전공까지, 폭넓게 은사에 포함시키는 편이지만, 굳이 나누자면 그렇게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성령의 은사를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엡 4:12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성도를 온전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봉사의 일을 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입니다. 일은 열심히 하는데, 교회에 덕이 안 되고, 공동체를 힘들게 하는 것은, 은사를 잘못 사용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은사에 대해 가르침을 주기를, 서로 봉사하라고 했습니다. 벧전 4:10절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서로 봉사하라는 말은, 서로 섬기라는 말입니다. 각각 자기가 받은 은사로 서로를 섬김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은사로 자기 존재감을 드러내고, 영적 우월감을 나타내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치고 인성 좋은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자기가 은사를 받았으면, 몇 개나 받았겠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은사가, 어디 한 두 가지입니까? 그 많은 것 중에 몇 개 받았다고 우쭐한다면, 우스운 꼴입니다. 은사를 몇 개나 받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받은 은사를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요즘엔 은사를 자랑하는 사람보다는, 자기는 은사가 없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은사발견세미나를 통해서 “당신에게는 이런 은사가 있네요.”하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이게 내 은사 맞나요?”합니다. 전혀 아닌 것은 아니지만, 은사라고 하기는 부족하다는 생각인 듯합니다. 은사는 발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은사를 개발해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은사가 있어도, 묵혀 두면 사라지거나 약화됩니다.
사실은 성령의 은사보다, 우리가 더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갈 5:22-23절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열매가 아홉 가지로 표현돼 있지만, 한 인격에 포함됩니다. 누가 한 포도송이의 아홉 개의 알갱이로 표현했던데, 아주 적절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 ‘나는 사랑의 열매만 맺으면 된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희락의 열매를 맺는 것에 관심이 있고, 나머지 열매는 관심이 없다’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한 인격에 아홉 가지 열매가 맺혀야 하는 것입니다. 아홉 가지 열매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그렇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할 때, 자연스럽게 내 안에 열매가 맺힙니다. 성령의 열매도 열매니까, 시간이 필요한 건 당연합니다. 예수 믿고 성령 세례 받는 순간,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열매가 주렁주렁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에 속한 자와 신령한 자 사이에서, 엄청난 몸부림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열매가 맺힙니다. 이제 겨우 신령한 자에 이르렀나보다 했는데, 육신에 속한 자로 미끄러지기를 수도 없이 반복합니다.
어쩌다 열매를 맺었는데, 중간에 열매가 떨어지기도 합니다. 추수 때까지 가긴 했는데, 상처가 나 있고 벌레에게 먹히기도 했습니다. 어떤 때는 아름다운 열매가 맺혔습니다. 그럼 한 번 이런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나면, 그 이후로는 매일 매주 매달 매년 이런 아름다운 열매를 맺느냐 하면, 그렇게 보기는 어렵습니다. 우리가 육신을 입고 있는 한, 성령의 열매의 완성은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한, 끊임없이 자아를 쳐서 굴복시켜, 성령의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님 인정합니다. 환영합니다. 지금 내 안에 옵소서!”이게 우리 평생의 노래이길 바랍니다. “주여, 오늘도 성령으로 충만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옵소서!”이게 우리 평생의 기도이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은 성령의 시대입니다. 성령님은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믿음으로 영접하시고, 내 안에서 역사하시도록 마음의 문을 여십시다. 내가 나의 주인이 되게 하지 말고, 오직 성령 하나님께서 나를 주관하시도록 내어주십시다. 이것이 성령충만입니다. 늘 성령충만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령충만하지 않으면, 우리는 다시 타락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깜깜한 방에서 불을 켜 보십시오. 순식간에 방안이 밝아집니다. 그렇다고 어둠이 영원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요, 다시 불을 끄면 순식간에 어두워집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둠의 세력이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부터 멀어지는 순간, 우리는 다시 어둠의 자식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의 밝은 빛 가운데서 살아가려면, 언제나 빛이신 성령님을 인정하고 우리 삶에 모셔 들이고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령님과 더불어 동행하시면서 날마다 새 힘을 얻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늘 진리 가운데 거하심으로,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흠 없이 티 없는 모습으로 온전히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때때로 고난 당할 때, 시험을 달할 때, 성령님은 우리 곁에서 위로하시고, 더 나아가 아버지 앞에 중보 기도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는 단순한 고백이지만, 성령님을 모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항상 승리하게 하옵소서. 성령님과 늘 동행하게 하옵소서. 성령 충만하게 하옵소서.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옵소서. 그래서 성령을 통해 부어주시는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만끽하며 살아가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