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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점수 100점
2015. 6. 14(주일낮예배) 로마서12:14-18
김한길이 쓴 눈뜨면 없어라는 책이 있다. 잘 아시는 것처럼 김한길씨는 초대문화부장관인 이어령장관의 딸 이민아씨와 결혼하였다. 뜨겁게 사랑하여 결혼한 김한길은 이민아씨와 아무 것도 가지지 않고 미국으로 갔다. 그리고 둘은 정말 열심히 살았다. 기쁨과 즐거움은 성공한 후에 한꺼번에 누리기로 하고 밤에 잠을 자지 않고 공부하며 일을 하였다. 그렇게 성공을 위하여 미친듯이 일하는 김한길씨에게 이민아는 어린 시절을 이야기 해 주었다.
이민아씨가 5살 때였다. 어느날 동네에서 놀고 있는데 피아노를 실은 트럭이 집 앞에 선 것이다. 이민아씨는 그 날의 감격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고 하면서 만약에 몇 년뒤에 아버지가 피아노 100대를 사 줬어도 그 날의 기쁨만큼은 되지 못했을 것이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지금 기쁨을 느끼지 못하면 뒤에 성공을 해서도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김한길씨는 아내의 말을 듣지 않고 성공을 위하여 살았다. 김한길씨는 성공을 한 후에 그동안 즐기고 누리지 못했던 것을 한꺼번에 다 누릴 것이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렇게 5년을 살았을 때 김한길씨는 신문사 지사장이 되었고, 이민아씨는 미국의 변호사가 되었다. 그리고 방한칸짜리 셋집에서 벗어나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위에 3층짜리 새 집을 사서 이사도 하게 되었다. 아무 것도 가지지 않고 빈손으로 미국에 왔는데, 5년이 지났을 때 김한길씨가 바라는 성공을 한 것이다. 그래서 교포사회에서 젊은 부부의 성공사례가 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성공하여 그 좋은 집에 이사한 지 한달 뒤에 김한길씨는 이민아씨와 이혼을 하였다. 다시 말씀드리면 김한길씨는 성공을 위하여 몸부림치며 살았던 5년은 결국 이혼의 성공을 위하여 살았던 삶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부분을 김한길씨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방 하나짜리 셋집에서 벗어나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3층짜리 새 집을 지어 이사한 한 달 뒤에 그녀와 나는 결혼생활의 실패를 공식적으로 인정해야만 했다. 바꾸어 말하자면, 이혼에 성공했다. 그때 그때의 작은 기쁨과 값싼 행복을 무시해 버린 대가로...
김한길씨가 성공을 위하여 작은 기쁨과 값싼 행복을 무시한 대가가 무엇으로 왔는가? 그것은 단순한 이혼이 아니다. 내가 성공해서 함께 기쁨을 나누고 싶었던 사람과의 헤어짐이었다. 지금 나는 성공해서 너무 좋은데, 그래서 그 사람과 꼭 함께 기쁨을 나누고 싶었는데, 그 기쁨을 함께 나눌 사람이 없어져 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함께 기뻐할 사람이 있는가? 다윗이 사울왕을 피하여 도망할 때 다윗은 혼자가 아니었다. 다윗은 혼자 도망다니기도 힘든 상태였는데, 환란 당한 자와 빚진 자와 마음에 원통함을 가진 자들과 함께하였다. 그러므로 다윗은 도망을 다니면서 그 사람들의 안전과 생계까지 다 책임을 져야 하는 부담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다윗은 함께하는 자들을 위하는 지도자가 되었고, 또 함께하는 자들은 다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사무엘하 23장을 보면 정말 감격적인 사건이 기록된다. 어느날 다윗은 자신의 어린시절을 생각하면서 베들레헴 못의 물을 마셨으면 좋겠다고 말을 한 것이다. 누구에게 명령을 한 것이 아니라, 다윗은 혼잣말로 한 것이다. 그런데 요셉밧세벳과 엘르아살과 삼마가 다윗을 위하여 베들레헴에 있는 물 한잔을 가지기 위하여 갔다는 것이다.
3명의 용사가 다윗을 위하여 물 한잔 떠오는 것이 무슨 대단한 일인가? 할 수 있겠지만,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당시 베들레헴은 추수기를 맞이하여서 블레셋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50리가 넘는 베들레헴에서 물을 한잔 떠오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다윗이 원하는 것이면 이루어 놓고 싶어하는 이 용사들의 마음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지금 다윗과 그 용사들의 모습을 한번 보시기 바란다. 지금 다윗은 사울을 피하여 도망다니는 상황에 있었다. 그러므로 두렵고 고통의 시간을 보내었지만, 다윗이 그 고통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고, 또 어려움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습은 느헤미야서에서도 볼 수 있다. 성은 무너지고 성문이 불타서 백성들이 환란과 능욕을 당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왕의 허락을 받고 예루살렘 성벽재건을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귀환을 한 것이다. 그리고 느헤미야는 많은 사람들의 방해와 협박을 무릅쓰고 성벽을 재건하여 52일만에 성벽과 성문을 재건한 것이다. 그렇게 성벽을 재건한 후에 느헤미야 8장을 보면 학사 에스라가 율법책을 들고 섰다. 그때 모든 백성들이 다 일어나는 것이었다. 그렇게 일어서 있는 백성들 앞에서 에스라가 율법책을 읽을 때 백성들은 아멘아멘으로 화답하고 또 얼굴을 굽혀 땅에 대면서 하나님을 경배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 것이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가? 그들을 바벨론 포로생활을 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여러 가지 어렵고 힘든 상황 가운데서 성벽과 성문을 재건한 것이다. 그렇게 함께 고통을 이겨낸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질 때 모두 하나님 앞에서 감격한 것이다.
무슨 말인가? 다윗은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감격하는 삶을 살 수 있었다. 또 느헤미야는 어렵고 힘든 상황을 다 이겨내었을 때 수고한 백성과 함께 눈물을 흘리며 감격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어떻게 함께 기뻐하는 자가 될 수 있었겠는가? 폴앤마크 이사이고, 기획의 정석이라는 책을 쓴 박신영씨는 대구출신의 남자와 만나서 결혼을 하였다. 그리고 남편이 퇴근할 때 바쁜 일 때문에 반겨 맞이하지를 않았다. 그러자 남편은 일을 하고 있는 아내를 보고 눈치만 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씻었어! 하는 말에 씻고, 쇼파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다가 혼자 침실에 가서 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 마음을 고쳐먹었다. 박신영씨는 남편이 퇴근해서 집에 들어오면 15분동안 남편을 위하여 강아지가 되기로 결심을 하였다. 강아지는 주인이 집에 와서 키번호를 누르면 미친 듯이 달려가서 꼬리를 흔들고 주인을 맞이한다. 박신영씨도 강아지의 그러한 모습을 따라하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남편이 집에 도착해서 키번호를 띠띠띠 누를 때 현관으로 미친 듯이 뛰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대구출신의 남편에게 아이구 이리 살아서 돌아왔나! 하고 대구식 사투리를 하면서 남편을 껴안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날에는 오빠 오늘하루 어땠어요? 하고 묻는 것이다. 그러면 어색해하는 남편은 부장님이란 이런 일이 있었어!하고 간단하게 이야기 한다. 그런데 박신영씨는 남편이 말을 할 때 너무 신기하고 대단한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와~ 하고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그렇게 15분동안 지구촌에는 오빠밖에 없고, 오빠가 세상에서 제일 귀한 사람이다는 생각으로 남편을 대하였다. 그렇게 남편이 퇴근할 때 단 15분 동안 반갑게 남편을 대하였을 때 그 가정의 분위기는 어떻게 변화되었겠는가?
그런데 박신영씨가 집에서 부모님과 이야기를 하다가 울컥하는 일이 생겼다. 집에서 찰흑미를 넣었더니 밥이 맛있게 되었다는 말에 부모님이 입을 벌리고 듣고 있는 것이었다. 그 표정은 젖먹는 아이를 가진 엄마가 젖을 먹이면서 세상에 너 밖에 없다는 행복한 표정을 짓는 바로 그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박신영씨는 자신이 이렇게 건강하게 자란 것은 어머니의 바로 저 모습이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저는 이 이야기를 세바시에서 들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신세대와 쉰세대를 구분해 보았다. 쉰세대는 남편이 퇴근할 때 남편을 투명인간처럼 여긴다. 그래서 남편이 퇴근해서 집에 들어와도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남편도 그냥 자신이 해야 할 일만 한다. 이것은 쉰세대이다. 그러나 신세대는 다르다. 남편이 퇴근할 때 지구촌에 당신밖에 없습니다는 표정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그리고 기쁨으로 남편을 맞이하면 신세대이다.
그러면 여러분은 신세대인가? 쉰세대인가? 이제 오늘의 본문을 보시기 바란다. 오늘 본문을 쉽게 이해하려면 배경을 조금 알아야 한다. 당시 기독교는 로마의 핍박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모든 기독교인이 다 핍박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같이 교회를 다니고 있지만, 로마사람은 핍박을 적게 받거나 핍박의 자리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고스란히 핍박을 다 받아야 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 종들이 있었는데 믿는 주인을 가진 종은 덜 신앙생활을 하기가 덜 어려웠다. 그런데 믿지 않는 집에 있는 종은 엄청나게 힘들게 신앙생활을 하였던 것이다. 같이 교회를 다니고 있으면서 같이 핍박을 받고 있다면 그 어려움을 함께 이겨낼 수 있다. 그런데 나만 핍박을 받으면 상황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때 사람들이 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그렇게 힘들 때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또 저렇게 해야 한다고 자꾸만 답을 주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오늘 성경에서 힘들고 어려운 사람에게 답을 주려고 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늘 본문 15-16절을 보시기 바란다.
(롬 12:15-16)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16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바울은 힘들고 어려워하는 사람에게 정답을 주기 위하여 가르치지 말라는 것이다. 그냥 즐거워하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즐거워하고, 또 우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부둥켜 안고 울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정말 안되는 사람이 누구인가? 성경에 대하여 약간의 지식을 가진 목사와 성도이다. 성경에 대하여 약간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목사와 성도는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을 부둥켜 안고 함께 울기보다는 그 문제에 대한 원인을 성경적으로 파악하고 또 성경적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라고 한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대로 위로를 받으십시오 하고 말씀을 가르친다. 그런데 실제로 목사의 말을 듣고 위로 받는 사람은 거의 없다.
왜 위로가 되지 않는가? 16절은 위로의 원칙과 방법을 이야기 하고 있다. 위로의 원칙과 방법은 ❶마음을 같이해야 한다. 이 말의 뜻은 똑같은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 아니다. 마음과 마음이 조화와 발란스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고, 함께 이겨낼 수 있는 그런 마음의 상태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 가지는 자세가 ❷마음을 높은 곳에 있지 말고 낮은 곳에 두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알고 있는데, 당신은 그걸 모르고 있었군요! 하는 자세가 아니라, 당신이 얼마나 아프고 힘들어 하는지 내가 이해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하는 자세를 가지라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특히 우리는 오늘 본문이 로마서 12장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11장까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였으며, 구원받은 백성이 누구인가?에 대하여 이론과 원칙적인 내용을 모두 이야기 해 주었다. 그러므로 고난당하는 사람에게 로마서 11장까지의 이론과 원칙을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이론을 설명한 바울이 정작 위로가 필요한 사람 앞에게 스스로 지혜있는 체 하지말라고 하면서 이론적인 모습으로 다가가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것을 여러분의 삶에 그대로 적용해 보기 바란다. 우리 교회와 구역 안에 어렵고 힘든 사람이 있다. 그런데 나는 그 사람을 볼 때 함께 부둥켜 안고 내가 당신의 아픔을 더 많이 이해하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하는 자세와 방법으로 다가가는가? 그렇게 어려울 때는 이렇게 살아야 해! 하며 스스로 지혜있는 체 하며 다가가는가? 우리가 함께 기쁨을 나누고 싶다면 정답을 가지고 나가는 모습이 아니라, 같은 마음을 가지고 나아가는 모습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모습인가? 지금 기독교월간지인 교회와 신앙에서는 방언에 대한 논쟁이 뜨겁게 일고 있다. 에스라성경연구원 원장인 노우호목사님은 현대교회의 모든 방언은 거짓이다고 하였다. 여기에 대하여 호서대학교 신학대학원 강사인 김동찬목사와 평택대 김동수교수는 그렇지 않다는 반박을 하였다. 그런데 제가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은 것은 방언이 진짜다 가짜다가 아니라, 김동찬목사님이 제시하는 문봉주대사의 사례이다. 서울대외교학과를 졸업한 후 뉴질랜드대사, 주미공사, 본부 대사직을 맡으신 문봉주대사는 아침형 인간을 넘어서는 새벽형 크리스천이라는 책을 썼다. 그 책에서 문봉주대사는 방언기도나 은사를 굉장히 싫어하였는데, 자신에게 갈급한 일이 생겨서 기도할 때 박경림집사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분이 대뜸 묻는 질문이 방언하세요? 였다. 원래 방언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문봉주대사는 퉁명스럽게 아니요 하고 대답을 하였다. 그리고 박경림집사님과 함께 기도를 하는데 얼마쯤 지났을까? 갑자기 혀가 꼬이고 춤을 추며 방언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어서 기도를 하였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것은 그렇게 방언으로 기도하고 있는데, 박경림집사님이 방언을 통역해 주는 그 내용이었다. 그 내용은 문봉주대사의 어린시절부터 지금까지 모든 삶을 다 저장해 놓았다가 풀어놓은 것처럼 세세한 일까지 다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기도가 마친 후에 어떻게 제 일대기를 다 아십니까? 하고 물었다. 그때 박경림집사님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참 놀랍죠? 점쟁이도 아닌데,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이 한분이시니까 그렇죠. 집사님 안에 계시는 성령님과 제 안에 계시는 성령님이 한분이시기 때문에 성령님이 집사님에 대해서 다 얘기해 주시니까 알 수 있죠.
박경림집사님은 방언통역의 은사가 가능한 것은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이 같은 한 성령님이기 때문이다고 대답을 한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즐거운 자와 함께 웃고, 슬픈 자와 함께 울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성경적인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을 때가 아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역사하여 주실 때 우리는 함께하는 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저와 여러분은 함께하는 자로 살아가고 있는가? 한분이신 성령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마음을 감동하여 주시므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가 하나가 되어지는 기쁨이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즐거워 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는 그런 자여교회로 성장되어져 갈 수 있기를 바란다.
이제 말씀을 맺는다.
빙점으로 유명한 일본의 미우라 아야꼬가 쓴 안 모자라요, 충분해요 라는 글이 있다. 지적장애아 3명의 아이들이 선생님과 함께 산수공부를 하였다. 그날 산수공부의 주제는 모자란가? 안모자란가? 였다. 선생님은 3명의 아이와 3개의 그네가 그려진 그림을 보여주며 모자란가요? 안모자란가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아이들은 안모자라고 충분하다고 대답을 하였다. 흡족한 대답을 들은 선생님은 그러면 이제 줄긋기를 해 보라고 시켰다. 그랬더니 엉뚱하게 지적장애를 가진 아이가 그림에 있는 강아지를 첫 번째 그네와 연결을 시켰다. 그 다음에 두 번째 그네에 첫 번째 아이와 줄긋기를 하니 결국 그네가 모자라게 되었다. 당황한 선생님은 강아지는 그네를 탈 수 없으니 강아지를 그네에서 내리게 하자고 하였다. 그때 줄긋기를 한 아이는 아니예요. 우리가 번갈아 가면서 타면 모자라지 않아요. 강아지도 그네를 타게 해 주세요 하고 대답하였다.
그 다음 문제는 3개의 우산과 4명의 아이가 그려진 그림이었다. 선생님은 그 그림을 보여주며 모자라요? 안모자라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한 아이가 안모자라고 충분하다고 대답을 하였다. 선생님은 그 아이가 틀렸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하여 그 아이에게 줄긋기를 하라고 시켰다. 그래서 아이는 첫 번째 아이와 첫 번째 우산에 줄을 그었다. 그리고 두 번째 아이와 두 번째 우산에 줄을 그었다. 그렇게 하니 결국 한명의 아이가 남게 되었다. 선생님은 다시 물었다. 모자라요? 안모자라요? 그러자 아이는 안모자라요 하고 대답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는 마지막 네 번째 아이와 세 번째 우산과 다시 연결하면서 우산은 함께 쓰면 안모자라요 하고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이 지적장애를 가진 이 아이들의 산수점수는 0점이다. 그런데 그네에 강아지를 태울 수도 있고, 또 우산을 함께 쓸 수도 있는 이 아이들의 인생점수는 100점을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의 인생점수는 몇 점이나 되는가? 인생점수 100점을 맞고 싶으면 마음을 같이하고, 또 마음을 높은 곳에 두지 말고 낮은 곳에 두어 서로를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웃는 자와 함께 웃어서 비록 산수는 못하지만, 인생점수 100점이 가지는 함께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