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쑤안록 전투 이후, 북베트남의 사이공 공격계획은 20일 동안 연구, 토의를 거쳐 티우(Thieu)가 사임한 다음 날인 4월 22일 최종 공격계획을 확정하고 노동당 정치국 대표로 레둑토(Le Duc Tho)가, 사령관으로 둥(Dung)이, 정치장교로 팜 훙(Pham Hung)이 서명한 후 주요 지휘관 및 참모가 배석한 가운데 공격명령을 하달하였다.
쑤안록(Xuan Loc) 전투를 경험한 둥은 현재 남베트남군이 사이공을 중심으로 30~40㎞의 원형으로 최후의 방어선을 편성하고 있기 때문에 밀고 밀리는 대접전이 이루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가 없어 지금까지 신중하게 계획을 수립하였고 가용한 부대가 모두 도착할 때까지 기다렸던 것이다.
둥은 정치의 중심부이며 남베트남의 중추신경인 독립궁, 참모본부, 사이공 방위 사령부, 탄손누트(Tan Son Nhut) 공항, 사이공 경찰국 등의 5대 국방부 직할부대 및 기관을 최종목표로 선정하였고, 이를 점령하기 위한 각 군단의 기동계획을 다음과 같이 수립하였다.
• 제1군단, 제330, 350, 968사단 : 북쪽 13번 도로를 연하여 공격을 개시하여 남베트남군 참모본부를 점령.
• 제2군단 : 제3, 304, 324, 325사단 : 남동 15번 도로를 연하여 공격, 독립궁을 점령.
• 제3군단 : 제10, 316, 320사단 : 북서 1번 도로를 연하여 공격.
• 제4군단 : 제6, 7, 341사단 : 동에서 1번 도로를 연하여 공격, 탄손누트 비행장 점령.
• 제232군 : 제5, 8, 9사단 및 3개 독립연대 : 남쪽 및 남서에서 4번 도로를 연하여 공격. 사이공 방위사령부와 경찰국 점령.
• 특공사단 : 각 군단에 배속되어 사이공 시내에 사전 침투.
북 베트남군의 야전병원의 모습이다.
둥이 하달한 종합 작전지침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 ‘대담한 돌진’만이 기습을 달성할 수 있고 성공을 보장한다. 대담한 돌진은 혁명과업의 최종 완수에 대한 열정, 과감성, 모험을 할 수 있는 용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각오로써 달성될 수 있다.
• 적의 정규사단이 사이공 내부로 축차 철수하지 못하도록 적을 고착시키면서 배후를 차단하고 고착된 적은 후속부대가 소탕하도록 할 것.
• 병력을 절약, 집중하여 작전에 기여할 수 있는 중요목표를 점령할 수 있도록 할 것.
• 기계화 부대는 특수임무부대로 편성하여 신속히 사이공 시내로 돌진하여 부여된 5대 최종목표를 점령하는데 최대의 노력을 경주할 것.
• 특수임무부대의 신속한 돌진을 보장하기 위하여 사전에 투입된 특공사단, 사이공 시의 침투부대, 사이공 정치 공작원들은 중요 교량이나 길목을 사전 점령하여 공격부대를 선도하고 요인 암살 및 민중봉기를 유도할 것.
• 최대한의 화력은 적 참모본부, 탄손누트 공항 등 군사목표에 집중하고 적의 항공지원에 대비하여 가용한 대공화기를 최대로 운용할 것.
• 정치적 과업에 유의하여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특히 노동자들의 생명을 보호하는 데 유의할 것.
• 군사목표에 대해서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고 적의 시내 철수를 최대한 저지하여 시가전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고 특히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역사적 유물을 보존하는 데 유의할 것.
• 공격수행 간 책임을 명확히 분담하되 유리한 상황이 전개되면 타 부대 지역도 과감히 점령하는 등 작전이 유기적으로 협조되도록 할 것.
1975년 4월 북베트남군의 공격루트
전부터 사이공 지역 작전 시 지휘본부였던 벤캇(Ben Cat, 철의 삼각지대 남쪽 지점)에 전방 지휘사령부를 설치하여 둥이 전체 작전을 지휘하고 동부의 제2, 4군단은 레 트롱 탄(Le Trong Tan), 남서, 북서 지역의 제3군단과 제232군은 레둑안(Le Duc Ahn)이 지휘하도록 하였다.
총공격은 4월 29일에 개시하기로 하였고, 제2군단과 제4군단은 4월 26일부터 공격을 개시하여 4월 29일 이전에 비엔 호아(Bien Hoa), 롱탄(Long Thanh), 푸옥레(Phuoc Le)를 점령하도록 하였다. 총공격 개시 전에 남베트남군 및 사이공 시민에게 충격을 주기 위하여 트룽(Trung) 중위가 선도하는 A-37의 탄손누트 공격은 4월 28일 오후에 실시하도록 하였다. 협상을 기대하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며 통수권자를 계속 교체해 가며 스스로 와해의 길을 재촉하는 사이공 정부의 추태를 보면서 총공세를 준비하는 북베트남군 수뇌들은 코웃음을 치고 있었다.
연전연승으로서 사기가 충천한 북베트남군 17개 사단에 비하여 남베트남군의 전력은 너무나 열세하였다. 남베트남군에게 가용한 부대는 온전한 사단이 제5, 25사단의 2개 사단뿐이고 제18사단(1개 연대 부족), 제22사단(재편성, 1개 연대 부족), 해병사단(재편성, 1개 여단 부족), 제1공수여단(쑤안록 전투 시에 피해를 입음), 신편부대인 제468해병여단, 2개 레인저단, 제3기갑여단 등이 고작이었다. 계속되었던 패배, 사이공 정부의 혼란, 몰려드는 피난민 등으로 그나마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어 있었다.
남베트남군 제3군단장 구엔 반 토안(Nguyen Van Toan) 중장의 방어계획은 사이공 지역 일대를 5개 주요 저항선으로 편성하여 방어한다는 것이었다.
3군단장 구엔 반 토안
• 롱안(Long An) 전선 : 제22사단, 제6레인저단
• 쿠추(Cu Chu) 전선 : 제25사단, 제9레인저단
• 빈두옹(Binh Duong) 전선 : 제5사단
• 비엔 호아(Bien Hoa) 전선 : 제18사단, 제468해병여단, 제3기갑여단
• 15번 국도 전선 : 제1공수여단
• 예비 : 해병사단
북베트남군 제2군단의 공격은 4월 26일 17:00에 12개 포병대대의 공격준비사격과 함께 개시되었다. 사이공에서는 대통령직을 고수하고 싶은 후옹(Huong)에게 사퇴하도록 한참 야단인 때다. 반정부 활동의 본거지로 유명한 안쾅(An Quang)사(寺)의 트리쾅(Tri Quang) 승려, 키(Ky), 노동 지도자 트란 쿠옥 부(Tran Quoc Buu) 등이 후옹 축출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국방장관인 돈(Don)과 참모총장도 후옹에게 사퇴를 권고하고 있었다.
북베트남군 제304사단은 2시간 만에 롱탄(Long Thanh)의 기갑학교를 점령하였으나 보병학교에서는 남베트남군의 완강한 저항을 받았다. 당시 보병학교에는 달라트(Da Lat) 육사생도들이 철수하여 그곳에 있었고 기갑학교에서 철수한 장병들까지 합세하여 방어하였다. 그들은 방어선이 돌파당하면 계속 역습을 가하여 밀고 밀리는 전투가 4월 27일, 28일 내내 계속되었고 4월 29일 12:00까지 버티었다.
북베트남군 제325사단은 롱탄 외곽 지역을 점령한 후 공격을 계속하였고, 제3사단도 4월 27일 15:00까지는 푸옥레(Phuoc Le)를 점령하고 붕타우(Vung Tau) 방향으로 공격을 계속하였다.
북베트남군 제2, 4군단은 동나이(Dong Nai) 강과 사이공 강의 두 개의 강을 도하하여야 사이공 시내에 진입할 수 있기 때문에 공격을 서둘러야 했다. 제4군단은 비엔 호아(Bien Hoa) 공군기지를 공격하였으나 남베트남군 제18사단과 제3기갑여단도 만만치는 않았다. 남베트남군은 대전차호까지 구축하여 북베트남군 기계화 부대의 공격을 저지하였다. 4월 28일에는 북베트남군의 포격으로 비엔 호아 공군기지는 운용할 수 없게 되어 항공기를 탄손누트(Tan Son Nhut) 비행장과 제4군단 지역 트라녹(Tra Noc) 기지로 소개시켰다. 강상의 각 교량들을 뺏고 뺏기는 혈전이 계속되었다. 후방에 사전 침투한 적 특수부대들이 점령하면 증원부대가 이를 탈환하고, 증원부대가 돌아가면 다시 뺏는 식이었다. 이런 과정이 수차례 반복된 교량이 동나이 다리였다.
북베트남군 제1군단, 제3군단, 제232군의 진격도 신통치 않았다. 4월 28일까지 남베트남군이 설정한 주 방어선은 그런대로 지켜졌다.
4월 28일 오전 남베트남군 참모총장 카오 반 비엔(Cao Van Vien)은 연립정부의 구성은 곧 자신의 죽음을 뜻하기 때문에 북베트남과 타협이 가능한 것으로 믿고 사는 사람에 이 땅을 인계하고 떠나는 것이 현명하다는 구실로 미 대사관에 들어서면서 미 해병대 경계병에게 경례를 하고 사무실로 들어가 별이 4개 달린 전투복을 벗어버리고 사복으로 갈아입고 테니스 코트장에서 헬기로 미 해군 함정으로 탈출하였다. 아직 전장에는 수만 명의 남베트남군이 북베트남군의 공세를 저지하고 있는데 군의 최고 선임자이며 티우가 사임한 이후 사실상의 군 총사령관이라는 사람이 모든 것을 팽개치고 혼자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하여 일찍 도주를 한 것이다. 군은 제3군단장 토안(Toan) 중장과 사이공 방위사령관 구엔 반 민(Nguyen Van Minh) 소장이 지휘하고 있었고 총사령관은 없어진 것이다.
4월 28일 야간에 탄손누트 공항을 폭격하여 심리적인 충격을 준 후 4월 29일 05:00에 북베트남군 5개 사단은 일제히 치열한 공격준비사격을 실시한 후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북베트남군 제304사단은 오전 내내 혈전으로 보병학교를 3일 만에야 점령하고 롱빈(Long Binh) 기지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제325사단은 동나이 강 나루터에 도착하여 도하를 시작하였다. 제3사단은 오후에 붕타우를 점령하였다. 제324사단의 1개 연대는 1개 기갑연대와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15:00에 출발하였다. 그들은 남베트남군의 방어선이 무너지고 적이 와해될 때에 신속히 전과 확대하여 사이공 시내에 제일 먼저 진입할 부대로서 이미 새 군복을 착용하고 팔에는 붉은 완장을 차고 있었다.
북베트남군 제4군단은 비엔 호아 비행장을 3개 방향에서 계속 공격을 하였으나 탈취할 수가 없었다. 방어하고 있던 남베트남군 제18사단은 많은 손실을 입었고 제3기갑여단은 탄약이 부족하였으나 조치해 줄 만한 상급부대 지휘관이나 참모들은 탈출하는 데 정신이 없었다.
북베트남군 제1군단이 공격하고 남베트남군 제5사단이 방어하고 있는 빈두옹(Binh Duong) 전선은 4월 29일은 방어선이 지탱되었다. 북베트남군 제3군단의 공격을 받은 남베트남군 제25사단의 방어선은 무너졌다. 반메투오(Ban Me Tuot)를 점령하고 남베트남군의 중부 고원지대 철수 시 계속 공격하였던 북베트남군 제3군단의 공격을 받은 제25사단은 와해되었고 사단장 리톤바(Ly Ton Ba) 준장은 도주하였으나 후에 체포되었다. 북베트남군 제3군단은 쾅트룽(Quang Trung) 훈련소를 계속 공격하여 남베트남군의 항복을 받아냈다.
북베트남군 232군의 공격을 방어하는 롱안(Long An) 전선의 남베트남군 제22사단도 전선을 확보하고 있었고 북베트남군의 일부가 4번 도로를 차단하자 피아 공방전이 벌어졌다. 제22사단도 많은 손실을 입었다.
총공격을 받은 남베트남군의 전선은 4월 29일 밤까지 사이공 외곽 10~20㎞ 지역에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5:1 이상의 전투력 차이와 높은 사기는 일거에 남베트남군을 압도할 수 있었는데도 공격은 사실 지지부진이었다. 남베트남군에 부족한 것은 예비부대였고 북베트남군에게 부족한 것은 훈련, 과감성, 독단능력 등이었다. 북베트남군의 신병들은 잔뜩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남베트남군 제4군단 지역은 아무 이상이 없었다.
미국의 철수작전은 4월 19일부터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심리적 요인을 고려하여 야간에 C-130, C-141 등의 대형 수송기들이 운용되어 임시 캠프인 괌으로 수송되었다. 철수시킬 남베트남인들은 공산화됨으로써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될 사람, 각종 미국기관에 근무하였던 고용인, 현지 미국인이 추천하는 인원 등이다. 탄손누트(Tan Son Nhut) 공항에서의 철수는 4월 28일로서 끝나고 이후는 헬기에 의해 해상에 대기하고 있는 미군 함정으로 철수시켰다.
4월 29일부터 미 대사관에서 최고 70명까지 탑승시킬 수 있는 CH-53으로 철수를 시작하였으나 연료가 다하여 18:30 이후에는 12명까지 탑승시킬 수 있는 UH-1 헬기로 야간철수를 계속하였다. 북베트남군은 미국의 철수를 방해하지 않았다. 4월 29일만 해도 남베트남 공군기 4대가 북베트남군 대공화기에 의하여 격추되었었다. 북베트남군은 미군 철수를 방해하여 미 제7함대의 공격을 자초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며 자기네들에게 방해가 되는 사람들은 한 사람이라도 더 철수시키는 것이 바람직했던 것이다.
후속 헬기들의 착륙을 위해 버려지는 헬기
미국의 철수 인원에 포함되지 못하는 남베트남인들은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여 해안으로 나가 거룻배를 이용하여 미군 함정이 있는 곳까지 도달하여 구조를 요청하였고 미군은 이들을 전부 받아주었다. 피난민을 가득 실은 배들이 계속 줄을 이었다.
4월 28일 남베트남의 3일 대통령 두옹 반 민(Duong Van Minh)에게 협상이 안 될 경우에 철수할 의향을 묻자, 그는 웃으면서 고개를 흔들고 “남베트남 사람들은 내 민족이다. 나는 떠날 수 없다.”고 말하면서 그의 손자, 그의 딸과 대령인 사위, 조카들의 철수를 부탁했다. 그의 오랜 친구였던 해군 참모총장 디에프 쾅 퉁(Diep Quang Thung)이 같이 철수하자고 4월 29일 마지막으로 종용하였을 때도 민은 거절하였다.
해군 참모총장 디에프 쾅 퉁
남베트남군 제2군단장이었던 팜반푸(Pham Van Phu) 소장은 가족들의 철수를 부탁하고 자신은 그대로 남았다가 북베트남군이 점령한 2일 후에 권총으로 자살하였다. 남베트남군 제1군단장 트룽(Truong)은 키(Ky)의 자가용 헬기로 미 함정에 안착하였고, 남베트남군 제3군단장 토안(Toan), 티우(Thieu)의 안보담당 보좌관이었고 부정으로 이름난 당 반 쾅(Dang Van Quang) 중장, 참모총장이었던 비엔(Vien)이 떠난 후옹이 후임으로 임명한 빈록(Vinh Loc) 중장 등도 다 탈출하였다.
팜 반 푸 소장
피난하는 고위인사.. 전투복 차림이 고 쾅 트룽 1군단사령관, 콧수염이 구엔 카오 키 부통령 겸 공군 원수
당 반 쾅 중장
빈 록 중장
병약한 마틴 미 대사는 끝까지 신의를 지켰다. 4월 28일 부인을 먼저 철수시키자는 직원들의 건의에 남베트남 사람들에게 심리적인 영향을 준다고 거절하고 공관에 사물들은 그대로 놔둔 채 4월 30일 03:45에 마지막 두 번째 헬기로 부인과 같이 철수 헬기에 올랐다.
그래험 마틴 주베트남 미 대사
미 대사관에는 기다리는 사람이 400여 명도 더 넘었다. 때로는 질서가 흐트러지기도 하였으나 미 해병대가 강권으로 질서를 바로 잡았다. 마틴 대사가 떠나면서 6대를 더 요청한다고 하였으나 미국인 철수완료를 초조하게 기다리는 미 국무부 상황실에서 작전을 종료시키라는 지시가 내려와 마지막 헬기가 05:24에 이륙하고 철수작전은 끝났다. 키신저(Kissinger)는 자랑스럽게 미국의 철수작전이 종료되었다고 기자들에게 발표하였다.
대사관으로 몰려든 피난민들을 제지하는 미 해병대
주베트남 한국대사 이대용(李大鎔) 외 140명의 한국인이 탑승을 하지 못하였고 이 대사는 이후 5년 동안 북베트남 치하에서 온갖 고초를 겪으며 억류생활을 해야 했다.
주베트남 한국공사 이대용
미군들은 4월 29일 23:30부터 장비를 폭파하기 시작하였고 마지막 남은 미 해병대는 폭약에 지연신관을 장착한 후 4월 30일 07:30에 밖에서 철수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개스탄을 던지며 문을 폐쇄하고 07:53에 대사관 옥상에서 이륙함으로써 모든 미국인은 이제 사이공을 떠났다. 잠시 후 미 대사관 건물 내부는 폭파되었다.
사이공 함락 직전, 미국 대사관 옥상을 통해 탈출하는 사람들
헬기에 타려는 베트남인을 주먹으로 제지하는 모습
4월 29일, 30일 양일 18시간 동안 헬기 70대, 630쇼티로 미국인 1,373명, 남베트남인 5,595명, 제3국인(한국인, 호주인, 태국인 등)83명을 철수시킴으로서 사상 최대 규모의 헬기 철수 작전이 단시간 내에 이루어졌다. 4월 중 미국인 6,763명, 남베트남인과 제3국인(한국인, 호주인, 태국인 등)을 포함하여 45,125명, 거룻배 어선을 이용하여 미 함정에 탑승한 6,000여 명이 남베트남을 탈출하였다. 기타 민간 항공기를 이용하거나 비밀리에 수송된 인원도 4,000명 가까이 되어 패망 직전까지 남베트남을 탈출한 남베트남 사람들은 65,000여 명으로 추산되었다.
헬기로 철수하는 미국인들
미국의 철수작전은 마틴 대사 지침 하에 미군이 수행하였다. 미 의회는 철수 후에 미군과 군용장비를 운용하여 남베트남인을 철수시킨 것이 못마땅하였다. 대통령이 해외에 주재하는 미국인을 보호하는데 필요한 조치를 할 수 있는 권리는 인정하나 남베트남인을 철수시키는 데에 대통령이 의회의 승인 없이 함선, 항공기, 해병대를 운용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는 논쟁이 의회에서 벌어졌다.
포드(Ford) 대통령은 끝없는 논쟁에 지쳐 백악관 대변인을 통하여 “남베트남인을 철수시키는데 미군을 운용한 것은 합법성을 따져서 운용했던 것이 아니라 도의적인 측면에서 미군을 운용했고 남베트남인들을 철수시켰다. 그들은 공산화 이후 죽을 것이기 때문에 구해주었고 지금도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라고 발표하였다.
대통령 취임식을 마친 민(Minh)은 부통령에 구엔 반 후엔(Nguyen Van Huyen) 전 하원의장, 수상에 부 반 마우(Vu Van Mau) 반 정부파 하원의원, 공보장관에 그의 보좌관이며 하원의원인 리 퀴 청(Ly Qui Chung)을 임명하는 등 마지막 내각을 구성하였다. 민이 아직 협상이 가능하다고 보는 것은 북베트남이 통일하게 되면 인도차이나 3국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되므로 중국이 북베트남의 무력에 의한 통일을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고 임시혁명정부(PRG)도 북베트남의 지배를 원치 않고 있으며 북베트남도 남베트남 전체를 통치할 행정조직이 아직은 안 되어 있기 때문에 일시적인 과도정부가 필요할 것이고 또한 북베트남도 원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구엔 반 후엔
부 반 마우
북베트남에서는 이미 친 중국파가 완전히 거세되어 레 두안(Le Duan)을 비롯한 친소련파가 권력을 장악하고 있고 북베트남 내 임시혁명정부의 위치, 북베트남이 사전에 남베트남 점령지 행정을 담당할 요원을 양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민이 알 리가 없는 것이다.
군인들을 치하하는 레 두안
민은 4월 29일 오전에 공보장관 리퀴청 외 3명을 탄손누트(Tan Son Nhut)에 있는 합동군사반의 임시혁명정부 대표에게 보냈다. 임시혁명정부 대표(북베트남군 상좌)는 정원에서 자기들이 재배했다는 바나나를 같이 먹자고 하면서 농담으로 시간을 끌었다. 남베트남측 대표들이 재촉하자 그들은 군인이라 정치적인 문제는 말할 수 없다고 얼버무렸다.
오후에는 소위 재야 중립파의 대표적 인물이라고 꼽히는 트란 곡 리엥(Tran Ngoc Lieng) 변호사, 추 탐 루안(Chu Tam Luan) 교수, 찬 틴(Chan Tin) 신부 등 3명을 합동군사반에 보냈다. 그들은 시간을 끌었고 군대를 해산하라는 주장을 되풀이하였다. 날이 어두워지고 포탄이 계속 떨어져 남베트남측 대표들은 돌아올 수가 없었다.
찬 틴 신부
4월 30일 날이 밝으면서 북베트남군의 공격은 재개되었다. 남베트남군에게는 상급부대로부터 아무런 지시도 없었다. 롱안(Long An) 전선의 남베트남군 제22사단 병사들은 북베트남군 T-54 전차가 사이공으로 진격하고 있는데도 상급부대에서 왜 아무런 조치가 없는가 하고 의문을 제기했다.
비엔 호아(Bien Hoa) 전선을 고수했던 남베트남군은 밀리기 시작했다. 북베트남군은 공격 4일 만에 비엔 호아 공군기지를 탈취할 수 있었다. 남베트남군은 후퇴하면서 전투를 계속 하였다. 쑤안록(Xuan Loc) 전투에서 명성을 날렸던 남베트남군 제18사단 장병들은 사단장을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직 건제를 유지하고 있었고 사단장 다오(Dao) 준장을 떠나지 않았다. 다오는 전날 미군 친구로부터 같이 철수하지 않겠느냐는 무전을 받았으나 그는 거절하였다.
전설이 되어버린 남베트남 보병 제18사단, 사단이라고 말하기엔 너무 부족한 정원 5,000명짜리 여단급의 부대지만, 빛나는 공적을 세웠다.
레 민 다오 준장은 남베트남 패망 후 행방불명되었다. 한때 전사했다는 소문도 있었으나 훗날 알려진 바로는 그는 북베트남에 체포되어 재교육수용소에서 전향을 권유당했으나 끝까지 거부하였다. 결국 17년간 수용소에서 투옥된 후 베트남에서 탈출하여(북베트남이 추방하였다는 말도 있다)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미국 망명후, 연설하는 레 민 다오 준장.
북베트남군 제3군단 예하 제10사단은 08:00 경 탄손누트 공항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다. 제2군단도 09:30까지는 사이공 강 다리까지 진격하였고 교량은 사전 침투한 요원들이 확보해 놓고 있었다.
탄손누트 공항에서 전투를 벌이는 남베트남군
탄손누트 공항을 공격하는 북베트남군
13번 도로에 연하여 빈두옹(Binh Duong) 전선을 고수하였던 남베트남군 제5사단장 레 구엔 비(Le Nguyen Vy) 준장은 군단과 통신이 두절되자, 사이공에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판단하고 장병들을 집결시켜 가용한 차량을 총동원하여 사이공으로 철수하도록 하였다. 사이공에서 약 50㎞ 북쪽으로 떨어져 있는 기지에서 철수하던 제5사단은 도로를 차단하고 있던 북베트남군의 공격을 받고 사단은 와해되어 사단참모들은 포로가 되었고 사단장 레 구엔 비 준장은 자결하고 말았다. 전쟁지도의 부재가 빚은 참극 중의 하나인 것이다.
레 구엔 비 준장
연대장 시절의 레 구엔 비... 그는 함께 근무하던 미군고문단과 시찰 온 미군 장성들에게 매우 유능하다는 평을 들었던 보기드문 예외적인 능력의 소유자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4월 30일 아침 일찍부터 합동군사반과 협상을 타진했던 민은 아무런 진전이 없고 북베트남군은 시시각각 사이공으로 진격을 계속하고 있자 오전 9시경 그는 무조건 항복을 결심하고 10:20에 라디오 방송으로 항복을 발표하였다.
“전 남베트남군은 적대행위를 중지하고 현 위치에서 정지하라. 본인은 베트남인끼리 더 이상의 불필요한 유혈을 방지하고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하여 남베트남군에게 현 위치에서 정지할 것을 요청한다. 본인은 또한 임시혁명정부군도 적대행위를 중지할 것을 요청한다. 우리는 임시혁명정부와 정부를 인계하기 위한 절차를 논의하게 되기를 희망한다.”
이 항복으로 남베트남(The Republic of Vietnam)이라는 국가가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되었다.
전 남베트남군에게 항복명령을 내릴 군 지휘관은 아무도 없었다. 비엔(Vien)이 떠난 후 참모총장으로 임명되었던 빈록(Vinh Loc)도 떠나가고 동생이 북베트남군 소장이었다는 참모본부 참모장 동 반 쿠엔(Dong Van Khuyen) 중장도 탈출하였고 참모본부에 남아있는 장성은 구엔 후 한(Nguyen Huu Hanh) 준장 뿐이었다.
참모본부 참모장 동 반 쿠엔 중장
구엔 후 한 준장
한 준장은 10:30에 라디오 방송으로 전 예하부대에게 무기를 버리고 최초로 접촉되는 북베트남군에게 항복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후에 한은 오래 전부터 북베트남의 첩자라는 것이 밝혀졌다. 참모본부의 책임 있는 장군들은 다 도망하여 버리고 도망할 필요가 없는 북베트남의 스파이가 남베트남군에게 항복명령을 하게 되는 웃지 못 할 비참한 현실이 발생한 것이다.
지금까지 자신의 생명을 걸고 용감하게 싸웠던 장병들은 깊은 허탈감에 빠졌고, 이 허탈감은 여러 가지 형태로 표출되었다. 끝까지 싸우겠다고 계속 항전하는 자, 허공에 총을 쏘아대며 울부짖는 자, 모든 것이 끝났다고 자결하는 자, 분노와 증오심에 어쩔 줄 모르며 약탈을 자행하면서 미국인을 모두 쏘아 죽이겠다고 날뛰는 자, 사복으로 갈아입고 어디론가 사라지는 자 등 갖가지였다.
남베트남군들이 버리고 간 군복과 군화들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AC-119 건쉽의 조종사 티엔 중위
남베트남군 제4군단 지역은 아직도 건재하였다. 이 지역에는 북베트남군이 추가로 투입되지도 않았고 이 지역에 있는 북베트남군의 일부는 사이공 지역 공세로 전환되기도 하여, 이 지역은 온존되었었다. 제4군단장 구엔 코아 남(Nguyen Khoa Nam) 중장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자기 군단지역을 지킬 수 있었다.
제4군단장 구엔 코아 남 중장
남 중장은 미국의 철수가 한창일 때 남베트남을 떠나기 위하여 사이공으로 도주하는 성장을 권총으로 사살하였다. 또 다른 성장이 해상으로 도주하자 헬기로 추격하여 사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남 중장은 민의 항복발표를 듣고 권총으로 자결의 길을 택하였다. 남 중장은 남베트남군 중에서 자신의 임무를 끝까지 수행한 소수의 떳떳한 장성이었다. 제4군단 예하 제7, 9, 21사단은 해산되었고 제7사단장 트란 반 하이(Tran Van Hai) 준장은 자결의 길을 택하였다.
제7사단장 트란 반 하이 준장
벤캣(Ben Cat)에 있는 북베트남군 전선 사령부는 환희로 가득 찼다. 레둑토(Le Duc Tho), 팜 훙(Pham Hung), 반 티엔 둥(Van Tien Dung) 이하 모든 간부들은 서로 끌어안고 환희와 눈물을 흘렸다. 둥은 예하부대에게 계획대로 공격을 계속하여 최종목표를 모두 점령하도록 하고 저항하는 남베트남군에 대해서는 무자비하게 공격하도록 지시하였다.
남베트남 독립궁을 최종목표로 부여받은 제2군단 예하 특수임무부대는 진격을 계속하고 있었다. 10:20에 민의 항복 발표가 있기까지 사이공 시내에 진입하지 못하였다.
11:30에 그들은 사이공 동물원 일대에서 남베트남군의 저항을 받았다. 시간이 지체되자 사이공 여자 게릴라의 안내로 북베트남군 전차 1대가 미 대사관 앞을 돌아 독립궁으로 직행하였다. 폐쇄된 독립궁 철문을 그대로 밀치고 들어가 남베트남군 경비병들을 무장해제 시킨 후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섰다. 민 이하 그의 각료와 보좌관 몇 명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북베트남군 병사와 여자 게릴라가 게양대에서 남베트남 국기를 끌어내리고 임시혁명정부 기를 게양하였다. 시간은 12:45이었다.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에 입성하는 북베트남군
북베트남 탱크가 남베트남 대통령 관저로 진입하면서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패배로 끝났다.
남베트남 독립궁을 점령한 북베트남군
대통령궁을 포위한 북베트남 탱크
동물원에서 남베트남군의 저항을 물리친 북베트남군 특수임무부대 지휘관 구엔 반 탕(Nguyen Van Tang) 소좌는 수상 집무실에서 새 군복으로 갈아입고 훈장까지 부착하였다. 그는 즉시 독립궁으로 향하였다. 13:45에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서자 민은 그에게 정부를 이양하는 절차를 논의하자고 말하였다.
탕은 소리쳤다.
“무엇을 이양한단 말인가? 당신들은 패배자요, 항복자일 뿐이다.”
북베트남군들이 좌우로 늘어서서 총을 겨누고 있는 가운데 민 이하 패배자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연행되어 갔다.
민 대통령을 체포하는 북베트남군
포로가 되어 재교육 수용소로 끌려가는 남베트남군
사이공에서 미군 함선으로 탈출한 남베트남인들은 괌의 남베트남인 수용소에 일단 도착하였다. 남베트남군 장성들은 한곳에 따로 수용되었다. 3군단장이었던 토안(Toan)이 휠체어를 차지하자 결막염으로 고통을 받던 1군단장 트룽(Truong)이 다른 의자를 찾고 있었다. 이때 미 해군장교가 들어와 많은 별들이 달린 군복을 벗고 사복으로 갈아입도록 요구하였다.
“우리는 그대로 군복을 착용할 수 없는가?”
하고 처량한 목소리로 간청하자 미 해군장교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신들은 이제 군대도 국가도 없는 사람들이 아닌가?”
그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말없이 군복을 벗어야만 했다.
1975년 4월 30일 오후부터 사이공 시내에는 북베트남군들이 몰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겁에 질린 채 문을 걸어 잠그고 집안에 웅크리고 있으면서 창문을 통해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북베트남군의 행진을 지켜보았다. 일부 동조 시민들과 지하활동 요원들이 이들을 환영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북베트남군 병사들도 어리둥절하였다. 미제의 압제하에 있었던 남반부를 해방시켰는데 환영하는 열기는 찾아볼 수도 없고 시민들의 눈초리는 경계의 빛이 역력하고 차가왔다. 일부의 병사들은 호텔을 이용할 수 있었으나 대부분은 텅빈 거리에서 야영을 하여야 했다.
남베트남의 항복방송이 나오자 사이공과는 대조적으로 하노이에서는 열광이었다. 수 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폭죽을 터뜨리며 환성을 지르고 노래 부르며 벅찬 감동을 이기지 못하여 울고 있는 사람도 많았다.
사이공 전선 사령부에서는 5월 1일 승리를 자축하고 노동절을 기념하는 경축연이 벌어졌다. 샴페인을 터뜨리며 그들은 승자의 기쁨을 만끽하였다. 총사령관 반 티엔 둥(Van Tien Dung)은 사이공 지역 일대의 각 부대 순시에 들어갔다. 거리에는 수도 헤아릴 수 없는 남베트남군 포로들이 줄 지어 연행되고 있었다. 남베트남군 참모본부에는 모든 비밀문서, 지휘관 명단, 컴퓨터에 수록된 100만 명 이상의 남베트남군 명단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반 티엔 둥
포로가 된 남베트남군들
탄손누트(Tan Son Nhut)에 있는 캠프 데이비스(Camp Davis)에서 북베트남군 각 군단장들과 정치장교들이 모여 남베트남군의 유기장비와 포로 처리, 각 부대 시설 등의 처리문제를 논의하였다. 남베트남군 부대마다 “명예, 책임, 조국”이라고 쓴 구호들이 부착되어 있었다. 탄손누트 공항 정문을 조금 지나서 “연합군 장병들의 고귀한 희생은 영원히 기억될 것(The Noble Sacrifice of the Allied Soldiers Will Never be Forgotton)”이라고 새겨진 연합군 전몰 장병 추모비도 있었다. 이런 것은 다 지워지고 호치민 어록으로 대치되어야 할 것들이었다.
5월 7일 남베트남의 점령 통치를 위하여 남베트남혁명위원회(COSVN) 군사위원장이며 전선사령부 부사령관이었던 트란 반 트라(Tran Van Tra)를 위원장으로 하는 군사 행정위원회가 남베트남의 독립궁에 설치되었다. 이 기구의 실권은 북베트남 노동당 중앙위원인 보 반 키에(Vo Van Khiet)가 장악하고 있었고 모든 지시는 당 정치국으로부터 내려왔다. 정치국원인 레 둑 토(Le Duc Tho)와 팜 훙(Pham Hung)은 현지에서 계속 지도하였고, 정부의 각 부서, 경찰서, 은행 등 주요기관은 북베트남에서 파견된 요원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보 반 키에 왼쪽에서 2번째
레 둑 토
팜 훙
북베트남은 민족해방전선(NLF), 임시혁명정부(RPG)의 핵심요원들은 공세에 아예 참여시키지도 않고 하노이에 있게 하였고, 남베트남을 점령한 후에도 이들을 즉각 사이공으로 보내지 않고 5월 13일에야 사이공으로 보냈다. 그것은 5월 15일 전승 축하식이 계획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북베트남의 수뇌들이 줄 지어 사이공으로 내려왔다. 레 두안(Le Duan)과 보 구엔 지압(Vo Nguyen Giap)은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면서 흐르는 눈물을 감추지 못하고 손수건으로 닦으면서 환영나온 인사들을 포옹하였다.
5월 15일 사이공 독립궁에서는 수많은 인파가 동원된 가운데 승전 축하식이 거행되었다. 북베트남의 명목상 국가원수인 주석 톤 둑 탕(Ton Duc Thang), 민족해방전선과 임시혁명정부를 대표하여 구엔 후 토(Ngyuen Huu Tho) 민족해방전선 의장, 북베트남 노동당을 대표하여 팜 훙의 축사가 있었다. 이들은 모두 승리를 찬양하고 패자는 미 제국주의자들뿐이며 전 베트남인이 승자라고 말하였다.
톤 둑 탕
구엔 후 토
이어서 시가행진이 시작되었다. 청년, 학생, 각 종교단체, 사이공 시의 모든 단체와 모든 계층의 대표자들이 북베트남 기, 임시혁명정부 기, 호치민의 초상화를 들고 지나갔다. 북베트남군도 뒤따랐다. 보병, 포병, 전차, 대공화기, 대공미사일 등이 위용을 자랑하였고 수많은 비행기 편대가 축하비행을 하였다. 제일 후미에 초라한 복장의 엉성한 베트콩 몇 개 중대가 행진하였다. 이미 베트콩 사단은 해체되었던 것이다.
남베트남 패망이후에 남베트남군 장비인 v-100 보병수송차를 노획해서 시가행진을 하는 북베트남군
5월 20일부터 달라트(Da Lat)의 호텔에서 북베트남의 수뇌들과 민족해방전선, 임시혁명정부, 각계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전쟁종결 회의가 열렸다. 지금까지의 승리를 회고하고 차후의 정책을 논의하기 위한 회의였으나 이는 노동당 정치국에서 지시된 내용을 전파하는데 불과한 것이었다.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점령한 후에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소위 반동분자들의 처치와 사회체제를 공산사회로 전환시키는 부의 재분배, 국유화, 집단화였다.
모든 반동분자들에 대하여는 일정기간 재교육을 받으면서 자기의 죄과를 씻게 하고 새로운 공산사회 건설에 참여시킨다는 지령이 내려졌다.
대상자별 교육기간과 교육내용은 다음과 같이 결정되었다.
○ 교육기간 및 대상자
• 3일 : 병사와 하급공무원
• 10일 : 하급 장교, 정부기관, 정당의 중견 간부
• 30일 : 고급 장교, 경찰 간부, 정부 고관, 각 정당 지도자
○ 교육 내용
• 각자 저지른 과오에 대한 자아비판과 상호비판
• 미국 측이 저지른 범죄
• 공산 혁명 영웅의 전기 학습
• 혁명 정부의 시책
• 노동의 존엄성 인식
재교육 장소는 각 지역 별로 전에 베트콩들이 기지로 이용했던 지역이었다. 사이공 지역의 재교육 수용 소는 타이닌(Tay Ninh) 省으로 지난 날 자기네들의 본거지였다. 재교육 해당 인원은 각자 식량을 지참하고 신고하도록 하였고 재교육 인원은 전투 간에 포로가 되었거나 항복 후 즉각 체포된 수많은 사람들을 제외하고도 약 30여 만명으로 집계되었다.
기간이 얼마 되지 않아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신고한 사람들도 있었으나 정해진 기간 내에 돌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시민들이 항의하자 그들은 며칠 분의 식량만 준비하라고 하였지 기간은 정하지 않았다고 발뺌하였다.
최근에 북베트남의 개방정책의 일환으로 일부 장기 재교육자들을 석방하였으나 아직도 수용된 사람이 많이 있다고 한다. 이들은 티우(Thieu) 정부의 고위관리, 미 제국주의자에 빌붙은 자,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지 못하는 자, 인민의 고혈을 빤 자 등이라는 것이다.
베트남의 재교육 수용소
재교육의 실상은 정말 가혹한 것이었다.
• 주거시설은 전에 자기들이 사용하던 움막같은 곳에 50여명 단위로 집어넣어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 1일 식량은 1인당 200그램 정도이고 국은 소금 국 정도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여 영양부족에 의한 각기병 같은 것이 만연하였다.
• 피복은 6개월 만에 검은 파자마 1벌이 지급되었고 물은 일주일에 한 초롱 정도가 보급되었다.
• 엄격한 자아비판과 상호비판이 행하여 졌고 태도가 불손하거나 비타협적인 인사를 고문하고 현장에서 처형하기도 하였다.
• 2개월에 한번씩 가족과 간단한 편지를 교환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편지의 형식과 내용은 사전에 규정되어 그대로 쓰지 않으면 보내지도 않았다.
• 작업은 품위를 떨어뜨리거나 위험한 일을 시켰다. 변소 치우는 작업은 벌로 행해졌고 각 지역에 수없이 매설된 지뢰 제거작업은 주로 이들을 이용하였다. 지뢰 제거요령에 대한 교육이나 제거장비도 지급하지 않고 그대로 작업을 강행시켜 희생자가 많았다. 노동의 신성함을 인식시키는 작업의 일환인 것이다.
• 사이공 근처의 경찰관 수용소에서는 영양실조로 거동이 불가능한 자들을 생매장하였다. 이것은 그들의 자체조사에서 밝혀졌다.
• 재교육 시작 1년이 되는 1976년 6월에 북베트남이 비공식적으로 인정한 바에 따르면 재교육 수용소에 남아 있는 약 20여 만명을 12개 부류로 성분을 분류하여 재재교육 단계로 들어갔다.
다음은 사회체제의 전환이었다. 1975년 6월부터 전 은행예금을 동결하고 4개월 후에 화폐개혁을 실시하여 1인당 균등하게 미화 40달러에 상당하는 돈을 바꾸도록 하였다.
도시 인구를 그들이 통제 가능한 범위로 줄이기 위하여 1차로 사이공의 20여 만명을 포함하여 전국적으로 150만 명을 그들의 신 경제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그들은 1980년까지 총 500만 명을 이주시키기로 계획하였다.
노동자들의 천국을 만들기 위해 각 직장, 공장들은 상위 직위자와 하위 직위자들이 서로 교체하여 직무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다시 원상복귀시켰다.
모든 신문이 사라지고 내용이 비슷한 2개의 당 기관지만 발간되었다. 모든 서적은 검열을 받아야 했고 금서 목록이 작성되었다. 서점은 말할 것도 없고 개인이 소장한 모든 서적들도 몰수되어 역사, 종교 서적을 불문하고 소각되었다.
영화, 음악도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퇴폐적이고 감상적인 작품들은 모두 사라져야 했고 혁명의 영웅, 할당률을 초과달성하는 모범 집단농장 등을 찬양하는 영화나 음악, 군가로 대치되어 갔다. 20가구 당 1개의 스피커가 사이공의 거리와 골목에 배치되어 요란한 군가와 지시사항, 성명서가 방송되었다.
점령 후 몇 달 동안은 그대로 감시하고 있었으나 티우 정권하에서 반정부 활동의 중심이 되었던 카톨릭, 불교에 대한 조치도 시작되었다. 자기들의 혁명과업 수행에 정말 많은 공헌을 하였고 이들을 이용하기도 하였으나 이제는 가장 거추장스러운 방해자인 것이다. 그대로 두면 자기들이 당할 차례인 것은 뻔한 일인 것이다. 반정부 활동의 중심지였던 안쾅(An Quang)사는 폐쇄되었고 트리쾅(Tri Quang), 티엔 민(Tien Minh) 등의 유명한 승려들이 체포되어 갔다. 티우의 부정 규탄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트란 훈 탄(Tran Hun Thanh) 신부, 호앙 퀸(Hoang Quinh) 신부 등 수백 명의 신부들이 투옥되었다. 이들의 죄명은 미국 CIA의 첩자라는 것이었다. 이 유명한 승려, 신부들은 재교육이 필요 없는 인사들로서 다시는 베트남 사회에 나타나지 못하고 옥사해야 했다. 미국의 인권운동가들이나 유명한 미 상원의원들이 이들을 면회할 수도 없게 되었고, 언론들이 이들의 구속을 대서특필할 수가 없었음은 물론이다. 1976년 12월 미국의 반전 운동가들이 북베트남에게 그렇게 약속하고 보장한다던 인권문제에 대한 조치를 공개하라고 메아리 없는 독백을 하기는 하였었다.
트리쾅 승려
티엔 민 승려
트란 후 탄 신부
식량, 생활 필수품의 판매가 통제되어 암시장에서 그 가격은 부르는게 값이었다. 80피아스타이던 쌀 1㎏이 500피아스타, 200피아스타이던 휘발유 1ℓ가 1,600피아스타로 뛰어 올랐고 닭 1마리의 값이 노동자 월 평균수입의 절반이었다.
자본주의의 퇴폐를 상징하는 장발과 헐렁한 바지들은 거리에서 단속되었다. 반대로 북에서 온 관리나 병사들이 헐렁한 바지를 입고 머리를 길렀다. 또한 TV, 냉장고, 녹음기, 전축, 카메라, 오토바이 등이 압수되거나 뇌물로 또는 암시장에서의 거래로 북베트남의 관리나 당 간부, 군인들에게 엄청나게 흘러 들어갔다. 부의 이동이 시작된 것이다. 소위 부르조아지들의 호화스러운 별장들은 계속 주인이 바뀌어 갔다. 그것은 하노이에서 내려오는 간부들의 직위가 계속 올라감에 따라 별장을 양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공장, 사무실, 인민공사, 부락 집단농장에서는 목표 초과달성 운동이 전개되었다. 호치민 생일, 당 창건일, 노동당 전당대회 같은 무슨 기념일을 앞두고 대대적으로 전개되는 공산사회에서의 목표 초과달성 운동에 대해서는 우리가 익히 들어온 바와 같다.
남베트남 패망 후 보트 피플로 알려진 남베트남인들의 대탈주극은 보도를 통하여 전 세계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가까운 타이, 말레이시아, 브루나이, 인도네시아는 말할 것도 없고, 멀리 오스트레일리아까지도 이 보트 피플들이 떠내려 갔다. 탈출 중에 사망한 사람을 제외하고도 남베트남 패망 후 2년간 수십만 명의 남베트남인들이 탈출에 성공하였고 지금까지도 계속된다고 한다.
말레이시아 해안에 도달한 보트 피플. 배가 침몰 직전에 놓였다.
북베트남은 점령 후 2년간 현존 또는 잠재적인 반동분자들을 제거한 후에 사회, 경제 분야에서 그들의 이상적인 공산주의 체제를 건설하려고 계획하였다. 1976년 12월에 북베트남은 5개년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여 이의 추진을 서둘렀으나, 남베트남 정부와 군대의 해산에 따른 350여만 명의 실업자, 혼란과 시행착오를 반복하는 사회, 경제시책, 공산체제와 자본주의 체제와의 접목 갈등, 20여년 동안 분단되어 각기 다른 체제하에서 형성된 엄청난 이질성 등으로 침체를 면치 못하였다.
통일의 형식을 갖추는 작업도 가속화되었다. 민족해방전선, 임시혁명정부, 민족민주평화세력 연맹 등의 단체와 몇 번의 협의 형식을 거쳐 1976년 4월 25일 남북 총선거가 실시되어 통일 베트남 국회가 구성되었다. 인구 10만 명 기준으로 1명의 의원이 선출되었다. 선거를 기권할시는 배급표가 몰수되기 때문에 투표율은 99% 이상이었고 민족해방전선, 임시혁명정부 등의 인사는 4~5명이 지명되었을 뿐이었다.
6월 24일에 통일 국회가 열렸고, 7월 2일에 통일국가로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립을 내외에 선포하였다. 국가주석 톤 둑 탕, 당 제1서기 레 두안, 수상 팜 반 동(Pham Van Dong), 부수상 겸 국방장관 보 구엔 지압 등의 북베트남 권력구조는 그대로이고, 통일국가라는 형식을 갖추기 위해 구엔 후 토 민족해방전선 의장을 부주석으로, 7명의 부수상 중 3명을 남부출신으로 교체한 것 뿐이었다.
팜 반 동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점령하고 난 후부터 소련이나 중국의 무상원조는 삭감되었다. 혁명전쟁의 성공에 대하여 칭송하는 말은 많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무상원조를 해줄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전후의 복구사업에 많은 자본이 필요했던 베트남은 미국에게 신호를 보냈다. 미끼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831명의 미군 실종자였다. 미국도 응해 왔다. 에드워드 케네디 의원도 탄 손 누트 공항 공격시 죽은 2명의 미 해병 유해를 송환하라고 촉구하였다. 1975년 12월에 몇 명의 미 하원 대표가 비밀리에 하노이를 방문하였고 키신저 전 장관도 비밀 교섭을 시작하였다. 하노이는 휴전 협정에 북베트남이 응하면 42억 달러의 경제원조를 제공하겠다고 비밀협상 최초단계에서 닉슨이 약속한 것을 실천한다면 실종자 수색에 적극 협조하겠다고 하였다. 미국이 이에 응하지 않자 12명의 확인된 실종자 명단을 주면서 회유하였으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카터 미 대통령이 들어선 이후에도 하노이에 대표를 파견하였고 파리에서 양국대표가 만나기도 하였다.
50억 달러에 달하는 미군 장비를 노획한 베트남은 군사강국이 되어 그들의 오랜 꿈이었던 인도차이나 지배의 소망을 실현시킬 수 있게 되었다.
크메르 루즈(Khmer Rouge) 군의 폴포트 정권과 소규모 분쟁이 있었으나 베트남은 자제하여 오다가 1977년 9월 24일부터 타이 닌 성 일대에서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1978년 12월까지는 내륙지역 공격을 하지 않았다.
폴포트
크메르 루즈군
베트남군은 25개 보병사단, 45개 독립보병연대, 60개의 방공연대, 20~30개의 전차대대 등의 막강한 전력을 보유하는 군대가 되었다. 전에는 북베트남이 중국 고문관의 지도를 받아 미군 항공기를 공격하였으나 이제는 크메르 군이 중국 고문관의 지도하에 F-5 등의 노획 항공기로 공격하는 베트남에 대하여 공격하는 아이러니가 연출되었다.
노획한 F-5E 전투기를 사용하는 북베트남군
그러나 크메르 군은 베트남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1978년 12월 25일부터 1979년 1월 15일까지 베트남군은 크메르의 헹 삼린(Heng Samrin) 군과 함께 12개 사단으로 크메르 전역을 점령하고 헹 삼린 정권을 수립하였다. 라오스도 모든 부대에는 베트남군 고문관이 파견되었고 5만명의 베트남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프놈펜을 공격하는 베트남군
헹 삼린
1978년도에 베트남이 화교를 축출하고 크메르를 점령하자 중국이 이를 응징하기 위하여 1979년 2월 17일부터 15개 사단을 동원하여 국경에 연하여 있는 5개 지역을 공격하였고 베트남도 즉각 병력을 전환하여 반격하였다. 양국의 피해는 베일에 가려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중국군은 내륙 깊숙이 진격하여 베트남이 더 이상의 침공을 못하도록 견제하였다고 말하였고 베트남은 즉각 반격으로 심대한 손실을 입혔다고 말하였다.
중국의 베트남 침공 경로
교전중인 베트남군
교전중인 중국군. 중국은 초반 전투에서 병력과 기갑 전력에서 숫적 우세를 유지했으나 전투가 벌어진 지역이 대부분 험준한 산악 지형이라 이러한 잇점을 발휘하지 못했다.
베트남군의 포로가 된 중국군
베트남에 투입전 사열중인 중국군
통일 후 베트남은 국민소득 200달러 수준의 최빈국으로 전락되었다. 공산화 이후 지금까지 150만 명 이상이 베트남을 탈출한 것으로 알려졌고 지금 베트남은 이데올로기보다 가난을 면하기 위하여 안간힘을 쓰고 있다.
페레스트로이카의 조류를 타고 베트남도 1987년부터 개방정책을 폈다. 1986년 12월 제6차 노동당 전당대회에서 노쇠하고 완고한 혁명 1세대의 당 지도부가 실용주의적 경제 개혁파로 교체되었다. 개혁파의 주도인물은 당 제1서기에 임명된 구엔 반 린(Nguyen Van Linh)이다. 린은 1985년 7월에 사망한 당 제1서기 레 두안의 측근인물로서 1975년 4월 사이공 점령 후 사이공 군사 행정위원회 부위원장이었고 이후 사이공 시당 서기장, 노총연맹 의장, 정치국원을 역임한 바 있다.
구엔 반 린
베트남은 14만명의 캄보디아 주둔 병력을 철수시키면서 동남아 각국들과 경제관계를 모색하고 있고, 미국과의 관계도 개선되었으며 우리나라와도 외교관계를 맺는 등 이제는 본격적인 빈곤탈피 전쟁을 전개하고 있다.
끝.
드디어 베트남전쟁사를 완결하였습니다.
매일 연재하느라 힘들었는데 그동안 읽어주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http://cafe.daum.net/IloveVC/TrGy/27?q=%EB%B0%B0%ED%8A%B8%EB%82%A8%EC%A0%84%EC%9F%81%EC%82%AC |
첫댓글 누구나 좋은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하고 좋은 사람을 눈에 담으면 사랑을 느낍니다.
좋은 사람을 마음에 담으면 온기가 느껴집니다. 좋은 사람과 대화를 나누면 향기가
느껴지고 좋은 사람을 만나면 좋은 일만 생깁니다. 웃는 얼굴엔 가난이 없습니다.
오늘도 좋은 일들로 즐겁고 행복한 시간들로 가득 하십시오. 사랑합니다.
어떠한 일을 시작하려고 할 때 내일, 모레
이렇게 하루하루 미뤄본 적 다들 있으실 거에요.
하지만 이렇게 하루하루 미루기만 하고,
당장 오늘 그 일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결국은
아무 것도 못하게 되는 나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