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51)> 명종 1- 을사사화(乙巳士禍)
- 문정왕후 그리고 을사사화(乙巳士禍)
문정왕후(대비)가 수렴청정을 시작하면서 조정의 실권은 윤임을 필두로 한 대윤에서 문정의 동생인 윤원로, 윤원형을 필두로 하는 소윤으로 넘어갔습니다. 아재비와 조카싸움에서 조카 승~
문정대비의 세력을 배경으로 한 소윤 측 윤원형은 그 측근인 임백령 등을 동원하여 대윤 측의 대표 윤임이 그의 조카인 봉성군에게 왕위를 옮기도록 획책하였다고 무고함으로써, 윤임·유관·유인숙 등 무수한 신료와 선비들을 사사하니 이것이 바로 을사사화입니다.
을사사화는 표면적으로는 윤씨 외척간의 싸움이었으나 사림파에 대한 훈구파의 공격으로서, 연산군 4년의 무오사화 이후 약 50년간 신료와 선비들이 대규모로 옥사한 사화는 이로써 마지막이 되었습니다. 백성의 평안은 뒷전으로 미룬채 50년간 지랄들을 했어요.
※ 4대사화 : 무오사화, 갑자사화(이상, 연산군), 기묘사화(중종), 을사사화(명종)
사림파는 4차례의 사화를 통해 큰 피해를 입었고, 후에 서원과 향약으로 선조 때 다시 중앙정권을 장악합니다. 병이다 병~
아무튼 이러한 을사사화 이래 윤원형 일파인 소윤은 수년간 반대파 숙청을 위한 음모를 계속하였는데, 이 때까지 죽은 유력 인사들만 해도 100명에 이르렀습니다.
이와 같은 일의 총감독은 당연히 문정왕후였습니다. 문정은 죽는 날까지 국정을 장악하고 철혈정치를 펼치니, 호불호를 떠나 실로 대단한 여인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문정왕후를 야사가 표독스러운 여인으로 그리고 있는 것은 이해가 가는데, 정사인 실록에서도 야사 못지않게 평가를 하는 것은 다소 의아스럽기도 합니다.
생각컨대, 이는 문정이 사화를 통해 사림을 탄압함으로써 당대 유학자들의 공공의 적이 된 점, 사관은 모두 유학자였던 점, 문정이 사림을 사랑했던 인종을 배척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점, 그리고 유학자들이 결사반대하는 불교를 부흥시킨 점(도첩제와 승과제도 부활) 등이 그 원인이 될 것이고, 여기에 “여자”라는 이유가 하나 더 추가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사람을 죽이기에 힘쓰니 인재는 숨고, 간신배만 우글대는 세상
중종 인종 명종 시대의 사화~~ 이런 시간동안 나라가 한 없이 약해지고, 이어지는 사림이 붕당정치를 하면서 국력이 한 없이 약해지고~
반면에 일본은 통일이 되면서
강력한 군대가 할 일이 없어지고~
이러니 남아도는 기운을 조선에서 쓰자며 지랄지랄들을 하는데~~
<조선왕조실록(52)> 명종 2
- 명종의 죽음과 사림의 재등장
문정은 명종 8년, 명종 나이 스물에 섭정을 그만두고 명종으로 하여금 만기를 친지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물러났어도 그녀는 여전히 권력의 중심이었고, 그 동생 윤원형의 권세 역시 변함없이 강성하였습니다.
윤원형은 20년동안 권력 실세로 군림하면서 그 끝을 모를 부패행위를 일삼았습니다. 사시사철 전국 각지에서 뇌물을 실은 수레가 올라왔고, 곳곳이 농장이며, 한양에만 대저택이 10여 채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윤원형의 주변 인물 중 최고 화제는 바로 정난정이었습니다. 정난정은 부총관을 지낸 정윤겸과 관비의 사이에서 태어난 서녀로 엄청난 미인은 아니었지만, 남자를 유혹하는 묘한 매력을 가진 여자로, 원형의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아 그 첩이 되더니, 한 발 더 나아가 기존 정실을 내몰아 죽인 후 스스로 정실이 되었습니다.
난정은 문정왕후의 사랑도 듬뿍 받아 궁궐을 무시로 드나들었고, 원형의 권세를 배경으로 상권을 장악하여 전매, 모리 행위로 많은 부를 축적하였으므로, 당시 원형과 난정 부부의 자녀들과 혼인하고자 하는 자들이 줄을 섰다고 합니다.
이러한 난정도 나름대로의 공도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적자와 서자의 신분차별을 폐지하고 서자도 벼슬길에 나설 수 있도록 하였고, 불교를 융성하게 하였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난정 역시 문정왕후와 함께 사대부들의 공공의 적이었으므로, 원형의 권력 즉 문정왕후가 죽자 원형과 함께 유배될 수밖에 없었고, 끝내는 늘 소지하고 다니던 독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원형 역시 난정이 죽은 지 5일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문정왕후, 윤원형이 모두 죽은 후, 이들의 자리를 메운 것은 사림이었습니다.
사림은 거듭되는 사화로 많은 유학자를 잃었지만 전국 각지에 은거하며 학문을 닦고 제자를 길렀으며, 문정왕후가 죽자 봇물처럼 정계에 등장하여 윤원형 일파를 제거하는 등 실로 오랜 만에 중앙무대를 장악할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한편, 명종은 부인 심씨와의 사이에 아들 하나를 두었을 뿐, 후궁으로부터도 아들을 하나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 뿐인 아들이 열세 살의 나이로 죽고 말았습니다.
이에 후사를 걱정하던 명종은 배다른 형제 덕흥군의 아들 셋을 불러 자신이 쓴 익선관을 벗어 써보라고 하자, 다른 아들들과 달리 셋째인 하성군은 “성상께서 쓰시는 것을 신하된 자가 어찌 쓸 수 있겠나이까”라고 하여 명종의 눈도장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 얍삽한 자가 명종의 뒤를 이은 선조가 됩니다.
명종은 외아들 사망 이후 시름시름 앓다가 재위 22년만인 1567년 죽으니 그의 나이 겨우 34세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