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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으시고 이해하시는 하나님
2016. 6. 19(주일낮예배) 시편 28:1-2
진나라가 무너진 후 한나라와 초나라의 격전지가 되었다. 항우장사라고 불리는 초나라의 항우와 흙수저를 물고 태어난 유방의 싸움에서 누가 승리했겠는가? 한나라가 승리했기 때문에 우리가 장기를 둘 때 고수가 한나라를 잡는다.
그런데 한나라의 유방은 초나라의 항우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술과 여자를 좋아했던 유방은 입을 열면 음담패설로 무림을 제패할 인품과 덕망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런 유방에게 한가지 장점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경청이었다. 한번은 유방이 군사들을 이끌고 전쟁에 나갈 때 그 길을 막아서는 신하가 있었다. 그런데 유방은 자기의 고집대로 전쟁터에 나갔다가 비참하게 패배하고 돌아왔다. 그렇게 패배한 유방은 전쟁에 나가지 말아야 한다고 충언을 한 신하를 불러서 상을 내렸다. 그 후 유방은 신하들의 말에 귀를 기우리게 되었고, 또 충언을 하여 상받는 것을 본 신하들은 유방에게 자신들의 생각을 직언하게 되었다. 그래서 한나라의 장점은 충언과 직언이 끊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에 비하여 초나라의 항우는 달랐다. 항우는 전략가였고, 또 능력있는 장수였다. 그랬기 때문에 자신의 힘과 지혜로 적과 싸워서 늘 승리하는 기쁨을 누리며 살았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의 힘과 지혜를 의지하였던 항우의 단점은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한나라와의 전쟁도 마찬가지였다. 항우는 4년동안 한나라와의 전쟁에서 늘 승리하였다. 그래서 한나라의 많은 사람과 유방의 가족마저도 인질로 잡고 있었다. 그런데 4년의 전쟁으로 지친 항우는 한나라의 인질과 유방의 가족을 돌려보내는 조건으로 휴전협정을 맺었다. 그리고 항우가 그의 군대를 철수시키고 10만의 병사만 남아 있을 때 한나라 유방은 60만대군으로 유방을 공격한 것이다. 그 전쟁에서 패배하여 항우의 군사는 포로가 되고, 그는 한나라에 포위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항우는 여자친구 우희와 술을 마시고 있는데, 적진에서 초나라 민요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한나라가 민요를 통하여 심리전술을 펼쳤던 것이다. 그 소리에 우희는 자기 백성의 고통소리로 해석하여서 자살을 한다. 그리고 항우는 남은 군사와 포위망을 뚫고 도망치다가 결국 자살을 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중국에는 2가지 고사성어가 생겼다. 하나는 우희의 죽음으로 항우와 헤어지게 되었다는 뜻의 패왕별희이고, 또 하나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항우가 한나라의 포위망을 뚫지 못한 것을 두고 사면초가라 한다.
왜 항우가 패왕별희와 사면초가의 아픔을 가지게 되었는가? 누가복음 18장은 바리새인과 세리가 기도하는 장면이 나온다. 바리새인은 나는 다른 사람들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하고 기도하였다. 그렇게 바리새인이 기도할 때 세리는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고 기도하였다.
그런데 누가복음 18장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들이 성전에서 기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 성전에서 기도한다는 것은 간절히 기도해야 할 내용이 있었던지 아니면 신앙의 열심히 대단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간절함과 열정적인 신앙을 가진 바리새인과 세리가 한 성전에서 기도하는데, 바리새인은 따로 서서 기도하고 있고, 또 세리는 멀리 서서 기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러분이 보시기에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하는 모습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우리가 생각하는 바에 의하면 신앙의 열심과 간절함이 있는 사람이 한 성전에서 기도한다면 가슴을 치고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고 세리가 기도할 때 바리새인은 그 세리의 어깨위에 손을 얹고 하나님 이 형제의 고통을 들으시고, 용서하여 주옵소서 하고 중보해야 하는 것이 마땅해 보인다.
그런데 왜 이들은 따로 서서 기도하고 있는가? 먼저 그 부분을 읽어보기 바란다.
(눅 18: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의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말한다. 그래서 의로운 사람이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알아서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는 사람을 말한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의를 관계로 해석하지 않고, 오히려 구분으로 해석하였다. 그래서 세리를 보고 따로 서야했고, 또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고 기도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저는 만약 바리새인이 세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소리를 듣고, 또 그 세리의 아픔을 이해하였다면 어떤 모습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랬다면 아마 바리새인은 우리가 생각하는 바처럼 세리를 위하여 기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한 성전 안에서 두 기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성전 안에서 하나된 아름다운 모습이 나타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일에만 급했던 바리새인은 세리의 기도소리를 듣지 않았고, 또 세리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둘은 따로 서서 기도를 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경청과 공감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가? 어느 유명한 목사님이 개척을 하기로 하였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지 말라고 목사님의 능력이라면 금방 교회는 안정권이 될 것이다고 격려해주었다. 그리고 개척을 시작했는데 첫예배에 500명이나 모였다. 목사님은 개척설립예배를 드리고 조금만하면 큰 교회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고 자신을 가졌다. 그런데 다음주에 600명이 모일 줄 알았는데, 교인의 수는 500명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다음 주에는 많은 사람이 올꺼야라고 생각했는데 그 다음 주에는 사람이 더 많이 줄었다. 이렇게 해서 몇 달이 지났을 때 교회 안에 성도는 몇 명 되지 않게 되었다. 얼마나 힘들었던지 주일이 지난 저녁에 목사님은 밤에 잠을 자지 못했다. 그리고 옆에 있는 사모님에게 여보 하나님은 살아계실까? 나는 하나님이 살아계신게 믿어지지 않아! 하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사모님은 목사님께 여보 걱정하지 말아요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을 저는 믿고 있어요. 그러니 당신은 편안히 주무세요. 하고 남편을 위로하게 재웠다. 그 후에 사모님은 교회당을 찾아서 두 손을 모았다. 그리고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다고 한다.
하나님 저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나의 믿음없음을 도와주소서
사모님은 그 밤에 교회당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였다.
하나님께서 이 사모님의 기도를 들어주었겠는가? 이제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란다. 본문의 배경은 다윗이 압살롬을 피하여 도망하는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성문에 앉아서 백성의 민심을 얻은 압살롬은 이제 반란의 칼을 빼들었다. 그렇게 칼을 빼들면서 제일 먼저 도움을 구한 사람이 아히도벨이었다. 다윗의 책사였던 아히도벨은 굉장히 지혜로운 사람이라서 아히도벨이 압살롬의 편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은 아히도벨의 지혜를 막아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할 정도였다.
이렇게 지혜로운 아히도벨이 압살롬의 손을 잡은 후에 책사로서 조언한 것 중에 하나가 백주에 다윗의 첩과 동침하라는 것이었다. 아히도벨이 이렇게 조언한 이유는 압살롬은 다윗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압살롬이 전쟁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을 때 아버지께 용서를 구하면 다윗은 압살롬은 죽이지 않고, 함께 했던 반란군만 죽일 수도 있었다.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반란군에게 가장 큰 문제는 압살롬이었다. 그런데 압살롬이 아버지의 첩과 동침하는 순간 이제 압살롬은 아버지를 찾을 수 없는 관계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반란군들이 압살롬을 믿고 충성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아히도벨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히도벨은 압살롬에게 백주에 다윗의 첩과 동침하라고 조언을 한 것이다.
아히도벨은 이렇게 똑똑한 전략가 였다. 그래서 삼하 16:23을 보면 다윗과 압살롬 모두 아히도벨을 굉장히 소중한 사람으로 여겼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삼하 16:23) 그 때에 아히도벨이 베푸는 계략은 사람이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과 같은 것이라 아히도벨의 모든 계략은 다윗에게나 압살롬에게나 그와 같이 여겨졌더라
아히도벨은 다윗과 압살롬에게 모두 하나님의 지혜와 같이 인정을 받고 있었던 상태였다.
그런데 왜 아히도벨은 다윗을 배반하고 아버지를 죽이려는 압살롬의 손을 잡았겠는가? 그 이유는 밧세바가 자신의 손녀였기 때문이다. 아히도벨은 다윗이 자기의 손녀사위를 죽이고, 또 손녀를 아내로 삼은 밧세바 사건을 보면서 더 이상 다윗을 섬겨서는 안된다는 마음을 가졌던 것이다. 결국 다윗의 죄악이 자신의 최고 책사를 잃어버리게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책사가 있는 압살롬의 반란군은 다윗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고 있다. 다윗이 어떻게 기도하고 있는가? 이제 본문을 읽어보기 바란다.
(시편 28:1-2)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 2내가 주의 지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다윗의 고통은 자신의 죄악으로 인한 것이었다. 그런데 다윗은 그러한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고 하면서 자신의 아픔과 고통을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다윗이 어떻게 기도할 수 있었겠는가? 한 심리학자가 부잣집 아들과 가난한 집 아들 중 성공할 확률이 높겠는가? 하는 실험을 하여서 부잣집 아들이 성공할 확률이 높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이 심리학자가 알게 된 것은 성공률이 아니라, 성공할 수 있는 이유였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부잣집 아들이 성공할 확률이 높은 이유는 돈이 많고, 또 배경도 좋고, 교육의 기회가 높기 때문이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부잣집 아들이 성공할 확률이 높은 이유는 누군가에게 요구하고 협상하는 능력인 실용지능이 높기 때문이다는 것이다. 쉽게 말씀드리면 부잣집 아들은 무엇을 사달라고 하면 부모님들은 거의 들어준다. 그러므로 부잣집 아들은 어릴 때부터 요구하고, 또 자신의 요구가 받아드려질 수 있도록 협상하는 능력을 키워가는 것이다. 그러나 가난한 집 아이는 아무리 요구하고, 협상을 하여도 받아드려지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 요구와 협상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 결과가 사회생활에 성공과 실패의 중요한 요인이 된 것이다.
무슨 말인가? 실용지능이 높은 것은 아이의 문제가 아니라, 부모의 문제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가 아이의 요구를 잘 들어줄 때 아이는 요구하고, 협상하는 능력이 뛰어나서 결국 성공한다는 것이다.
다윗도 마찬가지였다. 다윗은 실용지능이 높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다윗이 실용지능이 높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다윗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언제나 응답하여 주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윗이 어떠한 형편가운데 있던지 다윗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해하시는 하나님이 있었기 때문에 다윗은 그 하나님을 향하여 나의 반석이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실용지능이 높은가? 동치미에서 남편들에게 비교하면서 바가지 긁는 아내 VS 비교도 않하고 전혀 관심이 없는 아내 중 어떤 아내와 살 수 있겠는가? 하고 질문하였다. 이 질문에 장경동목사님은 바가지 긁는 아내를 선택하였다. 왜냐하면 아내가 바가지를 긁는다는 것은 아직까지 애정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그런데 김창기 정신과의사선생님은 다른 말을 하였다. 김창기의사선생님의 말을 들어보기 바란다.
바가지를 긁는 것과 무관심한 것의 시작은 사랑이 아니라, 분노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 분노를 감싸안을 수 있으면 1번을 선택할 수 있겠지만, 그 분노를 감싸안을 수 있는 힘이 없어서 2번을 선택한다.
저는 김창기의사선생님의 말에 동의한다. 아내가 바가지를 긁느냐? 무관심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런 아내에 대하여 내가 경청과 공감의 마음을 가질 수 있느냐?가 함께 살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아내가 어떤 상황에 있던지 함께 살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내가 어떤 상황에 있던지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여 주시는 반석과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은혜를 입었기에 이제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을 향하여서 반석과 같은 모습으로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여 듣고, 또 공감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시간 나의 말에 귀를 기우리고, 내 마음을 이해하시는 경청과 공감의 하나님을 묵상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인하여 이제 나도 경청과 공감의 능력을 가지고 살 수 있는 주의 백성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이제 말씀을 맺는다.
진재혁목사님이 섬기는 지구촌교회 부교역자가 50여명이다. 그런데 3년동안 진목사님과 함께 사역하였던 부목사님 한분이 교회를 이동하게 되었다. 성격이 내성적이라 그 누구에게도 주목받지 못하고 사역하다 교회를 이동하게 된 부목사님은 교회를 떠나기 전에 진목사님께 인사하러 왔다. 그때 진목사님은 다음 교회에 가서 사역을 잘 할 수 있기를 위하여 기도하고, 또 덕담도 해 주었다. 그리고 헤어질 시간이 되었는데 부목사님이 문앞으로 걸어가다 멈칫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무슨 하실 말씀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 목사님께서 목사님 저 한번만 안아주시면 안됩니까?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진목사님이 그 부목사님을 꼬옥 껴안으면서 해 준 말이 목사님 미안합니다 였다. 50여명의 부교역자가 있으니 목사님이 부교역자들을 다 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격이 밝고 쾌활한 교역자에게는 말도 많이 하고, 애정표현도 많이 하였지만, 성격이 무뚝뚝한 교역자들에게는 목사님도 무뚝뚝하게 대하여서 교역자의 마음을 살피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목사님은 그 부목사님을 껴안으면서 미안하다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교회 안에 지구촌교회 부목사님처럼 사랑받고 싶어하는 분이 많이 있지 않겠는가? 이제 그런 분들은 저 한번만 안아주세요. 저 한번만 손잡아 주세요 하고 다가설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렇게 다가오는 분을 향하여 왜 이러세요? 하는 반응을 보이지 말고, 진심으로 경청과 공감의 자세로 반응하시기 바란다. 그래서 경청과 공감이 있어서 따뜻함이 있고, 하나님이 나를 이런 모습으로 받아주었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우리 자여교회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