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수로왕비릉> 및 구지봉, 구지가, 수로왕비, 고인돌
1. 유적지 대강
명칭 : 수로왕비릉
위치 : 경상남도 김해시 구산동 119-3
입장료 : 없음
방문일 : 2023.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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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허황후(許皇后)[33~189]의 다른 이름은 허황옥(許黃玉)이다. 허황후는 아유타국의 공주로 바다를 건너와 가락국[금관가야]의 시조 수로왕과 혼인하였다. 국왕 부부가 낳은 11명의 자녀 가운데 10명이 아들이었는데, 8명은 수로왕의 성을 따서 김해 김씨(金海金氏)가 되었고, 2명은 허황후의 간청에 따라 김해 허씨가 되었다고 한다. 허황후와 수로왕의 혼인에 관한 이야기는 『삼국유사(三國遺事)』 「가락국기(駕洛國記)」와 「금관성 파사석탑(金官城婆娑石塔)」 조에 상세하게 적혀 있다. 관련 기록에 의하면 9간(干)에 의해 추대된 수로왕은 토착 세력의 처녀 가운데 왕비를 간택할 것을 요청 받았으나 모두 거절하고 인도 아유타국에서 온 공주와 혼인하였다.
허황후의 도래 설화에서 우선 주목되는 것은 허황후의 출신지에 대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불교 동점(東漸)[점점 세력을 넓혀 동쪽으로 옮겨 감]에 대한 이야기라는 설, 아유타국은 일본에 있던 가락국의 분국이라는 설, 기원전 1세기 인도 아요디아 왕국이 태국에 건설한 식민국 아유티야 또는 아요디아에서 중국 사천성 보주(普州) 지역으로 집단 이주한 허씨족(許氏族)이 옮겨 왔다는 설, 낙랑 지역에서 도래한 유이민 혹은 상인이었다는 설 등이 있다.
허황후의 출신지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점은 허황후가 바다를 건너올 때 한사잡물(漢肆雜物)[한나라의 여러 가지 호화로운 물건]을 잔뜩 가져온 것, 천부경·종정감·사농경 등 중국계 관직을 칭한 것, 황옥(皇玉)이라는 이름이 중국 ‘황제’와 관련 있다는 것 등이다. 이런 것들로 보아 허황후는 북방 유이민 집단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즉 허황후 집단의 출현은 기원전 2세기 초반 위만 조선의 멸망과 한나라 군현 설치 이후 김해 지역과 북방 지역의 인적·물적 교류의 산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대외 교역에 유리한 김해 가락국의 입지 조건이 허황후의 도래를 통해 보여 주는 선진 문물의 상징인 ‘선박 신앙’과 결합된 것이다. (부산역사문화대전 전재)
입구 홍살문
허황후 수로왕비릉
파사각. 파사석탑비각
파사석. 신화인지 실화인지.
고직사
돈숭문. 안쪽으로 승보재가 있다.
박물관에서 이동했을 때 만나는 옆문.
측면에서 바로본 묘소.
수로왕비릉은 바로 구지봉 자락에 있다. 가운데 도로가 지난다.
구지가비
2) 구지가
작자·연대 미상의 고대가요. 영신군가(迎神君歌)·구하가(龜何歌) 또는 구지봉영신가(龜旨峰迎神歌)라고도 부른다. 원가(原歌)는 전하지 않으나, 관련설화와 4구체의 한문으로 번역된 것이 ≪삼국유사≫권2 가락국기조에 전한다.
이에 의하면 서기 42년 3월 계욕(禊浴)의 날에 북쪽 구지에서 수상한 소리로 부른 것이 있었다. 무리 200∼300명이 거기에 모였는데, 사람의 소리 같기는 하지만 그 형상은 나타나지 않고 소리만 내어, “여기에 누가 있느냐?”라고 묻더라는 것이다.
구간(九干) 등이 “우리가 있소.”라고 대답하자, “내가 있는 곳이 어디냐?”하고 재차 물어오자, 구간이 다시 “구지요.”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다시 “하늘이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와서 나라를 새로 세워 임금이 되라 하였기에 여기에 내려왔다. 그러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산봉우리를 파서 흙을 모으면서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놓아라. 만일 내어놓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라.(龜何龜何 首其現也 若不現也 燔灼而喫也)’고 노래하면서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대왕을 맞이하게 될 것이고, 이에 너희들은 매우 기뻐서 춤추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구간들이 그 말과 같이 행하고 모두 기뻐하면서 노래하고 춤추었다. 그러자 얼마 후 자주색 끈이 하늘로부터 드리워져 땅에 닿았다. 그 끝을 찾아보니 붉은 보자기에 금합자(金合子)가 싸여 있었다. 열어보니 그 속에는 해와 같이 둥근 황금빛 알 여섯이 있어 이를 본 모든 사람이 놀라고 기뻐하여 함께 수없이 절을 했다.
조금 있다가 다시 보자기에 싸서 아도간(我刀干)의 집으로 돌아와 평상[榻]위에 두고는 무리들이 모두 흩어졌다가, 하루가 지난 다음날 아침에 다시 모여 금합자를 열어보니, 알 여섯개가 모두 동자로 변했는데, 용모가 매우 준수하였다고 한다.
<구지가>와 그 신화에 대한 해석은 매우 다양하다. 신화를 영신제의(迎神祭儀)로 보고 신탁의식(神託儀式)·희생의식·영신의식의 세 단계로 이루어졌다고 논의하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등극제의로 보고 신탁의식·귀복의식(龜卜儀式)·등극의식의 세 단계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등극의식은 다시 하강-격리-재수용-등극의 과정으로 이루어졌다고 하였다. <구지가>는 이 세 단계 가운데 제2 단계에서 신탁에 의해 불린 주가(呪歌)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이 가요의 성격을 밝히는 데는 가창 뒤의 결과나 가사 자체의 분석도 중요하지만 산문전승 중에 들어 있는 ‘굴봉정촬토(掘峰頂撮土)’라는 행위전승의 풀이도 중요하다. 그리하여 이에 대한 견해도 다양하게 나타난다.
(중략)
그리고 이 가요의 뜻과 표현형식이 비슷한 것에 신라 성덕왕 때 해룡에게 끌려간 수로부인(水路夫人)을 구출하기 위해 부른 <해가>라는 노래가 전하고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재)
구지봉 입구
2) 구지봉
구지봉(龜旨峰)은 시의 중심부로부터 북쪽으로 약 2㎞ 정도 떨어져 있는데, 봉(峰)이라고 부르기에는 다소 낮은 동산에 해당된다. 그러나 가야의 건국설화로 인하여 구지봉은 역사적인 봉우리로 자리 잡고 있으며, 국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구지가(龜旨歌)」의 산실인 만큼 널리 알려져 있다.
내용
구지봉은 봉우리의 모양이 넓은 원형으로, 마치 거북이가 엎드린 형상과 같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가야 건국설화에 따르면, 가야 땅을 다스리던 아홉 추장이 구지봉에 모여 제사를 지내는데, 문득 하늘에서 알 여섯 개가 담긴 금합이 붉은 실에 매달려 내려왔다.
이튿날에 그 알 여섯 개가 차례로 깨어지며 아이가 하나씩 나왔다고 한다. 그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부쩍부쩍 자라나서 열흘째가 되자 모두 키가 아홉 자가 넘는 어른이 되었으며, 그 가운데 맨 먼저 나온 이가 가락국의 시조인 김수로왕이 되었다고 전한다.
산봉우리 동쪽에는 수로왕비 허왕후릉(許王后陵)이 자리 잡고 있고, 구지봉 정상에는 1976년에 세운 여섯 개의 알과 아홉 마리의 돌거북으로 구성된 천강육란석조상(天降六卵石造像)이 있다. 그 북쪽 5m쯤에는 1908년에 건립된 ‘대가락국태조왕탄강지지(大駕洛國太祖王誕降之地)’라고 새겨진 비가 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거북의 목에 해당하는 부분에 고의적으로 도로를 개설하여 거북 모양의 원래 모습이 훼손되었다고 한다. 김해 구지봉은 2001년에 사적 제429호로 지정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재)
교과서 속의 구지봉이 이곳에서는 현재형이다.
구지봉석. 명필 한석봉이 썼다는 글씨다.
*구지가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놓아라. 만일 내어놓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라.
(龜何龜何 首其現也 若不現也 燔灼而喫也)
가락국의 신화는 구지봉에 내린 여섯 알 중 가장 큰 알에서 가락국의 수로왕이 나왔다고 한다.
대가락국태조왕탄강지지 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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