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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 백의종군 길(3∼4코스)
(2020년 1월 28일, 의왕시청∼용주사)
瓦也 정유순
조선 명장 이순신(李舜臣, 1545~1598).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다. 서울 건천동(乾川洞, 현재 중구 인현동)에서 이정(李貞)과 초계변씨(草溪邊氏)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대대로 문신 집안 출신이나 20대에 무예를 익혀 1572년(선조 5) 28세 때에 무과(武科)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4년 뒤인 32세가 되어서 비로소 식년 무과(병과)에 급제한 뒤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로 첫 관직에 오른다.
<충무공 이순신 생가터 표지석-네이버캡쳐>
1586년(선조 19)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를 거쳐 조산보만호(造山堡萬戶)가 되었으며, 그뒤 전라도 관찰사 이광(李洸)에게 발탁되어 전라도의 조방장(助防將)이 된다. 이후 선전관(宣傳官)과 비변사 등을 거쳐 1591년(선조 24) 47세에 유성룡(柳成龍)의 천거로 정읍(井邑) 현감이 되어 선정으로 칭송받는다. 이후 진도군수 등을 지냈으며, 같은 해 정3품 당상관인 절충장군(折衝將軍) 전라좌도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로 승진하였다.
<충무공 이순신 영정-네이버 경향신문 캡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대첩을 시작으로 남해의 해전에서 연전연승하여 제해권(制海權)을 확보하고 남해안 일대의 일본 수군을 완전 일소한 뒤 한산도로 진영을 옮겨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었다. 이즈음 원균(元均, 1540~1597)과의 마찰과 모함으로 파직당하고 투옥되었으나, 우의정 정탁(鄭琢)의 변호로 사형을 면하고 백의종군하였다. 그후 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그는 12척의 함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대첩(鳴梁大捷)에서 대승을 거두고 해상권을 다시 회복한다.
<난중일기-네이버 두산백과캡쳐>
백의종군 길은 충무공 이순신이 삭탈관직을 당하고 1597년 3월 4일에 투옥되어 28일간 의금부에 갇혔다가 “도원수 권율(權慄) 수하에서 백의종군하라”는 선조의 어명을 받고 1597년 4월 1일 출옥하여 한양을 떠나 6월 4일 경상남도 합천의 초계(草溪)에서 권율도원수를 만날 때까지의 행로를 지금의 시각으로 다시 더듬어 보는 670㎞의 여정이다. 따라서 1597년 8월 4일 삼도수군통제사에 다시 임명되기까지의 행적은 포함되지 않는다.
<백의종군 길 지도>
오늘의 일정은 제3코스 중간지점인 경기도 의왕시청 입구인 경수대로 고천동에서 출발한다. 고천동(古川洞)은 경기도 의왕시에 속한 동으로 서쪽에 오봉산이 솟아 있고, 중앙부로 안양천이 흐른다. 천변에 형성된 시가지를 제외한 나머지 많은 지역은 산지를 이룬다. 동 이름은 자연마을인 고정동(古井洞)과 고고리(古古里)의‘고’자와 평사천(坪沙川 : 벌사그내)의‘천’자를 따서 고천리라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
<의왕시 고천동주민센터 주변>
1914년 평사촌·고정동·고고리·내곡동이 병합하여 수원군 의왕면 고천리로 되었다. 1936년 일왕면 고천리로 바뀌었고, 1949년 화성군 일왕면 고천리로 되었다. 1963년 시흥군 일왕면 고천리로 되었다가 1980년 시흥군 의왕읍 고천리로 바뀌었다. 1989년 의왕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고천동으로 되었다. 또 벌사그내(坪沙川)는 조선 시대 정조(正祖)가 수원의 융릉(隆陵)을 참배하기 위하여 이곳에 행궁(行宮)을 설치한 후 민가가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의왕시 고천동 경수대로>
고천동에 있었던 행궁은 의왕시(義王市)의 중심지이자 현릉원에 능행을 가던 정조(正祖)가 쉬어 가던 곳이었다. 1789년 능행 길에서는 이곳에서 아버지를 기리며 주민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으며, 이곳에 행궁을 지어 이름을 <사근행궁>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자리에는 의왕시 별관이 들어서 있고, 표지석만 세워져 있을 뿐 표지석 주변에 쓰레기가 버려져 있고, 잡초가 무성한 것으로 보아 관리는 제대로 되지 않는 것 같다.
<사근행궁 터-2017년9월 촬영>
과천∼봉담 간 고속화도로와 국도 제1호 경수대로(京水大路)가 교차하는 고합교차로를 지나 통미마을과 길 건너 고고리(古古里)마을 앞으로 하여 행로는 지지대고개로 향한다. ‘고고리’는 원래 ‘골골(谷谷)이’ 였는데, 고골이로 변했다가 한자로 지명을 바꿀 때 古古里(고고리)로 변한 것 같다. 이곳은 성종의 아들인 전주이씨 전성군(全城君)의 고손인 이정(李禎)이 좌승지를 지낸 후 이곳에 낙향하면서 촌락이 형성되었다. 1960년대 이전만 해도 타성(他姓)은 살지 못할 만큼 전주이씨 누대의 세거지(世居地)였다고 한다.
지지대(遲遲臺)고개는 광교산(光敎山, 582m)산 자락으로 수원시와 의왕시의 경계를 이루는 고개다. 정조가 아버지 장헌세자의 원침인 현륭원(顯隆園) 전배(展拜)를 마치고 환궁하는 길에 이 고개를 넘으면서 멀리서나마 현륭원이 있는 화산(花山)을 바라볼 수 있으므로 이곳에 행차를 멈추게 하고 ‘뒤돌아보면서 행차가 느릿느릿 하였다’ 하여 이곳의 이름을 한자의 느릴 지(遲)자 두 자를 붙여 지지대(遲遲臺)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지지대고개-의왕에서 수원방향>
경수대로변인 고개에는 지지대비(遲遲臺碑)가 있다. 이 비석은 정조의 지극한 효성을 추모하기 위해 1807년(순조7)에 화성어사 신현(申絢)이 건립하였다. 홍문관제학 서영보(弘文館提學 徐榮輔)가 비문을 지었고 전판돈녕부사겸판의금부사 윤사국(前判敦寧府使兼判義禁府使 尹師國)이 글을 쓰고 수원부유수겸총리사 홍명호(水原府留守兼總理使 洪明浩)가 비의 상단 전자(篆字)를 썼다. 지지대비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되었다.
<지지대비각>
지지대고개 영동고속도로 북수원IC를 살짝 지나면 프랑스군 참전 기념비가 있다. 이 비는 한국전쟁 시 대한민국의 안전과 자유를 수호하기 위하여 파병된 프랑스군 영령들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한국과 프랑스의 문화를 접목하여 추모공간으로 2001년 11월에 조성하였다. 프랑스군은 4천여 명이 파병되어 1951년 1월부터 1953년 휴전이 될 때까지 많은 전과를 올리고 개선하였다. 전상자는 사망 288명, 부상 818명, 실종 18명이다.
<프랑스군 참전 기념비>
역시 수원은 정조대왕의 얼이 서린 고장이다. 수원시 입구인 장안구 파장동에는 정조(正祖)의 효심을 기리기 위하여 효행공원을 1993년 지지대(遲遲臺) 고개 주변에 조성하였다. 공원 내에 프랑스군 참전 기념비·잔디광장·효행기념관·정조대왕 동상 등과 각종 운동기구가 설치되어 있다. 효행기념관은 정조대왕의 효심을 기리고 이를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세운 기념관으로 정조의 발자취를 돌아보고 그의 치적, 일대기 및 정조의 효행과 화성(華城) 축성모형도 등 정조 중심사료를 전시하고 있다.
<효행공원의 정조대왕 동상>
지지대교차로를 지나 장안구 이목동 노송지대로 들어서면 울창한 노송들이 고고함을 뽐낸다. 이곳의 소나무숲은 송죽동과 조원동으로 이어지는데, 특히 지지대 고개 정상으로부터 경수산업도로를 따라 5km 구간에는 노송(老松) 숲이 펼쳐진다. 이는 정조가 융릉 관리에게 내탕금(內帑金) 1000냥을 하사하여 소나무 500주와 능수버들 40주를 심은 것이 퍼진 것이다. 현재는 대부분 늙어서 죽고 100여 주 정도의 노송이 보존되어 있지만, 이 낙락장송(落落長松)은 정조의 효성과 사도세자의 비운이 함축되어 있다.
<이목동 노송지대>
다시 서호천을 따라 백의종군 길로 들어선다. 서호천(西湖川)은 수원시의 북쪽 파장동에서 발원하여 서호를 거쳐 장지동에서 황구지천과 합류하는 하천이다. 중간에 이목천·송죽천·매산천 등의 소하천이 유입하며 중간중간에 파장저수지·일월저수지·서호저수지 등의 저수지가 있다. 얼마 전까지는 서호천 유역에 많은 농경지가 있었으나 현재는 대부분 시가지나 주거지로 바뀌었다. 원래 명칭은 고문헌 등에 의해 사근천(沙近川)으로 추정되며, 서호로 유입되는 하천이라 ‘서호천’으로 된 것 같다.
<서호천>
화서역 부근에서 오전을 마무리하고 여기산 모퉁이를 돌아 3코스 도착점인 ‘GS25 수원서둔점’을 향해 길을 나선다. 권선구 서둔동에 있는 여기산(麗妓山)의 정상 부근에는 청동기시대 유적이 발견된 곳이다. 1979년부터 숭실대학교 박물관에 의하여 발굴이 시작되어 출토된 유물로는 민무늬토기와 김해식토기 그리고 이와 관련된 집터 등이 있다. 그리고 여기산은 중백로·쇠백로·황로의 서식지이며, 여기산(麗妓山) 아래에는 시민체육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여기산>
서둔동(西屯洞)은 ‘화성의 서쪽에 있는 둔전(屯田)’이라는 뜻이다. 둔전(屯田)은 ‘농사도 짓고 전쟁도 수행’한다는 취지 아래 부근의 한광지(閑曠地)를 개간, 경작해 군량을 현지에서 조달함으로써 군량 운반의 수고를 덜고 국방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후대에는 관청의 경비를 보충하기 위해 설치한 토지도 둔전이라 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전자를 국둔전(國屯田), 후자를 관둔전(官屯田)이라 하여 서로 구별하였다.
<서둔동 벼 시범경작지-2018년9월 촬영>
GS25 수원서둔점에서 제4코스를 출발하여 웃거리사거리를 지나 서둔로로 들어서서 약 25분 정도 걸으면 <경기상상캠퍼스>가 나온다. 이곳은 옛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 부지와 건물을 새롭게 조성하여 지역주민과 창작자, 예술인을 위한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한 곳이다. 옛 건물이 가진 역사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으면서 모든 세대가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 되도록 리모델링을 거쳐 현재까지 6곳의 문화공간이 조성되었다.
<GS25 수원서둔점>
<경기상상캠퍼스 입구>
경기상상캠퍼스와 가까이 있는 서울대학교 수원수목원과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 농장 앞을 지나 권선구 고색동에 있는 수원종합공구단지를 지난다. 수원수목원은 1907년 무렵부터 식재(植栽)되어 조성되었고, 서울대 농장은 1970년대 주곡(主穀) 자립을 달성하게 한 ‘통일벼’를 육종한 역사적 장소이자 미래의 농업을 선도할 수 있는 첨단 농업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농업생명과학을 완성하는 현장이다.
<서울대학교 수원수목원>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 농장>
고색동(古索洞)은 도고산 밑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고색골이라 한 데서 비롯된 지명이다. 고색동 148번지에는 쪽박산으로 부르는 언덕이 있다. 이곳을 1988년 발굴한 결과 앞부분은 네모지고 뒷부분은 둥근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 형태의 고분이 발견되고 안에서 경질토기(硬質土器)가 채집되었으나, 아쉽게도 네모난 앞부분이 도로건설로 인해 파괴되었다. 이런 형태의 고분은 남부 지방에 20여 기가 있으며, 이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을 표현한 우리 조상들의 우주 관이기도 하다.
<고색동 골목>
하늘을 찢을듯한 굉음을 내며 솟구치는 공군 전투기의 비상(飛翔)을 보며 다시 서호천과 만나 평리교를 건너 천변 길로 들어선다. 수원비행장은 일제강점기 때 건설된 비행장으로 해방 이후 활주로를 두 배로 확장하여 미 공군의 출격기지로 사용되었다. 특히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 29일 맥아더 장군이 첫발을 디딘 곳이다. 맥아더는 인근의 농업시험장을 임시지휘소로 이용해 한강방어선과 인천상륙작전 등의 구상을 세운다. 그리고 영화 ‘빨간마후라’의 촬영지로 지금은 공군 제10 전투단이 주둔하고 있다.
<수원비행장>
수원비행장 주변으로는 ‘중복들’이 넓게 펼쳐진다. 이 지역에는 예로부터 중보(中洑)가 있다하여 중보평 또는 중봇들이라고 불러왔다. 이 인근은 서호(西湖) 아래 물이 풍부한 너른 벌판 가운데 이루어진 마을이라 해서 벌말·들말·평리 등으로 불렸고, 그것이 지금의 ‘평동’이라는 이름이 되었다. 넓은 들녘을 지나 수원시가 펼쳐지고 북으로 병풍을 친 광교산은 수원의 진산(鎭山)답다.
<중복들과 수원시, 광교산>
장지동에서 서호천을 받아들인 황구지천(黃口池川)은 경기도 의왕시 초평동에서 발원하여 수원시를 가로지르는 전형적인 도심형 하천으로, 생활오수가 유입되면서 농업용수로도 사용하기 어렵고 악취가 2003년부터 수원 하수종말처리장을 증설과 꾸준한 하천정화 노력으로 청둥오리와 백로 등 각종 조류가 사는 자연형 하천으로 개선되었다. 황구지천이라는 이름은 ‘큰 고지가 있는 강’이라는 뜻이며, ‘뻗친 내’라는 뜻의 우리말 ‘느러곶이내’가 ‘놀곶이내’로 되면서 항곶포라고 표기하였다가 ‘항’이 황으로 변한 것이다. ‘구지’는 ‘고지·곶이(곶)’를 가리킨다.
<서호천과 황구지천의 만남>
황구지천을 가로지르는 배양교를 건너면 경기도 화성시 배양동이다. 화성시(華城市)는 서쪽으로 서해와 접하고, 동쪽으로는 용인, 북쪽으로는 안산과 수원, 남쪽으로는 오산과 평택이 접하고 있다. 화성(華城)이라는 지명은 수원화성에서 유래한 것 같다. 화성은 수원과 오산이 같은 행정구역이었으나, 1949년 수원읍이 수원시로 승격되면서 수원군의 나머지 지역이 화성군이 되었으며, 2001년에는 화성군이 시로 승격하여 지금에 이른다. 삼국 시대부터 대중국 교통요충지로 당항성(당성)이 있었다.
<황구지천과 배양교>
<화성시 배양동마을>
중봇들 바라보며 아늑하게 자리 잡은 화성시 배양동은 이미 농촌 마을이 아닌 공업화가 시나브로 많이 진척된 마을이다. 입구부터 조금 반듯한 주택은 거의 공장으로 변했다. 마을 한가운데에 있는 방죽도 변해가는 마을 모습을 바라보며 옛 향수에 젖어 있는 양 서산으로 기울어지는 태양을 살며시 안아준다. 마을 위쪽의 교회 건물처럼 지어 놓은 어느 공장의 탑 벽에 ‘오늘 하루도 당신 거예요’라는 문구가 그래도 조금 위안을 준다. 땅거미가 질 무렵 용주사 입구에 도착하여 4코스 완주 확인 소인(消印)을 마친다.
<배양동마을의 공장건물>
<용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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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글 재미 있게 읽었습니다.
디양한 분야에 까지 폭넓은 식견으로
깔끔하게 백의종군길 후기를 남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분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지금부터 420여년 전
겨우 죽음을 모면한 이충무공이
구국충정의 일념으로 걸었을 길을
지금의 시각으로 시공(時空)을 넘어
살펴보는 것도 뜻이 있다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세세한 설명 고맙습니다.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