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편은 가장 잘 알려진 시편 가운데 하나입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 조차도 한 번은 들어봤을 시이죠. 다른 한 편으로는 익숙한 만큼 잘 알지는 못하는 시가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시는 다윗의 시입니다. 다윗은 어려서부터 목자였습니다. 자신에게 익숙한 환경으로 시를 지어 불렀던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시편에서 말하는 이 “목자”라는 이미지는 고대 근동에서 왕에 대한 묘사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왕은 백성을 돌보기 때문에 그의 백성과 공동체와 관련이 됩니다. 하지만 오늘시는 그것을 개인적인 차원에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내신 왕이신 하나님, 목자이신 하나님이 나의 왕임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이 시에서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가 목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후반 부에 상을 베풀어주는 잔치를 베푸시는 분의 이미지로 하나님이 묘사됩니다.
1절을 보시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하고 시작합니다. 부족이 없다는 것은 풍족하다는 말도 되지만 먹는 데에 부족함이 없다는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나를 위해서 푸른 풀밭에 뉘이시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양을 위해서 이리저리 좋은 꼴을 찾아 다니는 목자의 모습이 전제가 됩니다. 또 그분은 양을 위해서 양이 어떤 것을 먹어야 하는지 아시는 분이시고, 무엇이 필요한지 아시는 분이십니다. 양이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을 잘 아는 목자이십니다. 푸른 초장을 찾으면 그곳에 양들이 눕게하고 그것을 먹게 합니다. 이것을 오늘 시편에서는 쉬게한다, 곧 ‘안식’이라고 합니다. 안식은 단지 육체적인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마음껏 누리는 것입니다. 목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이 푸른 초장은 안전한 장소이기 때문에 주신 것을 맘껏 먹고 마음껏 누리면 됩니다. 늑대가 나타나면 목자가 다 처리해 주기 때문에 걱정이 없습니다. 그곳에서 힘들었던 그 간의 여정이 회복이 되고, 영혼이 다시 회복되게됩니다. 그리고 다시 좋은 초장을 찾아서 길을 나서는 목자를 따라서 길을 나섭니다. 이 목자는 자기의 이름을 위해서 늘 옳은 길, 의의 길로 인도합니다.
‘의의 길’은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그 길은 안전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 신실한 성품를 걸고 인도하시는 길이기 때문에 안전하고 틀림이 없는 길입니다. 두번째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길입니다. 의의 길을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 음성을 따라서 가는 길입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잘 따라 가야지 자기 마음대로 가면 안되는 것입니다. 양들은 시력이 좋지 않아서 바로 앞에 있는 것도 잘 못본다고 합니다. 반면에청각이 발달 되어서 목자의 음성을 잘 구별합니다. 양은 그 목자가 인도하는 길, 의의 길로 인도함을 받아 안전한 길로 그분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분은 신실하기 때문에 그분을 따르는 양을 버리고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함께하시고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4절을 보면 혹시 길을 잘못 들고, 목자의 음성을 놓쳐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갔더라도 그분은 양을 버리지 않고 그들과 함께 합니다. 여기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인생의 위기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위기의 순간에 시인은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주님이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푸른 초장에도 계시고 음침한 사망의 골짜기에도 함께 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곳에도 주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평안할 때도, 우리가 인생에서 험한 길을 갈 때에도 주님은 함께하십니다. 주님은 당신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당신의 양인 우리를 지킵니다. 지팡이와 막대기는 목자가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양이 다른 길로 가면 고리로 당겨서 무리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막대기는 사나운 짐승이 달려들면 때리는 데 사용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인 시인을 위로하고 안전하게 지키십니다.
5절과 6절을 보시면 목자와 양의 이야기에서 하나님께서 상을 차려주시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그림이 조금 바뀌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은 잔치의 주인으로서시인에게 상을 차려줍니다. 그것도 대적들인, 원수들 앞에서 그렇게 상을 차려 주십니다. 그리고 기름을 머리에 부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많은 원수들, 이방 나라들, 이스라엘 내의 여러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왕으로 세워 주셨다는 뜻도 되고, 단순히 높여 주셨다는 뜻도 됩니다. 이어서 시인은 하나님의이런 행동을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의인화시켜서 표현합니다. 시인의 평생에 하나님의 선함과 인자하심, 이것도 헤세드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신실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언약을 지키시는 그 하나님의 헤세드가 마치 사람처럼 그를 따른다 말입니다. 여기서 나를 따른다고 했을 때 그 의미가 조금 약한데, 원어로 보면 이것은 추격하는 것입니다. 전투에서 적들을 쫓아 갈 때 쓰는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선하심과 언약에 신실하신 그 사랑이 우리를 평생 동안추격하는 것입니다. 끈질기고 집요하게 자신을 쫓아 올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주 강력한 표현입니다. 그냥 졸졸 따라다니는 정도가 아니라 안 놓치려고 이를 악 물고 쫓아 오는 것입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그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시인을 하나님의 집에 거하게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영원히거하게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집에 누가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참된 목자 되시는 하나님을 따라 가는 의의 길을 가면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 집요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에 이끌려 결국 도착하게 되는 곳이바로 하나님 자신이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참된 목자이자 왕으로서 우리에게 참된 쉼을 주시고,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 안에서 우리는 참된 만족과 평안을 누립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 때에도 주님은 그곳에서도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예수님은 참된 목자로서 자신의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왕이십니다. 예수님은 당신께서 친히 선한 목자로서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고 요한 복음 10장 11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목자로서 예수님은 당신의백성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심으로 백성들에게 푸른 초장으로, 영원한 쉼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주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함이 끝까지 우리를 추격하도록 하셨습니다. 우리가 즐거울 때나 슬플 때나 아플 때나 고생할 때에든 어떤 때에든 예수님은 떠나지 않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 때문에 우리는 어떤 상황에도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의인화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서 끝내 우리를 하나님의 품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 약속을 믿고 삶의 평안의 순간과 어두움의 순간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