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온다 / 조미숙
지난달에 멀리 고흥 나로도에 있는 봉래산을 다녀왔다. 복수초가 피었다는 소식에 좀이 쑤셨다. 두 시간이 넘게 걸리는 곳이라 선뜻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꽃 보러 가자면 다들 좋아해 이의가 없었다. 일행 중에 일이 있어 늦게 출발한 탓에 고흥에 가서 바로 점심부터 먹었다. 인터넷 검색으로 식당을 찾아 간 집은 맛집이라고 하는데 주인아주머니 혼자서 일을 하는 것 같았고 식당은 한산했다. 삼치 조림과 장어탕을 시켜 나눠 먹었는데 내 입맛에는 달콤한 무가 일품인 삼치 조림이 맞았다. 야들야들한 삼치도 한입에 꿀꺽한다. 삼치가 고흥 특산물이라고 벽면에 붙어 있었다.
초행길이라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지인에게 전화를 거니 등산로 쪽으로 가보라 한다. 길이 나뉘는 곳을 지나치자마자 환호성이 터졌다. 노란 복수초가 밭을 이루었다. “예쁘다!”라는 말을 연발하는 내게 동행은 “눈 속에 핀 복수초가 최고라며?” 라며 핀잔을 준다. 비록 내가 원하던 그림은 아니었지만 낙엽 더미에서 빼꼼히 고개를 내밀며 방긋 웃는 노란 꽃을 보고 어찌 그런 매정한 말을 할 수 있을까? 그 말은 취소한다며 손끝으로 꽃을 어루만졌다. 복수초를 누군가 황금 술잔이라고 했겠다. 활짝 피기 전에는 딱 맞는 말이다. 잠깐일 것 같은 복수초는 정상에 이르도록 온 산을 노란 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복수초 실컷 보고 간만에 산에 올라 기분이 무척 상쾌했다. 저 멀리 보이는 편백숲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시간이 없어 편백숲은 가 보지 못하고 되돌아오며 다음을 기약했다.
2주 전에는 순천에 있는 지인을 꾀어 강진 주작산에 다녀왔다. 주작산 휴양림에 주차하고 등산로를 따라 걷는데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길이 정비되지 않아 관목들이 옷깃을 스친다. 가파른 경사면을 지나 능선에 오르니 시야가 넓어진다. 아무도 없는 길을 싸목싸목 걸어가며 밀린 이야기들을 나눴다. 점심시간이 얼추 된 것 같아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며 걷는데 마침 지인도 “우리 밥 먹자.” 한다. 바위에 기대어 찰밥에 김치와 김으로 조촐하게 먹는 점심이지만 꿀맛이었다. 내가 도시락을 준비한다고 했더니 지인이 천혜향으로 주스를 만들어 오고 손수 담근 고추 절임과 어리굴젓을 챙겨 주었다.(그 반찬은 남편이 즐겨 먹었다.) 기암괴석이 즐비한 주작산은 봄철에 산철쭉이 어우러지면 장관이겠다. 네 시간여에 걸친 산행에도 피곤이 쌓이지 않았다. 다음에는 해남 미황사 달마고도길이라도 걷자고 약속하고 헤어졌다.
최근에 리베카 솔닛의 <걷기 인문학> 책을 읽고 나서 걷기의 욕망이 부풀었다. “나는 걸을 때만 사색할 수 있다. 내 걸음이 멈추면 내 생각도 멈춘다. 내 두 발이 움직여야 내 머리가 움직인다.” 고 루소는 <고백록>에서 말했다고 한다. 내 비록 루소, 어즈워드, 소로처럼 걸을 수는 없어도 틈틈이 시간을 내어 보기로 했다. 점점 떨어지는 집중력과 가물거리는 기억력에 형편없는 문해력까지 나를 힘들게 한다. 책을 읽어도 까만 것은 글씨요, 흰 것은 종이일 뿐이다. 정독이 안 된다. 이번 책처럼 방대한 영역을 포괄하는 내용은 더욱 더 나를 헤매게 한다. 한 줄을 채 읽기도 전에 이미 난 글을 떠나 생각의 파편들을 붙잡고 자유롭게 머릿속을 유영하고 있다. 내 머리가 움직이게 하려면 나도 열심히 걸어야겠다.
오랜만에 아침에 일어나 공원을 몇 바퀴 돌았다. 앞으로 아침 시간에 게으름 피우지 않고 동네 산책이라도 해보려고 한다. 어제도 보물이(반려견)을 데리고 유달산 일주도로를 걸었다. 두 시간 반 정도 걸렸다. 세상은 미세먼지로 뿌옇지만 매화며 산수유, 목련 등이 피어 그나마 봄빛을 느끼게 했다. 길가에 키 작은 풀들이 꽃을 피우고 쑥쑥 자란 쑥은 나에게 어서 봄나물 캐러 가라고 소곤거린다. 아직 이른 시간인데 유명 맛집 앞에서는 몇 사람이 줄을 서고 있었다. 예전에는 가끔 갔었는데 지금은 사람이 너무 많아 엄두가 나지 않는다. 바다 건너편 고하도의 용머리가 거대한 탑을 이고 힘겹게 누워있고 목포대교 밑을 빠져 나가는 배들을 유유히 물살을 가른다. 출렁이는 물결처럼 내 마음도 봄바람이 인다. 뻐근한 다리를 끌며 집으로 돌아와서는 어제 먹다 남은 쭈꾸미 볶음에다 밥을 비벼서 맛나게 먹었다.
얼마 남지 않은 자유시간을 만끽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생겼다. 두 차례의 서울 방문과 명절(연휴동안 아프긴 했지만)을 보내고 몇 번의 산행을 다녀오고 나니 내 겨울방학이 끝나 간다. 미뤄둔 책도 열심히 읽고 산에도 열심히 다니고 해야지 했던 애초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어느덧 3월이 되었다. 아이들을 키울 때는 새 학기가 되어야 한 해가 시작하는 것 같았고 내가 하는 일도 봄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새해가 되도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일상이 계속 될 뿐 별다른 감회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소리 소문도 없이 두 달이 달아났다.
난 여지껏 겨울잠을 자고 있다. 바짝 엎드려 봄이 오기만을 기다려야 하는데 가끔 설레발치는 일들이 있지만 잘 견뎠다. 이제 고용보험도 어느덧 막바지에 이르렀다. 빨리 올 한 해의 일정이 나와야 하는데 손 놓고 때를 기다리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이제 우수 경칩도 지났으니 나도 슬슬 잠을 깨야 될 것 같다. 어찌됐든 봄은 온다.
글쓰기가 시작되었다. 올해는 부지런히 움직여야지 마음먹었는데 그 버릇 개 못 준다고 어느덧 또 주말이 되고 말았다. 시간도 많아 핑계거리도 없는데 일이 이렇게 되고 말았다. 우리 글쓰기반 문우님 말씀처럼 올해는 내 글이 익어가려면 좀 더 노력해야겠다. 방금 전까지 천둥소리가 나며 비가 오던데 이 비 그치면 봄빛이 완연하겠다.
첫댓글 고흥 봉래산까지 멀리 가셨네요. 그곳에 몇 번 갔는데 복수초는 못 봤어요.
걷기는 온몸을 깨우는 운동인 것 같아요.
결국 저는 봉래산 가지 못했습니다.
복수초는 또 내년에 눈마춤하렵니다.
주작산의 진달래가 눈에 환합니다.
목포 뒷동산에 진달래가 피었더라고요. 조미숙 작가님 글을 읽으니, 이제 완벽한 봄이네요.
복수초 본다고 약속해 놓고 당일 아침에 발을 다쳐서 가지 못했다는 슬픈 일이 있었어요. 내년에는 꼭 영접하려 가야겠어요.
복수초가 꽃밭을 이룬 곳이 있네요. 언제부턴가 둘레길만 찾는데, 글을 읽으며 대리 만족합니다.
봄을 만나러 다니셨군요? 데려오셨구요. 하하
덕분에 즐거운 여행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이제 기지개를 펴시면 멋진 봄을 맞이하게 되실 거에요. 선생님이 멋지잖아요. 멋진 삶을 만들어 내실 것입니다.
선생님의 글에 활기차고 아름다운 봄이 노니는 듯합니다. 멋진 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글이 무르익어 가네요. 감칠맛이 납니다. '나 글 쓰는 여자야.'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