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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중국 하얼빈역, 수많은 인파가 모인 가운데, 일본 정치계의 거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이 도착한다.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러시아 의장대의 사열을 받던 이토 히로부미, 그 순간 세발의 총탄이 그를 명중시켰다. 저격당한지 30분후 이토 히로부미는 사망하고 만다. 그를 저격한 이는 大韓帝國 청년 安重根이었다.
최원정/KBS 아나운서: 자, 역사저널 그날, 오늘은 安重根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역사적인 날로 문을 열어봤습니다. 오늘 제목이 帝國主義의 두 얼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다 인데요. 두 얼굴이라는 의미가 굉장히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네요.
이윤석/방송인: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본하면 떠 오르는 얼굴은 사실 이토 히로부미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의 元兇이고, 이토 히로부미는 乙巳勒約의 元兇이고, 元兇들의 이름이 먼저 떠올라요.
최원정: 되게 불편한 두 사람이네요, 우리의 역사를 제일 힘들게 했던,
이익주/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이토 히로부미가 찾아간 곳이 중국 영토인 하얼빈이예요. 여기에서 러시아 재무장관을 만날려고 간 거죠. 이 사람을 한국인 안중근 의사가 저격을 한건데 이 당시에 하얼빈은 러시아가 租借하고 있었던 중국영토예요. (하얼빈-당시 러시아의 租借地).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이 사건에는 한국, 일본, 중국, 러시아 네 나라가 연관이 되어 있어요.
류근/시인: 야, 그야말로 글로벌한 사건이네요.
이익주: 거기다가 더한 건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장관을 만나는게 만주철도 부설권 때문이다 라는 이야기가 있어서 만주에 관심을 갖고 있던 영국, 미국이 전부 이 현장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었어요.
최원정: 전 세계의 이목이 쏠려 있었군요.
이익주: 정말 글로벌한 사건이예요.
이윤석: 그 타이밍을~ 일부러 노렸을 수도 있겠어요.
심용환/역사작가: 실제로 지금도 하얼빈역이 있어요. 가보면 삼각형 그리고 사각형 바닥에 安重根 의사가 저격한 곳, 이토가 사살당한 곳이 표시가 되어 있는데요. 安重根 의사가 저격을 한 다음에 러시아어로 꼬레아 우라! 요즘 말로 대한민국 만세! 하고 외친 건데, 세 차례 외친 다음에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외치고 나서 그 다음에 본인이 저격했던 총을 러시아 헌병한테 넘겨주고 스스로 체포를 당하게 되요.
이윤석: 그러니까 도피할 생각은 없었고 순순히 체포가 됐다는 얘이네요.
방광석/동국대학교 대외교류연구원 교수: 安重根에게는 다른 큰 목적이 있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이유, 그리고 東洋平和를 위협하는 일본 帝國主義의 실체를 재판정에서 밝혀서 전세계에 알릴려고 한 거죠.
---------------------------安重根: 이토 히로부미는 우리 대한의 독립 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교란자이므로 대한 의용군 사령의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며 안응칠(안중근 본명) 개인의 자격으로 사살한 것이 아니다---------------------安重根과 러시아 헌병의 일문일답 中---------------
최원정: 오늘 일본 제국주의의 실체, 그 중심에 있었던 이토 히로부미에 대해서 자세히 얘기를 나눠볼까 하는데, 어떤 사람이었나요?
심용환: 이력이 정말 화려합니다. 일본 총리를 네번이나 지냈고요. 그리고 초대 한국 통감으로 부임합니다.
이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생년월일: 1841년 10월 16일
사망일: 1909년 10월 26일
경력사항:
1885년 초대 내각총리(총4차례 총리역임)
1888년 초대 추밀원 원장
1890년 초대 귀족원 의장
1900년 초대 입헌정우회 총재
1906년 초대 한국통감
보도에 보면, 초대, 즉 최초라는 타이틀이 자주 나오게 됩니다.
류근: 장 장 장 초대통감,
방광석: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이 근대국가가 만들어지는 시기니까 새로운 직책이 많이 만들어지는데, 처음으로 중요한 직책이 만들어지면은, 자기가 반드시 먼저 長을 해야지만 직성이 풀리는, 그런 식으로 해서, 계속 최초의 자리를 차지할려고 했던 거죠.
이윤석: 본인이 만든 자리를 본인이 초대해서 초대! 초대 의장이 되고,
방광석: 그래서 이토 히로부미가 햇것을 좋아한다 라는 말이 일본에서 실제로 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으로 조선애 부임해서 (1906년 2월), 말을 하기를 일본은 한국을 보호할뿐 병합할 생각은 없다----일본은 한국을 병합할 필요가 없다.(중략)-------------그러나 일본의 지도와 감독이 없이는 건전한 자치를 이룰 수 없다-----------이렇게 얘기했고 그래서 安重根 의사가 이토를 사살한 것을 두고서 일본에서는 이토 히로부미가 사망하는 바람에 大韓帝國이 더 빨리 일본에 병합됐다 라고 얘기를 하고 있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이토의 얘기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일 때의 얘기죠.
류근: 일본측 논리대로 라면 安重根 의사가 저격대상을 잘못 골랐다는 얘기네요.
최원정: 논리상 그렇지요, 얘기가 되나?
류근: 저는 그 논리가 安重根 의사의 의도를 폄훼하거나 자기들의 침략을 합리화시키려는 걸로 들리는데~,
이익주: 이토 히로부미가 무슨 생각에서 그런 말을 한 것인지 병합에 반대했다는게 진심이었는지 오늘도 그 진실을 100초 후에, 알려드리겠습니다. 또 다른 버전, 오늘은 그 진실을 700초 후에 알려드리겠습니다. 어쨌든 이토는 통감이 되서 왔을 때만해도(1906년), 단지 大韓帝國이 문명화될 때까지 보호해주겠다! 이런 말을 했습니다.
류근: 조폭도 보호해주겠다는 명목으로 보호비(?)를 뜯는 거잖아요. 大韓帝國을 합병하지 않고 문명화 될 때까지 보호해 주겠다는 자들이 총칼까지 앞세워 가지고 勒約을 체결하게 만든거 아녜요. 신뢰할만 합니까?
최원정: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을 하면서 어떤 일을 했는지 우리가 살펴보면 이 말의 진정성을 알 수 있는데, 자, 심용환 작가가 사진으로 준비했다고요.
심용환: 사진이 말하는 그날, 여기 이게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단체 사진인데요. 근데 이들 중에서 낯 익은 얼굴이 있습니다. 바로 가운데 한복을 입은 이 남자?-------
이윤석: 설마 제가 생각하는 그 사람은 아닐 꺼 같은데, 이토 히로부미는 아니죠?
심용환: 이토 히로부미, 그 사람이 맞습니다.
최원정: 한복 체험하는 건가요? 우리나라에 와서,
심용환: 가운데 있는 사람은 이토 히로부미가 맞고요. 앞에 보시면 조바위 쓴 이토 히로부미의 부인이고, 이토 히로부미의 딸입니다. 가족이 한복을 입고 있죠. 이토가 1906년 12월달에 잠시 일본에 갑니다. 일본에 갔었을 때 지금 친일파(박의병 한성부판윤, 박의병의 부인, 이지용 을사오적)들이 한복을 갖고가서 선물을 해서 선물한 한복을 입고 찍은 사진입니다. 여기 보이는 이토 히로부미 같은 경우는 굉장히 한국문화도 잘 이해하고 뭔가 한국인들과 공감하는 듯한 그런 모습들이 보이기도 하는데, 한국 통감으로서 그의 행보를 보여 줄 수 있는 또 다른 사진이 한 장 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좀 인자해 보이는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서있지요. 오른 쪽에 있는 이 소년은 누구일까요?
이윤석: 손자?
심용환: 일본 군복을 입고 있는 이 꼬마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였었던 영친왕(李垠)입니다. 후사가 없었던 순종이 고종의 뒤를 이어서 즉위를 하니까 그의 동생이었던 영친왕이 황태자가 됩니다.
이윤석: 영친왕이 순종의 동생이었군요.
심용환: 이토가 당시 10살짜리 쉽게 말하면 어린아이였던 영친왕의 일본 유학을 제안하게 되고요. 영친왕을 일본으로 데려가게 됩니다. 실제로 이토 히로부미 같은 경우는 평소에 많이 하던 말이 뭐냐하면 선린, 우호 이런 말들을 굉장히 많이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이 사람의 진심인지에 대해선, 우리가 오늘 정확하게 집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죠.
이익주: 영친왕이 유학을 떠날 때 10살이잖아요. 일본식 교육을 받아요. 군복을 입고 있었는데 성장하면서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일본 육군 중장이 됩니다. 완전한 일본 사람으로 키워지는 거죠. 이토 히로부미는 영친왕을 위해서 라고 하면서 유학을 주선했지만 사실은 인질로 잡고 일본식으로 동질화시킬려고 한 거죠. 大韓帝國의 황태자를 일본 사람을 만들려고 한 거예요.
류근: 이건 정말 노골적으로 황실을 억압하고 핍박한 것 보다 더 무서운 계략이 숨어 있는 거죠.
방광석: 그뿐만 아니라 이토 히로부미는 乙巳勒約을 체결할 당시에 한국의 황제를 통감이 직접 알현할 수 있다는 조항을 넣습니다. (乙巳勒約 제3조-통감은 친히 한국 황제 폐하를 알현할 권리를 가진다). 황제를 만나서 결정사항을 통보하고 강압하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심용환: 이 당시에 통감부가 고종이 살던 慶運宮을 출입 할 수 있는 門標를 만들었습니다. 이들이 들고 있는 이유는 궁중의 위엄을 세우고 大韓帝國의 황실을 보호하겠다면서 궁금령(宮禁令), 쉽게 말하면 궁 출입을 제한하는 법을 공표하게 되고요. 허락받은 사람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윤석: 의도가 있는 거지요. 겉으로는 황실을 보호해 준다고 하지만 속으로는 황실, 황제를 감시하고 고립시키는 의도가 있는 거죠.
류근: 거의 가택연금 상태네요.
이익주: 그런거죠. 그래서 일본의 수법이 훤히 보이는데요. 게다가 고종이 은밀하게 독립운동을 지원하다는 사실, 이 사실도 알게되요. 그래서 황실의 자금 줄을 차단하고 외부와의 연락을 봉쇄하죠. 그래서 그 당시 한 외신에서는 이런 고종을 두고 유폐된 황제 라는 표현까지 합니다.
류근: 마지막 황제보다 더 비극적이 되네요
최원정: 황실에 친한척 보호해 주는척 하면서 손발을 꽁꽁 묶어놓는 거네요.
방광석: 사실 일본은 乙巳勒約을 체결할 때 외교권만 접수하기로 했잖아요. 그런데 통감부는 大韓帝國을 문명화 시키겠다면서 내정에도 간섭을 합니다. 大韓帝國 정부에게 시정개선을 요구하고 국민의 이익을 최우선 하겠다면서 일본으로부터 1000만엔의 차관을 받도록 하죠. 그 돈을 가지고 경찰력을 늘리고 학교를 짓고 농공업을 개선시키겠다고 하면서 환심을 살려고 한 것입니다.
류근: 그러니까 돈까지 빌려주면서 치안과 교육을 강화하고 생산력을 향상시키겠다, 얼핏 듣기엔 大韓帝國에 몹시 도움이 되는 일 같은데(?), 이렇게 슬슬 친일파(?)가 되가는 건가요?
최원정: 혹 했어요? 돈 1000만엔에?
류근: 그럴 듯 하지 않아요?
이윤석: 일본의 행동은 끝까지 봐야 그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보통 사람들도 사기 당할 때보면은 정말 친절하게 간이라도 내어 줄 것처럼 다가왔다가 나중에 정신차려보면 내 간이 없어져 있어요!
최원정: 과연 이토 히로부미가 大韓帝國에 내걸었던 공약들이 믿을 수 있는 말 들일까요? 오늘 특별히 우리한테 제보할 게 있다고 해서 스튜디오를 찾아 오신 분이 있는데요. 빨리 만나보도록 하겠습니다.
최원정: 안녕하세요?
새미 라샤드/이집트 유학생: 안녕하세요? 이집트 유학생 새미 라샤드 라고 합니다.
최원정: 방송활동 많이 하시잖아요? 반가워요, 새미씨, 이토 히로부미를 아세요?
새미: 사실 저도 한국 사람들에게 이토 히로부미가 어떤 존재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한국생활 7년차). 그가 大韓帝國을 통치한 방식은 우리 이집트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윤석이 형!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이윤석: 아, 절 아세요? 반갑습니다. 새미 동생.
류근: 나보다 한국말을 더 잘해!
이윤석: 이집트 랑 관련이 있다고 하면 이집트가 옛날에 태양신을 숭배했잖아요, 그러니까 일본을 마치 태양처럼 숭배하도록 통치했다, 그런 방식아니었을까요?
새미: 땡!
류근: 그러면 이집트 하면 피라미드 잖아요. 그러니까 大韓帝國을 피라미드 사업체 운영하듯이 전국민을 네트워크로 엮어 가지고?
새미: 땡! 땡! 땡!
이윤석: 그건 우리가 미안하더라구요. 이집트의 위대한 문화 유산을 잘못되게 사용을 했잖아요. 사과를 드리고---, 이집트 미라, 대한제국을 미라처럼 꼼짝 못하게?
새미: 땡! 사실 그건 아니고요. 대한제국과 비슷한 시기에 우리 이집트도 영국으로부터 지배를 받고 있었거든요. 근데 이토 히로부미는 당시 영국이 이집트를 통치한 방식을 벤치마킹 했다고 합니다. 영국은 1882년부터 무려 72년간 이집트를 지배했거든요. 그런데 그때 당시 이집트에 부임했던 영국의 총영사인 크로머 라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은 미개한 이집트를 문명화 시키는 것이 영국의 임무라고 주장 하면서 이집트를 간접통치를 했습니다. 그래서 이토 히로부미는 크로머의 이집트를 통치한 통치술을 벤치마킹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윤석: 그러니까 이토 히로부미가 영국인 크로머가 이집트를 지배한 방식을 공부를 해서 롤모델로 삼았다?
새미: 맞습니다.
이윤석: 딩댕동 한번만---결국은 맞혔네.
새미: 한국에서도 역사 수업시간에 이토 히로부미에 대해서 공부를 하잖아요. 이집트도 마찬가지 입니다. 역사 수업시간에 크로머에 대해서 공부를 하는데 사실 크로머는 말로는 이집트를 문명화시킨다. 얘기를 했지만 사실은 이집트 국민들을 탄압 했거든요. 그래서 이집트 사람들 대부분은 크로머를 싫어합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집트나 한국이나 역사를 잊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윤석: 진짜 뜨겁네요.
최원정: 맞는 말씀입니다. 오늘 덕분에 이토 히로부미의 롤 모델 크로머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네요.말씀 잘 들었어요, 새미씨.
새미: 감사합니다.
이윤석: 고마워요, 새미 동생,
새미: 감사합니다, 형님.
류근: 역사인식이 투철한 열혈 청년이네요.
최원정: 오늘 부로 갑자기 친해지신 거 같애요.
이윤석: 네, 외국인 동생 한 명 생겼어요.
최원정: 자, 대체 크로머는 어떤 식으로 이집트를 통치한 걸까요?
심용환: 크로머는 지배계층한테 특혜를 주면서 그들을 통해서 대신 이집트를 통치하는 방식인데이집트에 외국자본을 유치해 가지고 농업이나 무역 같은 것을 진흥시키는 경우가 있구요. 심지어 교육개혁을 단행한다고 하는 부분도 있으니까 이건 뭐지하는 생각이 살짝 들기도 하구요.
이익주: 그 이면을 들여다 봐야 되요. 그 이면을 들여다 보면 이익을 전부 영국이 수탈해가기 때문에 이집트에 남는 이익은 크지 않았다는 거지요. 교육개편을 가지고 말씀을 하셨는데 이게 전부 중급관리, 기술자, 자기들이 부려 먹기 쉬운 사람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인 거죠. 그래서 교육도 초등교육 위주로만 진행되고, 고등교육까지는 이집트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지 않습니다.
이윤석: 크로머와 이토의 통치술은 흡사한 거 같아요.
류근: 잘 먹고 잘 살게 해주겠다고 해서 나라 빚 쓰게 하고 그 돈으로 경찰력 증원해서 감시하고 식민지 교육으로 쇠뇌시키고 농사 잘 짓게 해준다면서 자기들 식량 창고로 만들고, 난 궁금한게 그 시대에 이토 히로부미는 영국인 크로머의 통치술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방광석: 사실 대한제국이 乙巳勒約을 체결할 당시에 일본에서는 보호통치연구가 굉장히 활발히 진행이 되었습니다. 크로머가 이집트를 어떻게 통치했나 하는 것에 대한 책까지 번역되어 나왔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이토는 항상 이집트의 재정에 귀를 기울이고 주시하고 있다 라고 밝히기도 했구요. 또 大韓帝國의 외교고문을 맡고 있었던 스티븐스 (러럼 스티븐스 D.W.Stevens(1851~1908)-일본에 의해 파견된 대한제국 외교고문) 라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도 영국의 이집트 통치에 대해서 이토에게 조언을 한 적이 있다 라고 말을 하기도 했죠 (한국인의 환심을 사야!).
이윤석: 들어보니까 일본은 아시아 쪽이 아니라 서구 열강하고 동일시를 하고 나중에는 한 통속이 되는 것 같애요.
류근: 점점 가재(일본)는 게편(프랑스 영국 미국 러시아)이 되어가고 있어요.
최원정: 자, 그렇다면 이토 히로부미는 이 서양의 제국주의를 어떻게 학습하고 어떻게 실행에 옮기게 까지 됐을까, 본격 해부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심용환: 총리를 연거푸 네번이나 역임했구요. 집안이 좋았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굉장히 가난한 농민출신 입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가 주인으로 모시던 사람의 성씨가 이토였고 아버지가 이토 성을 물려받게 되는 계기가 있었어요. 그래서 가난한 농민에서 하급무사로 신분상승이 되는 거죠.
방광석: 아시가루 라고 하죠. (아시가루-평소 잡역에 종사하다가 전시에 병졸이 되는 최하급 무사), 말단 무사신분을 얻게된 겁니다.
최원정: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아시가루 출신이죠?
방광석: 네, 그렇죠.
이윤석: 도요토미 히로부미(?).
최원정: 헷갈리는 학생들 많아요.
이윤석: 한 통속으로 이어져 오는 느낌이 있어요. 그렇게 농민에서 하급무사로 겨우 된 것 같은데 어떻게 총리까지 될 수가 있었는지? 일본에도 과거시험 제도가 있었나요?
이익주: 일본에는 과거시험이 없습니다. 요시다 쇼인이라는 사람이 있어요. 저 사람이 일본개항시기(1854년) 전후로 활동했던 사상가라고도 할 수 있고 정치가인데 뒷날 메이지 유신의 정신적 지도자, 이런 호칭을 받는 사람입니다. 저 사람의 고향이 조슈 라는 곳의 하기라는 곳인데요. 거기에 자기 집에다가 학교를 만들었어요. 그 학교가 쇼카 손주쿠 라고 하는데 거기서 젊은이들을 가르쳤는데 (야마구치현 고향인 조슈 지역에 사설 교육기관인 쇼카 손주쿠 설립), 이토 히로부미의 집이 저 쇼카 손주쿠에서 걸어서 2~3분 거리에 있습니다.
이윤석: 운 좋게도 학군 좋은 동네 살았네요.
이익주: 그래서 요시다 쇼인이 죽기 전까지 불과 2년 정도 요시다 쇼인에게서 학문을 배웁니다.
류근: 아까 요시다 쇼인이 사상가라고 하셨잖아요? 도대체 어떤 사상을 펼쳤길래 일본 사람들이 지금까지 기리고 있는 걸까요?
방광석: 요시다 쇼인이 살았을 시기에는 일본 무사들이 지배하던 막부체제에서 천황체제로 이행하는 과도기였습니다. 그 이전까지 천황은 상징적인 존재에 불과 했구요. 무사집단의 우두머리였던 쇼군(국가의 실질적인 통치자)이 실질적인 통치자였죠. 그런데 그게 1860년대가 되면 천황을 떠받들고 서양세력을 물리치자는 존왕양이(尊王攘夷) 운동의 선구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 요시다 쇼인이죠. 그래서 요시다 쇼인은 단순히 외국세력을 물리칠 뿐만 아니라 일본이 힘을 갖춰서 해외로 팽창해야 된다. 가까운 지역은 일본의 홋카이도, 당시 홋카이도는 아직 확실히 일본 땅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더 멀리 가면은 캄차카 반도, 그리고 서쪽에 있는 만주지역, 몽골지역까지 나가자 그리고 남쪽으로는 타이완, 필리핀까지 일본이 팽창해야 된다. 이런 주장을 했던 사람이 바로 요시다 쇼인입니다.
최원정: 당연히 조선도 그 범위 안에 들어가나요?
방광석: 그럼요, 당연히, 그 중에서도 가장 가까운 쪽은 조선인 거죠.
류근: 결국은 그대로 실행이 되는 거잖아요?
방광석: 네, 그렇죠. 결과적으로, 그 당시에는 이게 하나의 공상에 가까운 주장일지 모르죠. 힘이없었으니까 나중에 일본의 군국주의가 실현되고 대동아 공영권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어떻게 보면 그것과 흡사한 형태니까 요시다 쇼인이 가르침이 실현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익주: 이 요시다 쇼인의 제자들이 메이지 유신에 성공하고 일본 근대화에 공을 세운 사람들이예요. 그러면서 자기 스승으로 떠받들게 되면서 유명해 지는데 결국 일본 제국주의, 군국주의의 뿌리가 된 사람이라고 볼 수가 있는 거죠.
심용환: 우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많이 얘기하잖아요? 여기에 이제 아까 방금 말씀하셨던 요시다 쇼인의 위패가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의 스승, 요시다 쇼인의 위패가 보관된 야스쿠니 신사), 야스쿠니 신사의 가장 큰 특징은 일본 근대사에서 잘 알고 있는 A급 전범들이라고 하는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여러 전쟁 범죄자들이 같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거죠.
류근: 그런 신사에 이토 히로부미의 스승이 있다고 하니까 정말 오싹하지 않습니까? 제국주의의 몸통이 이토의 스승이었는데 (1869년 메이지 유신 직후 전사한 군인을 기리는 神社 건립), (1978년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A급 전범 14명 합사), (요시다 쇼인 등 제국주의 인물들이 있는 야스쿠니 신사),
이윤석: 그런데 존왕양이 운동이라고 하니까 이토 히로부미가 서양은 물러가라 라고 시위도 하고 그랬다는 건가요?
심용환: 이토가 도쿄 시나가와에 있는 영국 공사관에 불을 질렀던 적이 있었고요 (1862년), 막부측의 지식인을 살해하는 과격한 행동까지 했습니다. 행동주의자죠!
방광석: 이토 히로부미는 지금으로 보면 하나의 테러리스트였다 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 당시에.
류근: 일본 총리를 네번씩이나 지낸 사람이 젊은 시절에는 방화범에 살인까지 했다!
심용환: 이게 정치행위 였기 때문에 오히려 포상을 받고 영국 유학기회도 얻었어요. 상황이 굉장히 과격했던 거지요.
최원정: 그렇게 서양에 대해서 반감이 있고 오랑캐 라고 하면서 이런 행동까지 했는데 영국을 롤모델로 삼고 서양의 제국주의를 따르게 된 건가요?
이윤석: 갑자기 돌변했네요.
방광석: 일본의 尊王攘夷의 攘夷는 鎖國하고는 다릅니다. 문을 닫고 외부하고 접촉을 하지 말라 이것이 아니라 지금은 힘이 약하니까 힘을 키워가지고 강하게 되면 외부로 팽창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개국으로 전환이 되는데 이토는 일찌감치부터 서양체험을 많이 하게 됩니다. 그래서 서양을 자주 접촉하면서 일본을 강하게 하자 해서 서양제국주의를 따르는 노선으로 전환하게 됐죠.
이익주: 같은 지역에 사는 청년 친구들, 모두 다섯 명이 영국으로 밀항을 시도합니다. (이토 히로부미 포함 조슈 출신 젊은이 5명이 영국밀항 시도), 그래서 영국에 가는데 성공해요. 그래서 우여곡절 끝에 영국에서 받아들여져서 영국의 대학에서 청강을 하게 되는데 그 대학이 University College London 이라고 해가지고 (University College London-런던에 처음 설립된 대학-인도의 간디 등 동양 유학생을 받아들임), 꽤 좋은 학교예요. 간디도 여기 나왔어요. 이런 학교에서 6개월간 청강을 하고 돌아옵니다. 이때 다섯명의 조슈 젊은이들을 기념해서 조슈 파이브 [조슈 출신 영국유학생 5人] 라고 해서 동상을 세워놓고,
최원정: 이거 ‘조슈 파이브’ 영화로도 나왔어요. 일본에서 제작된 영화 조슈 파이브 (2006).
이익주: 일본에서도 역시 조슈 파이브 라고 해서 굉장히 크게 기념을 하는건데 하여튼 이 경험을 통해서 일찍부터 이토는 외국에 대한 견문을 넓혀갈 수가 있었습니다.
최원정: 우리도 이런 기회가 있었는데~~ 개화파들이 문물 받아들이고, 북촌 파이브 이런거 만들수 있었는데~~, 되게 좀 아쉬워요.
방광석: 그렇죠. 이토가 영어를 잘 하게 됨에 따라서 정치적으로 출세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외교교섭에도 나간 적이 있고 가장 큰 것은 1871년에 천황의 명으로 해서 파견되는 서양의 유럽과 미국 12개 나라를 순방하게 되는 이와쿠라 사절단입니다. (이와쿠라 사절단-서영 문물을 체험하고 돌아와 일본 근대화에 큰 영향을 끼침), 이와쿠라 사절단은 원래 서양견문을 오랫동안 연구해서 일본의 근대화에 영향을 끼쳤다고 하는 점이 많이 알려져 있는데 그것 말고 또 다른 한가지 큰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건 뭐냐하면 불평등조약을 개정하는 것입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적극적으로 불평등 조약을 개정할려는 교섭에 나서게 됐죠. 그런데 근대외교에 대한 이해라고 할까 이것이 아직 철저하지 않은 단계에서 그건 실패하고 결국은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이익주: 그래서 이 조약개정이 얼마나 어려운지 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왔을 것입니다. 이러한 실패한 경험, 이것이 이토 개인에게는 굉장한 재산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협상가로 키워지는데 실례로 조약개정을 실패하고 돌아와서 3년 뒤에 조선하고 강화도 조약을 맺어요(1876년).
이윤석: 그러니까 그때 조약을 한번 맺으면 바꾸기가 어렵다는 걸 몸소 체험하고 그 경험을 살려서 그 수법을 그대로 조선에다 적용을 한 거죠.
최원정: 아이 얄미워!
심용환: 한번 맺으면 절대 못바꿔, 이걸.
최원정: 강화도 조약 때 우리한테 이걸 다 써 먹는 거야, 치외법권이 들어가서 못바꾸게 된 사실,
방광석: 그러니까 일본이 동아시아 국가들과 외교를 만드는데 많은 지식과 정보를 서양 사람한테배운 겁니다.
심용환: 일본은 벤치마킹을 잘 한다는 말을 많이 하고, 해군체제는 영국에서 배웠다, 철도와 통신은 미국에서 배웠다 육군이나 법률 같은 것들은 프랑스에서 배웠다. 헌법이나 의학 같은 것은 독일에서 배웠다 라고 분류를 하는데 실제 그런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니까요.
이윤석: 그럼 일본 가보면 지금도 운전할 때 자동차 핸들이 오른쪽에 있는데 그 교통 시스템은 영국에서 벤치 마킹한 거군요.
류근: 지금 사실 이 순간 불길한 예감이 엄습하긴 합니다.
이익주: 그럼요 좋은 것만 배워오는 게 아니거든요. 이토가 서양의 문명 기술 이런 것만 배워 온 게 아니고 당연히 그 당시 서양국가들의 문제적인 모습도 보았겠조. 약한 나라들 침략하고 수탈하고, 이런 제국주의에도 눈을 뜬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건 그 방법, 어떻게 하느냐 이걸 배워와서 대한제국에 적용한 거죠.
심용환: 그 방법? 그 말이 인상적이다.
최원정: 못된 것 배워왔네.
---------------이상협 아나운서: 속보입니다. 지난 (1907년 9월) 20일 오전 8시, 경운궁 중화전에서 대한제국 황제 양위식이 치러졌다고 합니다. 저희 대한제국 늬우스 취재결과 이날 양위식에는 황위를 물려주는 황제도 황위를 이어받을 황태자도 참석하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졌는데요. 대신에 이토 히로부미 통감의 감독하에 환관 두명이 황제 폐하의 대역을 맡아 양위식을 거행했다고 합니다.
최원정: 실황 뉴스가 개콘 보는 거 같네요. 말이 돼요?
이윤석: 대역을 쓸 수가 있는 거예요? 오전 8시에 대궐에서 했으면 내가 볼 때는 이건 리허설인데---?
류근: 진짜 황실을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그렇지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이상협: 그렇습니다. 역사상 이보다 더 기이한 양위식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속보입니다. 대한제국과 일본이 (1907년 7월 24일) 정미7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일본이 대한제국의 내정에 공식적으로 관여하겠다는 조약인데요. 외교권을 박탈 당한 을사늑약 보다 더 굴욕적인 조약이 아닌가 싶습니다! 너무나 화가 납니다. 이토 히로부미 통감 외교권만 가져간다더니 이렇게 한입으로 두 말하기입니까! 네!? 긴급상황 발생, 일본헌병이 스튜디오로 침입해 이상협 아나운서를 끌고 가다. 방송독립쟁취!
이윤석: (이상협 아나운서) 지금 끌려 나간 거예요?
최원정: 크로머식이니 뭐니해서 야심을 숨기고는 이번에 노골적으로 조치를 내린 거네요.
이익주: 우리 지난 시간에 고종의 대한제국의 밀사, 을사늑약이 무효다 주장하기 위해서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했던 이야기를 했잖아요. 그것이 1907년 6월 말부터 7월초에 있었던 사건인데 그 사건 이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한번 보시죠.
------------1907년 통감부 조치-----------
07.19. 새벽에 고종 양위 결정
07.20. 고종 양위식 개최
07.24. 신문지법 정미 7조약 체결
07.27 집회결사 금지 보안법
08.01 대한제국 군대해산
이렇게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하기 위한 절차가 전광석화 처럼 진행이 됩니다.
류근: 저건 미리 정해진 스케줄이 있었는지 아닌가 싶네요.
방광석: 이토 히로부미는 이 와중에도 대한제국을 기만하는 발언을 합니다. 7월 29일날 한 연설에서 일본의 욱일기와 대한제국의 팔괘기가 나란히 내걸리기를 바란다 라고 말을 했는데 대한제국과 일본이 양립하기를 바라는 것처럼 말을 해놓고서 사흘 뒤에 바로 전격적으로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해 버립니다.
이윤석: 진짜, 가만 보면 말 바꾸기의 달인이네요. 처음부터 탁 때리는게 차라리 낫지 뭐 이렇게 칭찬할 것 처럼 쓰다듬다가 꽝 때리면 진짜 아프고 화가 많이 나거든요. 그런데 보니까 계속 그렇게 하고 있어요.
심용환: 공식적으로 대한제국 내정에 간섭하는데 조약내용을 잠깐만 읽어드리면 화가 더 나요. 조약의 내용이 대부분 어떻게 되어 있느냐면, 대한제국 정부는 시정개선에 관하여 조선 통감의 지도를 받을 것 (정미 7조약). 법령을 제정하거나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은 미리 통감의 승인을 거칠 것(정미7조약) 이런 식으로 되니까 완벽하게 장악이 된 상태고요. 대한제국 정부에 일본인 관리가 한 2천여명이 파견이 돼서, 재정 사법 경찰 아예 모든 분야내정을 장악합니다.
-----------------------이상협 아나운서 등장, 대한제국 늬우스, 골방 늬우스 입니다. 도저히 방송 안하고는 못베겨서 부득이하게 집에서 마이크를 들었습니다.
이윤석: 개인방송!
이상협: 속보입니다. 대한제국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 통감직을 사임하고 일본으로 떠난다는 속보입니다. 다시 한번 알려 드립니다. 1909년 6월, 이토 히로부미가 드디어 통감직을 사임했습니다.
최원정: 근데 갑자기 어떻게 된 일이에요? 통감직을 사임했다는 것, 잘된 일인가, 왜 사임을 한 거죠?
이익주: 이토의 계획대로 일이 안됐던 겁니다. 그 당시 일본이 통감부를 앞세워서 대한제국을 계속 억압을 하니까 일본이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지는 데 대한제국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국민들의 반발이 정말 예상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전개됩니다. 이렇게 되니까 이토 히로부미는 옛날 일본에서 메이지 천황이 일본 전역을 순회하면서 전국을 다니면서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던 그 사례를 떠올려요. 그래서 순종 황제를 앞세우고 전국 순행길에 나섭니다. 그래서 이걸 가지고 대한제국 국민들의 반발을 잠재우려 했는데 그게 되질 않아요. 국민들의 반일감정이 꺾이질 않으니까 애초에 이토가 생각했던 구상이 다 깨져버리고 그러면서 통감직에서 사임을 하게 됩니다.
이윤석: 이토 히로부미가 그동안 일본에서는 모방작전이 먹혔는데 이게 대한제국에서는 안먹혔네,
최원정: 우리의 저항이 워낙 크니까 보통민족입니까.
류근: 그러면 이토의 입장에서는 속내를 들켰으니까 이대로는 안통하겠다 싶어가지고 자발적으로 물러선 것이다 라고 보는 건가요?
방광석: 그런데 사실, 또 다른 통감직 사임의 이유가 있습니다. 이토가 통감으로서 조선에 와 있는 사이에 일본 내각의 총리를 맡고 있었던 사람이 가쓰라 다로입니다. 가쓰라 다로는 바로 아시겠지만 가쓰라-태프트 (가쓰라-태프트 밀약 1905년 7월 체결-미국과 일본이 필리핀과 대한제국에 대한 서로의 지배를 인정한 협약), 밀약을 체결한 장본인이죠. 그런데 가쓰라 다로는 이토의 방식과는 달리 적극적으로 즉시 병합을 주장을 합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가쓰라 뿐만 아니라 초대 총독이 됐던 데라우치 마사타케 [훗날 초대 조선총독], 이런 사람들도 모두 강경파 였죠. 즉시 병합하라는 강경파가 일본 내에서 득세를 하니까 이토의 입지가 더 줄어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어쨋던 이런 국내외적인 사정이 맞물려 가지고 이토가 사임을 결정했다고 봐야 합니다.
이윤석: 이쨋거나 이토는 그 동안 선린이니, 친선이니 자칭 이런 말을 했는데 자기가 그동안 했던 말이 지킬 수 없는 약속, 혹은 다른 목적이 있다는게 들키니까 그래서 쓱 물러난 게 아닌가 이런 느낌이 듭니다.
이익주: 아까 이토가 병합을 반대한게 사실인지 진심인지 밝히겠다고 했는데 오늘 우리 방송의 제목이 제국주의의 두 얼굴이잖아요. 그 진면목이 지금 들어나는 건데 겉으로는 병합에 반대한다 그런데 속으로는 계속 병합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토가 그 말을 하면서도 분명히 병합에 찬성했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1909년 4월에 일본 내각수상이었던 가쓰라 하고 외무대신 고무라가 이토를 찾아간 일이 있어요.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은 이토에게 병합을 합시다 라고 당신의 생각을 좀 꺾으시오 하는 권유를 하러 갔는데 뜻밖에도 이토가 쉽게 병합에 찬성을 했다는 거예요.
이윤석: 그렇죠. 그러니까 이토도 병합에 찬성하고 있었다는 이 장면에서 밝혀진 거죠.
방광석: 그게 맞습니다. 그게 결정적인 순간인데요. 일본에서도 아직 이토가 보호국론자인지 병합론자인지를 제대로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거지요. 왜냐하면 자꾸 연설이라든가 언론에다가 나는 병합론자가 아니다. 나는 한국을 보호할려고 왔을 뿐이다. 이런 것을 계속 얘기를 했었거든요. 그런데 이토는 의외로 일본 정부의 병합방침에 순순히 찬성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토의 본심이 거기서 확실히 드러났다고 얘기 할 수 있습니다.
최원정: 찬성 반대 문제가 아니라 기초를 다 다진 다음에 넘겨준 거잖아요. 죄질이 더 나쁘네.
이윤석: 그리고 치밀한 것이 일본 대신들조차도 이 사람이 어떤 쪽인지 모를 정도로 끝까지 숨긴 거에요.
류근: 백조, 백조, (백조는 겉으로는 깨끗해 보이지만 사실 정말 더럽다고 해요)
이윤석: 지금 말씀 들어보니까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당하기 전에 이미 병합에는 (6개월전) 찬성을 한 거네요? 그러니까 이토 히로부미가 빨리 사망하는 바람에 한일강제병합이 앞당겨졌다 라는 주장은 허위라는게 증명이 된 거네요.
최원정: 어불성설,
류근: 이토는 일본이 대한제국을 합병 하도록 꽃길을 깔아준 사람입니다.
방광석: 이런 과정을 거쳐서 이토가 통감에서 사임한 뒤 4개월 후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이 됩니다. (1909.10.26). 추정컨대 이토는 청일전쟁 시기에 랴오둥 반도를 획득하고서도 3국 간섭(러시아, 프랑스, 독일)을 통해서 이걸 되돌려 줄 수 밖에 없는 일본으로서 안타까운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 한국병합이 목전에 다가왔으니까 이번 만큼은 러시아에게 한국 병합을 인정해 달라고 확실히 해둘려고 하얼빈을 방문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죠. 반면에 안중근 의사는 이토를 사살함으로서 일본 제국주의의 민낯을 세계에 알렸고 뤼순 감옥에서 자신의 평화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서 동양평화론이라고 하는 글을 남깁니다.
류근: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은 동양의 평화를 위해서 일본을 처단한다 이런 뜻인가요?
심용환: 놀랍게도 아닙니다. 안중근 의사는 대한제국과 청나라, 일본 3국이 동맹을 해서 서양 제국주의 열강에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람입니다. 내가 왜 이토를 죽였는가 동양의 평화를 우리 한중일이 연합을 해서 지켜내야 하는데 그가 동양의 평화를 깨는 일을 했기 때문에 내가 처단했다 라면서 본인은 이토 사살의 명분으로서 동양평화론을 새롭게 해석을 해요.
이익주: 그러니까 그 뒤에 우리가 일본에 국권을 뺏긴다고 하는 이 결과를 아직 모르는 상태에서 동양평화론이라는 이론을 구상하는 건데요. 아주 구체적인 이야기까지 나오는데 일본이 청나라에 뤼순항을 조차하고 있잖아요. 이것을 돌려준다면 일본과 청의 관계가 개선되겠죠. 그리고 대한제국과 청, 일본이 공동으로 관리하고 여기를 중심으로 해서 평화회의를 조직하자 그리고 이 세나라의 국민들로부터 인구가 많잖아요. 그러니까 한명당 1원씩 모금을 해서 이것을 가지고 공동은행을 설립하고 공동의 화폐를 발행하고 이런 주장을 합니다.
이윤석: 유럽의 EU 있잖아요. 지금 얘기가 대한제국 하고 청하고 일본하고 동맹을 맺어서 동아시아 연합을 만들자 라는 얘기 같은데 110년 전에 벌써 이런 구상을 했다고 하니 상당히 놀랍기도 하고 상당히 앞서간 생각이기도 하네요.
이익주: 좀 더 한 걸음 더 들어가서 안중근 의사는 구국의 청년들로 군대를 만들자 그리고 군대는 군인들로 2개국 이상의 언어를 배우자 앞으로 이 청년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새로운 세계는 한중일 3국의 공동노력으로 평화가 유지되는 그런 세상이 될 것이다 라는 이런 구상인 거죠.
류근: 결론적으로 제국주의 처럼 남의 것을 빼앗고 짓밟으면서 잘 먹고 잘 살자가 아니라 3국이 평화롭게 잘 살자 라는 이런 뜻이었다는 것이죠.
방광석: 그러니까 안중근은 약육강식의 논리를 앞세우면서 일본의 제국주의 정책을 실천하는 이토 히로부미를 제거를 하면 동양의 평화가 올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동양 3국의 공멸을 가져올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를 제거해야 된다 라고 생각을 해서 처단한 것이죠.
최원정: 이게 지금 뤼순 감옥에서 쓰신 거예요?
심용환: 이게 낯설게 느껴지지만 민족자결주의 나오기 벌써 한참 전이고 그리고 국제연합이라든지 세계평화 개념 나오는게 2차 세계대전 전후로 나오잖아요. 1940년대 거든요. 그런데 이게 1909년에 거사를 하시고 썼던 글이기 때문에 이미 어떤 서양인들이 세계평화를 위한 국제기구 같은 상상하기 전에 이런 생각을 하셨기 때문에 되게 인상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하고 안중근의 재발견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원정: 선고일자를 기다리는 와중에 일본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일본을 품어 안고 생각을 한다는 것은 저는 당황스러운 거예요. 어쩌면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을까?
류근: 당연히 안중근 의사가 대한제국의 독립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을 것이다 이렇게 믿고 있었는데 그 보다 훨씬 더 크고 넓은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거 아닙니까 알고 나니까 진짜 존경스럽고 감동입니다.
김용환: 중화민국 총통 원세개가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의 이익을 취하였고 안중근의 목숨 바침은 한국과 세계 평화를 위함이었다 라고 그 당시에 언론을 통해서 직접 기고문을 쓸 정도였으니까. 우리가 쉽게 간구할 문제가 아니죠.
--------------------------안중근/여순감옥에서: 지금 세계는 동서로 갈라져 있고 인종도 각각 달라 서로 경쟁하고 있다. 청년들을 전쟁터로 내몰아 귀중한 생명이 희생당하는 일이 날마다 그치지 않는다. 밝은 세상에 이 무슨 광경이란 말인가------------------안중근 의사 동양평화론 中--------------------------------------------------------------------------1910년 3월 26일 안중근 의사 사형집행.
류근: 아까 안중근 의사의 東洋平和論을 보면 富國强兵의 길이 서로 뺏고 빼앗기는 길이 아니라 共存과 相生에 있다고 하잖아요. 帝國主義는 진실을 짓밟은 集團利己主義 내지 國家利己主義 였다는 사실이 참 뼈아프게 다가 옵니다.
방광석: 올해(2018년)는 메이지 유신 150년이 되는 해입니다. 올해 초에 아베 총리는 메이지 유신을 예찬을 하면서 그 시대정신을 다시 구현하자고 호소를 했습니다. 과거 일본 帝國主義 침략의 역사는 지우고 그 다음에 메이지 유신을 미화만 할려는 것이 아닌가 염려됩니다.
심용환: 아베 총리가 사실은 최근에 이런 발언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자신이 이토 히로부미와 같은 조슈 인맥이다 라는 발언을 많이 했고 그게 꽤 화제가 됐는데 “이토 히로부미는 초대 총리대신이고, 제가 97대 총리 대신입니다 조슈 출신으로는 첫번째가 이토 히로부미, 제가 8번째 입니다” 여기까지 얘기했고 지금 보시는 인물들이 일본의 조슈번 출신의 인물들이고 총리들이 됐던 사람들입니다.
가쓰라 다로-한일강제병합 당시 일본 총리
데라우치 마사타케-초대 조선총독
이토 히로부미-초대 통감
기시 노부스케-아베 총리 외조부 태평양 전쟁 A급전범으로 기소
아베 신조-現일본 총리
한일강제병합 당시 일본의 총리였던 가쓰라 다로, 그리고 총대 총독으로 조선병합을 강경하게 밀어부쳤던 데라우치 마사타케도 1916년에 제18대 총리 대신으로 취임하게 되고요,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쟁 당시 A급전범으로 기소가 됐던 아베 총리의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 그리고 그의 외손자인 아베 신조, 이들을 모두 이토 히로부미의 스승인 요시다 쇼인의 정신을 계승한 조슈 인맥이라고 부르게 된다는 거죠.
류근: 위험한 계보,
이익주: 아까 야스쿠니 신사 얘기가 나왔었는데요. 이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 군국주의를 이끈 사상가들, 그리고 전범들 또 전쟁에서 전사한 일본 군인들, 그런 신사입니다만 이곳에 조슈 인맥의 정신적 지주라고 할 수 있는 요시다 쇼인이 있고, 그리고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일본의 정치인들이 지금도 이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고 있다는 점이에요.
최정원: 단순히 사과를 안하는 차원이 아니라 옛 영광을 되찾겠다는 무서운 야망 같은게 보여져서 섬뜩섬뜩 해요.
이익주: 2차 세계대전 전범들을 아직도 자신들의 애국자라고 평가를 하고 있으니까요.
이윤석: 지금 계속 야스쿠니 신사참배가 이어지고 있는 걸 보면은 일본의 군국주의가 아베 내각을 통해서 현재 진행 중이다. 과거 완료형이 아니고 현재 진행 중이다. 이런 느낌이 들어요.
류근: 물론 일본에서도 지난 역사를 참회하는 양심적인 분들은 있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베 정부는 아직도 帝國主義, 軍國主義 허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헛 꿈을 꾸고 있다. 그래서 지금 조슈? 이렇게 물어보고 싶어요.
최원정: 아재 개그를~해서 조슈?
이윤석: 아베, 이제는 꿈에서 깨슈~ 그만 조슈~
최원정: 왜들 이러슈~
방광석: 메이지 유신 이후 富國强兵이라는 이름 아래 이웃 나라를 적으로 돌리고 희생시키면서 帝國主義의 침략을 반성하지 않고 그것을 미화하고 國家主義로 나아가는 것이 과연 일본을 위한 길인가? 이것은 우리가 한번 생각해봐야 되겠습니다.
심용환: 安重根 이라는 존재를 기억하는게 중요한게 이토는 어떻게 보면 현실주의자이잖아요. 현실 대세에 이름이 나고 나쁜 놈이 돼서 한 몫 하겠다는 거고, 안중근 의사는 현실이 그래도 안된다 이렇게 가야 된다 라고 하면서 평화의 길을 제시하였기 때문에 일본이 이럴수록 오히려 우리는 평화로 나가는 길을 적극적으로 제시하는 安重根의 길을 따르는 게 올바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이익주: 安重根의 동양평화론 처럼 보편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는가 평화 인류애 자유 공존 번영 이런 것들을 갖지 못하는 국가가 국민들에게 충성을 요구했을 때 그 국민들을 모두 범죄자로 만든다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이라도 일본은 과거의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서 반드시 인정하고 사과를 해야만 앞으로 共存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류근: 사과를 진심으로 해야죠.
최원정: 실제로 이 말은 우리가 아닌 일본 사람들이 꼭 들었으면 좋겠어요. 끝. (KBS 역사저널 그날 40화, “제국주의의 두 얼굴, 이토 히로부미 사살하다”에서 정리).
①. 1909년 10월 26일, 大韓帝國 安重根, 중국 하얼빈역, 일본 정치계 거물 이토 히로부미를 향하여 권총 세발 발사, 이토는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를 만나 러시아 의장대 사열을 받던 중, 세발의 총탄은 이토를 명중시켰고 이토는 30분 후에 사망, 그때 安重根의 나이 31세, 그리고 이토는 68세,
② 安重根은 원래 평화론자, 이토가 大韓帝國의 국권을 침탈해서 그를 권총 처단한게 아니고 일본이 東洋平和를 깨뜨렸기 때문에 이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 이토를 처단한 것, 安重根은 大韓帝國과 淸나라, 일본 3국이 동맹을 해서 西洋 帝國主義 열강에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람, 그러나 일본은 1854년 개항 후로 富國强兵, 國家膨脹主義를 추구하고 있었다.
③ 安重根은 일본이 대한제국의 국권을 뺏어간다는 결과를 모른 상태에서 동양평화론을 구상, 구체적으로 일본이 淸나라에 뤼순항을 돌려준다면 청일관계가 개선되고, 大韓帝國, 淸, 일본이 공동으로 관리, 평화회의 조직, 세나라의 국민들 한명당 1원씩 모금, 공동은행 설립, 공동화폐 발행하자. 安重根은 110년전에 오늘날 유럽의 EU가 있듯이, 동아시아 연합구상.
④ 安重根은 3국에서 2개국 이상 언어를 배우는 청년들로 군대구성, 한중일 3국의 공동노력으로 동아시아 평화유지, 결론으로 帝國主義는 남의 것을 빼앗고 짓밟으면서 나만 내 나라만 잘 먹고 잘 살자 라는 弱肉强食논리는 동양 3국이 공멸, 이는 윌슨의 民族自決主義나, 서양인들의 국제연맹이나, 1940년대 이후 국제연합기구보다 훨씬 이전으로 先驅者적 구상,
⑤ 1906년 2월 이토 히로부미 조선통감 부임, 일본은 한국을 보호할뿐 병합할 생각은 없다. 일본은 한국 문명화 도와 주겠다. 조선은 일본의 지도와 감독이 없이 자치를 이룰 수 없다. 1905년일본 乙巳勒約 체결시 외교권만 접수하기로, 그런데 통감부는 大韓帝國 내정간섭, 大韓帝國 정부 시정개선 요구, 일본에서 1000만엔 차관강요, 그 돈으로 경찰력을 늘리고, 농공업 경제수탈 개시
⑥ 1882년, 대한제국과 비슷한 시기에 이집트는 영국 지배를 받았다. 당시 이집트에 부임했던 영국 총영사 크로머, 미개한 이집트를 문명화 시키는 것이 영국의 임무라고 주장, 이집트 간접통치, 이토 히로부미는 크로머가 이집트를 통치한 방식을 벤치마킹해 대한제국에 적용, 영국 72년간 이집트지배, 일본은 1905년부터 40년간 한국지배,
⑦ 일본 1854년 개항이후, 요시다 쇼인은, 자기고향 조슈에서 집에 쇼카 손주쿠 라는 학교 세우고 죽기 전까지 2년간 젊은이들에게 일본의 영토팽창 부국강병론을 가르쳤다, 이토 히로부미가 요시다 쇼인에게서 그 학문을 배웠다. 후에 요시다 쇼인의 제자들이 메이지 유신과 일본 근대화에 성공, 요시다 쇼인을 스승으로, 결국 요시다 쇼인은 일본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의 뿌리,
⑨ 이토 히로부미 포함 조슈 출신 청년 다섯 명 영국 밀항시도성공, 영국대학 University College London에서 6개월간 청강하고 귀국, 다섯 명의 조슈 젊은이들 기념해 조슈 파이브 기념동상, 이토가 영어를 잘 하게 됨에, 외교교섭에도 나가고, 1871년에 이와쿠라 사절단을 이끌고 유럽과 미국 12개 나라순방, 서양문물 연구, 일본 근대화에 큰 영향, 불평등조약 개정교섭은 실패 중단,
⑨-1 일본은 명치유신 전에 체제와 문화를 유럽에서 벤치마킹을 했는데, 해군체제는 영국에서, 철도와 통신은 미국에서, 육군이나 법률 같은 것들은 프랑스에서, 헌법이나 의학 같은 것은 독일에서 배웠다. 이번에 후쿠오카에서 렌터카를 운전하는 걸 보았는데 자동차 핸들이 오른쪽에 있는데 그 교통 시스템은 영국에서 벤치 마킹한 것이다. 그런데 유럽에서 좋은 것만 배워온 게 아니고, 당연히 그 나라들의 나쁜 점도 보았고, 그걸 배워와서 대한제국을 침략하고 수탈하는데 적용했다.
⑩ 이토는 1906년 2월 조선통감에 부임하고, 1909년 6월 사임, 4개월 후 (1909.10.26)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 이토는 1910년 한국병합前에 러시아에게 한국 병합을 인정해 달라고 확실하게 하기 위해 하얼빈 방문추정, 반면 安重根은 이토를 사살함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실체를 세계에 알렸고 뤼순 감옥에서 자신의 동양평화론 구상정리, 31세 안중근은 68세 이토 히로부미보다 훨씬 더 크고 넓은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당시 중화민국 총통 袁世凱는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의 이익을 취하였고 안중근의 목숨바침은 한국과 世界平和를 위함이었다 언론에 직접 기고.
⑪ 요시다 쇼인의 국가팽창(집단이기주의, 국가이기주의, 부국강병)은 일본이 1894~1895년 청일전쟁과 1904~1905년 노일전쟁을 승리하자, 또 다시 드디어 선전포고없이 1941년 12월 7일, 미국 진주만을 공격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대한민국도 일제로부터 해방,
⑫ 우리가 일본 도쿄 야스쿠니 신사를 많이 얘기하는데, 1869년 메이지 정부는 전몰자를 위령하기 위해 도쿄 초혼사를 창건, 십년뒤 야스쿠니 신사로 개칭, 1895년 12월, 메이지 천황이 직접 참배, 야스쿠니는 1904년 露日戰爭 203고지 여순항 공략전투에서 일본군 3개사단 6만여명 전사, 이들을 전쟁영웅으로 신사에 모시고, 일본은 전쟁국가로 돌입시발점, 일본 전몰자 제사 중심 시설로 지위확립, 여기에 요시다 쇼인 위패와 태평양 전쟁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A급 전쟁 범죄자 14명과 여러 전쟁 범죄자들을 합사하고 있어 문제,
⑬ 이렇게 만들어진 야스쿠니 신앙은 전쟁에 나가는 이에게는 비장한 결의를 다지게 하였고, 마지막에 '대일본 제국 만세' 와 '천황 폐하 만세'를 외치며 죽을 수 있게 해 주었다. 야스쿠니 신사는 결국 아시아 태평양 전쟁에서 천황과 대일본 제국 만세를 부를 수 있는 군인과 그 가족을 만들어 냈다.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은 "총리는 일찍이 야스쿠니 신사참배는 많은 전몰자들에게 경의와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한 것으로 A급 전범을 위해 참배하는 것이 아니며, 또 일본은 극동 국제 군사 재판의 결과를 수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⑭ 2018년은 메이지 유신 150년이 되는 해, 올해 초에 아베 총리 메이지 유신 예찬, 그 시대정신 다시 구현하자고 호소, 과거 일본 帝國主義 침략의 역사는 지우고 메이지 유신만 미화할려는 것에 염려, 아베 총리 자신은 이토 히로부미와 같은 조슈 인맥, “이토 히로부미는 초대 총리대신이고, 제가 97대 총리 대신입니다. 조슈 출신으로는 이토 히로부미가 첫번째, 제가 8번째 입니다.”
⑮ 안중근/여순감옥에서: 지금 세계는 동서로 갈라져 있고 인종도 각각 달라 서로 경쟁하고 있다. 청년들을 전쟁터로 내몰아 귀중한 생명이 희생당하는 일이 날마다 그치지 않는다. 밝은 세상에 이 무슨 광경이란 말인가 (안중근 의사 동양평화론 中)-1910년 3월 26일 안중근 의사 사형집행.
⑮ 安重根의 동양평화론 처럼 일본정부는 보편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는가. 平和 人類愛 自由 共存 繁榮 이런 것들을 갖지 못하는 국가가 국민들에게 충성을 요구했을 때 그 국민들을 모두 범죄자로 만든다. 지금이라도 일본은 과거의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서 반드시 인정하고 사과를 해야만 앞으로 共存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될 수 있다.
(16) 30년전 서울올림픽 직후 저는 일본인 대학생 이상 성인 100여명과 펜팔을 해봤는데 그들은일본돈 100엔 지페에 이토 히로부미 초상화가 있었는데 그가 어떻게 누구에 의해서 사살당했는지를 모르고 있었다. 일본 지도자들은 조선과 일본에 관한 정확한 역사를 학생들에게 가르치지를 않았다는 걸 알았다. 제국주의 식민지와 2차 세계대전에 피해를 준 강대국 중에서 흔히들 독일과 일본을 비교하고 있다. 유럽 독일은 6백만 유대인 학살과 폴란드 침공에 대해서 충분히 상대방이 진정으로 수용할 때까지 보상하고 찾아가서 무릎 꿇고 사과하여 피해국 국민들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그런데 아시아 일본만은 유독 피해국들로부터 계속 진정한 사과와 배상요구를 당하고 있다. 일본 내에서도 안중근 의사의 고상한 인품과 동양평화론에 감동해서 학문적 연구를 하는 여러 모임이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