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가 / 조영안
설날이 지난 후 거실 한쪽에 택배 상자가 쌓여 갔다. 보는 내내 마음은 심란했다. 25년 동안 품고 있었던 딸의 분가가 실감난다.
딸은 대학 입학 무렵부터 방을 얻어 나가고 싶다고 말했다. 다른 지역의 대학에 합격했을 때도 혼자 지내야 하기에 반대했다. 이번 분가는 우연찮은 계기에 결정되었다. 어머님과 작은 언쟁에서다. 딸의 스트레스를 직감했다. 나도 모르게 "너, 방 얻어서 나가." 라고 뱉었다. 그 말은 곧 현실이 되었다. 그동안 함께 살면서 받았을 스트레스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고 아프다.
어머님이 쌓여 있는 택배 상자를 보고 뭐냐고 묻는다. 손녀가 방을 얻어 나간다고 조심스레 설명했다. 당신 때문에 나가는 것도 모르고 "쯧쯧, 두 집 살림 차려서 어쩐다냐? 코코와 호두는 어쩌고."라며 중얼거렸다. 첫 살림을 차리는 손녀 걱정보다 남은 일 걱정만 말 하는 것 같아 서운하다. 물론 어머님 탓만도 아니다. 마치 탁구공처럼 여기저기서 심부름을 시키는 바람에, 왔다 갔다 한다. 할머니의 걱정스런 말에 순간 딸도 한마디 내뱉는다. "누구 때문에 나가는 줄도 모르시나 " 그랬다. 딸이 그동안 받은 스트레스가 거의 한계에 도달 했다는 것을 실감했다.
딸은 수험생이다. 지난해에 합격하지 못했다. 소란스러운 집을 피해 주로 스터 카페를 이용했다. 가끔 근처의 도서관도 이용하면서 점심 겸 저녁은 빠짐없이 집에서 해결했다. 그리고 주말마다 머리도 식힐 겸 약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4월부터는 공부에만 전념했는데 오를 수 없는 벽이었다. 그래서 다시 출발선에 섰다. 대도시의 기숙학원이나 고시원도 생각했지만, 혼자서 계획을 세워 잘하는 편이라 원룸을 택했다.
이사 준비는 순조로웠다. 필요한 것은 인터넷으로 주문했다. 대부분은 집 근처 대형 마트와 다이소에서 샀는데 가짓수가 많았다. 그런데 내 생각과는 다르다. 문득 친정 엄마가 생각난다. 엄마는 예쁜 것이 있으면 하나하나 모아 두었다. 그러고는 살림살이에 필요하다며 시집갈 때 모두 챙겨 주었다. 그중 반짇고리와 작은 단지 두 개는 아직도 내 곁에 있다. 그래서일까. 나 역시 평소에 좋은 물건이 있으면 딸을 생각하며 차곡차곡 모아 두었다. 그런데 딸은 관심도 없다. 모두 구식이란다. 마지못해 몇 가지는 챙기면서도 흘깃 눈치를 본다. 내 서운한 마음을 달래주려는 억지춘향인 게 한눈에 보인다.
이삿짐을 싣고 가면서 슬며시 내 자취생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산골에서 도시로 나가기에 시작은 참 요란했다. 그때가 고등학교 입학이었다. 친정 엄마가 쓰던 찌그러진 냄비를 비롯하여 대부분 집에 있던 것을 챙겼다. 이사도 버스와 기차를 타고 갔다. 자취방은 연탄불을 지폈다. 장마철에는 빗물이 새어 양푼을 받쳐 놓고 지냈다. 지금의 이사와는 전혀 달랐다.
주말마다 집에 와서 반찬을 챙겼다. 문제는 김치 냄새였다. 기차 안에서는 그나마 나았다. 간혹 버스를 타면 울퉁불퉁 비포장 도로다. 심하게 흔들려 국물이 흘러 냄새가 진동했다. 내릴 때까지 내 마음은 조마조마하며 바늘방석이 되었다. 그렇게 보낸 내 여고 시절에 비하면 지금의 이사는 행복한 호사다. "엄마 30년이 넘었네요.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세요." 조수석에서 듣고 있던 딸이 한마디 한다.
딸 방은 4층이었다. 딸이 운동 삼아 오르내리면 좋겠으나, 나는 힘들었다. 가득 실은 차에서 밖으로 짐을 옮겨 놓고 보니 제법 많았다. 6평 정도의 작은 방인데도 거의 다 갖춰져 있었다. 수납공간이 많아 상자 하나하나를 풀어 차근차근 정리하기 시작했다. 오랫만에 딸과 이마를 맞대고 했다. “짐은 다 어디로 갔지?” 할 정도로 깔끔하게 정리가 되었다. 이제 이사는 끝났다.
집으로 다시는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어제 잠깐 가게로 들른 딸의 표정이 밝고 편하게 보였다. 걸어서 5분 거리인 집에는 들를 생각도 없나 보다. "너 얼굴 좋다. 편한가 봐." "엄청 좋아요. 진즉 나갔어야 했는데." 좋긴 좋은가 보다. 한편으로는 시원섭섭했다. 이제 나간 지 1주일이 되었다. 텅 빈 방과 풀이 죽어 엎드려 있는 강쥐 두 마리를 본다. 그렇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라는 말이 실감난다.
첫댓글 그래도 가까운 거리에 있으니 다행이네요.
서로 편하게 지내면 좋겠지요.
너무 섭섭해 마세요.
그러네요. 다른 지역으로 갔다면 어땠을까 싶답니다. 벌써 서서히 적응되는 듯요. 가까운 순천이라 지척에 있다싶어 편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잔소리 알지요. 할아버지, 할머니는 드라마 보면서 욕을 계속하셨던 게 떠오르네요. 따님이 공부에 집중할 수 있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벌써 독하게 마음 먹었는지 오지도 않고 연락도 없네요. 이젠 마음 편하게 지내렵니다.
"너 얼굴 좋다. 편한가 봐" 하하하!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될 겁니다. 우리보다 훨씬 더 진화한 개체거든요.
반갑습니다.
엄마의 욕심이고 세대차이란걸 다시 느꼈답니다. 이제는 제가 정신 차려야겠어요.
가까운 데 있어도 마음은 허전하시겠어요.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저 이사 다니던 시절도 생각나고요.
늦둥이로 태어나서 더 그런가 봅니다. 벌써 서서히 적응되는 듯요.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와 너무 다른 세대라서 생각이 다르더라고요.
그래도 가까이 있으니 다행입니다.
올해는 좋은 결과가 있기를 응원합니다.
같이. 있을 때는 몰랐는데, 이제 떨어져 보니까 세대 차이를 더 크게 실감 한답니다. 늘 응원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따님의 분가를 응원합니다. 새로운 시작이네요. 얼마나 좋을까요?
막상 하고 보니까 잘 한 일이다 싶네요. 서서히. 적응 되는 듯 합니다..응원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따님의 새로운 시작을 응원합니다. 잘 해내시리라 믿습니다.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질게 마음 먹었는지 근처에 일보러 왔어도 그냥가네요. 저도 선생님 처럼 믿는답니다.
에구, 선생님 서운하시겠어요? 따님이 많은 위로가 됐을 텐데요. 이제 글로 풀어 놓으세요. 응원 댓글 열심히 쓸게요.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