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잃으면 구원하리라 / 슥 12:7-10, 눅 9:18-27
잃으면 얻는다는 오늘의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면서도 본눙적으로 기피하는 말씀이기도 하다. 말씀의 이치는 이해가 가면서도 왠지 모르게 그렇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구원한다, 얻는다고 하는 것은 좋은데, 잃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기분이 좋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보통 잃지 않고 얻을 수는 없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죽지 않고 천국에 가는 법은 없을까? 눈뜬 이대로 주님을 만나뵐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냉혹하다고 할만큼 분명하다. 주님께서 못박듯이 딱부러지게 말씀하셨다. 잃으면 얻으리라. 잃고 얻고를 일직선 상에 놓고 계신다. 보통 상식으로는 얻으려고 해야 얻고, 가지려고 해야 갖게 된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노력의 결과가 일직선 상에 놓여 있다. 그런데 잃어야 얻는다고 하신다. 죽어야 산다고 하신다. 주어야 받는다고 하신다. 얻으려고 애써야 얻는 것이지 버려야 얻는다니 납득이 가지 않는다.
본문 말씀의 헬라어 원문을 보면, 여기 나오는 잃는다는 말 ‘아폴루미’는 그 뜻이 매우 강하다. ‘루미’라는 말은 그냥 잃는다는 것이 아니라 ‘파괴하다, 부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 ‘아포’라는 말이 붙어서 그 뜻이 더 강해진다. 부수어도 철저하게 부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우리 말에서 ‘잃다’ 보다는 ‘잃어버리다’가 좀더 강하고, ‘버리다’ 보다는 ‘내버리다’가 좀더 강하고, ‘부수다’ 보다는 ‘때려부수다’ 하면 좀더 강한 표현이 되는 것과 같다. 24절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결코 추상적인 말씀이 아니다. 구체적이고도 현실적인 말씀이다. 적어도 생명 문제에 관해서는 따지고 헤아리고 알고 모르고에 상관하지 않는다. 생명은 생명이기 때문이다. 생명 그 자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생명은 생명이요, 진리는 진리이다. 따지고 헤아리는 이론에 따라 이렇게 저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이러하니 이렇게 살아라 하면 예하고 순종할 따름이다.
본문 말씀을 읽어보면 그 속에 세가지 충격적인 사건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메시야되심을 스스로 인정하신다.
베드로가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할 때에 ‘네 말이 옳도다’라든가, ‘내가 그로라’라고 드러나게 그렇다 하신 것은 아니지만 앞뒤 말씀을 볼 때 우리는 예수님 스스로가 그렇게 인정하신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메시야’라고 하면 아주 정치성이 강한 표현이다. 왕중의 왕이요, 선지자 중의 선지자요, 제사장 중의 제사장이다. 가장 이상적인 왕이요 제사장이요 선지자가 되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이같은 메시야되심을 자인하시고도 이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계하신다. 메시야가 메시야 되려면 이를 만방에 알려야 하지 않겠나? 메시야가 메시야된 사명을 감당하려면 메시야임을 널리 알려야 하고 메시야임이 알려지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시니 충격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왜 알리지 말라고 하셨을까? 다른 복음서, 이를 테면 마태복음에서 그 맥락을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시기까지, 다시 말하면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의하여 메시야를 바로 깨닫기까지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하시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아무튼 자신이 메시야 되심을 요즘 말로 피알(광고)하지 말라고, 나팔 불지 말라고 하신다.
두 번째 충격적인 사건은, 자신의 인자되심을 밝히신 것이다.
인자라고 하는 말은 메시야보다는 훨씬 중요한 말이다. 예수님께서 빌라도 법정에서 재판을 받으시게 되었을 때, 빌라도로부터 넘겨받은 예수님께 대하여 헤롯은 자기가 왕이므로 예수님이 정말로 유대인의 왕인지 어떤지, 정치적인 차원에서 관심을 두어 집착하고, 제사장 가야바가 예수님께 ‘네가 메시야냐?’라고 물었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전혀 다른 의미의 대답을 하신다.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오리라.’ 여기서 메시야관과 인자관의 대립을 볼 수 있다. 메시야는 정치적 개념이 아주 강한 표현이다. 이에 비해서 인자는 종말론적 계시자임을 말한다. 역사 끝에 하나님 자신이 임재하여 오시는 것을 말씀하는 표현이다. 그러므로 ‘네가 메시야냐, 그리스도냐? 하고 물었다가 ’인자다‘ 하시는 바람에 ’아이고 참람하도다. 죽이자‘ 하고 만 것이다. 인자라고 하시는데는 할 말이 없는 것이다. 훨신 높고, 훨신 우주적이고, 훨씬 더 종말적인 의미의 존재가 곧 임자인 것이다. 오늘 읽은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였을 때에 주님께서는 ‘인자가’ 하고 말씀하시면서, 너무나도 거리가 먼 이야기를 하신다. ‘고난의 종’의 의미를 말씀하고 계신다. 22절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구약을 통하여 줄기차게 설명해 온 ‘고난의 종’,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그 고난의 종을 말씀하신 것이다. 인자라고 하면 지극히 높은 존재인데, 지극히 영광스러운 존재인데 ‘고난의 메시야’라니, 이것이야말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세 번째 충격은, 나를 따라오려거든 너희도 나같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23-24절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본래 그리고 결국은 큰 영광이 있겠지만, 현재 현실적으로는 십자가를 지는 고통이 따라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우리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제자도 그리스도와 같은 고난의 길을 가야 하는 것이다. 실로 오묘한 가르침이다.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으로 십자가를 지셨으니 우리에게는 편한 길, 고통이 없는 길만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사람들 가운데는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찬송가 323장 ‘부름받아 나선 이 몸’의 ‘멸시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다’를 ‘멸시천대 십자가는 주님지고 가옵소서’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얌체, 맹추라는 소리를 들어 마땅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환난을 당하셨으니 나는 편하고, 예수님께서 가난하셨으니 나는 부하고, 예수님께서 죽으셨으니 나는 살고, 예수님께서 천대받으셨으니 나는 영화를 누리고, 예수 믿으면 이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신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내가 십자가를 졌으니 너도 십자가를 져야 한다. 이 말씀의 뜻은 너무도 강하게 부각되어 있다. 본문 말씀을 잘 살펴보자.
1.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각오하고 십자가를 준비해야 한다.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안일주의이다. 어떻게든 편하게 예수 믿으려고 하는 것이다. 누가 교회에 열심히 나간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새벽에도 나가고, 낮에도 나가고, 저녁에도 나가고, 성경공부하러 나간다고 하자, 어떤 사람이 ‘당신은 예수 믿어도 참 이상하게 믿는구먼. 나처럼 한달에 두어번 나가면 되는 것이지, 뭐 그리 힘들고 야단스럽게 믿는가? 어차피 천국은 갈텐데...’ 하고 무안주듯 말하자 그 말을 들은 당사자가 이 사람을 보고 한마디 한다. ‘당신도 천국가리라고 믿어요. 나도 갈 것이요. 그러나 내가 가는 천국과 당신이 가는 천국은 결코 같지 않을 거요!’ 여러분, 안일하게 얻은 것은 소중하지 않은 법이다. 이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모름지기 우리는 준비를 해야 한다. 마음으로 준비해야 하고, 상식적으로도 준비해야 하고, 성서적으로 신학적으로도 단단히 준비해야 한다. 환난과 박해가 있다. 고난이 있고 손해가 있다. 많은 비난을 받는다, 그러므로 비상한 각오를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
2.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고난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 선택적인 것이 아니다. 당할 수도 있고 안당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니다. 필연적이다. 우리는 이 점을 알고 예수를 믿어야 한다. 예수 믿으면 모든 일이 잘되고 형통하고 복받는 것이 아니다. 이런 안일한 신앙이라면 참으로 문제이다. 우리는 언제나 이 고난의 필수성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만사형통하고 복받는 것은 우리의 소원일 뿐이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확실한 주님의 말씀이다. 주님은 날 위해 십자가를 지셨는데, 나도 염치가 있지 어떻게 편하기만 바라겠나? 더욱이 말끝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말이다. 하다못해 우리는 이렇게라도 생각할 줄 알아야 하겠다.
3. 생사가치관이 분명해야 한다고 성서는 말씀한다.
죽어야 산다는 이치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죽기 전에는 살지를 못한다. 철저하게 죽어야만 산다. 철저하게 잃어야만 얻을 수 있다. 처음부터 이 이치를 알고 출발하는 사람이라야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생명 문제가 중요하다. 생명이라고 할 때, 그리스도인은 이를 영생 차원에서만 이해하여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생명을 육체적인 차원에서 이해할 것이 아니다. 영생을 기준으로 해서 생명을 생각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생명관이다. 영생지향적 생명만이 생명이다. 영생으로 연계되지 못한 생명은 죽어가고 있는 생명이다. 잊지 말아야 한다. 결코 우리는 이 초라한 생, 모질고 병들고 괴로운 육체적인 생, 세상적인 생에 너무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적어도 우리 믿는 사람은 영생을 참생명으로 안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만이 길이요 생명이다. 죄와 더불어 사는 생은 생이 아니다. 추잡하게 사는 것, 부끄럽게 사는 것은 생이라고 할 수 없다. 심판을 향하여, 지옥을 향하여 가는 생은 생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런 삶은 살아 있으나 죽은 삶이다. 모름지기 우리는 이같은 생명관을 가지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생명 중심의 세계관을 가지게 된다. 온 천하를 얻고도 이러한 생명이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니다. 언제든지 생명만이 소중하다. 이 생명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버리고 어떤 노력이라도 다 지불한다. 어떤 가치라 해도 이를 위해서는 버려야 한다. 그래야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다.
4. 마지막으로 생각할 문제는 생명을 보전하는 원리이다.
지키려 하면 잃고, 버리려 하면 얻을 수 있는 것이 그 보전원리이다. 이 원리를 잘 알아야 한다. 좀더 나아가 생명 중심의 세계관을 가지고 살 때에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는 새로운 세계관이 성립된다. 생명이 이로운 것은 가치가 있는 것이요, 해로운 것은 무엇이든지 나쁜 것이다. ‘네 원수가 네 집안 식구니라’라고도 주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내가 생명의 길을 가는 데에 거추장스러운 것이 많다. 때로는 집안 식구가 문제될 수도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문제될 수도 있다. 많은 재산이 문제될 수도 잇다. 내 변변하지 않은 명예와 체면이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이럴 때에는 과감하게 바려야 한다. 세상적인 성공, 실패, 쾌락, 안일 등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대로 내가 생명을 위하여 달릴지라는 경주에서 방해가 되는 것은 다 제하여 버려야 한다. 자칫 얽매이기 쉬운 모든 것을 다 버려야 한다. 달리기 선수가 몸에 걸친 것을 되도록 다 벗어버리고 달려야 최선이 성과를 올릴 수 있는 것과 같다. 거추장스러운 것이 없이 거뜬하게 뛰어야 하는 것이다. 몸만 뛰는 것이 아니다. 마음까지 정신까지 집중해서 달린다. 인간 능력의 한계를 가는 것이다.
방해되는 것은 철저히 다 없애야 한다. 이것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이다. 예수 믿기만 하면 간단하다고 했는데 왜 이렇게 복잡하고 힘드는가 할 것이다. 값비싸고 귀한 것일수록 마당히 지불해야 할 댓가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래서 마침내는 결정적인 순간을 만난다. 초대교회의 많은 사람들이 결정적인 순간을 만났다. 순교가 바로 그것이다. 예수 믿으면 죽었다. 예수를 부인하면 살려준다고 했다. 막다른 순간이 아닌가? 이런 순간에 내가 나의 육적 생명을 지탱하자고 영생을 포기할 것인가? 영생이야 어떻게 되건 당장에는 살아야겠다 할 것인가? 순교도 중요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순교적으로 현실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순간마다 이러한 결단을 요구받고 있다. 중요한 결단과 함께 순간순간을 살아가야 한다. 다시한번 깊이 생각해 보자. 인생은 투자되는 것이어야 한다. 결코 보전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보전할 것인가가 아니라 끊임없이 쓰여져야 하는 것이다. 우리 몸을 보라. 가만히 있으면 건강이 유지되나? 자꾸 움직여야 건강이 유지된다. 내 몸이 하자는대로 다하면 되는 것인가? 먹고 싶은대로 먹고, 자고 싶은대로 그저 누워자기만 하면 되는 것인가? 더 자고 싶어도 일어나서 5분만 지나면 잘일어났다는 생각이 들지만, 만일에 귀찮다고 그냥 누워있다보면 하루종일 후회하게 된다. 우리는 더 큰 미래를 위해서 적은 현재를 포기해야 한다. 이달 중순에 전북일보에 건강을 위한 11가지 습관이 게재되었다. 여기에 보니 좋은 벗과 사귐, 봉사하는 생활, 정신적 훈련-성경공부, 기도 명상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열심히 신앙생활하는 사람이 건강하다는 말이다. 신앙생활에는 많은 것을 포기하고 투자해야 한다.
생이란 투자되는 것이다. 정력을 투자하고, 노력을 투자하고, 때로는 생명을 투자해야 한다. 그렇게 씀으로써 얻는 것이다. 일생을 계속적으로 투자해야만 새생명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옛것이 줄기차게 깨어져나가야 한다. 문제는 어디에, 누구를 위하여, 어떻게 투자하느냐이다. 부분적인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전적으로 투자하여야 한다.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고 말씀하셨다. 막8장에는 ‘나와 목음을 위하여’라고 하셨다. 나와 복음을 위하여, 투자의 방향, 투자의 목적이 이렇듯 분명하다. 참생명의 길, 영생의 길을 말씀하신다. 영생을 알기 전에 사는 것이 죽어가는 것이지 사는 것이 아니다. 영생을 알고 영생을 향하여 사는 생만이 참으로 사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비생명적인 것, 비영생적인 것을 다 버려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 생명을 아는 사람만이 참 생명의 길이 행복하다는 것을 안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찾기 위하여 자기의 가졌던 것을 다 팔아서 그 밭을 사는 사람의 마음과도 같다. 이는 미래지향적인 생이며 영생본위적인 생이다. 이런 생을 사는 사람은 한순간을 살아도 생명적인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다. 후버라는 주교가 순교했다. 그는 순교하기 전날 밤에 이런 말을 남겼다. ‘생명은 달고 죽음은 쓰다는 것이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죽음은 더욱 쓰고 영원한 생명은 더욱 단 것입니다.’ 우리는 시시때때로 죽음을 생각한다. 죽음 그것은 분명히 쓴 것이다. 영원한 죽음은 더욱 쓴 것이다. 우리가 잠간씩이라도 세속적 생명을 지향하는 욕망을 죽일 때에는 아픔을 느낀다. 그것을 버려야 할 때에는 쓰리고 아프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사는 길이다.
여러분은 오늘 영생을 지향하고 교회에 나왔다. 그러나 이러한 시간에도 세속적인 즐거움을 찾아가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이 예배와 함께 큰 기쁨을 얻지만, 그 사람들은 하루가 즐거웠을지 모르지만 천국과는 조금 더 멀어졌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이런저런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생명을 지향하는 욕망을 과감하게 깨뜨려버려야만 비로소 참생명, 영원한 생명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이는 돈으로 얻을 것도 아니요, 노력으로 얻을 것도 아니다. 지식으로 얻을 것도 아니다. 다만 자기 희생적인 그 거룩한 역사 안에서만이 자기 성취를 보게 되는 것이다. 나와 복음을 위하여 목슴을 잃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예수님께서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이 말씀에 아멘으로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자. (1996-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