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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그릇에 담긴 보배 / 신 5:12=15, 고후 4:6-11
태초에 하나님께서 사람의 육체를 흙으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사람의 육체는 죽으면 흙으로 돌아간다.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한 사람의 이름은 ‘아담’이라고 했다. 히브리어로 ‘아다마’는 사람이라는 뜻이고 ‘아담’은 흙, 먼지, 티끌이라는 말이다. 사람은 흙이라는 말이다. 흙에서 나고 흙에서 자라고 흙으로 돌아가 흙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아담은 이렇게 무상한 것이다. 초목도 흙에서 난다. 흙에서 자란다. 그리고 나중에는 흙으로 돌아간다. 사람은 초목과도 같은 것이다. 동물도 흙에서 나고 흙에서 자라고 흙으로 돌아간다. 사람은 동물과도 같다. 흙은 모든 생물의 어머니요, 모든 생물의 무덤인 것이다. 가나안에 살던 주민들은 바알신을 그들의 하나님으로 섬겼다. 바알은 땅의 신이다. 가나안 사람들이 땅 신을 섬긴다고 히브리 민족은 반발을 하였다. 이렇게 사람은 흙이라고 하는 말에 사람이 어디 흙이냐라고 반발을 할지 모르겠다. 그러면 사람이 흙이 아니다라고 해봅시다. 인간은 흙은 아니다. 생각이 있으니 흙은 아니다. 스스로 행동하니 흙은 아니다. 그러면 이것이 영혼이겠나? 영혼은 아니다. 흙처럼 흙과 같은 형체가 있으니 인간은 영이 아니다. 그러면 인간은 신인가? 동물보다 나은, 그렇다고 인간이 신인가? 인간은 육을 떠나서는 생각도 행동도 못하므로 신은 아니다. 인간은 동물도, 흙도 신도 아니다. 희랍 사람들의 논리학을 적용한다면 인간은 동물이요, 흙이요, 신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논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할지라도 사실은 인간은 흙도 아니요 신도 아니요 그렇다고 동물도 아니다.
인간은 역사적인 존재이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인간은 그릇이라 하였다. 인간은 그릇, 금그릇, 은그릇이 아니라 질그릇, 흙으로 만든 질그릇이라 하였다. 인간은 질그릇이다. 질그릇은 생각이 있어 만들어 졌으나 그 질그릇이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질그릇은 필요한 행동을 목표로 하고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 그릇이 스스로 행동할 수는 없다. 질그릇은 흙이다. 그러나 질그릇은 흙만은 아니다. 흙으로 만들어진 그릇이다. 인간은 질그릇처럼 흙으로 만들어진 그릇이다. 금과 은과 무쇠로 만든 그릇처럼 튼튼하지 못한 인간은 질그릇이다. 그릇만으로서의 인간은 실로 빈약하기 짝이 없다. 그러면 인간은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느냐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인간은 그 육체 속에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 마음은 무엇인가? 마음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마음을 누가 보는가? 그러나 마음은 있다. 마음은 본질이다. 마음만으로는 실존하지 못하는 본질이다. 인간의 본질인 마음은 역사와 더불어 실존하지 못하면 마음은 알 수도, 볼 수도 없다. 그러므로 마음만은 물과 같이 그 자체로서는 모양이 없는 본질뿐이다. 그러므로 마음도 하나의 그릇이다. 마음은 실로 빈 그릇이다. 임마누엘 칸트의 말대로 거기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서 그 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그릇도 금그릇이나 은그릇이나 무쇠그릇처럼 든든한 그릇은 아니다. 약간 기울어도 그 물을 따라서 움직이는, 민감하게 변하는 그렇게도 유약한 질그릇이다. 인간은 몸도 마음도 질그릇이다. 유약하기 그지없는 질그릇이다. 인간을 자랑하는 자는 혹시 있어도 인간을 장담하는 자는 없다. 남들이 자기를 무엇이라고 말할 수는 있어도 내가 나는 무엇이라고 말하지는 아니한다. 오직 인간은 그릇일 뿐이다. 유약한 질그릇이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참으로 놀라운 인생철학자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인간에 대한 깊고 깊은 이해를 거듭하고 여기저기 자신을 가리켜 질그릇이라고 말하였다. 사도 바울은 ‘이 보화가 질그릇에 담겼으니’라고 감격에 겨운 표현을 했다. 질그릇에 담긴 보화, 매우 인상적인 표현이다. 그러나 이것은 문학적인 수식은 아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와 자기 주변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인간이라는 것에 대하여 철저히 실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질그릇에 담겨진 보화로 인하여 인생의 보람을 다시 찾아낸 것이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보화는 두말할 것도 없이 생명의 복음을 말하는 것이다. 혹시 인간의 보화는 인격의 존엄과 인간의 자유가 아니겠느냐 하고 반문할지 모르겠지만, 여기 사도 바울은 벌써 헬라의 철학에도, 유대의 종교에서도 그리고 인간의 실존에서도 이미 실망한지 오랜 때였으므로 더 언급하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인간은 그릇 뿐임을 깨달았을 때 이 질그릇은 아직 어떤 것에도 쓰여짐을 당하여 보지 못하였음을 깨달은 것이다. 이 그릇에 모세의 율법을 담아보아도 그 율법은 그릇을 인격화하도록 생명을 가진 것이 아니었다. 그 그릇에 철학을 담아보아도 그 철학은 그 그릇을 인격화하지 못한 것이다.
그는 이 그릇에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의 복음 진리를 채워놓았을 때 비로소 그 그릇이 인격화하였던 것을 경험하였다. 마치 여기 한 토기장이가 고추장독을 만들어 놓았는데, 지나가던 사람들이 물독으로 알고 사다가 물을 담아 놓았다거나, 혹시 다른 사람은 김치독으로 알고 사다가 김치를 담아 놓았다면 그것은 매우 부적당하게 사용된 것이다. 그리고 그 그릇은 오히려 천대를 받은 것이다. 그런데 그 주인이 그 독을 도로 찾아서 복음진리를 채워놓았을 때 비로소 제구실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질그릇을 만드신 하나님의 손에 다시 돌아가서 이 그릇에 그의 복음진리를 담아 놓았을 때 이제 이 인간은 살아있고, 값있는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복음 진리를 그 마음에 채우고 그 말씀과 법도를 그의 생명 속에 아로새기지 아니한 인간은 그 인간의 가치를 갖지 못하고 있는 인간이다. 생명의 내용이 비장되어 있지 아니하고는 곧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과 성령의 감동하시는 은혜가 함께 하지 아니하면 인간은 오직 명색없는 빈 그릇일 뿐이다.
우리는 이 보화를 질그릇에 담아 가졌다. 영원한 생명이 되시는 하나님의 산 말씀을 받았고, 우리는 그 말씀, 그 생명의 그릇이 되도록 선택된 것이다. 하나님은 왜 이 보화를 이와같은 질그릇에 담아 주셨는지 그 까닭을 모르겠다. 여기 사도 바울은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한다. 이 질그릇도 그렇거니와 이 그릇에 보화를 담아 주심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절대성을 나타내심인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은 그릇도, 그 그릇에 담은 보배도 초월하는 모든 생명의 주체이심을 우선 명백히 하여야만 한다. 인간도 복음도 그 창조행동의 산물이기에 그것들이 창조자의 자유를 구속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나의 이 질그릇에 그의 가장 귀한 보배를 담아주셨다는데 불평을 말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특유한 은총에 대하여 시기할 자도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는 것보다 더 잘 아신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에게 비록 자그마한 능력이라도 있다고 생각되는 때 이 작은 것은 가장 큰 보배가 들어올 문을 막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우리들의 모든 실패의 원인은 우리의 단점들 때문이 아니라 우리들이 장점이라고 여겼던 그것들 때문이었던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재주 때문에, 똑똑한 것 때문에, 우리의 재물 때문에, 지식 때문에, 우리의 능력이라고 생각하였던 그것들 때문에 우리는 오히려 더 큰 보화를 받을 길이 막혔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 질그릇에 당신의 보화를 담아주심은 하나님의 능력이 어떠하심을 보여주심이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인간의 모든 능력을 완전히 정복하고 그의 능력만을 나타내신 것이다. 그의 절대적인 애정과 선택에 의하여서 우리는 이 은혜를 받은 것이다. 우리의 능력들은 모든 장애물을 끌어들이는 역할을 하였어도 그 보배를 받아들이는 일은 못하였다. 진실로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독단적인 애정과 선택에 의하여서 이루어진 것이다.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가 하나님을 믿게 된 감격을 가졌으리라 본다. 여러분은 은혜를 받으면서 내가 왜 이러한 은혜를 받게 되었는지를 감격할 때가 있었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여러분의 마음의 진실된 고백은 하나님은 나같은 것에게 왜 이렇게 은혜를 주시나 하고 놀랍게 여겼을 것이다. 여기 사도 바울의 감격도 같은 것이다. 왜 이 질그릇에 하나님은 값진 보화를 담아 주셨을까? 이제 사도 바울의 고백은 이렇다.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는 이 말에 주의하여야 한다. 이제 이 질그릇은 예수님의 생명을 담았으나 그 담은 것으로만 만족하지 않고 이제 그생명이 내게서 그대로 나타나게 하려는 의욕이 북바쳐 올라 그 의욕 때문에 예수님의 그 죽음을 내몸에 짊어지고 다니겠다는 적극적인 자세이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지는 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죽을 육체에도 나타나게 하려는 것이다. 곧 예수의 생명이 우리 죽을 육체에도 나타나게 하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우리 몸에 나타낸다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최고 이상이요, 그가 그의 신앙을 증거하는 산 표적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고 이 질그릇을 완전히 그에게 복종시켜야만 한다. 그래서 이 질그릇들을 보는 자에게 질그릇은 보이지 않게 하고 그 안에 담은 보화만을 볼 수 잇게 이 보화를 안팎으로 나타내야 한다. 우리는 혹시 이 질그릇 속의 그리스도를 덮어두거나 묻어두고 사는 사람들도 보게 되는 것이다. 속에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있는데 겉은 그대로 질그릇으로 사는 그리스도인도 있다. 또 어떤 경우에만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또 어떤 입장에 있을 때는 그리스도의 복음은 아주 숨겨버리고 사는 얼룩배기 그리스도인도 가끔 볼 수 있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예수 이름은 짊어지고 다니면서도 예수의 생명은 그 속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간판 위에 나타내고 그 속에는 예수의 생명을 잃어버린 무수한 그리스도인들과 무수한 기독교 단체들과 무수한 교회들을 보게 되는 것이 참으로 부끄럽다. 옛날에는 믿는 자들이 예수 믿는 것을 잘 나타내지 않아서 문제였는데, 오늘날은 너무 지나치게 나타내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기 힘든 불행한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 큰 고통거리이다. 생명이 없는 것은 언제나 값이 없는 법이다. 빈 그릇은 그것이 금그릇이라도 그릇으로서의 값은 없는 법이다. 생명 없는 신앙, 그리스도의 생명 없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값이 없다. 그러므로 헐값에 팔리고 헐값에 좌우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값어치가 거리의 쓰레기보다 못한 것이 아닌가? 이 보배가 질그릇에 담긴 것을 자각하지 못하면 이 보배는 그 그릇에서 옮겨질 것이요, 이 질그릇에는 그 그릇에 해당한데로 온갖 오물을 담아 함께 멸망의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질그릇에 담긴 보배, 그러므로 이 보화를 담고 있는 한, 이 질그릇 값은 이 보화값과 일치하는 것이다. 세상의 값을 가지고서는 감히 비교할 수 없는 것을 가졌다. 진리에 곧게 서서 믿음으로 삽시다 하고 권고하는 것은 여러분의 값을 높이기 위한 것이다. 이 보화를 그대로 유지시키려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생활은 값이 있어야 한다. 말 한마디에 값이 있어야 하고, 행동 하나에 값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참 생명이 이 질그릇 안팎에 나타나면 그 값이 저절로 높아진다. 그리스도인의 말 한마디는, 기독교회의 성명 한 장은 그 사회 그 나라에서 어느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무게와 값이 있어야 한다. 어떻게 값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겠으며, 어떻게 값있는 교회가 되겠나? 외면으로는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지는 그리스도인, 내면으로는 그의 생명이 나타나야 되겠다는 것이다. 곧 그리스도를 말하는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인의 말은 행동을 수반하는 말이어야 한다는 것이며, 교회의 발언은 행동된 것의 증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거짓은 권위를 파괴시킨다. 거짓은 모든 값을 떨어뜨린다. 진실만이 최후에 남는 유산이다. 생명은 진실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 죽을 몸에 나타남은 그리스도의 진실이 내 몸의 전부여야 한다는 말이다. 이 질그릇에 담긴 보화가 보화값을 하려면 그의 생명이 내 속에 나타나야 한다. 진실한 인격의 새로운 창조운동이 계속되어야 한다. 외부의 표현은 내부의 생명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 보배를 질그릇에 담은 은혜받은 사람들이다. 내가 이 보화를 담아 가진 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것이며 공로없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는 이제 주님의 죽으심을 우리의 외부에 짊어지져야 하고 그의 생명이 우리 질그릇에 나타나게 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1995-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