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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기 현대사상세미나 11
홍승용: 노동자국가와 노동자국제주의(토론 정리)
토론자: 생각을 좀 많이 하게 하는 내용인데요. 개량주의와 민주당을 언급하셨는데, 지난주에 있었던 기후 위기 행진과 관련해서 기후 위기 행진을 준비한 주최 측 중에 지난번 총선에서 민주당과 선거연합을 했던 세력과 어떻게 함께할 것인지, 오늘 발제를 들으면서도 이것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전술적인 판단을 달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들이 들어서 발제자의 생각은 어떤지 한번 여쭤보고 싶고요.저는 여전히 중국 문제와 관련해서는 좀 납득이 잘 안 갑니다. 홍콩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지, 또 대만 내의 계급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을 건데 그런 사람들이 지향하는 내용은 어떤 것인지도 혹시 아시는 분 있으면 좀 설명 부탁드립니다.
발제자: 저도 그냥 방구석에 앉아서 책 몇 권 읽으면서 사이언스 픽션을 쓴 수준이라서요. 엄밀한 조사와 과학적 논증과는 거리가 멉니다. 홍콩과 대만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민주당과는 어떤 일을 하느냐, 했느냐가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이냐, 체제 전환이라는 말들을 많이 하는 데 진정한 의미에서 체제 전환을 작심하고 그 준비 작업으로 일하는 것과 이대로 조금 개선하자 하는 단계에 머물자 하는 것에 따라 앞으로 하는 행위들이 근본적으로 달라질 수 있다고 봅니다. 중요한 건 앞으로 뭘 하려고 하느냐 하는 목적의식에 따라 얼마나 적극적으로 운동하느냐, 이게 관건이라고 봅니다. 레닌 얘기를 끌어들인 것도 너무 결벽증에 빠지지 말자, 어디서든 일하자 이런 취지입니다. 지금 민주당과 무엇을 같이 했느냐가 결정적인 문제는 아닙니다.
그래도 상징적 의미를 가지는 대표자들이 공식적으로 하는 일은 문제가 되지요. 많은 사람들을 그쪽 으로 오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수록 어디서든 선전전을 좀 제대로 하라고 요구할 수 있습니다. 좋은 자리, 의회든 정부 기관이든, 그 자리에서 꿀 빨고 앉아 있지 말고 적극적으로 싸워라, 문제의 핵심들을 짚어내고,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도 선전하고, 변혁적인 관점에서 일하면은 쉽지는 않지만, 의미 있습니다. 레닌도 반동적인 노동조합에서 그런 일을 하면 구성원들이나 지도부로부터 반발을 사고 박해를 받을 수 있는데, 그런 것을 회피하지 말아라, 들어가서 싸워라 뭐 이런 얘기를 하거든요. 이것은 중요한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중국 문제와 관련해서는 실제로 평등주의, 호혜주의, 사회주의 방향으로 사회 전체가 움직이기 시작했느냐가 중요한데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중국의 양극화, 불평등은 심하잖아요. 앞으로, 평등사회로 가느냐, 그러기 위해 공산당이 무엇을 할 수 있느냐, 이미 다 먹혀 들어갔느냐, 강력한 힘으로 사회주의 방향으로 밀어붙이고 있는데 저항을 받고 있느냐, 그 저항을 이길 수 있느냐, 패배할 것이냐 이런 것들이 관심거리입니다. 게다가 중국 자체만이 아니라 미국의 간섭도 끊임없는데, 그것들을 어떻게 겪어내느냐 이런 것들이 다 문제입니다. 아무튼 저는 잘 됐으면 좋겠다, 사회주의적이고 혁명적으로 발전했으면 좋겠다, 그러나 아직은 좀 더 예의주시하자는 생각입니다.
발제자: 중국에 관해 공부해야 한다는 부채 의식이 없을 수 없습니다. 또 제국주의가 만들어내는 매수 효과에서 자유롭지 않겠지요. 이런 문제의식에 대해 대부분의 지식 노동자들이 거북해합니다. 물론 노동자국가 개념을 이제는 자연스럽게 써야 한다는 생각인데, 이상하게 쓰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지요. 지난 대선에 사회주의 후보가 나왔는데, 노동자 후보, 노동자 대통령 표명하면 어떨지요.
토론자: 노동자 국가 개념은 다소 생소합니다. 맑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까지 한결같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을 제기했거든요.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의 상대 개념은 부르주아 민주주의라는 식으로 논의를 전개해 왔지요. 그러니까 이런 전통과 어느 정도 거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전통적 이론과 비교해 가면서 설명하는 것이 빈약합니다. 노동자 국가로 가자는 것을 강조하지만, 맑스주의 이론에서는 그런 이야기가 별로 없거든요. 실제 현실에서도 노동자 국가의 명칭을 갖고 있는 어떤 국가가 사실상 없고요.사회주의로 하든지 아니면 민주주의 같은 이름으로 하면 인민이라 하는 이름을 붙이고요. 그리고 노동자 국가라는 것을 이론적으로도 꺼렸던 나라가 대표적으로 소련입니다. 노동자를 내세우면, 자율권을 주는 거죠. 자주 관리제와 같은. 그러니까 소련하고 양극에 있었던 티토의 자주관리제하고 계획경제는 서로 이데올로기적으로 심각하게 대립했고요. 스탈린이 극단적으로 그런 자주관리제를 극단적으로 비판했고요.
발제자: 공식 국호가 아니라 자기들끼리 부를 때, 혹은 그 권력의 성격상 노동자· 농민의 국가 내지 노동자국가라는 것입니다. 현시점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말 대신 노동자국가를 쓸 만한 근거는 맑스주의 이론 내에 충분히 있다고 봅니다. 엥겔스가 파리코뮌이야말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라고 칭했고, 맑스도 여기에 동의한 셈인데, 그때의 핵심이 근본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발제에서 언급했던 조치를 통해 누구도 사회 위에 군림할 수 없도록 만든다는 것이 기본 원리지요.
토론자: 자본가들을 상대로 하는 독재라는 의미가 희석될 위험도 있지요.
발제자: 그것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래서 저는 동시에 자본독재라는 말을 쓰자, 반대로 노동자 민주주의를 강조하자는 것입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라는 말보다 자본독재라는 말을 더 자주 쓰는 것이 좋아 보입니다. 맑스주의 이론을 문자 그대로 답습할 이유는 없지요. 현재 맑스 엥겔스나 레닌 시대와는 비교가 안 되게 노동자 비중이 압도적입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말은 사실 전략적으로 도움이 안 된다는 거죠. 지금은 노동자라는 말조차 기피하는 문화가 팽배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극복해야 합니다. 바로 자기가 노동자고, 옆에 있는 사람이 노동자고, 아버지가 노동자인데, 노동자를 혐오하면서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이것은 극복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노동자, 노동자계급, 노동자국가 이런 것들은 절대 양보하면 안 되는 개념들이다. 그러니까 전략적으로 노동자라는 말을 피해 온 것은 잘못이고, 이젠 바꿀 때가 됐고, 바꿔서 노동자, 노동자국가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써야 할 때가 됐다는 것입니다. 전략적인 판단입니다. 사회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사람들이 권력의 주인인 국가라면 그것은 당연히 민주주의국가이기도 합니다.
민중이 주인인 체제가 민주주의라는 것, 민주주의 개념을 이제는 말 그대로 받아들이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노동자가 압도적 비중을 차지하므로 민주주의가 되기 위해서는 노동자가 국가권력의 주인이어야 한다는 것을 반복해서 주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맑스도 파리코뮌을 ‘노동자계급의 정부’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맑스 엥겔스의 이론을 자구(字句)대로 계승할 것이 아니라, 그 기본 정신을 살리면서 우리의 현 단계에서의 전략적 관점에서 노동자국가를 강조하자는 것입니다. 그 기본 정신에 비춰볼 때, 프롤레타리아독재의 본질에는 근본민주주의가 담겨 있다는 것이고, 노동자를 강조하여 자본과 각을 세우고, 동시에 본질적인 국가권력의 문제를 우회하지 말자는 것이지요.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실질적 민주주의가 아닌 형식적 민주주의라는 점을 지적할 때, 또 그것이 노동자민주주의로 전화되어야 한다는 점을 밝힐 때 쓰고, 다른 경우에는 노동자민주주의와 대조되는 자본독재라는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 좋겠다는 겁니다.
발제자: 서구의 맑스주의자들이 뭐라고 주장하느냐에 구애받아야 할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맑스주의자 가운데에는 저 같은 인간도 있는 거지요. 예컨대 바디우는 민주주의 자체가 문제라고 하는데, 그럴 필요가 없지요. 지금의 각자도생 문화 속에서 어떤 깃발을 세우기도, 세운다고 함께 가기도 쉽지 않지요. 그래도 그 공약수를 조금 찾자는 겁니다. 노동자민주주의, 노동자국가 이런 개념을 통해 공약수를 조금씩 만들자는 것입니다. 어떤 이론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고, 이데올로기 전쟁을 벌이고 있는 셈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그것이 바람직하고 괜찮다면 같이 하자는 것이고, 심각한 문제가 있다면 폐기해야 겠지요. 왜 노동자만의 국가 아닌데 노동자국가를 말하느냐는 문제 제기가 있습니다. 노동자가 주도하는 국가라는 것이고, 국가권력이 본질적으로 노동자계급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맑스주의 전통에 따르는 이야기이며, 존중하고 답습해야 한다고 봅니다. 노동자를 버려온 수십 년의 역사가 있는데, 이제 살려야 할 여러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토론자: 문재인 정권은 촛불 덕분에 권력을 잡아서 한 가지 개혁이라도 뭐 내세울 만한 것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정권은 노동 존중이라는 표현까지는 썼고, 한 몇 달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상황판을 만들며 추진했지만 결국 다 포기해 버렸잖아요.
사실 그것은 노동의 관점에서 보면 큰 문제입니다. 어쨌든 노동에 대한 무시 천시 멸시 이런 것이 팽배해 있다 보니까, 노동하는 나, 노동을 하는 노동자인데 노동자라고 말을 못 합니다. 홍길동보다도 못한 존재들인 것 같습니다. 요즘 젊은이들한테 인기 있는 채널 중 사장 남천동이 있는데, 애들은 다 사장을 좋아해요. 하지만 무슨 일을 하든, 언제든지 잘릴 수 있는 계약에, 하청에 하청밖에 못 하는데도요. 노동이나 노동자라는 말은 이제 확장하는 것이 맞습니다. 정서적인 부분도 문제입니다.
발제자: 특히 정서 차원에서 문제가 크지요. PD가 21세기를 표방할 때, 노동 현장에만 머물지 말고 일상생활 속으로 들어가자는 취지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만.
토론자: 특히 정의당이 그랬죠. 정의당이 그렇게 등장할 때부터 노동은 밀려났습니다.
발제자: 그 결과 현재의 노동 현실 아니면 자본독재 현실을 감당할 만한 어떤 이데올로기적 지표를 만들어냈느냐, 전혀 못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오히려 악화시켜 온 겁니다. 노동자 개념은 사회마다 시대마다 다를 수 있어요. 한국 사회는 이제 노동자가 압도적 다수를 점하게 됐지요. 실질적으로 노동 인구가 대부분이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노동자국가 이야기해야 할 때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왜 못하고, 항상 자본독재의 양대 분파인 두 당에다가 표를 줘야 하느냐, 노동자당이 성장해야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현 단계의 주요모순 아니겠습니까.
토론자: 독일이나 덴마크, 뉴질랜드나 프랑스도 마찬가지고, 이런 나라들의 선거제도는 우리와 판이합니다. 노동당이나 진보 정당들이 진출할 수 있는 선거제도 자체가 미비합니다. 승자독식 지역구가 압도적이고, 비례제도는 위성 정당들이 잠식해 버리고 그러니까 성공 가능성이라는 부분에서 많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선거제도도 고쳐야 하고, 성공의 맛보기가 필요한데 정치적 효능감이라는 성공의 맛보기가 봉쇄된 거죠. 그런 나라들에는 내각제가 많습니다. 영국도 노동당이 복귀했는데, 우리는 제왕적 대통령제에 온통 관심이 집중된 것도 문제입니다.
또 경제 규모에 비해 소상공인 자영업자가 많습니다. 노동이 무시 천시되고 노동자라고 떳떳하게 자신을 밝히지 못하게 강제되는 사회다 보니까, 노동자가 노동자라고 말하면 ‘넌 빨갱이 아니냐?’ 이렇게 되고, 색깔론이 지배하니까, 노동자로 나서기 싫어하고, 이제 운동을 하다 안 되면 결국 우유 배달 대리점, 택배 대리점 하는데, 이게 대부분 계약을 맺는 특수고용 노동자면서 다 사장인 거죠. 그냥 밥이나 먹고 살면서, 이제 다 떨어져 나가거든요.
전체적으로 이런 문제를 고치기 위해서도 선거 자체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게 아니면 이제 선거 제도를 바꾸는 데에 힘을 쏟아야 합니다. 그래야 진보가 진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요. 맑스 시대 독일 사민당에 성장할 수 있듯이 성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어쨌든 이제 노동자 대중의 시기이기도 하고요. 선거를 수단으로 쓴다면 선거 제도의 변경은 필수입니다. 노동자의 당, 노동자계급의 정당이 성장하려면 말입니다. 선거제도 문제와 함께, 분단으로 인한 압박, 색깔론 문제도 있습니다.
발제자: 민주당에 대한 환상이 여전히 남아있지요. 아마 차기 정권은 어쨌든 이재명으로 넘어갈 가능성이 큰데, 이재명 정권이 해낼 수 있는 게 있고, 해낼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걸 명확하게 인식해서 그 한계를 짚어가고, 직접 경험하지 않더라도 앞질러서 이것이 한계라고 설득할 수 있고 그 대안을 우리가 만들 수 있다면, 설득력 있는 강력한 대안을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제도도 중요한데 그 이상으로 정권을 잡으면 무엇을 할 것인지를 제대로 보여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레닌이 개량주의 노동당의 발전 경과를 보자고 얘기했듯이, 민주당이 앞으로 몇 년간 집권했을 때 나타나는 문제들이나 한계들도 볼 수도 있고, 그걸 예측하며 대안을 먼저 만들어 갈 수도 있다고 봅니다. 조직 확대 문제도 있고요.
토론자: 만약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서 노동자 국가를 세워 할 수 있는 일, 그러니까 사회주의 실현 단계로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죠. 우리 이야기는 이론적인 전 단계고, 지금 우리의 실천 대상은 아니고요. 그러면 사회주의 혁명을 어떻게 일으키자는 얘기는 없고 현 단계에서 노동자 국가를 모색하면서 하는 거예요. 우리가 사실 표현하는 건 계급정당이지요. 계급정당은 유럽에 산재해 있지요. 우리의 경우 계급정당은 민주노동당, 통합진보당 정도까지 계급정당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다른 나라의 전례를 일단은 봐야 할 텐데, 계급정당들이 쇠퇴하고 없습니다. 그쪽 추이도 봐야 하고, 우리는 재건해야 되고요.
발제자: 현재의 추세는 가변적이라고 봅니다.
토론자: 선거제도 개선은 생각해 볼 수 있는 거죠.
발제자: 계급정당의 가능성이 얼마나 있느냐를 막연히 추측할 것이 아니라, 계급정당을 성장시키기 위해서라도 노동자국가 개념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지금 상황에서 왜 자본독재를 넘어서야 하느냐 는 문제의식부터 그 대안은 노동자국가라는 얘기를 해야 하고, 그것이 민주당과 선을 그을 수 있는 길입니다. 지향점으로서의 노동자국가가 필요합니다. 사회주의를 얘기할 수도 있는데, 사회주의라는 말은 너무 혼탁합니다. 사회주의라는 말은 맑스 시대부터 오염돼 왔지만, 그 정신은 알지요. 그것은 받아들이자, 그렇지만 노동자국가라는 말하는 순간, 이건 자본독재와 대립 구도가 명확해질 수 있습니다.
토론자: 독일 사민당을 계급정당으로 보면, 노동자계급의 정당이지요.
발제자: 사민당이 우경화를 거쳐 지금은 어디까지 가 있는지 알 수 없는 정도입니다.
토론자: 그러니까 쇠퇴한 것이고, 이게 도대체 계급정당의 성격을 갖는지 의구심이 듭니다.
발제자: 소련 붕괴 이후 자본주의는 단일 패권 체제로 세계화되어 가면서 한동안 잘 나갔지만, 이제 그렇지 못하게 된 거죠. 30여 년 전과 지금의 경제 상황은 확연하게 달라졌습니다. 불균등발전은 맹렬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전쟁은 불가피해졌지요. 유기적 구성 커지고 생산성 좋아질수록 사람 줄여야 하지요.이런 상황이 명확해지고 있습니다. 기후 위기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런 상황은 자본주의의 본질을 알면 오래전부터 예견되었을 텐데, 이론적으로 적극 대응해 왔는지 의문입니다. 이런 상황을 바꿔야 한다, 자본주의 넘어서야 한다는 이론 투쟁들을 이론가들이 얼마나 해왔느냐 하는 것이지요. 서구 쪽은 다 포기하고 청산주의로 간 듯합니다. 사회를 바꾸자는 것도 부분적이고 미시적인 단편적 개선에 머물고 자본과 정면 대결하겠다는 논자들은 드문 상태입니다. 그들의 이론에 비추어 한국 사회를 봐야 할 이유는 없지요. 지금의 눈앞에 닥친 위기 상황 자체를 보자는 겁니다.
토론자: 그런데 계급정당, 노동자당이 지금 다 쇠퇴하는 그런 단계입니다.
발제자: 그 쇠퇴라는 것도 일시적 현상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변할지는 대응이 얼마나 기민하냐, 아니면 이데올로그들이 그 안에서 단맛 보면서 뒤처져서 해설만 하다가, 세상 변하는 것 따라잡지도 못하는 상태냐에도 영향을 받겠지요. 그에 비해 현장에서는 위기들이 더 절박합니다. 또 자본 논리가 있지 않습니까? 법칙적인 변화들이 있는데 그것들을 제대로 알면 예측도 한다는 거죠. 이러한 예측하에서는 대응이 가능합니다. 노동자국가는 현재 위기 상황으로 가고 있는 세계 자본독재체제의 결말이 어떨지를 예측하면서 얘기하는 겁니다.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재명이 내세우는 것처럼 경제영토 넓힌다든지 재생에너지 활용하여 새로운 생산력 발전시킨다는 등의 이야기는 그 귀착점이 제국주의입니다. 우리는 기존 제국주의 문제를 보아왔습니다. 발전된 생산력 가지고 지금도 싸우고 있고요. 중국과 미국의 싸움에서 핵심은 생산력 아니습니까. 그런데 생산력 발전으로 노동력 줄이며, 이를 기본소득으로 조금 때우는 수준이지요. 그 한계가 명백하지요. 자본독재체제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경제 원리로 작동하는 사회를 만들어야겠지요.
그 동력이 될 수 있는 노동자들이 그동안에 살 만큼 살게 되어 자기는 노동자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는 지경까지 와 있어요. 그런데 이제 피부로 느낄 만큼 위기로 빨려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노동자 당이 집권하겠다는 의지도 보일 수 없다면 누가 지지하겠습니까?
토론자: 그건 슬로건으로 할 수 있습니다. 일본을 보면, 공산당도 있고 사회당도 있습니다. 유럽에도 개혁 정당들이 있어요. 우리의 경우 개혁 정당이 한 번 등장했다 사라지고 재건도 어렵습니다. 첫째 낳았는데, 사산입니다.
발제자: 민주노동당의 실패 원인을 의회주의에서 찾기도 합니다. 생각해 보면 소련 붕괴 후 변혁적 대안을 찾지 못한 셈입니다. 체제 변혁을 포기했지요. 그러고 나면 자본독재 시스템 안에서 얼마나 더 잘 적응하느냐, 어떻게 해야 조금 더 영향력을 갖느냐, 얼마나 더 개선하느냐에 매몰되어 버린 겁니다. 그런데 변혁적인 마인드를 버려도 좋을 만한 물적 토대, 한국경제의 성장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합니다. 심각하게 실업 쏟아져 나올 수 있고, 언제라도 전쟁 터질 수 있고, 미국발 경제위기 닥칠 수 있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세계 경제 차원에서부터 토대가 흔들리고 있다는 겁니다. 대안을 적극적으로 기민하게 만들어 나가지 않고, 옛날에 실패했으니까 안 된다는 이야기만 반복할 수는 없습니다.
토론자: 안 된다는 얘기보다는 저기서는 쭉 내려오다가 쇠퇴했는데, 우리는 애초에 없었고 생겼다가 다시 출산해야 하는 그런 진통을 생각해야 한다는 겁니다.
발제자: 물론 그렇습니다. 쉽지 않습니다. 자본 이데올로기가 우리 뼛속까지 스며들어 앉아 있는데 어떻게 하루아침에 걷어내겠습니까. 어쨌든 문제의식을 느끼고 시작해야 한다, 나는 최소한 이것을 하겠다, 내가 제국주의자들의 매수에 놀아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각부터 해야겠다, 이런 것이지요. 한국경제의 성장 분위기에 휘말려 세계를 보는 눈 자체가 흐려지고, 꿀맛을 보는 과정에서 진짜 문제의식을 다 잃어버리지 않았는지 자각부터 시작해야 할 듯합니다. 제국주의는 당연히 매수를 이용합니다. 제일 먼저 이데올로그들을 매수합니다.
토론자: 저도 매판 지식인 셈입니다.
발제자: 검열이 자동화돼 있는 상황까지 와 있는데, 그것부터 우선 자각해야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토론자: 현실을 보는 내 입장을 갖고 있겠다고 생각하는 게 중요하겠죠. 예컨대 학진에 응모해도 탈락이 뻔하면 살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지금 이렇게 생각하게 것은 노동자가 빨갱이라는 말을 들어서입니다. 저는 대학원을 다닌 후 유치원 교사로 일하는데, 사람들과 1대 1로 만나면서 달라진 시각으로 보게 됩니다. 옛날에는 저도 교사고, 저 사람도 교사니까 그냥 1대 1로 보았는데, 지금은 생각이 좀 달라진 거예요. 아이들 대하는 태도도 다르게 보입니다. 왜 저렇게 행동하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저 사람이 교사로 서 있나, 노동자로 서 있나. 그 사람들이 보고 있는 아이들은 지금 어떤 입장에 있는지, 여러 생각을 하게 되면서 내가 내 입장을 어떻게 취하느냐가 일상을 결정하는 나라는 사람을 다시 보게 됐어요. 이 글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더라고요. 그러니까 내 입장을 정하면 생각을 다르게 하게 됩니다.
발제자: 노동자국가 건설은 중간 목표고, 풍요로운 평등 사회로 가자는 건데, 그 과정은 자본독재를 극복해 가는 지난한 해방 전쟁 과정입니다. 이 전쟁이 뭐 한두 번의 전투로 끝나는 것은 아니지요.온갖 영역에서 전쟁하는 겁니다. 각자 의식하지 못해도 이미 그 전쟁판에 들어가 있습니다. 이미 패배해서 쪼그려 앉아 있을 수도 있지만 싸우는 사람들도 또 어딘가에 있습니다. 중요한 건 싸우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은 같이 가야지요. 효율적으로 싸우려면 전위가 중요하고, 덩어리가 커져서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당이 되면 더 좋고요. 당을 통해 집권까지 하면 제대로 자본독재를 극복할 가능성이 커진다고 봅니다.
토론자: 자료 3쪽에 보면 파리코뮌의 정보 공개 이야기가 나오는데, 지금 어린이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휴게시간이었습니다. 휴게시간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를 놓고 분란들이 생깁니다. 한 사람이 쉬면 다른 사람이 그 일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것이 법적으로 정해진 것이고, 우리끼리 싸울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를 하다 보니까 이런 것도 중요하다는 생각하게 됩니다. 정보 공개가 되는 것, 이런 것이 현실에서 쌓여가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만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일상에서 그런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니까 이론적으로만 알고 있던 것이 이제 현장에 들어가니까 바로 보이는 거예요. 이렇게 알고 있다는 것이 현실에서 확인되고 표현되는 것도 중요해 보여요. 먼 얘기가 아닐 것 같고요. 노동자 국가가 요원한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부터 시작되면 너무 당연한 얘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토론자: 파리코뮌을 맑스는 아주 적극적으로 표현했고, 레닌도 초창기에는 상당히 적극적으로 표현했지요.
발제자: 초창기에는 조금 비판적으로 보았고 국가와 혁명에서 적극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토론자: 이론적으로 그랬고 실제로는 작살을 내버렸죠. 소비에트가 파리코뮌인 셈인데, 역사적으로 소비에트가 사회주의에서 활동한 예가 없어요.
발제자: 실패 사례를 들면서 안 된다고 하지 말고, 왜 안 됐는지, 어떤 것을 배울 것인지, 어떻게 해야 성공할지 연구할 필요 있는 것 아닌가요.
토론자: 차베스가 소비에트를 곳곳에 만들었어요. 그것 덕분에 나라는 엉망인데도 정권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거든요.
발제자: 차베스가 만들기 전에 이미 그런 풀뿌리 조직들이 엄청나게 형성돼 있었죠. 오히려 이 조직들이 차베스를 만들어내지 않았나요.
토론자: 그 조직에는 파리코뮌적인 잠재적 요소들이 있었는데, 쉽지 않습니다. 러시아도 8개월 만안에 끝났고요.
발제자: 파리코뮌은 짧게 끝났다는 것 때문에 오염이 훨씬 덜 된 원형을 유지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것을 배워야 한다는 겁니다. 그대로 하자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적용하려면 어떤 문제들이 있고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분석해야 합니다. 실패 사례들에서 확인할 수 있어요. 분석 결과들을 종합하자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만들려는 노동자국가 모델이 딱 하나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나라들이 안정화되는 순간, 계급 없는 사회가 됐다는 관점을 갖는 순간 인민 개념이 전면에 나옵니다. 루카치의 경우 처음에는 계급론적인 글들을 쓰다가 사회주의 리얼리즘 단계로 전환되는 30년대 중반 이후에는 계급 대신 인민을 논합니다. 여기에는 이데올로기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그런다고 계급전쟁이 사라진 것은 아니고, 제국주의를 상대로 여전히 계급전쟁을 치러야 하는 거죠. 그러니까 상당한 기간을 거쳐야 한다. 그러니까 노동자국가는 인민 개념보다 장기적으로 쓰일 수 있다고 봅니다.
참석자: 스탈린이 프롤레타리아독재라는 말을 그대로 썼지요.
발제자: 그러니까 노동이라는 말조차 쓰기 힘든 상황에서, PT 독재라는 말과 노동자국가라는 말 가운데 어느 쪽이 유용한지가 문제지요. 독재라는 말을 쓰는 순간 낙인이 찍히지만, 우리는 압도적인 다수를 이루는 노동자들이고, 민주국가의 주인은 우리다, 민주국가 만들자, 여기에 대해서는 반박이 어렵지요. 그런데 왜 안 쓰느냐는 겁니다. PT 독재라는 말을 쓴다고 내용이 달라지느냐, 자본독재를 제압하자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오히려 자본에다 독재라는 말을 붙여 줘야지요.
토론자: PT 독재하고 노동자 민주주의 국가하고 같다고 얘기한 거 어디에도 없고, 저쪽에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말합니다.
발제자: PT 독재의 정신이 무엇이냐 물을 때 그것이 구현됐던 파리코뮌을 돌아보면, 그 내용은 근본 민주주의인데, 그것을 엥겔스가 PT 독재라고 했지요. 맑스는 노동자 정부라고도 했고요.
토론자: PT 독재 얘기할 때, 계획은 언어 화폐 상품 민족 가치 국가 이것이 다 소멸하어야 하는 거죠.
발제자: 그 방향으로 가는 점에서는 똑같아요. 파리코뮌만 해도 벌써 국가의 기능이 완전히 변한 거지요. 기존의 국가하고는 완전히 달라졌단 말입니다. 그것을 발판으로 자본독재의 잔재들을 어떻게 제압해 갈 것이냐 하는 문제가 남아 있단 말이에요. 그 싸움을 벌이는 기간은 장구하게 간다는 거예요.이 기간을 노동자국가라 개념으로도 감당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자본과의 싸움이 진행되니까요.
토론자: 서구 계급정당들이 노동자 국가를 모색한 거죠.
발제자: 그런 모색이 다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공한 것들, 성과들, 실패 사례들, 이런 것들을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몇 사람 모여서 할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그것들을 연구하고 종합하고 평가하는 광범한 과제를 한두 연구소 차원에서 감당하기는 어렵고, 대대적으로 힘을 모으자는 입장입니다. 모이는 구조를 자꾸 만들자는 겁니다.
토론자: 전위는 저와 …
발제자: 안 맞을 수 있지요. 전위 개념으로 들어가면 거부감 있는 사람들 많죠. 관료주의로 간다, 당 독재로 간다, 등등. 로자주의부터 네그리, 들뢰즈 세례받은 사람들, 공산당원이었던 알튀세르까지 계급 환원주의 거부하는 점에서 전위와는 좀.
토론자: 전위를 비판하는 분들은 살기가 힘들어서 그런 거지. 무슨 이론적으로…
토론자: 그보다 제가 볼 때는 자기만 유일한 전위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인정을 못 해요. 특히 아나키스트들이 그래요. 제가 볼 때 현실적으로 개인 능력의 차이라든지, 조건에 차이가 나는 건 어쩔 수가 없어요. 그걸 인정하기 싫다는 거죠.
토론자: 여러 가지 전위조직들 많은 건 괜찮은데, 다 살기가 어려우니까 그만둬서 전위가 힘든 겁니다. 아무나 다 자기 믿음대로 못 사니까요. 예술계에도 전위가 있으면 좋고, 아나키스트 전위가 있어도 되고요. 그다음에 입장이 다른 전위들이 선의에 경쟁을 하면 되거든요. 선의의 경쟁하다가 청산도 할 수 있겠지만, 그건 노동자 대중들이 선택할 부분입니다. 동네마다 분위기 다르니까요. 스페인 분위기가 다르고, 이탈리아 쪽에는 아나키스트 쪽이 강했지요.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점점 그렇게 살기가 어렵다는 겁니다. 개폼으로 사는 것이 전 세계적인 단일문화까지 되었어요. 획일적인 단일종이죠. 농업 생태적으로 보면 다양한 콩도 수십 가지 옥수수도 수백 가지였는데, 지금 옥수수 세 가지도 안 되거든요. 그런 식으로 삶의 모습들이 획일화되다 보니까 전이로 살기 어려운 거예요. 전위로 살면 오래도록 노령 청년으로 살 수도 있는데, 흔히 꼰대니, 뭐니 하면서 무시당하거든요.
발제자: 그럼 전위 말고 꼰대 됩시다.
토론자: 이러면 막말이라고 욕먹겠지만 실제로 그런 게 있으니까요, 인정할 만한 에코페미니즘이나 이런 거 말고 꼴통 페미니스트들은 아직 꼰대스럽게 얘기하잖아요. 전위라고 과감하게 드러내기가 좀 어렵습니다.
발제자: 드러내자, 누가 인정해라 이것은 아니고요. 어쨌든 이것이 삶의 의미다, 이런 일을 통해서 뭐라도 조금이라도 변화시키면 그만큼 세상이 변한다, 효과적으로 한번 해보자면 이제 사람 만나는 것이고, 조직하는 것이고, 또 연구하는 것이지요. 그럴 마음이 있느냐, 아니면 처음부터 이건 나하고 아무 관계 없고 의미도 없고, 더 좋은 집, 더 좋은 차, 더 좋은 직장 등에 그냥 올인할 것이냐가 문제지요. 제 눈에 후자는 좀 비참해 보입니다.
토론자: 전위를 강요할 수는 없지요. 저처럼 게으른 사람은 전위 말고 할 게 많아요. 이제 전위의 사회적 역할이 상당히 이제 약해졌다고 할 수 있어요.
토론자: 민주노동당이 등장할 때 표방한 것이 일하는 사람들이 행복한 세상이었습니다. 그것이 PT 독재가 되건 노동자국가가 되건, 실질적인 내용에서는 우리가 어떻게 투쟁하느냐 하는 방식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 연구소에는 주로 국가적인 모델로 체제 문제나 평등 문제를 해결하자는 방식이 주류고 그것도 상당히 일리가 있습니다. 최근 흐름을 보면 공산권이 무너진 후 고진이 이야기하는 어소시에이션이나, 또 최근에 사토 고헤이가 말한 탈성장 공산주의는 국가도 아니고 아나키즘도 아니고 자발적 연합체입니다. 이 모델도 한번 같이 고민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간단하게 국가를 통해 한 번에 모두 해결하면 좋죠. 그건 한번 시험해 봤습니다. 기본적으로 발전 모델, 그러니까 생산력 발전을 추구하는 것은 노동자가 집권하나 부르주아가 집권하나 결국 끊임없는 생산을 통해서 자본을 축적해서 나누자는 방식인데, 그런 방식 또 가능하면 좋겠죠. 그런데 노동자들이 집권해도 끊임없는 생산이나 발전을 추구할 때 반드시 착취를 가져옵니다. 그런 이야기는 머레이 북친 같은 사회 생태주의자들도 완전히 생태 중심이 아니고, 사회적 억압을 쟁점으로 가져온다는 차원에서 의미 있다고 봅니다.
국가 중심 모델로 생산적 발전을 통해서 노동자가 정권을 잡아 생산력 발전을 통해 부를 나눠주는 방식도 좋지만 그건 안 될 확률도 좀 있다는 거죠. 그러니까 제가 볼 때는 어떻게 싸우느냐 그 방식이 중요합니다. 생태를 고민하면 국가 모델이 아니고 어소시에이션 모델로 갈 수밖에 없는 구조가 돼요.왜냐하면 생태라는 것은 그 지역에서 다양한 먹거리를 해결하면서 다른 나라를 지배하는 제국주의로 갈 필요가 없어요. 생태 어소시에이션 모델 논의도 앞으로 조금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른 식의 싸우는 방식, 어소시에이션을 추구하는 방식은 어떻겠는가 하는 이야기를 해봅니다.
발제자: 제가 생각하는 노동자국가는 어떤 단일 모델로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구소련이든 중국이든 아니면 북한이든, 또 만일 어소시에이션 운동이 유효하고 배울 게 있다면 얼마든지 배워서 우리가 이 시점에 맞는 모델을 새롭게 구성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배제하는 건 아니지만 그쪽으로만 가자고 하기에는 전략적인 평가가 필요하겠지요.
그러니까 국가 권력의 문제는 너무 심각하기 때문에 이것을 건너뛰고 과연 되겠느냐는 판단을 하게 됩니다. 어소시에이션 운동은 하지 말자가 아니고, 결정적인 것은 결국 국가 문제에서 결판이 날 것 같다는 그런 막연한 문제의식이죠. 아무튼 어떻게 결합할 것인지는 더 연구해봅시다.
토론자: 좋은 건 다 하자는 건가요.
발제자: 좋은 걸 안 하자는 건가요.
토론자: 근데 사실은 이 두 개는 이게 좀 양립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어요.
발제자: 코뮌부터가 기존의 국가 모델하고 완전히 다르지요. 또 노동자국가가 지향하는 경제 원리로 몇 가지 지적한 내용에서도 이미 성장 문제 등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에 나름대로 맑스를 끌어들여 얘기했습니다. 얼마든지 결합해서 갈 수 있는 것들입니다. 왜 꼭 따라 놀아야 하겠습니까.
토론자: 맑스도 분명히 어소시에이션을 얘기했지요.
토론자: 다 제출해야 합니다. 다 제출하면, 선택은 역사의 대중이 인민대중이 또 노동자 대중이 합니다. 경쟁하고 선택받는 겁니다. 역사의 검증을 통과하는 거죠. 당장 국가가 현재 막강한 권력으로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노동자, 국가, 국가권력이라는 부분을 쓰지 않겠다는 것이 일부 생태주의자, 일부 아나키스트들입니다. 때때로 이거 깨기 위해 피 터지게 싸우는 분들이 있어요. 그럴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각자 자기 입장과 계획들을 가지고 우선은 노동자들과 만나는 게 맞습니다.
노동자들과 만나면서 이 노동자들에게 선택받을 때까지 민주적으로 민주주의적으로 채택 받으면 되는 거고 노동자들이 아나키즘을 채택하면 이제 집에 가는 거지요. 하느님이 십계명 던지면 이게 맞다고 모세처럼 끌고 가는 게 아니잖아요. 노동자 대중이 채택하면 되는 거예요.
지금 문제는 우리 사회가 아직도 색깔론에 시달리고, 노동자정당, 그전에 노동자, 노동 등 최소한의 노동 존중 교육을 안 받아왔다는 겁니다. 해방과 분단 이후 전쟁을 치르면서 노동이라는 두 글자 자체를 빨갱이로 몰살시켜 왔기 때문인데, 그렇기 때문에 그 부분을 확장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노동자국가라는 용어 사용부터 시작해서 이 정서를 구체화하고 외화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나머지 전략적 입장, 이론적 입장은 무엇이든지 노동자계급과 친화적이라면 다 제출되어야 하고 역사의 검증을 통과하면서 사회 속에서 채택된다고 생각합니다.
발제자: 노동자국가 또는 PT 독재는 기본적으로 국가 사멸을 지향점으로 설정하고 있어요. 어소시에이션은 지금도 그 준비 작업으로서 의미 있지만, 최종적으로 구현된 단계로서 더 큰 의미가 있어요.국가 사멸이 구현된 단계로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을 방해하고 탄압하는 현재의 자본 권력이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운동이 밑에서 조금 성장하면 밟아버리고 조금씩 사람이 늘어나면 매수해 버려서 발전할 수 없게 만드는 이 구조를 어떻게 깨느냐, 이 운동이 자본독재에 그냥 다 흡수돼 버리는 걸 어떻게 막을 것이냐 고민할 때 국가권력 문제를 건너뛰기가 어렵습니다. 국가권력이 어떻게 성격을 바꿀 것이냐가 문제지요. 노동자국가는 국가권력의 성격을 바꾸자는 얘기거든요. 저들이 지금까지 그랬으니까, 우리도 한번 잡아 어떻게 해보자가 아니라, 국가권력 자체가 사멸하는 길로 나아가는 국가, 새로운 국가를 만들자는 것이 노동자국가입니다.
토론자: 그 끝에 풍요롭고 행복한 사회가 있는 거지요. 그 사회는 연합적인 사회일 수밖에 없는 거지요. 국가가 사멸하고 계급이 사멸하는 것이 최종 목표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다양한 층위와 다양한 종류의 사회가 있을 텐데, 그걸 상상하는 것이지 어떻게 문자로 이렇다고 확정하고 미래를 호소할 수 있겠습니까? 그건 불가능합니다. 생협과 같은 노력을 많이 해도 대자본 대시장 경쟁 논리 또는 국가의 승인 또는 예산 결산 검사, 이런 부분에 망치로 계속 두들겨 맞아 무너지는 거죠.
국가 권력을 재편하거나 해체하고 노동자성이 강화되고 노동자들이 따르는, 그리고 레닌이 얘기했듯이 폭압적인 기구들, 국정원, 검찰, 기무사 이런 부분들을 다 없애야겠지만, 그렇게 없애려고 해도 국가권력을 잡아야 하는 거예요.
발제자: 과학기술로 일어나는 온갖 문제점들을 극복할 때는 과학기술이 필요 없는지. 핵을 해체하려면 핵기술이 동원돼야 하지요. 똑같은 성격은 아니라도 엄청나게 발전된 상태가 또 필요하다는 겁니다.평화롭게 된 기술이라는 구호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자연을 억압해 왔는데, 자연이 스스로 말할 수 있게 해주는 기술들, 그런 이념들이 등장하는데, 생산력 발전이 꼭 파괴적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요. 그것은 기본적으로 노동력 절약 문제거든요. 똑같은 사용 가치를 만들 때 얼마큼 우리가 노동력을 절약할 수 있느냐의 문제, 효율의 문제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생산력 발전은 인간 해방으로 가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걸 이용해서 끊임없이 사람들이 착취하고 억압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생산관계의 문제 지배관계의 문제가 본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토론자: 그러니까 철학적인 논쟁이 들어가야 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평등한 세상을 추구하는 것은 맞고, 노동자들이 국가권력을 쥐는 것도 상당히 일리가 있는데, 다른 철학에서는 국가권력을 쥐는 방식 자체가 반드시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과정을 확보하고 또 인간의 자연과학도 인간 지배를 가져오는 그 과정을 수반한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증명됐다고 봅니다. 적절한 과학 기술을 활용하는 방식이 과연 뭐냐, 인간과 자연의 화해하는 알리앙스 테크닉을 이야기하는 경우에는 맑수주의 모델 이 끝났다고 보지죠. 노동자가 집권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인간의 지배와 자연 착취를 수반한다는 거죠.
발제자: 철학적이라기보다는 역사적인 것 같기는 합니다. 역사적인 실패가 법칙화되는 것도 아닐 듯하고요. 어쨌든 그런 문제의식을 느끼고, 대안 사회를 만들어 갈 때는 피해 갈 수 있는 적절한 모델을 찾아야겠죠. 그럴 때 어느 정도 어떻게 그런 문제의식들을 받아들이고 실현해 낼지는 좀 더 종합적으로 연구해야 할 것 같습니다.
토론자: 한마디만 덧붙이면, [나는 자연인이다]에서 산 위에 올라가는 사람도 저 사람이 자연을 착취하는지 안 하는지는 몰라요. 자연을 착취한다는 의미가 뭔지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좋겠어요. 추상적으로 인간이 자연을 착취한다고 말하는데, 그러면 그 착취와 공존의 기준이 무엇인지 묻고 싶어요.
토론자: 저는 어소시에이션이 무슨 뜻인지는 알겠고, 사회주의는 구체적으로 이런 시도를 했는데 무엇이 잘못됐다고 평가할 수도 있고, 냉정하게 이해해서 사회주의 역사하고도 비슷하게 으스스해지는 그 문제의식이 국가 문제를 다루지 말고, 내부적으로 공동체를 만들어 대안적인 해결책을 찾자고 하는데 그것도 냉정하게 역사적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사회주의도 아나키즘도 역사 속에서 실천하고자 노력했다고 봐요. 요즘 와서 한순간에 떨어진 문제가 아닙니다.
토론자: 어소시에이센도 지금 기능하고 있습니다. 계급이 소멸한 공산주의 사회에서 어소시에이션 한다는 것은 웃기는 얘기예요. 현 단계에서 어소시에이션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회주의에 두 가지가 있는 거죠. 국가가 먼저고 그다음에 어소시에이션이라는 것은 비맑스적이에요.
토론자: 아니요. 그런 문제가 아니고, 명시적으로 그런 문제의식을 느낀 두 면이 진행되고 있다는 거죠. 단순하게 국가 문제에 활용했던 그런 집단들이 틀린 부분이 있다는 거고 그 부분은 교정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또 다른 쪽에도 그렇게 진행되는 역사가 있었다는 겁니다.
발제자: 아무튼 어소시에이션 문제 자체를 맑스부터 한번 총체적으로 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안에 들어가면 또 만만치 않은 싸움판이 벌어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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