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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족 이야기 O: 반남박씨 문과 급제자
부록2: 과거와 관련된 뒷이야기 2-II
II
한편, 숙종 기묘년(1699년) 증광시 문과의 부정 사건은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또 하나의 비극을 낳았다. 위에서 언급되었던 이수철(李秀哲)의 이야기이다. 한산인(韓山人) 이수철의 아버지는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치고 우승지ㆍ예조참의에 이르렀던 이동직(李東稷: 1611~1675)이며 할아버지는 목사(牧使)를 지낸 이성연(李聖淵)이다. 이성연이 목은 이색(李穡)의 10세손이니 이수철은 목은의 12세손이 된다. 한 마디로 ‘쟁쟁한’ 집안이었다. 그런데 이수철의 형 이수준(李秀儁)이 과거 관리에 참여했던 봉미관 홍수우(洪受禹) 등과 모의하여 응시자의 피봉을 고쳐 씀으로써 이수철의 답안지를 다른 응시자의 답안지와 바꿔치기를 하여 아우 이수철을 부정으로 합격시켰다고 한다.
형 이수준은 숙종에 의해 죄가 경미하다는 판단이 내려져 큰 화를 면했으나, 당사자였던 아우 이수철은 어쩔 수 없이 관노(官奴)가 되어 강진현 고금도(康津縣 古今島)로 정배(定配)되었다가 후에 제주(濟州)로 다시 개배(改配)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다행히 숙종의 배려로 사형은 면했지만, 자신은 물론 해당 가문은 말할 수 없는 치욕을 당했던 것이다. (※정배(定配): 죄인을 지방이나 섬으로 보내 정해진 기간 동안 그 지역 내에서 감시를 받으며 생활하게 하던 일. 또는 그런 형벌. 개배(改配): 귀양지가 바뀜.)
그런데 이 이수철(李秀哲)은 바로 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의 사위였다. 다시 말해서, 이수철은, 불과 20세의 나이에 두역(천연두)으로 세상을 떠난 숙녕옹주(淑寧翁主: 1649-1668)의 유일한 혈육인 딸 반남박씨의 남편이었다. 숙녕옹주는 조선 17대 임금 효종(孝宗)과 후궁 경주이씨(慶州李氏) 사이의 소생으로 18대 임금 현종의 배다른 누이동생이다. 따라서 이수철은 박필성-숙녕옹주의 사위이며, 효종의 외손서(外孫壻)이고, 현종의 생질서(甥姪壻)가 된다. 말을 바꾸면, 이수철의 부인 반남박씨는 당시 임금이었던 숙종(肅宗)의 고종사촌 여동생이다.
질병으로 인해 어머니 숙녕옹주를 일찍 여의었던 반남박씨는 이제 남편(이수철)마저 과거 부정에 휘말려 관노가 되어 고금도, 제주 등지로 유배되는 비운을 겪어야만 했다. 1705년(숙종 31년) 9월, 이수철의 아내 반남박씨는 마침내 외사촌 오라버니가 되는 숙종에게 다음과 같이 상언(上言)한다.
“제가 이 죄인[즉 이수철]의 아내로서 제주에 입적(入籍)되어 어쩔 수 없이 외조(外祖)[즉 효종]의 어휘(御諱) 넉 자를 써넣었습니다. 바라건대, 종실(宗室)의 자손을 면천(免賤)하는 규례를 원용하여 제 지아비[즉 이수철]가 종이 된 것을 면제해 주소서.(自以罪人之妻, 入籍濟州, 而不得不書塡外祖御諱四字。 乞援宗室子枝免賤之例, 除其夫爲奴。)”(번역: 국사편찬위원회)
이 눈물겨운 상언(上言)을 접한 숙종은 의금부와 승정원 관리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마침내 이수철을 관노의 신분에서 면천(免賤)시켜 준다. 이로써 조선 과거의 부작용이 낳았던 또 다른 비극의 주인공인 한 많은 한 여인의 작은 소망이 드디어 이루어지기는 하였지만, 탐욕으로 얼룩진 과거 부정은 결국 후손 만대에 떳떳하지 못한 불행한 역사로 기록되었던 것이다.
참고1: 이수철(1667~1729)의 자(字)는 계보(季保)이고, 부인(반남박씨)과의 사이에 자녀가 없어 11촌 조카 이사윤(李思胤)을 양자로 들였다. 『한산이씨세보』에는 이수철의 字, 생졸연월일, 배위, 묘소에 관한 기록만 있고 과거 관련 사실과 처벌에 관한 기록은 없다.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이수철의 아버지 이동직(李東稷)의 신도비명(神道碑銘)에는 이수철이 이수림(李秀林)으로 되어 있다.
참고2: 이 과거(기묘증광시)는 결국 파방(罷榜)되었으나 숙종 36년(1710)에 복과(復科)되었다. 그러나 이성휘, 박필위, 이수철을 비롯한 중죄인들은 복과되지 못하고 영원히 삭과(削科) 상태로 남았다. 참고로, 영조 51년(1775) 5월에 시행된 문과 정시도 부정 문제로 정조 1년(1777)에 파방되었다. 이 정시에 급제한 박상집(朴相集)도 파방과 더불어 삭과되어 끝까지 복과되지 못했다. 또 고종 16년(1879) 기묘 정시에 급제했던 박영훈(朴泳薰)도 발거(拔去: 삭과)되었으나 이듬해에 복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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