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6-29 주일설교
바리새인의 모습과 제자의 모습
마태복음 23:1~12
제가 전도사 시절에 고등학교 동기가 같은 교회 전도사로 있었는데 저는 그 백전도사에게 한 가지 부러운 것이 있었습니다. 그 교회는 전국이 아는 유명한 교회인데, 원래 백전도사의 할아버지가 기증한 땅에 예배당을 건축했습니다. 백전도사는 할아버지도 그 교회의 장로였고 아버지는 그 교회의 시무 장로였는데 저에게는 그런 빽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말씀을 보다가 신자는 누구나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나에게는 장로 할아버지와 장로 아버지는 없어도 아브라함 할아버지가 있다는 사실로 위안을 삼았습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여전히 문제가 있었습니다. 백전도사의 할아버지는 백씨인데 아브라함 할아버지는 아씨입니다. 아브라함은 아씨이고 나는 최씨, 이게 우긴다고 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을 바꿔 할아버지 장로와 아버지 장로는 없지만 나부터 시작해서 내 아들들과 손주들에게 든든한 믿음의 가문을 물려주기로 결심했습니다.
전통 있는 신앙의 가문에는 믿음의 저력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신앙 가문 출신이라면 그 저력을 보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만일 그런 신앙적 배경이 없는 성도라면 여러분이 자녀와 손주에게 믿음의 기둥을 세워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오래 한 성도에게는 뜻밖의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일명 홉니와 비느하스 증후군입니다. 엘리 대제사장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어릴 때부터 성전이 자기 집이었고 제사 후에 나오는 제물이 자기 집 식탁에 올라왔습니다. 그래서 성전과 제사가 특별하게 생각되지 않았고 어느 날에는 백성이 제사드리는 제물을 미리 빼앗아서 스테이크를 해 먹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사람이 뭐든 같은 일을 오랫동안 하다 보면 긴장하지 않고도 노련하게 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마음이 없이도 기도도 하고 찬송도 하고 헌금도 봉사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형식주의 신앙인이라고 합니다.
또 반대 문제도 생길 수 있습니다. 형식주의의 반대말은 가현설주의입니다. 초대교회 시대에 어떤 사람들은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는 플라톤주의 영향을 받아서 예수님이 육체로 오심을 부인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그렇게 보였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가현설을 영어로 Docetism이라고 하는데 헬라어 δοκεῖν(~처럼 보인다)에서 나온 말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가현설주의자들을 적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요이 1:7).
오늘날 가현설주의자는 없지만 하나님을 마음으로만 사랑하고 몸은 움직이지 않는 신자가 있습니다. 마음이 없이 몸만 움직이는 형식주의자도 문제이고, 몸은 꼼짝도 하지 않고 마음으로만 하나님을 섬기려는 가현설적 신자도 문제입니다. 바리새인은 형식주의와 가현설주의 양쪽 문제가 모두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마 23:3).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바리새인들도 처음부터 나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 다시는 하나님을 거역하지 말고 하나님 말씀을 철저히 지키자고 생겨난 그룹입니다. 바벨론 포로기 동안 유대인 사회는 “왜 우리가 멸망했는가?”라고 질문했고 그 답을 “율법을 지키지 않아서”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철저한 율법 준수 운동을 일으킨 사람들이 바리새파입니다. “바리새”라는 말은 “구별된 자”라는 좋은 뜻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바리새인은 율법을 지나치게 세분화하고 외적 행동에 집착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율법보다 자기들의 전통을 더 높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형식주의를 지적했습니다. 바리새인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말과 행위가 어긋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3절) 바리새인은 무엇이 잘못되었을까요?
1. 바리새인의 잘못된 점 여섯 가지
1) 모세의 자리에 앉음(2절)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면 출입문 오른쪽에 특별한 의자가 있는데 그 의자 이름이 모세의 자리입니다. 회당장은 그 자리 앉아 회당에 들어오는 사람의 인사를 받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율법에 대해 질문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자리에 앉아서 대답합니다. 모세의 자리에 앉는다는 말은 모세의 권위를 계승했다는 뜻입니다. 그는 모든 존경을 한 몸에 다 받았습니다.
2) 말만 하고 행하지 않음(3절)
이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힘들고 어려운 일은 남에게 시킨다는 뜻입니다. 둘째는 자기 말을 스스로 실천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 둘 중에 어느 쪽이 문제일까요? 네, 둘 다 문제입니다. 그런데 둘째가 더 문제죠.
3) 남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고 자기들은 옮기지 않음(4절)
바리새인들이 사람에게 지우는 가장 힘든 짐은 율법의 짐입니다. 유대인 소년이 12살이 되면 성인식을 합니다. 성인식의 핵심은 율법 두루마리가 담긴 상자를 어깨에 지워주는 것입니다. 12살에 짊어진 율법은 죽은 후에만 그 짐이 벗겨집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백성들에게는 지키지 못하도록 율법의 세부 조항까지 지우고 막상 자기들은 그 율법을 행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예수님이 4절에서 지적하셨습니다.
4) 모든 행위를 과시함 (1) 경문 띠를 넓게 함(5절)
경문 띠는 유대인이 기도할 때 머리와 팔에 감는 테필린을 말합니다. 경건해 보이려고 경문 때는 넓게 하는 것은 정말 형식주의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박사 가운을 입고 설교하는 격입니다. 그런다고 반드시 훌륭한 설교자는 아니지요.
5) 모든 행위를 과시함 (2) 옷술(찌찌트)을 길게 함
옷술이란 <민수기 15:38>에서 말하는 옷단 술을 말합니다. 히브리어로 찌찌트라고 합니다. 다윗이 사울의 옷자락을 자른 것도 이 찌찌트입니다. 혈루증 앓던 여인이 만진 예수님의 옷자락도 이 찌찌트입니다. 왜냐하면 찌찌트는 사람의 명예와 권위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찌찌트는 그 사람이 하나님 백성이라는 표시입니다. 하지만 찌찌트가 길다고 훌륭한 성도는 아닙니다. 괜한 자기 과실일 뿐입니다.
6) 윗자리, 높은 자리, 문안받는 것, 랍비 칭호 좋아함.(6-7)
이 부분도 하나씩 유대 문화를 설명할 수 있지만 너무 길어지니까 다음 기회에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하여간 이 모든 부분에서 바리새인들은 겉치레, 형식주의에 치우쳐 본질을 놓쳐버렸다는 것이 예수님의 지적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해 주시면서 8절에서 “그러나 너희는”이라고 하신 후에 신자의 올바른 삶은 제시하셨습니다.
2. 제자의 합당한 자세 네 가지
1) 랍비 칭호를 받지 말라(8절)
유대인 사회에서 랍비가 되는 것은 굉장한 명예입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교만해진다면 오히려 불행입니다.
잠언 18장 22절은 말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을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예수님은 랍비가 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랍비 칭호를 받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는 교만과 거만함을 경계하라는 말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목사와 박사가 되지 말라는 말이 아니고, 장로와 안수집사가 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2)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9절)
이 말은 친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유대인 사회에서는 스승, 원로, 선지자 등도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오늘날도 그런 일이 있습니다. 교황(敎皇)이 영어로 Pope이고 라틴어로 Papa인데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또 사람들은 어떤 영역에서 걸출한 사람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음악의 아버지: 바하, 심리학의 아버지: 프로이트, 유전학의 아버지: 멘델, 경제학의 아버지: 아담 스미스, 정치학의 아버지: 마키아벨리 등입니다.
심지어 요즘은 “아버지” 대신에 “신”이라고 합니다. 공부의 신, 축구의 신, 요리의 신, 춤의 신 등입니다. 하지만 모두 신성모독입니다. 김추성교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어떤 전도사가 친구를 향해 “야, 헬신”이라고 하길래 무슨 뜻이냐고 했더니 헬라어를 매우 잘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랍니다. 교수님은 정색하면서 경계하셨다고 합니다. 신자 여러분은 실수로라도 “**신”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3) 지도자라 칭함 거절하라
여기서 지도자는 “하나님의 뜻이 이것이다”하고 가르치는 랍비를 말합니다. 랍비 가운데 자기가 지도자이고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자가 있었으나 그가 옳다는 증거는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유대 사회의 관용어 중에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메시아가 오시면”이라고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지도자는 그리스도 뿐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히브리어로 메시아인데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죠. 기름은 물 위에 뜨기 때문에 기름 부음을 받은 왕과 대제사장은 백성의 위에 있는 사람, 지도자로 인정받았습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왕이나 대제사장이 종종 백성을 잘못 인도하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어려운 문제가 생길 때마다 “메시아가 오시면”이라고 했습니다.
수가성 여인도 그렇게 말했고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바로 내가 메시아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신약의 성도에게 최고의 권위는 예수님의 말씀, 성경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를 허무는 비평학자가 많습니다. 그들은 자기 이성을 성경 위에 올려놓습니다. 아무리 유명한 신학교 교수라도 성경의 권위를 허무는 자는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에덴동산의 뱀과 같은 자입니다.
4) 큰 자는 섬기는 자가 되라(11~12절)
이 말은 얼핏 보면 목사와 장로가 철가방 들고 배달하라는 말처럼 오해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섬긴다는 말은 반드시 청소와 배달을 뜻하지 않습니다. 나라에서도 대통령이 거리에서 청소하고 식사 배달하면 훌륭한 되는 것 아닙니다. 대통령이 청소하면 온 국민이 불편합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전했고 사람들의 섬김을 받았습니다. 사도들도 여러 곳에서 설교했고 사람들에게 대접도 받았습니다. 만일 대접하지 않는 동네는 발의 먼지를 떨고 나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사람을 섬기려고 허드렛일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높이지 말고 섬기라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이 말한 큰 자란 지금까지 말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알면 알수록 자신이 너무나 작은 자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도 바울은 자신을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라고 했고 죄인 중의 괴수라고 했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은 자기를 높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에게 자기를 낮추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맺으면서
지금까지 바리새인의 잘못된 모습 6가지와 참된 제자의 모습 4가지를 정리해 드렸습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제자로 헌신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언제나 변질합니다. 새옷도 낡고, 새집도 낡고 새차도 낡듯이 새로운 제도도 낡습니다. 바리새인들도 원래 훌륭했으나 형식주의자로 변했습니다.
우리는 개혁된 교회에 속해 있습니다. 중세교회의 반 성경적 모습을 고치려고 수많은 사람이 피 흘리며 세운 것이 장로교회입니다. 그런데 종교개혁 이후 500년간 우리는 많이 타락했습니다. 개혁된 교회는 계속해서 개혁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스스로 날마다 죽는다고 했는데 우리는 주일마다, 설교 들을 때마다라도 개혁합시다.
무엇을 개혁할까요? 마음이 사라진 채 종교 행위만 하는 형식주의를 회개합니다. 동시에 마음만 헌신하고 몸은 꼼짝도 하지 않는 가현설 신앙도 회개합니다.
교회는 세상을 향해서도 영향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세상이 교회를 죽이려 할 때는 거룩한 방파제를 이루어 막아내야 합니다. 지금 정부와 여당이 여성가족부를 성평등가족부로 개편하려고 합니다. 이럴 때 성도는 나가서 “성평등가족부 반대한다”라고 외쳐야 교회를 보호할 수 있습니다.
1~3절을 통해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 흉을 보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단속하는 중입니다. 남의 어리석음과 악함을 보면서 여러분 스스로 개혁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