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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양반전[兩班傳]
-유형: 작품
-시대: 조선
-성격: 한문 단편소설
-작가: 박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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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정조 때에 박지원(朴趾源)이 지은 한문 단편소설.
[내용]
조선 정조 때에 박지원(朴趾源)이 지은 한문 단편소설. 작자의 문집인 ≪연암집 燕巖集≫ <방경각외전 放璚閣外傳>에 실려 있다. 저작연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지은이의 초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선에 한 양반이 살고 있었다. 어질고 독서를 좋아하였다. 군수가 도임하면 반드시 그를 찾아가 예를 표하였다. 그러나 집이 가난하여 해마다 관곡을 꾸어 먹은 것이 여러 해가 되어 1,000석에 이르렀다. 관찰사가 군읍을 순행하다가 관곡을 조사해 보고 크게 노하여 그를 잡아 가두라고 명하였다. 양반의 형편을 아는 군수가 차마 가두지 못하였고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양반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갚을 길이 없었다. 그의 아내는 “당신이 평소에 글 읽기를 좋아하였으나 관곡에는 소용이 없구려! 어이구 양반! 양반(兩半 : 한냥 반, 兩班과 兩半은 동음)은 커녕 한푼어치도 안 되는구려!” 하고 푸념하였다.
그 마을의 부자가 “양반은 비록 가난하여도 늘 존귀하고 영화로우나 나는 비록 부유하여도 비천하니 참으로 욕된 것이다. 지금 양반이 가난하여 관곡을 갚을 수 없으므로 양반을 보전하기가 어렵게 되었으니 내가 사서 가지겠다.”고 사사로이 의논을 하였다. 드디어 양반을 찾아가 관곡 갚기를 청하자 양반은 기뻐서 허락하였으며, 부자는 그 자리에서 관곡을 실어 보냈다.
군수가 놀라 몸소 가서 그 양반을 위로하고 관곡 갚은 경위를 물어보려 하였다. 그러자 양반은 전립에 짧은 옷을 입고 땅에 엎드려 소인이라 자칭하며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는 것이었다.
경위를 알게 된 군수는 짐짓 부자의 행위를 야단스럽게 기리고 나서, 이런 사사로운 매매는 소송의 단서가 되므로 문권(文券 : 공적인 문서나 서류)을 만들어야 한다고 명하고, 관아로 돌아와 모든 고을 사람들을 불러놓고 문권을 만들었다. 문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건륭(乾隆) 10년 9월 일 명문(明文)은 양반을 팔아 관곡을 갚으니 그 값이 1,000곡(斛)이다. 양반을 일컫는 말은 선비·대부(大夫)·군자(君子) 등 여러 가지이다. 네 마음대로 하라. 더러운 일은 하지 말고 옛일을 본받아 뜻을 세운다. 오경(五更 : 새벽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에는 항시 일어나서 유황을 뜯어 기름불을 켜고 눈은 코끝을 보면서 발꿈치를 모아 꽁무니를 괴고 ≪동래박의 東萊博議≫를 얼음에 박밀듯이 외우고……소를 잡지 않고 노름을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온갖 행동이 양반에 어긋남이 있거든 이 문권을 가지고 관가에 나와 바로잡을 것이다.”
정선군수가 문건에 수결을 하고 좌수·별감이 증인으로 서명한 뒤에 통인이 문권 가운데에 관인을 찍었다. 호장(戶長)이 읽기를 마쳤다. 부자는 슬픈 기색으로 “양반이 신선 같다고 들었는데, 참으로 이와 같다면 한쪽은 너무 이익이고 한쪽은 너무 손해니, 이익이 될 수 있도록 고쳐달라.”고 청하였다. 그래서 다시 문권을 만들었다. 다시 만든 문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 백성을 낼 때, 그 백성이 넷이고, 사민(四民) 가운데 가장 귀한 것이 선비다. 이것을 양반이라 일컬으니 그 이익이 막대하다. 농사도 하지 말고 장사도 하지 말고 대강 문사(文史)나 섭렵하면 크게는 문과에 오르고 작아도 진사는 된다. 문과 홍패(紅牌)는 두 자(尺 척)밖에 안 되지만 백물이 갖추어져 있는 돈주머니이다……궁사(窮士)가 시골에 살아도 오히려 무단(武斷)을 할 수 있다. 이웃집 소로 먼저 밭을 갈고, 마을 일꾼을 데려다 김을 맨들 누가 감히 나를 홀만하게 여기랴. 네 코에 잿물을 붓고 머리끝을 잡아돌리고 수염을 뽑더라도 감히 원망하지 못하는 것이다.”
부자는 문권의 이 대목에 이르러는 혀를 빼물며 “그만두시오, 그만 두시오, 맹랑합니다. 장차 나를 도둑놈으로 만들 작정이오?” 하고 머리를 흔들고 가서 죽을 때까지 양반의 일을 말하지 않았다.
<양반전>에 대하여 박지원은 <방경각외전>의 자서(自序)에서 다음과 같이 그 저작 경위를 밝히고 있다 “사(士)는 천작(天爵)이니 사(士)와 심(心)이 합하면 지(志)가 된다. 그 지(志)는 어떠하여야 할 것인가? 세리(勢利)를 도모하지 않고 현달하여도 궁곤하여도 사(士)를 잃지 말아야 한다. 명절(名節)을 닦지 아니하고 단지 문벌이나 판다면 장사치와 무엇이 다르랴? 이에 <양반전>을 쓴다.” 따라서 이 작품은 천작을 팔고 산 정선 양반과 상인인 부자를 풍자한 것으로 허위와 부패를 폭로한 것이다.
<양반전>에서 처음 만든 문권에 나타나는 것은 양반의 형식주의이다. 두 번째에 만들다가 만 문권에서는 양반의 비인간적인 수탈 등이 매우 구체적이고 희화적(戱畫的)으로 서술되고 있다. 이 점에 착안하여 <양반전>은 양반의 위선적인 가면을 폭로하고 봉건계급 타파를 주장한 소설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작품을 분석하여 얻은 결론은, 치부를 한 뒤 신분 상승을 꾀하여 양반이 되고자 하는 정선의 한 부자가 마침 어느 몰락 양반이 당면한 극한 상황을 계기로 그 양반을 사 가지는 사건을 두고, 같은 양반 계층인 군수가 기지를 써서 이 매매행위를 파기시켜버린 골계소설이라는 것이다.
그 까닭은 최초에 설정하였던 관곡 보상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뒤에 군수가 새로 이 사건에 개입한 점, 문권의 내용은 양반이 상인(常人)이 되어 지켜야 할 일들이 제시된 것이 아니고 상인이 양반이 되어 지켜야 할 것만을 요구하는 일방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첫째 문권은 양반이 행하는 일들의 골계적인 표현이며, 둘째 문권은 계약 파기의 적극적인 방법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견해는 작가가 가진 철저한 계급의식을 감안할 때 상당한 설득력을 가진다.
<양반전>은 부농이 등장하여 경제력에 의한 양반신분획득의 가능성이 나타난다. 그리고 관료사회의 부정이 깊어졌으며, 몰락양반의 비참한 모습이 드러나는 등의 조선 후기의 역사적 상황이 작가의 간결한 필치로 잘 그려진 작품이다.
또한 사이사이에 끼여 있는 교묘하고 익살스러운 표현은 독자의 웃음을 유발한다. 속된 표현이라 하여 당대에 많은 비난을 받았던 이 작품은 도리어 그 표현 때문에 더 높은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고 할 것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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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전]
'양반'은 사족(士族)을 높여서 부르는 말이다. 정선 고을에 한 양반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어질면서도 글 읽기를 좋아하였다. 그래서 군수가 새로 부임할 때마다 반드시 그 집에 몸소 나아가서 경의를 표하였다.
그러나 그는 살림이 가난해서, 해마다 관가에서 환자를 타 먹었다. 그렇게 여러 해가 쌓이고 보니, 천 석이나 되었다. 관찰사가 여러 고을을 돌아다니다가 이곳에 이르러 관청 쌀의 출납을 검열하고는 매우 노하였다.
"어떤 놈의 양반이 군량을 이렇게 축냈단 말이냐?"
명령을 내려 그 양반을 가두게 하였다. 군수는 그 양반이 가난해서 갚을 길이 없는 것을 불쌍히 여겼다. 차마 가두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두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 양반은 밤낮으로 훌쩍거리며 울었지만, 아무런 대책도 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아내가 이렇게 욕하였다.
"당신이 한평생 글 읽기를 좋아했지만, 관가의 환곡을 갚는데 아무런 도움도 못 되는구려. 쯧쯧, 양반 양반 하더니 한 푼어치도 못 되는구려."
그 마을의 부자가 가족들과 서로 의논하였다.
"양반은 아무리 가난해도 언제나 높고 영광스럽건만, 우리들은 아무리 부자가 되어도 언제나 낮고 천하거든. 감히 말을 탈 수도 없고, 양반만 보면 저절로 기가 죽어서 굽실거리며 엉금엉금 기어가서 뜰 밑에서 절해야 하지. 코가 땅에 닿도록 무릎으로 기다시피 하면서, 우리네는 줄창 이렇게 창피를 당해야 하거든. 마침 저 양반이 가난해서 환자를 갚지 못해 몹시 곤란해질 모양이야. 참으로 그 양반이라는 자리도 지닐 수 없는 형편이 되었지. 내가 그것을 사서 가져야겠어."
부자는 곧 양반의 집을 찾아가서 그 환자를 대신 갚겠다고 청하였다. 양반은 크게 기뻐하면서 허락하였다. 그래서 부자가 곧 그 곡식을 관가에 보내어 갚았다. 군수는 매우 놀라면서도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직접 양반에게 찾아가 위로하면서, 환자를 갚은 사정을 물으려 하였다. 그러자 양반은 벙거지를 쓰고 베잠방이를 입은 채로 길바닥에 엎드려, '쇤네'라고 칭하면서 감히 올려다보지를 못하였다. 군수가 깜짝 놀라 내려가서 그를 부축하며,
"선생께서 어찌 이다지도 스스로를 욕되게 하시는지요."
하였다. 양반은 더욱 황송하여 어쩔 줄 몰라 하며, 머리를 조아리고 엎드렸다.
"황송하옵니다. 쇤네가 감히 일부러 이런 짓을 하는 것은 아니옵니다. 쇤네는 벌써 스스로 양반을 팔아 환자를 갚았으니, 마을의 부자가 바로 양반이옵니다. 쇤네가 어찌 다시금 뻔뻔스럽게 옛날처럼 양반 행세를 하면서 스스로 높이겠습니까?"
군수가 감탄하면서 말하였다.
"군자답구려 부자시여. 양반답구려 부자시여. 부유하면서도 아끼지 않으니 정의롭고, 남의 어려움을 돌봐 주니 어질도다. 낮은 신분을 싫어하고 높은 자리를 그리워하니 슬기롭도다. 이야말로 참된 양반이로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소송이 일어날 꼬투리가 되리다. 내가 그들과 더불어 고을 사람들을 모아 놓고 증인을 세운 뒤에, 증서를 만들어 주리다. 군수인 내 자신이 마땅히 서명해야지."
군수가 곧 동헌으로 돌아와서 온 고들 사족과 농민, 공장(工匠), 장사치까지 모두들 불러 뜰
에 모았다. 부자는 향소(鄕所)의 오른쪽에 앉히고 양반은 공형(公兄)의 아래에 세운 뒤에, 바로 증서를 제작하였다.
"건륭(乾隆) 10년 9월 몇 일에 아래와 같이 문권을 밝힌다.
양반을 팔아서 관가의 곡식을 갚은 일이 생겼는데, 그 곡식은 천 섬이나 된다. 이 양반의 이름은 여러 가지다. 글만 읽으면 '선비'라 하고, 정치에 종사하면 '대부(大夫)'라 하며, 착한 덕이 있으면 군자(君子)라고 한다. 무관의 계급은 서쪽에 벌여 있고, 문관의 차례는 동쪽에 자리 잡았으며, 이들을 통틀어 '양반'이라고 한다. 이 여러 가지 양반 가운데서 그대 마음대로 골라잡되, 오늘부터는 지금까지 하던 야비한 일들을 깨끗이 끊어 버리고, 옛사람을 본받아 뜻을 고상하게 가져야 한다.
오경(五更)이 되면 언제나 일어나서 성냥을 그어 등불을 켜고, 정신을 가다듬어 눈으로 코끝을 내려다보며, 두 발굽을 한데다가 모아 볼기를 괴고 앉아서 "동래박의"처럼 어려운 글을 얼음 위에 박 밀듯이 외워야 한다. 굶주림을 참고 추위를 견디며, 입에서 가난하다는 말을 내지 않아야 한다. 아래윗니를 맞부딪쳐 똑똑 소리를 내며, 손가락으로 뒤통수를 튕긴다. 가는 기침이 나면 가래침을 씹어 넘기고, 털 감투를 쓸 때에는 소맷자락으로 털어서 티끌 물결을 일으킨다. 세수할 때에는 주먹의 때를 비비지 말 것이며, 양치질할 때에는 지나치게 하지 말아야 한다. 긴 목소리로 '아무개야' 계집종을 부르고, 느리게 걸으면서 신뒤축을 끌어야 한다. {고문진보}나 {당시품휘} 같은 책들을 깨알처럼 가늘게 배껴 쓰되, 한 줄에 백 자씩 써야 한다. 손에 돈을 지니지 말 것이며, 쌀값을 묻지도 말아야 한다. 날씨가 더워도 버선을 벗지 말며, 밥을 먹을 때에도 맨상투 꼴로 앉지 말아야 한다. 식사하면서 국물부터 먼저 마셔 버리지 말며, 마시더라도 훌쩍거리는 소리를 내지 말아야 한다. 젓가락을 내리면서 밥상을 찧어 소리 내지 말며, 생파를 씹지 말아야 한다. 막걸리를 마신 뒤에 수염을 빨지 말며, 담배를 태울 때에도 볼이 오목 파이도록 빨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아무리 분하더라도 아내를 치지 말며, 화가 나더라도 그릇을 차지 말아야 한다. 맨주먹으로 아녀자들을 때리지 말며, 종들이 잘못하더라도 족쳐 죽이지 말아야 한다. 말이나 소를 꾸짖으면서 팔아먹은 주인을 들추지 말아야 한다. 병이 들어도 무당을 불러오지 말고, 제사하면서 종을 불러다 재(齋) 들이지 말아야 한다. 화롯가에 손을 쬐지 말며, 말할 때에 침이 튀지 말아야 한다. 소백정 노릇을 하지 말며, 돈치기 놀이도 하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여러 가지 행위 가운데 부자가 한 가지라도 어기면, 양반은 이 증서를 가지고 관청에 와서 송사하여 바로잡을 수 있음을 증명한다.
성주(城主) 정선 군수 화압(花押)
좌수(座首) 별감(別監) 증서(證署)
증서를 다 쓰고는 통인(通引)이 인(印)을 받아서 찍었다. 뚜욱뚜욱하는 그 소리는 마치 엄고(嚴鼓) 치는 소리 같았고, 그 찍어 놓은 모습은 마치 북두칠성이 세로 놓인 듯, 삼성(參星)이 가로놓인 듯 벌렸다. 호장(戶長)이 읽기를 마치자, 부자가 한참 동안이나 멍하게 있다가 말했다.
"양반이 겨우 요것뿐이란 말씀이오? 나는 '양반은 신선과 같다'고 들었지요. 정말 이것뿐이라면, 너무 억울하게 곡식만 빼앗긴 기지유. 아무쪼록 좀 더 이롭게 고쳐 주시오."
그래서 다시 증서를 만들었다.
"하늘이 백성을 낳으실 때에, 그 갈래를 넷으로 나누셨다. 이 네 갈래 백성들 가운데 가장 존귀한 이가 선비이고, 이 선비를 양반이라고 부른다. 이 세상에서 양반보다 더 큰 이문은 없다. 그들은 농사짓지도 않고, 장사하지도 않는다. 옛글이나 역사를 대략만 알면 과거를 치르는데, 크게 되면 문과(文科)요, 작게 이르더라도 진사(進士)다.
문과의 홍패(紅牌)는 두 자도 채 못 되지만, 온갖 물건이 이것으로 갖추어지니 돈 자루나 다름없다. 진사는 나이 서른에 첫 벼슬을 하더라도 오히려 이름난 음관(蔭官)이 될 수 있다.
훌륭한 남인(南人)에게 잘 보인다면, 수령 노릇을 하느라고 귓바퀴는 일산(日傘) 바람에 해쓱해지고, 배는 동헌(東軒) 사령(使令)들의 '예이'하는 소리에 살찌게 되는 법이다. 방안에서 귀고리로 기생이나 놀리고, 뜰 앞에 곡식을 쌓아 학을 기른다.
(비록 그렇지 못해서) 궁한 선비로 시골에 살더라도,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다. 이웃집 소를 몰아다가 내 밭을 먼저 갈고, 동네 농민을 잡아내어 내 밭을 김 매게 하더라도, 어느 놈이 감히 나를 괄시하랴. 네 놈의 코에 잿물을 따르고 상투를 범벅이며 수염을 뽑더라도 원망조차 못하리라."
부자가 그 증서 만들기를 중지시키고, 혀를 빼면서 말하였다.
"그만 두시오. 제발 그만 두시오. 참으로 맹랑합니다그려. 당신네들이 나를 도둑놈이 되라 하시는군유."
하고는 머리채를 흔들면서 달아났다. 그 뒤부터는 죽을 때까지 '양반'이란 소리를 입에 담지도 않았다.
<끝>
<재편집: 오솔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