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다움을 찾아서
2023. 6. 18(주일낮예배) 사도행전 22:2-11
오늘은 옛날 이야기로 설교를 시작하겠다. 옛날 큰 죄를 지은 승려가 관가로 압송되고 있었다. 무더운 여름날씨에 먼길을 걸었던 승려는 마침 주막 옆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때 승려는 포졸에게 주막에서 목이라도 축이고 가자고 제안한다. 피곤에 지친 포졸은 스님이 술 한잔 사 준다는 그 말에 주막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스님이 권하는 술을 한잔 받아먹고, 두잔 받아먹다가 그만 만취하여 잠이 들고 말았다. 그 순간 승려는 포졸의 머리를 빡빡 밀고, 자기 옷을 입히고, 우마의 감옥에 넣고 자물쇠를 잠그었다. 그리고 승려는 불이나게 도망을 가버렸다. 한참이 지난 후에 잠에서 깨어난 포졸은 자기가 우마 안에 갇혀 있고, 또 승복을 입고 있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래서 너무 괴로워 머리를 만졌는데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순간 포졸은 한숨 쉬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중은 여기에 있는데 나는 어디로 갔는가?
그런데 그 포졸의 한숨이 오늘날 성도된 저와 여러분의 한숨이 아닌가? 이 이야기는 제가 지어낸 것이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앉아서 싸우고 있다. 그래서 왜 싸우는지 가보았더니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과자를 사 주었다. 그리고 손자가 과자를 먹을 때 할아버지가 아~ 하고 입을 벌렸을 때 과자를 주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화가난 할아버지는 손자의 과자를 빼앗아 버렸다. 그랬더니 손자는 자기 과자라고 울고, 할아버지는 손주가 버릇이 없다고 화를 내고 있는 것이었다.
할아버지 다운가? 그런데 시간이 흘러 그 손자가 중학교에 갔다. 그리고 첫 번째 시험에서 60점을 받은 손자는 부모님께 혼이 났다. 그랬던 손자는 다음번 시험준비를 정말 열심히 준비하여서 90점을 받았다. 기분 좋게 성적표를 받은 손자는 집으로 달려와서 할아버지 나 90점 받았다. 하고 자랑했다. 그 말을 들은 할아버지는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서 뭔가를 찾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손자에게 와서 성적표를 보여주면서 할아버지는 중학교 다닐 때 100점 받았다고 자랑하는 것이다.
그 손자가 장성하여 결혼할 때가 되었다. 그 손자는 할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하겠는가? 할아버지는 어릴 때 손자에게 과자도 사주었고, 또 손자가 학교 다닐 때보다 훨씬 더 공부도 잘했다. 그런데 손자는 할아버지를 사랑하지도, 존경하지도 사랑하지도 않는다.
왜 존경도 하지 않고, 사랑도 하지 않는가? 사도행전 11장에는 안디옥교회의 이야기가 기록되어져 있다. 예루살렘의 박해로 많은 사람들이 흩어지게 되었는데, 어떤 사람들은 480Km나 떨어진 안디옥까지 가게 되었다. 그런데 안디옥으로 흩어진 사람들은 그곳에서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예루살렘교회는 바나바를 파송한다. 그때 바나다는 다소에 있는 바울을 데리고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는데, 그렇게 바울과 바나바를 통하여 말씀을 들은 그 사람들을 향하여 세상은 그리스도인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이 말의 의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무슨 말인가?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 그런데 그 예수의 도를 믿고 따른다는 것을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믿어 예루살렘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여기서도 예수를 믿는다는 성도의 모습을 보면서 바보같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전부였겠는가? 안디옥에 머문 성도들의 삶은 그냥 예수를 믿고, 말씀을 배우는 것에 멈추지 않았다. 예루살렘에서 도망한 이들은 경제적으로 굉장히 힘들고 궁핍한 상태에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이 먹을 것에만 급급해 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형제가 있으면 돕는 것을 꺼려하지 않았다. 아니 자기가 해야 할 많은 일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형제의 집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먼저 가서 돕는 그런 모습이 있었던 것이다.
혹시 제 코가 석자다는 말을 아는가? 내 코에서 콧물이 1M나 나와 있다. 그런데 너무 바쁘고 힘들어서 그 코를 닦을 겨를이 없다는 것이다. 그때 제 코가 석자다는 말을 쓴다. 그런데 안디옥으로 도망한 성도들의 삶이 바로 제 코가 석자였다. 보통 사람들은 이렇게 제 코가 석자이면 다른 사람들도 이해할 것이야! 하면서 자기 문제에만 몰두하는 것이다. 그런데 안디옥교회 성도들은 자기 코가 석자임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돌아보기를 먼저 한 것이다. 이러한 안디옥교회 성도들을 세상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이 안디옥교회 성도들에게 한 말이 그리스도인이라는 표현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참된 성도다운 모습이 아니겠는가? 어느 목사님 위임식에서 저는 아주 인상적인 권면을 들었다. 목사님은 권면 시간에 저 사람이 가씨 성을 가진 사람입니까?를 4글자로 바꾸어 보라고 하였다. 그때 사람들이 가가가가이라고 말하자, 목사님은 목사가 목사다우려면 3개의 가를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선배 목사가 위임하는 후배목사에게 꼭 기억하라는 3개의 가가 무엇이겠는가? 제일 먼저 가식을 버리라고 하였다. 목사가 사람을 대할 때 진실된 모습이 아니라, 사랑하는 척, 열심히 하는 척, 능력이 있는 척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가청(可聽)하라(들으라)는 것이다. 목회는 제일 먼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만약 목회자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면 목회를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목회는 성도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그래서 성도가 얼마나 아프고, 힘든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목회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가능을 말하라는 것이다. 목사가 병에 걸려 걱정하는 성도를 만나서 이 병원 의사가 경력이 없고, 또 얼마 전에 집사님과 똑같은 병으로 입원한 사람이 죽었다고 말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집사님을 사랑하고 있으므로, 우리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기다리자 는 말을 해야 하는 것이다. 목사님은 후배 목사의 위임식에 이렇게 3가지의 가를 꼭 기억하라는 말로 권면을 하였다.
멋있지 않는가? 그런데 목사님이 이렇게 멋진 말로 후배 목사를 격려할 수 있었던 것은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목사님은 자신이 목회를 하면서 더 목사답기 위하여 많이 고민하고 질문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답을 가지고 권면한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성도다운 삶에 대하여 고민하고 있는가? 이제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란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자기를 박해하는 유대인들을 향하여서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는가?에 대한 간증이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예수 믿는 자를 잡아 옥에 가두는 일에 열심을 다하였다. 그랬던 바울은 대제사장의 허락을 얻어 다메섹에 사는 그리스도인을 잡기 위하여 살기가 등등하여 그 길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바울은 다메섹에 거의 도착했을 때 예수님을 만난다. 갑자기 하늘에서 큰 빛이 비쳐서 바울은 땅에 엎드렸다. 그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하는 음성을 들은 바울은 주님 누구시니이까?(8절) 하고 묻는 것이다. 그 바울의 질문에 예수님은 내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알려주었다. 그때 바울은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10절)고 묻는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의 모습이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바울은 지금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 분은 누구인가? 질문한다. 그래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바울은 그러면 이제 내가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바울은 예수님의 임재 앞에서 고민하고, 또 질문하므로 자기다운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도행전 7장을 보면 바울은 이와 대조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스데반이 공회에 잡혀갈 때 그의 얼굴은 천사와 같았다. 그 스데반이 공회 앞에서 설교를 했을 때 사람들은 마음에 찔려 스데반을 향하여 이를 간다(행 7:54). 그리고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이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행 7:55)고 말했을 때 그들은 큰 소리를 지르고, 귀를 막고 일제히 스데반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스데반을 성 밖으로 끌고가서 돌을 던졌을 때 스데반은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60) 하고 운명하였다.
이것이 스데반의 순교의 모습이다. 스데반의 순교의 모습은 일반적이지 않았다. 공회 앞에 억울하게 잡혀 왔지만, 그의 얼굴은 불평이 아니라 천사와 같았다. 그리고 설교할 때 사람들의 얼굴은 점점 더 어두워지고 분노하고 있다는 것을 보았지만, 스데반은 그 앞에서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본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돌에 맞아 고통 속에 죽어가면서도 용서하는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 바울은 왜? 어떻게? 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 그런데 바울은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히 여겼다(행8:1). 여기서 마땅히 여겼다는 말은 모든 사람들이 다 좋게 여긴 것처럼 바울도 그렇게 여겼다는 말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다 좋게 여기므로 나도 좋게 여긴다는 생각을 가진 그 바울의 삶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바울은 질문하기 시작한다. 이 놀라운 광채로 임하시는 분은 누구인가? 하고 물었던 바울은 주님을 찾고, 또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물으면서 그 길을 걸어가게 된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을 찾고, 또 바른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질문하며 살았던 바울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 6:17)고 말하는 것이다. 마땅히 여기지 않고 고민하고, 묻는 바울의 삶에는 예수님이 함께한 삶의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나다움을 위하여 고민하고, 또 질문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한 선교사가 아프리카에 갔다. 그리고 사역을 하던 선교사는 원주민들이 하루에 세 번씩 물길러 다니는 것을 보았다. 사람들은 물을 길러오기 위하여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또 많이 힘들어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선교사님은 추장에게 수도를 설치하자고 제안한다. 그러자 추장은 마을 주민들과 의논해 보겠다고 한 후 다시 선교사님을 찾아왔다. 그리고 추장은 수도를 설치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그 말에 갑갑해진 선교사님은 왜 수도를 설치하지 않기로 하였는지를 물었다. 그때 추장은 지금 물을 길러오는 일이 너무 바쁘고 힘들어서 수도를 설치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면서도 자신의 삶을 바꾸고자 하는 의지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저와 여러분의 삶이 그렇지 않는가? 예수를 믿어도 전혀 삶에 변화가 없다면 이제 저와 여러분은 고민해야 한다. 주여 뉘시오니이까? 내가 무엇을 행하리이까? 이 질문을 통하여 우리는 나다움을 찾아가야 한다. 그렇게 나다움을 찾아갈 때 우리의 삶에는 그리스도의 흔적이 남게 될 것이고, 열매로 알리라(마 7:20)는 주님의 음성에 합당한 열매맺는 자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나다움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며, 우리 주님 앞에 열매가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