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서지 맙시다
2024. 6. 30(주일오전예배) 갈라디아서 2:15-21
혹시 비행기를 타 보았는가? 전 세계 인구 중에 비행기를 타본 사람은 5%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여러분 중에 비행기를 타 본 사람은 세계 5%만이 경험한 것을 경험해 본 것이다.
그러면 비행기가 이륙할 때 얼마의 기름을 사용하는지 아는가? 한 기장의 말에 의하면 비행기가 활주로를 벗어나 50ft까지 이르는데 3분 걸린다. 그리고 10분 정도가 되면 저고도인 1만ft 상공에 도달한다. 그때 안전벨트를 풀고 화장실을 다녀와도 된다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그리고 순항고도인 3만 ft에 도달하려면 30분 정도가 걸린다고 한다. 이렇게 순항고도에 이르기까지를 이륙이라고 한다.
비행기가 이렇게 순항고도에 이르기까지 얼마의 기름이 필요하겠는가? 인천공항에서 미국 LA까지 가는데 총 11시간을 비행할 때 항공기는 860드럼의 기름을 사용한다. 그런데 비행기가 이륙하는 최초 30분에 100드럼 이상을 사용한다. 비행기가 지면을 벗어나 순항고도에 이르기까지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땅 종되었던 집에서 구원하여 주었다. 그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모세를 통하여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내린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물론이거니와 애굽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크고 위대하심을 알게 하여 주었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였을 때 애굽의 바로는 600승거와 모든 병거를 이끌고 이스라엘 백성을 잡으러 온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이 광야로 이끌어 내었느냐(출 14;11),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였느냐(출 14:12)고 불평한다. 홍해 앞에 이스라엘 백성은 절망과 고통에 빠진 것이다. 그때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시고 이스라엘을 건너게 하였다. 아니 하나님은 그 홍해를 건너는 애굽의 수레바퀴를 벗기시고 꼼짝못하게 하신 후에 홍해를 덮으셔서 그들을 심판하였다. 그래서 여호와가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시고, 이스라엘을 절망 가운데서 구원하여 주었다.
무슨 말인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하여 엄청나게 많은 역사를 나타내 보이신 것이다. 그래서 능력의 하나님을 알아서 광야 길을 능히 걸어갈 수 있도록 해 주신 것이다.
그런데 민수기 14장을 보면 충격적인 사건이 기록된다. 이스라엘은 가데스 바네아에서 12명의 정탐군을 보내어 가나안 땅을 정탐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10명의 정탐군이 우리가 보기에도 메뚜기와 같다는 보고를 한다. 그 말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밤새 울면서 불평하고 원망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충격적인 말을 한다.
(민 14:3-4)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4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보았지만, 광야에서 늘 불평과 원망을 일삼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급기야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말한다.
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말하고 있는가? 2010년 MBC에 일요일 일요일 밤에 오늘을 즐겨라는 예능 프로그램이 있었다. 그 프로그램에 신현림 시인과 함께 MC들이 시와 친해지도록 위하여 창작여행을 한 적이 있다. 그때 신현림 시인이 초등학교 2학년 학생이 지은 아빠는 왜? 라는 재미난 시를 소개해 주었다. 먼저 그 시를 들어보기 바란다.
엄마가 있어 좋다. 나를 이뻐해 주어서
냉장고가 있어서 좋다. 나에게 먹을 것을 주어서
강아지가 있어서 좋다. 나랑 놀아 주어서
아빠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
이 시가 방송된 이후 많은 아빠들이 한숨을 쉬었다고 한다. 그리고 아빠들은 이것이 한국 가정에서 아빠들의 실상이다고 한탄하고, 엄마에게 밀리는 것은 당연하지만, 강아지와 냉장고에게까지 밀리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등의 반응이 있었다. 그러한 반응 중에 한 아버지는 이런 댓글을 달았다.
아빠는 엄마를 이뻐하고, 냉장고에 먹을 것을 채워넣고, 강아지 사료주려고 존재한단다.
초등학교 2학년 학생은 모든 존재이유는 자기 필요에 있었다. 그래서 자기에게 필요하면 존재이유가 있고, 자기에게 필요하지 않으면 존재 이유가 없는 것으로 시를 쓰고 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 필요를 존재케 하기 위하여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가 아닌가? 이스라엘 백성이 아마 시를 썼다면 이렇게 썼을 것이다.
만나가 있어서 좋다. 나를 배부르게 하여서
구름기둥이 좋다. 나를 시원하게 해 주어서
그런데 하나님은 왜 있는지 모르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필요를 채우시는 분이었는데, 이스라엘은 그것을 몰랐기에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 아닌가? 이제 오늘 본문인 갈라디아서를 보시기 바란다. 당시 갈라디아교회는 유대율법주의자들에 의하여 신앙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한 교회에 바울은 ①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② 종의 멍에를 매지 말고, 자유로 섬기라, ③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율법으로 돌아가지 말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져 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바울은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게 율법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하는가? 먼저 오늘 본문 갈라디아서 2장 18절을 읽기 바란다.
(갈 2: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여기서 헐다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 지나가는 사람들이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짓는 자여(마 27:40) 라고 조롱할 때 사용한 단어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을 만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성전을 청결케 하신 예수님은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는 제사장의 말에 그 성전을 헐면 사흘만에 다시 세우겠다(요 2:19) 말씀하였다. 이때 예수님이 성전을 헐면 3일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말씀하신 의미는 지금까지는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났지만, 이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유대인들은 이 성전은 46년동안 지었거늘 네가 3일동안 일으키겠느냐? 고 묻는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성전과 십자가 중 무엇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가? 지난 주 오전예배 시간에 하나님께서 제 마음에 주신 것이 우리 예배의 시작이 은혜가 되게 하기를 구하라는 것이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내가 이번 한 주간은 그래도 착하고 바르게 살았어! 하는 내 의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불러 주었습니다 하는 그 은혜가 예배의 출발이 되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출발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저에게는 아주 특이한 친구가 한 명 있다. 그 친구는 가끔씩 자기는 아내에게 늘 미안하다는 말을 한다. 명미가 내 만나서 고생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러면 저는 그 친구에게 이렇게 말한다. 소영이는 내 만난 것을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은 소영이에게 놀라운 복을 주었다 라는 말을 한다.
그런데 객관적으로 볼 때 제 친구와 저 중에 누가 아내에게 더 잘하겠는가? 제가 강도사 때 그 친구는 군면제를 받아서 목사가 되었다. 그리고 큰교회 협동목사를 하면서 성지공고 교목이 되어서 저보다 훨씬 많은 사례를 받았다. 그런데 그 친구는 집에 가면 걸레들고 방 닦고, 또 우리가 먹는 라면을 끓이기 위하여 주방에 들어가는 것을 조금도 어색해하지 않는다. 그런데 저는 방을 한번 닦으면 일 년을 우려 먹는다.
왜 이런 차이가 나겠는가? 예배도 마찬가지이다.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이 나의 죄를 용서하여 주었다는 그 은혜가 예배의 시작이 되면 그 예배는 기쁨과 감격이 넘치게 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내가 할례를 받았고, 또 살찐 송아지를 잡았다는 내 의를 드러내기 시작하면 참된 예배를 드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무엇을 근거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바울이 갈라디아교회에 편지를 쓸 때는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있었다. 그래서 성전에는 제사가 드려지고 있었고, 또 예루살렘에서 제사를 드리지 못하는 흩어진 유대인들은 회당에서 제사를 드리고 있었다. 이렇게 제사를 드리고 있었던 유대인들을 보면서 예수님을 믿는 성도 중에는 나도 저렇게 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이다. 아니 어떤 유대인들은 자신과 같이 할례를 행하고, 또 율법을 지켜 제사를 드릴 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가르쳤기 때문에 그들은 다시 성전으로 돌아가려 한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성도들에게 바울은 만일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나를 범법자로 만드는 것이다(갈 2:18)고 말씀한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호수아 6장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여호수아 6장은 여호수아가 여리고성 전투를 한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하루에 한바퀴씩 성읍을 돌고, 마지막 일곱째 날에는 일곱바퀴를 돌았다. 그리고 양각나팔을 불며 백성들이 환호를 지를 때 여리고 성이 무너진 것이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을 점령한다. 그런데 전쟁에서 승리한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을 재건하는 자는 기초를 쌓을 때 장자를 잃을 것이고, 문을 세울 때 막내아들을 잃을 것이다(수 6:26)고 맹세한다.
그런데 열왕기상 16장을 보면 아합왕 때에 히엘이라는 사람이 여리고 성을 재건한다. 그때 히엘은 기초를 쌓을 때 맏아들 아비람을 잃고, 성문을 세울 때 막내 아들 스굽을 잃게 된다. 건축자 히엘은 여리고 성을 재건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어기고 성을 재건하였기 때문에 말씀대로 장자와 막내 아들을 잃어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