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박형민의 따뜻한 세상이야기
 
 
 
카페 게시글
사람 사는 세상 스크랩 나의 아버지를 보내며!~ 스티브 모리스 이야기
박형민 추천 0 조회 229 11.05.02 14:2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2010 1월 - 내 삶의 두번째 이야기>                                          


스티브 모리슨 이야기 - 나의 아버지를 보내며!~


지난해 12월 12일!

대한사회복지회에서 광주,전남 입양가족 송년의 밤 행사가 있었습니다.

그날은 특별히 한국입양홍보회(영어약칭 MPAK엠펙) 최석춘이사의 참석이 약속된 터라 설레는 마음으로 행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다섯 식구 중 세 명이 신종플루에 감염된 탓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광주지회장을 맡고 있는 엄진경님께 꼭 가겠노라고 찰떡같은 약속을 했는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최석춘이사의 숭고한 삶과 소중한 가치에 관해 좋은 이야기를 듣고 싶었습니다.

재 작년 입양을 결심하고 이화영아원을 찾았을 때 격월간지 ‘마당넓은집’을 통해 만난 최석춘이사의 삶은 많은 걱정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던 우리 가족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되었습니다. 

최석춘 이사는 미 항공우주국 수석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부모의 죽음과 친동생과의 생이별 등으로 상처 입은 어린 시절 보낸 후 강원도 묵호의 보육원에서 미국 유타 주 솔트레이크시티에 사는 모리슨 가정에 입양된 것은 14세 때입니다.

그는 “내게 입양은 새로운 출발점이었고 가족의 사랑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세계 최대 고아수출국이라는 오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에 가정이 필요한 많은 아동들이 가정을 가질 수 있도록 간절히 원하던 최석춘이사는 편견 없는

세상에서 아이들이 행복하게 성장하기를 소망하던 국내 입양부모들과의 만남은 1999년 한국입양홍보회를 발족하였습니다.

최이사는 부인 이경미씨와 사이에 세 딸과 10년전 한국에서 입양한 아들 1명의 자녀를 두고 있습니다.


아래 글은 2006년 3월 29일 콜로라도 주에서 거행된 최석춘이사의 양아버지 마가렛 모리슨의 장례식에서 아버지께 드리는 조사의 번역본입니다.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존 모리슨은 그의 아들을 통해 제게 아버지의 숭고한 삶에 관해 가르침과 가슴 뭉클한 감동을 주었습니다.

 

                                                                                                      최석춘이사

                                                                                               2001년 부모님과 함께

                                                                                     2006년 아버지장례식장에서 조사낭독

 


<나의 아버지를 보내며>

 -------------------------------------------------------------

어머니! 가족 여러분! 친구분들!

그리고 빌리지 세븐 교회 성도님들께, 제 이름은 스티브 모리슨입니다.

저는 쟌 과 마가렛 모리슨 의 장남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품 안에 안기신 한 영혼이 천국에서의 새로이 시작되는 삶을 즐거워하고,

그분의 세상에서의 삶에 작별을 고하며 또한 그분의 삶을 기리기 위해서 함께 모인 이 자리에서 이 분이 얼마나 훌륭하셨던 분이였는지를 충분히 이해하고 알기 위해서는 아버지께서 저와 제 가족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셨던 분이셨는지를 여러분들과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리슨이라는 이름에 맞지 않는 얼굴을 가진 저이지만 그 동안 오랜 세월 그리 해왔던 것처럼 오늘 이 시간 저는 여러분께 얼마나 제가 모리슨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자랑스럽고 기쁘게 생각하는지를 그리고 쟌과 마가렛 모리슨의 아들로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특권으로 생각하고 살아왔는지를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태어났습니다.

6살의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잃고 고아원에서 자랐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나중에 나의 형제가 될 제임스를 만나게 되었죠.

어머니와 아버지는 롼다, 쉐러, 그리고 마크 이렇게 세 명의 남매를 두었습니다.

1968년도에는 제임스를 입양하셨고 그 후 얼마 되지 않아서 부모님께서는 한국에서 고아 한 명을 더 입양 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인도의 손길을 느끼셨습니다.


홀트에서 격월로 발간되던 소식지에서 가정을 필요로 하고 있는 많은 아이들의 이름과 사진이 함께 올려진 것을 보게 되셨습니다.

아버지는 사진과 설명을 읽어 내려 가시다가 보이스카웃 복을 입고 있는 13세 남자아이의 사진에 눈이 멈추셨다 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사진 속의 제 모습을 보는 순간 “이 아이는 내 아들이야” 라고 알 수 있었노라고 후에 저에게 자주 말씀 해주시곤 하셨지요.

어머니께서는 곧 14살이 되가는 이 문제투성이 일수도 있는 10대소년을 입양한다는 사실에 별로 달가워하지 않으셨답니다.

그래서 아홉 살쯤 되어보이는다른 남자아이를 가리켜 보았지만 “난 벌써 결정 했다오” 라고 하시면서 아버지께서는 마음을 움직이시지 않으셨지요.

어머니께서는 또 다른 더 어린 남자아이를 가리키시며 “이 아이는 어때요?” 라고 물으셨지만 아버진 여전히 “난 이미 결정을 내렸소. 이 아이가 바로 내 아들이오” 라고 대답하셨다 합니다.

 이 모든 일로 인해 더욱 마음이 불안해지신 어머니께서는 문제해결을 보기를 원하시는 마음으로 제임스를 부르셨습니다.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나의 사진을 본 제임스는 웃으면서 “착한 애 예요. 데려 오세요.” 라고 말했고, 그날 이렇게 해서 저는 선택되었던 것입니다.


1970년 5월 28일에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아버지를 처음 뵌 날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집은 솔트레이크 시티였기 때문에 비행기를 갈아타야 했었죠.

 한국을 떠날 때 저는 새 옷과 새 신 차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입국절차를 마치고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저는 모든 옷을 갈아입어야 했습니다.

 그때 모리슨집에서 온 옷 꾸러미가 저를 기다리고 있었지요.

그 안에 들어있던 구멍 난 청바지와 신발을 보고 저는 얼마나 놀랬는지 모릅니다.

 솔트레이크 시티에 도착해서 아버지를 따라 아버지가 몰고 오신 차를 보았을 때 저는 또 한번 무척

놀랐습니다.

 14년 된 1956년도 쉐비바머이었던 그 차는 곁은 녹이 쓸어있었고 차 안의 쿠숀은 찢어져 있었습니다.

옆 에 다른 차들은 반짝거리는 새 차들이었는데 말이죠.

 그걸 보고서 저는 미국에 살러 왔다는 것이 마음에 불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곧 저는 이건 부모님들이 가난 하셔서가 아니라 매우 검소하신 생활습관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닿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제가 처음 접했던 아버지의 모습 이였지요.

도착한 그날 어머니께서 저를 위해 만들어주셨던 순 어머니식 김치의 독특한 맛을 또한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저는 이것을 나중에 아이랜드 김치라고 불렀죠).

 그날 밤 아버지께서는 제가 잠자리에 드는 것을 봐 주러 들어오셔서 부드럽게 제 이마에 입을 맞춰주셨습니다.

 36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아버지의 따듯함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날 드디어 내게도 아버지가 생겼다는 사실 또 내게도 가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중학교에 들어간 저는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새로운 목표와 열정이 생겼습니다.

고아들이 사회적으로 무시를 당하는 신분 이였던 한국에 있었을 때는 저는 늘 열등하게만 취급되었었고 자연히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고아라는 이유로 항상 듣는 말이 부정적이고 낙담적인 것 들 이였기에 희망이 없어진 상태에서 당연히 저는 학교에서 공부를 잘 하지 못했었지요.

 미국에 와서, 새로운 가족과 함께 하면서 또한 새로 갖게 된 희망과 미래를 향한 꿈으로 인해 상황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학교에서 공부를 열심히 했고 좋은 성적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저는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아침마다 아버지께서는 출근하시긴 전에. “좋은 하루 보내, 여보” 라고 하시면서 우리 형제들이 보는 앞에서 어머님을 안고 키스해 주시곤 하셨습니다.

 그리고 일 끝나시고 집에 돌아오시면 또 어머니를 안아주시고 키쓰해 주셨죠.

 한국에서는 이러한 사랑표현을 본적이 없었던 저로 써는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아서 어색하게만 느껴졌지만 서서히 나중에는 저도 이런 모습이 좋아졌습니다.

 어머니께 사랑스럽게 대해주셨던 아버지의 모습은 제 마음에 특별하게 남아서 한 남자가 아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이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제게 영어를 가르쳐 주셨고 14살이라는 나이 였음에도 불구하고 세싸미 스트? (Sesame Street) 과 미스터 로저의 이웃 (Mr. Roger’s Good Neighborhood) 이라는 어린이 프로그램을 보게 하셨죠.

 어니와 버트 (Ernie &Bert), 빅버드 (Big Bird), 그리고 쿠키 먼스터 (Cookie Monster) 등이 생각 나는군요.

 그리고 또 저는 거꾸로 숫자를 세는 법도 배웠답니다.

 모리슨 집에서 저는 정말로 행복했습니다.

가족이 모여 함께 식사하는 저녁 시간이 되면 우리는 돌아가면서 식사기도를 하곤 했지요.

 우리 오 남매는 모두 우애하고 사이가 좋았습니다.

 몇 시간씩이고 카드놀이와 보드게임으로 즐거웠던 좋은 기억이 저에게는 남아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집안에 모든 필요한 결정을 잘 내려주셨고 짜임새 있는 살림으로 가정을 너무나 잘 지켜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독서를 매우 즐기셨던 분이셨기에 늘 손에는 신문이나 책이 들려 있었지요.

그때 당시 저는 이것이야 말로 행복한 가정이구나 라고 생각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 전까지는 가정생활이 어떤 것인지를 전혀 몰랐었죠.

 그때부터 저는 미래를 향한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언젠가 나도 커서 아버지처럼 멋진 신사가 되어 어머니처럼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 결혼해서 자녀를 갖고 가정을 이뤄야지.

아버지가 어머니께 하시는 것처럼 나도 내 부인에게 왕비를 위하듯 최선의 사랑과 보살핌을 다해서 잘 할거야.

 이 외에도 또 다른 꿈을 갖게 되었습니다.

 입양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알게 되었고 가족을 갖게 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깨닫게 되었기에 그때 저는 마음먹었죠.

 커서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게 되면 나도 가정이 필요한 아이를 입양 할 것이라고. 2000년 12월에 저와 제 아내는 아들 조셉이를 한국에서 입양했습니다.

 조셉이 도착한날 밤, 잠드는 것을 봐주러 방에 들어가서 아들과 함께 기도했습니다.

 잠 들기 전에 몸을 구부려 조셉의 이마에 입을 맞춰주었습니다.

30년 전 아버지께서 저에게 해 주셨던 것과 꼭 같이 말이죠.

 그제서야 저는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끼치신 영향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오늘날 저는 십대 때 가졌던 꿈의 현실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항공우주 엔지니어로 좋은 직장을 가졌고 우리 가족은 그리스도안에서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신앙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아내가 곁에 있고, 함께 귀한 네 자녀를 두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시작이 참 어려웠던 저에게 이러한 꿈을 이룰 수 있도록 격려해주시고 만들어 주신 분은 바로 아버지이셨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께 비교해볼 때 저는 너무나 훌륭하셨던 한 분을 그저 본받기 위해 따랐을 뿐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아버지는 또한 MPAK (엠펙) 이라는 비영리 단체를 제가 시작할 수 있도록 인스피레이션 (Inspiration) 이 되어주신 분입니다.

MPAK 은 한국의 입양문화에 긍정적인 변화를 주기 위하여 세워진 단체입니다.

이 기관을 통하여 많은 아이들이 한국에서 가정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1979년에 대학을 마치고 저는 직장생활을 시작하기 전 한 달 이라는 쉬는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보냈던 그 한 달은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했던 시간 이였지요.

 아버지는 그때 심장 바이페스 수술을 받으시고 요양 중이셨습니다.

여러 가지 토픽으로 대화 하던 중 아버지께서는 저를 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스티브야 부모와 가정이 없었던 너를 우리가 입양 했을 때는 네가 우리의 도움을 필요했기 때문 이였지. 하지만 여러 해가 지난 지금 생각해 보니 우리가 오히려 너를 통해서 훨씬 더 많은 축복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구나.”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저는 그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하신 말씀에 뭐라고 대답으로 입밖에 냈었는지 조차의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때 나를 향하신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의 깊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 대화가 있은 후 2주가 지나서 아버지와 저는 인생, 하나님, 결혼, 그리고 저의 미래에 관하여 마음을 터 놓고 솔직한 대담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날은 나의 인생을 크게 바꿔놓았던 날이 되었습니다.

대화를 나누면서 아버지께서는 저를 똑바로 쳐다보시면서 제가 살아있는 동안 결코 잊을 수 없을 너무나 힘있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스티브야. 난 그 동안 내 인생에 중요한 결정을 내려왔다.

 그 중 최선의 결정은 하나님을 믿기로 한 것. 그리고 두 번째로 중요했던 결정은 너의 어머니와 결혼 한 것. 그리고 세 번째는 너를 우리 가족으로 삼게 된 것 이란다.

 이 말씀을 들은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버지의 그 말씀에 그 어떤 것으로도 대답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저 저를 향하여 쏟아 부어주시는 아버지의 그 사랑을 흡수하듯 받아들였을 뿐. 얼마나 우리 다섯 남매 모두를 똑 같이 사랑하고 계시는지를 저는 잘 알고 있었지만 아버지께서는 그 때 저에게 얼마나 저를 사랑하고 계시는가를 말씀해주고 게셨던 것이지요.

 그날부터 아버지를 향한 저의 사랑과 존경은 새로운 단계로 올라섰습니다.

 그때 해주신 아버지의 그 말씀이 저의 인생을 바꿔 놓았던 거지요.

그 말씀들이 이제는 제 자신이 할 수 있는 저의 말이 되었고 바로 저의 비전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삶의 가장 우선의 자리에 모시고 아름다운 나의 아내를 사랑하고 지키며 자녀들을 귀히 여기고 보호하는 것 이 세가지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늘 심각하고 진지하기만 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유머감각이 넘치는 분이기도 하셨죠. 결혼 전 어머니의 마음을 사기 위해 귀에 달콤한 말을 속삭이시던 때가 있었노라고 자랑을 하시기도 하셨고 자주 “나는 내 아일랜드의 놀라운 매력을 발휘 했지!”

 (I turned on my Irish Charm!) 하고 자신 있게 얘기 하시기도 하셨죠.

 아버지와 함께 저는 두 아일랜드 남자인양 흉내를 내면서 서로 장난기 있게 바라보며 “쇼렌 비고라~!” 같은 아직까지도 무슨 뜻 인지는 모를 그런 소리들을 주고받곤 했지요.

 마시는 물이나 커피 위에 뜨는 것들을 가리켜 ‘플로키’ 라고 부르며 영어에도 없는 그 단어를 저에게 가르쳐 주셨던 아버지. ‘나의 아일랜드 들장미, 가장 아름답게 피는 꽃’ 이라는 노래를 부르기 좋아하셨던 아버지는 또한 너무나 근사한 수준급 테너목소리의 소유자 이셨습니다.

 아버지께로부터 배운 수법(묘기, 장난) 도 몇 가지가 있네요.

아버지께서는 어머니를 만나게 된 얘기를 해주곤 하셨는데, 어머니를 세 번째 만나고 난 다음에 장래신부와 함께 집 앞 현관에 앉아서 이렇게 말씀 하셨다고 합니다.

 “우리의 미래를 예상해 보겠는데, 언젠가 나는 당신과 결혼하여 하나님 안에서 행복한 가정을 이룰 것이요” 후 에 제가 너무나 좋아했던 여인을 만나 데이트를 하던 중 저도 그녀를 향해 그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미래를 예상해 보겠노라고. 언젠가 나는 당신과 결혼하여 우리는 주님 안에서 아름다운 가정을 이룰게 될 것 이요 라고. 네! 그 방법이 확실한 효과를 보았습니다.

여기 그 수법에 넘어간 저의 아름다운 아내가 지금 제 옆에 앉아있습니다.


3주전에 어머니와 함께 저는 아버지가 계시던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아버지의 인생이 마무리 되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지요.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내내 밝으신 모습이셨습니다.

기분이 확실히 좋으셨던 아버지는 어머니를 위해 노래를 부르시기 시작하셨죠.

 “Every day with Margaret is sweeter than the day before. Every day with Margaret, I love her more and more”

아버지께서 부르시는 이 노래를 들으면서 목이 메어오고 눈에는 눈물이 맺혔습니다.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분이 나의 아버지. 이런 분의 아들인 나는 얼마나 축복 받은 인생인가?”

 어머니를 향한 이 아버지의 사랑은 어쩜 이렇게 숭고할 수가 있을까!”

이 노래가 어디서 나온 노래인지를 잘 알고 있었던 나는 아버지께 여쭤봤습니다.

 “있잖아요, 그거, 그 노래는 찬송가 아니던가요, 아버지? 주님과 함께하는 매일….이죠!”

아버진 그러는 저에게 귓속말로 “얘야, 쉬~! 아무한테 말하기 없기다.” 라고 하셨고 그 말씀에 우리 세 사람은 큰 소리로 웃고 말았습니다.

 LA 집으로 돌아 오기 전에 저는 아버지를 위해서 기도해 드리고 떠나왔습니다.


 끝으로 어머님께 특별한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54년 동안 어머니께서는 아버지의 신실한 돕는 배필로 항상 곁에 계셨죠.

 늘 아버지를 존경하고 높여주셨고 남편의 지도력에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며 살아오셨죠.

우리 다섯 남매를 최선을 다해 사랑해주시고 키워주신 어머니. 어머니께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와의 올바른 관계가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늘 강조해 주셨고요.

오랜 세월 아름답고 곱게 이렇게 아버지 곁에 끝까지 함께 해 주셨네요.

 어머니. 하지만 아직도 하실 일이 많이 남아 있답니다.

우리 모두는 어머니를 필요로 해요.

특별히 어머니의 손자손녀들이요.

 아버지께서 남기시고 가신 빈자리를 채워드리기 위해 우리모두 최선을 다 할게요.

 그리고 우리는 모두 살아있는 동안 아버지의 사랑의 기억들을 소중히 간직하겠어요.


 롼다, 쉐러 , 마크, 제임스에게 우리 앞으로 최선을 다해 아버지처럼 살도록 힘쓰자.

 아버지가 남기고 가셨고 우리가 물려받은 이 귀한 유산을 우리 자녀들에게 또 그 다음 세대에 대대로 물려 주기 위해 노력하자.

 롼다, 쉐러 그리고 마크야. 너희들의 아버지를 나와 제임스와 함께 해준 것을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를 너희들이 알아 주었으면 좋겠구나.

 우리 둘에게 최고로 좋은 형제자매가 되어준 것 정말로 고맙구나.

그리고 아버지…

저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아버지. 아버지의 삶은 저희 모두가 본받고 따라야 할 모본 이였습니다

 아버지가 남겨 주신 것 들이 우리 모두에게 감동의 지침으로 남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품 안에 이순간 안기신 것을 인해 우리모두 기뻐합니다. 편히 쉬세요,

 아버지. 많이 그리울 거예요.

 그리고 늘, 언제나 아버지를 생각 할께요.


 아버지를 사랑하는 아들 스티브 모리슨

2006년 3월 29일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