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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려고 하는데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화면을 보면서 쓰는 게 아니라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런 건 시각장애 됨의 감사한 점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제가 이토록 눈물이 많아진 이유는 맘 속 깊은 곳에서부터 진심으로 존경하는 제 스승님께 닥친 끔찍한 시련 때문입니다. 실은 스승이라는 존재에 대하여 요즘 세상에 회의를 느끼는 편입니다. 제가 교만한 탓이겠지요. 저 역시 교사라는 길을 걸어가면서 스승이라 불릴 만한 자격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몸소 느끼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저절로 고개를 숙이게 하는 진정한 스승님이 제게도 한 분 계셨더랬지요. 바로 서울맹학교 시절 저희 밴드부를 지도해주신 최영식 선생님이십니다. 그 선생님께서 얼마 전 그만 쓰러지시고 말았습니다. 좌반신 마비라고 합니다. 79세의 연세에도 악기를 배우고자 하는 시각장애인이 있는 곳이라면 전국 어디라도 마다하지 않고 쫓아다니실 만큼 정정하시던 분인데 이제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실 수 있을지 없을지도 장담하지 못하는 상황이랍니다. 그분 밑에서 악기를 배운 시각장애인이 이제는 아이를 낳아 그 자식들이 그 선생님께 악기를 배우고 있습니다. 이번에 쓰러지신 것도 서울맹학교 100주년 기념행사 건으로 회의하던 중이셨답니다. 최영식 선생님이 안 계신 서울맹학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데 이젠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젠 악기 연주하는 시각장애인을 볼 때마다 그 선생님이 생각날 텐데 어떻게 그 연주를 즐거운 마음으로 들을 수 있을까요?
저는 원래 음악과는 거리가 아주 먼 사람이었습니다. 아주 어릴 적부터 부모님이 피아노니 바이올린이니 열심히 배우도록 학원을 끊어주셨지만, 실력은 항상 제자리걸음이었지요. 초등학교 시절은 거의 쉼 없이 바이올린 학원에 다녔지만 지금은 바이올린을 어떻게 잡는지도 잊어버렸습니다. 음감도 하나도 없는 음치인데다가 빠른 곡에서는 박자를 놓치기도 일쑤입니다. 그랬던 제가 어떻게 맹학교 브라스 밴드에 들어가게 됐는지는 지금도 미지수입니다. 어쩌면 학부모회에서 활동 중이시던 저희 어머니께서 넌지시 최영식 선생님께 저를 부탁하셨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제가 음악에 얼마나 소질이 없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밴드부에 들어간다는 자체가 부담스러웠습니다. 정확한 내막도 모르면서 저희 어머니를 원망하기까지 했었어요. 최영식 선생님 앞에서 처음 바리톤을 부는 날,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습니다. 그 자리를 나오는 순간 그냥 다 때려치우겠다고 다짐했지요.
그랬었는데 어떻게 어떻게 전 밴드부 생활을 계속하게 되었습니다. 결코 악기를 잘하게 되어서 한 것이 아닙니다. 최영식 선생님의 인자한 웃음이 저에게 용기를 주신 것입니다. 가까스로 아이네 클라리넷이라는 곡의 바리톤 파트를 완주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저는 다른 밴드부 부원들과 함께 합주 연습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리톤이라는 악기는 중저음의 금관 악기로 곡의 메인 파트를 맡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음을 틀리더라도 그렇게 큰 티가 나지는 않지요. 제가 밴드부에서 그럭저럭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저는 그렇게 음악을 하는 다른 친구들 사이에서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워하며 밴드부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게 한다는 것이 좋았고, 미숙하게나마 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이 뿌듯했습니다.
저는 행운아였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저시력이었기 때문에 밴드부가 행사를 할 때는 제가 악기 나르는 것을 도울 수가 있었거든요. 체격도 다른 아이들보다는 큰 편이라 튜바, 큰북 같은 것을 주로 날랐습니다. 보통 합주 연습은 기숙사 지하에 있는 생활관에서 하고 조회는 기숙사 위층에 있는 강당에서 했기 때문에 먼저 제 악기를 강당으로 옮겨 놓고 덩치 큰 악기들을 날랐습니다. 그러다 보면 다른 아이들이 하나둘씩 강당으로 모이기 시작하지요. 행사가 다 끝난 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 밴드부가 외부로 행사를 나갈 때도 저는 제 악기를 옆구리에 끼거나 다른 선생님께 맡기고 제일 덩치 큰 큰북과 튜바를 날랐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제게는 그저 즐거운 일들이었습니다. 생색내기나 의무감에서 한 것이 아니라 저에게 밴드부에 들어갈 기회를 주신 최영식 선생님에 대한 보답이었습니다. 악기 연주를 잘 못 하는 저로선 이렇게라도 최영식 선생님께 보탬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최영식 선생님은 언제나 웃음으로 칭찬해주셨어요. 그 인자한 웃음, 그 웃음이 아니었다면 전 밴드부를 일찌감치 그만두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최영식 선생님의 이런 인자한 웃음 때문에 밴드부를 계속할 수 있었던 학생은 비단 저뿐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나중에서야 확실히 알게 된 것이지만 최영식 선생님은 저희가 행사나 대회에서 연주를 틀렸을 때도 결코 저희를 나무라는 적이 없으셨습니다. 연습할 때는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지도해주시면서 연주가 끝나고 나면 언제나 정말 잘했다고 칭찬해주시는 분이셨지요. 사실 저희 밴드에는 타고난 음감을 가진 뛰어난 학생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학생들도 꽤나 많았습니다. 저처럼 음악성이 전혀 없는 아이와 시각장애와 지적장애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아이도 속해 있었습니다. 실력보다는 음악을 하고자 하는 마음, 그리고 음악이 필요한 아이들을 단원으로 받아들이신 최영식 선생님의 정책 때문이었지요. 저는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습니다. 만약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대회 입상이나 1등만을 목표하는 선생님이 우리 밴드부를 지도하셨더라면 저는 애초에 그 밴드부에 들어가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어떻게 개인 레슨은 받았을지도 모르겠지만요. 어쩌면 그렇게 구성된 밴드가 행사에 나가면 실수를 연발하는 건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악기를 잘 아는 사람들뿐 아니라 일반인이 들어도 잘 티가 나는 클라리넷의 삑사리 소리와 가끔 박자가 안 맞는 북소리는 제가 들어도 민망할 정도였어요.
그런데 그런 공연을 마친 후에도 최영식 선생님은 저희에게 '다음에는 더 열심히 하자'라는 흔한 충고조차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실수를 했건 말건 열심히 연주한 것에 대해 언제나 경의를 표하셨지요. 저는 그게 너무 감사했습니다. 오히려 그럴 때마다 다음엔 정말 틀리지 말고 열심히 하겠다는 마음이 절로 솟구치곤 한 것입니다.
최영식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에서도 주변 사람들을 미소 짓게 만들곤 했습니다. 선생님은 정말 웃음이 많으신 분입니다. 그 유머 감각은 젊은 세대가 들어도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 수준이시지요.
하루는 저희 밴드부 한 선배 누나와 제가 함께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 학교 도덕선생님이 지나가시다가 그 누나를 알아보고 인사를 하시더랍니다. 그 도덕선생님도 원체 학생들과 격 없이 지내시던 분이라 나이 50이 되시도록 아이들과 농담을 주고받기를 즐기셨습니다. 그래서인지 그 선배 누나가 그 선생님한테 장난스럽게 "아빠~"라고 부르더라고요. 저는 아무리 선생님이 편해도 그렇지 저렇게 부를 수 있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바로 옆에 계시던 최영식 선생님께서 "에잇, 선생님한테 아빠가 뭐야!"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순간 '에구 오늘 누나 잘못 걸렸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최영식 선생님의 말씀...
"아빠가 아니라 오빠지~"
도덕선생님을 포함에서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웃음보를 터뜨렸습니다. 오히려 너무 경직된 생각을 하고 있던 제가 최영식 선생님한테 한 수 배웠지요. 선생님은 그런 농담을 많이 하십니다. 최영식 선생님과 있으면 웃음이 떠나지를 않지요. 동화책에 나오는 옛날이야기 들려주시는 할아버지와 이미지가 흡사합니다.
그런 선생님께서도 가끔 젊으실 적 얘기를 들려주실 때는 저희에게 가슴 찡함을 전달해주기도 하셨습니다. 하루는 생활관 소파에 앉아 악기를 배우다가 선생님 스무 살 때 얘기를 들었습니다. 당시는 6.25가 발발한 1950년대였답니다. 최영식 선생님은 어린 나이에 군대에 징집되어 어떤 마을을 행군하고 계셨답니다. 그런데 그 마을은 방금 폭격을 맞은 듯 곳곳에서 연기가 나고 모든 집들이 무너져 있었습니다. 방금 막 전쟁의 폭력이 휩쓸고 간 참담한 광경이었지요. 스무 살의 젊은 청년에겐 퍽이나 충격적인 장면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때 최영식 선생님께서 발견하신 것은 잿더미 사이에 피어난 빨간 진달래꽃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곳에서 피어난 찬란한 생명의 빛깔 앞에 그만 스무 살의 최영식 선생님은 넋을 잃고 말았답니다. 죽음과 생명이 이렇게 공존할 수도 있구나라는 것을 그때 처음 느끼셨답니다. 그러면서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은 어차피 세상 이치인데 사람이 태어나는 것을 대하듯 죽음을 대할 수는 없는 걸까"라고 저에게 물으시더라구요. 겨우 고등학생밖에 되지 않은 저는 그 문제에 대하여 한참 동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전쟁을 경험하셨고 지난 수십 평생을 살아오시면서 수많은 죽음을 목격하셨을 선생님의 말씀은 그만큼 저에게 큰 울림을 주셨거든요.
그렇게 웃음과 고민을 함께 안겨주시던 최영식 선생님은 병상에 누우신 지금도 저에게 웃음과 슬픔을 함께 안겨 주시고 계시는군요. 선생님이 쓰러지셨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맹학교 동기 세 명과 함께 입원해 계시는 병원으로 찾아갔습니다. 이젠 다 큰 어른이 되어서 각자 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연락도 자주 못 들이던 찰나에 죄송한 마음이 앞서더군요. 앞이 보이지 않는 저희가 찾아가자 그나마 성하신 오른손으로 저희 손을 하나하나 꼭 잡아주시면서 웃으셨습니다. 그렇게 힘드신데도 웃으시면서 바쁜데 뭐하러 왔냐고 저희에게 고맙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동안 선생님께 평생 갚지 못할 은혜를 입은 건 바로 저희인데 말입니다.
선생님은 "헌용이 아버지는 아직 교직에 계신가?" "나리는 아직 인천에 살고 있나?" 하시면서 저희의 근황을 물어보셨습니다. 시각장애인의 음악 교육에 40년을 몸담으시면서 선생님을 거쳐 간 사람이 수천 명은 될 텐데 우리에 대해 그렇게 정확히 기억하고 계신 것에 놀랐습니다. 그래서 침대 옆에 앉아 더 많은 얘기를 오래오래 나누고 싶었습니다. 옛날 생활관에서 악기 연습을 할 때처럼 편하게 앉아서 저희 사는 얘기를 하고 농담을 주고받으며 언제까지고 그렇게 앉아 있고 싶더라구요. 그런데 그렇게 저희 앞에 정정하게 앉아 계실 것 같던 분이 침대에 누워 계시니 맘이 너무 아팠습니다. 선생님이 피곤하실까 금방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마음이 수천 개의 돌을 얹은 듯 무거웠습니다.
그러고보니 악기 연습을 할 때도 이렇게 언제나 저희가 먼저 일어났었습니다. 선생님은 악기를 배우려고 찾아가면 언제나 거기 그대로 웃으시며 저희를 기다리시던 분이었고, 연습이 끝나고 나면 늘 뒷정리를 하시려고 거기 그대로 남아 계신 분이셨습니다. 밤늦게 하교를 하다 보면 기숙사 저편에서 서투른 악기 소리가 찬 밤 공기에 실려 오곤 했습니다. "오늘 또 새로운 아이가 악기를 배우기 시작했나?" 하면서 귀가했던 밤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학교 그 누구도 최영식 선생님의 출퇴근 시간을 몰랐더랍니다. 기숙사에 살던 아이들도 말이에요. 그렇게도 학교 풍경의 일부로 녹아 계신 선생님이십니다. 그런 선생님이 이젠 생활관이 아닌 병실에 계시다니요...
마침 저희 셋은 선생님을 못 뵌 사이 모두 교사가 되었고 마침 저희가 찾아간 날은 스승의 날이었습니다. 그게 병원을 나오면서 생각나더라구요. 스승의 날 감사 드린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나왔어야 했는데 왜 그 말이 생각나지 않았는지... 집으로 돌아오는 길, 저희는 선생님께 문자를 보냈습니다.
"선생님 스승의 날 축하드립니다. 빨리 완쾌하세요~ 나영 나리 헌용"
그 문자에 선생님은 "감사감사감사"라고 답하셨더군요. 저희는 웃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희 한 명 한 명한테 쓰고 계신 마음이 이 짧은 여섯 글자에도 다 전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얼마 전, 한방 병원에 입원해 계시던 선생님께서 며칠 되지 않아서 요양 병원으로 옮기셨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한방 병원이 별로 효과가 없어서 그러셨나보다 하고 별 의미를 두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순전히 병원비 때문이신 것 같더라고요. 아차 싶었습니다. 한방병원이 원체 비싼 것을 몰랐던 것이 아니라 평생 악기를 가르치셨던 분이 가정 형편이 넉넉지 않을 거란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1주일에 몇 번씩은 꼭 가서 악기를 배웠던 5년간의 학창 시절 저는 선생님께 레슨비를 드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왜 그게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왜 저는 그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을까요...
제 주변에 있던 모든 아이들이 모두 그렇게 무료로 레슨을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년 365일, 40년 내내 선생님은 그렇게 시각장애인들에게 무료 레슨을 해주시면서 한 몸 다 바치신 것입니다. 그런 분께 왜 저는 아무것도 되돌려 드릴 것이 없는 걸까요? 왜 교사가 된 지금까지도 그런 스승의 마음을 한 번도 가슴 저리게 감사해본 적이 없었던 걸까요?
선생님이 쓰러지시고 나니 갑자기 모든 게 깨달아집니다. 그렇게 의미 없이 부르던 노랫말이요... 구구절절이 뼛속에 사묻힙니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우러러볼 수록 높아만 지네...
제발 선생님이 완쾌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완쾌하셔서 맹학교 밴드부를 지휘하는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선생님이 안 계신 맹학교 밴드부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서울맹학교 개교 100주년 행사를 준비하다가 쓰러지시다니요. 그 100주년이 뭐라고요. 그 100년 중의 40년을 함께 하셨는데 그깟 100주년 행사 때문에 우리의 역사가 쓰러지시다니요...
앞으로도 오래오래 많은 제자를 길러 내셔서 스승의 참모습을 세상 사람들이 더 많이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제발 일어나셔서 예전처럼 밝게 웃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께서도 꼭 기도해주세요.
최영식 선생님은 시각장애인들에게는 진정한 스승님이십니다. 아직 우리 곁에는 이렇게 위대하신 스승님이 필요합니다...
시각장애인들이 그 행운을 더 오래 누릴 수 있도록이요... 선생님이 우리 곁에 건강히 계신 것이 우리에게는 수천억짜리 복지 정책보다도 더 값진 것이랍니다...
최영식 선생님, 우리의 영원한 스승님, 부디 빨리 완쾌하셔서 돌아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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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리의 진정한 스승님이시네요.
저도 한땐 밴드부에 들어가고 싶었는데 집도 지방이고 배울 기회가 없었지만 가끔씩 스쳐지나갈때면 언제나 인자하시게 인사해 주시던 기억이 나네요.
이게 바로 선생님과 스승님의 차이겠지요!
이렇게 기도하고 걱정하는 제자들이 있으니 빨리 쾌유하실거예요.
그러고보니 저도 올해 스승의 날엔 선생님들께 전화 드리는 것도 잊었네요.
얼른 전화드려야겠어요.
오랜만에 카페에 들어왔어요. 병원에서 최영식 선생님을 뵈었는데도 문득 선생님을 떠올릴 때면 학교 생활관에서 악기와 학생들과 함께 계신 선생님이 가장 먼저 떠오르네요. 여기가 교무실이 아니었다면 헌용이 글 보고 눈물샘이 터졌을 거에요!!!
마음이 너무 아프네요. 구구절절 100% 동감입니다. 최영식 선생님~ 정말 진정한 스승이십니다. 존경합니다. 그리고 감히 사랑합니다. 빨리 쾌유되시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