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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 농민신문/유년의 판화/성지문-심사위원/김남환,이상범
▶ 매일신문/어떤 肖像/이숙경-심사위원/박기섭
▶ 불교신문/山家에서(시 가작)/김승호-심사위원/김동호
▶ 조선일보/겨울 판화/나홍련-심사위원/윤금초
▶ 동아일보/먹감나무 문갑/최길하-심사위원/유재영
▶ 경향신문/도산서원에서/이순희-심사위원/김제현.이상범
▶ 부산일보/저녁밥상-자화상-/장홍만-심사위원/최승범,장순하
▶ 대한매일/흔들리는 構圖/박소연-심사위원/박시교,윤금초
▶ 국제신문/우포늪 가시연꽃/김정연-심사위원/이근배,정해송
▶ 경남신문/또 하루/서성자-심사위원/김교한,이우걸
▶ 전주일보-현재 미발표
▶ 중앙신인문학상/컵/김보영-심사위원/윤금초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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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농민신문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유년의 판화 / 성지문
1
바람도 한 줄 없이 그림자가 일렁인다
눈 먼 기억들을 바늘귀에 꿰는 어머니
남루를 깁는 낙타여 촛불마저 목이 탄다
불빛도 지루한가봐 그을음을 피우는 밤
머언 곳 동정 살피듯 창문쪽으로 떠는 귓볼
밤 새워 사막을 기워온 어머니의 무르팍이여
2
연을 날려보면 아득함에 소름 끼친다
솟구친 가오리연은 하늘 호수에 숨었을까
끊어진 연줄에서는 사금파리로 우는 햇살
청국장 끓이는 냄새 솔잎 타는 저녁 연기
갈라진 손등에 문댄 가난 시린 콧물 자국
주접든 개를 붙들고 마구 뛰던 텅 빈 운동장
3
누군가 올 것만 같아 공연히 들창을 열면
이마에 닿는 하늘 혀로 받는 꽃눈송이
부엌엔 밥물이 끓고 감자싹이 돋는 윗목
먼 겨울 우레에 잠귀가 들린 외할머니
더 이상 늘린 입성은 저승에나 있다는 듯
두 손을 호도알처럼 비며 내 귓볼을 어루신다
*시조 당선소감
밤 사이 설핏 눈이 내렸다. 아파트 주차장은 빠져나간 차들로 휑뎅그렁했다. 그 빠져나간 차들이 머물던 자리엔 그 몸피만큼의 자국이 남았다. 거기에 몸을 머물게 한 차가 대신 그 눈을 맞았던 것이다.
내가 머물러 있어 그 눈(雪)을 맞지 못하는 곳이 있다면 그건 안된 일이다. 나도 느끼지 못한 눈이기에 그 누구도 느끼지 못할 눈일 거라는 생각은 그래서 나에게는 온당치 않다. 가끔 꿈속에서 내 머리 위에는 내리지 않고 눈앞의 개울 속으로 속절없이 녹아드는 눈발을 보다 깨어난 적이 있다. 다 같이 맞을 수 있고 다 같이 뒹굴 수 있는 눈발 속이라면 한번쯤 순수하게 세상이 어두워도 좋으리라. 아내와 딸에게 기쁨을 전한다. 아울러 심사위원 선생님께 감사를 드린다.
성지문 <인천 남동구 만수동>
*시조 심사평
올해 응모작엔 수준작이 많았다. 끝까지 남은 작품은 이우식의 <印章에 새긴 그림>, 김산의 <어둠의 풀밭>, 김정연의 <우포늪 가시연꽃>, 성지문의 <유년의 판화> 등 네 편.
<印章에 새긴 그림>은 감각은 빼어났으나 일관성이 희박했다. <어둠의 풀밭>은 고요를 바라보고 일구어나가는 솜씨에 비해 주제가 명확하지 않았다. <우포늪 가시연꽃>은 세 수에 담긴 내용과 이미지가 깔끔했지만 주제가 빈약했다. 결국 남은 건 성지문의 <유년의 판화>.
이 작품은 3부(어머니·나·외할머니)로 나뉘어 여섯 수를 이끄는 서정의 힘이 돋보였다. '끊어진 연줄에서는 사금파리로 우는 햇살` 등 빼어난 영상이 작품의 위상과 격을 높이고 있다.
김남환 <시조시인>·이상범 <시조시인>
[2002 매일신문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어떤 肖像 / 이숙경
흐린 불빛에 돌연 어지럼증이 일어
불태워 밝히고 싶은
어둔 저 가슴 한복판
천천히
들이붓는다
몇 잔 검푸른 독주
입 닫고 눈 닫고
귀마저 틀어막던
차마 못 깨뜨릴
오랜 고독의 뼈대
누군가
나무마치로
바스러뜨리고 있다
▨당선소감
바다의 수평선을 바라볼 때 그것을 밑줄 삼아 얹어 놓았던 숱한 그리움의 언어들, 길을 가다 우연히 만난 바람에 모조리 날려 버리고 싶었던 고통의 언어들, 잎새 한 잎도 거두지 못한 뼈마디 앙상한 나뭇가지에 다정히 걸쳐 주고 싶었던 언어들, 작은 가슴 넘치도록 솟아오르는 언어들 때문에 몸부림쳐봐도 시다운 시를 쓸 수 없어 자신을 몹시 책망하며 부끄러워했습니다.
작품이 당선작으로 결정됐다는 소식을 듣고 시인이 될 수 있다는 희망에 모든 것 들이 눈부시도록 아름다워 벌떡 일어나 세상을 얼싸안고 싶은 감동이 느껴졌습니 다. 시조를 쓰게 된 것은 오래되지 않았지만 시조에 대한 묘미를 발견했을 때의 감동은 참으로 컸습니다.
정제된 질서에 감칠 맛 나게 풀려 나가는 오묘한 말의 연줄이 마침내 무한한 허공 을 날았다 가슴을 타고 내려와 넉넉함으로 안기는 것을 작품을 통해 체험했을 때 저는 시조가 우리 민족문화의 당당한 유산임을 깨달았습니다.
존경하는 어느 시조 시인의 작품은 시조의 존재 가치와 고귀한 정서, 아울러 글을 쓰는 것에 대한 막중한 책임감까지 느끼게 했습니다. 부족한 점이 많지만 이 소 중한 기회를 발판삼아 시를 통해 행복해질 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 만들기에 더욱 힘쓰겠습니다. 당선작을 가려내느라 애쓰신 심사위원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약력 △1966 전북 익산 출생 △전주교대 국어교육과 졸업 △대구 율하초등학교 교사
▨심사평
신춘문예 당선작을 뽑는 일은 고통과 기쁨을 동반한다. 우열을 가리기 힘든 정신 의 숙도를 가늠하는 일이 고통이라면, 그로 말미암아 전혀 새로운 감성을 만나는 일은 다시 없는 기쁨이기 때문이다.
숙고 끝에 마지막까지 손에 남은 작품은 네 편. 이순희씨의 ‘鳶’과 최기송씨의 ‘떡살’은 우리 전통 생활 소재에다 생존의 애환을 담아내고 있다. ‘떡살’이 심상의 차분한 결구에 치중했다면 ‘연’은 좀더 열린 쪽이다.
두 편이 다 녹록찮은 시력을 보여 주지만 어떤 유형적인 본새를 벗지 못한 게 흠 이다. 이우식씨의 ‘한개의 달걀을 위한 명상’은 달걀 부화과정을 통해 생명에 대한 전율을 감지케 한다. 착상이 신선하고 이미지의 전개가 활달한 반면, 표현의 적확도와 완성도 면에서 아쉬움을 남긴다.
당선작으로 가려낸 이숙경씨의 ‘어떤 초상’은 신춘문예의 일반적인 투에서 벗어 난 작품이다. 무리하게 상을 끌어가려는 욕심을 접은, 빈틈없는 구성과 개성적인 수사가 돋보인다.
찬찬히 들여다 보면 그것은 가식이나 욕망의 더께를 걷어낸 갈등의 내면 풍경으로 드러난다. 청렬한 정신의 순도를 느끼게 하는 ‘몇 잔 검푸른 독주’를 시대의 질곡 위에 ‘천천히/ 들이붓는’ 감각이 예사롭지 않다. 모쪼록 당선의 영예에 안 분하지 말고 더 좁고 가파른 길을 내달릴 각오를 다져 주기 바란다.
박기섭(시조시인)
[2002 불교신문신춘문예 시 당선작]
-시, 시조 공모전에서 시조로 당선되었기 때문에 수록합니다.-
[시 가작]
山家에서 / 김승호
나무 숲 바람소리 가만히 숨죽이면
못 물은 왜 이렇게 꼬리가 길은지,
돌담에 기대어 있는 산중의 의문 하나를
모악의 산맥같은 돌로 눌러 죽이고
석등 밑에 부려놓은 허리 휜 길 하나
가슴 속 붉게 흐드러진 화염도 밟고 와서
손 호호 불어가며 고봉 쌀밥 공양하고
그림자 가득한 창호문을 닫아걸면
화엄은 깊은 바닷속 늘 깊이 잠겨 있음을
비 끝에 쓸리는 적멸의 이 길을
시내에 모이는 솔 소리에 비내리면
미륵은 우리 곁에서 수행자로 걷고 있다.
* 시부문 심사평
“넓은 세계로 나가기를”
예년의 수준을 훨씬 넘는 많은 응모작 가운데 예선을 통과하여 본심에서 오른 작품들은 강재현 〈청평사 가는 길〉외 8편, 백하길 〈공사장에서〉외 8편, 김승호 〈山家에서〉외 5편, 정하해 〈살아서 관을 짜다〉외 4편, 이정원 〈빈 들에 서다〉외 5편, 홍 범 〈보이를 마시며〉외 4편, 이완 〈나비〉외 5편 장석원 〈낙하하는 것들의 이름을 안들〉외 4편 등이었다.
이 중에서 마지막으로 이은자, 장석원, 이정원, 김승호 네분의 작품이 최종 심사의 대상이 되었다. 이은자의 간결성, 이정원의 서술성, 장석원의 참신성, 김승호의 형식적 절제 등이 각각의 장점으로 돋보였다. 그러나 육화된 시적 사유와 투고된 작품의 균질성 등으로 인해 이정원의 〈빈 들에 서다〉와 〈등신불〉 등을 금년도 당선작으로 선정하지 않을 수 없다.
‘겨울은 그 빈 여백에 작은 움 하나를 그리기 시작한다’는 깨달음이나 ‘풍경에서 뛰어나온 마음들’을 붉은 배롱꽃에 전화시킨 상상들이 이번 수상을 계기로 크고 넓은 세계로 뻗어나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당선자에게 축하의 박수를 보내드리며, 아깝게 탈락한 많은 분들에게 격려의 말씀을 전한다.
< 심사위원 : 최동호 교수>
[2002 조선일보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겨울 판화 / 나홍련
바다 빛이 뚝뚝 떨어지는 어물전 좌판대 위
비릿한 냄새 풍기며 하얗게 뒤집힌 고등어들
얼음꽃 차디찬 살갗, 지느러미만 파닥인다.
시퍼런 파도소리 등줄기에 서럽게 실려
아가미를 벌리다가 하얀 소금알 몇 개 문
썰렁한 아침 너머로 먼 바다가 출렁이고.
겨울의 상처들이 찢긴 비늘 속으로 숨는다.
소금물에 절인 살점, 반란의 흔적이 얼핏 보이고
그들은 꿈꾸고 있다. 푸르게 닿는 바다새 울음
회색빛 물감을 풀어 희미해진 어물전 저녁
부서진 상자 속에 주검들이 줄줄이 꿰어져
눈발이 서럽게 내린 삭막한 풍경도 그려 넣자.
[당선소감]
몸부림친 시간만큼 시조의 멋 깨달아
김천의 직지천 강변도로를 달리다 보면 이마에 닿을 것 같은 황악산이 환하게 우리 앞에 선다. 그 늠연한 기세에 나는 저절로 당당해 지고 있음을 느낀다. 가끔 일요일 오후 황악산속에 들면 산길 따라 달리는 바람과 함께 정신없이 능선까지 오르게 된다. 그러나 곧 갈증을 견디지 못하여 되돌아오는 하산길에서 만나는 운수암 마당에 있는 맑은 물에 한껏 취하게 된다. 얼마나 많이 찾아 헤매였던가 오래동안 풀지못한 갈등들이 눈빛을 붉게 하고 치졸한 세정속에서도 샘물처럼 맑은 시들이 솟아나고 있지 않는가.
산사에서 목탁소리를 들으며 자작나무 숲길을 걷다가 어느날 갑자기 시조와 만나게 되었고 직지사 대가람 뜰앞에 있는 백수(백수)선생님의 시비앞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것도 즐거운 일이었다.
어느날 고전시가집을 읽다가 고전시조 몇편에 반해 급선회 하여 스스로 시조세계에 파고 들었으나 제한된 형식 속에서 절제된 언어와 리듬을 어울리게 할 수 없는 것으로 판단되어 스스로 포기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제까지 몸부림 친 만큼 건진 노력들이 시조에 더 적극적으로 매달리게 하였고 낮익은 가락속에서 자연과 인생을 엮어 내면서 다른 시에서는 느낄수 없는 멋이 시조속에 간직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많은 선배 시인들이 밝고 간 넓고 큰 뜨락을 이제 나도 막 발걸음을 옮겨 놓으려는 순간이다. 그동안 긴 공직생활을 청산하면서 새로운 시조와의 동행은 나에게 더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오늘의 이 기쁨을 나의 사랑하는 가족들과 김천의 문우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 그리고 대구의 윤사섭 형에게도 이 기쁜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나에게 시조의 길을 열어주신 윤금초 심사위원님께 고개숙여 감사드립니다.
▲1942년 경북 김천에서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 국어국문학과 4년 수료 ▲제2회(’99년)공무원 문예대전 시조부분 우수상 ▲2001년 공모 가람시조 문학상 장원 당선 ▲경북 김천시 평화동 정휘맨션 A동 103호
◆심사평/ 삶의 현장 싱그럽게 풀어내
‘빙동삼척 비일일지한(氷凍三尺 非一日之寒)’.‘얼음 석자는 하루 아침 추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라는 말이다. 응모 작품 태반은 절차탁마의 내공 부족이었다. 곰삭지 않은 ‘날것 ’을 그대로 드러낸 경우가 많았다. 시조문학의 미덕은 선경(先景)·후정(後情)의 원리, 즉 묘사와 진술의 원리를 터득하는 일이다. 이미지를 끌어낸 다음 그 위에 담론(談論)을 실어야 하는데, 그것을 그만 놓치고 만 경우가 허다했다.
디지털시대는 세상을 자잘한 암호로 압축, 저장한다. 그것이 참 간편하고 빠르긴 하지만 문학세계는 좀 다르다. ‘다뉴세문경을 보다(성세경)’나 ‘겨울 산수유(황성진)’‘폐가(이시백)’는 시조 문맥 속에 정교한 복선을 깔지 못한 흠을 드러냈다. 이미지와 이미지가 가는 톱니바퀴처럼 정치(精緻)하게 맞물려 나가야 하는데 때로는 겉돌고, 때로는 움푹움푹 굴곡을 이루는 등 기복이 심했다. 직설적 서술방법에 치우쳐 찰기 있는 문장을 일궈내지 못했다.
‘개오지 설화(정평림)’나 ‘대금산조(송금례)’는 말 뽄새가 녹록지 않은 사설시조였다. 그러나 이들 작품은 감성경화에 걸려 억지 제스처만 무성했다. 시는 현실을 끌어안되 그 현실을 날것으로 드러내지 않고, 잘 여과시켜 색다른 그 무엇으로 환치해 놓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당선작 ‘겨울 판화 ’는 관조의 총혜를 읽을 수 있다. 삶의 현장성을 싱그러운 언어로 풀어낸 게 이 작품이 지닌 매력이다. 패기에 찬 한 신인이 펼쳐보이는 격렬한 ‘힘의 시학 ’을 만난 것은 우리의 복락이다. (윤금초/시조시인)
[2002 동아일보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먹감나무 문갑 / 최길하
물 한 모금 자아올려 홍시 등불이 되기까지
까막까치가 그 등불아래 둥지를 틀기까지
그 불빛 엄동 설한에 별이 되어 여물기까지
몇 해째 눈을 못 뜨던 뜰 앞 먹감나무를
아버님이 베시더니 문갑을 짜셨다.
일월도(日月圖) 산수화 화첩을 종이 뜨듯 떠 내셨다.
돌에도 길이 있듯 나무도 잘 열어야
그 속에 산 하나를 온전히 찾을 수 있다.
집 한 채 환히 밝히던 홍시 같은 일월(日月)도.
잘 익은 속을 떠서 문갑 하나 지어 두면
대대로 자손에게 법당 한 칸쯤 된다시며
빛나는 경첩을 골라 풍경 달듯 다셨다.
등불 같은 아버님도 한세월을 건너가면
저렇게 속이 타서 일월도(日月圖)로 속이 타서
머리맡 열두 폭 산수, 문갑으로 놓이 실까.
[당선소감]
최길하
△1957년 단양 생
△1984년 중앙일보 시조 백일장 장원
△1994년 충청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
△현 성신양회 노동조합 사무장 근무
동아일보와 심사위원께 좋은 작품으로 보답할 것을 약속 드립니다.
힘든 세월이 있을 때 안쓰러운 마음으로 염려해주신 '성신양회' 사우 여러분께도….
먹감나무처럼 아버님은 홍시 같은 등불이었습니다. 아마 속 또한 불 밝힌 자국이 꺼멓게 그을려 있으셨을 겁니다. 그 꺼먼 무늬가 해와 달을 품고 산을 이루어서 말입니다. 이제 아버님은 떠나시고 제가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반짝이는 문갑 한 쌍과 함께….
먹감나무의 무늬와 별처럼 빛나는 장식이 서로 꾸며주고 비쳐주며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남을 헐뜯고 자기 똑똑한 척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상대에 대한 이해나 배려에는 아주 인색한 사람 말입니다. 조선시대의 문갑, 장롱, 반다지등 가구를 보면 나무와 장식의 조화가 마치, 맑은 날 밤하늘에 별이 돋은 것처럼 아름답게 서로를 꾸며주고 비쳐주고 있습니다. 나무(木)와 쇠(金)는 서로 상극이지만 서로를 꾸며주고 비쳐줌으로써 상생으로 변하게 됩니다. 시골집 마당에 홍시가 익으면 우리 모두 하루에도 몇 번씩 감나무를 바라보았습니다. 개도 닭도 늙은 염소도…. 그때 짐승들의 마음속에도 깊은 강물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모든 사물에 자신을 비쳐 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것은 둘이 아니다(不二). 담겨지는 그릇만 다를 뿐 서로 비쳐주고 비쳐보는 사이(間)만 있다가, 그 사이조차 지워지고 다 녹아서 원융(圓融)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곳에 이르면 모든 사물에서 관세음(觀世音)을 보게되고 상대성 원리가 합류되지 않겠습니까.
저는, 모든 자연계가 무상(無常)히 진행하는 흐름과 균형의 방향성에 대하여, 사물들의 설계도인 대칭의 구조가 균형과 질서의 꽃이 되는 것에 대하여, 그러므로 모든 사물은 숫자로 해독 할 수 있고, 그 궁극은 항상 부등호(=)로 끝나는 것에 대하여 문을 열어 보고자 합니다. 'DNA'를 시의 언어로 풀어가 보겠습니다.
[심사평] / 유재영(시조시인·동학사 대표)
70여편의 응모작 중 최종 심의에 오른 작품은 여섯 편이었다. 박소현 <푸드득, 꿈꾸는 아침>, 윤채영 <못물을 보며>, 최하록 <어머니, 세 개의 이미지>, 설혜원 <청량사 배롱나무>, 심석정 <염전에서>, 최길하 <먹감나무 문갑>가 그것이다.
이 가운데 <염전에서>와 <청량사 배롱나무>, 그리고 <먹감나무 문갑>이 당선을 놓고 마지막까지 겨루었다.
< 염전에서>는 치열한 주제의식과 언어를 다루는 솜씨가 돋보였으나 군데군데 음보의 지나친 이탈과 감성을 다스리는 섬세함이 부족했고, <청량사 배롱나무>는 작가의 뛰어난 시적 재능에도 불구하고 시조의 전통성과 무관한 구성상 문제가 흠이었다.
그와 달리 최길하 씨의 작품은 탄탄한 구성과 함께 미학적인 면과 작품의 성취도에서 단연 앞서 있었다. 그것은 당선작인 <먹감나무 문갑> 외에도 또다른 작품 <백자 연적> 역시 단수이긴 하지만 시인으로서의 역량을 평가받기에 충분했다. 신인답지 않은 지나친 능숙함에 전혀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시조라는 완고한 형식에 잊혀져 가는 우리의 정서를 이만큼 담아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시조가 아니면 결코 느낄 수 없는 <먹감나무 문갑>이 있는 저 아름다운 언어 풍경을 바라보는 새해 아침, 이 땅에서 시조를 쓴다는 것이 즐겁다. 당선자의 대성을 바란다.
[2002 경향신문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도산서원에서 / 이순희
파르라니 타는 혼불 안개로 감싸안고
濃墨의 시대사가 토담으로 둘러쳐진,
안동 땅 들어서면서 옷깃부터 여미었네.
완락재 앞마당엔 한 우주가 터지고 있었네
홀연히 몸을 날린 설매화 다시 이울고
부신 눈 지그시 감고 먼 훗날을 읽고 있었네.
적성산 한 자락이 북풍에 꺾여나가
문풍지 우는 소리에 저려오던 사무침도
한 마리 박새로 와서 세상의 잠을 깨우고
쉼 없이 솟는 사랑 빈배에 실어보내며
강선대에 홀로 앉아 뜯었다던 가야금소리
그 소리 영원을 돌아와 댓잎 끝에 아리네.
[시조 당선소감] 시조는 생의 의미이자 동반자
<이순희>
1960년 경북 성주 출생
영남대 국어국문과 졸업
2001년 전국 시조 공모전
장원(대구시조 주최)
내 유년시절 어느 날로 기억된다. 친구를 찾아 놀이터에 나갔는데 텅 빈 놀이터에는 잎 떨군 가지들만 쉰 울름을 울고 있었다. 나도 따라 울고 싶었다. 그러나 목구멍까지 치미는 울음을 꾸욱 삼켜버렸다. 가슴에 묵직한 것이 내려앉았다.
그날 이후 까닭 모를 병이 가끔씩 나를 찾아왔다. 가슴을 누르던 것이 걷잡을 수 없는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런 날은 바람에 떠밀려 진종일 거리를 서성거렸다.
끝이 없을 것 같던 방황은 끝났다. 나를 지탱해 주는 따뜻한 친구를 만난 것이다.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그 친구와 나는 모든 것을 주고 받았다. ‘시조’라는 이름을 가진 친구였다.
처음부터 시조가 내 친구가 된 것은 아니었다. 느낌없이 지나치던 시조를 내게 소개해 주신 분은 민병도 선생님이셨다. 선생님께서는 시조의 깊은 매력에 대해서도 눈뜨게 해 주셨다.
무채색이었던 나의 생이 지금은 여러 가지의 색깔을 띠게 되었다. 때로는 짙은 회색이다가 때로는 화려한 무지갯빛이다가….
까닭은 동반자가 된 시조가 늘 함께 하기 때문이다.
부족한 작품에 등불 밝혀 길 열어주신 심사위원님께 먼저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린다. 따뜻한 충고의 말씀으로 이끌어주신 여러 선생님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그리고 흔들릴 때마다 바로 세워준 한결 시조 문우들과 모자람 투성이인 나를 따뜻한 눈길로 지켜보아 준 아이들과 남편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이 기쁨을 드린다.
[시조 심사평] 정신의 깊이에 대이는 보법
올해는 시조응모가 부활한 첫해이다. 신문사에 감사한다. 시조가 어렵다는 말을 하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선 시로서의 성공을 거두어야 하고 형식미에 대입시켜 무리없는 성과를 이룩해야 하는 일이 쉽지가 않기 때문이다. 예선을 거쳐 최종심에 오른 작품 중에서 전준의 ‘겨울, 능내에서’, 김산의 ‘낙타’, 그리고 이순희의 ‘도산서원에서’가 끝까지 남아 우열을 겨룬 작품이었다.
‘겨울, 능내에서’(전준)는 다산생가의 영상을 형상화한 작품이었으나 흐름이 핵을 찌르지 못하고 언어가 겉돌아 관념적으로 비쳤다.
‘낙타’(김산)의 경우, 매끄럽고 능란한 기교가 작품을 많이 다루어온 솜씨다. 그러나 작품의 깊이가 부족하다는 게 심사위원의 공통된 견해였다. 이 말은 진실성의 미흡으로 치부되었다.
끝으로 이번 수상작 ‘도산서원에서’(이순희)는 다른 작품들에 비해 작품을 일구어 나가는 보법이 아주 신중하다. 도산서원은 퇴계의 정신과 사상, 그리고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유림의 중심지요, 오늘의 대학과 대학원 과정의 인재를 육성한 곳이다. 이같은 것을 염두에 두고 작자는 대뜸 ‘파르라니 타는 혼불 안개로 감싸안고/농묵의 시대사가 토담으로 둘러쳐진’으로 작품의 문을 열고 있다. 퇴계의 정신을 포착한 서두다. 풍경을 소화하는 서정의 힘과 정신의 깊이를 감지하게 한다. 당선을 축하하며 정진을 바란다.
〈심사위원:김제현·이상범〉
[2002 부산일보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저녁밥상 - 자화상- / 장홍만
내게 돈벌이란
영 재주가 없는 건지
탐탁찮은 가장 노릇에 포크질하던 아내가
살빠진 월급봉투 얇게,얇게 저며 칼질하는,
조촐한 저녁 한끼 된장국 끓는 소리
오래도록 길들인 깊은 맛은 아니어도
공들인 값어치만큼의
그 빛깔은
씹히는데,
거른 적 없는 식탐에도
삭정이,삭정이처럼
위상은 어째 깡말라만 가는 건지
노동의 차디찬 현장에 모닥불감은 될는지.
[당선소감]
'타오르는 불꽃 다스리는 계기'
추운 겨울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열심히 생을 꾸려가는 사람들로 이 도시는 붐빈다. 참 많은 날들 패기도 억척스러움도 담배꽁초처럼 흘려놓고서 이 길 위에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는지 망연할 따름이다.
진실한 그리고 간절한 고민 하나 미련처럼 끌어안고 아프게 흔들렸던 날들을 되새겨 본다. 얼마나 게을렀는지 의미 있는 흔적도 남김없이 지낸 많은 시간들을 이제는 조용히 뼈저리게 반성해야겠다.
반가운 소식이 있었으면,노곤한 삶의 한때라도 작은 설렘이 있었으면 하고 기다리던 전화연락이었을텐데 막상 너무 재미없게끔 당선소식을 받았던 듯싶다. 소식을 전해주었던 그 분의 마음까지 무겁게 만들지 않았는지 새삼 미안한 심경이다.
왠지 모를 막막함이 황량한 들판에 마구 쏟아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설렘일 줄 알았는데 전혀 낯선 두려움이 위용을 내세우듯 길을 막아서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직도 두려워해야 할 것들이 많은 모양이다. 이 난감하게 헤매는 마음도 추슬러야겠고 잊고 살았던 부분,잃어버린 것들을 소중히 되살려내는 한 계기로 삼아야겠다. 얼마나 부지런을 떨어야 할까….
뽑아주신 심사위원들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못난 글 부끄러움이 깊었는데 이렇게 따뜻한 온기를 불어넣어 주셔서 형언할 수 없는 마음입니다. 사그라지던 용기와 자신감에 모닥불을 놓겠습니다. 마음속 화르르 타오르는 불꽃을 오래도록 다스리며 앞서가는 많은 분들의 좋은 글 더욱 많이 읽겠습니다.
[심사평]
이 시대 젊은 지성인의 자화상
응모자는 모두 50명. 하나하나 세어 보지는 않았으나 1인당 평균 4편으로 쳐도 모두 200편 쯤 되니 예년보다 좀 많아졌다.
응모자의 분포도 지역적으로는 부산 등 경상권 중심에서 서울 중부 전라 충청 강원 제주까지 전국으로 고루 확대되었다.
특히 작품의 질적 수준은 괄목할 만큼 향상되어 중간층이 많이 두꺼워지는 다이아몬드형을 보이고 있는 것은 시조의 앞날을 위해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라 하겠다.
예선에 오른 사람은 김종길 손영희 김태영 이종대 박태진 이운정 장홍만 씨. 이들 7명은 각기 수 편씩의 작품에서 고른 역량을 보여 장래가 기대되는 사람들이었다.
이 중에서 장홍만 씨를 당선자로 낙점해 놓고 작품을 가리는데 시간이 걸렸다. '자화상'이란 부제가 붙은 '저녁 밥상'은 첫 수를 사설,둘째 수를 평시조로 처리하여 다소 요설스럽고,'가을 언저리 1'은 평시조 2수를 다양한 시행으로 배열해 간결한 상징이 인상적이어서 선자(選者)에 따라 당선작을 달리 할 수 있겠다 싶었다.
'저녁 밥상'을 가려 뽑은 것은 신문의 대중성이 작품의 평이성과 통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의 작품에 깔려 있는 '그늘''궁상' 등 그런 이미지는 이 시대를 사는 젊은 지성인의 자화상이던가.
< 시인 최승범·장순하>
[2002 대한매일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흔들리는 構圖 / 박소연
말보다 깊은 기억 바랑에 가득 채워
보이지 않는 그곳, 뜬눈으로 걸어간다.
끝없이 타는 목마름 발길마다 밟으며
한 걸음 내딛으면 또 다가서는 생(生)의 갈증
기어이 넘어야 할 불혹의 기나긴 고비마다
바래고 주름진 흔적 혈흔(血痕)으로 남는다.
난타당한 푸른 수액 꽃가지에 동여매고
맨발로 계단을 건너 당도한 세월의 길
렌즈 속 흔들리는 구도(構圖), 돌아서서 지운다.
삭정이 성긴 힘줄 안으로 삭혀두고
막막한 저 발자국 정수리에 또 새길까
지워도 뚜렷이 남는 육면체를 꿈꾸며.
[당선소감] ‘박소연’
예고 없이 첫눈 내리던 날 기차 여행을 했다.싸늘한 들녘에 참으로 오랜만에 은빛 고요가 쌓인다.애써 어둠을 잡아둔그 대지 위에 의미가 되지 못한 언어들이 마구 뒹굴고 있었다.얼기설기 구도를 짜며 내 문학의 길도 그렇게 젖거나 마르곤 했다.
한 겨울,떠오르는 감정들을 밤새도록 끌어안을 수 있었던많은 나날에 감사드린다.밥 보다 더 배부른,차보다 더 향기로운 시조를 창작하면서 삶을 배우고 일렁이는 감정들을 삭히고 삭혔다.‘첫눈의 설레임을 어떻게 풀어낼까’하고.
고민할 때 신문사로부터 뜻밖의 ‘당선’ 소식을 받았다.사방으로 흩어지는 눈송이들이 내 안에 차곡차곡 쌓이더니 초조,기다림,환희의 나팔소리로 바뀌었다.
내 이제,나의 삶에도 형광색의 무대를 마음껏 꾸밀 수 있으리라 믿고 싶다.
그 동안은 바람에 부서지고 어둠에 찢겨지는 가설무대였다면 이젠 혼자서도 넉넉히 마임을 할 수 있는 작은 단상이었으면 한다.열병처럼 쏟아지는 언어들을 모아 몸짓으로 풀어보리라.때로는 단아하게 또 유장하게.
부족한 작품을 흔쾌히 뽑아주신 신문사와 심사위원님께 먼저 깊이 감사 드린다.겉으로는 신랄하게,속으로는 따뜻하게보듬어 준 곽홍란 시인과 문우들께 이 벅찬 기쁨을 바치고싶다.
또 어설픈 아내에게 내색조차 하지 않고 묵묵히 지켜준 남편,엄마 작품이라고 줄줄 읽으며 즐거워하는 아이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심사평]
총응모작을 둘로 나눠 두 심사위원이 각자에게 할당된 작품을 가려뽑는 1차 심사가 있은 뒤,그 뽑은 작품을 또 서로 바꿔 읽어서 몇편만을 고르는 2차 심사를 가졌다.
이런 과정을 거쳐 마지막으로 남은 작품이 김미영의 ‘복천동 고분(古墳)’과 김종길의 ‘산수유’,박소연의 ‘흔들리는 구도(構圖)’ 등 세 편이었다.
이들 세 편도 모두 조금씩의 결점을 내보이고 있었다.예컨대,‘복천동 고분’은 시어의 불필요한 남용이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는데 ‘무덤’,‘토우’ 등 이 시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시어들이 두세 번씩 쓰이고 있는 점이었다.‘산수유’에서도 ‘노랗게,노랑,노란’ 이라는 봄을 가리키는 단어가 짧은 시속에 세 번씩이나 사용되고 있었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더라면 더 좋은 시어로 바꾸어놓을 수있었을 것이란 아쉬움이 있었다.
끝까지 거론된 작품들이 예년의 당선작 수준을 크게 뛰어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신춘의 화려한 등단을 가리는 이 불꽃튀는 경선이 분명 신인다운 패기와 참신성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데에 역점을 두게 되면,이러한 생각에 가장 접근한 작품이 바로 ‘흔들리는 구도’였다.군데군데 설익은 표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뽑은 데에는 함께 투고한 ‘폐광,그후’ 등이작자의 역량을 뒷받침해 주었음도 밝히지 않을 수 없다.
당선작에 축하의 박수를 보내며,아울러 앞으로의 정진을 기대한다.
박시교 윤금초
[2002 국제신문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우포늪 가시연꽃 / 김정연
문명이 뒷짐지고 돌아앉은 외진 그곳
넓디넓은 늪물 속에 까치발 딛고 서서
가시연, 저무는 빛에 파르르르 전율한다.
그리움 물고 나는 도요새는 오지 않고
가시에 찢기는 아픔 비명조차 삼켜가며
절정의 그날을 위해 숨 고르며 기다린다.
갓밝이 그 초입에서 꽃송이 툭 · 툭 터져
보랏빛 얇은 속살 한겹한겹 드러내며
남몰래 품었던 하늘 되돌리고 서있는 너.
[당선소감]- 김정연
행여나 행여나 하며 기다림에 뛰는 가슴 토닥이던 시간의 끝을 지나 체념으로 마음을 돌려 내년을 위한 신발끈을 질끈 동여 맬 때, 불쑥 들려 온 낯선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흐르던 눈물은 반가움과 늦은 것에 대한 투정이었을까요?
새벽 한시, 도전을 결심한 그 날 후로 습관처럼 의식이 맑아지는 시간입니다. 남들이 잠든 시간에도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제 삶의 큰 위안이었는데 그 작업이 고도의 절제와 함축을 바탕으로 한 언어의 운율에 맞추어 춤추는 것이었으니 그 즐거움은 가히 가히 짐작할 수 있으실 것입니다.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 많이 노력하였으나 모자람의 벽을 뛰어 넘기에는 아직도 긴 절차탁마의 시간이 필요함을 느낍니다.
평소 존경해 오던 두 분 심사위원 선생님들께서 내미신 손을 꼭 잡고 그 믿음에 어긋남이 없도록 매진하여 긴 겨울 끝, 얼음 녹이는 복수초처럼 가장 먼저 상큼한 봄 소식을 알리는 그런 시인이 되고 싶습니다.
무지한 저를 여기까지 이끌어 주신 윤금초 선생님과 많은 선배님, 이 밤을 까맣게 태우고 있을 문우들에게 먼저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외조를 아끼지 않았던 남편과 사랑하는 아들 근호와 딸 소영과 함께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약력=△1963년 부산 출생.
[사평]- 이근배 정해송(이상 시조시인)
오직 이 땅의 모국어로만 빚어지는 시조는 신춘문예의 벽을 넘어설 때 그 가락과 숨결을 한 층씩 높여왔다.
올해도 시조의 형식에 천착해 온 숨은 신인들의 작품을 읽는 기쁨은 컸다.
그러나 시적 감수성과 시재가 시조의 형식에 부딪쳐 기대만큼의 새 지평을 열지 못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아쉬움이 없지 않았다.
당선작 ‘우포늪 가시연꽃’(김정연)은 글감의 발견부터가 시적 안목에 믿음을 주고 있으며 자칫 낯익은 서정에 빠질 소재이면서 그 내면의 깊이를 예리한 칼끝으로 도려내고 있어 이미지가 낱낱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
문명의 그늘에서 소외되고 버림받은 생명이 온 몸으로 터뜨리는 눈부신 개화. 그 절정은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가슴에 묻혀진 욕망을 읽게 한다.
특히 셋째 수의 초장 ‘갓밝이 그 초입에서 꽃송이 툭 · 툭 터져’에서 종장 ‘남몰래 품었던 하늘 되돌리고 서 있는 너’로 다시 일으켜 세우는 솜씨는 높이 사고 싶다.
이 작품이 대체로 시적 전개가 활달하고 시조의 운율에 익숙한 점이 예년의 수준을 넘어서고 있으며 시조단에 한 몫을 보태리라는 기대도 갖게 한다.
끝으로 성대현의 ‘못질하기’ ‘김미영의 ‘연탄을 갈며’, 김진순의 ‘겨울의 河口에서’가 최종심에서 마지막까지 불꽃을 피웠으나 ‘못질하기’는 관념적인 서술과 굳은 낱말들이, ‘연탄을 갈며’는 시조의 운율을 벗어난 산문적 음보가, ‘겨울 河口에서’는 낯익은 시상의 전개가 지적되어 상대적으로 뒤에 밀리게 되었다. 더욱 분발하여 시조의 내일과 손잡기 바란다. / 이근배 정해송(이상 시조시인)
[중앙신인문학상 시조 당선작]
컵 / 김보영
1.
손과 손을 둥글게 맞잡은 물방울이
수채화 속 휘어진 세상을 담아든다
구포역, 낡은 탁자 위 덩그러니 놓여진 꿈.
2.
어릴 적 뛰놀던 길, 그 컵을 들여다본다
헤엄치는 물고기의 일렁이던 비늘이
희미한 汽笛되는가, 그림자가 되는가.
3.
노을 속 동백꽃 빨갛게 타오르다,
보송한 솜털 박힌 이파리 하나 톡 떨군다.
새하얀 목덜미 두르고 겨울이 오고 있다.
[중앙 신인 문학상 시조부문] 수상자 김보영씨
"제 또래에 시조를 쓴다고 하면 주위에서 박물관 유물 같은 걸 왜 쓰냐고들 하지요. 하지만 그런 사람들 중 태반은 글이 뭔지 잘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요. 글을 쓰는 사람에게 시조는 기본과 같은 겁니다. 특히 틀을 바꾸지 않고도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장르가 바로 시조지요."
중앙신인문학상 시조 부문 수상자 김보영(20)씨의 당찬 수상 소감이다.
이제까지의 수상자 중 최연소인 김씨는 현재 광주여대 문예창작과 3학년에 재학중인 학생. 그런만큼 젊은이다운 패기와 시상(詩想)을 떠올리는 감각에 신선함이 그득하다. 선정 과정에서 "구태의연한 게 시조가 아니며 당대의 문제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심사위원들의 절박한(!) 기준에 가장 부합했기에 당선자가 됐다.
당선 연락을 받았을 때 "거짓말 하지 마세요"라고 첫 반응을 보인 김씨는 "아직 어린 나이고 평생 시조를 쓰며 살건데 상을 너무 의식하면 잘해야겠다는 강박관념에 사로 잡혀 부자유스러워질 것 같아 기쁜 마음과 일부러 거리를 두고자 한다"고 말했다.
[심사평]
중앙신인문학상 시조부문은 그 관문이 까다롭기로 정평이 나있다.달마다 예선을 통과한 후보들의 새로운 작품을 받아 심사위원들이 전체 윤독을 거친 다음 다수득표자 3~4명으로 압축한 뒤 이들 작품을 면밀히 검토하여 당선자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번에 최종적으로 남은 분은 김기철.손영희.강경화.김보영 씨였다.`봄이 종종 말을 걸다`등의 작품에서 김기철씨는 선명한 이미지와 각 장 사이를 끊어내는 듯 하면서도 이어가는 유연함을 보여주었다. 손영희씨의 간결하면서도 중량감 있는 시상, 강경화씨의 체험 속에서 우러난 삶의 발견과 잔잔한 감동 또한 주목됐다.
김보영씨는 `꽃`등의 작품에서 새로운 감각이 뛰어나고 전편에서 아우르고 있는 세계가 탄탄해 보인다. 심사위원 전원이 주목한 `컵`은 버려진 하나의 평범한 사물을 통해 과거와 현재로 이어지는 물고기 비늘과도 같은 섬세한 에스프리와 잔잔한 감동이 있는 수작이다.기운차게 당선의 자리에 놓는다. 정진해주기 바란다.
< 심사위원:윤금초.박시교.유재영.김영재.박기섭.이지엽.정수자.홍성란>
[2002 경남신문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또 하루 / 서성자
박제된 그리움 같은 앨범을 뒤적인다
우유빛 날개 입은 순백의 기러기 한 쌍
무지개 융단 위를 날아
꽃 계단을 오르고.
담장 밑에 심었던 박하 풀 마른 자리엔
가난한 내 유년의 여린 목을 휘감았던
퇴색한 희망 몇 포기
잡초로 웃자라 있다.
이렇게 반쯤 걸어온 하루가 또 가고 있다
선 밖에서 떠돌던 상념의 찌꺼기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사각 틀을 맴돌고.
당선소감-시조(서성자)
『엄마, 해 나왔어요.』
꼭꼭 닫힌 두꺼운 커튼을 아이가 힘껏 밉니다.
오전 내내 흐린 하늘이었는데... 언제 나왔을까? 유리를 통과한 햇살이
유리문보다 더 넓게 거실에 쏟아집니다.
기쁩니다. 또 두렵기도 하구요. 허공에 발을 딛고선 기분이 이럴까요?
언제나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근원을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초조한 일상들이었습니다.
희미하게 지난 며칠 불면 속에서 조금씩 다져갔던 생각들을 다시 떠올립
니다.
사실 고백하면 저는 아직 좋은 시조가 어떤 것인지 잘 알지 못합니다. 모
든 예술 장르가 그렇듯이 공부를 하면 할수록 더 어렵다는 생각뿐입니다.
정해진 율과 절제된 언어로 감정을 담아내야 하는 것은 물론, 그 기본의
틀 속에 어떤 현장을 통한 역사와 사회의 새로운 인식을 생각하는 일은 제
게 특히 그렇습니다. 그런 만큼 성취감도 크겠지요. 그러나 한 편의 글에
서 사회, 역사적으로 어떤 큰 의미를 담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평범한 사람
들의 일상의 감정을 잔잔하게 표현하여 작게나마 공감을 줄 수 있다면 그
또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그런 마음으로 어떤 내용의 글을 쓰든 단 한 사람의 마음에라도 오래 남
는 글을 쓰리라는 생각을 살짝 보이는 길 앞에서 조심스레 해봅니다.
엉거주춤 서 있던 나를 공부의 길로 적극 밀었던 가족과 친구들, 늘 겸손
과 자신감의 조화를 강조하시며 이끌어 주신 창신대 문창과 교수님들, 시조
의 첫 걸음에 사랑과 용기를 실어준 학교 언니 동생들 모두 고맙습니다. 그
리고 모자라는 글 뽑아주신 심사위원들께 감사 드립니다. 지금의 설렘과 마
음가짐 꼭 간직하여 더욱 좋은 작품으로 보답하겠습니다.
▲1963년 마산 출생 ▲창신대학 문예창작과 재학
[심사평-시조]
가능성이 많은 시인, 참신한 시인, 실험정신이 투철한 시인을 대망하며
백여편의 작품을 읽었다. 몇 차례 정독했지만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작품
이 보이지 않았다. 우선 연시조의 경우 각각의 수가 완결되어 있으면서 시
상의 전개나 의미확장에 기여해야 하고, 사설시조의 경우 엮음의 미학이
잘 빚어져야 하는 것 등은 정형시인 시조에 대한 기본상식이다. 아울러 현
대시조답게 우리 시대의 정서를 노래해야 한다. 이러한 주문은 언제나 심사
의 기본 관점이지만 오래 습작해 온 사람들도 간과하는 경우가 많다.
심도있는 대화를 나누기 위해 최기송의 「풀꽃」, 정양숙의 「눈내리는
바다」, 차창수의 「도배하는 날」, 우은진의 「강」 「거울」, 장홍만의
「문자메시지」, 하주은의 「옛날 이야기가 되어버린 제비」, 손영희의
「완사역에서」, 서성자의 「거리에서」 「또 하루」 등을 가려서 거듭 읽
었다.
「풀꽃」은 참 안정된 서정시였다. 가락도 잘 살려내었다. 그러나 너무
평이한 느낌을 주었다. 「눈내리는 바다」는 백수류의 정통시맥을 잇는 작
품이었다. 좀 더 많은 시적 공정이 요구되었다. 「도배하는 날」은 「옛날
이야기가 되어버린 제비」와 같이 일상적인 소재를 시화한 것이었다. 그러
나 두 작품 모두 시적 긴장이 부족했다. 「강」 「거울」은 예사롭지 않은
시적 안목을 보여주고 있었다. 사물을 감각화하는 것, 사물을 통해 초월적
존재를 그려내는 것 등이 그러했다. 그러나 안정감이 부족했다.
결국 「또 하루」, 「거리에서」, 「완사역에서」, 「문자메시지」 등으
로 초점이 모아졌다. 「문자메시지」의 경우 그 제목이 시사하는 바와 같
이 가장 절실한 현실을 그려내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의 셋째수는 둘째수
까지 유지해 온 긴장감을 완전히 이완시키고 있다. 이 시인의 사설시조관
또한 문제가 되었다. 드라이한 대신 시적 탄력이 부족했다. 현대적이면서
도 감동스럽지 못한 이유를 깨달아 더 노력했으면 한다.
「완사역에서」는 처음 가장 두드러진 작품이었으나 「주머니」 등의 중복
사용, 표현의 묘를 얻었음에도 느껴지는 상투성이 문제가 되었다. 서성자씨
는 작품이 모두 고르지만 특별히 빼어난 작품을 찾아내기가 어려웠다. 결
국 지리멸렬한 삶에 대한 냉소적인 시선이면서 그 고난에 대한 극복의지로
읽히는 「또 하루」를 뽑기로 했다. 축하드린다.
(심사위원:시조시인 김교한·이우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