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 영화를 보다보면 인간사냥하는 범죄 영화가 있습니다.
주 테마가 아니면 부속 장면으로 설정되어 나타나곤 하는 이 인간사냥은 '내가 열 셀 동안 뛰어봐. 그 후엔 내 손에 죽기 전에 저기까지 가면 살려준다' 와 같은 대사로 시작됩니다.
비슷한 테마를 가지고 제작된 영화가 있습니다 : The invisable man
이 영화를 보면
한 여자에 집착하는 한 남자가
자신의 두뇌와 힘을 이용하여
보이지 않는 사람이 되어 여자를 괴롭힙니다.
그런데 아바타 이후
타고난 육신보다는
컴퓨터의 가상현실 속의 아바타로
살기를 택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기의 이상 세계를 선택하여
되고 싶은 존재가 되어 산다는 것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문제는 누군가의 선택을 받기 위한
세계를 만드는 데 있습니다.
아마도 새로운 게임의 출현과도 유사하게
각자의 선택을 유혹하는 세계들을 만드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실제의 인물들의 사적인 자료들을 도용하여 만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들지 않는 실제의 인물들과는 충돌을 야기시키기도 합니다.
자신들이 만든 세계와 아바타에 맞지 않으면
오리지널이라도 실제 인물을 제거합니다.
그래서 벌어지는 것이 인간사냥
그러한 게임아닌 게임에 매인 사람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을 실제와 혼동합니다.
오해와 편견을 넘어서 사실이 되어버린 가상이 실제를 위협합니다.
몸은 있으나 모두 투명인간들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몰이꾼들이 되어갑니다.
자신의 가상을 실제로 투사해서 그대로 되어야 성공입니다.
안되면
죽음
이것이 인간의 의식을 지배할 때
안되는 것이 없는 가상의 가능성이 현실을 덮어 버립니다.
드라마 모범택시에 나오는 범죄들이
결코 남의 이야기만은 아닌 것이 됩니다.
틀린 가상을 감당하기보다는
실제를 틀어 죽이는 것이 이익이 될 수 있으니까요..
이 틀고 죽이는 작업이 게임인 사람들
바로 인간사냥꾼들입니다.
정치판에서 제일 잘 사용되는 인격흠집내기가 아마도 공통분모가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공통분모가 되는 것 같습니다.
사람살리기와
사람죽이기의.
인간사냥꾼들이 예전에는 힘없는 사람들을 괴롭혔다면
이제는 힘있는 사람들도 힘을 벗겨가며 괴롭히는 것이 특징입니다.
벗겨서 추한 모습을 드러내고 죽어야 자신들의 틀린 가상세계가 살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언제부턴가
저도 이 말을 되뇌이게 되었습니다.
"나도 틀릴 수 있다"
신문에 난 책 광고의 한 구절이지만
나의 한계뿐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의 한계를 지적하는
그리고 어쩌면
축복이자
저주일 수 있는
이 한마디
되뇌이다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저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신 말씀의
참 뜻을 깨닫게 되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