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왕사와 문두루비법
발굴전 사천왕사지의 인가
신라시대에는 절이 넘쳐났다. 국교가 불교이고 국왕을 비롯해 대신과 귀족들이 불교를 신봉하면서 국민들은 자연스럽게 불교를 깊게 믿게 되었다. 승려를 국사로 초빙해 왕권에 깊숙이 개입하니 승려들의 수도 따라 늘어나고 사찰이 곳곳에 건립되며 크게 번창했다.
신라시대에는 백제와 고구려, 일본과 중국의 크고 작은 나라들이 침략해와 나라를 지키기 위한 호국사찰이라는 이름으로 절이 국가적인 차원에서 건립되기도 했다. 사천왕사는 대표적인 호국사찰로 손꼽힌다. 녹유신장 벽전과 목탑의 흔적, 문두루비법으로 당나라를 물리친 사천왕사의 내력을 알아본다.
발굴전 사천왕사지의 인가
경주시가지에서 울산방향으로 이어지는 7번국도를 따라 내려가다가 남산 통일전으로 갈라지는 갈림길 왼쪽에 넓은 사찰의 자리가 바로 사천왕사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7년에 걸쳐 발굴작업을 벌이면서 다양한 흔적을 찾아냈다. 밀교로 전해지는 불법을 공부하던 승려, 도승들이 문두루비법을 암송하던 사천왕사의 흔적을 찾아 역사기행을 떠나본다.
❚사천왕사 발굴정비 복원하라
경주 사천왕사지는 경주 남산 맞은편 낭산 남단의 해발 약 53m 낮은 언덕에 위치한 절터이다. 주변에 경주 선덕여왕릉(사적 제182호), 능지탑, 보문리사지, 전 황복사지, 전 신문왕릉 등이 있고 7번 국도를 사이에 두고 경주 망덕사지(사적 제7호)가 있다. 경주시 배반동에 있는 신라시대 대표적인 호국사찰의 절터로 사적 제8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사천왕사는 삼국유사 기록에 의하면 문무왕 19년 679년에 창건됐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쌍탑 형식으로는 최초로 건립한 호국사찰로 목탑의 흔적이 드러나 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또 탑지에서 출토된 녹유사천왕상전은 당시 최고의 조각가였던 양지의 작품으로 알려지고 있다.
사천왕사지의 금당터
고려사에는 문종 때에 사천왕사에서 문두루도량을 27일간 열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당시까지는 사찰이 유지된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김시습의 시 ‘유금오록(遊金鰲錄)’을 통해 15세기 후반에는 민가(民家)로 변해버렸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여러 차례 수습 조사되었지만 절터 중간으로 철길을 놓아 사적지가 크게 훼손됐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2006년부터 2012년까지 발굴조사를 벌여 전제적인 가람배치와 녹유소조상의 배치, 녹유신장상, 목이 날아가고 없는 두 기의 귀부 등을 확인했다. 이 귀부는 문무왕의 비석일 것이라는 설도 있다.
현재 절터에는 동서방향으로 초석을 남긴 사방 3칸의 탑지가 있고 그 북쪽에 초석이 남아 있는 금당지(金堂址)가 있어 쌍탑식 가람배치였음을 알 수 있다. 금당지 북쪽에 동서방향으로 사방 3칸 규모의 작은 건물 기단이 있다.
남쪽 외곽에는 머리가 없어진 동서 귀부와 당간지주 1기가 있다. 이밖에 최근 발굴 조사로 확인된 회랑지와 익랑지, 석등지, 귀부 비각, 북편배수로, 석교가 있고, 일제가 가설한 철도로 파괴된 강당지가 일부 드러나 있다.
사천왕사 목탑터
목탑 기단의 우주와 탱주 옆에는 넝쿨무늬가 있는 장방형전을 쌓아올리고 이 전으로 구획된 면에 녹유소조상을 부착한 것으로 확인됐다. 동회랑지는 북편의 철로에 의해 일부 결실됐다. 남회랑지는 문지 동편에서만 도리칸 11칸, 보칸 1칸으로 확인되었다.
금당지 북쪽 사방 3칸 규모의 방형 건물지, 일명 ‘단석지’는 통일신라시대 쌍탑가람배치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건물지이다. 평가통일신라 초기에 지어진 최초의 쌍탑식 가람이자 2기의 목탑을 나란히 배치한 첫번째 사찰이며, 목탑 기단부의 면석이 녹유소조상이었다는 것이 특이한 것으로 조사됐다. 당나라의 콧대를 납작하게 했던 호국사찰 사천왕사의 복원이 기대된다.
목탑으로 오르는 돌교량
❚호국사찰 사천왕사와 망덕사
문무왕이 당나라의 힘을 빌려 백제와 고구려를 물리치고 삼국통일을 이룩했다. 그러나 당나라군사는 백제와 고구려의 땅이었던 곳에 웅진도독부와 안동도호부를 설치해 나라를 다스리며 신라까지 집어삼키려는 흉심을 보였다. 문무왕은 당나라의 속셈을 눈치 채고 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당나라의 황제 고종은 당시 당나라에 있던 왕의 동생 김인문을 감금하고는 신라를 공격하기 위해 대대적인 군사를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그때 당나라에서 공부를 하던 의상대사가 김인문을 찾아가 그로부터 당나라가 신라를 공격하려한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급격하게 신라로 돌아와 왕에게 알렸다. 문무왕은 대신들을 모아 대책을 논의하면서 명랑법사가 신통한 비법을 익히고 있다는 보고를 듣고, 그를 불러 대응토록 했다. 명랑법사는 낭산 남쪽에 신유림이 있는데 그곳에 절을 지어 불공을 드리면 될 것이라고 계책을 내놓았다.
사천왕사 당간지주
이렇게 사천왕사가 건립되고 있던 중 벌써 당나라 군사들이 서해바다에 이르러 신라를 공격하기 직전이라는 첩보가 신라궁성에 보고됐다. 명랑법사는 공부가 깊은 승려들과 함께 비단으로 임시 절을 짓고 문두루비법을 펼쳤다. 문두루비법으로 서해바다에 집채만한 파도가 일어나 당나라 배를 모두 수장시켰다.
당나라 황제는 신라가 사천왕사를 지어 불법의 힘으로 당나라군사를 물리친다는 소식을 듣고 대신을 신라에 파견해 사실을 파악하게 했다. 신라는 당나라 대신을 속이기 위해 사천왕사 건너편에 망덕사를 짓고 그곳으로 안내했다. 망덕사를 사천왕사가 마주 보이는 가까운 곳에 지었는지 의문이다.
당나라 대신은 망덕사를 둘러보고 사천왕사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그러자 신라는 당나라 대신을 금은보화 등으로 매수해 거짓보고를 올리도록 했다. 예나 지금이나 뇌물 앞에 쉽게 무너지는 인간사를 들여다보는 것도 세상사 공부가 된다고 생각하니 쓴웃음이 난다.
❚문두루비법
문두루비법은 신라가 당나라 군사를 물리친 비법으로 신라와 고려시대에 행했던 밀교의식의 하나로 전해지고 있다. 신라의 명랑(明朗)이 중국에서 밀교를 배운 뒤 635년(선덕여왕 4)에 귀국할 때 처음으로 전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문무왕 때 당나라 군사가 신라를 침략하게 되자 왕은 명랑에게 적을 물리칠 수 있는 비방을 물었다.
이에 명랑은 낭산(狼山)의 남쪽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울 것을 제의했다.
시간이 급박하였으므로 오색비단으로 가건물을 짓고 5방(方)에 신상(神像)을 세운 뒤 유가명승 12인과 함께 문두루비법을 썼다. 그 때 당군과 신라군이 아직 접전하기도 전에 바람과 물결이 사납게 일어나 당나라 배가 모두 바다에 침몰했다고 한다.
문두루는 범어 무드라(mudra)의 소리나는대로 번역한 것으로 풀이된다. 명랑에 의해 처음으로 신라에 전해진 이 비법은 ‘불설관정복마봉인대신주경(佛說灌頂伏魔封印大神呪經)’에 의한 것이다. 이 경에 의하여 불단(佛壇)을 설치하고 다라니 등을 독송하면 국가적인 재난을 물리치고 국가를 수호하여 사회를 편안하게 할 수 있다고 한다.
신라시대 문두루비법 등과 관련된 밀교는 여러 사찰에서 흔적이 발견되고 있다. 외동읍의 원원사도 밀교사원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 불국사 석가탑의 다라니경도 밀교의 하나로 해석된다.
고려시대에도 문두루비법은 자주 개설되었다. 고려의 동북쪽에서 완안여진(完顔女眞)과의 대결이 있었던 1108년(예종 3년) 7월 북쪽 국경 가까운 진정사(鎭靜寺)에서 문두루도량을 열었고, 그 이듬해 4월 서경(개성)의 흥복사(興福寺), 영명사(永明寺), 금강사(金剛寺), 장경사(長慶寺) 등 4개 사찰에서 문두루도량이 개설되었다.
또 1074년(문종 28년) 7월 동경(경주)의 사천왕사에서 27일 동안 문두루도량을 열었으며, 몽고족의 침략이 있었던 1217년(고종 4년)에도 이 도량이 개설되었다. 특히 고려에서는 이 문두루비법을 서경에서 많이 행하였는데 그 까닭은 서경의 위치, 풍수지리설 등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도법처럼 통했던 문두루비법의 주술적 힘이 아쉽다.
❚녹유신장은 북천왕이 빠진 사천왕
경주 사천왕사 목탑 기단부에 있었던 녹유전 조각상은 서울중앙박물관, 국립경주박물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등에 나누어져 보관되어 온전한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2006년부터 2012년까지 사천왕사터를 재발굴하면서 유약으로 구워낸 녹유신장의 모습을 완벽에 가깝게 재현해 공개했다.
경주문화재연구소는 9월부터 올해말까지 연구소에서 ‘양지사석’이라는 제목으로 사천왕사에서 출토된 녹유신장의 완벽하게 재현된 모습과 양지 스님의 걸작품과 행적들을 소개하고 있다.
사천왕사 목탑 기단부 단면에 부착되었던 사천왕상의 조각들은 한면에 3구씩 4면에 돌아가면서 붙어 있었다. 이 조각상들은 칼과 화살을 들고 갑옷을 입은 수호신들이 악귀를 짓밟고 있는 모습을 정교하게 새긴 양지 스님의 걸작이다.
녹유전 조각상들은 머리에 보관을 쓰고 악귀 위에 앉아 있는 수호신(A형), 투구를 쓰고 화살을 든 수호신(B형), 한쪽 다리를 다른 쪽 허벅다리 위에 올려 앉은 반가부좌 자세로 칼을 들고 있는 수호신(C형)으로 드러났다. 특히 A형 조각상은 1916년과 1936년 출토된 하반신과 2006년 발견된 상반신이 90년, 70년 만에 결합돼 완형에 가깝게 복원된 것이다.
수막새
귀면와
‘녹유신장상’으로 불리는 이 조각을 두고 국내 미술사학자들은 불법(佛法)의 세계를 수호하는 4명의 신인 사천왕(四天王)이라는 주장과 불법을 수호하는 8종의 신장인 팔부신중(八部神衆)이라는 설로 엇갈리고 있다.
이런 주장들은 경주문화재연구소의 이번 발굴에서 다르게 확인됐다. 사천왕사의 목탑 기단부의 녹유전 신상은 사천왕상과 같은 네 가지 상이 아니라 사천왕과 비슷한 옷차림을 한 세 가지 상으로만 확인된 것이다. 탑 기단부 한 면마다 ABC형의 신상이 2번씩 되풀이해 붙인 형태로 6개의 신상이 4면에 배치돼 신상은 탑마다 24기씩 부착된 형태로 드러났다.
한 면에 네 개의 상이 연속된다는 강우방 전 이화여대 교수의 사천왕상설이나, 여덟개 상이 연속된다는 문명대 전 동국대 교수의 팔부중상설과 다르게 밝혀진 것이다.
녹유신장은 동서남북 네 방위를 지키는 사천왕으로 북방을 지키는 신의 모습이 결여된 상태다. 이를 두고 김알지와 문무왕은 흉노족, 훈족의 후손으로 북방은 지킬 필요가 없기 때문에 나머지 동서남 세 방위를 지키는 신장상만 새겼던 것이라는 주장이 대두돼 흥미를 끌고 있다.
첫댓글 문두루비법은 만사를 형통케 하는 비법이다.
공부, 건강, 행복을 기원하는 것은 물론 국가적 재앙을 막는 일에도 통했던 비법으로 전하고 있다.
오늘날 문두루비법은 누가, 어디에 쓰고싶어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