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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루는 옛 숙신의 나라이다. 부여의 동북쪽 천여리에 있었으며, 동쪽은 큰 바닷가이다.
남쪽에는 북옥저와 접하고 있으며, 그 북쪽 끝은 알 수 없다. 그 땅은 산이 많고 험했다.
주민들은 부여와 비슷했으나 언어는 부여와 같지 않았다
後漢書/卷85
挹婁,古肅慎之國也。 在夫余東北千餘里,東濱大海,南與北沃沮接,不知其北所極。 土地多山險。 人形似夫余,而言語各異
말갈(靺鞨; 중국어 정체: 靺鞨, 간체: 靺鞨, 병음: Mòhé, 모허)은
6~7세기경 만주 북동부에서 한반도 북부까지 거주한 퉁구스계 민족으로,
본래 쑹화강 (松花江) 유역의 물길(勿吉)이 지배하였으나 6세기 중엽 물길의 세력이 약화되자 각 부족들이 자립하였는데, 이들을 총칭하여 말갈이라 부른다.
발해 멸망 이후 요나라 때부터 여진(女眞)이라 불렸다가 청나라 때에는 만주족이라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1세기 무렵부터 말갈이 신라, 백제와 교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에대해 다산 정약용은 이 시기 등장한 "말갈"을 예족에 해당하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말갈족은 후에 여진족으로 불렸으며,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에 의해 지배를 당하지만
아구다가 부족을 통합하여 세력을 확장해 금나라를 세우고 만주와 북중국을 지배하였다.
둥베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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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린 성 | 랴오위안 · 바이산 · 바이청 · 쑹위안 · 쓰핑 · 옌볜 조선족 자치주 · 지린 · 창춘 · 퉁화 |
랴오닝 성 | 다롄 · 단둥 · 랴오양 · 번시 · 선양 · 안산 · 잉커우 · 진저우 · 차오양 · 톄링 · 판진 · 푸순 · 푸신 · 후루다오 |
헤이룽장 성 | 다싱안링 지구 · 다칭 · 무단장 · 솽야산 · 쑤이화 · 자무쓰 · 지시 · 치타이허 · 이춘 · 치치하얼 · 하얼빈 · 허강 · 헤이허 |
신라사람으로 신라가 고려에게 흡수 되자 북쪽으로가서 세력을 키운 뒤, 941년 여진족의 추장이자 시조가되었다. 960년 죽었으며 그의 아들 완안오노는 여진족 제2대 추장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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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성왕 피습사건의 전말 ▼ [특별기획] 만주대탐사 2부작-1부 제 5의 문명 요하를 가다 |
또는 아이신 구룬(Aisin Gurun)은 여진족 완안아골타가 세운 왕조로 1115년 아골타가 국호를 대금(大金), 연호를 수국(收國)이라고 하고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면서 정식으로 금나라가 역사 무대에 등장하게 된다.
수도는 북송 시대에는 상경 회령부, 남송 시대에는 중도(中都)였으며, 몽골의 침략 이후로 수도를 카이펑으로 천도했다.
1125년에 여진의 금(金)왕조는 거란족의 요를 합병(거란족 중 왕족의 한 명인 야율대석은 거란족을 포섭해서 서요를 세우나 징기즈칸에 의해 망한다.)하고
1153년에 수도를 요(遼)의 남경으로 이동하여 이곳을 중앙수도인 중도(中都)라고 불렀다.
1215년에 몽골이 중도를 불태우고 1237년에 중도 북쪽에 대도(大都)를 건설하였다.
금나라 건국 이전에 여진족들은 지금의 만주 헤이룽장 성에 거주하던 말갈족이었다.
여진족이라는 표현은 10세기 여진족 언어의 "여진"이라는 단어에서 나왔다. 이 단어의 기원은 현재 학계에서 합의되지 않은 상태이다.
요나라의 지배(동단국)를 받았다. 하지만 요나라의 지배가 약화되면서(지리적 요건과 시간적 요건(오대 십국시대)) 여진족들은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결국 여진족들은 거란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시작했고,
1115년 완안아골타라는 뛰어난 지도자가 등장해 부족을 통합하고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며 금나라를 건국했다.
2대 태종 때인 1125년에는 송나라와 동맹을 맺고 요를 협격하여 만주지역으로부터 요를 멸망시켰다. 1126년에 송나라의 수도 카이펑을 점령하자 이들은 권력을 잡게 되었다. 여진 군대는 장강까지 남하하였으나 회하 부근에서 저지되고 남송은 일단 국경을 방어하게 되었다.
그러나 금나라는 송나라와의 사이에 불화가 발생하자 송나라 수도였던 허난 성의 카이펑을 공격하여 1127년에 송나라의 상황 휘종과 황제 흠종 등을 사로잡고 송나라를 강남으로 밀어냈다.
여진 부족들은 전쟁에 뛰어났으나 정착하여 수십 년을 지내게 되자 점차 스스로 유목 정체성을 잃게 되었다. 결국 이들은 중국 한족과 혼인하기 시작하였으며 남송과의 평화를 공고히 하였다. 금나라의 지배자들은 유교 이념을 따르게 되었다.
1189년에 금나라는 몽골과 남송을 상대로 두개의 전선에서 싸우게 되었다.
제8대 선종(재위 1213년 ~ 1223년)은 1214년에 몽골군의 공격을 받고 이를 피하여 도성을 베이징에서 카이펑으로 옮겼다.
1234년 제9대 애종은 몽골, 남송 연합군의 추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살함으로써 금은 건국 120년 만에 멸망하였다.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기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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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 금 태조 (金太祖) |
응건흥운소덕정공인명 장효대성무원황제 (應乾興運昭德定功仁明 莊孝大聖武元皇帝) |
완안아골타 (完顔阿骨打) (아구다) |
수국(收國) 1115년 ~ 1116년 천보(天輔) 1117년 ~ 1123년 |
1115년 ~ 1123년 |
제2대 | 금 태종 (金太宗) |
체원응운세덕소공 철혜인성문열황제 (體元應運世德昭功 哲惠仁聖文烈皇帝) |
완안성(完顔晟) | 천회(天會) 1123년 ~ 1135년 | 1123년 ~ 1135년 |
- | 금 휘종 (金徽宗) (금 희종 추숭) |
경선황제 (景宣皇帝) |
완안종준(完顔宗峻) | - | - |
제3대 | 금 희종 (金熙宗) (금 민종<金閔宗>) |
홍기찬무장정효성황제 (弘基纘武莊靖孝成皇帝) (무령황제<武靈皇帝>) |
완안단(完顔亶) | 천회(天會) 1035년 ~ 1037년 천권(天眷) 1038년 ~ 1040년 황통(皇統) 1041년 ~ 1049년 |
1035년 ~ 1049년 |
- | 금 덕종 (金德宗) (해릉왕 추숭) |
헌고홍도문소무열 장효예명황제 (憲古弘道文昭武烈 章孝睿明皇帝) (명숙황제<明肅皇帝>) |
완안종간(完顔宗幹) | - | - |
제4대 | - | 폐황제 (廢皇帝) (해릉양왕<海陵煬王>) |
완안량(完顔亮) | 천덕(天德) 1149년 ~ 1153년 정원(貞元) 1153년 ~ 1156년 정륭(正隆) 1156년 ~ 1161년 |
1149년 ~ 1161년 |
- | 금 예종 (金睿宗) (금 세종 추숭) |
입덕현인계성광운 문무간숙황제 (立德顯仁啓聖廣運 文武簡肅皇帝) |
완안종요(完顔宗堯) | - | - |
제5대 | 금 세종 (金世宗) |
광천흥운문덕무공 성명인효황제 (光天興運文德武功 聖明仁孝皇帝) |
완안옹(完顔雍) | 대정(大定) 1161년 ~ 1189년 | 1161년 ~ 1189년 |
- | 금 현종 (金顯宗) (금 장종 추숭) |
체도홍인영문예덕광효황제 (體道弘仁英文睿德光孝皇帝) |
완안윤공(完顔允恭) | - | - |
제6대 | 금 장종 (金章宗) |
헌천광운인문의무 신성영효황제 (憲天光運仁文義武 神聖英孝皇帝) |
완안경(完顔璟) | 명창(明昌) 1190년 ~ 1196년 승안(承安) 1196년 ~ 1201년 태화(泰和) 1201년 ~ 1208년 |
1189년 ~ 1208년 |
제7대 | - | 무평황제 (武平皇帝) (위소왕<衛紹王>) |
완안윤제(完顔允濟) | 대안(大安) 1209년 ~ 1211년 숭경(崇慶) 1212년 ~ 1213년 지녕(至寧) 1213년 |
1208년 ~ 1213년 |
제8대 | 금 선종 (金宣宗) |
계천흥통술도근인 영무성효황제 (繼天興統述道勤仁 英武聖孝皇帝) |
완안순(完顔珣) | 정우(貞祐) 1213년 ~ 1217년 흥정(興定) 1217년 ~ 1222년 원광(元光) 1222년 ~ 1223년 |
1213년 ~ 1223년 |
제9대 | 금 애종 (金哀宗) (금 의종<金義宗>) |
순정황제 (順靖皇帝) |
완안수서(完顔守緒) | 정대(正大) 1224년 ~ 1232년 개흥(開興) 1232년 천흥(天興) 1232년 ~ 1234년 |
1223년 ~ 1234년 |
제10대 | - | 말황제 (末皇帝) |
완안승린(完顔承麟) | 성창(盛昌) 1234년 | 1234년 |
금나라의 황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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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태조 · 금 태종 · 금 희종 · 금 해릉왕 · 금 세종 · 금 장종 · 금 위소왕 · 금 선종 · 금 애종 · 금 말제 |
청나라: 1616 - 1912
청나라(淸—) 또는 대청제국(大淸帝國) 또는 다이칭 구룬(Daicing Gurun)은 일반적으로 중국이 여진족(만주족)의 지배를 받은 시기를 말한다.
원래 청나라는 1616년에 여진족의 누르하치가 동북 지역에 건국한 이민족의 나라를 말하는데, 초기에는 금(흔히 “후금”이라 부름)이었다가 후에 세력을 강화하여 청으로 국호를 바꿨다.
이민족의 나라 청나라는 한족의 중국 명나라뿐 아니라 주변의 몽골, 위구르, 티베트를 모두 정복하여 몽골 제국(원나라)을 제외한 역대 중국 왕조 중에서 가장 큰 영토를 이루게 되며, 이민족으로써는 가장 오랫동안 중국을 지배하였다.
1912년 선통제 푸이 대에서 서구열강 세력 등의 영향으로 국력이 약해져 청나라는 멸망하고, 중국 역사에서 2천여 년간 이어졌던 제국의 시대가 끝나게 된다.
1616년 만주족인 누르하치가 만주를 통일하고, 예전에 만주족의 다른 이름인 여진족이 세웠던 금나라를 잇는다는 뜻에서 후금(後金)이란 이름의 나라를 세우며 시작되었다.
그 후계자 홍타이지는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고 주변 각국을 침공하여 영토를 확장함과 동시에 군사·행정 제도인 팔기(八旗) 체제를 확립하였다.
홍타이지의 다음에 즉위한 순치제(順治帝)때 청의 팔기군이 산해관을 넘어서 명나라 수도였던 베이징을 점령하고 수도로 삼았다.
청나라 군대가 만리장성을 넘어서 중국에 들어올 때 ‘양주십일(揚州十日)’,‘가정삼도(嘉定三屠)’와 ‘머리카락을 기르면 목을 자른다(留發不留頭)’는 등의 사건을 일으켰다.
당시 만주의 중원을 정복한 만주족은, 피지배층 한족들로부터 오랑캐라고 극심한 저항을 받았는데, 이들을 기선 제압하려는 목적으로 많은 학살을 자행하였다. 양저우 한 곳에서만 약 80만명을 학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2][3]
이 때 학살당한 인원수는 보수적으로 계산해도 약 5,000만 명에서 최대 1억명의 중국인이 만주족에게 학살되었다는 주장도 있다.[4] 이 주장이 완전히 맞다고 할 수는 없어도, 학살로 인한 인구 감소가 있었다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하지만 정복 초기에만 학살이 있었을 뿐, 이후에 체제가 안정되고, 경제가 발전 하면서 인구는 큰 폭으로 증가하게 된다.
만주족이 세운 청은 원나라와는 달리, 한족을 중용하였으며 그들의 선진 문화를 수용하기에 힘썼다. 순치제에 이어 강희제(康熙帝)가 즉위한 초기까지 오삼계(吳三桂)등 3명의 번왕세력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 청나라에 걸림돌이 되는 세력들이 있었으나 1683년 모두 진압되고, 대만도 청나라 영토로 편입되었다.
청나라의 제4대 황제인 강희제(1661 ~ 1722)는 순치제가 사망하자 8세로 즉위한다. 15세때부터 친정을 시작하여 오배의 난, 삼번의 난을 진압하고 대만을 복속함으로써 진정한 중국 통일을 이루게 된다.
또한 러시아가 강점한 네르친스크를 회복하기 위한 전쟁에서 승리하여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하고, 스타노보이 산맥과 흑룡강을 따라 러시아와 국경을 확정한다. 또한 아직까지 완전히 충성을 맹세하지 않던 외몽골을 정복하여 영토를 넓혔고 자신에게 반항하던 준가르의 군세를 크게 꺾어놓았다.
문화적으로는 한자 5만여자를 부수별, 획수별로 분류한 《강희자전》을 편찬케하였고,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으며, 예수회 선교사(대표적으로 아담샬을 들수있다.)들을 총애하였다.
강희제 치세에 이르러 광동 성을 중심으로 서양과의 무역이 크게 발달한다. 그러나 강희제는 적장자 윤잉을 황태자로 세운 뒤 폐해가 일어나 윤잉을 두 번 황태자에 책봉하고 두 번 폐위하였으며 뒤이어 자식들이 황태자 자리를 놓고 권력 투쟁을 벌여 말년에는 그리 평온하지 못하였다. 그는 6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으며, 아들 35명과 딸 20명이 있었다.
강희제가 사망하자 넷째 아들 옹정제 (1722 ~ 1735)가 45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옹정제는 형제의 난에서 승리하여 부황의 후계자가 되었으며, 청나라의 통치체제를 완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옹정제는 세금을 단일화 하여 국민들의 부담을 덜어주었으며 문화적으로는 강희제 때 시작한 백과사전 고금도서집성을 완성한다. 그러나, 만주족을 비방하는 것을 억누르는 문자의 옥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옹정제는 하루 4시간밖에 자지않고 정무에 너무 몰두하다가 과로 때문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하지만 옹정제의 최후에는 아직도 의혹이 많이 남아있다.
옹정제의 뒤를 이은 건륭제 (1735 ~ 1795)는 몽골 제국을 제외한 중국의 역대 왕조 중에서 가장 큰 영토를 완성하였다. 이 당시의 영토는 몽골, 신강, 티베트를 모두 포함한 것이었다. 또한 미얀마, 태국, 베트남 등의 종주권를 확보 했다. 이 시기의 중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인구가 3억 명을 넘어섰으며, 이는 명나라의 인구가 6천만 명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적으로는 사고전서를 편찬, 경전과 역사서, 철학서, 문집을 모두 모아 10만권을 만들었다. 청조는 이 편찬 사업을 한족 지식인을 감시하는 방법으로 사용하였고, 청조통치에 문제가 있는 내용들은 폐기하였다. 또한 이러한 편찬사업은 금석학의 발전을 가져왔다.
그러나 많은 해외정벌과 계속되는 황실의 사치로 인한 천문학적인 경비가 국가재정에 부담을 주게되어 국운이 기울어지기 시작하게 되었고, 정치적으로도 건륭제의 총신(寵臣)이었던 화신(和神)의 전횡과 관리들의 부패로 인해 건륭제 말기에는 청나라 각지에서 백련교의 난(白蓮敎─亂)을 비롯한 여러 반란이 일어났다.
강희제 이후 옹정제(雍正帝)·건륭제(乾隆帝)까지 3대에 걸쳐 주변 각국을 침공·정복하여 더러는 직접 지배하고 더러는 조공국(朝貢國)으로 삼아 일대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리하여 이 전성기를 강건성세(康乾盛世)로 불렸다. 그러나 건륭제 말기부터 백련(白蓮, 1796년-1804년),·천리(天理, 1813년)의 난을 계기로 청나라는 점차 쇠퇴로 기울었다.
한편, 영국은 1792년 매카트니를 시작으로 이후 몇 차례에 걸쳐 중국에 사절단을 보내 문호 개방을 권유하였으나, 오직 광저우만 개항되었을 뿐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세기무렵에 영국계 동인도 회사가 삼각 무역(아편 무역)으로 경제적 이익을 보려고 했으나, 청조는 이를 반대하여 아편 무역을 금하였다. 그러자 영국은 아편 전쟁(1840년-1842년)을 시작하여 승리하였다. 1842년 난징조약으로 홍콩은 99년간 영국에 넘어갔고 상하이 등 5개 항구가 강제 개항되었다. 이후 중국에서의 이권 확보를 위해 서구 열강이 쇄도해옴으로써 중국은 역사상 유례없이 휘청거렸다.
1851년 홍수전(洪秀全)이 기독교 성격의 사회운동인 태평천국 운동을 일으켰다. 태평천국은 외형상 홍수전이 야훼의 자식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아우라 자칭하면서 기독교를 표방했으나, 내면에서는 만주족 지배로부터의 한족의 독립, 토지의 균등한 분배, 만민 평등을 주장한 사회혁명이었다. 또한 당시 청나라는 영국·프랑스와의 제2차 아편 전쟁(1856년-1860년)이 일어나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제2차 아편 전쟁이후, 청나라는 휴전에 중재역할을 한 러시아 제국에 1860년 베이징 조약을 통해 연해주지방을 할양해야만 하는 서구열강세력들로부터 이권 침탈이 더욱 심화되어갔다.
태평천국의 위세는 그러나 흥수전에 대한 우상화를 경계한 서구 열강과 이홍장과 같은 한족계 신사층을 앞세운 청나라 조정의 협공으로 태평천국은 1864년 수도 천경(天京:태평천국이 난징을 고쳐 부른 이름)이 함락되고 홍수전도 자살함으로써 그 막을 내렸다.
1860년대 이후에 전개된 양무운동(洋務)은 증국번(曾國藩)·이홍장(李鴻章) 등의 주도하에 일어났으며, 군함과 서양식 대포 등 신식 무기를 제조하고 관련 공업을 진흥시켜 중국 산업화의 기원이 되었다. 이홍장은 영국을 방문하여 빅토리아 훈장도 받았다. 사실 양무 운동은 정부의 감독을 받았기 때문에 한계 요인을 안고 있었다. 1894년-1895년의 청일전쟁이 청나라의 패배로 끝나자 양무 운동은 수포로 돌아가고 중국을 둘러싼 열강의 각축은 더욱 치열한 양상을 띠었다.
1898년 캉유웨이(康有爲)·량치차오(梁啓超) 등은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모델로 하여 무술개혁(戊戌)으로 입헌군주제를 확립하고자 했으나 서태후(西太后)·이홍장 등 기존세력의 반격으로 수포로 돌아갔다.
이후 1899년에 일어난 의화단(義和團)과 열강 8국의 연합군이 1900년 베이징에서 격돌한 북청사변과 그 수습을 위한 베이징 의정서(1901년)를 체결하며 청조는 쇠퇴해갔다. 또한 1904년-1905년의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제국은 러시아 제국을 물리치고 남만주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하였다.
서태후는 유학생을 일본 등에 보내 선진국의 헌법과 의회 제도에 대해 알아보게 했으며, 국내적으로도 낡은 과거 제도 대신 각지에 대학을 세워 신학문의 연구 기반을 조성하는 한편 최신식 군대도 만들었다. 그러나 이미 각지에서 만주족을 비난하고 한족의 공화국을 지향하는 혁명세력이 움트고 있었다. 이들 모두는 일본의 일부 지식인이 주장한 중일 연대론(中日聯帶論)과도 상호연계되기도 했다.
결국 청은 신해혁명(1911년)으로 인해 1912년 멸망하였고, 위안스카이가 중화민국의 대총통으로 취임하면서 그 영토를 계승하였다. 그 이후, 1949년에 중국 본토가 중화인민공화국이 되고, 타이완 섬은 분리되어 중화민국이 된다.
청나라 시대에는 외국 무역이 더욱 활발해져, 은의 유입도 크게 증가하였다. 청은 18세기 초에 인두세(정은)를 따로 거두지 않고, 토지세(지은) 속에 포함시켜, 세금 제도를 단순화한 지정은제를 시행하였다.
18세기 중엽에 선교사를 앞세운 서구열강이 교역을 원하자, 청나라는 교역항을 광저우로 한정하여 서양 상인들을 통제하고, '공행'이라는 특허 상인의 조합에 대외 무역의 독점권을 주었다. 공행무역등으로 서양 상인들의 무역량이 적었을거라 생각하겠지만, 오히려 그 반대로 청나라의 차와 생사는 유럽에서 많은 이익을 올릴 수 있었기 때문에 서구 열강과 청의 무역량은 날이 갈수록 증가하였다. 한편, 이시기에 유럽의 상인들 중에서는 영국 동인도 회사가 청나라와의 무역을 독점해 가고있었을 무렵이었다. 무역량이 늘어남에 따라 영국은 청나라와 무역에서 '무역 역조 현상'이 두드러졌다. 막대한 양의 은을 청에 지불하게 된 영국은 이를 개선하기 위해 청나라에게 무역 제한조치의 철폐를 요구하였다.
19세기가 되자, 영국은 무역적자를 메우기 위해 동인도 회사를 앞세워 인도에서 생산되는 아편을 중국에 수출하였다. 매년 급격히 영국 동인도 회사의 아편 수출양이 증가하자, 청나라는 국내의 아편중독자가 늘어나는가 하면, 막대한 양의 은이 빠져나가게 된다. 이무렵 청나라는 '은본위제'를 실시했었는데, 청나라는 영국과의 '아편 무역'으로 인해 은의 급격한 감소로 국가체제의 위기를 맞게된다. 1830년대에는 은의 가격이 두 배 이상 폭등하고, 그결과 은으로 세금 납부하던 농민들과 상인들은 부담이 두 배로 늘어났고, 결국 세금이 제대로 징수되지 않아, 국가 재정이 곤란한 지경에 빠져 버린다.
1840년 제1차 아편전쟁 이후, 외세 열강세력들의 침탈이 본격화 심화되면서 청나라의 경제상황은 더욱 더 악화되어만 가게 된다.
청나라때에는 양자강 중류 지역이 최대의 쌀 재배 지역이 되고, 감자, 양파, 땅콩, 옥수수 등의 외래작물이 재배되었다. 이러한 농업에서의 상품 작물 재배와 함께 면, 제지, 제당 등의 분야에서 매뉴팩처가 발달하였다.
비(非)한족 지배자인 청조는 방대한 한족 지배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때문에 중국의 전통문화와 여러 제도를 답습하고 한족의 협력을 얻어 지배체제를 확립코자 하였다. 특히 한족의 지식인층을 회유하여 관심을 정치와 사회문제로부터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서 그들을 동원하여 대편찬 사업을 추진하였다. 강희 연간의 『강희자전(康熙字典)』, 옹정의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건륭의 『사고전서』는 그렇게 하여 생긴 것이다.
반면에 반청적(反淸的)이라 판단한 사상에는 용서 없는 탄압을 가하여 이른바 문자의 옥을 일으켰다. 실증주의(實證主義)에 투철한 실사구시(實事求是) 학풍인 고증학(考證學)은 이미 명대에 시작을 보았지만 청조의 사상 탄압은 한인 학자로 하여금 더욱더 고증학으로 나아가게 하여 정치 문제로부터 도피시켰다. 그러나 고증학은 그 자신 일종의 과학적 객관주의이며, 서양 과학문명의 영향도 더해져 학문의 전분야에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었다. 가령 실제의 측량으로 제작된 황여전람도(皇與全覽圖) 등은 이러한 학풍의 소산인 것이다.
또한 청대에는 소설과 희곡의 발달이 한층 더 현저하여 『홍루몽(紅樓夢)』 『유림외사(儒林外史)』 『요재지이(聊齊志異)』 등 걸작이 나왔고, 희곡도 풍성하게 연출되었다. 회화에서는 중국의 전통적 기법 외에 카스틸리오네에 의하여 서양의 화법(畵法)이 받아들여졌고, 건축은 원명원(圓明園)과 같이 베르사유 궁전에도 비길 만한 훌륭한 건출물들이 건설되었다.
중국에서는 일찌기 당나라 시대에 네스토리우스파(京敎)선교사들이 입국하여 대진사라는 교회를 세우고 선교활동을 하였다. 천주교는 명나라때부터 마테오 리치 신부(1552년-1610년)등의 예수회 선교사들의 전교활동으로 소개되었다.
천주교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전교하면서 겪었던 어려움중 하나는 조상제사문제였다. 조상제사문제는 1704년 조상제사에 반대하는 도미니쿠스 수도회와 조상제사를 중국인의 전통으로 존중하는 예수회간의 신학논쟁으로 이어지는데, 결국 교황청에서 조상제사를 천주교 교리에 어긋나는 것으로 규정하여 금지함에 따라 중국의 천주교 신자들과 선교사들은 탄압을 받게 되었다.[5] 천주교 선교사들은 유럽에 중국 문화가 소개하여 유럽 지식인들의 중국연구열을 높이는 계기를 만들었으며, 중국인들과 똑같은 옷을 입는 등 중국의 전통문화를 존중하였다.
개신교도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였다. 18세기 독일에서 태동한 모라비안 교인들은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였으며, 1860년에는 영국의 제임스 허드슨 테일러와 그의 아내 마리아 테일러가 선교활동을 하였다. 이들은 중국사람들과 똑같은 옷을 입음으로써 중국인들에게 다가섰는데, 당시 개신교 선교사들에게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허드슨 테일러는 1865년 중국내륙선교회(영어: China Inland Mission,CIM)를 결성하여 1898년 중국 후난성을 마지막으로 선교활동을 하였다. 그의 뒤를 이은 중국 내지선교회 선교사들은 1949년 중국 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정부를 수립하여 1951년에 철수할 때까지 활동하였으며, 1964년 OMF(영어: Overseas Missonary Fellowship)으로 선교회의 이름을 바꾸었다. [6]
통치 행정 구역의 구분: 성-부-주-현-청 (省 府 州 縣 廳)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재위기간 |
---|---|---|---|---|
- | 청 시조 (淸始祖) (청 태조 추숭) |
- | 애신각라포고리옹순 (愛新覺羅布庫里雍順) |
- |
- | 청 조조 (淸肇祖) (청 태조 추숭) |
원황제 (原皇帝) |
애신각라맹특목 (愛新覺羅孟特穆) |
1405년 ~ 1433년 |
- | - | 순황제 (順皇帝) (청 태조 추숭) |
애신각라충선 (愛新覺羅充善) |
1433년 ~ 1467년 |
- | - | 흥황제 (興皇帝) (청 태조 추숭) |
애신각라탈라 (愛新覺羅脫羅) |
1467년 ~ 1481년 |
- | - | 정황제 (正皇帝) (청 태조 추숭) |
애신각라석보제편고 (愛新覺羅錫寶齊篇古) |
1481년 ~ 1522년 |
- | 청 흥조 (淸興祖) (청 태조 추숭) |
직황제 (直皇帝) |
애신각라복만 (愛新覺羅福滿) |
1522년 ~ 1542년 |
- | 청 경조 (淸景祖) (청 태조 추숭) |
익황제 (翼皇帝) |
애신각라각창안 (愛新覺羅覺昌安) |
1542년 ~ 1571년 |
- | 청 현조 (淸顯祖) (청 태조 추숭) |
선황제 (宣皇帝) |
애신각라탑극세 (愛新覺羅塔克世) |
1571년 ~ 1583년 |
제1대 | 청 태조 (淸太祖) |
승천광운성덕신공조기입극인효 예무단의흠안홍문정업고황제 (承天廣運聖德神功肇紀立極仁孝 睿武端毅欽安弘文定業高皇帝) |
애신각라노이합적 (愛新覺羅努爾哈赤) (누르하치) |
1583년 ~ 1616년 |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기간 |
---|---|---|---|---|---|
제1대 | 청 태조 (淸太祖) |
승천광운성덕신공조기입극인효 예무단의흠안홍문정업고황제 (承天廣運聖德神功肇紀立極仁孝 睿武端毅欽安弘文定業高皇帝) |
노이합적 |
천명(天命) | 1616년 ~ 1626년 |
제2대 | 청 태종 (淸太宗) |
응천흥국홍덕창무관온인성 예효경민소정융도현공문황제 (應天興國弘德彰武寬溫仁聖 睿孝敬敏昭定隆道顯功文皇帝) |
황태극 |
천총(天聰) | 1626년 ~ 1636년 |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기간 |
---|---|---|---|---|---|
제2대 | 청 태종 (淸太宗) |
응천흥국홍덕창무관온인성 예효경민소정융도현공문황제 (應天興國弘德彰武寬溫仁聖 睿孝敬敏昭定隆道顯功文皇帝) |
황태극 |
숭덕(崇德) | 1636년 ~ 1643년 |
- | 청 성종 (淸成宗) (청 세조 추숭) |
무덕수원광업정공 안민입정성경의황제 (懋德修遠廣業定功 安民立政誠敬義皇帝) (예충친왕<睿忠親王>) |
다이곤 |
- | - |
제3대 | 청 세조 (淸世祖) |
체천융운정통건극영예흠문 현무대덕홍공지인순효장황제 (體天隆運定統建極英睿欽文 顯武大德弘功至仁純孝章皇帝) |
복림 |
순치(順治) | 1643년 ~ 1661년 |
제4대 | 청 성조 (淸聖祖) |
합천홍운문무예철공검관유 효경성신중화공덕대성인황제 (合天弘運文武睿哲恭儉寬裕 孝敬誠信中和功德大成仁皇帝) |
현엽 |
강희(康熙) | 1661년 ~ 1722년 |
제5대 | 청 세종 (淸世宗) |
경천창운건중표정문무영명 관인신의예성대효지성헌황제 (敬天昌運建中表正文武英明 寬仁信毅睿聖大孝至誠憲皇帝) |
윤진 |
옹정(雍正) | 1722년 ~ 1735년 |
제6대 | 청 고종 (淸高宗) |
법천융운지성선각체원입극 수문분무흠명효자신성순황제 (法天隆運至誠先覺體元立極 敷文奮武欽明孝慈神聖純皇帝) |
홍력 |
건륭(乾隆) | 1735년 ~ 1795년 |
제7대 | 청 인종 (淸仁宗) |
수천흥운부화수유숭문경무 광유효공근검단민영철예황제 (受天興運敷化綏猷崇文經武 光裕孝恭勤儉端敏英哲睿皇帝) |
옹염 |
가경(嘉慶) | 1795년 ~ 1820년 |
제8대 | 청 선종 (淸宣宗) |
효천부운입중체정지문성무 지용인자검근효민관정성황제 (效天符運立中體正至文聖武 智勇仁慈儉勤孝敏寬定成皇帝) |
민녕 |
도광(道光) | 1820년 ~ 1850년 |
제9대 | 청 문종 (淸文宗) |
협천익운집중수모무덕진무 성효연공단인관민장검현황제 (協天翊運執中垂謨懋德振武 聖孝淵恭端仁寬敏莊儉顯皇帝) |
혁저 |
함풍(咸豊) | 1850년 ~ 1861년 |
제10대 | 청 목종 (淸穆宗) |
계천개운수중거정보대정공 성지성효신민공관명숙의황제 (繼天開運受中居正保大定功 聖智誠孝信敏恭寬明肅毅皇帝) |
재순 |
동치(同治) | 1861년 ~ 1875년 |
제11대 | 청 덕종 (淸德宗) |
동천숭운대중지정경문 위무인효예지단검관근경황제 (同天崇運大中至正經文 緯武仁孝睿智端儉寬勤景皇帝) |
재첨 |
광서(光緖) | 1875년 ~ 1908년 |
비정통 | - | 대아가 (大阿哥) (대황자<大皇子>) |
부준 |
보경(保慶) | 1899년 |
제12대 | 청 공종 (淸恭宗) |
배천동운법고소통수문 경부관예정목체인입효민황제 (配天同運法古紹統粹文 敬孚寬睿正穆體仁立孝愍皇帝) (말대황제<末代皇帝>, 손황제<遜皇帝>) |
부의 |
선통(宣統) | 1908년 ~ 191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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