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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숙 堂叔
작가약력 : 조진태 *1971년 <석화>로 아동문학 등단 이후, 1976년 월간문학에 단편<雨滴>발표로 소설작품 활동 *창작집<석화><옥상의정원><견습기><비목><못다부른노래><초원에잠든별>외 다수. *수필집<오동잎 잎새마다><인생은꽃으로향기로><세월의소리> 외 교육저서. 논문집 등 다수. *한국문인협회 음성군지부회장, 월간<학부모>주간, 교육세계신문 기자(차장) 역임 *현재 한국소설가협회중앙위원, 한국수필문학가협회이사, 한국문인협회 음성군지부 고문, 중앙대학교 문인회이사. |
보랏빛 하늘이 바닷물 색을 띠기 시작하자 스물거리는 아지랑이가 햇빛에 흔들리고 있다. 온통 녹색이 밭언덕 산자락마다 질펀하다. 오월도 중순을 접어들면서 햇볕은 점점 두꺼워지더니 밤마다 내리는 아침 이슬이 햇빛에 하늘거리는 아지랑이와 함께 그 영롱함이 더해간다.
오월 훈풍이 가끔가끔 초여름을 재촉이라도 하듯 일꾼들의 이마를 스쳐가자 어느덧 봄이 다가서는 초여름에 한 발짝 물러설 무렵 산자락 밭언덕마다 찔레꽃이 흐드러지게 피기 시작한다.
준혁은 채마밭에서 괭이질을 하다 말고 그 흐드러지게 핀 찔레꽃을 새삼 올려다본다. 그리고는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손등으로 쓰윽하니 훔치며 말했다.
“허허, 그 놈의 찔레꽃 흐드러지게도 피었군!”
때마침 아내도 바랭이를 매느라 호미질을 하다가 뜬금없이 하는 찔레꽃이란 소리에 같은 쪽으로 시선을 모아 보냈다.
그 곳엔 정말 눈이 부실 만큼 하얗게 핀 찔레꽃이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어머나, 엔간히도 탐스럽네.”
아내 미령이 찔레꽃을 새삼 떠올리고 있을 때 준혁 역시 생각은 아득한 기억 속으로 거슬러 오르고 있었다.
준혁의 아버지 정인수씨는 국가 비상대책 상임위원에서 5공이 자리잡기 시작하면서 국회재무분과위원장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H대학교의 총학생회 회장이던 준혁은 군사독재에 항거하며 민주화 운동으로 매일 데모에 앞장섰다.
그는 어느 날 드디어 데모의 주동자로 현상 수배되었고 날마다 쫓기는 몸으로 피신을 다녔다. 부모가 아무리 설득을 해도 듣지 않았던 준혁 때문에 5공의 권력핵심에 있던 아버지 정인수씨 마저 권좌에서 물러났다.
그 무렵 정보계 형사들은 학원 내까지도 마구 진입해 데모 주동자를 색출하는데 혈안이 돼 있었다.
날이 갈수록 민심은 5공정권으로부터 이완되기 시작하고 학생들의 데모는 과격해져서 폭력 양상을 띠며 화염병과 최루탄으로 밤이 새고 날이 저물기 일쑤였다. 이 지경에 이를 무렵 정보계 형사들은 고위층의 특별 지시에 따라 데모 주동자인 준혁을 체포하기 위해 점점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준혁은 할 수 없이 교회나 성당으로 전전하다가 결국은 시골 깊숙이 잠적할 수밖에 없었다.
준혁은 당숙이 사는 충청도에서도 오지인 음성땅, 거기서도 한참 들어가야 하는 감우재 고개 너머 호방터로 들어갔다. 당숙은 일찍이 교직을 물러나 이 산간 오지인 호방터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다. 그는 세상과 담을 쌓고 인생의 고단한 짐을 이곳 초야에 내려놓고 흙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었다. 그도 고등학교 교장 시절 학생들의 데모를 사전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직위 해제되었고 얼마 안 가서 사직서를 던지고 시골로 은둔해 온 처지라 준혁이 찾아갔을 때 그는 내심 반기면서도 조심해서 맞아 주었다.
“잘 왔다. 천둥 번개 일고 먹구름 끼던 여름이 있으면 반드시 맑은 하늘에 별이 뜨고 소슬바람에 이삭 여무는 가을이 오는 법이다. 이곳에서 지내기란 여간 힘들지 않을 테지만 견뎌 보거라. 많이 웅크려서 멀리 뛰는 개구리를 보지 않았느냐? 이 세상 또한 그리 오래 가던 못할 겨. 당분간 흙 냄새 맡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이고…….”
당숙은 흙 묻은 손을 내밀어 준혁의 손마디가 저릴 만큼 꼭 잡아 주었다.
저녁녘의 햇살이 당숙의 주름진 이마를 어루만지듯 빗겨나갈 때 긴 세월 동안 교육 한생을 다하지 못한 그의 원한도 준혁의 짐작만으로도 능히 역력해 보였다.
당숙은 한참이나 잡고 있던 준혁의 손을 풀며 왼손에 쥐었던 호미를 도로 옮겨 잡더니 부추 밭에 김매기를 시작한다.
만춘의 햇살에 꽤나 그을린 당숙의 얼굴은 검붉게 보였지만 연세에 비해 늙고 쇠퇴해진 모습은 아니었다. 반세기 가량을 교직에만 몸담고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지낸 관계로 피부 빛이 유난히도 하얗던 당숙은 왕년의 모습과는 달리 지금의 모습은 차라리 건강해 보이기도 했다.
당숙은 깊었던 상처에 새살이 돋듯 농군이 되면서 자연 속에서 새 삶을 가꾸며 남은 생에 활력을 되찾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교직을 갑작스레 물러난 후 한동안 허탈과 실의에 빠져 분통을 터트리던 지난날 당숙의 초췌한 모습은 아니었다.
평소 품위나 고상함과는 달리 한 인간이 지닌 도덕과 가치 기준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을 때 어이없어, 제풀에 지쳐 버린 어린아이처럼 멍하게 지내던 그때와는 확실히 달랐다.
준혁도 당숙의 곁에서 맨손으로 부추 밭의 잡풀을 뽑으며 말했다.
“부모의 뜻을 거역하고 불효를 저질러서까지 이 몰골로 찾아뵈서 죄송합니다.”
“젊음은 어떠한 질곡(桎梏)에서도 굽힘이 없어야 참다운 젊음이요, 그것은 곧 역사를 변형하기도 하는 법이거든. 부정과 불의에 항거함은 젊은이의 용기요 시대적 사명일 테니 너무 집안 걱정일랑 접어 두도록 해라.”
다행히도 당숙은 준혁의 편에 서 준 셈이었다. 해서 준혁은 제6공화국의 6·29 선언이 올 때까지 호박골에서 별 탈 없이 지낼 수가 있었다.
준혁은 그 날 당숙 곁에서 텃밭을 매며 두꺼운 산 그림자가 내리고 어둠이 허리까지 찰랑찰랑 차오를 때까지 일을 거들다가 당숙이 기거하는 농막으로 들어갔다.
그 날 밤 준혁은 당숙의 집 안쪽 골방에서 자면서 몇 번이나 몸을 뒤척이며 잠을 설치곤 했다. 같이 데모를 하다가 형사대에 끌려 가 싸늘한 감방에서 지내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심한 물고문과 심지어 전기 고문으로 초주검을 당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기에 더욱 마음이 불편했다. 자기 혼자 이런 곳에 와서 편안히 지낸다 생각하니 잠이 올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준혁은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하고선 새벽 일찍 일어났다.
호방터의 여명은 어둠과 밝음이 교차되면서 부윰한 안개가 엷게 산자락과 밭언덕을 덮어오며 하루의 아침을 열고 있었다. 준혁이 방문을 나서 잔디밭 뜰을 나섰을 때 이미 당숙은 일어나 괭이 한 자루를 어깨에 메고 사립을 나서고 있었다.
“당숙부님, 피곤하시지 않으셔요? 이렇게 일찍 일어나시고…….”
“피곤하긴, 너도 일찍 일어났구나. 좀 더 잘 것이지…….”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나세요?”
“뭐, 습관이지.”
“그럼, 낮에 피곤하실 텐데 낮잠이라도 한숨 주무시나요?”
“낮잠 잘 시간이 어디 있어. 농사꾼은 한시도 쉴 틈이 없는 게야.”
준혁은 당숙을 따라 집 주변을 돌아보았다. 새벽은 점점 밝음으로 채워지며 당숙이 경영하는 농원을 훤히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준혁은 당숙을 따라 농장을 돌아보노라니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십 년 전 시골로 이사를 간다기에 트럭에 이삿짐을 싣고 당숙과 함께 처음 도착했던 이곳은 말 그대로 묵정밭에 잡풀만 무성한 황무지였다. 그 황무지를 퇴직금과 서울 재산을 정리해 구입한 것이었다. 전에 살던 사람이 낡고 퇴락한 주택 옆에 겨우 채마밭 정도 일구어 살아갔던 모양이고, 만여 평이나 된다는 농토는 억새풀이며 망초대가 어른의 키만큼이나 자라 까투리가 알을 낳고, 노루며 산토끼가 제멋대로 놀다 가는, 황량하기 이를 데 없던 곳이었다. 그런 곳에 짐을 내려놓으며 당숙은 말했었다.
“참으로 한갓져서 좋구나. 제2의 인생을 걸어 볼만한 곳이거든.”
그러했던 그 농장이 그때와는 전연 딴판이었다. 그야말로 상전벽해(桑田碧海)였다. 우선 삐딱하게 반쯤은 기울어져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던 고가부터가 달랐다.
당숙이 기거하는 농막은 말이 농막이지 도시의 단독 주택 못지않았다. 기울어져 가던 고가를 현대에 맞게 멋지게 리모델링해서 참으로 생활하기에 편리하도록 손질돼 있었다.
내부에는 서가며, 욕실에다, 응접실과 침실이며 주방을 현대식으로 바꾸고, 간간이 들리는 옛친구들을 위해 별실도 마련되어 있어서 준혁이 당분간 머물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서가에는 서울서 옮겨온 장서가 수천 권이나 꽂혀 있었고, 부속 건물로 지은 창고에는 각종 농기구와 영농장비들을 깨끗이 정비해서 알맞게 진열해 놓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점은 손수 고안하고 설계해 지은 비닐하우스 안에 수백 분의 분재와 틈틈이 수집해서 손수 좌대를 깎고 다듬어서 진열해 놓은 수석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거기다가 밭이며 그 언저리에 널려진 수많은 돌들을 모아 쌓아 놓은 탑들도 장관이었거니와 장승과 솟대를 농장 둘레의 울타리 따라 낸 산책로에다 서너 자 간격으로 세워 두었으니 그 또한 당숙이 아니고선 해낼 사람이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준혁은 그제야 당숙이 퇴직 후 십 년 간이나 호방터를 단 한 번도 나가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해가 갔다.
“당숙님은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만평도 넘는 이 넓은 땅을 혼자서, 그것도 손수 이렇게 가꾸어 놓으시다니요! 그야말로 피땀을 쏟아 부은 셈이네요?”
“대단할 거야 뭐 있겠나. 하기야 교직에서 쫓겨나다시피 했고, 거기다가 자식 하나 있었지만, 결혼하자마자 외국에 나가 버렸으니 식구란 우리 내외뿐이라 농장 가꾸는 일 말고 할 일이 따로 있었겠어. 그래서 자고새면 이 농장에 엎드려 살아왔지. 물론 독서 시간을 제외하고는.”
“이 농원이야말로 흔히 말하는 테마공원이 아니라 ‘테마농원’이라 하겠군요.”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처음부터 그런 생각으로 시작한 것은 아니었지. 환갑도 진갑도 다 지난 나이에 무슨 미래를 위한 투자를 하겠어, 아니면 원대한 꿈을 심겠어. 다만 세상사를 잊고, 사람을 잊고, 나를 잊는 방법으로 그저 해 본 거지.”
준혁의 눈에 비친 당숙의 ‘찔레꽃 농원’은 그렇게 화려하지도, 요란하지도 않은, 마치 찔레꽃처럼 수수하고 가식이 없으면서도 올목졸목하며, 끈질긴 생명력이 넘치는 그런 농원이었다.
농원 전체를 마치 씨줄과 날줄을 쳐서 바둑판 모양으로 나누어 길을 내고 그 네모진 밭뙈기에다 사과, 복숭아, 배, 감, 호두, 자두, 다래, 머루, 포도, 밤, 대추, 석류, 앵두, 살구, 매실 등 과일 나무를 심고, 두릅, 엄나무, 오갈피, 옻나무, 참죽나무, 개금나무, 산수유, 동백, 뽕나무 등을 심었는가 하면, 장미, 진달래, 개나리, 홍철쭉, 황철쭉, 백철쭉, 수국, 황매화, 백매화, 모란, 치자, 라일락, 작약, 과꽃, 나리, 봉숭아, 백접시꽃, 홍접시꽃, 구절초, 국화 외에 야생화 등 기화요초도 키에 따라 군락을 이루었고, 그 군락지 마다 하나하나 패찰이 세워져 있었다.
그 넓은 농원 둘레에는 산책길을 내어서 그 길 따라 후박나무, 목련화, 전나무, 자장나무, 단풍나무, 헛개나무, 모과나무, 은행나무, 벚나무, 느티나무 따위가 손 안간 데 없이 키워져서 초여름의 아침 산책길에 싱그러움을 더해 주고 있었다. 또한 기거하는 집 주변에는 채마밭을 잘 손질해서 부추, 근대, 상추, 시금치, 무, 배추, 오이. 토마토, 당근, 머위, 우엉, 가지, 호박, 참깨, 들깨, 감자, 고구마, 옥수수, 산나물, 들나물까지 골고루 가꾸어서 밥솥에 밥 안쳐 두고 손만 내밀면 찬거리는 얼마든지 장만하게끔 되어 있다.
농원을 거닐다 보면 돌아가는 모퉁이마다 쉬엄쉬엄 쉬어갈 수 있게 통나무 의자도 만들어 놓았고, 음풍영월하는 시인 묵객도 아니면서 군데군데 자연석을 세워 거기다가 명시,명문장을 각인해 두었으니 과히 문학공원이라고도 할만하다.
준혁은 당숙이 가꾼 ‘찔레꽃 농원’을 돌아볼수록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도회의 돈 많은 어느 재벌이 거금을 투자해서 만든 별장도 아니고, 순전히 당숙 당신 내외만의 손으로 가꾼 농원이라는데 입이 벌어져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다.
“이 정도의 농원을 가꾸는 일이란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야. 한 십 년 걸렸지만, 그 십 년의 세월이 짧은 것이 아니잖냐 그 말이야. 나이 들면 잠도 잘 안 와. 하루에 네 댓 시간 자면 돼. 그 십 년을 초수로 환산해 보라고. 오천이백오십육만 초가 아닌가. 십 년을 자면 잠자는 시간만도 팔백칠십육만 초나 되거든.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들 하지 않던가? 십 년 동안에는 식물도 자라고 흙도, 사람도 변할 뿐만 아니라 모든 생물 무생물이 가만있질 않아. 살아 있는 생물에 애정을 쏟으면 쏟는 만큼 자라고 번성해져. 아무 가치 없이 흙 속에 묻혔거나 길섶에 나둥그러진 돌도 저렇게 주워다가 탑을 쌓고 글을 새겨 두고 보면 죽음에서 부활되어 다시 생명력을 갖게 되는 거지.”
“이 수많은 수종과 기화요초는 어떻게 다 구하셨는지 궁금하군요?”
내가 직접 구한 것도 많지만, 대부분은 여러 곳에 편지를 보내 종자를 구입하기도 했고, 아는 분들로부터 종자나 묘목을 기증을 받아 씨 뿌리고 가꾸어 놓은 거야. 처음에는 친구들도 이제야 씨 뿌려 뭐 하겠느냐며 황당무계한 짓 말라고 말리기도 했다가 지금은 와 보고 감탄을 하더군.”
“오늘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할지라도 나는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스피노자의 말을 실천하신 셈인가요?”
“천만에. 앞에서도 말했지만 맹목적이었어. 그저 나무를 심고, 땅을 파고 채소를 가꾸고 짐승을 기르면서 세월을 삭이자고 작정을 했었지. 육순이 넘은 나이에 씨를 뿌리고 묘목을 가꾸어 황금이 열린다 한들 무엇에 쓰겠어. 더군다나 자식마저 떠나버리고 없는 마당에. 하지만 일하는 즐거움은 대단했지. 일도 일 나름이라 특히 노동이야말로 마음과 몸을 동시에 건강하게 해 주거든. 일을 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거야. 일에서 즐거움을 찾고, 즐기는 재미에 푹 빠져 있노라면 우리 부부는 마치 신선이 된 기분이었지.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운’ 그 따위 게을러터진 인간은 조선왕조 시대의 삼류 선비나 할 짓이고, 오늘을 살아가는 고민 많은 인간들이나 노인들에게는 일에 푹 빠지는 것 외는 어떤 치료법이 없다는 게 내가 터득한 진리이고 지론이야.”
“이 정도로 노력을 하셨는데 소득은 어느 정도나 되는지요?”
“소득, 그렇지. 소득이 있고 말고. 과일에, 채소에, 닭, 오리, 염소 등에서 얻는 육류에, 연못에 기르는 물고기하며, 고구마, 감자, 콩, 토란에다 논마지기에서 생산하는 몇 가마의 쌀이면 우리 두 식구 호구지책으로 족하거니와 우리 부부 나란히 이 찔레꽃 농원을 한 바퀴 돌아볼 때는 뭔가 모를 행복감에 젖기 일쑤니 거기에서 더 소득을 바래 뭣하겠는가? 또한 하루가 저물어 뜰 앞에 심은 오동나무에 달이 뜨고, 연못가에 심은 양류에 소소한 바람 지나갈 적에 잔디밭에 놓인 평상에 국화꽃으로 빚은 술상 앞에 놓고 먼 곳에서 모처럼 찾아온 옛 벗과 함께 일배일배 부일배로 술잔 기울이는 그런 풍류도 인생 삶의 일부일진저. 이 또한 소득이라 아니할 수 있으리. 안 그런가?”
당숙은 농원을 한 바퀴 돌아 본 후 우리에서 염소를 몰아 풀밭에 매어 두고 닭, 오리 장에 모이를 뿌려 준 다음 연못에 걸어 둔 낚싯대 너머로 물고기에게 먹이를 던져 주었다. 그러고 나니 아침해가 한 뼘이나 솟아 있었다. 해맑은 햇살은 아침안개가 산자락 밭언덕을 희뿌연 연기처럼 휘감아 오르는 사이로 눈이 부셔왔다.
준혁은 그날로부터 근 이태 동안을 찔레꽃 농원에서 당숙을 도우며 생활하다가 5공 정부 끝 무렵 노태우의 6·29 선언으로 복교를 하려고 서울로 돌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학적은 이미 제적된 지 오래여서 복학이 불가능했다.
준혁은 부모님을 찾아갔지만 호통만 맞고 집안에 발걸음도 들리지 못하게 했다.
할 수 없어 다시 서울로 올라온 준혁은 운동권 학생들에게 데모 선동 자금을 대 주며 후원해 주던 야당지도자를 찾아갔다.
그는 몹시 반색을 하며 반겼다. 육이구 선언으로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대통령을 간접 선거로 선출하던 것을 이제 대통령을 직선제로 할 것을 선언하자 야당지도자는 대권을 노리고 한층 더 운동권 학생들을 이용했다. 몇 개월 안 돼 대선을 위한 총력전이 시작되자 학생들을 적절히 이용해 신군부에 대항하는 학생데모대가 거리를 뒤덮었다.
그 데모대의 한복판에는 역시 정준혁이 우뚝 서 있었다. 선거전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전투를 방불케 하는 데모로 밤낮이 없었다. 화염병과 최루탄이 도시의 곳곳을 난무했다. 준혁은 몇 번이나 화상까지 입고 병원을 들락이면서까지 데모를 주도했지만 결과는 역시 노태우의 승리로 끝났다.
준혁은 민주화의 조종이 울렸다고 생각지 않았다. 서울의 봄은 기어코 오고 말 것이라는 신념으로 다시 운동권 학생들을 규합했다.
데모는 대선 때처럼 심하지는 않았지만 올림픽을 치르던 전후를 제외하고는 여전히 계속되었다. 특히 6공이 끝날 무렵 3당 합당으로 YS가 정권을 잡자 특정지역 사람들은 더욱 반발했고 그 지역을 중심으로 한 학생들은 준혁을 중심으로 과감한 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준혁은 이제 정치인도 아니고 학생도 아닌 애매모호한 존재로 야당정치인의 주변을 돌며 빛 잃어 가는 민주화 투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는 이제 민주화의 투쟁은 신군부와의 투쟁이 아니라 정권의 평화적 교체에 있다고 보았다. YS의 합당정치는 아무리 문민정부라 해도 평화적 정권 교체가 아니므로 민주정치가 아니라는 지론이었다. 그러나 YS는 날로 인기가 높아졌고 ‘역사 바로 세우기’ 구호까지 내걸어 부정부패를 뿌리 뽑고, 군부의 잔재 청산을 위해 전직 대통령 두 명을 한꺼번에 감옥으로 처넣었다.
그랬음에도 그의 임기 말년은 참으로 눈물겹고 허망했기에 국민으로부터 연민의 정마저 느껴지게 했다. 자식을 감옥에 넣고 IMF라는 경제 위기로 이끈 장본인으로 차기 대통령 당선자인 DJ에게 두 달 여나 그 권한 행사마저 빼앗긴 꼴이 되고 말았다.
준혁은 반세기만에 야당이 처음으로 평화적 정권 교체를 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자부했다. 그래서 민중이 세운 정부로 자처하여 국민의 정부라는 이름에 스스로 도취돼 있었다.
준혁에게는 한 국민으로서 높은 사람으로부터 논공행상을 받는 일 외는 아무 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DJ의 부름만을 기다렸다. 한 달, 두 달 아무리 기다려도 그에게 내려지는 그 어떤 소식도 없었다. 그렇게나 따뜻하고 인간적이며 격려와 위무와 사랑을 베풀고 나라와 민족과 고생하며 투쟁하던 후배들의 앞날을 걱정하고 염려하던, 그 분은 대통령이 되어 한을 풀었지만 준혁은 그제야 그들의 들러리만 서다가 젊음을 소모시키고 말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허탈에 빠지고 말았다.
이제 와서 DJ와의 독대는 불가능이었다. 그저 들리는 소식이라고는 벌써 DJ 측근들의 비리 아니면, 부정부패로 연일 신문의 기사로 오르내릴 뿐이었다.
그래도……? 준혁은 그런 마음으로 입에 풀칠하기 어려운 지경에서도 DJ의 부름을 기다렸다. 그 길 외는 살길이 없었다. 희망도 없었다.
데모 때나 대선 때마다 미적미적하던 별볼일 없던 운동권 후배들이나 동료들이 잘도 출세를 해 새집도 마련하고 권세도 부리며 뚱땅거리면서 잘도 산다는 소문이 자자했지만 준혁에게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는 그만 지치고 말았다. 그렇다고 운동권 생활 외 아무런 이력도 없는, 그래서 고등 룸펜이 된 준혁은 정말 살길이 막막했다. 그런 처지의 준혁에게 어느 날 편지 한 통이 배달되었다. 당숙의 편지였다.
죽기 전에 한 번 만났으면 한다는 간곡한 당부의 편지였다.
불현듯 생각해 보니 당숙의 곁을 떠나온 지도 또 십 년이 후딱 지나쳐 있었다. 아, 내가 너무 무심했구나!
준혁은 아직 결혼식도 올리지 못한 아내와 더불어 그날로 찔레꽃 농원에 사는 당숙을 찾아갔다.
고속버스를 타고 음성읍에 내려 다시 택시를 잡아타고 호방터로 가자 했더니 운전기사는 멀뚱히 준혁을 쳐다보기만 했다. ‘찔레꽃 농원’을 아느냐고 물으니 진작 그렇게 말씀하시지 하고 반문이다. 호방터는 몰라도 찔레꽃 농원을 누가 모르겠느냔다. 그만큼 당숙의 농원은 널리 알려진 모양이다. 준혁이 농원 입구에 내리자 첫눈에 띈 것 역시 흐드러지게 핀 찔레꽃이었다. 반원형 아치의 양 옆으로 하얗게 핀 찔레꽃은 그렇게 화려하지도, 천박하지도 않으면서 끈질긴 생명력을 지녔다며 당숙이 좋아하던 꽃이었다.
준혁은 아내 미령과 함께 사립문을 들어서 넓은 잔디가 깔린 뜰을 지나 당숙의 집 앞에 이르렀다. 현관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동경이 한 마리가 컹컹 한두 번 짓더니 그만이다. 꼬리 없는 동경이는 찾아온 손님임을 금시 알아차린 모양이다.
옛날 같았으면 당숙 내외가 이 농원 어느 곳에선가 불쑥 나타나 반겨 주셨을 터인데도 아무런 기척이 없다. 온통 녹음으로 뒤덮인 분지. 그 찔레꽃 농원 전체가 오늘 따라 적막하기 그지없게 느껴진다. 마치 한가한 간이역에 들어선 느낌이다. 만춘의 햇살만은 옛날과 다름없이 무더기로 비껴 내리는데 오늘 따라 당숙의 집 안은 고여있는 웅덩이의 물처럼 모든 것들이 멈추어져 있는 듯하다.
“당숙님! 준혁이가 왔습니다.”
그렇게 큰소리를 내며 응접실에 들어섰을 때에야 당숙은 등의자에서 조용히 일어서며 준혁 내외를 반겼다.
“와 주었구나. 반갑다.” 그러면서 미령을 가만히 바라본다.
“저의 처입니다.”
“저, 미령이에요. 당숙님.”
“그렇구나. 아직 결혼식도 올리지 못했다지?”
“네, 형편이 여의치 않아서요.”
준혁이 얼른 대답했다.
“다 알고 있다. 종형도 웬 고집이 그렇게 센지…….”
준혁의 부친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백발이 성성한 당숙은 많이도 수척해 보였다. 올해로 연세가 팔십오 세이시니 미순(米旬)도 몇 해 안 남았다.
“아직도 손수 일을 하세요?”
“못해. 날일로 품삯 주어가며 일꾼들 데려다 시킬 뿐이야. 그래서 네 형편 알고 있는지라 의논하고자 편지 한 거지.”
‘인생칠십 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란 말은 옛말이다. 미순을 목전에 두고도 만여 평의 농장을 경영하는 당숙의 모습을 두고 노익장(老益壯)이라 해야 할지……. 준혁은 당숙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얼굴에 검버섯이 생기고 피부가 곱긴 하나 주름이 많고 어딘가 노쇠한 모습은 지난 세월도 어지간히 길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때 당숙모가 부추며 상추, 쑥갓을 바구니 가득 담고 들어오며 반색을 했다. “족하님이 오셨군. 질부도?”
“네, 같이요.”
얼마 안 있어 당숙모와 미령이 같이 마련한 점심이라 푸짐한 푸성귀로 즐거운 식사를 했다. 점심을 끝낸 후 넷은 다 함께 농원을 둘러보았다.
당숙이 교직을 물러나 이곳에 터잡은 지 올해로 꼭 이십삼 년이 되는 셈이다. 그 긴 세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농원을 가꾸었으니 그 어느 구석인들 당숙 내외의 손 안 간 곳이 있으랴.
크고 작은 나무는 그 모양도 형형색색이다. 이 농원에 심겨진 화초며, 수목의 종류만도 천여 종이 넘는다니 참으로 놀랄 일이었다. 미령은 더욱 감탄해 마지않았다. 일일이 손수 가꾸었다는 데도 놀랐지만, 최초의 시작을 육순이 넘은 나이에 씨를 뿌려 오늘에 이른 점은 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또한 산책길 요소마다 돌에 새긴 명시, 명문장 비석이 무려 이백 개도 넘게 세워져 있었다. 그래서 주말이면 농원이 미어지게 학습과 견학을 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다고 했다.
농장을 한 바퀴 돌아보고 나오자 때마침 오월 훈풍이 녹색 장원의 나무숲을 지나간다.
숲을 휩쓸고 지나가는 바람과 이름 모를 산새의 간헐적인 지저귐이 산사처럼 조용했지만, 실구름에 가려 있던 하오의 태양이 불거지자 주변은 금시 호기심 많은 아이의 눈망울만큼이나 환해졌으므로 우리 모두의 마음도 밝고 명랑해졌다.
그날 밤, 준혁 부부와 당숙 내외는 응접실 소파에 마주 앉아 있었다.
통유리창 너머로 아스라이 보이는 매실봉 머리로는 보름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당숙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랫동안 심사숙고한 결론이다. 너의 지금 형편이 어떻다는 것도 다 알고서 하는 말이다. 서울 생활을 접고 이곳으로 올 수 없겠니? 만약 그리 한다면 이 농원도, 집도 너에게 모두 양도해 줄 계획이다.”
준혁과 미령은 당숙의 뜻밖의 제안에 어리둥절해 한동안 말이 안 나왔다. 잠시 후에야 겨우 입을 떼었다.
“재종형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준성이, 그 녀석은 양인(洋人)이 된지 오래야. 물론 녀석에게 준다 해도 관리할 수 없음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러니 네가 맡아 잘 관리하고 경작해 보거라. 오래 되기는 했지만 한 이태 동안 쌓은 경험도 있지 않니?”
“하지만…….”
“너무 망설일 것 없다. 내 이미 너에게 증여코자 제반 서류를 갖추어 놓았느니라. 나나 너의 당숙모 또한 너무 오래 살았다 싶구나. 다만 너희 내외에게 부탁이 있다면 저쪽 찔레꽃 흐드러지게 핀 언덕 양지 바른 곳에 내 이미 안식처를 마련해 두었으니 우리 내외 이 세상 하직하거든 그 곳에 묻어다오. 그것뿐이다.”
당숙의 반쯤 감은 눈에서 맑은 눈물이 자르르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흐흐흑― 당숙님! 왜 그리도 약하신 마음 가지십니까? 건강하게 더 오래 사셔야지요.”
그렇게 말하는 준혁도 당숙 앞에 엎드려 그만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가슴 저린 통곡을 토해 내는 준혁의 귓속으로 아슴하게 당숙의 말씀이 파고들었다.
“사람 한 평생이 뭐겠니? 바람처럼, 구름처럼 그렇게 스쳐 가는 것이 아니더냐. 애시당초 목숨 가진 것으로 태어난 것이 잘못이 아니었을까? 태어난 곳이 있었으면 마땅히 돌아갈 곳이 있어야지. 그 많은 친구들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해서 다들 저승으로 떠났는데, 나는 지각을 하고 있어.”
당숙의 얼굴에선 어느 사이 타고 내리던 눈물 대신 잔잔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당숙모도 휴지 한 장을 뽑아 콧물을 풀고 일어서더니 주방에서 손수 담갔더라며 매실 물을 가져와 컵 가득 부으며 말했다.
“너무 밤이 오래 되었어요, 그만 들어가 잡시다. 조카 내외도 피로할 텐데.”
그 날 밤 준혁은 잠을 설치면서 몸을 뒤척이고 있을 때 하얗게 부서져 내리는 달빛을 타고 찔레꽃 농원 수목 사이에서 이름 모를 밤새가 후꾸 후꾸욱 하는 소리에 가슴이 젖어 들었다.
준혁은 그 많은 시간을 거슬렸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와 채마밭에 괭이질을 한다. 돌아서면 자라는 바랭이를 뽑노라니 문득 당숙 생각이 다시 떠올라 하던 일 제쳐 두고 찔레꽃이 흐드러지게 핀 당숙 내외의 무덤으로 갔다.
당숙의 무덤에는 아직도 잔디가 어우러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작년 봄이다. 준혁 내외가 서울의 모든 것을 청산하고 이곳 호방터로 이사를 와 찔레꽃 농원을 경영하며 당숙 내외를 모신지 겨우 한 해만에 당숙 내외는 한날한시에 기거하던 침대에서 나란히 돌아 가셨다.
그의 침대 옆에는 한 통의 유서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 세상 너무 오래 머물러 치매라도 걸릴까 두려워 우리 함께 먼저 간다. 양지 바른 찔레꽃 피는 언덕바지에 우리 내외 나란히 묻어 다오.>
준혁 내외는 무덤 앞에 엎드려 큰절을 올리고 무덤을 지켜보았다.
당숙 내외가 마치 나뭇가지에 잠시 앉았다가 날아간 새처럼 이 세상을, 아니 이 찔레꽃 농원을 잠시 머물다 떠났으려니 생각하니 준혁의 가슴에 까닭 모를 애수가 서려 가슴이 저려왔다.
여전히 당숙이 잘 가꾸어 놓은 찔레꽃 농원에는 오늘도 새가 울고, 바람이 스치고, 화초며 수목은 예나 변함없이 자라고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