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26일(월) 광주일보
세상을 살아가며 스쳐갔던 사람들의 얼굴을 일일이 다 떠올리지 못한다. 누구든 과거에 대한 추억을 갖고 살아가지만 그것들을 다시 기억해 내기 위해선 어떤 도구나 계기가 필요하다. 이를테면 과거의 사진첩을 꺼내어 들춰보다 생각나는 사람들. 오래된 책갈피에서 우연히 떨어진 메모 조각들. 갑자기 들려온 누군가의 부음 소식에 떠오르는 얼굴들. 잊고 살다가도 과거가 문득 떠오르는 순간이 있다.
김현석 감독의 <시라노 연애조작단>은 이를테면 과거의 추억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의 이야기로 읽힌다. 프랑스 작가 에드몽 로스탕의 <시라노 드 베르쥬락>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 이 영화는 전체적인 틀로 보면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정말 특별한 점은 과거의 사랑을 포기하지 못하는 남자의 솔직한 심정 묘사와 추억과 현재를 넘나드는 방식의 독특함에 있다.
영화에서 가장 아름답고 멋진 장면. 병훈(엄태웅)은 의뢰인 상용(최다니엘)의 연애 조작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옛 연인 희중(이민정)을 카페로 불러낸다. 하지만 과거의 연인이었던 희중이 자신을 기억하고 있을지 고민하는 병훈. 그는 그녀와 함께 프랑스 유학중 함께 들었던 노래를 흘려보낸다.
병훈이 먼지 낀 시디케이스를 선반에 던져놓자 공기 중으로 날려가는 먼지들. 그 먼지들은 노래의 전주를 타고 카페의 공간을 오가며 과거와 현재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노래에 얽힌 병훈과 희중의 기억을 들춰냄은 물론, 현재 두 사람의 복잡한 표정 위를 스치듯 지나간다.
희중은 병훈에게 다가가 묻는다. “방금 그 노래 제목 좀 알 수 있을까요?” 병훈은 모자로 얼굴을 감춘 채 대답한다. “아그네스 발차. 우리에게 더 좋은 날이 되었네.”
이 노래는 그리스 출신의 세계적인 메조 소프라노 아그네스 발차가 부른 <내 조국이 가르쳐 준 노래> 음반 여덟 번째 트랙에 실린 <Aspri Mera Ke Ya Mas>다. 그리스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민요 등을 수록한 음반으로 음악 매니아라면 누구든 한 장쯤 소장하고 있을 명반이다. 특히 이 음반에는 먼저 유명해진 노래 <기차는 8시에 떠나네>도 수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두자.
1968년 프랑크푸르트 오페라에서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케루비노 역으로 데뷔한 아그네스 발차는 강렬하고도 정열적인 연기와 노래로 유럽에서 주목받았다. 특히 카라얀과 함께 잘츠부르크 페스티발에서 가장 많은 공연을 한 가수였으며,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장미의 기사>에서 최연소 나이로 옥타비안 역을 노래한 가수다.
<내 조국이 가르쳐 준 노래> 음반에서 아그네스 발차의 음성은 그녀의 오페라 음반에서는 결코 들을 수 없는 회한과 조국에 대한 그리운 감정이 가득 묻어있다. 더 이상 오페라 가수로서가 아니라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모국에 대한 애정이 가득한 단 한명의 그리스 인으로서 노래하는 것이다.
누군가와 추억의 공간에서 함께 들은 음악이 있다는 것은 어찌보면 행복한 일이다. 과거에 대한 추억의 공유가 이처럼 아름답고 편안한 한 곡의 노래와 함께 시작된다는 것은 정말이지 아름다운 일이다.
그냥 만난 사람은 잊혀져도 노래와 함께 만난 사람은 잊혀지지 않는다. 아니, 절대로 잊혀질 수가 없다.